• 최종편집 2024-04-19(금)
 

행복한 삶을 꿈꾸고 아름다운 생의 마무리를 생각하지 않는 사람은 없다. 성공한 사람이나 부와 영예를 안은 사람이라 해서 생의 마무리가 같은 등식으로 보장되지 않는 게 우리 인생이다. ‘누구처럼 살겠다.’ 많은 사람이 모범 답안을 만들어 복기를 하고 계획을 세우지만, 결국은 백이면 백이 다 다른 무늬의 삶을 살고, 각기 다른 죽음을 향해 파동을 일으키며 달려간다.

 

삶의 아름다운 마무리를 생각하고 이를 실천한 사람 중에 스콧 니어링과 헬렌 니어링을 떠올려 보았다. 부와 명예를 등지고 평생 자연과 더불어 살았던 이들 부부는 노년에 이르러 매일 밤 이런 글귀를 함께 읽었다.

삶은 죽음을 향한 순례다. 탄생의 순간부터 죽음은 당신을 향한 출발을 시작했다. 삶은 죽음을 향한 순례이므로 죽음은 삶보다 더 신비로운 것이다.?

 

유명한 와튼학파의 경제학 교수였던 스콧 니어링은 반전운동으로 인해 교수직을 파직하고 미국 버몬트 시골에 들어가 농촌생활을 통한 새 인생을 시작했다. 이들 부부는 문명의 발전으로부터 두어 발짝 떨어져 살아가는 삶의 방식을 터득했다. 직접 육체노동을 통해 농사를 짓고 자급자족하는 방법으로 자신들만의 삶을 살은 것이다.

 

그러면서 현재의 삶을 자족했으며, 죽음을 맞을 때는 스스로 음식을 줄여가며 죽음마저도 초연히 살아낼 수 있는가를 수행자처럼 깊이 관찰하며 살았다. 이들 부부는 56년을 부부로 생활하면서 때로는 동료로, 연인으로, 친구로 사랑했고, 그러면서 삶까지 서로를 닮아갔다. 100세가 되자 남편 스콧이 스스로 곡기를 끊었다.

 

그는 마음속의 모든 번뇌, 망상을 잠재우며 깨달음을 터득해서 어디에도 얽매이지 않는 자유인으로 살아가는 모습을 수행했다. 그러므로 모든 의혹과 번민을 떨쳐내고 편안한 마음으로 하늘에 모든 걸 맡긴다는 안심입명(安心立命)의 경지에서 죽음을 맞았다. 그는 경제적 은둔생활에 들어가서 100세까지 나물 먹고 물 마시는 생활이 아닌 나물과 물로서 어떻게 자본주의에 대항할 것인가를 몸소 보여주었고, 그러면서 죽음의 순례를 이어갔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최소한의 소비로 최대한의 자유를 누리는 삶을 실천한 것이다. 아내는 남편이 죽은 후에도 10년간 농장을 지키며 홀로 죽음을 향한 순례의 발걸음을 또박또박 걸어갔다. 단풍나무 시럽을 조금씩 삼키고 주스와 물, 약간의 곡기를 씹으며 충만한 마음으로 남편 스콧처럼 죽음을 마중하려고 했다.

 

죽음을 부재로 받아들이는 방법은 저마다 다를 것이다. 니어링 부부처럼 부재를 충만한 또 하나의 존재로 받아들임은 순례자로서 그들 부부가 선택한 방법인 셈이다. 한 생애를 살다 갔다는 것은 어떤 식으로든 세상에 존재를 새겼다는 것을 의미한다. 거창하지 않아도 누군가의 마음속에 새겨진 자취는 ‘0’이라는 숫자처럼 부재의 존재감을 남기니까.

 

‘0’이란 부재는 진짜 없는 게 아니라, 존재가 지나간 흔적이 아닌가. 인간은 무수한 흔적을 새기다가 끝내는 ‘0’으로 돌아가는 존재이다. 죽음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를 이해한다면, 이 세상을 어떻게 살아야 할지 답이 보인다. 무수한 흔적을 새기다가 ‘0’으로 돌아가는 또 하나의 존재로 인식할 수 있다면, 시작과 끝이 존재에서 존재로 이어지는 것임을 알게 될 것이다.

 

헬렌 니어링이 자전으로 쓴<아름다운 삶, 사랑, 그리고 마무리>를 읽었다. 그녀는 자신의 체험을 바탕으로 인생의 삶과 존재, 죽음이란 또 다른 존재를 이야기했다. 삶의 방식이 똑같을 수 없듯이 이러한 존재 인식은 한 시대를 같이 한 사람으로서 부정도 긍정도 아닌 묘한 갈림길에 생각을 머물게 한다.

-소설가 daumcafm 이관순의손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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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삶과 죽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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