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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제하는 삶을 위하여
괴테는 '진정한 행복은 절제에서 온다' 했고, 동양선비들도 인간의 덕목중 절제만 한 것이 없다고 했습니다. 절제는 한 마디로 자신의 욕구와 행위를 제어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가슴은 알아도 실천에서 어려움을 겪지요. 누구나 경험했을 일입니다. “새해는 꼭 해야지.” 다이어트, 금주, 금연 등 야심찬 결단을 하지만 얼마 안가 흐지부지 되죠. 습관 된 행동을 멈추고 나쁜 버릇을 고치는 일은 왜 늘 힘들까... 모순 속에 길을 찾는 게 우리네 삶입니다. 습관도 그중 하나죠. “좋은 습관을 들이려면 적어도 만 번 이상의 훈련이 필요한데, 나쁜 습관은 한두 번으로도 족하다”고 해요. 손대면 헤어나기 어려운 도박과 같은 거죠. 지나친 걱정도 고약한 습관입니다. 걱정은 몸 안에서 번지는 불이죠. 밖에서 난 불은 소화기로 끄면 되지만 안에서 쥐고 흔드니 대처가 어려워요. 근심은 할수록 빠지는 늪입니다. 가려울 때 긁는 것처럼 당장은 잦아들지만 곧 더 가려워 집니다. 오죽하면 티베트에 “걱정을 해서 걱정이 사라진다면 걱정이 없다”는 속담이 생겼을까요. 인간이 절제를 못하는 데는 진화론, 생물학, 유전학, 심리학 등 많은 요인이 혼재돼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인간의 어쩔 수 없는 본능이란 말도 있어요. 배고프지 않아도 계속 먹으려는 것은 생존을 위한 과식본능이, 불필요한 물건을 계속 사는 것은 쾌락을 추구하는 구매심리가, 알면서 계속 말실수를 함은 말로 관심을 끌려는 인간의 습성에 있답니다. 그렇다고 인간사회가 절제를 향한 노력을 게을리 한 것은 아니었지요. 바우하우스의 디자인은 장식에서 벗어난 절제의 아름다움을 표현했고요. 샤넬의 패션은 여성에게서 허위의 코르셋을 벗어던지게 한 사고를 쳤지요. 절제는 언어는 물론 모든 생활에서 새로운 품격을 담아냅니다. 절제를 막는 것은 당장의 만족과 즐거움이 ‘참고자 하는 의지’보다 강하게 유혹할 때 나타납니다. 하지만, 스스로 욕망 조절을 못하면 진정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없습니다. 절제는 유익한 것, 해로운 것을 구분해 우리 스스로 삶의 주인공이 되도록 이끌어 주니까요. 사실 마음에서 분출되는 대부분은 절제의 대상입니다. 욕심과 허영, 미움, 시기, 질투까지도. 같은 물을 먹고도 소는 우유를 내고 뱀은 독을 내는 이치와 같아요. 사람이 입으로 먹을 때는 독이 없는데, 그것을 먹고 나오는 말에는 독이 있습니다. 진실로 사람관계가 어질기를 원한다면, 절제의 힘에 도움을 청하세요. 절제는 좋은 습관을 부릅니다. 나이가 들수록 ‘절제하는 삶’을 강조하는 데는 인류가 경험에서 길어 올린 지혜가 있어서죠. *글 이관순(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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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제하는 삶을 위하여
괴테는 '진정한 행복은 절제에서 온다' 했고, 동양선비들도 인간의 덕목중 절제만 한 것이 없다고 했습니다. 절제는 한 마디로 자신의 욕구와 행위를 제어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가슴은 알아도 실천에서 어려움을 겪지요. 누구나 경험했을 일입니다. “새해는 꼭 해야지.” 다이어트, 금주, 금연 등 야심찬 결단을 하지만 얼마 안가 흐지부지 되죠. 습관 된 행동을 멈추고 나쁜 버릇을 고치는 일은 왜 늘 힘들까... 모순 속에 길을 찾는 게 우리네 삶입니다. 습관도 그중 하나죠. “좋은 습관을 들이려면 적어도 만 번 이상의 훈련이 필요한데, 나쁜 습관은 한두 번으로도 족하다”고 해요. 손대면 헤어나기 어려운 도박과 같은 거죠. 지나친 걱정도 고약한 습관입니다. 걱정은 몸 안에서 번지는 불이죠. 밖에서 난 불은 소화기로 끄면 되지만 안에서 쥐고 흔드니 대처가 어려워요. 근심은 할수록 빠지는 늪입니다. 가려울 때 긁는 것처럼 당장은 잦아들지만 곧 더 가려워 집니다. 오죽하면 티베트에 “걱정을 해서 걱정이 사라진다면 걱정이 없다”는 속담이 생겼을까요. 인간이 절제를 못하는 데는 진화론, 생물학, 유전학, 심리학 등 많은 요인이 혼재돼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인간의 어쩔 수 없는 본능이란 말도 있어요. 배고프지 않아도 계속 먹으려는 것은 생존을 위한 과식본능이, 불필요한 물건을 계속 사는 것은 쾌락을 추구하는 구매심리가, 알면서 계속 말실수를 함은 말로 관심을 끌려는 인간의 습성에 있답니다. 그렇다고 인간사회가 절제를 향한 노력을 게을리 한 것은 아니었지요. 바우하우스의 디자인은 장식에서 벗어난 절제의 아름다움을 표현했고요. 샤넬의 패션은 여성에게서 허위의 코르셋을 벗어던지게 한 사고를 쳤지요. 절제는 언어는 물론 모든 생활에서 새로운 품격을 담아냅니다. 절제를 막는 것은 당장의 만족과 즐거움이 ‘참고자 하는 의지’보다 강하게 유혹할 때 나타납니다. 하지만, 스스로 욕망 조절을 못하면 진정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없습니다. 절제는 유익한 것, 해로운 것을 구분해 우리 스스로 삶의 주인공이 되도록 이끌어 주니까요. 사실 마음에서 분출되는 대부분은 절제의 대상입니다. 욕심과 허영, 미움, 시기, 질투까지도. 같은 물을 먹고도 소는 우유를 내고 뱀은 독을 내는 이치와 같아요. 사람이 입으로 먹을 때는 독이 없는데, 그것을 먹고 나오는 말에는 독이 있습니다. 진실로 사람관계가 어질기를 원한다면, 절제의 힘에 도움을 청하세요. 절제는 좋은 습관을 부릅니다. 나이가 들수록 ‘절제하는 삶’을 강조하는 데는 인류가 경험에서 길어 올린 지혜가 있어서죠. *글 이관순(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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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이란 죽음을 향한 순례
조선의 성리학자 이기가 말했다 해요. “노인이 젊은이와 반대인 것이 3가지가 있다. 밤에 잠을 안자며 낮잠을 좋아하고, 가까운 곳을 못 보면서 먼 것은 보며, 손주는 몹시 아끼면서 자식과는 소원한 것, 이것이 노인의 3가지 상반된 점.” 이라고. 늙어가며 슬픈 건 소중한 것을 지키기가 힘들어지는데 있습니다. 가족, 명예, 친구 등 모두가 소중한 것들이죠. 지켜보려고 애쓰지만, 하나 둘 낙엽 지듯이 내 곁을 떠납니다. 그러다 꾀 벗은 나무가 된 자신을 보면서 연민하겠지요. 그러나 중요한 것은 집으로 잘 돌아가는 일입니다. 흙에서 왔으니 흙으로 잘 돌아가는 것이지요. 웨스트민스터 사원엔 위대한 학자나 시인, 화가, 존경받는 정치인이 묻혀 있다고 합니다. 기라성 같은 유명인사들 주검 틈에 토마스파라는 농장지기가 있습니다. 80세까지 총각이었다가 122세에 재혼해 장수했다는 그의 주장이 입소문을 타 유명인사가 된데 따른 것이지요. 그는 찰스1세 국왕도 알현하는 영광도 지닙니다. 하지만 런던의 한 초청 만찬장에서 음식을 먹다가 탈이 나 죽었다고 합니다. 검증 없이 말만 듣고 가장 장수한 복 받은 사람으로 평가해 묘지를 내준 사원의 결정은 ‘장수’에 대한 인간 의 관심이 얼마나 큰지를 잘 보여줍니다. 86세로 선종한 김수환 추기경이 칠순을 맞아 신부들과 식사하면서 “막상 일흔이 돼보니 죽음이란 게 두려운 것 같다”고 말했습니다. 추기경의 두려움은 70년이란 긴 시간을 갖고도 아직 고치지 못한 허물이 많은 게 아쉽고, 남은 시간에 얼마나 허물을 고치며 살까 생각하니 초조하다는 뜻입니다. 해를 보내면서 ‘늙음’과 ‘죽음’이란 단어가 자주 입에 오른 듯합니다. 그런 상념에 젖다보면 오래 사는 장수의 미련보다 남은 생을 통해 얼마나 내 허물을 고치며 살 수 있을까 고뇌한 추기경 얼굴이 흔들립니다. 오래 전 읽었던 오연석 교수(전 경기대. 죽음학교 교장)의 글도 생각납니다. 죽음을 준비하는 지혜 같아서 머리에 넣어두었지요. 그는 1년에 몇 달씩 캐나다에 머물었는데 옆집에 사는 노인과 이웃사촌으로 친하게 지냈답니다. 정원을 가꾸는 솜씨가 좋아 모르는 것도 척척 알려주었다는 군요. 그런데 부인이 죽은 후로 더는 그 물음을 못하게 됐답니다. 그때마다 머리를 긁적이며 “꽃 이름은 아내가 잘 아는데”하며 부인을 그리워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던 어느 해, 그가 병원에 입원했다는 소식을 들었고, 다시 호스피스병원으로 옮긴 것을 알게 되었답니다. 언제 또 볼까 싶어 문병 차 찾아갔는데, 내 손을 잡더니 오래 살지 못한다며 놀랍도록 편안한 미소를 짓더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동안 이웃이 되어줘 행복했다면서 자신의 장례식에 초청하고 싶다고 하는군요. 오 교수가 돌아오면서 생각합니다. 내게 이 정도였으면 가족과는 얼마나 많은 대화를 나눴을까. 우리 주변에 그분처럼 죽음을 준비하고 사랑하는 사람들과 “고맙다, 행복했다, 함께 해 좋았다”고 말하며 떠날 사람이 얼마나 될까 묻게 되더랍니다. 나도 할 수만 있다면 그런 바람 하나 갖고 싶습니다. 순례의 끝머리에서 보고 싶은 사람 웃으며 만나고. 사랑하는 가족들과 손을 잡고 “너와 함께 한 세상이 행복했다... 굿바이.” 하며 순례를 마칠 수 있다면. (소설가 이관순의 손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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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델라의 외침‘밤베렐라’
언어에는 정령이 있어 ‘말이 씨를 뿌린다’고 합니다. 하늘아래 언어 중 가장 용맹스러운 단어는 ‘용서’일 것입니다. 그만큼 행함이 어려워서죠. 남을 미워하지 않고 미움을 받지 않고 세상을 살 수 있다면 좋으련만, 현실은 그리 녹녹하지 못합니다. 세상을 살면서 생기는 미움은 자연스러운 감정입니다. 우리의 일상에는 사랑한 만큼 미움도 증오도 생겨요. 받은 복이 많으면 원수도 생깁니다. 때로는 커피 한 잔 나눈 적 없는 사람이 나를 험담하고, 별일이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나를 원수처럼 생각하는 사람도 나옵니다. 남의 인생 한 복판에 뛰어들어 돌이키지 못할 불행을 만들기도 하지요. 그래서 용서를 몇 번 하면 되느냐는 질문에 “일곱 번씩 일흔 번을 하라“고 성경은 가르칩니다. 그만큼 용서하며 사는 일이 어려운 일이지만, 가치와 상급이 크다는 뜻이겠지요. 가능한 한 남을 미워하지 않고 다른 사람과 척지지 않고 살려 해도, 얽히고설킨 인간관계에서 감정이 충돌하면 미움이 생기고 커집니다. 더구나 왼뺨을 때리면 오른 뺨도 내밀라는 가르침엔 속수무책일 때가 많죠. 무식하면 용감하다고, 맹수 같은 용맹함 없이는 쉽게 행하지 못하는 게 용서하는 일입니다. 내가 용서를 했는데 상대가 거부하거나, 상대가 용서를 구하는데 내가 받아들이지 못하는 경우도 있어요. 어렸을 때 옆집 장독을 깨뜨려 난리가 났습니다. 엄마가 오시기 전에 해결해 보려고 두 손을 싹싹 빌었는데 “아를 어째 키웠냐” 며 놀라 달려온 엄마에게 심한 말을 퍼부었습니다. 집에 돌아온 내가 식식댑니다. “엄마는 그딴 소릴 듣고 왜 가만있어? 엄마한테 욕한 거 절대 용서 못해!” 그때 엄마가 성난 아들에게 타이른 말이 있습니다. “잘잘못은 하나님이 아신다. 은혜는 가슴에 새기고 미움은 냇물에 새겨라.” 밤베렐라 (bambeleiia)! 남아공 넬슨 만델라 대통령이 26년간 감옥생활을 하면서 매일 자신을 향해 외쳤던 말입니다. ‘never give up! 포기하지 마라. 주님이 희망이시다’ 만델라 대통령이 그 긴 세월을 감옥에 살면서 끝까지 희망을 지키려고 자신을 일깨운 말. 그만이 지닌 마법의 주문이 ‘밤베렐라’입니다. 만델라는 남아공에서 평등선거로 뽑힌 첫 대통령이지요. 아프리카민족회의 지도자로 반아파르트헤이트 운동을 전개하다가 투옥돼 그 긴 26년 수감생활을 견디고 나와 민족의 영웅이 되고, 세계인권운동의 상징이 되었습니다. 그의 위대함은 대통령이 되어 자신과 민족을 탄압한 자들을 용서한 점입니다. 진실화해위원회를 설치해 과거사를 용서로 청산하고, 흑백갈등이 없는 국가를 세우고자 평생을 헌신했지요. 그가 노벨평화상 수상자가 되던 날, 전 세계가 반겼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용서와 함께 짝을 이룬 단어가 ‘희망’입니다. 아름다운 사람은 끊임없이 희망을 전하는 사람입니다. 그중 온몸으로 희망을 말한 고 장영희 교수가 있지요. 그는 죽기까지 ‘희망이란 새 한 마리’ 어깨 위에 올리고 희망을 속삭였어요. 타고난 장애에 세 번의 암 투병 속에도 조선일보에 연재한 ‘영미시 산책’엔 늘 희망의 새가 날았습니다. ‘산을 넘고 보니 이 산이 아니네’ 할 때도 “진정한 용기는 다시 도전하는 것“이라며 마법의 주문을 걸곤 했습니다. ‘밤베렐라’. 당신은 용기가 필요하고 지칠 때 자신에게 힘을 주는 마법의 주문이 있나요? 내 인생에 힘이 된 한마디는 무엇인가요? 순례의 완성은 온 곳으로 잘 돌아가는 것이다 (소설가 이관순의 손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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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무늬를 찾아가는 인문학
한때 '인문학'이 유행이었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이에 대한 관심은 서점가, 강연장, 답사모임 같은 데를 찾아보아도 아직 식지 않은듯합니다. 강의를 나가보면 개념 자체를 잘 이해하지 못함을 느낄 수 있는데요 마치 철학을 어렵게 여기는 것과 비슷합니다. 국가 발전도 학문과 연결해 볼 수 있어요. 국가 초기단계에는 법학, 정치학이 중심이 되지만, 초기발전단계로 가면 경제, 사회, 신문방송 등으로 관심이 옮겨 가고, 좀 더 발전하면 철학, 심리학 등으로 축이 이동하게 됩니다. 그리고 성숙단계에는 고고학, 인류학 등이 발달하면서 제국을 꿈꾸지요. 중국, 일본, 프랑스, 이탈리아가 그랬으니까요. 인간은 어떤 흐름 속에 존재하고 그 흐름 속에 무늬를 그리며 삽니다. 자연과 나와의 관계에도 인문의 무늬를 그려요. 인문학은 인간이 자연과 세계와 어떤 관계를 가지고 어떤 무늬를 그리며 사는지를 연구합니다. 인문학하면 르네상스 휴머니즘을 떠올립니다. 신이 지배하던 사회에서 스스로 독립하려는 사상입니다. 신이 아닌 인간과의 관계를 통해 인간의 우월성을추구 하겠다는 것이지요. 모든 학(學)은 모방에서 시작합니다. 모방을 통해 계속 습득함이 학습인데, 학습이 학이 되는 순간 인문적 상상 · 통찰 · 창의력은 결핍되죠. 그래서 학이 아닌 활동으로 가야하고, 인문적 통찰로 나가야합니다. 인문적 통찰은 딱 보면 알아채는 힘이죠. 그 힘을 키우려면, 우리가 아닌 나로 가야하고, 대답하는 인재보다 질문하는 인재로 이끌어야 합니다. TIME 표지에 ‘아시아인은 생각할 줄 모른다’가 나온 적이 있습니다. 답은 정해져 있다 생각하고 이를 찾기에 골몰하는 삶을 지적한 거지요. 머리에 잔뜩 뭔가를 채우고 그대로 따라가려고 합니다. 머릿속의 상을 좇거나 보이는 것에 집착하면 생각이란 동력이 약화됩니다. 베케트의 ‘고도를 기다리며’는 연극사의 이정표와도 같은 작품입니다. 적막한 무대에 ‘고도’를 기다리는 정체모를 두 인물이 나오지요. 이렇다 할 줄거리도 없이 “결국 고도씨는 오늘밤에 못 오지만 내일 올 예정” 이란 황당한 결말로 관객들에게 충격을 주죠. 이 둘이 기다린 고도는 무엇일까. 종교적 구원자 언제 끝날지 모르는 종전 소식? 사람마다 다 다를 수 있습니다. 많은 사람이 작품의 난해함을 말하면서 최고의 작품으로 꼽는 건 인생의 비애 속에서도 잃지 않은 유머 때문입니다. 한 열광적인 독자가 그에게 말합니다. “전 일생 동안 선생의 열렬한 팬이었고 40년 전부터 선생님 책을 읽어왔지요” 베케트의 대답이 재미있습니다. “그 참 피곤하시겠소.” 인문학자들이 한국사회를 위기로 보는 건 선진사회로 가는 경계에 머물러서입니다. 선진 학습으로 양적 성장에 성공했으나, 새로운 방향으로 경제, 정치,교육의 돌파구를 마련 못해 지금의 불행을 겪는다고요. 한국사회의 발전은인문적 통찰로 질적 생존력을 높일 수 있느냐에 달렸다합니다. 이를 알고도 못나가는 상황이 안타까울 뿐이지요. 기업인만이 인문적 통찰에 힘씁니다. 그렇게 나가지 않으면 죽으니까요. 기업인이 인문학을 필요로 함은 고급스러워지려는 것이 아니라, 생존을 위해 틀과 방식을 혁신적으로 가져가기 위해서입니다. 인문적 창의성은 용기와도 관련 있어요. 변화의 경계에 선 모호함, 불안함을 견뎌야하니까요. 이를 잘 설명한 사람이 2500년 전 노자(老子)입니다. 우주만물에 대해 생각한 중국 최초의 철학자지요. 그가 찾은 우주의 진리를 도(道)라 하고, 우주만물이 이뤄지는 근본적 이치를 도(道)로 설명합니다. 노자는 인문적 개인이 자발적으로 모인 사회가 강하다고 했습니다 (소설가 이관순의 손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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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무늬를 찾아가는 인문학
한때 '인문학'이 유행이었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이에 대한 관심은 서점가, 강연장, 답사모임 같은 데를 찾아보아도 아직 식지 않은듯합니다. 강의를 나가보면 개념 자체를 잘 이해하지 못함을 느낄 수 있는데요 마치 철학을 어렵게 여기는 것과 비슷합니다. 국가 발전도 학문과 연결해 볼 수 있어요. 국가 초기단계에는 법학, 정치학이 중심이 되지만, 초기발전단계로 가면 경제, 사회, 신문방송 등으로 관심이 옮겨 가고, 좀 더 발전하면 철학, 심리학 등으로 축이 이동하게 됩니다. 그리고 성숙단계에는 고고학, 인류학 등이 발달하면서 제국을 꿈꾸지요. 중국, 일본, 프랑스, 이탈리아가 그랬으니까요. 인간은 어떤 흐름 속에 존재하고 그 흐름 속에 무늬를 그리며 삽니다. 자연과 나와의 관계에도 인문의 무늬를 그려요. 인문학은 인간이 자연과 세계와 어떤 관계를 가지고 어떤 무늬를 그리며 사는지를 연구합니다. 인문학하면 르네상스 휴머니즘을 떠올립니다. 신이 지배하던 사회에서 스스로 독립하려는 사상입니다. 신이 아닌 인간과의 관계를 통해 인간의 우월성을추구 하겠다는 것이지요. 모든 학(學)은 모방에서 시작합니다. 모방을 통해 계속 습득함이 학습인데, 학습이 학이 되는 순간 인문적 상상 · 통찰 · 창의력은 결핍되죠. 그래서 학이 아닌 활동으로 가야하고, 인문적 통찰로 나가야합니다. 인문적 통찰은 딱 보면 알아채는 힘이죠. 그 힘을 키우려면, 우리가 아닌 나로 가야하고, 대답하는 인재보다 질문하는 인재로 이끌어야 합니다. TIME 표지에 ‘아시아인은 생각할 줄 모른다’가 나온 적이 있습니다. 답은 정해져 있다 생각하고 이를 찾기에 골몰하는 삶을 지적한 거지요. 머리에 잔뜩 뭔가를 채우고 그대로 따라가려고 합니다. 머릿속의 상을 좇거나 보이는 것에 집착하면 생각이란 동력이 약화됩니다. 베케트의 ‘고도를 기다리며’는 연극사의 이정표와도 같은 작품입니다. 적막한 무대에 ‘고도’를 기다리는 정체모를 두 인물이 나오지요. 이렇다 할 줄거리도 없이 “결국 고도씨는 오늘밤에 못 오지만 내일 올 예정” 이란 황당한 결말로 관객들에게 충격을 주죠. 이 둘이 기다린 고도는 무엇일까. 종교적 구원자 언제 끝날지 모르는 종전 소식? 사람마다 다 다를 수 있습니다. 많은 사람이 작품의 난해함을 말하면서 최고의 작품으로 꼽는 건 인생의 비애 속에서도 잃지 않은 유머 때문입니다. 한 열광적인 독자가 그에게 말합니다. “전 일생 동안 선생의 열렬한 팬이었고 40년 전부터 선생님 책을 읽어왔지요” 베케트의 대답이 재미있습니다. “그 참 피곤하시겠소.” 인문학자들이 한국사회를 위기로 보는 건 선진사회로 가는 경계에 머물러서입니다. 선진 학습으로 양적 성장에 성공했으나, 새로운 방향으로 경제, 정치,교육의 돌파구를 마련 못해 지금의 불행을 겪는다고요. 한국사회의 발전은인문적 통찰로 질적 생존력을 높일 수 있느냐에 달렸다합니다. 이를 알고도 못나가는 상황이 안타까울 뿐이지요. 기업인만이 인문적 통찰에 힘씁니다. 그렇게 나가지 않으면 죽으니까요. 기업인이 인문학을 필요로 함은 고급스러워지려는 것이 아니라, 생존을 위해 틀과 방식을 혁신적으로 가져가기 위해서입니다. 인문적 창의성은 용기와도 관련 있어요. 변화의 경계에 선 모호함, 불안함을 견뎌야하니까요. 이를 잘 설명한 사람이 2500년 전 노자(老子)입니다. 우주만물에 대해 생각한 중국 최초의 철학자지요. 그가 찾은 우주의 진리를 도(道)라 하고, 우주만물이 이뤄지는 근본적 이치를 도(道)로 설명합니다. 노자는 인문적 개인이 자발적으로 모인 사회가 강하다고 했습니다 (소설가 이관순의 손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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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생에 가장 소중한 날
아버지 기일을 찾아 대전으로 내려가는 기차를 탔습니다. 창밖의 잿빛 세상을 보면서 저무는 해와 가당찮은 내 나이와, 헐렁해진 시간의 밀도 속을 헤집는 바람소릴 듣다가 뜬금없는 의문 하나를 건집니다. 그날 아버지가 만족하셨을까? 희수(77세)연이 열린 1992년 봄날, 아내를 앞서 보낸 아버지는 혼자 상을 받으셨지요. 자식들은 아버지께 기쁨이 되고자 많은 친구 분을 초대해 정성껏 모셨습니다. 모두 기꺼워하셨고 당신도 흡족하셨는지 직접 자손 소개도 하셨지요. 그런데 27년이 지난 지금 왜 그 생각이든 걸까? 물론 그때도 어머니가 그리웠었지만 아버지 심중에 이는 댓바람 소리는 듣지 못했으니까요. ‘부부해로’의 의미를 새롭게 깨닫습니다. 옆에서 배우자 잃는 모습들을 보면서 ‘짝’과 ‘외짝’이 얼마나 큰 행불복의 요소 인지를... ‘검은머리 파뿌리 되도록’ 이란 말의 참뜻이 심금에 와 닿습니다. 요즘 세태에서 ‘파뿌리’는 고전이 된 듯합니다. 그만큼 부부개념도 달라졌으니까요. 요즘은 생일이 대세입니다. “애가 무신 생일이노” 그런 소리 듣던 게 엊그젠데. 지금은 돌만 지나도 깨치는 게 ‘생일’인 듯합니다. 애들 생일이 더 요란하지요. ‘생파’라고 친구 초청하고, 선물 싸들고 오는 또래들을 보면 생일 문화만은 흥왕한 나라가 됐습니다. 올해도 새 달력을 걸기 전에 아무개 생일부터 기록합니다. 누구로부터 축하를 받는 것은 행복한 일입니다. 외로운 인생끼리 날을 정해 “오늘은 당신 날이야, 네가 세상의 주인공야” 하고 반겨주니, 때론 축복송이 눈물겹기도 하겠지요. 아버지 기일에 새롭게 눈뜬 ‘결혼기념일’. 최근 모임에서 후배가 결혼30주년 일이라며 양해를 구합니다. 그 말에 덥석 손을 잡고는 “야, 부인이 훌륭하시네. 30년을 데리고 살아주셨군.” 진반농반의 축하지만 말에 진심을 담았습니다. 앞으로 결혼 30년? 40년? 쉽지만 않아 보입니다. 예전엔 빠른 결혼에, 이혼은 어불성설이라 은혼식, 금혼식은 보통이고, 60주년 회혼식을 여는 어른도 많아 동네잔치가 됐었지요. 이제는 ‘전설 따라 3천리’ 에나 나올 법한 얘기입니다. 늦은 나이에 어렵게 결혼하고도 이혼은 그리도 쉽게 잘 하는지, 경력될 일도 아닌데 어른들마저 황혼에, 연금이혼까지 사전에도 없는 말이 나돕니다. 이혼에 대해서는 자식에조차 묻지도 말하지도 말라는 금기영역이 돼버렸습니다. 이런 세태에 정말 축하 받을 사람은 하나씩 나이테를 늘려가는 부부입니다. 거친 세파에도 꿋꿋이 부부의 자리를 지키는 아내와 남편, 엄마와 아빠가 있을 때, 가정은 보금자리로 탄생합니다. 나 홀로 팔순, 구순잔치가 무슨 큰 기쁨일까. 그보다 살아서 부부가 맞는 결혼 30주년이 소중하고, 40주년이면 하늘이 내린 복으로 반길 만한 일입니다. 개인잔치보다 해로잔치가 더 성대했으면 합니다. 연말에 큰 기업의 창업주와 만난 자리에서 말했지요. 생일도 좋지만 회사가 결혼기념일을 챙기는 문화를 만들면 좋겠다고. 석혼식(10년), 은혼식(25년), 진주혼식(30년) 등, 어렵게 결혼하고 쉽게 도장 찍는 시류에, 가정의 연륜을 소중히 가꾸는 아름다운 ‘보금자리인증’ 하나 만들면 좋지 않을까. (소설가 이관순의 손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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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패도 성공처럼 해요
강단에 설 때마다 즐겨했던 말이 ‘중용 23장’입니다. “작은 일에도 최선을 다하면 정성스럽게 된다. 정성스럽게 되면 겉이 변하게 되고, 겉으로 드러나면 밝아져 남을 감동시키고, 남을 감동시키면 바뀌어 진다. 오직 지극정성을 다하는 사람만이 나와 세상을 변하게 할 수 있다.” 영화 ‘역린’에서 정조는 ‘무엇이든 원하면 정성을 다하라 그리하면 이뤄진다’고 했지요. 소설 연금술사도 ‘네가 간절히 원하면 우주가 도와준다’로 첫 문장을 썼고, 카르마(業) 또한 강렬하게 생각하는 것은 현실로 나타난다고 가르칩니다. 개그맨 김병만은 스스로를 실패의 달인이라고 합니다. 그는 개그맨 시험에 7번 낙방하고 백제대 3번, 서울예전 6번을 다 떨어졌습니다. 한 때는 인생을 포기하려고도 했고, 아버지에게 “왜 이렇게 작게 낳았느냐?“고 앙탈도 부렸습니다. 그가 어둠의 터널에서 나와 얻은 결론이 “가늘고 길게 가자, 어떤 단역도 주저말고 소명처럼 받들자, 절대 쉬지 말자.”입니다. 이후로 정성 그 하나만으로 버텨내 아무리 힘들고 고통스러워도 좌절은 할망정 포기는 없었어요. 긴 시간이 흐른 뒤 아버지가 주신 작은 키가 개그맨으로 성공시킨 요인임을 고백합니다. 고뇌 없는 성장이 가능할까요? 삶의 변화나 향상도 어렵습니다. 에머슨은 ‘고뇌는 인생을 사는데 필요불가결한 유익한 존재’라고 말했어요. 고뇌 없이,정성 없이 가식의 탈을 쓰면 불행한 사회인이 됩니다. 나이 50줄에 들면 슬슬 눈치보기를 시작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기량은 8인데 10인 척하며 일하는 사람이 늘어난다 해요. 부족한 면은 몸과 눈치로 아부로 메우면서 상사는 상사대로, 부하는 부하대로 나름의 가면을 씁니다. 살아남고자,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고자 양보와 배려라는 명목아래 얼굴을 탈속에 감추지요. 거기에 익숙해지면 임시방편으로 쓴 탈이 내 얼굴로 굳어져 내가 아는 나와 남이 아는 내가 헷갈리게 됩니다. 말하지 않아도 회사는 나의 맨 얼굴을 압니다. 빤히 알면서 “당신은 해낼 수 있다”고 부추기죠. 진짜 조직이 겁내는 사람은 탈을 벗고 덤비는 사람입니다. 스스로 변화를 위해 힘쓰는 사람이죠. 조로사회가 될수록 가면을 벗고 나답게 살 방법을 찾아야 해요. 슈바이처는 “난 인생을 보는 눈은 매우 허무적이나 어떻게 살아가야 하느냐 하는 점에서는 매우 의욕적“ 이라고 했습니다. 결점이 없는 사람은 계곡 없는 산과 같아요. 한가롭게 노는 구름은 비를 만들지 못합니다. 실패했다고 쫄지 말아요. 훗날에 그것이 성공의 디딤돌이었음을 알게 됩니다. 성공이 하늘에서 뚝 떨어지는 세상은 없으니까요. 개그맨 김병만은 결점을 인정하고 그 대신 온 정성을 다해 실패도 성공처럼 한 표본입니다. 그래야 세상은 아름답고 싸워볼 가치가 있는 곳이 되지 않을까요? ‘죽어갈지언정 패배하지 않는다’ 고 한 헤밍웨이(노인과 바다)처럼. 글 이관순(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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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을 '반짝반짝'이며 살자
11월은 참 애매한 달입니다. 가을도 겨울도 아닌 회색지대 하늘에 뜬 낮달처럼 온기가 없습니다. 가을비 그친 아차산에 올랐다가 수년 전의 기억에 잠겨 한참을 머물렀습니다. 그해 가을, 주왕산 일대로 형제여행을 다녀왔습니다. 3형제 내외가 25년을 함께 한 즐거움인데 그해는 큰 형님의 자리가 비었었지요. 가장 건강했던 분이 세상을 떠나신 겁니다. 늘 계획을 세우고 먹거리와 잠자리를 준비해 주셨지요. 그러면서 여행은 한 차로 해야 맛인데, 카니발 한 대 있으면 좋겠다고 아쉬워했습니다. 이제는 카니발 리무진도 마련했는데 타는 사람이 5명뿐 입니다. 한 사람의 빈자리가 이렇게 크다는 것이 여행 내내 생각에서 떠나지 않았지요. 한 치 앞을 못 보는 게 우리네 인생임을 실감합니다. 900km를 운행하면서 많은 얘기를 나눴지요. 아무래도 빈자리의 주인공인 큰 형님과의 추억이 많았습니다. 가을 벌판 위로 기억들을 떠올리면서 서로에게 묻습니다. 우리 다섯이 언제까지 이렇게 여행을 다닐 수 있을까? 축대에서 돌 하나 빠지니 갑자기 전체가 위태롭게 느껴진 겁니다. 그래서인지 그해 가을 산하가 유난히 눈부셨습니다. 주로 꺼낸 주제는 이 세 가지에 있는 듯합니다. “해야 했는데” “했어야만했는데” “할 수 있었는데...” 모 시인은 인생에서 가장 슬픈 것을 이 세 가지로 꼽았지만, 내게는 참회록처럼 다가왔습니다. 가을은 소란스런 계절이 아닙니다. 단풍 찾아 요란하게 몰려다니는 그러한 행락철만은 아닌 듯합니다. 우리 몸에 눌어붙은 삶의 얼룩을 닦으면서 내면 깊이 침잠해야 하는 절기입니다. 안 쓰던 일기라도 써야할 그런 나날입니다. 오색으로 물든 가을 풍경에서 경건한 생명들의 아름다움이 빛납니다. 단풍진 나뭇잎을 털어내며 겨울나기를 준비하는 나무들, 생명들이 사라진 빈 들판, 모진 비바람을 견뎌내고 가지에 주렁주렁 매달렸던 과일들의 소회는 무엇일까. 그러면서 떠오르는 것. 내 인생도 가을이 짙었는데 어디에다 낫을 댈 수 있으려나... 스산한 바람이 나이만큼 차오릅니다. 쉬운 것이 하나 없는 우리들 삶입니다. 물질이 곤궁한 것만큼 견디기 어려운 일도 없지요. 광야에 홀로 선 나무처럼 느껴지는 외로움도 무척 우리를 힘들게 합니다. 더 힘든 일은 사랑하는 사람의 이름을 불러도 대답이 없을 때입니다. 옆에 있다면 온갖 걸 다 해줄 것 같은데 이 세상에 없을 때 그 열패감은, 밑을 모를 만큼 깊고 광대하겠죠. 오늘이 그를 사랑할 마지막 날이 될 수도 있고, 지금이 그와 나눌 대화의 끝일 수도 있어요. 이런저런 핑계로 내일에다 미루지 마십시오. 내일은 상상 속에서나 있는 것. 아무도 내일을 살아본 사람은 없으니까요. 말하기는 쉬워도 내일을 기약하는 건 부질없는 철부지 소리이거나 비겁한 짓입니다. 우리는 내일을 기약할 수 없는 인생입니다. 아껴야 할 사람이 옆에 있다면 오늘 최선을 다 해 사랑하세요. 그것이 부부이든, 가족이든, 친구일 수도 있겠지요. 시간은 후진도 모르고 유예도 없는 직진 형입니다. 오늘이 반짝반짝 빛나게 살아야 할 이유입니다. 미움, 원망의 자리에 위로, 격려, 사랑을 채워서요. 지금 내 손에 쥔 시간만이 확실한 내 것이니까요. 글 이관순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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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제하는 삶을 위하여
- 괴테는 '진정한 행복은 절제에서 온다' 했고, 동양선비들도 인간의 덕목중 절제만 한 것이 없다고 했습니다. 절제는 한 마디로 자신의 욕구와 행위를 제어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가슴은 알아도 실천에서 어려움을 겪지요. 누구나 경험했을 일입니다. “새해는 꼭 해야지.” 다이어트, 금주, 금연 등 야심찬 결단을 하지만 얼마 안가 흐지부지 되죠. 습관 된 행동을 멈추고 나쁜 버릇을 고치는 일은 왜 늘 힘들까... 모순 속에 길을 찾는 게 우리네 삶입니다. 습관도 그중 하나죠. “좋은 습관을 들이려면 적어도 만 번 이상의 훈련이 필요한데, 나쁜 습관은 한두 번으로도 족하다”고 해요. 손대면 헤어나기 어려운 도박과 같은 거죠. 지나친 걱정도 고약한 습관입니다. 걱정은 몸 안에서 번지는 불이죠. 밖에서 난 불은 소화기로 끄면 되지만 안에서 쥐고 흔드니 대처가 어려워요. 근심은 할수록 빠지는 늪입니다. 가려울 때 긁는 것처럼 당장은 잦아들지만 곧 더 가려워 집니다. 오죽하면 티베트에 “걱정을 해서 걱정이 사라진다면 걱정이 없다”는 속담이 생겼을까요. 인간이 절제를 못하는 데는 진화론, 생물학, 유전학, 심리학 등 많은 요인이 혼재돼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인간의 어쩔 수 없는 본능이란 말도 있어요. 배고프지 않아도 계속 먹으려는 것은 생존을 위한 과식본능이, 불필요한 물건을 계속 사는 것은 쾌락을 추구하는 구매심리가, 알면서 계속 말실수를 함은 말로 관심을 끌려는 인간의 습성에 있답니다. 그렇다고 인간사회가 절제를 향한 노력을 게을리 한 것은 아니었지요. 바우하우스의 디자인은 장식에서 벗어난 절제의 아름다움을 표현했고요. 샤넬의 패션은 여성에게서 허위의 코르셋을 벗어던지게 한 사고를 쳤지요. 절제는 언어는 물론 모든 생활에서 새로운 품격을 담아냅니다. 절제를 막는 것은 당장의 만족과 즐거움이 ‘참고자 하는 의지’보다 강하게 유혹할 때 나타납니다. 하지만, 스스로 욕망 조절을 못하면 진정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없습니다. 절제는 유익한 것, 해로운 것을 구분해 우리 스스로 삶의 주인공이 되도록 이끌어 주니까요. 사실 마음에서 분출되는 대부분은 절제의 대상입니다. 욕심과 허영, 미움, 시기, 질투까지도. 같은 물을 먹고도 소는 우유를 내고 뱀은 독을 내는 이치와 같아요. 사람이 입으로 먹을 때는 독이 없는데, 그것을 먹고 나오는 말에는 독이 있습니다. 진실로 사람관계가 어질기를 원한다면, 절제의 힘에 도움을 청하세요. 절제는 좋은 습관을 부릅니다. 나이가 들수록 ‘절제하는 삶’을 강조하는 데는 인류가 경험에서 길어 올린 지혜가 있어서죠. *글 이관순(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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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제하는 삶을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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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제하는 삶을 위하여
- 괴테는 '진정한 행복은 절제에서 온다' 했고, 동양선비들도 인간의 덕목중 절제만 한 것이 없다고 했습니다. 절제는 한 마디로 자신의 욕구와 행위를 제어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가슴은 알아도 실천에서 어려움을 겪지요. 누구나 경험했을 일입니다. “새해는 꼭 해야지.” 다이어트, 금주, 금연 등 야심찬 결단을 하지만 얼마 안가 흐지부지 되죠. 습관 된 행동을 멈추고 나쁜 버릇을 고치는 일은 왜 늘 힘들까... 모순 속에 길을 찾는 게 우리네 삶입니다. 습관도 그중 하나죠. “좋은 습관을 들이려면 적어도 만 번 이상의 훈련이 필요한데, 나쁜 습관은 한두 번으로도 족하다”고 해요. 손대면 헤어나기 어려운 도박과 같은 거죠. 지나친 걱정도 고약한 습관입니다. 걱정은 몸 안에서 번지는 불이죠. 밖에서 난 불은 소화기로 끄면 되지만 안에서 쥐고 흔드니 대처가 어려워요. 근심은 할수록 빠지는 늪입니다. 가려울 때 긁는 것처럼 당장은 잦아들지만 곧 더 가려워 집니다. 오죽하면 티베트에 “걱정을 해서 걱정이 사라진다면 걱정이 없다”는 속담이 생겼을까요. 인간이 절제를 못하는 데는 진화론, 생물학, 유전학, 심리학 등 많은 요인이 혼재돼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인간의 어쩔 수 없는 본능이란 말도 있어요. 배고프지 않아도 계속 먹으려는 것은 생존을 위한 과식본능이, 불필요한 물건을 계속 사는 것은 쾌락을 추구하는 구매심리가, 알면서 계속 말실수를 함은 말로 관심을 끌려는 인간의 습성에 있답니다. 그렇다고 인간사회가 절제를 향한 노력을 게을리 한 것은 아니었지요. 바우하우스의 디자인은 장식에서 벗어난 절제의 아름다움을 표현했고요. 샤넬의 패션은 여성에게서 허위의 코르셋을 벗어던지게 한 사고를 쳤지요. 절제는 언어는 물론 모든 생활에서 새로운 품격을 담아냅니다. 절제를 막는 것은 당장의 만족과 즐거움이 ‘참고자 하는 의지’보다 강하게 유혹할 때 나타납니다. 하지만, 스스로 욕망 조절을 못하면 진정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없습니다. 절제는 유익한 것, 해로운 것을 구분해 우리 스스로 삶의 주인공이 되도록 이끌어 주니까요. 사실 마음에서 분출되는 대부분은 절제의 대상입니다. 욕심과 허영, 미움, 시기, 질투까지도. 같은 물을 먹고도 소는 우유를 내고 뱀은 독을 내는 이치와 같아요. 사람이 입으로 먹을 때는 독이 없는데, 그것을 먹고 나오는 말에는 독이 있습니다. 진실로 사람관계가 어질기를 원한다면, 절제의 힘에 도움을 청하세요. 절제는 좋은 습관을 부릅니다. 나이가 들수록 ‘절제하는 삶’을 강조하는 데는 인류가 경험에서 길어 올린 지혜가 있어서죠. *글 이관순(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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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이란 죽음을 향한 순례
- 조선의 성리학자 이기가 말했다 해요. “노인이 젊은이와 반대인 것이 3가지가 있다. 밤에 잠을 안자며 낮잠을 좋아하고, 가까운 곳을 못 보면서 먼 것은 보며, 손주는 몹시 아끼면서 자식과는 소원한 것, 이것이 노인의 3가지 상반된 점.” 이라고. 늙어가며 슬픈 건 소중한 것을 지키기가 힘들어지는데 있습니다. 가족, 명예, 친구 등 모두가 소중한 것들이죠. 지켜보려고 애쓰지만, 하나 둘 낙엽 지듯이 내 곁을 떠납니다. 그러다 꾀 벗은 나무가 된 자신을 보면서 연민하겠지요. 그러나 중요한 것은 집으로 잘 돌아가는 일입니다. 흙에서 왔으니 흙으로 잘 돌아가는 것이지요. 웨스트민스터 사원엔 위대한 학자나 시인, 화가, 존경받는 정치인이 묻혀 있다고 합니다. 기라성 같은 유명인사들 주검 틈에 토마스파라는 농장지기가 있습니다. 80세까지 총각이었다가 122세에 재혼해 장수했다는 그의 주장이 입소문을 타 유명인사가 된데 따른 것이지요. 그는 찰스1세 국왕도 알현하는 영광도 지닙니다. 하지만 런던의 한 초청 만찬장에서 음식을 먹다가 탈이 나 죽었다고 합니다. 검증 없이 말만 듣고 가장 장수한 복 받은 사람으로 평가해 묘지를 내준 사원의 결정은 ‘장수’에 대한 인간 의 관심이 얼마나 큰지를 잘 보여줍니다. 86세로 선종한 김수환 추기경이 칠순을 맞아 신부들과 식사하면서 “막상 일흔이 돼보니 죽음이란 게 두려운 것 같다”고 말했습니다. 추기경의 두려움은 70년이란 긴 시간을 갖고도 아직 고치지 못한 허물이 많은 게 아쉽고, 남은 시간에 얼마나 허물을 고치며 살까 생각하니 초조하다는 뜻입니다. 해를 보내면서 ‘늙음’과 ‘죽음’이란 단어가 자주 입에 오른 듯합니다. 그런 상념에 젖다보면 오래 사는 장수의 미련보다 남은 생을 통해 얼마나 내 허물을 고치며 살 수 있을까 고뇌한 추기경 얼굴이 흔들립니다. 오래 전 읽었던 오연석 교수(전 경기대. 죽음학교 교장)의 글도 생각납니다. 죽음을 준비하는 지혜 같아서 머리에 넣어두었지요. 그는 1년에 몇 달씩 캐나다에 머물었는데 옆집에 사는 노인과 이웃사촌으로 친하게 지냈답니다. 정원을 가꾸는 솜씨가 좋아 모르는 것도 척척 알려주었다는 군요. 그런데 부인이 죽은 후로 더는 그 물음을 못하게 됐답니다. 그때마다 머리를 긁적이며 “꽃 이름은 아내가 잘 아는데”하며 부인을 그리워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던 어느 해, 그가 병원에 입원했다는 소식을 들었고, 다시 호스피스병원으로 옮긴 것을 알게 되었답니다. 언제 또 볼까 싶어 문병 차 찾아갔는데, 내 손을 잡더니 오래 살지 못한다며 놀랍도록 편안한 미소를 짓더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동안 이웃이 되어줘 행복했다면서 자신의 장례식에 초청하고 싶다고 하는군요. 오 교수가 돌아오면서 생각합니다. 내게 이 정도였으면 가족과는 얼마나 많은 대화를 나눴을까. 우리 주변에 그분처럼 죽음을 준비하고 사랑하는 사람들과 “고맙다, 행복했다, 함께 해 좋았다”고 말하며 떠날 사람이 얼마나 될까 묻게 되더랍니다. 나도 할 수만 있다면 그런 바람 하나 갖고 싶습니다. 순례의 끝머리에서 보고 싶은 사람 웃으며 만나고. 사랑하는 가족들과 손을 잡고 “너와 함께 한 세상이 행복했다... 굿바이.” 하며 순례를 마칠 수 있다면. (소설가 이관순의 손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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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이란 죽음을 향한 순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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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델라의 외침‘밤베렐라’
- 언어에는 정령이 있어 ‘말이 씨를 뿌린다’고 합니다. 하늘아래 언어 중 가장 용맹스러운 단어는 ‘용서’일 것입니다. 그만큼 행함이 어려워서죠. 남을 미워하지 않고 미움을 받지 않고 세상을 살 수 있다면 좋으련만, 현실은 그리 녹녹하지 못합니다. 세상을 살면서 생기는 미움은 자연스러운 감정입니다. 우리의 일상에는 사랑한 만큼 미움도 증오도 생겨요. 받은 복이 많으면 원수도 생깁니다. 때로는 커피 한 잔 나눈 적 없는 사람이 나를 험담하고, 별일이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나를 원수처럼 생각하는 사람도 나옵니다. 남의 인생 한 복판에 뛰어들어 돌이키지 못할 불행을 만들기도 하지요. 그래서 용서를 몇 번 하면 되느냐는 질문에 “일곱 번씩 일흔 번을 하라“고 성경은 가르칩니다. 그만큼 용서하며 사는 일이 어려운 일이지만, 가치와 상급이 크다는 뜻이겠지요. 가능한 한 남을 미워하지 않고 다른 사람과 척지지 않고 살려 해도, 얽히고설킨 인간관계에서 감정이 충돌하면 미움이 생기고 커집니다. 더구나 왼뺨을 때리면 오른 뺨도 내밀라는 가르침엔 속수무책일 때가 많죠. 무식하면 용감하다고, 맹수 같은 용맹함 없이는 쉽게 행하지 못하는 게 용서하는 일입니다. 내가 용서를 했는데 상대가 거부하거나, 상대가 용서를 구하는데 내가 받아들이지 못하는 경우도 있어요. 어렸을 때 옆집 장독을 깨뜨려 난리가 났습니다. 엄마가 오시기 전에 해결해 보려고 두 손을 싹싹 빌었는데 “아를 어째 키웠냐” 며 놀라 달려온 엄마에게 심한 말을 퍼부었습니다. 집에 돌아온 내가 식식댑니다. “엄마는 그딴 소릴 듣고 왜 가만있어? 엄마한테 욕한 거 절대 용서 못해!” 그때 엄마가 성난 아들에게 타이른 말이 있습니다. “잘잘못은 하나님이 아신다. 은혜는 가슴에 새기고 미움은 냇물에 새겨라.” 밤베렐라 (bambeleiia)! 남아공 넬슨 만델라 대통령이 26년간 감옥생활을 하면서 매일 자신을 향해 외쳤던 말입니다. ‘never give up! 포기하지 마라. 주님이 희망이시다’ 만델라 대통령이 그 긴 세월을 감옥에 살면서 끝까지 희망을 지키려고 자신을 일깨운 말. 그만이 지닌 마법의 주문이 ‘밤베렐라’입니다. 만델라는 남아공에서 평등선거로 뽑힌 첫 대통령이지요. 아프리카민족회의 지도자로 반아파르트헤이트 운동을 전개하다가 투옥돼 그 긴 26년 수감생활을 견디고 나와 민족의 영웅이 되고, 세계인권운동의 상징이 되었습니다. 그의 위대함은 대통령이 되어 자신과 민족을 탄압한 자들을 용서한 점입니다. 진실화해위원회를 설치해 과거사를 용서로 청산하고, 흑백갈등이 없는 국가를 세우고자 평생을 헌신했지요. 그가 노벨평화상 수상자가 되던 날, 전 세계가 반겼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용서와 함께 짝을 이룬 단어가 ‘희망’입니다. 아름다운 사람은 끊임없이 희망을 전하는 사람입니다. 그중 온몸으로 희망을 말한 고 장영희 교수가 있지요. 그는 죽기까지 ‘희망이란 새 한 마리’ 어깨 위에 올리고 희망을 속삭였어요. 타고난 장애에 세 번의 암 투병 속에도 조선일보에 연재한 ‘영미시 산책’엔 늘 희망의 새가 날았습니다. ‘산을 넘고 보니 이 산이 아니네’ 할 때도 “진정한 용기는 다시 도전하는 것“이라며 마법의 주문을 걸곤 했습니다. ‘밤베렐라’. 당신은 용기가 필요하고 지칠 때 자신에게 힘을 주는 마법의 주문이 있나요? 내 인생에 힘이 된 한마디는 무엇인가요? 순례의 완성은 온 곳으로 잘 돌아가는 것이다 (소설가 이관순의 손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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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델라의 외침‘밤베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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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무늬를 찾아가는 인문학
- 한때 '인문학'이 유행이었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이에 대한 관심은 서점가, 강연장, 답사모임 같은 데를 찾아보아도 아직 식지 않은듯합니다. 강의를 나가보면 개념 자체를 잘 이해하지 못함을 느낄 수 있는데요 마치 철학을 어렵게 여기는 것과 비슷합니다. 국가 발전도 학문과 연결해 볼 수 있어요. 국가 초기단계에는 법학, 정치학이 중심이 되지만, 초기발전단계로 가면 경제, 사회, 신문방송 등으로 관심이 옮겨 가고, 좀 더 발전하면 철학, 심리학 등으로 축이 이동하게 됩니다. 그리고 성숙단계에는 고고학, 인류학 등이 발달하면서 제국을 꿈꾸지요. 중국, 일본, 프랑스, 이탈리아가 그랬으니까요. 인간은 어떤 흐름 속에 존재하고 그 흐름 속에 무늬를 그리며 삽니다. 자연과 나와의 관계에도 인문의 무늬를 그려요. 인문학은 인간이 자연과 세계와 어떤 관계를 가지고 어떤 무늬를 그리며 사는지를 연구합니다. 인문학하면 르네상스 휴머니즘을 떠올립니다. 신이 지배하던 사회에서 스스로 독립하려는 사상입니다. 신이 아닌 인간과의 관계를 통해 인간의 우월성을추구 하겠다는 것이지요. 모든 학(學)은 모방에서 시작합니다. 모방을 통해 계속 습득함이 학습인데, 학습이 학이 되는 순간 인문적 상상 · 통찰 · 창의력은 결핍되죠. 그래서 학이 아닌 활동으로 가야하고, 인문적 통찰로 나가야합니다. 인문적 통찰은 딱 보면 알아채는 힘이죠. 그 힘을 키우려면, 우리가 아닌 나로 가야하고, 대답하는 인재보다 질문하는 인재로 이끌어야 합니다. TIME 표지에 ‘아시아인은 생각할 줄 모른다’가 나온 적이 있습니다. 답은 정해져 있다 생각하고 이를 찾기에 골몰하는 삶을 지적한 거지요. 머리에 잔뜩 뭔가를 채우고 그대로 따라가려고 합니다. 머릿속의 상을 좇거나 보이는 것에 집착하면 생각이란 동력이 약화됩니다. 베케트의 ‘고도를 기다리며’는 연극사의 이정표와도 같은 작품입니다. 적막한 무대에 ‘고도’를 기다리는 정체모를 두 인물이 나오지요. 이렇다 할 줄거리도 없이 “결국 고도씨는 오늘밤에 못 오지만 내일 올 예정” 이란 황당한 결말로 관객들에게 충격을 주죠. 이 둘이 기다린 고도는 무엇일까. 종교적 구원자 언제 끝날지 모르는 종전 소식? 사람마다 다 다를 수 있습니다. 많은 사람이 작품의 난해함을 말하면서 최고의 작품으로 꼽는 건 인생의 비애 속에서도 잃지 않은 유머 때문입니다. 한 열광적인 독자가 그에게 말합니다. “전 일생 동안 선생의 열렬한 팬이었고 40년 전부터 선생님 책을 읽어왔지요” 베케트의 대답이 재미있습니다. “그 참 피곤하시겠소.” 인문학자들이 한국사회를 위기로 보는 건 선진사회로 가는 경계에 머물러서입니다. 선진 학습으로 양적 성장에 성공했으나, 새로운 방향으로 경제, 정치,교육의 돌파구를 마련 못해 지금의 불행을 겪는다고요. 한국사회의 발전은인문적 통찰로 질적 생존력을 높일 수 있느냐에 달렸다합니다. 이를 알고도 못나가는 상황이 안타까울 뿐이지요. 기업인만이 인문적 통찰에 힘씁니다. 그렇게 나가지 않으면 죽으니까요. 기업인이 인문학을 필요로 함은 고급스러워지려는 것이 아니라, 생존을 위해 틀과 방식을 혁신적으로 가져가기 위해서입니다. 인문적 창의성은 용기와도 관련 있어요. 변화의 경계에 선 모호함, 불안함을 견뎌야하니까요. 이를 잘 설명한 사람이 2500년 전 노자(老子)입니다. 우주만물에 대해 생각한 중국 최초의 철학자지요. 그가 찾은 우주의 진리를 도(道)라 하고, 우주만물이 이뤄지는 근본적 이치를 도(道)로 설명합니다. 노자는 인문적 개인이 자발적으로 모인 사회가 강하다고 했습니다 (소설가 이관순의 손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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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무늬를 찾아가는 인문학
- 한때 '인문학'이 유행이었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이에 대한 관심은 서점가, 강연장, 답사모임 같은 데를 찾아보아도 아직 식지 않은듯합니다. 강의를 나가보면 개념 자체를 잘 이해하지 못함을 느낄 수 있는데요 마치 철학을 어렵게 여기는 것과 비슷합니다. 국가 발전도 학문과 연결해 볼 수 있어요. 국가 초기단계에는 법학, 정치학이 중심이 되지만, 초기발전단계로 가면 경제, 사회, 신문방송 등으로 관심이 옮겨 가고, 좀 더 발전하면 철학, 심리학 등으로 축이 이동하게 됩니다. 그리고 성숙단계에는 고고학, 인류학 등이 발달하면서 제국을 꿈꾸지요. 중국, 일본, 프랑스, 이탈리아가 그랬으니까요. 인간은 어떤 흐름 속에 존재하고 그 흐름 속에 무늬를 그리며 삽니다. 자연과 나와의 관계에도 인문의 무늬를 그려요. 인문학은 인간이 자연과 세계와 어떤 관계를 가지고 어떤 무늬를 그리며 사는지를 연구합니다. 인문학하면 르네상스 휴머니즘을 떠올립니다. 신이 지배하던 사회에서 스스로 독립하려는 사상입니다. 신이 아닌 인간과의 관계를 통해 인간의 우월성을추구 하겠다는 것이지요. 모든 학(學)은 모방에서 시작합니다. 모방을 통해 계속 습득함이 학습인데, 학습이 학이 되는 순간 인문적 상상 · 통찰 · 창의력은 결핍되죠. 그래서 학이 아닌 활동으로 가야하고, 인문적 통찰로 나가야합니다. 인문적 통찰은 딱 보면 알아채는 힘이죠. 그 힘을 키우려면, 우리가 아닌 나로 가야하고, 대답하는 인재보다 질문하는 인재로 이끌어야 합니다. TIME 표지에 ‘아시아인은 생각할 줄 모른다’가 나온 적이 있습니다. 답은 정해져 있다 생각하고 이를 찾기에 골몰하는 삶을 지적한 거지요. 머리에 잔뜩 뭔가를 채우고 그대로 따라가려고 합니다. 머릿속의 상을 좇거나 보이는 것에 집착하면 생각이란 동력이 약화됩니다. 베케트의 ‘고도를 기다리며’는 연극사의 이정표와도 같은 작품입니다. 적막한 무대에 ‘고도’를 기다리는 정체모를 두 인물이 나오지요. 이렇다 할 줄거리도 없이 “결국 고도씨는 오늘밤에 못 오지만 내일 올 예정” 이란 황당한 결말로 관객들에게 충격을 주죠. 이 둘이 기다린 고도는 무엇일까. 종교적 구원자 언제 끝날지 모르는 종전 소식? 사람마다 다 다를 수 있습니다. 많은 사람이 작품의 난해함을 말하면서 최고의 작품으로 꼽는 건 인생의 비애 속에서도 잃지 않은 유머 때문입니다. 한 열광적인 독자가 그에게 말합니다. “전 일생 동안 선생의 열렬한 팬이었고 40년 전부터 선생님 책을 읽어왔지요” 베케트의 대답이 재미있습니다. “그 참 피곤하시겠소.” 인문학자들이 한국사회를 위기로 보는 건 선진사회로 가는 경계에 머물러서입니다. 선진 학습으로 양적 성장에 성공했으나, 새로운 방향으로 경제, 정치,교육의 돌파구를 마련 못해 지금의 불행을 겪는다고요. 한국사회의 발전은인문적 통찰로 질적 생존력을 높일 수 있느냐에 달렸다합니다. 이를 알고도 못나가는 상황이 안타까울 뿐이지요. 기업인만이 인문적 통찰에 힘씁니다. 그렇게 나가지 않으면 죽으니까요. 기업인이 인문학을 필요로 함은 고급스러워지려는 것이 아니라, 생존을 위해 틀과 방식을 혁신적으로 가져가기 위해서입니다. 인문적 창의성은 용기와도 관련 있어요. 변화의 경계에 선 모호함, 불안함을 견뎌야하니까요. 이를 잘 설명한 사람이 2500년 전 노자(老子)입니다. 우주만물에 대해 생각한 중국 최초의 철학자지요. 그가 찾은 우주의 진리를 도(道)라 하고, 우주만물이 이뤄지는 근본적 이치를 도(道)로 설명합니다. 노자는 인문적 개인이 자발적으로 모인 사회가 강하다고 했습니다 (소설가 이관순의 손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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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생에 가장 소중한 날
- 아버지 기일을 찾아 대전으로 내려가는 기차를 탔습니다. 창밖의 잿빛 세상을 보면서 저무는 해와 가당찮은 내 나이와, 헐렁해진 시간의 밀도 속을 헤집는 바람소릴 듣다가 뜬금없는 의문 하나를 건집니다. 그날 아버지가 만족하셨을까? 희수(77세)연이 열린 1992년 봄날, 아내를 앞서 보낸 아버지는 혼자 상을 받으셨지요. 자식들은 아버지께 기쁨이 되고자 많은 친구 분을 초대해 정성껏 모셨습니다. 모두 기꺼워하셨고 당신도 흡족하셨는지 직접 자손 소개도 하셨지요. 그런데 27년이 지난 지금 왜 그 생각이든 걸까? 물론 그때도 어머니가 그리웠었지만 아버지 심중에 이는 댓바람 소리는 듣지 못했으니까요. ‘부부해로’의 의미를 새롭게 깨닫습니다. 옆에서 배우자 잃는 모습들을 보면서 ‘짝’과 ‘외짝’이 얼마나 큰 행불복의 요소 인지를... ‘검은머리 파뿌리 되도록’ 이란 말의 참뜻이 심금에 와 닿습니다. 요즘 세태에서 ‘파뿌리’는 고전이 된 듯합니다. 그만큼 부부개념도 달라졌으니까요. 요즘은 생일이 대세입니다. “애가 무신 생일이노” 그런 소리 듣던 게 엊그젠데. 지금은 돌만 지나도 깨치는 게 ‘생일’인 듯합니다. 애들 생일이 더 요란하지요. ‘생파’라고 친구 초청하고, 선물 싸들고 오는 또래들을 보면 생일 문화만은 흥왕한 나라가 됐습니다. 올해도 새 달력을 걸기 전에 아무개 생일부터 기록합니다. 누구로부터 축하를 받는 것은 행복한 일입니다. 외로운 인생끼리 날을 정해 “오늘은 당신 날이야, 네가 세상의 주인공야” 하고 반겨주니, 때론 축복송이 눈물겹기도 하겠지요. 아버지 기일에 새롭게 눈뜬 ‘결혼기념일’. 최근 모임에서 후배가 결혼30주년 일이라며 양해를 구합니다. 그 말에 덥석 손을 잡고는 “야, 부인이 훌륭하시네. 30년을 데리고 살아주셨군.” 진반농반의 축하지만 말에 진심을 담았습니다. 앞으로 결혼 30년? 40년? 쉽지만 않아 보입니다. 예전엔 빠른 결혼에, 이혼은 어불성설이라 은혼식, 금혼식은 보통이고, 60주년 회혼식을 여는 어른도 많아 동네잔치가 됐었지요. 이제는 ‘전설 따라 3천리’ 에나 나올 법한 얘기입니다. 늦은 나이에 어렵게 결혼하고도 이혼은 그리도 쉽게 잘 하는지, 경력될 일도 아닌데 어른들마저 황혼에, 연금이혼까지 사전에도 없는 말이 나돕니다. 이혼에 대해서는 자식에조차 묻지도 말하지도 말라는 금기영역이 돼버렸습니다. 이런 세태에 정말 축하 받을 사람은 하나씩 나이테를 늘려가는 부부입니다. 거친 세파에도 꿋꿋이 부부의 자리를 지키는 아내와 남편, 엄마와 아빠가 있을 때, 가정은 보금자리로 탄생합니다. 나 홀로 팔순, 구순잔치가 무슨 큰 기쁨일까. 그보다 살아서 부부가 맞는 결혼 30주년이 소중하고, 40주년이면 하늘이 내린 복으로 반길 만한 일입니다. 개인잔치보다 해로잔치가 더 성대했으면 합니다. 연말에 큰 기업의 창업주와 만난 자리에서 말했지요. 생일도 좋지만 회사가 결혼기념일을 챙기는 문화를 만들면 좋겠다고. 석혼식(10년), 은혼식(25년), 진주혼식(30년) 등, 어렵게 결혼하고 쉽게 도장 찍는 시류에, 가정의 연륜을 소중히 가꾸는 아름다운 ‘보금자리인증’ 하나 만들면 좋지 않을까. (소설가 이관순의 손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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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제하는 삶을 위하여
- 괴테는 '진정한 행복은 절제에서 온다' 했고, 동양선비들도 인간의 덕목중 절제만 한 것이 없다고 했습니다. 절제는 한 마디로 자신의 욕구와 행위를 제어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가슴은 알아도 실천에서 어려움을 겪지요. 누구나 경험했을 일입니다. “새해는 꼭 해야지.” 다이어트, 금주, 금연 등 야심찬 결단을 하지만 얼마 안가 흐지부지 되죠. 습관 된 행동을 멈추고 나쁜 버릇을 고치는 일은 왜 늘 힘들까... 모순 속에 길을 찾는 게 우리네 삶입니다. 습관도 그중 하나죠. “좋은 습관을 들이려면 적어도 만 번 이상의 훈련이 필요한데, 나쁜 습관은 한두 번으로도 족하다”고 해요. 손대면 헤어나기 어려운 도박과 같은 거죠. 지나친 걱정도 고약한 습관입니다. 걱정은 몸 안에서 번지는 불이죠. 밖에서 난 불은 소화기로 끄면 되지만 안에서 쥐고 흔드니 대처가 어려워요. 근심은 할수록 빠지는 늪입니다. 가려울 때 긁는 것처럼 당장은 잦아들지만 곧 더 가려워 집니다. 오죽하면 티베트에 “걱정을 해서 걱정이 사라진다면 걱정이 없다”는 속담이 생겼을까요. 인간이 절제를 못하는 데는 진화론, 생물학, 유전학, 심리학 등 많은 요인이 혼재돼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인간의 어쩔 수 없는 본능이란 말도 있어요. 배고프지 않아도 계속 먹으려는 것은 생존을 위한 과식본능이, 불필요한 물건을 계속 사는 것은 쾌락을 추구하는 구매심리가, 알면서 계속 말실수를 함은 말로 관심을 끌려는 인간의 습성에 있답니다. 그렇다고 인간사회가 절제를 향한 노력을 게을리 한 것은 아니었지요. 바우하우스의 디자인은 장식에서 벗어난 절제의 아름다움을 표현했고요. 샤넬의 패션은 여성에게서 허위의 코르셋을 벗어던지게 한 사고를 쳤지요. 절제는 언어는 물론 모든 생활에서 새로운 품격을 담아냅니다. 절제를 막는 것은 당장의 만족과 즐거움이 ‘참고자 하는 의지’보다 강하게 유혹할 때 나타납니다. 하지만, 스스로 욕망 조절을 못하면 진정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없습니다. 절제는 유익한 것, 해로운 것을 구분해 우리 스스로 삶의 주인공이 되도록 이끌어 주니까요. 사실 마음에서 분출되는 대부분은 절제의 대상입니다. 욕심과 허영, 미움, 시기, 질투까지도. 같은 물을 먹고도 소는 우유를 내고 뱀은 독을 내는 이치와 같아요. 사람이 입으로 먹을 때는 독이 없는데, 그것을 먹고 나오는 말에는 독이 있습니다. 진실로 사람관계가 어질기를 원한다면, 절제의 힘에 도움을 청하세요. 절제는 좋은 습관을 부릅니다. 나이가 들수록 ‘절제하는 삶’을 강조하는 데는 인류가 경험에서 길어 올린 지혜가 있어서죠. *글 이관순(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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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제하는 삶을 위하여
- 괴테는 '진정한 행복은 절제에서 온다' 했고, 동양선비들도 인간의 덕목중 절제만 한 것이 없다고 했습니다. 절제는 한 마디로 자신의 욕구와 행위를 제어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가슴은 알아도 실천에서 어려움을 겪지요. 누구나 경험했을 일입니다. “새해는 꼭 해야지.” 다이어트, 금주, 금연 등 야심찬 결단을 하지만 얼마 안가 흐지부지 되죠. 습관 된 행동을 멈추고 나쁜 버릇을 고치는 일은 왜 늘 힘들까... 모순 속에 길을 찾는 게 우리네 삶입니다. 습관도 그중 하나죠. “좋은 습관을 들이려면 적어도 만 번 이상의 훈련이 필요한데, 나쁜 습관은 한두 번으로도 족하다”고 해요. 손대면 헤어나기 어려운 도박과 같은 거죠. 지나친 걱정도 고약한 습관입니다. 걱정은 몸 안에서 번지는 불이죠. 밖에서 난 불은 소화기로 끄면 되지만 안에서 쥐고 흔드니 대처가 어려워요. 근심은 할수록 빠지는 늪입니다. 가려울 때 긁는 것처럼 당장은 잦아들지만 곧 더 가려워 집니다. 오죽하면 티베트에 “걱정을 해서 걱정이 사라진다면 걱정이 없다”는 속담이 생겼을까요. 인간이 절제를 못하는 데는 진화론, 생물학, 유전학, 심리학 등 많은 요인이 혼재돼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인간의 어쩔 수 없는 본능이란 말도 있어요. 배고프지 않아도 계속 먹으려는 것은 생존을 위한 과식본능이, 불필요한 물건을 계속 사는 것은 쾌락을 추구하는 구매심리가, 알면서 계속 말실수를 함은 말로 관심을 끌려는 인간의 습성에 있답니다. 그렇다고 인간사회가 절제를 향한 노력을 게을리 한 것은 아니었지요. 바우하우스의 디자인은 장식에서 벗어난 절제의 아름다움을 표현했고요. 샤넬의 패션은 여성에게서 허위의 코르셋을 벗어던지게 한 사고를 쳤지요. 절제는 언어는 물론 모든 생활에서 새로운 품격을 담아냅니다. 절제를 막는 것은 당장의 만족과 즐거움이 ‘참고자 하는 의지’보다 강하게 유혹할 때 나타납니다. 하지만, 스스로 욕망 조절을 못하면 진정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없습니다. 절제는 유익한 것, 해로운 것을 구분해 우리 스스로 삶의 주인공이 되도록 이끌어 주니까요. 사실 마음에서 분출되는 대부분은 절제의 대상입니다. 욕심과 허영, 미움, 시기, 질투까지도. 같은 물을 먹고도 소는 우유를 내고 뱀은 독을 내는 이치와 같아요. 사람이 입으로 먹을 때는 독이 없는데, 그것을 먹고 나오는 말에는 독이 있습니다. 진실로 사람관계가 어질기를 원한다면, 절제의 힘에 도움을 청하세요. 절제는 좋은 습관을 부릅니다. 나이가 들수록 ‘절제하는 삶’을 강조하는 데는 인류가 경험에서 길어 올린 지혜가 있어서죠. *글 이관순(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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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이란 죽음을 향한 순례
- 조선의 성리학자 이기가 말했다 해요. “노인이 젊은이와 반대인 것이 3가지가 있다. 밤에 잠을 안자며 낮잠을 좋아하고, 가까운 곳을 못 보면서 먼 것은 보며, 손주는 몹시 아끼면서 자식과는 소원한 것, 이것이 노인의 3가지 상반된 점.” 이라고. 늙어가며 슬픈 건 소중한 것을 지키기가 힘들어지는데 있습니다. 가족, 명예, 친구 등 모두가 소중한 것들이죠. 지켜보려고 애쓰지만, 하나 둘 낙엽 지듯이 내 곁을 떠납니다. 그러다 꾀 벗은 나무가 된 자신을 보면서 연민하겠지요. 그러나 중요한 것은 집으로 잘 돌아가는 일입니다. 흙에서 왔으니 흙으로 잘 돌아가는 것이지요. 웨스트민스터 사원엔 위대한 학자나 시인, 화가, 존경받는 정치인이 묻혀 있다고 합니다. 기라성 같은 유명인사들 주검 틈에 토마스파라는 농장지기가 있습니다. 80세까지 총각이었다가 122세에 재혼해 장수했다는 그의 주장이 입소문을 타 유명인사가 된데 따른 것이지요. 그는 찰스1세 국왕도 알현하는 영광도 지닙니다. 하지만 런던의 한 초청 만찬장에서 음식을 먹다가 탈이 나 죽었다고 합니다. 검증 없이 말만 듣고 가장 장수한 복 받은 사람으로 평가해 묘지를 내준 사원의 결정은 ‘장수’에 대한 인간 의 관심이 얼마나 큰지를 잘 보여줍니다. 86세로 선종한 김수환 추기경이 칠순을 맞아 신부들과 식사하면서 “막상 일흔이 돼보니 죽음이란 게 두려운 것 같다”고 말했습니다. 추기경의 두려움은 70년이란 긴 시간을 갖고도 아직 고치지 못한 허물이 많은 게 아쉽고, 남은 시간에 얼마나 허물을 고치며 살까 생각하니 초조하다는 뜻입니다. 해를 보내면서 ‘늙음’과 ‘죽음’이란 단어가 자주 입에 오른 듯합니다. 그런 상념에 젖다보면 오래 사는 장수의 미련보다 남은 생을 통해 얼마나 내 허물을 고치며 살 수 있을까 고뇌한 추기경 얼굴이 흔들립니다. 오래 전 읽었던 오연석 교수(전 경기대. 죽음학교 교장)의 글도 생각납니다. 죽음을 준비하는 지혜 같아서 머리에 넣어두었지요. 그는 1년에 몇 달씩 캐나다에 머물었는데 옆집에 사는 노인과 이웃사촌으로 친하게 지냈답니다. 정원을 가꾸는 솜씨가 좋아 모르는 것도 척척 알려주었다는 군요. 그런데 부인이 죽은 후로 더는 그 물음을 못하게 됐답니다. 그때마다 머리를 긁적이며 “꽃 이름은 아내가 잘 아는데”하며 부인을 그리워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던 어느 해, 그가 병원에 입원했다는 소식을 들었고, 다시 호스피스병원으로 옮긴 것을 알게 되었답니다. 언제 또 볼까 싶어 문병 차 찾아갔는데, 내 손을 잡더니 오래 살지 못한다며 놀랍도록 편안한 미소를 짓더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동안 이웃이 되어줘 행복했다면서 자신의 장례식에 초청하고 싶다고 하는군요. 오 교수가 돌아오면서 생각합니다. 내게 이 정도였으면 가족과는 얼마나 많은 대화를 나눴을까. 우리 주변에 그분처럼 죽음을 준비하고 사랑하는 사람들과 “고맙다, 행복했다, 함께 해 좋았다”고 말하며 떠날 사람이 얼마나 될까 묻게 되더랍니다. 나도 할 수만 있다면 그런 바람 하나 갖고 싶습니다. 순례의 끝머리에서 보고 싶은 사람 웃으며 만나고. 사랑하는 가족들과 손을 잡고 “너와 함께 한 세상이 행복했다... 굿바이.” 하며 순례를 마칠 수 있다면. (소설가 이관순의 손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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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이란 죽음을 향한 순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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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델라의 외침‘밤베렐라’
- 언어에는 정령이 있어 ‘말이 씨를 뿌린다’고 합니다. 하늘아래 언어 중 가장 용맹스러운 단어는 ‘용서’일 것입니다. 그만큼 행함이 어려워서죠. 남을 미워하지 않고 미움을 받지 않고 세상을 살 수 있다면 좋으련만, 현실은 그리 녹녹하지 못합니다. 세상을 살면서 생기는 미움은 자연스러운 감정입니다. 우리의 일상에는 사랑한 만큼 미움도 증오도 생겨요. 받은 복이 많으면 원수도 생깁니다. 때로는 커피 한 잔 나눈 적 없는 사람이 나를 험담하고, 별일이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나를 원수처럼 생각하는 사람도 나옵니다. 남의 인생 한 복판에 뛰어들어 돌이키지 못할 불행을 만들기도 하지요. 그래서 용서를 몇 번 하면 되느냐는 질문에 “일곱 번씩 일흔 번을 하라“고 성경은 가르칩니다. 그만큼 용서하며 사는 일이 어려운 일이지만, 가치와 상급이 크다는 뜻이겠지요. 가능한 한 남을 미워하지 않고 다른 사람과 척지지 않고 살려 해도, 얽히고설킨 인간관계에서 감정이 충돌하면 미움이 생기고 커집니다. 더구나 왼뺨을 때리면 오른 뺨도 내밀라는 가르침엔 속수무책일 때가 많죠. 무식하면 용감하다고, 맹수 같은 용맹함 없이는 쉽게 행하지 못하는 게 용서하는 일입니다. 내가 용서를 했는데 상대가 거부하거나, 상대가 용서를 구하는데 내가 받아들이지 못하는 경우도 있어요. 어렸을 때 옆집 장독을 깨뜨려 난리가 났습니다. 엄마가 오시기 전에 해결해 보려고 두 손을 싹싹 빌었는데 “아를 어째 키웠냐” 며 놀라 달려온 엄마에게 심한 말을 퍼부었습니다. 집에 돌아온 내가 식식댑니다. “엄마는 그딴 소릴 듣고 왜 가만있어? 엄마한테 욕한 거 절대 용서 못해!” 그때 엄마가 성난 아들에게 타이른 말이 있습니다. “잘잘못은 하나님이 아신다. 은혜는 가슴에 새기고 미움은 냇물에 새겨라.” 밤베렐라 (bambeleiia)! 남아공 넬슨 만델라 대통령이 26년간 감옥생활을 하면서 매일 자신을 향해 외쳤던 말입니다. ‘never give up! 포기하지 마라. 주님이 희망이시다’ 만델라 대통령이 그 긴 세월을 감옥에 살면서 끝까지 희망을 지키려고 자신을 일깨운 말. 그만이 지닌 마법의 주문이 ‘밤베렐라’입니다. 만델라는 남아공에서 평등선거로 뽑힌 첫 대통령이지요. 아프리카민족회의 지도자로 반아파르트헤이트 운동을 전개하다가 투옥돼 그 긴 26년 수감생활을 견디고 나와 민족의 영웅이 되고, 세계인권운동의 상징이 되었습니다. 그의 위대함은 대통령이 되어 자신과 민족을 탄압한 자들을 용서한 점입니다. 진실화해위원회를 설치해 과거사를 용서로 청산하고, 흑백갈등이 없는 국가를 세우고자 평생을 헌신했지요. 그가 노벨평화상 수상자가 되던 날, 전 세계가 반겼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용서와 함께 짝을 이룬 단어가 ‘희망’입니다. 아름다운 사람은 끊임없이 희망을 전하는 사람입니다. 그중 온몸으로 희망을 말한 고 장영희 교수가 있지요. 그는 죽기까지 ‘희망이란 새 한 마리’ 어깨 위에 올리고 희망을 속삭였어요. 타고난 장애에 세 번의 암 투병 속에도 조선일보에 연재한 ‘영미시 산책’엔 늘 희망의 새가 날았습니다. ‘산을 넘고 보니 이 산이 아니네’ 할 때도 “진정한 용기는 다시 도전하는 것“이라며 마법의 주문을 걸곤 했습니다. ‘밤베렐라’. 당신은 용기가 필요하고 지칠 때 자신에게 힘을 주는 마법의 주문이 있나요? 내 인생에 힘이 된 한마디는 무엇인가요? 순례의 완성은 온 곳으로 잘 돌아가는 것이다 (소설가 이관순의 손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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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델라의 외침‘밤베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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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무늬를 찾아가는 인문학
- 한때 '인문학'이 유행이었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이에 대한 관심은 서점가, 강연장, 답사모임 같은 데를 찾아보아도 아직 식지 않은듯합니다. 강의를 나가보면 개념 자체를 잘 이해하지 못함을 느낄 수 있는데요 마치 철학을 어렵게 여기는 것과 비슷합니다. 국가 발전도 학문과 연결해 볼 수 있어요. 국가 초기단계에는 법학, 정치학이 중심이 되지만, 초기발전단계로 가면 경제, 사회, 신문방송 등으로 관심이 옮겨 가고, 좀 더 발전하면 철학, 심리학 등으로 축이 이동하게 됩니다. 그리고 성숙단계에는 고고학, 인류학 등이 발달하면서 제국을 꿈꾸지요. 중국, 일본, 프랑스, 이탈리아가 그랬으니까요. 인간은 어떤 흐름 속에 존재하고 그 흐름 속에 무늬를 그리며 삽니다. 자연과 나와의 관계에도 인문의 무늬를 그려요. 인문학은 인간이 자연과 세계와 어떤 관계를 가지고 어떤 무늬를 그리며 사는지를 연구합니다. 인문학하면 르네상스 휴머니즘을 떠올립니다. 신이 지배하던 사회에서 스스로 독립하려는 사상입니다. 신이 아닌 인간과의 관계를 통해 인간의 우월성을추구 하겠다는 것이지요. 모든 학(學)은 모방에서 시작합니다. 모방을 통해 계속 습득함이 학습인데, 학습이 학이 되는 순간 인문적 상상 · 통찰 · 창의력은 결핍되죠. 그래서 학이 아닌 활동으로 가야하고, 인문적 통찰로 나가야합니다. 인문적 통찰은 딱 보면 알아채는 힘이죠. 그 힘을 키우려면, 우리가 아닌 나로 가야하고, 대답하는 인재보다 질문하는 인재로 이끌어야 합니다. TIME 표지에 ‘아시아인은 생각할 줄 모른다’가 나온 적이 있습니다. 답은 정해져 있다 생각하고 이를 찾기에 골몰하는 삶을 지적한 거지요. 머리에 잔뜩 뭔가를 채우고 그대로 따라가려고 합니다. 머릿속의 상을 좇거나 보이는 것에 집착하면 생각이란 동력이 약화됩니다. 베케트의 ‘고도를 기다리며’는 연극사의 이정표와도 같은 작품입니다. 적막한 무대에 ‘고도’를 기다리는 정체모를 두 인물이 나오지요. 이렇다 할 줄거리도 없이 “결국 고도씨는 오늘밤에 못 오지만 내일 올 예정” 이란 황당한 결말로 관객들에게 충격을 주죠. 이 둘이 기다린 고도는 무엇일까. 종교적 구원자 언제 끝날지 모르는 종전 소식? 사람마다 다 다를 수 있습니다. 많은 사람이 작품의 난해함을 말하면서 최고의 작품으로 꼽는 건 인생의 비애 속에서도 잃지 않은 유머 때문입니다. 한 열광적인 독자가 그에게 말합니다. “전 일생 동안 선생의 열렬한 팬이었고 40년 전부터 선생님 책을 읽어왔지요” 베케트의 대답이 재미있습니다. “그 참 피곤하시겠소.” 인문학자들이 한국사회를 위기로 보는 건 선진사회로 가는 경계에 머물러서입니다. 선진 학습으로 양적 성장에 성공했으나, 새로운 방향으로 경제, 정치,교육의 돌파구를 마련 못해 지금의 불행을 겪는다고요. 한국사회의 발전은인문적 통찰로 질적 생존력을 높일 수 있느냐에 달렸다합니다. 이를 알고도 못나가는 상황이 안타까울 뿐이지요. 기업인만이 인문적 통찰에 힘씁니다. 그렇게 나가지 않으면 죽으니까요. 기업인이 인문학을 필요로 함은 고급스러워지려는 것이 아니라, 생존을 위해 틀과 방식을 혁신적으로 가져가기 위해서입니다. 인문적 창의성은 용기와도 관련 있어요. 변화의 경계에 선 모호함, 불안함을 견뎌야하니까요. 이를 잘 설명한 사람이 2500년 전 노자(老子)입니다. 우주만물에 대해 생각한 중국 최초의 철학자지요. 그가 찾은 우주의 진리를 도(道)라 하고, 우주만물이 이뤄지는 근본적 이치를 도(道)로 설명합니다. 노자는 인문적 개인이 자발적으로 모인 사회가 강하다고 했습니다 (소설가 이관순의 손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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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무늬를 찾아가는 인문학
- 한때 '인문학'이 유행이었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이에 대한 관심은 서점가, 강연장, 답사모임 같은 데를 찾아보아도 아직 식지 않은듯합니다. 강의를 나가보면 개념 자체를 잘 이해하지 못함을 느낄 수 있는데요 마치 철학을 어렵게 여기는 것과 비슷합니다. 국가 발전도 학문과 연결해 볼 수 있어요. 국가 초기단계에는 법학, 정치학이 중심이 되지만, 초기발전단계로 가면 경제, 사회, 신문방송 등으로 관심이 옮겨 가고, 좀 더 발전하면 철학, 심리학 등으로 축이 이동하게 됩니다. 그리고 성숙단계에는 고고학, 인류학 등이 발달하면서 제국을 꿈꾸지요. 중국, 일본, 프랑스, 이탈리아가 그랬으니까요. 인간은 어떤 흐름 속에 존재하고 그 흐름 속에 무늬를 그리며 삽니다. 자연과 나와의 관계에도 인문의 무늬를 그려요. 인문학은 인간이 자연과 세계와 어떤 관계를 가지고 어떤 무늬를 그리며 사는지를 연구합니다. 인문학하면 르네상스 휴머니즘을 떠올립니다. 신이 지배하던 사회에서 스스로 독립하려는 사상입니다. 신이 아닌 인간과의 관계를 통해 인간의 우월성을추구 하겠다는 것이지요. 모든 학(學)은 모방에서 시작합니다. 모방을 통해 계속 습득함이 학습인데, 학습이 학이 되는 순간 인문적 상상 · 통찰 · 창의력은 결핍되죠. 그래서 학이 아닌 활동으로 가야하고, 인문적 통찰로 나가야합니다. 인문적 통찰은 딱 보면 알아채는 힘이죠. 그 힘을 키우려면, 우리가 아닌 나로 가야하고, 대답하는 인재보다 질문하는 인재로 이끌어야 합니다. TIME 표지에 ‘아시아인은 생각할 줄 모른다’가 나온 적이 있습니다. 답은 정해져 있다 생각하고 이를 찾기에 골몰하는 삶을 지적한 거지요. 머리에 잔뜩 뭔가를 채우고 그대로 따라가려고 합니다. 머릿속의 상을 좇거나 보이는 것에 집착하면 생각이란 동력이 약화됩니다. 베케트의 ‘고도를 기다리며’는 연극사의 이정표와도 같은 작품입니다. 적막한 무대에 ‘고도’를 기다리는 정체모를 두 인물이 나오지요. 이렇다 할 줄거리도 없이 “결국 고도씨는 오늘밤에 못 오지만 내일 올 예정” 이란 황당한 결말로 관객들에게 충격을 주죠. 이 둘이 기다린 고도는 무엇일까. 종교적 구원자 언제 끝날지 모르는 종전 소식? 사람마다 다 다를 수 있습니다. 많은 사람이 작품의 난해함을 말하면서 최고의 작품으로 꼽는 건 인생의 비애 속에서도 잃지 않은 유머 때문입니다. 한 열광적인 독자가 그에게 말합니다. “전 일생 동안 선생의 열렬한 팬이었고 40년 전부터 선생님 책을 읽어왔지요” 베케트의 대답이 재미있습니다. “그 참 피곤하시겠소.” 인문학자들이 한국사회를 위기로 보는 건 선진사회로 가는 경계에 머물러서입니다. 선진 학습으로 양적 성장에 성공했으나, 새로운 방향으로 경제, 정치,교육의 돌파구를 마련 못해 지금의 불행을 겪는다고요. 한국사회의 발전은인문적 통찰로 질적 생존력을 높일 수 있느냐에 달렸다합니다. 이를 알고도 못나가는 상황이 안타까울 뿐이지요. 기업인만이 인문적 통찰에 힘씁니다. 그렇게 나가지 않으면 죽으니까요. 기업인이 인문학을 필요로 함은 고급스러워지려는 것이 아니라, 생존을 위해 틀과 방식을 혁신적으로 가져가기 위해서입니다. 인문적 창의성은 용기와도 관련 있어요. 변화의 경계에 선 모호함, 불안함을 견뎌야하니까요. 이를 잘 설명한 사람이 2500년 전 노자(老子)입니다. 우주만물에 대해 생각한 중국 최초의 철학자지요. 그가 찾은 우주의 진리를 도(道)라 하고, 우주만물이 이뤄지는 근본적 이치를 도(道)로 설명합니다. 노자는 인문적 개인이 자발적으로 모인 사회가 강하다고 했습니다 (소설가 이관순의 손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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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생에 가장 소중한 날
- 아버지 기일을 찾아 대전으로 내려가는 기차를 탔습니다. 창밖의 잿빛 세상을 보면서 저무는 해와 가당찮은 내 나이와, 헐렁해진 시간의 밀도 속을 헤집는 바람소릴 듣다가 뜬금없는 의문 하나를 건집니다. 그날 아버지가 만족하셨을까? 희수(77세)연이 열린 1992년 봄날, 아내를 앞서 보낸 아버지는 혼자 상을 받으셨지요. 자식들은 아버지께 기쁨이 되고자 많은 친구 분을 초대해 정성껏 모셨습니다. 모두 기꺼워하셨고 당신도 흡족하셨는지 직접 자손 소개도 하셨지요. 그런데 27년이 지난 지금 왜 그 생각이든 걸까? 물론 그때도 어머니가 그리웠었지만 아버지 심중에 이는 댓바람 소리는 듣지 못했으니까요. ‘부부해로’의 의미를 새롭게 깨닫습니다. 옆에서 배우자 잃는 모습들을 보면서 ‘짝’과 ‘외짝’이 얼마나 큰 행불복의 요소 인지를... ‘검은머리 파뿌리 되도록’ 이란 말의 참뜻이 심금에 와 닿습니다. 요즘 세태에서 ‘파뿌리’는 고전이 된 듯합니다. 그만큼 부부개념도 달라졌으니까요. 요즘은 생일이 대세입니다. “애가 무신 생일이노” 그런 소리 듣던 게 엊그젠데. 지금은 돌만 지나도 깨치는 게 ‘생일’인 듯합니다. 애들 생일이 더 요란하지요. ‘생파’라고 친구 초청하고, 선물 싸들고 오는 또래들을 보면 생일 문화만은 흥왕한 나라가 됐습니다. 올해도 새 달력을 걸기 전에 아무개 생일부터 기록합니다. 누구로부터 축하를 받는 것은 행복한 일입니다. 외로운 인생끼리 날을 정해 “오늘은 당신 날이야, 네가 세상의 주인공야” 하고 반겨주니, 때론 축복송이 눈물겹기도 하겠지요. 아버지 기일에 새롭게 눈뜬 ‘결혼기념일’. 최근 모임에서 후배가 결혼30주년 일이라며 양해를 구합니다. 그 말에 덥석 손을 잡고는 “야, 부인이 훌륭하시네. 30년을 데리고 살아주셨군.” 진반농반의 축하지만 말에 진심을 담았습니다. 앞으로 결혼 30년? 40년? 쉽지만 않아 보입니다. 예전엔 빠른 결혼에, 이혼은 어불성설이라 은혼식, 금혼식은 보통이고, 60주년 회혼식을 여는 어른도 많아 동네잔치가 됐었지요. 이제는 ‘전설 따라 3천리’ 에나 나올 법한 얘기입니다. 늦은 나이에 어렵게 결혼하고도 이혼은 그리도 쉽게 잘 하는지, 경력될 일도 아닌데 어른들마저 황혼에, 연금이혼까지 사전에도 없는 말이 나돕니다. 이혼에 대해서는 자식에조차 묻지도 말하지도 말라는 금기영역이 돼버렸습니다. 이런 세태에 정말 축하 받을 사람은 하나씩 나이테를 늘려가는 부부입니다. 거친 세파에도 꿋꿋이 부부의 자리를 지키는 아내와 남편, 엄마와 아빠가 있을 때, 가정은 보금자리로 탄생합니다. 나 홀로 팔순, 구순잔치가 무슨 큰 기쁨일까. 그보다 살아서 부부가 맞는 결혼 30주년이 소중하고, 40주년이면 하늘이 내린 복으로 반길 만한 일입니다. 개인잔치보다 해로잔치가 더 성대했으면 합니다. 연말에 큰 기업의 창업주와 만난 자리에서 말했지요. 생일도 좋지만 회사가 결혼기념일을 챙기는 문화를 만들면 좋겠다고. 석혼식(10년), 은혼식(25년), 진주혼식(30년) 등, 어렵게 결혼하고 쉽게 도장 찍는 시류에, 가정의 연륜을 소중히 가꾸는 아름다운 ‘보금자리인증’ 하나 만들면 좋지 않을까. (소설가 이관순의 손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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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생에 가장 소중한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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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패도 성공처럼 해요
- 강단에 설 때마다 즐겨했던 말이 ‘중용 23장’입니다. “작은 일에도 최선을 다하면 정성스럽게 된다. 정성스럽게 되면 겉이 변하게 되고, 겉으로 드러나면 밝아져 남을 감동시키고, 남을 감동시키면 바뀌어 진다. 오직 지극정성을 다하는 사람만이 나와 세상을 변하게 할 수 있다.” 영화 ‘역린’에서 정조는 ‘무엇이든 원하면 정성을 다하라 그리하면 이뤄진다’고 했지요. 소설 연금술사도 ‘네가 간절히 원하면 우주가 도와준다’로 첫 문장을 썼고, 카르마(業) 또한 강렬하게 생각하는 것은 현실로 나타난다고 가르칩니다. 개그맨 김병만은 스스로를 실패의 달인이라고 합니다. 그는 개그맨 시험에 7번 낙방하고 백제대 3번, 서울예전 6번을 다 떨어졌습니다. 한 때는 인생을 포기하려고도 했고, 아버지에게 “왜 이렇게 작게 낳았느냐?“고 앙탈도 부렸습니다. 그가 어둠의 터널에서 나와 얻은 결론이 “가늘고 길게 가자, 어떤 단역도 주저말고 소명처럼 받들자, 절대 쉬지 말자.”입니다. 이후로 정성 그 하나만으로 버텨내 아무리 힘들고 고통스러워도 좌절은 할망정 포기는 없었어요. 긴 시간이 흐른 뒤 아버지가 주신 작은 키가 개그맨으로 성공시킨 요인임을 고백합니다. 고뇌 없는 성장이 가능할까요? 삶의 변화나 향상도 어렵습니다. 에머슨은 ‘고뇌는 인생을 사는데 필요불가결한 유익한 존재’라고 말했어요. 고뇌 없이,정성 없이 가식의 탈을 쓰면 불행한 사회인이 됩니다. 나이 50줄에 들면 슬슬 눈치보기를 시작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기량은 8인데 10인 척하며 일하는 사람이 늘어난다 해요. 부족한 면은 몸과 눈치로 아부로 메우면서 상사는 상사대로, 부하는 부하대로 나름의 가면을 씁니다. 살아남고자,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고자 양보와 배려라는 명목아래 얼굴을 탈속에 감추지요. 거기에 익숙해지면 임시방편으로 쓴 탈이 내 얼굴로 굳어져 내가 아는 나와 남이 아는 내가 헷갈리게 됩니다. 말하지 않아도 회사는 나의 맨 얼굴을 압니다. 빤히 알면서 “당신은 해낼 수 있다”고 부추기죠. 진짜 조직이 겁내는 사람은 탈을 벗고 덤비는 사람입니다. 스스로 변화를 위해 힘쓰는 사람이죠. 조로사회가 될수록 가면을 벗고 나답게 살 방법을 찾아야 해요. 슈바이처는 “난 인생을 보는 눈은 매우 허무적이나 어떻게 살아가야 하느냐 하는 점에서는 매우 의욕적“ 이라고 했습니다. 결점이 없는 사람은 계곡 없는 산과 같아요. 한가롭게 노는 구름은 비를 만들지 못합니다. 실패했다고 쫄지 말아요. 훗날에 그것이 성공의 디딤돌이었음을 알게 됩니다. 성공이 하늘에서 뚝 떨어지는 세상은 없으니까요. 개그맨 김병만은 결점을 인정하고 그 대신 온 정성을 다해 실패도 성공처럼 한 표본입니다. 그래야 세상은 아름답고 싸워볼 가치가 있는 곳이 되지 않을까요? ‘죽어갈지언정 패배하지 않는다’ 고 한 헤밍웨이(노인과 바다)처럼. 글 이관순(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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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패도 성공처럼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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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을 '반짝반짝'이며 살자
- 11월은 참 애매한 달입니다. 가을도 겨울도 아닌 회색지대 하늘에 뜬 낮달처럼 온기가 없습니다. 가을비 그친 아차산에 올랐다가 수년 전의 기억에 잠겨 한참을 머물렀습니다. 그해 가을, 주왕산 일대로 형제여행을 다녀왔습니다. 3형제 내외가 25년을 함께 한 즐거움인데 그해는 큰 형님의 자리가 비었었지요. 가장 건강했던 분이 세상을 떠나신 겁니다. 늘 계획을 세우고 먹거리와 잠자리를 준비해 주셨지요. 그러면서 여행은 한 차로 해야 맛인데, 카니발 한 대 있으면 좋겠다고 아쉬워했습니다. 이제는 카니발 리무진도 마련했는데 타는 사람이 5명뿐 입니다. 한 사람의 빈자리가 이렇게 크다는 것이 여행 내내 생각에서 떠나지 않았지요. 한 치 앞을 못 보는 게 우리네 인생임을 실감합니다. 900km를 운행하면서 많은 얘기를 나눴지요. 아무래도 빈자리의 주인공인 큰 형님과의 추억이 많았습니다. 가을 벌판 위로 기억들을 떠올리면서 서로에게 묻습니다. 우리 다섯이 언제까지 이렇게 여행을 다닐 수 있을까? 축대에서 돌 하나 빠지니 갑자기 전체가 위태롭게 느껴진 겁니다. 그래서인지 그해 가을 산하가 유난히 눈부셨습니다. 주로 꺼낸 주제는 이 세 가지에 있는 듯합니다. “해야 했는데” “했어야만했는데” “할 수 있었는데...” 모 시인은 인생에서 가장 슬픈 것을 이 세 가지로 꼽았지만, 내게는 참회록처럼 다가왔습니다. 가을은 소란스런 계절이 아닙니다. 단풍 찾아 요란하게 몰려다니는 그러한 행락철만은 아닌 듯합니다. 우리 몸에 눌어붙은 삶의 얼룩을 닦으면서 내면 깊이 침잠해야 하는 절기입니다. 안 쓰던 일기라도 써야할 그런 나날입니다. 오색으로 물든 가을 풍경에서 경건한 생명들의 아름다움이 빛납니다. 단풍진 나뭇잎을 털어내며 겨울나기를 준비하는 나무들, 생명들이 사라진 빈 들판, 모진 비바람을 견뎌내고 가지에 주렁주렁 매달렸던 과일들의 소회는 무엇일까. 그러면서 떠오르는 것. 내 인생도 가을이 짙었는데 어디에다 낫을 댈 수 있으려나... 스산한 바람이 나이만큼 차오릅니다. 쉬운 것이 하나 없는 우리들 삶입니다. 물질이 곤궁한 것만큼 견디기 어려운 일도 없지요. 광야에 홀로 선 나무처럼 느껴지는 외로움도 무척 우리를 힘들게 합니다. 더 힘든 일은 사랑하는 사람의 이름을 불러도 대답이 없을 때입니다. 옆에 있다면 온갖 걸 다 해줄 것 같은데 이 세상에 없을 때 그 열패감은, 밑을 모를 만큼 깊고 광대하겠죠. 오늘이 그를 사랑할 마지막 날이 될 수도 있고, 지금이 그와 나눌 대화의 끝일 수도 있어요. 이런저런 핑계로 내일에다 미루지 마십시오. 내일은 상상 속에서나 있는 것. 아무도 내일을 살아본 사람은 없으니까요. 말하기는 쉬워도 내일을 기약하는 건 부질없는 철부지 소리이거나 비겁한 짓입니다. 우리는 내일을 기약할 수 없는 인생입니다. 아껴야 할 사람이 옆에 있다면 오늘 최선을 다 해 사랑하세요. 그것이 부부이든, 가족이든, 친구일 수도 있겠지요. 시간은 후진도 모르고 유예도 없는 직진 형입니다. 오늘이 반짝반짝 빛나게 살아야 할 이유입니다. 미움, 원망의 자리에 위로, 격려, 사랑을 채워서요. 지금 내 손에 쥔 시간만이 확실한 내 것이니까요. 글 이관순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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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을 '반짝반짝'이며 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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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리가 사라진 세상
- 짓궂은 질문을 해봅니다. ‘사람’과 ‘인간’은 같은 거야? 사전의 설명은 비슷하지만, 아무래도 “저 인간!” 하면 부정적 이미지가 앞서죠. “저 사람 인품이 좋아”로는 써도 “저 인간 인품이 좋다”고 말하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세상에 사람 같지 않은 인간이 많다보니 용례까지 헷갈립니다. 초등학교 국어 교과서의 ‘의좋은 형제’를 생각하면 지금도 마음이 훈훈합니다. 우애 좋은 형제가 가을 수확을 마치고 들판에 볏단으로 노적가리를 만듭니다. 형이 보니 아우네 것이 적어 보입니다. 그날 밤, 어려운 아우 형편을 안 형이 자신의 볏단을 옮겨 놓고, 다음날 밤은 식솔 많은 형을 생각한 아우가 반대로 볏단을 옮기지요. 노적가리가 줄지 않자 형제 다 고개를 갸우뚱합니다. 마침내 볏단을 옮기던 형제가 달빛 아래 마주치면서 얘기는 끝나죠. 그때의 감동으로 습자시간이면 붓글씨를 ‘노적가리 풍년일세’만 썼던 기억이 납니다. 가난해도 마음은 풍년인 사람들이 살던 시절이 있었지요. 엊그제 복권 당첨금이 살인흉기가 된 사건이 났습니다. 우애 좋은 형제가 복권 당첨으로 수억 원의 당첨금을 받아 배분까지는 성공했는데, 그 돈으로 사업을 했던 형이 망하며 사단이 납니다. 돈을 더 요구하는 형과 보증을 선 동생 간에 감정이 충돌하다 동생을 살해하는 일이 벌진 겁니다. 황금만큼 요괴스러운 것은 없습니다. 돈 앞에 장사가 없다지요. 일본 속담에 ‘담배꽁초와 돈은 쌓일수록 냄새가 난다’고 했습니다. 돈이 사람을 부패하게 만든다는 뜻이겠지요. 사는 것은 전보다 풍족해도 인성은 강퍅해졌습니다. 돈을 둘러싼 이기적 욕망이 칼끝처럼 첨예하게 부딪치는 세상입니다. 개신교의 큰 어른이셨던 목사님이 생전에 우리교회에 오셔서 당신이 붓으로 큼직하게 쓴 ‘의리를 지키자’란 글귀를 강단에 내리고 설교를 하신 적이 있습니다. 세상이 오죽하면 의리를 부탁했을까요. 사람과 사람,관계 사이에 의리가 사라졌다고 탄식하는 소리가 높아만 집니다. 제목을 잊은 영화입니다. 세 친구가 딱 한 번 은행을 털어 깨끗하게 살자며 치밀한 준비를 합니다. 그들의 거사는 성공했고 무사히 안전지대에 도착하자 돈다발을 놓고 환호합니다. 한 친구가 축배를 들자며 나갔다가 술에 독을 타서 옵니다. 욕심이 생긴 거죠. 태연하게 돌아온 친구가 술잔을 건네고 축배를 외칠 때, 팡팡! 술 사온 친구가 고꾸라지고 남은 둘은 낄낄댑니다. 뛰는 놈 위에 나는 놈이 있거든요. 둘은 더 큰소리로 건배를 외치지만 독배를 든 이들도 쓰러집니다. ‘사람에게 의리 빼면 시체’ 라고 말하던 세상이 있었지요. 의리란 뜻은 ‘사람관계에서 마땅히 지켜야 할 도리’로, 여기엔 사람이 갖춰야 할 덕목이다 녹아져 있죠. 가난은 견뎌내기 어려운 것임을 경험한 세대가 모이면 그래도 그때가 좋았다고 반추합니다. 의리가 사라진 곳에 먹잇감을 놓고 으르렁 대는 동물 세계가 어른댑니다. 사람 사이 흐르는 체온 대신 물질을 향한 충혈 된 눈빛만 섬뜩하니 사람은 없고 인간만 남아 보입니다. 다시 사전을 봅니다. ‘인간’이란 단어의 기본설명 뒤로 ‘사람의 모습은 하고 있되 사람답지 못하다는 뜻.’을 추가하고 예문도 달았군요. “저 인간이 한 짓을 생각하면 돌아버리겠어.” 너무도 흔히 듣는 슬픈 말이 됐습니다. 글 이관순(소설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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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리가 사라진 세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