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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얼마나 오랜 세월을 살아야
    해가 바뀌고 정이월이 다 지나는 데도 사람들은 신명을 내지 못합니다. 말만 새해, 무늬만 새해지 50년 전, 30년 전, 20세기에 경험한 그 모습이 오늘도 그대로 우리사회에 재연되고 있어서죠, 정권을 잡았다하면 곧바로 타도 대상이 되는 것도 판박이입니다. 갈등과 분열을 치유와 통합으로 외쳤던 거리는 지금도 같은 외침으로 넘치고. 신물 날 만큼 듣던 혁신, 개혁이란 소리는 21세기 지금에도 또 듣고 있지요. 배곯아 죽는 사람은 지금도 여전하고, 수십 년을 이어온 북한 핵문제는 아직도 머리에 인 채 문제 주변만 뱅뱅 돌뿐입니다. 신년 벽두부터 들리는 잿빛 소식들. 얼마나 오랜 세월을 더 견뎌내야 사람 살 만한 세상이 올까. 얼마나 참고 또 인내하면 사람들 얼굴에서 웃음꽃이 필까. 우울한 시간을 달래다 FM방송에서 귀가 솔깃한 노래 한 곡이 흘러나옵니다. 밥 딜런의 ‘바람 속에 답이 있다’죠. 노랫말이 한편의 훌륭한 시입니다. 밥 딜런은 단순한 가수가 아니지요. 노벨상 사상 115년 만에 세계적인 작가와 시인들을 누르고 노벨문학상(2016)을 수상한 최초의 뮤지션입니다. 평론가들은 그의 시가 셰익스피어나 TS 엘리엇에 견줄만하다고 평했지요. 딜런은 레코드 판매 1억장을 돌파하면서 포크음악의 황제 칭호를 받습니다. 특유의 철학적 가사와 진솔한 매시지로 대중음악과 문학의 경계를 허물었다는 평가도 받습니다. 그 공로를 인정받아 그레미 평생공로상, 퓰리처특별상, 미국이 민간에게 주는 최고의 자유훈장을 받는 등 세기의 음유시인으로 사랑을 받고 있습니다. 애플 창업자 스티브 잡스는 애플 주총에서 주주들에게 밥 딜런의 노래 ‘the times they are a change(세상이 바뀌고 있네)‘를 낭송할 정도로 딜런을 좋아했지요. 딜런의 시에는 사람이지만 사람으로 불리지 못한 흑인, 지유를 잃은 사람들, 전쟁 속에서 희생되는 사람들을 위해 ‘사람답게 살 권리’를 위해 싸우는 저항의 소리를 내면서도 늘 따뜻한 마음을 담았습니다. 그가 다른 유명 시인들과 다른 건 그의 시는 책 속에 있지 않고, 우리 삶 속에 있다는 것이지요. ‘얼마나 더 오래 살아야 세상은...’ 딜런은 사람들의 기원을 노래로 대신해 불러주었지만 세상은 60년이 된 지금도 변한 것이 없습니다. 바람 속에 답이 있다. 밥 딜런 얼마나 많은 길을 걷고 나서야 한사람의 인간이 될 수 있을까 얼마나 많은 바다 위를 날아가야 흰 갈매기는 사막에서 잠들 수 있을까 얼마나 더 많이 머리 위를 날아가야 포탄은 지상에서 사라질 수 있을까 친구여, 그 대답은 바람만이 알고 있지 바람만이 알고 있지. 얼마나 고개를 쳐들어야 사람은 하늘을 볼 수 있을까 얼마나 많은 귀를 가져야 타인들의 울음소리를 들을 수 있을까 얼마나 더 많은 사람이 죽어야 너무 많이 죽었음을 깨닫게 될까 친구여, 그 대답은 바람만이 알고 있지 바람만이 알고 있지. 얼마나 오래 그 자리에 서 있어야 산은 바다가 될까 얼마나 더 오래 살아야 사람들은 자유로워질까 얼마나 더 고개를 돌리고 있어야 안 보이는 척 할 수 있을까 친구여, 그 대답은 바람만이 알고 있지 (소설가 이관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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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7-15
  • 그리움이 찾아 오르는 고개
    우리나라는 산이 많아 고개도 많고 얽힌 사연도 많습니다. 이별이 되고, 한이 되고, 통곡이었던 고개들. 지금은 터널이 뚫리고 찻길이 열려 전설이 되었지요. 그러나 진짜 고개보다 더 힘들었던 고개는 따로 있습니다. 요즘 TV에서 가장 핫한 ‘미스터 트롯’을 보다가 서럽게 넘던 마음의 고개들을 찾아냅니다. 열세 살, 동원이가 불러 마스터의 올 하트에 눈물샘까지 자극했던 ‘보릿고개’. "아이야 뛰지 마라 배 꺼진다"로 시작되는 '보릿고개'는 마음 시린 옛 시절을 호출합니다. 곡식이 떨어진 봄부터 보리수확 때까지 주린 배를 초근목피로 달래고, 그마저 없으면 물 한 바가지로 배 채우던 시절. 오죽했으면 한참 뛰놀 아이에게 뛰놀지 못하게 막았을까. 가수 진성은 "동원이만 할 때부터 노래하며 배고픈 설움을 겪었는데 나도 몰래 옛 생각에 눈물을 보였다”고 말합니다. 그 때를 모르는 세대들은 배곯는 것이 무언지 모르죠. 문경새재보다 더 힘들게 숨이 차 넘던 보릿고개는 ‘단장의 미아리고개’와는 또 다른 한의 고개였습니다. ‘바위고개’도 마음 아픈 고개입니다. 부드러운 멜로디와 정감어린 가사로 한때 최고의 인기곡이었지만, 소절마다 님의 그리움이 절절히 묻어납니다. 이 노래 악보에는 작사자가 안 보여 미상처럼 보이지만, 실은 월북 연극인 이서향이 쓴 시입니다. 결혼 5년 만에 남편 월북으로 청상이 된 부인(백병원家 딸)이 죽기 전에 한 맺힌 사연을 풀어놓았지요. 바위고개는 남편이 중2때 지은 시를 친구(작곡가 이흥렬)가 받아 작곡했다고 합니다. 일제하의 설움을 고개로 표현해 민족의 심금을 울린 애창곡이 됐으나, 월북자를 작사자로 밝히기는 어려웠나 봅니다. 그러나 세월이 훌쩍 흐른 뒤, 바위고개는 아내의 운명을 예견한 노래가 되고 말았습니다. 평생을 기다림과 그리움으로 하루에도 수없이 마음 속 고개를 넘었을 아내라는 여자. 실존하지 않는다는 바위고개는 이승을 떠나면서 안고 갔을 아내의 마음에 있었습니다. ?바위고개 언덕을 혼자 넘자니, 예님이 그리워 눈물납니다. 고개위에 숨어서 기다리던 임 그리워 그리워 눈물 납니다. 바위고개 피인 꽃 진달래꽃은, 우리 임이 즐겨즐겨 꺾어주던 꽃, 임은 가고 없어도 잘도 피었네. 임은 가고 없어도 잘도 피었네.? ‘고모령’ 도 슬픈 고개였지요. 노래 ‘비 나리는 고모령’으로 잘 알려진 고개의 주인공입니다. 대구에 있었다는 고모령은 영원한 사모곡의 상징입니다. 징병을 떠나는 젊은이를 가득 태운 열차가 고모령을 힘들게 오를 때마다 가슴 시린 사연이 쌓였지요. 당시 기관차 성능으로는 경사 높은 고모령을 단 번에 넘을 수가 없었습니다. 열차가 헐떡이며 고개를 오를 때, 사방에서 몰려온 어머니들로 아우성입니다. 아들과 눈 한번 더 맞추려고 부르짖던, 이별의 아픔이 서린 고개. 현인은 이를 ‘비 내리는 고모령’으로 노래했습니다. ‘스무고개’는 어린 시절 추억의 놀이입니다. 질문은 스무 번까지 가능합니다. “남자야?” “응” “키가 커?” “아니” 이렇게 질문으로 힌트를 얻으면서 답을 찾는, 지금은 그리움의 고개가 됐지요. 스무고개 원리는 요즘 심리치료에 쓰인답니다. 아이들의 ‘왜요?’ 란 질문이 그런 것들이죠. “공룡이 다 어디 갔어요?” “죽었지” “왜 죽어요?” “화석이 지구랑 꽝하고 부딪쳐서.” “화석이 왜 꽝 해요?” 이렇게 ‘왜요’가 거듭되다보면 천체 물리학 원리에도 접근이 가능하답니다. 세상이 바뀌니, 힘들게 넘던 고개들 기억은 호롱불같이 가물대지만, 그렇다고 마음에 고개까지 사라지진 않았습니다. 사람들 마음에는 오늘도 여전히 그리움 으로 찾아 오르는 고개들을 다 품고 사니까요. (소설가 이관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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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7-05
  • 교황이 남긴 행복 10계명
    세상은 점점 스마트해 지는데 사람들은 왜 지쳐만 갈까. 저마다 열심히 산다고 사는데 삶은 왜 이리 핍폐해지고 힘들기만 할까. 모두가 허기진 가슴을 달래줄 그 무엇을 간절히 찾습니다. 2014년 여름, 이 땅을 위로한 이는 프란시스코 교황입니다. 온 나라가 세월호 에 침몰됐을 때, 그 분이 오셨지요. 교황은 누구를 비판하지 않고 모두의 등을 토닥여 주었습니다. 어둡고 소외된 곳을 찾아 사랑을 헌사할 때마다 우리들 마음은 뜨거웠고, 가장 낮은 곳을 보듬어 줄 때면 희망의 손길을 느꼈지요. 음성 꽃동네에서는 더 오래 그들의 얼굴을 어루만지며 눈을 맞춥니다. 두개골이 움푹 파이고 목뼈에서 꼬리뼈까지 굳어 작은 움직임도 버거운 중증장애인이라 불린 사람들이죠. 교황 앞에서 한없는 기쁨을 감추지 못했던 그들. 하지만 더 기뻐한 사람은 교황이었습니다. 교황은 이념과 종교, 빈부, 지역을 넘어 만인에게 사랑과 희망의 100시간을 선물했습니다. 명동성당에서는 위안부 할머니들을 위로하고 광화문광장에서는 순교자 124명을 복자로 선포하고, 해미읍성에선 아시아청년대회 미사를 집전하면서 ‘잠들지 말고 깨어서 희망과 덕으로 무장하라’고 권했지요. 78세 고령에도 쉴 틈 없이 소외된 이웃과 만났습니다. 상처를 어루만져주고 고통 받는 이들에겐 서슴없이 다가가 꼭 안아주고, 아기들만 만나면 좋아하는 특유의 미소에 사람들은 행복해했습니다. 이 시대의 ‘초강력 행복 바이러스 유포자’란 말이 잘 어울린 분이었지요. 프란시스코 교황이 이렇게 존경받은 이유는 교황이란 자리에서 내려와 가장 낮은 곳에 머물렀기 때문입니다. 늘 자신을 하느님의 ‘종’이라 불렀고, 종 이외 다른 건 거추장스런 형식이라고 했어요. 한 신문은 그가 떠나는 날 기사제목을 ‘굿바이 파파.. 청년에 희망주고 한국에 평화를 밝히다’로 달았지요. 교황은 “아이와 식탁에 앉아 있을 땐 TV를 끄고, 함께 그림을 그리고 책을 읽는 시간을 가지라, 자신과 다른 의견이나 태도를 받아들이고 타인의 삶을 인정하는 게 행복의 첫걸음”이라고 권했습니다. 또 “청년들에겐 최소한 먹을거리를 집에 가져갈 만큼의 자존심은 줘야한다”는 ‘행복10계명’도 주었어요. -다른 사람의 삶을 인정하라. - 관대해져라. - 겸손하고 느릿한 삶을 살아라. - 식사 때 TV를 끄고 대화하라. - 일요일은 가족과 함께 지내라. - 청년에게 일자리를 만들어줘라. - 자연을 사랑하고 존중하라. - 부정적인 태도를 버려라. - 자신의 신념과 종교를 강요치 말라. - 평화를 위해 노력하라. 교황은 질풍노도 같았던 자신의 과거도 고백했어요. “젊었을 때는 모든 것을 밀어내려고만 했는데, 성인이 돼서는 흐르는 강물처럼 순해졌고. 나이 들어 보니 삶은 고요한 물 같은 것임을 알게 되었다”며 겸손하고 친절하게 여유 있는 삶을 살아보라고 했지요. 시복식이 있던 날, 강천석 칼럼은 이 나라에 교황이 몰고 온 바람을 이렇게 꼭 찍어 말했습니다. “프란치스코 바람은 연꽃 만나러가는 바람처럼 더위에 지친 8월의 이파리들을 흔들어주는 그런 바람”이라고. 우리가 얼마나 광야 같은 세상에서 사람에 주리고 위로에 목말라 하는지, 모처럼 사람을 보고 행복해 했던 6년 전 그때가 생각납니다. (소설가 이관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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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7-01
  • 잘 늙고, 잘 죽는 일
    한 동네에서 30년쯤 살면 동네 사람과 만남은 함께 늙어간다는 것을 확인하는 자리입니다. 팔팔했던 젊음이 다들 주름진 얼굴로 바뀌었습니다. “얼굴이 좋아지셨네요?” 암을 이겨낸 분과 인사를 나누지만 마른 몸, 굽은 허리, 눈빛에서 연민을 느낍니다. 아파트 단지가 생기면서 후문 옆에 과일가게를 연 박 씨는 지금도 그 자리를 지키고, 시장입구에 생선 파는 아줌마도 여전히 생선을 만집니다. 한 번 선택이 평생에 작용한다는 말을 실감케 합니다. 꿈이야 많았겠지만, 어어 하는 새 세월이 흘렀겠지요. “가을볕이 좋아 잠깐 졸았는데 백발이 되었네.”라는 시구가 빠른 세월을 절창합니다. 그래서 후회 없는 인생을 살려면 다섯 가지 계획을 잘 세우라고 합니다. 중국 송나라 때 주신중이란 학자가 ‘인생오계론(人生五計論)’을 설파했지요. 이 다섯 가지를 바르게 세워 잘 실천하면 실패 않는 삶을 산다고 합니다. 첫째가 ‘생계(生計)’입니다. 난 무슨 일을 하여 어떻게 먹고 살 것인가? 직업에 관한 계획과 준비를 말합니다. 첫 업이 평생의 업이 되기 쉬우니까요. 그때보다 평균수명이 40년은 길어졌으니 생계의 중요성은 더 커질 수밖에요. 설령 적성을 살려 일할 곳이 마땅치 않더라도 쉬 포기하지 말라합니다. 둘째는 ‘신계(身計)’입니다. 몸과 마음을 강건하게 하라는 뜻이겠지요. 신외무물이란 말처럼 내 몸보다 소중한 것은 없습니다. 재물은 있다가 없고 또 채워지지만, 잃은 건강은 되찾기 어렵습니다. 요즘은 이 말이 어떻게 ‘처신’ 하며 살 것인가로 해석됩니다. 처세가 바르지 않으면 힘써 쌓은 명예까지 다 무너집니다. 끌끌하신 분들이 검찰 포토라인에 서는 것을 많이 보았으니까요. 셋째는 가계(家計). 가정을 어떻게 꾸려나갈 것인가를 묻습니다. 부부관계, 부모와 자식, 형제 관계를 이르죠. 가정은 마음의 풀을 뽑는 곳입니다. 사랑과 신뢰를 바탕으로 서로의 마음에 잡초가 자라지 못하게 돕는 곳입니다. 가정의 중요성은 거듭 말해도 부족함이 없겠죠. 사회의 마지막 안전판이니까요. 넷째는 노계(老計)죠. 어떻게 늙어 갈 것인가? 참 어려운 고난도 문제입니다. “참 곱게 늙으셨어요.” “예쁜 얼굴이 왜 저리 됐지?” 늙음을 두고 듣는 말이죠. 오죽하면 앙드레 지드가 “인생사에서 가장 어려운 건 아름답게 늙는 것‘이라고 했을까요. 삶이 얼굴에 나타난다는 말은 허투루 나온 말이 아닙니다. 세상을 편안하게 보고, 모든 것을 받아들이며, 이해하고 배려함이 나의 늙음을 아름답게 해줍니다. 끝으로 사계(死計)를 통해 어떻게 죽음을 준비할까를 묻습니다. 죽음은 모든 것의 끝이 아니라 새로운 세계로 들어가는 입구입니다. ‘죽음학’이 새롭게 조명되는 이유지요. 종교가 말하는 생명의 부활, 윤회, 내세도 뚜렷한 사생관 위에 서 있습니다. 감사하는 삶, 봉사하는 삶, 겸손한 삶이 편안한 사계의 충분조건입니다. 월 초에, 아내 병수발로 2년 가깝게 두문불출한 선배가 모임에 나왔습니다. 모두가 걱정했는데 빗나간 예상이었지요. 몸집은 빠졌지만 표정도 밝고 여간 편안해 보이지 않았습니다. 잘 웃던 모습도 여전했으니까요. 수발을 드는 건지 받는 건지 오해받겠다고 하니까 말을 받습니다. “순간순간이 아쉽지. 더 잘해주지 못해. 저렇게라도 내 옆에 오래오래 있어주면 좋겠어. 그래서 지금이 행복해.” 그 편안한 얼굴에서 나오는 말이 신선처럼 들립니다. *글 이관순(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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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6-24
  • 황금을 돌 같이 보라고?
    ‘황금을 보기를 돌같이 하라’ 이르신 이는 최영 장군입니다. 그 한 마디가 최영의 이미지를 각인시켜 놓았지요. 어느 정도 인격을 닦아야 황금을 돌 같이 볼 수 있을까? 의문이 들면서도 한때는 이 만한 카타르시스도 없다고 생각했었지요. 가난했던 학창시절, 이를 금과옥조로 삼아 스스로를 위안하기도 했습니다. “돈이냐 젊음이냐 이것이 문제로다!“ ”야! 없다가도 생기는 게 돈 아냐?“ 이렇게 친구와 맞장구치면서 말이죠. 그로부터 반세기가 지난 요즘의 학생들에게 최영의 말을 빌려 돈에 대한 생각을 물으니 한 친구가 눈을 동그랗게 뜨네요. “예? 말도 안 돼. 황금을 어떻게 돌과 비교해요.“ 아이들이 한바탕 깔깔 대며 ‘엄지 척’ 합니다. ”돈 그거 없으면 청춘 비참해져요.“ 수렵시대와 농경시대에는 돈타령이 지금 같진 않았겠지만, 산업시대를 돌면서 돈의 위용은 갈수록 진가를 발휘하고 있습니다. ‘돈은 알라딘의 등불’ 이란 말도 있어요. 무슨 소원이고 다 이루어 주는 마법의 등잔처럼 돈이면 무엇이든 다 할 수 있다는 뜻이겠죠. 그래서 ‘돈은 모든 사람을 엎드리게 하는 유일한 권력.’이란 말도 나왔습니다. 머리는 빈 깡통이면서 지식을 탐하는 부자 귀신이 있었답니다. 그가 당대의 석학인 가난한 선비를 찾아가 지식을 팔라고 간청합니다. “한 오천 냥이면?” 선비가 들은 척도 안합니다. “만 냥까지 쳐드립죠. 만냥 큰돈입니다” 선비의 얼굴에는 미동도 없습니다. 한참을 쩝쩝거리던 귀신이 통 큰 배팅을 합니다. “십만 냥! 어떠십니까?” 그러자 선비는 미련 없이 고개를 끄덕입니다. 계약서를 쓰기 무섭게 귀신이 궁금함을 못 참고 묻지요. “아무리 10만냥이 크기로서니 그래도 그렇지 팔 생각을 하십니까?“ 눈을 감고 있던 선비가 빙긋이 웃습니다. 그리고 “그 돈이면 귀신도 살 수 있다네.” 돈의 위력을 한마디로 압축해 보인 얘기입니다. 그러나 돈을 쓰는 재미보다 버는 즐거움에 빠진 사람도 더러 있습니다. GH 노만이 쓴 ‘크리스의 얼굴’ 이라는 작품에 이런 이야기가 나오죠. 한 친구가 죽기 살기로 억척스레 돈만 버는 부자를 향해 비아냥거립니다. “그렇게 돈을 벌면 뭘 하나. 아들이 자네가 버는 이상으로 방탕하게 낭비할 텐데. 허망한 일 아닌가?“ 그러자 부자가 너털웃음을 짓습니다. ”모르는 소리 말게. 제 놈이 아무리 돈을 펑펑 쓰고 놀아본들 애비의 돈 버는 즐거움에 비할 텐가?“ 또 이런 사람도 있지요. 일생을 성실히 노력해서 거부가 된 금융업자가 임종이 가까워지는 모양입니다. 이 부자에겐 불행히도 자식이 없었지요. 형제들이 저 많은 유산을 어떻게 처리할지 정해 달라고 은근히 보챕니다. 형님 정신이 이만하실 때 말씀 하셔야 합니다.” 형제의 채근을 받던 금융 거부가 그들을 돌아보며 빙그레 웃습니다. “알아서 처리하게 난 관심이 없네. 내가 일생 동안 즐길 대로 즐기고 남은 찌꺼기에 불과한 거 아닌가.“ 참 대답이 쿨 합니다. 돈을 버는 재미가 귀하고 즐거웠지 번 돈은 한낱 즐거움이 타고난 재에 불과하다는 그 인식이 놀라울 따름입니다. 돈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필요한 기본 요소입니다. 그렇지만 돈에 대한 가치관을 어디에 두고 있느냐에 따라 물질에 대한 인식은 크게 달라질 수 있습니다. 그래서 ‘황금을 돌같이 보라’는 말은 돈이란 신(神) 앞에 쉽게 무릎 꿇는,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교훈을 안깁니다. *글 이관순(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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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6-17
  • 절제하는 삶을 위하여
    괴테는 '진정한 행복은 절제에서 온다' 했고, 동양선비들도 인간의 덕목중 절제만 한 것이 없다고 했습니다. 절제는 한 마디로 자신의 욕구와 행위를 제어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가슴은 알아도 실천에서 어려움을 겪지요. 누구나 경험했을 일입니다. “새해는 꼭 해야지.” 다이어트, 금주, 금연 등 야심찬 결단을 하지만 얼마 안가 흐지부지 되죠. 습관 된 행동을 멈추고 나쁜 버릇을 고치는 일은 왜 늘 힘들까... 모순 속에 길을 찾는 게 우리네 삶입니다. 습관도 그중 하나죠. “좋은 습관을 들이려면 적어도 만 번 이상의 훈련이 필요한데, 나쁜 습관은 한두 번으로도 족하다”고 해요. 손대면 헤어나기 어려운 도박과 같은 거죠. 지나친 걱정도 고약한 습관입니다. 걱정은 몸 안에서 번지는 불이죠. 밖에서 난 불은 소화기로 끄면 되지만 안에서 쥐고 흔드니 대처가 어려워요. 근심은 할수록 빠지는 늪입니다. 가려울 때 긁는 것처럼 당장은 잦아들지만 곧 더 가려워 집니다. 오죽하면 티베트에 “걱정을 해서 걱정이 사라진다면 걱정이 없다”는 속담이 생겼을까요. 인간이 절제를 못하는 데는 진화론, 생물학, 유전학, 심리학 등 많은 요인이 혼재돼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인간의 어쩔 수 없는 본능이란 말도 있어요. 배고프지 않아도 계속 먹으려는 것은 생존을 위한 과식본능이, 불필요한 물건을 계속 사는 것은 쾌락을 추구하는 구매심리가, 알면서 계속 말실수를 함은 말로 관심을 끌려는 인간의 습성에 있답니다. 그렇다고 인간사회가 절제를 향한 노력을 게을리 한 것은 아니었지요. 바우하우스의 디자인은 장식에서 벗어난 절제의 아름다움을 표현했고요. 샤넬의 패션은 여성에게서 허위의 코르셋을 벗어던지게 한 사고를 쳤지요. 절제는 언어는 물론 모든 생활에서 새로운 품격을 담아냅니다. 절제를 막는 것은 당장의 만족과 즐거움이 ‘참고자 하는 의지’보다 강하게 유혹할 때 나타납니다. 하지만, 스스로 욕망 조절을 못하면 진정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없습니다. 절제는 유익한 것, 해로운 것을 구분해 우리 스스로 삶의 주인공이 되도록 이끌어 주니까요. 사실 마음에서 분출되는 대부분은 절제의 대상입니다. 욕심과 허영, 미움, 시기, 질투까지도. 같은 물을 먹고도 소는 우유를 내고 뱀은 독을 내는 이치와 같아요. 사람이 입으로 먹을 때는 독이 없는데, 그것을 먹고 나오는 말에는 독이 있습니다. 진실로 사람관계가 어질기를 원한다면, 절제의 힘에 도움을 청하세요. 절제는 좋은 습관을 부릅니다. 나이가 들수록 ‘절제하는 삶’을 강조하는 데는 인류가 경험에서 길어 올린 지혜가 있어서죠. 글 이관순(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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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6-10
  • 좋은 생명체로 산다는 것
    반려동물 1000만 시대. 어딜 가도 동물과 만납니다. 사람들은 개에게 어떤 운동을 시켜야 할지, 고양이는 어떤 장난감을 주면 좋을까를 놓고 고민합니다. 사람이 동물에게 무엇을 배우고, 동물에게 무엇을 가르쳐야 할지 걱정하는 사람은 찾기 힘듭니다. 가을볕이 좋아 공원 벤치에 앉았는데 주인을 따라 산책을 나온 시추 한 마리가 내 쪽으로 다가옵니다. 주인에게 양해를 구하고 쓰다듬어주니 무릎까지 올라와 얼굴을 핥고 난리입니다. 그것으로 끝나면 좋았을 것을, 다음이 문제였죠. 시추를 데리고 가던 주인이 면박을 주었기 때문입니다. “너 똥개야? 아무나 꼬리치면 어떡해?” 순간 무안해진 건 나였지요. 사람들은 애완견을 엄마, 아빠하며 끼고 살지만 실상 생명체를 얼마만큼 사랑하느냐 와는 별개로 보입니다. 한 주인을 좇아야 혈통 있는 개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의외로 많습니다. 다른 사람에게 위협적인 개를 은근히 자랑하기도 합니다. 심심찮게 애완견 때문에 다툼이 생깁니다. 왜 우리 쁘니만 야단치세요. 개라고 하셨는데 그럼 개조심 하시면 안 되나요?“ 듣자하니 내 새끼를 개라고 폄하한 댁이 비켜서 가라는 말로 들립니다. 개를 놓고 싸운다는 게 볼썽사나운지 됐다며 자리를 피하네요. 해외에서는 이런 개를 사회성이 부족한 문제 견으로 봅니다. 낯선 사람이라고 다 도둑은 아니니까요. 명견 진돗개가 세계애견협회에 정식 품종으로 등재되기까지 시간이 걸린 것도 이 때문입니다. 한 주인에만 충성도가 강해서죠. 진돗개가 군견으로 적합하지 못한 이유도 같은 맥락입니다. 주인이 자주 바뀌는 환경에 적응하기가 쉽지 않은 거지요. 사람도 어린 시절의 경험과 교육이 평생에 작용하듯 개의 사회성도 생후 3-12주가 중요하다고 합니다. 이때 다양한 환경과 사람을 접하지 못하면 훗날 낯선 사람이나 상황 앞에 쉽게 겁을 먹고 짖거나 공격성을 띈다고 해요. 최근 야생동물이 잇단 변을 당하는 안타까운 소식을 듣습니다. 주택가에 나타난 맷돼지가 사살, 포획, 도주하는 소동을 벌이더니, 다음날 밤은 고속도로를 걷던 맷돼지 10마리가 모두 차에 쳐 죽었습니다. 이들은 왜 나타났을까요? 지난 주, 서초구 서리풀공원에 올랐다가 여기저기 토끼가 뛰노는 진 풍경과 마주쳤습니다. 사람을 봐도 경계하지 않는 걸 보면 이러한 환경에 익숙해져 보입니다. 그러다 서초구청이 내건 안내문을 읽고서 사연을 알았지요. ‘제발 토끼를 버리지 마세요” 일종의 호소문입니다. 애완동물 1000만 시대의 그늘입니다. 언제라도 싫증나면 버려지는 개, 고양이, 열대어, 토끼 등. 곳곳에 버려진 생명들의 신음에는 무관심합니다. 곧 겨울이 올 텐데 토끼는 모진 추위를 어떻게 견딜까? 그러면서 엉뚱한 생각이 도집니다. 이판에 전쟁이 난다면 거리마다 버려진 애완동물로 홍수가 나겠구나. 유전자 관점에서 보면 모든 생물은 연결돼 있습니다. 서로 돕고 공생해야 그나마 생태계가 유지될 텐데, 지금 인간이 자행하는 이 어마한 환경파괴, 생명파괴는 궁극에 내 가족을 사지로 모는 일입니다. 생명체 최상부 고리의 사람이라면, 이제라도 좋은 생명체로 살아야 하는 방법을 고민해야 합니다. 앞으로 처음 본 개가 꼬리를 치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참 잘 키우셨네요. 교육이 훌륭하신가 봐요.” 이렇게 칭찬하면 어떨까요? 글 이관순(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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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6-03

실시간 기고 기사

  • 얼마나 오랜 세월을 살아야
    해가 바뀌고 정이월이 다 지나는 데도 사람들은 신명을 내지 못합니다. 말만 새해, 무늬만 새해지 50년 전, 30년 전, 20세기에 경험한 그 모습이 오늘도 그대로 우리사회에 재연되고 있어서죠, 정권을 잡았다하면 곧바로 타도 대상이 되는 것도 판박이입니다. 갈등과 분열을 치유와 통합으로 외쳤던 거리는 지금도 같은 외침으로 넘치고. 신물 날 만큼 듣던 혁신, 개혁이란 소리는 21세기 지금에도 또 듣고 있지요. 배곯아 죽는 사람은 지금도 여전하고, 수십 년을 이어온 북한 핵문제는 아직도 머리에 인 채 문제 주변만 뱅뱅 돌뿐입니다. 신년 벽두부터 들리는 잿빛 소식들. 얼마나 오랜 세월을 더 견뎌내야 사람 살 만한 세상이 올까. 얼마나 참고 또 인내하면 사람들 얼굴에서 웃음꽃이 필까. 우울한 시간을 달래다 FM방송에서 귀가 솔깃한 노래 한 곡이 흘러나옵니다. 밥 딜런의 ‘바람 속에 답이 있다’죠. 노랫말이 한편의 훌륭한 시입니다. 밥 딜런은 단순한 가수가 아니지요. 노벨상 사상 115년 만에 세계적인 작가와 시인들을 누르고 노벨문학상(2016)을 수상한 최초의 뮤지션입니다. 평론가들은 그의 시가 셰익스피어나 TS 엘리엇에 견줄만하다고 평했지요. 딜런은 레코드 판매 1억장을 돌파하면서 포크음악의 황제 칭호를 받습니다. 특유의 철학적 가사와 진솔한 매시지로 대중음악과 문학의 경계를 허물었다는 평가도 받습니다. 그 공로를 인정받아 그레미 평생공로상, 퓰리처특별상, 미국이 민간에게 주는 최고의 자유훈장을 받는 등 세기의 음유시인으로 사랑을 받고 있습니다. 애플 창업자 스티브 잡스는 애플 주총에서 주주들에게 밥 딜런의 노래 ‘the times they are a change(세상이 바뀌고 있네)‘를 낭송할 정도로 딜런을 좋아했지요. 딜런의 시에는 사람이지만 사람으로 불리지 못한 흑인, 지유를 잃은 사람들, 전쟁 속에서 희생되는 사람들을 위해 ‘사람답게 살 권리’를 위해 싸우는 저항의 소리를 내면서도 늘 따뜻한 마음을 담았습니다. 그가 다른 유명 시인들과 다른 건 그의 시는 책 속에 있지 않고, 우리 삶 속에 있다는 것이지요. ‘얼마나 더 오래 살아야 세상은...’ 딜런은 사람들의 기원을 노래로 대신해 불러주었지만 세상은 60년이 된 지금도 변한 것이 없습니다. 바람 속에 답이 있다. 밥 딜런 얼마나 많은 길을 걷고 나서야 한사람의 인간이 될 수 있을까 얼마나 많은 바다 위를 날아가야 흰 갈매기는 사막에서 잠들 수 있을까 얼마나 더 많이 머리 위를 날아가야 포탄은 지상에서 사라질 수 있을까 친구여, 그 대답은 바람만이 알고 있지 바람만이 알고 있지. 얼마나 고개를 쳐들어야 사람은 하늘을 볼 수 있을까 얼마나 많은 귀를 가져야 타인들의 울음소리를 들을 수 있을까 얼마나 더 많은 사람이 죽어야 너무 많이 죽었음을 깨닫게 될까 친구여, 그 대답은 바람만이 알고 있지 바람만이 알고 있지. 얼마나 오래 그 자리에 서 있어야 산은 바다가 될까 얼마나 더 오래 살아야 사람들은 자유로워질까 얼마나 더 고개를 돌리고 있어야 안 보이는 척 할 수 있을까 친구여, 그 대답은 바람만이 알고 있지 (소설가 이관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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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7-15
  • 그리움이 찾아 오르는 고개
    우리나라는 산이 많아 고개도 많고 얽힌 사연도 많습니다. 이별이 되고, 한이 되고, 통곡이었던 고개들. 지금은 터널이 뚫리고 찻길이 열려 전설이 되었지요. 그러나 진짜 고개보다 더 힘들었던 고개는 따로 있습니다. 요즘 TV에서 가장 핫한 ‘미스터 트롯’을 보다가 서럽게 넘던 마음의 고개들을 찾아냅니다. 열세 살, 동원이가 불러 마스터의 올 하트에 눈물샘까지 자극했던 ‘보릿고개’. "아이야 뛰지 마라 배 꺼진다"로 시작되는 '보릿고개'는 마음 시린 옛 시절을 호출합니다. 곡식이 떨어진 봄부터 보리수확 때까지 주린 배를 초근목피로 달래고, 그마저 없으면 물 한 바가지로 배 채우던 시절. 오죽했으면 한참 뛰놀 아이에게 뛰놀지 못하게 막았을까. 가수 진성은 "동원이만 할 때부터 노래하며 배고픈 설움을 겪었는데 나도 몰래 옛 생각에 눈물을 보였다”고 말합니다. 그 때를 모르는 세대들은 배곯는 것이 무언지 모르죠. 문경새재보다 더 힘들게 숨이 차 넘던 보릿고개는 ‘단장의 미아리고개’와는 또 다른 한의 고개였습니다. ‘바위고개’도 마음 아픈 고개입니다. 부드러운 멜로디와 정감어린 가사로 한때 최고의 인기곡이었지만, 소절마다 님의 그리움이 절절히 묻어납니다. 이 노래 악보에는 작사자가 안 보여 미상처럼 보이지만, 실은 월북 연극인 이서향이 쓴 시입니다. 결혼 5년 만에 남편 월북으로 청상이 된 부인(백병원家 딸)이 죽기 전에 한 맺힌 사연을 풀어놓았지요. 바위고개는 남편이 중2때 지은 시를 친구(작곡가 이흥렬)가 받아 작곡했다고 합니다. 일제하의 설움을 고개로 표현해 민족의 심금을 울린 애창곡이 됐으나, 월북자를 작사자로 밝히기는 어려웠나 봅니다. 그러나 세월이 훌쩍 흐른 뒤, 바위고개는 아내의 운명을 예견한 노래가 되고 말았습니다. 평생을 기다림과 그리움으로 하루에도 수없이 마음 속 고개를 넘었을 아내라는 여자. 실존하지 않는다는 바위고개는 이승을 떠나면서 안고 갔을 아내의 마음에 있었습니다. ?바위고개 언덕을 혼자 넘자니, 예님이 그리워 눈물납니다. 고개위에 숨어서 기다리던 임 그리워 그리워 눈물 납니다. 바위고개 피인 꽃 진달래꽃은, 우리 임이 즐겨즐겨 꺾어주던 꽃, 임은 가고 없어도 잘도 피었네. 임은 가고 없어도 잘도 피었네.? ‘고모령’ 도 슬픈 고개였지요. 노래 ‘비 나리는 고모령’으로 잘 알려진 고개의 주인공입니다. 대구에 있었다는 고모령은 영원한 사모곡의 상징입니다. 징병을 떠나는 젊은이를 가득 태운 열차가 고모령을 힘들게 오를 때마다 가슴 시린 사연이 쌓였지요. 당시 기관차 성능으로는 경사 높은 고모령을 단 번에 넘을 수가 없었습니다. 열차가 헐떡이며 고개를 오를 때, 사방에서 몰려온 어머니들로 아우성입니다. 아들과 눈 한번 더 맞추려고 부르짖던, 이별의 아픔이 서린 고개. 현인은 이를 ‘비 내리는 고모령’으로 노래했습니다. ‘스무고개’는 어린 시절 추억의 놀이입니다. 질문은 스무 번까지 가능합니다. “남자야?” “응” “키가 커?” “아니” 이렇게 질문으로 힌트를 얻으면서 답을 찾는, 지금은 그리움의 고개가 됐지요. 스무고개 원리는 요즘 심리치료에 쓰인답니다. 아이들의 ‘왜요?’ 란 질문이 그런 것들이죠. “공룡이 다 어디 갔어요?” “죽었지” “왜 죽어요?” “화석이 지구랑 꽝하고 부딪쳐서.” “화석이 왜 꽝 해요?” 이렇게 ‘왜요’가 거듭되다보면 천체 물리학 원리에도 접근이 가능하답니다. 세상이 바뀌니, 힘들게 넘던 고개들 기억은 호롱불같이 가물대지만, 그렇다고 마음에 고개까지 사라지진 않았습니다. 사람들 마음에는 오늘도 여전히 그리움 으로 찾아 오르는 고개들을 다 품고 사니까요. (소설가 이관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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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7-05
  • 교황이 남긴 행복 10계명
    세상은 점점 스마트해 지는데 사람들은 왜 지쳐만 갈까. 저마다 열심히 산다고 사는데 삶은 왜 이리 핍폐해지고 힘들기만 할까. 모두가 허기진 가슴을 달래줄 그 무엇을 간절히 찾습니다. 2014년 여름, 이 땅을 위로한 이는 프란시스코 교황입니다. 온 나라가 세월호 에 침몰됐을 때, 그 분이 오셨지요. 교황은 누구를 비판하지 않고 모두의 등을 토닥여 주었습니다. 어둡고 소외된 곳을 찾아 사랑을 헌사할 때마다 우리들 마음은 뜨거웠고, 가장 낮은 곳을 보듬어 줄 때면 희망의 손길을 느꼈지요. 음성 꽃동네에서는 더 오래 그들의 얼굴을 어루만지며 눈을 맞춥니다. 두개골이 움푹 파이고 목뼈에서 꼬리뼈까지 굳어 작은 움직임도 버거운 중증장애인이라 불린 사람들이죠. 교황 앞에서 한없는 기쁨을 감추지 못했던 그들. 하지만 더 기뻐한 사람은 교황이었습니다. 교황은 이념과 종교, 빈부, 지역을 넘어 만인에게 사랑과 희망의 100시간을 선물했습니다. 명동성당에서는 위안부 할머니들을 위로하고 광화문광장에서는 순교자 124명을 복자로 선포하고, 해미읍성에선 아시아청년대회 미사를 집전하면서 ‘잠들지 말고 깨어서 희망과 덕으로 무장하라’고 권했지요. 78세 고령에도 쉴 틈 없이 소외된 이웃과 만났습니다. 상처를 어루만져주고 고통 받는 이들에겐 서슴없이 다가가 꼭 안아주고, 아기들만 만나면 좋아하는 특유의 미소에 사람들은 행복해했습니다. 이 시대의 ‘초강력 행복 바이러스 유포자’란 말이 잘 어울린 분이었지요. 프란시스코 교황이 이렇게 존경받은 이유는 교황이란 자리에서 내려와 가장 낮은 곳에 머물렀기 때문입니다. 늘 자신을 하느님의 ‘종’이라 불렀고, 종 이외 다른 건 거추장스런 형식이라고 했어요. 한 신문은 그가 떠나는 날 기사제목을 ‘굿바이 파파.. 청년에 희망주고 한국에 평화를 밝히다’로 달았지요. 교황은 “아이와 식탁에 앉아 있을 땐 TV를 끄고, 함께 그림을 그리고 책을 읽는 시간을 가지라, 자신과 다른 의견이나 태도를 받아들이고 타인의 삶을 인정하는 게 행복의 첫걸음”이라고 권했습니다. 또 “청년들에겐 최소한 먹을거리를 집에 가져갈 만큼의 자존심은 줘야한다”는 ‘행복10계명’도 주었어요. -다른 사람의 삶을 인정하라. - 관대해져라. - 겸손하고 느릿한 삶을 살아라. - 식사 때 TV를 끄고 대화하라. - 일요일은 가족과 함께 지내라. - 청년에게 일자리를 만들어줘라. - 자연을 사랑하고 존중하라. - 부정적인 태도를 버려라. - 자신의 신념과 종교를 강요치 말라. - 평화를 위해 노력하라. 교황은 질풍노도 같았던 자신의 과거도 고백했어요. “젊었을 때는 모든 것을 밀어내려고만 했는데, 성인이 돼서는 흐르는 강물처럼 순해졌고. 나이 들어 보니 삶은 고요한 물 같은 것임을 알게 되었다”며 겸손하고 친절하게 여유 있는 삶을 살아보라고 했지요. 시복식이 있던 날, 강천석 칼럼은 이 나라에 교황이 몰고 온 바람을 이렇게 꼭 찍어 말했습니다. “프란치스코 바람은 연꽃 만나러가는 바람처럼 더위에 지친 8월의 이파리들을 흔들어주는 그런 바람”이라고. 우리가 얼마나 광야 같은 세상에서 사람에 주리고 위로에 목말라 하는지, 모처럼 사람을 보고 행복해 했던 6년 전 그때가 생각납니다. (소설가 이관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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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7-01
  • 잘 늙고, 잘 죽는 일
    한 동네에서 30년쯤 살면 동네 사람과 만남은 함께 늙어간다는 것을 확인하는 자리입니다. 팔팔했던 젊음이 다들 주름진 얼굴로 바뀌었습니다. “얼굴이 좋아지셨네요?” 암을 이겨낸 분과 인사를 나누지만 마른 몸, 굽은 허리, 눈빛에서 연민을 느낍니다. 아파트 단지가 생기면서 후문 옆에 과일가게를 연 박 씨는 지금도 그 자리를 지키고, 시장입구에 생선 파는 아줌마도 여전히 생선을 만집니다. 한 번 선택이 평생에 작용한다는 말을 실감케 합니다. 꿈이야 많았겠지만, 어어 하는 새 세월이 흘렀겠지요. “가을볕이 좋아 잠깐 졸았는데 백발이 되었네.”라는 시구가 빠른 세월을 절창합니다. 그래서 후회 없는 인생을 살려면 다섯 가지 계획을 잘 세우라고 합니다. 중국 송나라 때 주신중이란 학자가 ‘인생오계론(人生五計論)’을 설파했지요. 이 다섯 가지를 바르게 세워 잘 실천하면 실패 않는 삶을 산다고 합니다. 첫째가 ‘생계(生計)’입니다. 난 무슨 일을 하여 어떻게 먹고 살 것인가? 직업에 관한 계획과 준비를 말합니다. 첫 업이 평생의 업이 되기 쉬우니까요. 그때보다 평균수명이 40년은 길어졌으니 생계의 중요성은 더 커질 수밖에요. 설령 적성을 살려 일할 곳이 마땅치 않더라도 쉬 포기하지 말라합니다. 둘째는 ‘신계(身計)’입니다. 몸과 마음을 강건하게 하라는 뜻이겠지요. 신외무물이란 말처럼 내 몸보다 소중한 것은 없습니다. 재물은 있다가 없고 또 채워지지만, 잃은 건강은 되찾기 어렵습니다. 요즘은 이 말이 어떻게 ‘처신’ 하며 살 것인가로 해석됩니다. 처세가 바르지 않으면 힘써 쌓은 명예까지 다 무너집니다. 끌끌하신 분들이 검찰 포토라인에 서는 것을 많이 보았으니까요. 셋째는 가계(家計). 가정을 어떻게 꾸려나갈 것인가를 묻습니다. 부부관계, 부모와 자식, 형제 관계를 이르죠. 가정은 마음의 풀을 뽑는 곳입니다. 사랑과 신뢰를 바탕으로 서로의 마음에 잡초가 자라지 못하게 돕는 곳입니다. 가정의 중요성은 거듭 말해도 부족함이 없겠죠. 사회의 마지막 안전판이니까요. 넷째는 노계(老計)죠. 어떻게 늙어 갈 것인가? 참 어려운 고난도 문제입니다. “참 곱게 늙으셨어요.” “예쁜 얼굴이 왜 저리 됐지?” 늙음을 두고 듣는 말이죠. 오죽하면 앙드레 지드가 “인생사에서 가장 어려운 건 아름답게 늙는 것‘이라고 했을까요. 삶이 얼굴에 나타난다는 말은 허투루 나온 말이 아닙니다. 세상을 편안하게 보고, 모든 것을 받아들이며, 이해하고 배려함이 나의 늙음을 아름답게 해줍니다. 끝으로 사계(死計)를 통해 어떻게 죽음을 준비할까를 묻습니다. 죽음은 모든 것의 끝이 아니라 새로운 세계로 들어가는 입구입니다. ‘죽음학’이 새롭게 조명되는 이유지요. 종교가 말하는 생명의 부활, 윤회, 내세도 뚜렷한 사생관 위에 서 있습니다. 감사하는 삶, 봉사하는 삶, 겸손한 삶이 편안한 사계의 충분조건입니다. 월 초에, 아내 병수발로 2년 가깝게 두문불출한 선배가 모임에 나왔습니다. 모두가 걱정했는데 빗나간 예상이었지요. 몸집은 빠졌지만 표정도 밝고 여간 편안해 보이지 않았습니다. 잘 웃던 모습도 여전했으니까요. 수발을 드는 건지 받는 건지 오해받겠다고 하니까 말을 받습니다. “순간순간이 아쉽지. 더 잘해주지 못해. 저렇게라도 내 옆에 오래오래 있어주면 좋겠어. 그래서 지금이 행복해.” 그 편안한 얼굴에서 나오는 말이 신선처럼 들립니다. *글 이관순(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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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6-24
  • 황금을 돌 같이 보라고?
    ‘황금을 보기를 돌같이 하라’ 이르신 이는 최영 장군입니다. 그 한 마디가 최영의 이미지를 각인시켜 놓았지요. 어느 정도 인격을 닦아야 황금을 돌 같이 볼 수 있을까? 의문이 들면서도 한때는 이 만한 카타르시스도 없다고 생각했었지요. 가난했던 학창시절, 이를 금과옥조로 삼아 스스로를 위안하기도 했습니다. “돈이냐 젊음이냐 이것이 문제로다!“ ”야! 없다가도 생기는 게 돈 아냐?“ 이렇게 친구와 맞장구치면서 말이죠. 그로부터 반세기가 지난 요즘의 학생들에게 최영의 말을 빌려 돈에 대한 생각을 물으니 한 친구가 눈을 동그랗게 뜨네요. “예? 말도 안 돼. 황금을 어떻게 돌과 비교해요.“ 아이들이 한바탕 깔깔 대며 ‘엄지 척’ 합니다. ”돈 그거 없으면 청춘 비참해져요.“ 수렵시대와 농경시대에는 돈타령이 지금 같진 않았겠지만, 산업시대를 돌면서 돈의 위용은 갈수록 진가를 발휘하고 있습니다. ‘돈은 알라딘의 등불’ 이란 말도 있어요. 무슨 소원이고 다 이루어 주는 마법의 등잔처럼 돈이면 무엇이든 다 할 수 있다는 뜻이겠죠. 그래서 ‘돈은 모든 사람을 엎드리게 하는 유일한 권력.’이란 말도 나왔습니다. 머리는 빈 깡통이면서 지식을 탐하는 부자 귀신이 있었답니다. 그가 당대의 석학인 가난한 선비를 찾아가 지식을 팔라고 간청합니다. “한 오천 냥이면?” 선비가 들은 척도 안합니다. “만 냥까지 쳐드립죠. 만냥 큰돈입니다” 선비의 얼굴에는 미동도 없습니다. 한참을 쩝쩝거리던 귀신이 통 큰 배팅을 합니다. “십만 냥! 어떠십니까?” 그러자 선비는 미련 없이 고개를 끄덕입니다. 계약서를 쓰기 무섭게 귀신이 궁금함을 못 참고 묻지요. “아무리 10만냥이 크기로서니 그래도 그렇지 팔 생각을 하십니까?“ 눈을 감고 있던 선비가 빙긋이 웃습니다. 그리고 “그 돈이면 귀신도 살 수 있다네.” 돈의 위력을 한마디로 압축해 보인 얘기입니다. 그러나 돈을 쓰는 재미보다 버는 즐거움에 빠진 사람도 더러 있습니다. GH 노만이 쓴 ‘크리스의 얼굴’ 이라는 작품에 이런 이야기가 나오죠. 한 친구가 죽기 살기로 억척스레 돈만 버는 부자를 향해 비아냥거립니다. “그렇게 돈을 벌면 뭘 하나. 아들이 자네가 버는 이상으로 방탕하게 낭비할 텐데. 허망한 일 아닌가?“ 그러자 부자가 너털웃음을 짓습니다. ”모르는 소리 말게. 제 놈이 아무리 돈을 펑펑 쓰고 놀아본들 애비의 돈 버는 즐거움에 비할 텐가?“ 또 이런 사람도 있지요. 일생을 성실히 노력해서 거부가 된 금융업자가 임종이 가까워지는 모양입니다. 이 부자에겐 불행히도 자식이 없었지요. 형제들이 저 많은 유산을 어떻게 처리할지 정해 달라고 은근히 보챕니다. 형님 정신이 이만하실 때 말씀 하셔야 합니다.” 형제의 채근을 받던 금융 거부가 그들을 돌아보며 빙그레 웃습니다. “알아서 처리하게 난 관심이 없네. 내가 일생 동안 즐길 대로 즐기고 남은 찌꺼기에 불과한 거 아닌가.“ 참 대답이 쿨 합니다. 돈을 버는 재미가 귀하고 즐거웠지 번 돈은 한낱 즐거움이 타고난 재에 불과하다는 그 인식이 놀라울 따름입니다. 돈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필요한 기본 요소입니다. 그렇지만 돈에 대한 가치관을 어디에 두고 있느냐에 따라 물질에 대한 인식은 크게 달라질 수 있습니다. 그래서 ‘황금을 돌같이 보라’는 말은 돈이란 신(神) 앞에 쉽게 무릎 꿇는,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교훈을 안깁니다. *글 이관순(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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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6-17
  • 절제하는 삶을 위하여
    괴테는 '진정한 행복은 절제에서 온다' 했고, 동양선비들도 인간의 덕목중 절제만 한 것이 없다고 했습니다. 절제는 한 마디로 자신의 욕구와 행위를 제어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가슴은 알아도 실천에서 어려움을 겪지요. 누구나 경험했을 일입니다. “새해는 꼭 해야지.” 다이어트, 금주, 금연 등 야심찬 결단을 하지만 얼마 안가 흐지부지 되죠. 습관 된 행동을 멈추고 나쁜 버릇을 고치는 일은 왜 늘 힘들까... 모순 속에 길을 찾는 게 우리네 삶입니다. 습관도 그중 하나죠. “좋은 습관을 들이려면 적어도 만 번 이상의 훈련이 필요한데, 나쁜 습관은 한두 번으로도 족하다”고 해요. 손대면 헤어나기 어려운 도박과 같은 거죠. 지나친 걱정도 고약한 습관입니다. 걱정은 몸 안에서 번지는 불이죠. 밖에서 난 불은 소화기로 끄면 되지만 안에서 쥐고 흔드니 대처가 어려워요. 근심은 할수록 빠지는 늪입니다. 가려울 때 긁는 것처럼 당장은 잦아들지만 곧 더 가려워 집니다. 오죽하면 티베트에 “걱정을 해서 걱정이 사라진다면 걱정이 없다”는 속담이 생겼을까요. 인간이 절제를 못하는 데는 진화론, 생물학, 유전학, 심리학 등 많은 요인이 혼재돼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인간의 어쩔 수 없는 본능이란 말도 있어요. 배고프지 않아도 계속 먹으려는 것은 생존을 위한 과식본능이, 불필요한 물건을 계속 사는 것은 쾌락을 추구하는 구매심리가, 알면서 계속 말실수를 함은 말로 관심을 끌려는 인간의 습성에 있답니다. 그렇다고 인간사회가 절제를 향한 노력을 게을리 한 것은 아니었지요. 바우하우스의 디자인은 장식에서 벗어난 절제의 아름다움을 표현했고요. 샤넬의 패션은 여성에게서 허위의 코르셋을 벗어던지게 한 사고를 쳤지요. 절제는 언어는 물론 모든 생활에서 새로운 품격을 담아냅니다. 절제를 막는 것은 당장의 만족과 즐거움이 ‘참고자 하는 의지’보다 강하게 유혹할 때 나타납니다. 하지만, 스스로 욕망 조절을 못하면 진정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없습니다. 절제는 유익한 것, 해로운 것을 구분해 우리 스스로 삶의 주인공이 되도록 이끌어 주니까요. 사실 마음에서 분출되는 대부분은 절제의 대상입니다. 욕심과 허영, 미움, 시기, 질투까지도. 같은 물을 먹고도 소는 우유를 내고 뱀은 독을 내는 이치와 같아요. 사람이 입으로 먹을 때는 독이 없는데, 그것을 먹고 나오는 말에는 독이 있습니다. 진실로 사람관계가 어질기를 원한다면, 절제의 힘에 도움을 청하세요. 절제는 좋은 습관을 부릅니다. 나이가 들수록 ‘절제하는 삶’을 강조하는 데는 인류가 경험에서 길어 올린 지혜가 있어서죠. 글 이관순(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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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6-10
  • 좋은 생명체로 산다는 것
    반려동물 1000만 시대. 어딜 가도 동물과 만납니다. 사람들은 개에게 어떤 운동을 시켜야 할지, 고양이는 어떤 장난감을 주면 좋을까를 놓고 고민합니다. 사람이 동물에게 무엇을 배우고, 동물에게 무엇을 가르쳐야 할지 걱정하는 사람은 찾기 힘듭니다. 가을볕이 좋아 공원 벤치에 앉았는데 주인을 따라 산책을 나온 시추 한 마리가 내 쪽으로 다가옵니다. 주인에게 양해를 구하고 쓰다듬어주니 무릎까지 올라와 얼굴을 핥고 난리입니다. 그것으로 끝나면 좋았을 것을, 다음이 문제였죠. 시추를 데리고 가던 주인이 면박을 주었기 때문입니다. “너 똥개야? 아무나 꼬리치면 어떡해?” 순간 무안해진 건 나였지요. 사람들은 애완견을 엄마, 아빠하며 끼고 살지만 실상 생명체를 얼마만큼 사랑하느냐 와는 별개로 보입니다. 한 주인을 좇아야 혈통 있는 개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의외로 많습니다. 다른 사람에게 위협적인 개를 은근히 자랑하기도 합니다. 심심찮게 애완견 때문에 다툼이 생깁니다. 왜 우리 쁘니만 야단치세요. 개라고 하셨는데 그럼 개조심 하시면 안 되나요?“ 듣자하니 내 새끼를 개라고 폄하한 댁이 비켜서 가라는 말로 들립니다. 개를 놓고 싸운다는 게 볼썽사나운지 됐다며 자리를 피하네요. 해외에서는 이런 개를 사회성이 부족한 문제 견으로 봅니다. 낯선 사람이라고 다 도둑은 아니니까요. 명견 진돗개가 세계애견협회에 정식 품종으로 등재되기까지 시간이 걸린 것도 이 때문입니다. 한 주인에만 충성도가 강해서죠. 진돗개가 군견으로 적합하지 못한 이유도 같은 맥락입니다. 주인이 자주 바뀌는 환경에 적응하기가 쉽지 않은 거지요. 사람도 어린 시절의 경험과 교육이 평생에 작용하듯 개의 사회성도 생후 3-12주가 중요하다고 합니다. 이때 다양한 환경과 사람을 접하지 못하면 훗날 낯선 사람이나 상황 앞에 쉽게 겁을 먹고 짖거나 공격성을 띈다고 해요. 최근 야생동물이 잇단 변을 당하는 안타까운 소식을 듣습니다. 주택가에 나타난 맷돼지가 사살, 포획, 도주하는 소동을 벌이더니, 다음날 밤은 고속도로를 걷던 맷돼지 10마리가 모두 차에 쳐 죽었습니다. 이들은 왜 나타났을까요? 지난 주, 서초구 서리풀공원에 올랐다가 여기저기 토끼가 뛰노는 진 풍경과 마주쳤습니다. 사람을 봐도 경계하지 않는 걸 보면 이러한 환경에 익숙해져 보입니다. 그러다 서초구청이 내건 안내문을 읽고서 사연을 알았지요. ‘제발 토끼를 버리지 마세요” 일종의 호소문입니다. 애완동물 1000만 시대의 그늘입니다. 언제라도 싫증나면 버려지는 개, 고양이, 열대어, 토끼 등. 곳곳에 버려진 생명들의 신음에는 무관심합니다. 곧 겨울이 올 텐데 토끼는 모진 추위를 어떻게 견딜까? 그러면서 엉뚱한 생각이 도집니다. 이판에 전쟁이 난다면 거리마다 버려진 애완동물로 홍수가 나겠구나. 유전자 관점에서 보면 모든 생물은 연결돼 있습니다. 서로 돕고 공생해야 그나마 생태계가 유지될 텐데, 지금 인간이 자행하는 이 어마한 환경파괴, 생명파괴는 궁극에 내 가족을 사지로 모는 일입니다. 생명체 최상부 고리의 사람이라면, 이제라도 좋은 생명체로 살아야 하는 방법을 고민해야 합니다. 앞으로 처음 본 개가 꼬리를 치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참 잘 키우셨네요. 교육이 훌륭하신가 봐요.” 이렇게 칭찬하면 어떨까요? 글 이관순(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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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6-03
  • 나의 무서운 상전이 된 몸
    어디선가 보았던 글입니다. “젊었을 때 내 몸은 나하고 가장 친한 벗이더니, 나이 들면서 차차 내 몸은 나에게 삐치기 시작했고, 늘그막의 내 몸은 내가 한 평생 모시고 길들여온, 나의 가장 무서운 상전이 되었다.” 젊어서야 내가 하자는 대로 따라준 몸인데, 지금은 몸이 내 생명줄을 바싹 쥐고 있습니다. 몸이 상전이 된 데는 세월 탓이 여덟이고, 나머지는 몸을 마구 굴린 내 잘못입니다. 우리나라 기대수명은 82.6세로 일본에 불과 1.5년 차입니다. 그럼에도 ‘나는 건강하다’고 말하는 사람은 10명당 3명꼴에 불과합니다. 그 대신 외래진료건수는 세계 최고지요. 우리처럼 종합건강검진이 번창한 나라도 없을 것입니다. 덕분에 병을 조기에 발견도 하지만 건강에 대한 걱정을 과잉생산하고 있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수년 전 파이낸셜 타임스가 한국인의 장수비결을 ‘김치와 건강 염려’라고 빗대고는 마음 편히 사는 것보다 좋은 건강비결이 있겠느냐고 되묻습니다. 우리는 하루하루 의학정보의 홍수 속에 삽니다. 웬만큼 나이가 든 사람은 만나면 건강문제가 대화의 중심이 되는 현실입니다. 하버드의대 연구팀이 60년에 걸쳐 3백명을 대상으로 ‘잘 늙기’를 추적 조사했습니다. 그 결과 노화를 받아들이는 성숙한 자세와 원만한 인간관계가 건강하고 행복한 삶을 유지해 준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눈이 어둡고 몸이 굳어 발톱 깎는 일조차 전쟁이라며 씁쓸해 하지만, 생로병사를 순리로 받아들임이 첫 번째 건강의 비결입니다. '나무는 뿌리가 먼저 늙고, 사람은 다리부터 쇠한다’ 합니다. 사람이 늙으면 대뇌에서 다리로 보내는 명령이 정확히 전달되지 않고, 속도도 떨어집니다. 진시황 이후 청나라 마지막 황제까지 335명 황제의 평균수명이 41세이고, 조선시대 27명 왕의 평균은 37세에 그칩니다. 그래서 예부터 장수의 조건으로 보약이나 산해진미보다 튼튼한 다리를 꼽았지요. 다리는 기계의 엔진 같아 망가지면 올 스톱입니다. 머리카락이 희어지고 피부가 주글주글해짐을 걱정할 게 아니라, 다리 근육부터 신경 쓰랍니다. 몸에서 가장 큰 관절과 뼈는 다리에 다 모여 있어요. 젊은이의 대퇴골은 승용차 한 대 무게를 견뎌내고 슬개골은 몸무게의 9배를 지탱합니다. 대퇴부와 종아리 근육은 땅의 인력과 맞서느라 늘 긴장상태에 있고요. 견실한 골격과 강인한 근육, 부드럽고 매끄러운 관절은 인체의 철의 삼각을 만들어 하중을 지탱합니다. 미국에서 발행하는 ‘prevention(예방)’ 지가 장수의 특징으로 다리근육의 힘을 꼽는 이유입니다. 얼굴에는 그 사람의 일생이 담겨 있습니다. 화장을 해도 숨은 얼굴에서 나오는 잔상은 가릴 수 없지요. 젊어 사랑했던 여인을 만나고 온 친구가 만나지 않음만 못하다고 쓸쓸해 합니다. 고이 간직해온 환상이 무너져 아쉽다면서. 나이가 들어도 여자의 얼굴에서 젊은 시절의 모습이 보여야 아름답고, 남자는 경륜과 인품이 풍겨나야 잘 늙었다는 말을 듣습니다. 이는 어떤 생각과 태도로 삶을 살았느냐, 살아갈 것이냐 와도 통합니다. 철따라 옷을 갈아입듯, 노화에 순응하고 원만한 인간관계와 다리 근육까지 잃지 않으면 상전이 된 몸과 더없이 좋은 관계를 이어갈 수 있겠지요. 금이라서 다 반짝이지는 않습니다. 사람이 그렇습니다. 스스로 생각과 태도를 잘 가꾸면 녹이 내리지 않고, 나이테만큼 깊게 내린 뿌리에는 쉽게 서리가 닿지 못하니까요. 글 이관순(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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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5-27
  • 삶은 고향을 찾아가는 여정
    70대에 읽는 호메로스의 ‘오디세이아’는 젊어서 읽던 때와는 또 다른 잔잔한 공명을 주었다. 고대 그리스 문학의 대표적 작품인 ‘오디세이아’의 테마는 ‘귀향’. 그리스가 트로이 전쟁에서 승리한 후 고향을 찾아가는 영웅 오디세우스의 험난한 귀향 과정을 이야기한 대서사이다. 그 과정에서 바다와 섬, 그 밖의 여러 곳에서 고난을 겪으며 고향을 찾기까지의 분투와 아픔을 그렸다. 그의 귀향 여정은 세월이란 고난의 길을 걸어가는 인간의 삶과 맞닿아 있다. 그러나 형극의 여정 끝에 고향을 찾는 것으로 시련이 끝난다면 얼마나 좋을까. 오디세우스가 살인적인 재앙을 헤치고 귀향에 성공하더라도 긴장의 끈을 놓아서는 안 될 것이, 그동안 집안이 망해 버렸거나 아내가 정절을 버렸다면, 그의 귀향은 비극적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미케네 왕 아가멤논이 집에 무사히 돌아온 줄 알고 안심하다가 아내와 간부에 의해 살해를 당한 것처럼, 한 순간도 안도할 수 없는 게 인생이고 삶이기에. 오디세우스는 전쟁 영웅답게 신4중했다. 20년 만에 고향 이타카에 도착한 그는 일단 거지로 변장하고 가족들에게 접근을 시도한다. 남편 부재의 20년 세월을 아내 페넬로페는 어떤 심정으로 살았는지, 은밀하게 살펴보기로 한 것이다. 여기서 ‘페넬로페의 베 짜는 이야기’가 전개된다. 쉴 새 없이 일을 해도 끝나지 않는다는... 가장이 집을 비운 사이 오디세우스의 아내 페넬로페는 어떤 삶을 살았을까? 그녀는 남편 없는 긴 세월을 숱한 유혹과 위협에 시달려야 했다. 그녀의 미모에 반해 구혼을 청하는 남자들로 편할 날이 없었으니까. 오디세우스는 출정에 나서면서 아내에게 10년을 약속했다. “만일 10년 안에 돌아오지 못하면 당신은 재혼을 하시오”라고. 오디세이아에는 페넬로페 이야기처럼 흥미로운 소설적 장치가 여럿 있다. 그녀는 정숙한 여인이었다. 구혼자들이 몰려와 반협박조의 청혼을 할 때마다 이를 지혜롭게 물릴 줄 아는 여자였다. “지금 시아버지에게 바칠 옷을 짜고 있으니, 완성할 때까지 기다려 달라”며, 에둘러 남자들을 진정시킨 것이다. 베틀에 실을 올리면서 생각할 시간을 달라니, 욕망에 달뜬 남자인들 어쩌겠나. 낮에는 옷을 짜고 밤에는 풀고, 하루하루 같은 수고를 반복하면서 페넬로페는 오매불망 남편의 귀향을 기다렸다. 남편이 약조한 10년이 훌쩍 지났는데도 말이다. 그녀는 실타래와 베틀에 자신을 동여매고 자신의 정절을 지킨 셈이다. 오디세우스가 전편에 관통하는 메시지는 하나. 귀향은 정체성을 찾아가는 여정이며, 그 과정이 삶이라는 것. 집에 돌아오려면 먼저 집을 떠나야 하듯 귀향은 출향이 전제돼야 한다. 오디세우스가 집을 떠난 것은 밖에서 끌어낸 힘도 있지만, 밖으로 나가려는 내면의 원심력도 작용했다. 오디세우스의 투혼은 유혹의 노래를 부르는 세이레네의 섬들을 통과할 때 잘 드러났다. 부하들은 유혹의 노랫소리를 듣지 않으려고 귀를 밀랍으로 막았으나, 오디세우스는 노래는 들으면서 그 유혹에는 빠지지 않으려고 자신의 몸을 돛대에 묶어놓았다. 인간을 바깥세상으로 끌어내려는 호기심은 위험한 것이지만, 그것을 철저하게 억누르면 자폐증이 되고, 그렇다고 생각 없이 호기심을 좇다가는 ‘파멸’을 부를 수도 있다. 오디세우스는 호기심을 충족시키면서도 파멸에 이르지 않는 절묘한 선택을 배합한 셈이다. 인생은 늘 원심력과 구심력의 작용과 반작용이 상충하는 삶이다. ‘귀향’ 하지 않고 맹목적으로 돌진하는 원심력만 작용하면 인간은 결국 자아 상실의 상태로 빠지게 됨을 경고하는 것일까? 인간이 당면한 환경 문제와 물질문명에 대한 근본적인 비판으로 볼 수 있는 대목이다. “인간이 아무리 신적 앎에 다가선다 해도 우리 자신은 신과는 다른 인간임을 재확인하는 지혜를 잃지 말라”는 경고로도 읽힌다. 오디세이아는 신화적 요소에 이야기를 버무려 고전 특유의 매력을 담아냈다. 특이한 문체, 상상력을 자극하는 표현들이 곳곳에 매력 포인트를 숨기고 있다. 페넬로페에게 몰려오는 구혼자들 행태, 20년 정절을 지키는 페넬로페의 눈물, 오디세우스의 귀향과 상봉담(談), 그리고 아내를 넘본 자들을 응징하는 복수담까지…. 춘향전의 백미인 이도령과 춘향의 상봉 같은 극적인 장치도 멋스럽다. 숱한 남자로부터 유혹에 시달려온 페넬로페는 남편도 선뜻 받아들이지 못하고 슬쩍 떠본다. “그 침대를 이쪽으로 옮겨놔 주시겠어요?”라고…. 그러자 오디세우스가 답했다. “그 침대는 옮길 수 없다는 걸 당신도 알지 않소?” 오디세우스가 직접 산 나무의 밑동을 잘라 만들었으므로, 땅 속에 뿌리가 박혀 있기 때문이었다. 그제야 진짜 남편 오디세우슥가 돌아왔음을 확증하고 감격적인 부부 상봉이 이루어진다. “드라마처럼 재밌거나 그렇지는 않지만 한 번 읽어봐. 남는 게 있을 거야.” 학창 시절, 나의 손에 오디세이아를 건네주며 일독을 권하던 선배. 그는 지금 이 세상을 떠나 본향집을 찾아가고 있다. 그길 만은 험난하지 않기를... 선배의 따뜻한 미소가 눈가에 맴돈다. -소설가 daumcafe 이관순의 손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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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5-20
  • 어머니의 강(江)
    해마다 봄이 되면 어린 시절 어머님 말씀이 떠오릅니다. 항상 봄처럼 부지런해라, 항상 봄처럼 꿈을 가져라, 항상 봄처럼 새로워져라.... 그때는 그 말의 속내가 무엇인지 가슴에 와 닿지 않았습니다. 불혹이 넘어서 비로소 그 말에 눈을 떴습니다. 땅 속에서, 땅 위에서, 공중에서 혼신을 다해 생명을 탈환하는 노력을 보고, 어린 자녀들에게 ‘부지런해라‘고 말했습니다. 보이지 않는 곳곳에서 생명을 생명답게 키우는 꿈을 깨달으며, 항상 봄처럼 꿈을 가져라고 당부했습니다. 화단의 나무에서, 연못과 들에서 움트는 대지의 새눈들이 경이로워 딸아 너도 저렇게 새로워져라고 일렀습니다. 그때가 엊그제 같은데 세월이 많이 흘렀습니다. 나는 움직이지 않고 여기 서 있는데 왔다간 건 그들입니다. 이젠 아들이 손자에게 같은 말을 전합니다. 부지런해라, 새로워져라, 꿈을 가지라고. 어머니 말씀은 그렇게 대를 이어가며 전해지겠지요 흐르는 강물처럼... 인생을 잠깐 살다가는 여름밤의 꿈이라지만, 유독 그리움만 겁을 넘습니다. 마치 태양이 헐었다는 소리를 못 들은 것처럼. 이 세상에서 생명력이 가장 길고 영원한 향기를 내는 것, 그리움이 아닐까요?. 사람은 그리움을 먹고 사는 영물입니다. 5월은 많은 생각을 부릅니다. 생각은 그리움을 키웁니다. 어머니는 내게 유독 많은 그리움을 남기셨습니다. 오늘도 연기처럼 피어오르는 그리움이 바람을 타고 산과 강을 건너 퍼집니다. 언젠가는 내가 좋아했던 공단 치마저고리를 차려입은 어머니가 저 하늘에서 내려올 것만 같습니다. 부모가 죽으면 불효한 자식이 가장 서럽게 운다지요. 내가 그렇습니다. “서방님은 어머니한테 할 만큼 하셨어요. 우리가 못했지.” 형수님은 늘 그런 말을 해도 나는 잘못한 것만 생각납니다. 그런 일들이 새록새록 살아납니다. “왜 그걸 못해드렸을까.” 아쉬움이 커지면 가슴이 시려옵니다. 떠나신 지 30년인데 지금도 어머니 소리만 들으면 가슴이 짠합니다. TV에서 어머니 얘기를 듣다 눈시울이 붉어진 적도 많습니다. 지난해 아버지 부시 대통령의 아내 바바라 여사(94)가 세상을 떠났을 때 슬픔이 이렇게 아름다운 것일 수도 있구나 생각했습니다. 유난히 숱이 많은 순백의 백발은 그녀만의 캐릭터였습니다. 다음날 뉴욕타임스에 만평 한 컷이 실렸습니다. 그림판 하나가 세계의 많은 사람들의 심금을 울린 건 흔치 않은 일입니다. 그녀의 백발은 결코 화사하지 않은 슬픔이었기 때문이죠. 병을 앓던 어린 딸이 일찍 세상을 뜨자 백발로 변한 것입니다. 얼마나 슬픔이 컸으면, 딸이 그리웠으면, 그녀의 금발을 하루아침에 백발로 만들어버렸을까?.... 그림판은 백발의 여사가 흰 날개를 달고 천성 문을 향해 나르고 있고, 반대편에서는 어린 천사가 흰 날개를 퍼덕이며 그리운 어머니를 영접하러 나오는 장면입니다. 한 컷의 그림판이 이렇게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고 감동시키는구나... 그리움이 슬픔이고 슬픔이 그리움이란 것을, 작가가 잘 포착해 낸 것입니다. 어머니가 그리운 날엔 한강에 나갑니다. 오늘같이 안개까지 내린 날이면, 강뚝에 앉아 딱히 정한 곳도 없이 강자락에 싸여 흘러온 세월을 돌아봅니다. 푸른 물 겹겹으로 가슴 휘두르며 나홀로 걸어가셨던 당신의 세상을 생각합니다. 강은 흐르다 돌에 부딪치고 바위에 깨져도 이내 한 물로 흘러갑니다. 그곳에 얼마나 많은 상처가, 아픔이, 슬픔이 있었을까요. 당신은 이 모든 것을 넉넉한 품으로 안고 가셨습니다. 눈물을 삼키시면서... 그래서 물색이 저리도 검푸른가봅니다. 오늘도 새벽처럼 찾아오시는 어머니, 담장너머 아득한 안개 속으로 문풍지 같은 나의 떨림을 들으시나요? 당신의 자리는 억겁을 두고도 돌아오지 못할 흘러간 강물이신가요?. 소설가 이관순의 손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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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5-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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