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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초적 그리움 사랑의 정체
“우리는 하나의 심연에서 솟아올라 또 다른 심연으로 사라져간다. 이 심연과 심연 사이를 인생이라고 부른다.” 니코스 카잔차키스. 이 심연과 심연 사이에 여전히 난해하게 다가오는 것은 ‘사랑’입니다. 사랑이 강인한 생명력을 지닌 것은 인간의 원초적 그리움 때문이겠죠. 생명의 그리움, 자연의 그리움, 우리가 사는 일생도 따지고 보면 ‘그리움의 집짓기’에 다름 아닙니다. 평생을 매달려도 그 끝에 닿지 못하는 것. 다만 예술작품을 들추어 그 정체를 유추해볼 뿐이지요. 에리히 프롬은 사랑을 다섯 단계로 정의하고, 첫 단계를 ‘관심’으로 꼽았지요. 사랑은 관심에서 출발하기 때문입니다. 다음으로 ‘존중’을 꼽고, 여기서 발전한 단계가 ‘이해’입니다. 일방적 이해는 외눈박이 사랑을 부르지만 상호이해로 충족되면 뒷골목 사람이든 거리의 여자든 문제될 게 없다는 거지요. 그러나 이것만으로 참사랑의 척도를 가늠하기 어려운 게, 여기까지는 가식이나 정략적으로도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현대인의 사랑에서 가장 미덥지 못한 부문, 그래서 가장 강조돼야 할 덕목으로 에리히 프롬은 4단계의 ‘책임’을 들었지요. 사랑이 주는 감동은 책임부분에서 나옵니다. 책임이 담보되지 않은 사랑은 어느 한계 앞에 좌초할 수밖에 없지요. 그래서 사랑이 책임을 넘어설 때 비로소 ‘사랑은 주는 것’으로 완성됩니다. 흔히 사랑은 소프트한 것으로 생각하기 쉽지만, 사랑에는 고난이 전제돼야 합니다. 그 고난이 왔을 때, 맞서서 대응할지, 아니면 피할지. 여기서 사랑은 극명한 갈림길에 서지요. 사랑을 주제로 한 문학작품이나 영화를 읽고 보면서 사랑에 전율함은 사랑의 고귀한 가치인 ‘책임’을 다루기 때문입니다. 웨스트민스터 사원에는 유명작가의 작품이 아닌데도 관람객이 끊이지 않는 동상 하나가 있습니다. 왼팔이 없는 ‘팔 없는 여인상’. 사람들은 이 앞에서 옷깃을 여미고 상념에 잠깁니다. 그녀의 빈 어깨를 사람들이 얼마나 쓰다듬고 갔으면 반들반들 윤이 났을까요. 십자군전쟁 때의 일입니다. 무모한 원정 전을 벌인 십자군은 참패했고, 많은 병사가 모슬렘의 포로가 되었지요. 모두가 절망할 때 한 젊은 영국군 장교가 구명을 호소합니다. 그는 수용소의 놀림감이 되고, 마침내 모슬렘 사령관의 호출을 받습니다. “내가 없으면 아내는 죽습니다. 그녀를 위해 꼭 살아가야 합니다.” 사령관이 웃으며 “걱정 말게. 여자는 다른 남자가 책임질 걸세.” 이에 장교는 우리 사랑을 몰라서라고 강변했고, 그 말끝에 사령관은 야릇한 도박을 겁니다. “좋아, 그럼 내기하지. 자네를 사랑한다는 징표로 여자의 팔 하나를 가져오면 고려하겠네.” 이일을 까맣게 잊고 지내던 어느 날, 사령관 앞으로 썩은 팔 하나가 배달됩니다. 그제서 사령관은 과오를 사죄하고 장교를 풀어줍니다. 팔 없는 여인상의 모델은 장교의 부인입니다. 진한 감동으로 전율시켰던 그 여인의 빈 어깨는 시공을 넘어 뭇사람의 시선을 붙잡습니다. 생 페테르부르크중앙박물관에는 시선을 사로잡는 유화 한 점이 있습니다. 노인이 젊은 여인의 젖을 물고 있는, 좀은 해괴한 그림이지요. 그럼에도 이 유화가 보는 이의 마음을 사로잡는 것은 나폴레옹 전쟁 때의 일입니다. 내 사전에 불가능이 없다던 나폴레옹이 러시아를 침공했다가 폭설과 추위로 패퇴하는 비극을 맞지요. 그러나 비참하긴 눈구덩이에 갇힌 마을도 마찬가지. 먹을 것이 떨어진 가족들이 서로의 앞에서 굶어죽는 상황이 벌어집니다. 유화는 이 참담함 속에서 늙은 아버지에게 자신의 젖을 물려 마지막 사랑을 전하는 딸의 모습을 화폭에 담았습니다. 사랑은 이런 빛깔로도 직조돼 전율을 주지요. 사람들이 사랑에 열광하는 것은 타인과 통하려는 욕구 때문입니다. 한편의 영화를 보고자 하는 사소한 욕구 저변에도 타인과 통하고 싶은 욕망이 깔려 있습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가장 완성된 소통형태는 사랑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한다는 것은 유한하고 외로운 인생을 완전한 것으로 끌어올릴 수 있는 유일한 구원의 빛이자 출구로 다가가는 것이지요. 그러나 현실은 사랑을 가능하지 못하게 하는 상처와 조건으로 가득 차 있는 것이 비극입니다. (소설가 이관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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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정한 나를 찾는 길
고통과 역경의 연속이 우리가 사는 삶입니다. 게다가 삶을 불완전한 존재로 살아야 하니 바람에 날리는 연약한 갈대와 같습니다. 한없이 약하고 불완전한 인생에 더 마음 쓰이는 것은, 인생은 동전과 같다는데 있어요. 무엇이든 원하는데 사용할 수 있지만, 딱 한 번밖에 쓸 수 없습니다. 그래서 허투루 소비할 수 없는 1회성 시간을 손에 들고 있는 셈이지요. 이처럼 운신의 폭은 제한돼 있고, 사는 시간은 유한하고, 한치 앞을 내다보지 못한 채 사는 우리입니다. 파도에 떠밀려 다니는 부평초처럼 아무 힘도 능력도 없는 인생을 살면서, 왜 사람들은 하늘 높이 나는 새처럼 오르고 싶어 하고, 무한한 욕망에 사로잡혀 있는지, 온전한 자신의 모습엔 눈을 감습니다. 얼마나 문제가 있으면 성경에 “사람이 자기의 약한 것을 인정하는 것이 온전해 지는 것의 첫걸음”이라고 했을까. 만물의 영장이라고 하는 사람들의 언행을 보면, 어찌 저리도 허술하나 생각할 때가 종종 있습니다. 요즘 사람들은 자신의 약점과 한계를 인정하기보다 ‘할 수 있다’는 자기 최면을 끊임없이 걸고 오직 그것만 꿈꾸며 사는 듯합니다. 수많은 자기계발 ? 인생수험서가 넘쳐나고, 소셜 미디어에서 쏟아져 나오는 과잉정보에 무엇이 진짜고 가짜인지, 누가 적인지 아군인지 구분 못하고, 내 좋으면 그만이라는 ‘확증현상’에 매몰됩니다. 내 취향에 맞는 것만 찾으려고 하니까요. 자신을 살피지 못하면 욕망은 과잉되고, 교만은 웃자랍니다. 자칫하면 모방된 의식과 방식으로 한 번뿐인 삶을 그림자 인생으로 살아가기가 쉽습니다. 어떻게 해야 나답게, 나다운 삶을 살 수 있을까? 성경은 먼저 자기와의 조화를 이루라고 합니다. 진정한 나를 찾는 길은 있는 그대로의 나, 내 약점과 단점을 인정하는 것에서 시작됩니다. 그렇게 시작하기가 좀은 힘들 수 있어도, 나의 능력과 한계를 드러내놓고 인정할 때, 비로소 진짜 나를 찾아 나갈 이정표를 세울 수 있습니다. 남들이 ‘할 수 있다’고 외치니까 나도 따라 외친다거나 남들의 시선을 생각해 ‘척’ 하며 사는 것은 자기와의 부조화를 재촉하는 일입니다. 착한 사람처럼 보이려고 하면 정작 착한 사람은 될 수 없고, 남에게 보이는 일에 신경 쓰면 정작 자신의 삶에서 주인공이 될 수 없습니다. 결국 삶의 주도권을 뺏기고 정작 해야 할 내 일은 하지 못하게 됩니다. 자신에게 주어진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며 소소한 일상에 기뻐하고 정한 목표를 향해 끊임없이 나가려는 사람이 진짜 나를 발견한 사람입니다. 오늘을 열심히 살면서 드러나는 자신의 모습을 그대로 인정하는 사람, 이것이 나와 조화를 이룬 사람의 모습이지요. 자신에 대해 눈 감고 있는 사람은 결코 진정한 나를 찾아낼 수 없고, 변화를 기대할 수도 없습니다. 인간사회는 다양한 능력, 성격, 취향과 다른 얼굴의 사람들이 모여 서로를 이웃하며 사는 곳입니다. 그러려면 진실 돼야 하고 서로에게 믿음을 줘야 합니다. 나와의 조화를 이룬 사람만이 진실로 이웃과 조화를 이루며 살 수 있습니다. 가면을 쓰거나 가식된 행실로는 소소한 일상의 행복을 못 보는 청맹과니가 되기 쉽습니다. 나무는 홀로 서 있는 것 같지만 숲을 이루면서 완전해 집니다. 풀과 꽃, 벌레들과 생명력을 교감하며 올곧게 자라날 수 있는 것이지요. 숲이 돼 숲의 눈으로 세상을 보면 나무도 풀도 꽃도 벌레도 모두 평등한 생명체이듯 세상의 모든 사람은 소중한 내 이웃입니다. 홀로 선 나무라고 생각했던 나 역시, 이웃과 더불어 숲을 이루며 자연과 조화를 이루어 살 때 완성되는 존재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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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하나의 세상, 그래도
누구처럼 말하고 누구처럼 사는 사람의 차이는 뭘까. 이태석 신부같이, 데레사 수녀처럼 우리 곁에 사셨던 분들이 그리움으로 숨 쉬는 오늘입니다. “간절히 원하면 이루어진다.”고 한 파울로 코엘료, 직관을 따랐을 뿐이라는 스티브 잡스, “공부가 가장 쉬웠다”고 말하는 수능 만점자까지. 그렇게 쉬운 일들이 왜 내가 손을 댔다하면 껀껀이 망하는 걸까. 바닷가 질척한 펄 아래 ‘그래도(島)’ 라는 섬이 섰습니다. 세상에서 상처 받고, 고통 받고 살다가 세상이 왜 이래? 이건 아니잖아! 숨이 찬 사람들이 모여들어 살아가는 곳 입니다. 더 이상 갈 곳이 없으니 숨길 것도 없다는 사람들이 어우렁더우렁 사는 섬입니다. 아름다운 섬 그래도. 섬마을 초입에 걸린 슬로건부터 철학적입니다. 셰익스피어를 전공했다는 분이 내걸었습니다. ‘To be or not to be that is Question.’ 그가 마을 사람들에게 해준 설명은 보다 심오합니다. “사람답게 죽을 텐가, 죽은 듯이 살 텐가, 삶이란 평생의 업이로다.” 오늘은 그래도가 열린지 100일. 주민전체회의가 열렸습니다. 그동안 통성명에 인사는 주고받았지만 인생 족보에 대해선 서로가 함구해 왔지요. 오늘은 상처는 상처대로 아픔은 아픔대로 살아온 인생을 털어놓고, 그래도 사람답게 살자고 만든 자리입니다. 턱수염이 짙은 운영회장이 일어나 “지금까지 돈 낳고 사람 낳다고 우겨댄 게 바로 나여” 하고 말머리를 엽니다. 당초 돈이란 사람을 위해 생긴 것인데, 돈에 집착하다가 돈의 노예가 돼버린 바보가 여기 서 있다며 돈 때문에 실패한 자신을 고백합니다. 섬에서 가장 예쁜 부녀회장도 상처가 커 보입니다. 옷이란 원래 몸을 보호하려고 생겨난 건데 어쩌다 명품만 치렁치렁 감고 살다가 옷을 보호하는 치사한 여자가 되었답니다. “아무리 옷이 명품이고 화려하면 뭘 해요 저녁엔 다 벗어야 하는 데.” 사치하다 탈난 여자의 변입니다. 이런 남자도 있습니다. 사람이 살려고 집을 지었는데, 집에 환장한 사람처럼 집에다 처바르고 비까번쩍 치장했더니, 뭐야! 내가 집을 지키는 개 신세가 됐다고 합니다. 인생에 너무 많은 의미를 부여하다가 거꾸로 생각의 노예가 됐다는 생각장이 40대. 핸드폰 충전은 열심히 하면서 진짜 인생은 충전하지 못했다는 30대 고백이 이채롭습니다. 많은 걸 쟁여만 두었지 한 푼 제대로 써보지 못하고 갈 날을 기다리는 현대인이 나라는 60대 말기암 남자의 얘기는 주위를 숙연하게 합니다. 오지도 않은 노후대책에 매달리다가 오늘을 잃고, 구제받지 못할 희귀성 괴질에 걸렸다는 분의 스토리는 바로 내 일처럼 들려옵니다. 나누면 행복이 온다는 평범한 진리를 실천하지 못한, 스스로 장애인이라는 현대인도 있습니다. 사랑할 수 있는 시간이 얼마 남지 않음을 알고도 어영부영하다 아내를 저세상으로 보낸 자칭 바보천치도 있습니다. 인류가 파멸하는 길이라고 방방 뜨다가 슬그머니 돈 챙기고 폐수방류에 눈 감은 환경운동가. 모두 그래도 사람들의 자화상입니다. 아등바등 벌어 쌓아놨더니 자식들 재산 싸움 되고 결국 큰 아들 칼부림에 둘째가 죽었다는 노부부의 탄식도 쏟아집니다. 어깨를 들썩이며 우는 부부 앞에 다들 눈시울이 붉습니다. 버스 떠나면 파장이 빤한데 어쩌자고 일만하다가 낙상으로 고관절을 깨먹었다며, 평생 꿈인 세계여행까지 일장춘몽이 됐다고 뒤돌아 앉는 여자도 있습니다. 그래도 사람들의 공통점은 딱 둘입니다. 모두가 슬픈 사연을 안고, 세상을 거꾸로 보며 살았다는 점이죠. 머리를 숙여 다리가랑이 사이로 본 세상이 진짜로 생각하며 전도몽상(顚倒夢想)의 삶을 산 사람들. 사물을 바로보지 못하고 거꾸로 보거나, 헛된 꿈을 꾸면서도 현실로 착각하며 헤맨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더 행복하고 아름다운 섬이 되고픈 그래도. 어떤 경우에도 목숨만은 끊지 말고 희망의 끈은 쥐자는 사람들의 삶의 터전입니다. GPS 에도 잡히지 않은 곳, 그래서 더 아련하고 외로운 섬, 그래도 꽃은 피고 봄은 깊어 갑니다. 오늘도 그래도 사람들은 “우리는 모두 사라진 일상을 찾아 나선 순례자” 라면서 헛헛한 웃음을 하늘에 날리지요. (소설가 이관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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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랑과 아리랑고개
외국인이 내게 ‘아리랑’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어떻게 말하시겠어요? 나도 똑 부러지게 답하지 못한 아쉬운 기억을 지닙니다. 사람들은 대부분 우리민족이 가장 사랑하는 노래로 ‘아리랑’을 떠올릴 것입니다. 아리랑만큼 우리 민족의 서정이 곰삭혀진 노래는 없을 테니까요. 민초들이 토해내는 세상살이의 서러움, 모진 시집살이를 탄식하는 아낙네, 어느 감정이든 얹기만 하면 노랫가락이 되는 아리랑입니다. 아리랑의 고개는 거친 세상을 살면서 숱한 애환과 희비애락을 겪을 때마다 숱하게 넘었을 마음 속 고개이기도 합니다. 아리랑은 혼자 부를 때보다 여럿이 ‘떼창’을 할 때가 더 감흥을 주지요. 정교하게 짜인 흥과 한이 공명을 일으키니까요. 임권택 감독의 영화 ‘서편제’의 명장면은 오정해(송화 역)가 구성지게 아리랑을 육자배기로 뽑는 장면입니다. “아리아리랑 스리스리랑 아라리가 났네/ 문경새재는 어느 고개인고...” 무심코 듣는 가락에 의문이 듭니다. 진도 아리랑에 문경새재가 왜 등장하지? 한동안 나를 낯설게 했던 대목입니다. 나운규 영화 ‘아리랑’ 마지막 장면도 아리랑고개입니다. 주인공이 이 고개에서 일본 경찰에 연행될 때 절규합니다. “나를 위해 울지 마오. 나는 반드시 돌아옵니다. 나와 함께 아리랑을 부른 생각을 하며 아리랑을 기억해 주시오.”라는 대사가 심금을 울립니다. 열사의 땅 중동 건설근로자도, 파독 광부들도, 2002 월드컵 순간에도 목청을 높였던 노래는 아리랑입니다. 슬퍼서 부르고 좋아서 부르고... 아리랑 연구가인 서지학자 김연갑 선생은 문경새재를 아리랑고개로 지목합니다. 그는 “아리랑은 한국인에게 보편적이면서도 특별한 것‘이라고 하면서 ”만일 아리랑에서 아리랑고개가 없다면 그 많은 영화, 연극, 시, 소리 등에서 많은 어려움을 겪었을 것”이라고 민족정서에 끼친 영향이 매우 크다고 전합니다. 아리랑은 1869년부터 큰 변화기를 맞습니다. 7년 동안 진행된 경복궁 중수 때 영향을 받으면서죠. 삼남에서 차출된 부역꾼들이 한양으로 올라오는데 대부분 문경새재를 넘어야했습니다. 그곳에 유달리 많았던 박달나무는 민초들이 새재를 넘으면서 숨을 돌리고 빈궁한 처지를 하소연했던 신목입니다. 그러던 어느 순간, 아리랑의 상징목이 될 만큼 민초의 애환이 서린 박달나무가 몽땅 벌목돼 사라진 사실이 알려집니다. 경복궁 중수에 쓰기 위해 모두 공출당한 것이지요. 그래서 자조적 언어로 “문경새재 박달나무는 홍두깨 방망이로 다 나간다” 며 장탄식을 쏟았지요. 이는 학정을 비웃는 상실감의 표현이기도 했습니다. 아리랑은 부역꾼들이 전국에서 모였다 흩어지며 부르던 아라리가 아리랑으로 변주되었다는 게 정설로 보입니다. 경복궁 중수가 끝나자 부역꾼 상당수가 일을 찾아 철도 노동자로 변합니다. 나운규는 이들이 철길을 놓으며 절절하게 부르는 아리랑을 가슴에 담았다가 후일 영화로 만들게 되었다는 군요. “극장에는 손구락 하나를 꼬즐 틈 없시” 당시 신문 기사 표현대로 흥행에 성공한 당대 최고의 영화인 나운규의 ‘아리랑’도 탄압의 대상이 되었지요. 조선총독부가 아리랑에 탄압을 가하자 아리랑이 지하로 흘러들면서 항일 감정을 담는 등 다양한 가사가 만들어지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우리 대중가요에는 ‘고개’를 붙인 노래가 유난히 많습니다. 사람들의 가슴을 저미는 ‘단장의 미아리고개’, 구름도 쉬었다 넘을 만큼 높은 ‘추풍령고개’, 기약 없는 이별의 슬픔을 담은 ‘울고 넘는 박달재’, 징용으로 아들을 기차에 실어 보내는 사연 많은 ‘비나리는 고모령’도 있어요. 고개는 곧 한의 상징이고, 고개를 넘는 일은 고통의 표징이었습니다. 사람들은 아리랑고개가 어딘 지엔 별 관심이 없습니다. 김연갑 선생은 아리랑고개를 문경새재로 말하지만, 많은 문인들은 아리랑고개를 ‘마음 속 상상의 고개’로 생각합니다. 재밌는 것은 밀양아리랑에도, 진도아리랑에도 문경새재 박달나무가 나온다는 점이지요. 정확히 알려진 건 없지만, 신목처럼 아낀 새재의 박달나무를 몽땅 베간데 대한 불만이 전국으로 퍼지면서 가락에 녹아든 걸로 유추해 볼 수는 있겠지요. (소설가 이관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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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밥 한 번 먹어요.
“우리 언제 밥 한번 먹어요.” 이처럼 살가운 말이 있을까. 아부하는 것도 아니고, 지나침과 모자람도 없는, 정감을 주는 이만한 표현도 없습니다. 말하고 듣는 사람 다 기분 좋게 하니 참 좋아요. 먹는 것에 허기진 보릿고개 시절도 아니지만, 예나 지금이나 먹는 일은 귀하고 소중합니다. 두 사람이 마주앉아/ 밥을 먹는다/ 흔하디 흔한 것/ 동시에 최고의 것/ 가로되 사랑이어라.”고은 친구든 남녀든 사람끼리 마주앉아 밥 먹는 것만큼 일상사가 어디 있겠어요. 좋아하는 사람들과 한 끼를 같이 하는 일은, 유한한 삶을 사는 인생들이 정분과 위로를 나누는 시간입니다. 그 짧은 순간이 기억이 되고 추억이 되고 그리움으로 남습니다. 순대국 그릇 사이에 깍두기 한 접시 놓고 웃음 짓는 사이, 따뜻한 마음과 행복이 익어갑니다. 바쁘다는 핑계로 친구의 청을 사양한 적 없나요? 내가 후회하는 게 그런 것들입니다. 이번 일만 마치면 연락하겠다고 했는데, 사는 게 늘 그렇지요. 일이 끝나기도 전에 또 일이 터지고, 출장가고, 그러다 1년이 후딱 갑니다. 나이 들며 그런 기억이 안쓰럽습니다. “승진만 하면, 적금 붓는 것 끝내면” 이란 가정법에 주술을 걸다 해가 바뀌고 1년이 갑니다. KBS 1TV ‘개그콘서트’에 ‘밥 묵자’ 코너가 있었지요. 권위적인 가장이 가족들의 공격을 받을 때면 “자, 우리 밥 묵자.”로 분위기 반전을 꾀합니다. 밥 먹을 때는 개도 안 건드린다니까 마음이 상했어도 밥상 앞에서는 일단 감정부터 추스르지요. 대화 없이 숟가락 소리만 달그락거릴 땐 식후 분위기가 점쳐집니다. 그래도 칭찬만은 밥상머리가 제격이지요. “여보. 야가 이번 시험서 평균 10점이나 올랐대요.” “정말? 그래 잘했다. 우리 외식하자 주말에.” 독신으로 사는 여자의 말입니다. 사람들과 메신저로 대화를 나누지만, 대부분 끝머리에 “우리 얼굴보고 밥 한 번 먹자”는 말을 빼먹지 않습니다. 곤혹스러운 것은 다른 직장처럼 밥시간을 맞추기가 어려운 데 있죠. 자칭 ‘노가다’라는 무대 일을 하다보면 삼시세끼 제때 찾기가 어렵습니다. 낮에 잠자고 남잘 때 일어나 일하는 뒤바뀐 생활이 많다보니까요. 성격이 불같은 친구가 아침부터 전화에다 “밥 한번 먹자는 데 그리 힘드냐? 세상일 혼자 해?” 약속에 빠졌다고 십자포화를 맞습니다. 가까스로 전화를 끊자 “밥은 먹고 다니냐?” 엄마가 빈집에 들렀다가 텅 빈 냉장고 문짝에 붙인 메모 글이 눈에 띕니다. 영화 ‘살인의 추억’ 에서 송강호가 용의자에게 던진 대사와 같은 말이죠. 가끔 그런 말을 들으면 “잘 먹어. 다 먹고 살자는 거알아.” 그렇게 해석합니다. 먹자고 일하든, 일하려고 먹든 밥은 참 중요합니다. 대학생 때 교수님이 설렁탕 한 그릇을 사주셨지요. 학생에겐 은총의 날입니다. 감사한 마음으로 국물까지 싹 비웠는데 다음 날 연락이 옵니다. “설렁탕 맛있었냐?” “네 교수님. 다음에도 그런 기회를.” 이틀 후 똑 같은 말을 들을 때도 우스개다 했는데 “그 집 깍두기 맛있지?” “내가 사준 설렁탕 안 잊었지?” 나중에는 토하고 싶을 정도로 후회가 됐지만, 돌이켜 보면 학창의 추억 하나를 내게 주신 분입니다. 오늘 그 교수님께 점심을 대접했습니다. ‘밥 한번’이 인연이 돼 차진 관계로 발전했지요. 그러면서 깨닫습니다. 인생에서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이 타이밍임을. 팀 페리스가 쓴 '지금 하지 않으면 언제 하겠는가‘ 에는 인생에서 소중한 것들을 일렬로 세워 처리하지 말라고 합니다. 건강, 가족, 사람관계 등은 하나씩 순차방식으로 해내는 게 아니라고 했지요. 삶은 동시적으로 이루어지는 것. 열심히 꿈을 좇아 일하면서 가족과 따뜻한 대화를 나누고, 시간내 운동하고, 소중한 사람들의 안부를 챙기는 일들이 그렇습니다. 우리는 생각보다 핑계가 많습니다. 바쁘다고 피곤하다고 미루며 사양하죠. 실수하는 것입니다. 사람들과 부지런히 만나고 한 끼 밥을 나누세요. 그게 삶을 풍요롭게 하는 보약입니다. 살아온 세월에서 이런 메시지를 깨칩니다. “당신이 누군가에게 줄 수 있는 가장 위대한 선물은 시간이다”란 것을. 이때 시간은 누군가와 함께 한 시간에 깃든 소중한 추억이지요. 그래서 시간은 첫째도, 둘째도 ‘내는 것!’ (소설가 이관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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탁월한 선택, 최고의 만남
독일작가 한스 카로사는 “인생은 만남의 연속이다. 만남이 없는 건 죽음뿐” 이라했습니다. 운명적 요소가 다분한 만남은 축복이기도 하지만 비극의 출발도 됩니다. 만남은 내구성이 길지 못한 흠이 있어서죠. 그래서 만남은 이별을 잉태한다는 슬픈 가설을 낳습니다. 아이에게 그토록 조르던 장난감을 사줘 보세요. 잠을 잘 때도 끼고 잘 만큼 아끼는 것 같지만 실은 오래가지 못합니다. 곧 한 구석에 버려놓고 흥을 잃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한 번뿐인 생애에서 우리가 찾는 행복은 무엇일까요. 그것이 무엇이든 막상 얻고 나면 세월과 함께 시들해지는 경우를 경험합니다. 세상에 영원한 만족을 주는 건 없습니다. 사람들은 끊임없이 새 것을 갈망하고, 어제의 새 것을 오늘의 헌 것으로 버리며 삽니다. 지구력이 세다는 남녀의 사랑도 그래요. 지순지고로 연모한 사랑이 어느새 희미한 옛 사랑의 그림자로 돌아서는 건 숱한 노래 가사로도 확인됩니다. 그래서일까요? 벼락처럼 나타난 순애보 사랑, 짧고도 긴사랑, 부귀와 명예도 다 버리는 사랑 이야기는 물씬한 감동을 전합니다. 이 세상에는 영화보다 더 영화 같은 러브 스토리들이 있습니다. 절묘한 선택을 한 세기의 커플들 사랑 이야기가 이에 해당하겠지요. 세기의 톱스타 리즈 테일러와 리처드 버튼은 두 번의 결혼, 두 번의 이혼을 합니다. 테일러는 이혼하면서 사유를 “너무 사랑했기 때문에... 우리의 별거가 다시 우리를 결합시켜 줄 것으로 믿는다.”고 했지요. 남편과 아내를 버려 불륜커플이란 곱지 않은 시선 속에 결혼식을 올린 두 사람. 버튼은 테일러에게 33캐럿짜리 다이아 반지를 선물해 온 세계 여성의 가슴을 달뜨게 했지요. 하지만 알코올중독에 빠진 버튼 때문에 9년 만에 파경을 맞고, 이후 식지 않은 사랑으로 재결합을 하지만 반년도 못가 다시 헤어집니다. ‘7명의 남편과 8번의 결혼’ 이력을 남긴 테일러는 가장 사랑한 남자로 버튼을 꼽고, 죽으면 그의 고향에 뿌려달라는 유언도 남겼지요. 그녀는 배우자만 여덟 번의 선택을 한 셈이지요. 현대판 신데렐라, 다이애나와 찰스 왕세자의 사랑도 그렇습니다. 이들의 결혼은 전 세계의 이목을 모은 세기의 결혼식이란 기록을 남겼지요. 찰스는 원래 다이애나의 언니와 교제하다가 실제 반려자로는 청순한 이미지의 동생을 선택했습니다. 두 아들을 낳으며 영국민의 총애를 받은 다이애나였지만, 찰스의 계속되는 여자문제로 괴로워하다가 한순간 신데렐라에서 비련의 여인으로 전락하고 맙니다. 그리고 중동의 한 왕자와 자동차로 이동 중 파파라치의 추적을 따돌리려다가 전복사고를 내고 비운의 삶을 마감합니다. “사람들은 나를 마린 먼로와 비교하지만 그녀와 비교되고 싶진 않아요. 그녀의 죽음이 빨라서가 아니라 사랑을 못 이루고 죽었기 때문이죠. 난 사랑을 이루고 싶어요.” 다이애나의 간절했던 소망은 잘못된 만남과 선택으로 슬프게 막을 내립니다. 천사 같은 여자, 능력 있는 남자, 모두가 넋을 놓을 그런 만남을 부러워 하지 마세요. 그 선택이 탁월하지도 최고인 것도 아니니까요. 좀 부족해도 내 옆구리를 한 결 같이 지키고 있는 남자, 살뜰하게 가족을 잘 돌보는 내 옆의 여자가 더 탁월한 선택입니다. 그런 생각으로 내 옆 사람을 바라보고 한 번 빙그레 웃어보면 어떨까요? “당신 왜 웃어요? 얼굴에 뭐 묻었어요?” “아니, 그냥 예뻐서” “사람 싱겁긴!” 핀잔하면 한 번 더 웃어보이세요. 치즈라고 말하면서... 저물어가는 2019년의 끝말로 ‘사랑’이란 말을 선택해 보세요. ( 글 소설가 이관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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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보들의 천국
우리사회에 점점 꿈을 잃는 사람이 많아지는 것 같아 안타깝습니다. 젊은이를 보면서 그런 생각을 더합니다. 꿈이 메마른 사회는 가뭄 날의 풀밭같이 까칠해져 온기가 없고 스칠 때마다 소리가 납니다. 사람들이 자기자리를 진득하게 찾으려 하지 않아요. 파르르 끓는 냄비처럼 금세 싫증을 내고 다른 사람의 동향에 민감합니다. 찰나적인 것을 좇아가고 순간에 많은 이익을 낸 사람을 승자로 부러워합니다. 임시변통에 능하면 아예 재주꾼으로 묘사되기도 하지요.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아이작 싱어의 소설 ‘바보들의 천국’은 이렇게 전개 됩니다. 주인공 아첼은 부자 상인의 외아들입니다. 너무 게을러서 공부도, 일도, 만사를 귀찮게 생각할 뿐입니다. 훗날, 아버지의 사업을 물려받아야 한다는 걸 생각하면 벌써부터 머리가 지끈 지끈 아파온데요. 그러던 중 유모로부터 천국에는 일할 필요가 없고 매일 놀고먹을 수 있다는 말에 혹합니다. “그래 이렇게 살 바엔 죽어 천국에나 가야지.” 그는 천국에 가려는 욕망으로 죽기를 바라며 꼼짝 않고 침대에만 누워있자 아첼 부모는 고민 끝에 여러 사람들과 상의를 합니다. 어느 날, 눈을 뜨니 딴 세상이 열렸습니다. 아첼은 화려한 방에 누워있었고 날개가 달린 천사들이 찾아옵니다. “천국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천국? 여기가요?” 아첼은 날듯이 기뻐합니다. 하루 종일 아무 일도 하지 않아도 잔소리하는 사람이 없고, 잘 때가 되면 천사들이 포근한 침대에 눕혀 줍니다. 식사시간엔 온갖 산해진미를 담은 금 접시, 금 쟁반이 들어옵니다. 그렇게 꿈같은 시간이 며칠 지나자 아첼은 갓 구은 빵과 버터, 커피가 먹고 싶어 천사에게 주문합니다. 그랬더니 천국에는 그런 음식이 없다고 하네요. 실망한 아첼은 “지금 몇 시나 되었어요?” 하고 물으니 저런 “천국엔 시간이 존재하지 않습니다”라는 말로 돌아옵니다. “그럼 난 이제부터 무얼 하나요?” 천사가 말합니다. “천국에서 할 일이란 없어요.” 아첼은 맛난 산해진미를 먹어도 잠자는 일밖에 할 일이 없음을 알게 됩니다. 처음으로 뭔가 일하고 싶은 마음이 간절해집니다. 그러나 천사의 말은 똑 같지요. “천국에서 할일이 없어요.”라고. 아첼은 가짜 천국에서 한 주를 보내자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습니다. 화난 소리로 크게 외칩니다. “이렇게는 못 살아! 차라리 죽는 게 백번 낫겠어!” 하지만 왕 실망! 천사는 ‘천국에는 죽음조차 없다’는 걸 알려줍니다. 8일째 되는 날, 그의 부모는 아들을 데리고 지상으로 오지요. 이로부터 아첼은 열심히 일하고 생각하는 사람이 되었다고 합니다. 싱어 특유의 우화적이면서도 단순한 이야기지만 사람에게 주는 메시지는 명증합니다. 모든 것을 완벽하게 갖춘 곳, 아무 할 일도, 희망도 없는 곳, 그런 곳이 진정한 천국은 아닐 테니까요. 삶에 조급증을 느끼는 사람일수록 멀리 볼 줄을 모릅니다. 그러면 산 너머에 도도히 흐르는 강을 바라보는 시력을 잃게 됩니다. 눈에 꿈이 담기지 않으면 산 너머가 보이지 않습니다. 우직하게 내 일을 찾고 꾸준히 노력하는 곳에서, 우리가 만나는 하루하루의 일상 속에서, 꿈꾸는 만들어지고 있습니다. 오늘이 힘들어도 내 눈에 꿈을 담고 고통의 시간을 견뎌내는 마음의 근력을 키우면. 그리던 천국이 다가오지 않을까요? (글 소설가 이관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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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은 자리를 지켜주는 힘
새해가 되면 하는 일이 있습니다. 지난 해 일기를 살피면서 나쁜 습관이나 고쳐 야 할 것은 무엇인지 찾아 기도하는 일입니다. 그럼에도 매년 계속해 이름을 올리는 제목들이 있습니다. 하나는 ‘편리함에 물들고 있다’는 모습을 확인하는 일이죠. 이는 ‘게을러터지다’는 뜻과도, 이기적인 생각과도 통하죠. 편리하고 빠른 것만 눈에 들어 했으니까요. 자잘한 욕심들도 내가 버려야 할 짐입니다. 곳곳에 독버섯처럼 일었다 시든 욕망의 분칠을 보면 아직도 내가 내려놓지 못했구나 하는 자책의 마음이 듭니다. 누군가 사람은 죽을 때까지 욕망의 포로라고 했습니다. 그것이 크든 작든 좋든 나쁘든 그러한 유혹에 시달려야 한다고. 하지만 이 둘은 내가 있어야 할 자리를 이탈할 때 생겼다는 점에서 되돌아보게 합니다. 사람이든 물건이든 각기 정해진 자기 자리가 있습니다. 별은 하늘에 있을 때 밝게 빛나고, 들꽃은 들판에 있을 때 가장 아름다우며, 아이는 엄마 아빠랑 있을 때 가장 행복합니다. 들꽃이 예쁘다고 몇 송이를 꺾어 집에 가져와 꽃병에 꽂아두면 며칠은 마음이 즐겁기도 하겠지요. 하지만 그 꽃을 꺾지 않았다면 집에서 사는 날보다 훨씬 많은 날을 살며 많은 사람을 기쁘게 하고, 꽃이 진자리엔 더 많은 꽃을 피울 씨앗이 땅에 뿌려졌겠죠. 그걸 알면서도 순간의 이기적 충동으로, 사랑해서라는 말로, 제자리에 잘 있던 것을 내 옆에 슬쩍한 적은 없나요? 모든 사람이 이 같은 이기적 사랑을 한다면 어떤 일이 생길까. 세상은 기쁜 사람보다 슬픈 사람이 많아지겠죠. 제자리를 찾아 행복한 사람보다, 제자리를 잃고 슬퍼하는 사람이 늘어날 것입니다. 파블로 네루다가 쓴 ‘안녕, 나의 별’은 제자리를 잃고 슬픔에 빠진 별 이야기 입니다. 밤하늘에 빛나는 별을 갖고 싶었던 소년이 별 하나를 따서 주머니 속에 넣습니다. 그 순간 도시가 새까맣게 어두워집니다. 밤하늘에서 반짝 이다가 소년의 주머니 속에 들어간 별은 무서워 떱니다. 몸이 추우니 마음도 춥습니다. 소년의 마음은 어떠할까요? 별과 다르지 않습니다. 그토록 갖고 싶었던 별을 가지면 행복할 줄 알았는데, 이상하게도 행복하지 않았어요. 매일 반복하는 일상이 낯설기조차 합니다. 무엇이 소년을 이렇게 만들었을까요. 집에 온 소년은 주머니에서 별을 꺼냅니다. 그러나 별빛이 너무 강해 숨길 수 없는 데다 사람들이 별빛을 보고 몰려올 것 같습니다. 별을 훔쳤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어쩌나, 소년의 마음이 불안해 집니다. 이러다가 엄청난 벌을 받지 않을까 두려운 생각이 들었습니다. 소년은 별을 손수건에 싸서 몰래 집밖으로 나옵니다. 별은 싸늘하게 식었습니다. 소년은 별이 잘못될까봐 죄책감이 들어, 별을 강물에 놓아줍니다. 별은 물결에 흔들리며 멀어져갑니다. 미안한 마음에 소년은 별에게 제대로 인사도 못했어요. 별을 두려움에 빠뜨리고, 소년을 불안하게 만든 건 무얼까? 바로 ‘욕심 많은 나’ 입니다. 이기적인 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사랑은 그가 있어야 할 자리를 알고 지켜주는 힘이지요. (글 소설가 이관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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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란 고유명사로 살기
어떡하면 좀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을까. 은퇴한 사람들이 자주 주고받는 말입니다. 누구는 생각을 바꾸라고 하고, 누구는 삶의 프레임을 확 뜯어 고치 라고 합니다. 하지만 말처럼 쉬운 일이라면 굳이 이러한 대화에 눈을 맞출 필요는 없겠지요. 연초에, 암 투병에서 가까스로 빠져나온 친구와 만나, 얼마나 힘든 나날을 보냈을까 연민했습니다. 통증에 매몰된 자신이 너무 비참했다고 합니다. 그러한 고통의 날을 반복하다가 문득 깨달음이 찾아왔다고 합니다. 내가 마지못해 살고 있는 오늘이 ‘누군가의 간절한 내일’ 임을 자각하면서 생명의 소중함이 뼛속 깊이 파고들더라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당연하게 여겼던 일상의 소소한 것들이 기적으로 변하면서 감사와 행복을 되찾을 수 있었답니다. 고통으로 포기하고 싶은 오늘을 새롭게 정의 하자 삶의 태도가 확 달라졌고, 용기와 희망을 되찾게 됐다고 말할 때는 눈가에 이슬이 맺힙니다. 인생은 몸으로 살은 만큼 안다고 하죠. ‘프레임을 바꾼다’는 말도 친구가 온몸 으로 전해줄 때 비로소 그런 것임을 느꼈습니다. ‘모든 끝은 어딘가로 들어가는 입구’입니다. 절망의 ‘끝’에 새 프레임을 씌우니 희망의 출구가 보입니다. 어느 작가는 자신의 서재를 ‘외부와 격리된 방’으로 규정했습니다. 단순히 서재로 부를 때는 걸려온 전화를 다 받았는데, ‘격리’로 바꾼 뒤는 전원부터 끄게 되더라고 합니다. 자신의 업을 ‘직업’으로 부르고, 누구는 ‘소명’으로 생각한다면, 이들 사이의 간극은 갈수록 벌어지게 됩니다. 소명으로 여긴 사람이 느끼는 행복감이 훨씬 더 클 테니까요. 많은 사람들이 행복한 삶을 사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 ‘난 행복하다’고 단정할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주변의 시선을 의식하며, 비교하며 살 뿐, 정작 난 누구이며 어떤 삶을 사는지 들여다보는 데는 생각보다 소홀합니다. 나보다도 남에게 보여 지는 나를 위해 더 많은 시간을 쓰고, 나만의 일을 사랑하기보다 대중의 모습을 따라가려고 합니다. 하루에도 수십 번 익명이 판치는 SNS에 접속해 ‘좋아요’ ‘멋져요’ 같은 버튼에 손이 가고, 남 일에 끼어들며 존재감을 지키려고 합니다. 가장 편한 삶은 나다울 때 찾아옵니다. 사람들에게 보이는 나를 살려고 하면 복제된 인생을 사는 것에 다름 아니지요. 여기엔 가식과 과장이 도사립니다. 나라는 고유명사로 살아야 행복의 기준이 내가 되고 편안함을 얻습니다. 사람이 사람다운 삶을 살 때처럼, 내가 나다울 때 안락함을 느끼게 되지요. 행복의 기준을 타인과 공유하면, 그때부터 나는 소외되기 시작합니다. 마을사람이 나를 아는 고향에서 사는 삶과 나를 모르는 도시에서 사는 삶은 크게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어느 집 누구로 살면 몸가짐부터 조심하지만, 익명으로 사는 도시의 삶은 규제받지 않아 훨씬 편하죠. 4차 산업, 5G시대가 행복을 가져다줄까요? 편리함은 주겠지만 외로움은 더 격해 지고, 나는 더 흐릿해 집니다. 진짜와 가짜, 진실과 조작, 실상과 허상의 혼란은 더 커 지겠죠. 올해는 나만의 사전으로 살았으면 합니다. 관습이란 프레임부터 거둬내고 고유명사로서의 나를 찾아, 잃어버린 나의 풍경을 만들며 살았으면 합니다. ‘나 자신을 아는 것이 참된 진보’ 라고 한 안데르센 말처럼. (소설가 이관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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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초적 그리움 사랑의 정체
- “우리는 하나의 심연에서 솟아올라 또 다른 심연으로 사라져간다. 이 심연과 심연 사이를 인생이라고 부른다.” 니코스 카잔차키스. 이 심연과 심연 사이에 여전히 난해하게 다가오는 것은 ‘사랑’입니다. 사랑이 강인한 생명력을 지닌 것은 인간의 원초적 그리움 때문이겠죠. 생명의 그리움, 자연의 그리움, 우리가 사는 일생도 따지고 보면 ‘그리움의 집짓기’에 다름 아닙니다. 평생을 매달려도 그 끝에 닿지 못하는 것. 다만 예술작품을 들추어 그 정체를 유추해볼 뿐이지요. 에리히 프롬은 사랑을 다섯 단계로 정의하고, 첫 단계를 ‘관심’으로 꼽았지요. 사랑은 관심에서 출발하기 때문입니다. 다음으로 ‘존중’을 꼽고, 여기서 발전한 단계가 ‘이해’입니다. 일방적 이해는 외눈박이 사랑을 부르지만 상호이해로 충족되면 뒷골목 사람이든 거리의 여자든 문제될 게 없다는 거지요. 그러나 이것만으로 참사랑의 척도를 가늠하기 어려운 게, 여기까지는 가식이나 정략적으로도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현대인의 사랑에서 가장 미덥지 못한 부문, 그래서 가장 강조돼야 할 덕목으로 에리히 프롬은 4단계의 ‘책임’을 들었지요. 사랑이 주는 감동은 책임부분에서 나옵니다. 책임이 담보되지 않은 사랑은 어느 한계 앞에 좌초할 수밖에 없지요. 그래서 사랑이 책임을 넘어설 때 비로소 ‘사랑은 주는 것’으로 완성됩니다. 흔히 사랑은 소프트한 것으로 생각하기 쉽지만, 사랑에는 고난이 전제돼야 합니다. 그 고난이 왔을 때, 맞서서 대응할지, 아니면 피할지. 여기서 사랑은 극명한 갈림길에 서지요. 사랑을 주제로 한 문학작품이나 영화를 읽고 보면서 사랑에 전율함은 사랑의 고귀한 가치인 ‘책임’을 다루기 때문입니다. 웨스트민스터 사원에는 유명작가의 작품이 아닌데도 관람객이 끊이지 않는 동상 하나가 있습니다. 왼팔이 없는 ‘팔 없는 여인상’. 사람들은 이 앞에서 옷깃을 여미고 상념에 잠깁니다. 그녀의 빈 어깨를 사람들이 얼마나 쓰다듬고 갔으면 반들반들 윤이 났을까요. 십자군전쟁 때의 일입니다. 무모한 원정 전을 벌인 십자군은 참패했고, 많은 병사가 모슬렘의 포로가 되었지요. 모두가 절망할 때 한 젊은 영국군 장교가 구명을 호소합니다. 그는 수용소의 놀림감이 되고, 마침내 모슬렘 사령관의 호출을 받습니다. “내가 없으면 아내는 죽습니다. 그녀를 위해 꼭 살아가야 합니다.” 사령관이 웃으며 “걱정 말게. 여자는 다른 남자가 책임질 걸세.” 이에 장교는 우리 사랑을 몰라서라고 강변했고, 그 말끝에 사령관은 야릇한 도박을 겁니다. “좋아, 그럼 내기하지. 자네를 사랑한다는 징표로 여자의 팔 하나를 가져오면 고려하겠네.” 이일을 까맣게 잊고 지내던 어느 날, 사령관 앞으로 썩은 팔 하나가 배달됩니다. 그제서 사령관은 과오를 사죄하고 장교를 풀어줍니다. 팔 없는 여인상의 모델은 장교의 부인입니다. 진한 감동으로 전율시켰던 그 여인의 빈 어깨는 시공을 넘어 뭇사람의 시선을 붙잡습니다. 생 페테르부르크중앙박물관에는 시선을 사로잡는 유화 한 점이 있습니다. 노인이 젊은 여인의 젖을 물고 있는, 좀은 해괴한 그림이지요. 그럼에도 이 유화가 보는 이의 마음을 사로잡는 것은 나폴레옹 전쟁 때의 일입니다. 내 사전에 불가능이 없다던 나폴레옹이 러시아를 침공했다가 폭설과 추위로 패퇴하는 비극을 맞지요. 그러나 비참하긴 눈구덩이에 갇힌 마을도 마찬가지. 먹을 것이 떨어진 가족들이 서로의 앞에서 굶어죽는 상황이 벌어집니다. 유화는 이 참담함 속에서 늙은 아버지에게 자신의 젖을 물려 마지막 사랑을 전하는 딸의 모습을 화폭에 담았습니다. 사랑은 이런 빛깔로도 직조돼 전율을 주지요. 사람들이 사랑에 열광하는 것은 타인과 통하려는 욕구 때문입니다. 한편의 영화를 보고자 하는 사소한 욕구 저변에도 타인과 통하고 싶은 욕망이 깔려 있습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가장 완성된 소통형태는 사랑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한다는 것은 유한하고 외로운 인생을 완전한 것으로 끌어올릴 수 있는 유일한 구원의 빛이자 출구로 다가가는 것이지요. 그러나 현실은 사랑을 가능하지 못하게 하는 상처와 조건으로 가득 차 있는 것이 비극입니다. (소설가 이관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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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초적 그리움 사랑의 정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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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정한 나를 찾는 길
- 고통과 역경의 연속이 우리가 사는 삶입니다. 게다가 삶을 불완전한 존재로 살아야 하니 바람에 날리는 연약한 갈대와 같습니다. 한없이 약하고 불완전한 인생에 더 마음 쓰이는 것은, 인생은 동전과 같다는데 있어요. 무엇이든 원하는데 사용할 수 있지만, 딱 한 번밖에 쓸 수 없습니다. 그래서 허투루 소비할 수 없는 1회성 시간을 손에 들고 있는 셈이지요. 이처럼 운신의 폭은 제한돼 있고, 사는 시간은 유한하고, 한치 앞을 내다보지 못한 채 사는 우리입니다. 파도에 떠밀려 다니는 부평초처럼 아무 힘도 능력도 없는 인생을 살면서, 왜 사람들은 하늘 높이 나는 새처럼 오르고 싶어 하고, 무한한 욕망에 사로잡혀 있는지, 온전한 자신의 모습엔 눈을 감습니다. 얼마나 문제가 있으면 성경에 “사람이 자기의 약한 것을 인정하는 것이 온전해 지는 것의 첫걸음”이라고 했을까. 만물의 영장이라고 하는 사람들의 언행을 보면, 어찌 저리도 허술하나 생각할 때가 종종 있습니다. 요즘 사람들은 자신의 약점과 한계를 인정하기보다 ‘할 수 있다’는 자기 최면을 끊임없이 걸고 오직 그것만 꿈꾸며 사는 듯합니다. 수많은 자기계발 ? 인생수험서가 넘쳐나고, 소셜 미디어에서 쏟아져 나오는 과잉정보에 무엇이 진짜고 가짜인지, 누가 적인지 아군인지 구분 못하고, 내 좋으면 그만이라는 ‘확증현상’에 매몰됩니다. 내 취향에 맞는 것만 찾으려고 하니까요. 자신을 살피지 못하면 욕망은 과잉되고, 교만은 웃자랍니다. 자칫하면 모방된 의식과 방식으로 한 번뿐인 삶을 그림자 인생으로 살아가기가 쉽습니다. 어떻게 해야 나답게, 나다운 삶을 살 수 있을까? 성경은 먼저 자기와의 조화를 이루라고 합니다. 진정한 나를 찾는 길은 있는 그대로의 나, 내 약점과 단점을 인정하는 것에서 시작됩니다. 그렇게 시작하기가 좀은 힘들 수 있어도, 나의 능력과 한계를 드러내놓고 인정할 때, 비로소 진짜 나를 찾아 나갈 이정표를 세울 수 있습니다. 남들이 ‘할 수 있다’고 외치니까 나도 따라 외친다거나 남들의 시선을 생각해 ‘척’ 하며 사는 것은 자기와의 부조화를 재촉하는 일입니다. 착한 사람처럼 보이려고 하면 정작 착한 사람은 될 수 없고, 남에게 보이는 일에 신경 쓰면 정작 자신의 삶에서 주인공이 될 수 없습니다. 결국 삶의 주도권을 뺏기고 정작 해야 할 내 일은 하지 못하게 됩니다. 자신에게 주어진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며 소소한 일상에 기뻐하고 정한 목표를 향해 끊임없이 나가려는 사람이 진짜 나를 발견한 사람입니다. 오늘을 열심히 살면서 드러나는 자신의 모습을 그대로 인정하는 사람, 이것이 나와 조화를 이룬 사람의 모습이지요. 자신에 대해 눈 감고 있는 사람은 결코 진정한 나를 찾아낼 수 없고, 변화를 기대할 수도 없습니다. 인간사회는 다양한 능력, 성격, 취향과 다른 얼굴의 사람들이 모여 서로를 이웃하며 사는 곳입니다. 그러려면 진실 돼야 하고 서로에게 믿음을 줘야 합니다. 나와의 조화를 이룬 사람만이 진실로 이웃과 조화를 이루며 살 수 있습니다. 가면을 쓰거나 가식된 행실로는 소소한 일상의 행복을 못 보는 청맹과니가 되기 쉽습니다. 나무는 홀로 서 있는 것 같지만 숲을 이루면서 완전해 집니다. 풀과 꽃, 벌레들과 생명력을 교감하며 올곧게 자라날 수 있는 것이지요. 숲이 돼 숲의 눈으로 세상을 보면 나무도 풀도 꽃도 벌레도 모두 평등한 생명체이듯 세상의 모든 사람은 소중한 내 이웃입니다. 홀로 선 나무라고 생각했던 나 역시, 이웃과 더불어 숲을 이루며 자연과 조화를 이루어 살 때 완성되는 존재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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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정한 나를 찾는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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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하나의 세상, 그래도
- 누구처럼 말하고 누구처럼 사는 사람의 차이는 뭘까. 이태석 신부같이, 데레사 수녀처럼 우리 곁에 사셨던 분들이 그리움으로 숨 쉬는 오늘입니다. “간절히 원하면 이루어진다.”고 한 파울로 코엘료, 직관을 따랐을 뿐이라는 스티브 잡스, “공부가 가장 쉬웠다”고 말하는 수능 만점자까지. 그렇게 쉬운 일들이 왜 내가 손을 댔다하면 껀껀이 망하는 걸까. 바닷가 질척한 펄 아래 ‘그래도(島)’ 라는 섬이 섰습니다. 세상에서 상처 받고, 고통 받고 살다가 세상이 왜 이래? 이건 아니잖아! 숨이 찬 사람들이 모여들어 살아가는 곳 입니다. 더 이상 갈 곳이 없으니 숨길 것도 없다는 사람들이 어우렁더우렁 사는 섬입니다. 아름다운 섬 그래도. 섬마을 초입에 걸린 슬로건부터 철학적입니다. 셰익스피어를 전공했다는 분이 내걸었습니다. ‘To be or not to be that is Question.’ 그가 마을 사람들에게 해준 설명은 보다 심오합니다. “사람답게 죽을 텐가, 죽은 듯이 살 텐가, 삶이란 평생의 업이로다.” 오늘은 그래도가 열린지 100일. 주민전체회의가 열렸습니다. 그동안 통성명에 인사는 주고받았지만 인생 족보에 대해선 서로가 함구해 왔지요. 오늘은 상처는 상처대로 아픔은 아픔대로 살아온 인생을 털어놓고, 그래도 사람답게 살자고 만든 자리입니다. 턱수염이 짙은 운영회장이 일어나 “지금까지 돈 낳고 사람 낳다고 우겨댄 게 바로 나여” 하고 말머리를 엽니다. 당초 돈이란 사람을 위해 생긴 것인데, 돈에 집착하다가 돈의 노예가 돼버린 바보가 여기 서 있다며 돈 때문에 실패한 자신을 고백합니다. 섬에서 가장 예쁜 부녀회장도 상처가 커 보입니다. 옷이란 원래 몸을 보호하려고 생겨난 건데 어쩌다 명품만 치렁치렁 감고 살다가 옷을 보호하는 치사한 여자가 되었답니다. “아무리 옷이 명품이고 화려하면 뭘 해요 저녁엔 다 벗어야 하는 데.” 사치하다 탈난 여자의 변입니다. 이런 남자도 있습니다. 사람이 살려고 집을 지었는데, 집에 환장한 사람처럼 집에다 처바르고 비까번쩍 치장했더니, 뭐야! 내가 집을 지키는 개 신세가 됐다고 합니다. 인생에 너무 많은 의미를 부여하다가 거꾸로 생각의 노예가 됐다는 생각장이 40대. 핸드폰 충전은 열심히 하면서 진짜 인생은 충전하지 못했다는 30대 고백이 이채롭습니다. 많은 걸 쟁여만 두었지 한 푼 제대로 써보지 못하고 갈 날을 기다리는 현대인이 나라는 60대 말기암 남자의 얘기는 주위를 숙연하게 합니다. 오지도 않은 노후대책에 매달리다가 오늘을 잃고, 구제받지 못할 희귀성 괴질에 걸렸다는 분의 스토리는 바로 내 일처럼 들려옵니다. 나누면 행복이 온다는 평범한 진리를 실천하지 못한, 스스로 장애인이라는 현대인도 있습니다. 사랑할 수 있는 시간이 얼마 남지 않음을 알고도 어영부영하다 아내를 저세상으로 보낸 자칭 바보천치도 있습니다. 인류가 파멸하는 길이라고 방방 뜨다가 슬그머니 돈 챙기고 폐수방류에 눈 감은 환경운동가. 모두 그래도 사람들의 자화상입니다. 아등바등 벌어 쌓아놨더니 자식들 재산 싸움 되고 결국 큰 아들 칼부림에 둘째가 죽었다는 노부부의 탄식도 쏟아집니다. 어깨를 들썩이며 우는 부부 앞에 다들 눈시울이 붉습니다. 버스 떠나면 파장이 빤한데 어쩌자고 일만하다가 낙상으로 고관절을 깨먹었다며, 평생 꿈인 세계여행까지 일장춘몽이 됐다고 뒤돌아 앉는 여자도 있습니다. 그래도 사람들의 공통점은 딱 둘입니다. 모두가 슬픈 사연을 안고, 세상을 거꾸로 보며 살았다는 점이죠. 머리를 숙여 다리가랑이 사이로 본 세상이 진짜로 생각하며 전도몽상(顚倒夢想)의 삶을 산 사람들. 사물을 바로보지 못하고 거꾸로 보거나, 헛된 꿈을 꾸면서도 현실로 착각하며 헤맨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더 행복하고 아름다운 섬이 되고픈 그래도. 어떤 경우에도 목숨만은 끊지 말고 희망의 끈은 쥐자는 사람들의 삶의 터전입니다. GPS 에도 잡히지 않은 곳, 그래서 더 아련하고 외로운 섬, 그래도 꽃은 피고 봄은 깊어 갑니다. 오늘도 그래도 사람들은 “우리는 모두 사라진 일상을 찾아 나선 순례자” 라면서 헛헛한 웃음을 하늘에 날리지요. (소설가 이관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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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하나의 세상, 그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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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랑과 아리랑고개
- 외국인이 내게 ‘아리랑’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어떻게 말하시겠어요? 나도 똑 부러지게 답하지 못한 아쉬운 기억을 지닙니다. 사람들은 대부분 우리민족이 가장 사랑하는 노래로 ‘아리랑’을 떠올릴 것입니다. 아리랑만큼 우리 민족의 서정이 곰삭혀진 노래는 없을 테니까요. 민초들이 토해내는 세상살이의 서러움, 모진 시집살이를 탄식하는 아낙네, 어느 감정이든 얹기만 하면 노랫가락이 되는 아리랑입니다. 아리랑의 고개는 거친 세상을 살면서 숱한 애환과 희비애락을 겪을 때마다 숱하게 넘었을 마음 속 고개이기도 합니다. 아리랑은 혼자 부를 때보다 여럿이 ‘떼창’을 할 때가 더 감흥을 주지요. 정교하게 짜인 흥과 한이 공명을 일으키니까요. 임권택 감독의 영화 ‘서편제’의 명장면은 오정해(송화 역)가 구성지게 아리랑을 육자배기로 뽑는 장면입니다. “아리아리랑 스리스리랑 아라리가 났네/ 문경새재는 어느 고개인고...” 무심코 듣는 가락에 의문이 듭니다. 진도 아리랑에 문경새재가 왜 등장하지? 한동안 나를 낯설게 했던 대목입니다. 나운규 영화 ‘아리랑’ 마지막 장면도 아리랑고개입니다. 주인공이 이 고개에서 일본 경찰에 연행될 때 절규합니다. “나를 위해 울지 마오. 나는 반드시 돌아옵니다. 나와 함께 아리랑을 부른 생각을 하며 아리랑을 기억해 주시오.”라는 대사가 심금을 울립니다. 열사의 땅 중동 건설근로자도, 파독 광부들도, 2002 월드컵 순간에도 목청을 높였던 노래는 아리랑입니다. 슬퍼서 부르고 좋아서 부르고... 아리랑 연구가인 서지학자 김연갑 선생은 문경새재를 아리랑고개로 지목합니다. 그는 “아리랑은 한국인에게 보편적이면서도 특별한 것‘이라고 하면서 ”만일 아리랑에서 아리랑고개가 없다면 그 많은 영화, 연극, 시, 소리 등에서 많은 어려움을 겪었을 것”이라고 민족정서에 끼친 영향이 매우 크다고 전합니다. 아리랑은 1869년부터 큰 변화기를 맞습니다. 7년 동안 진행된 경복궁 중수 때 영향을 받으면서죠. 삼남에서 차출된 부역꾼들이 한양으로 올라오는데 대부분 문경새재를 넘어야했습니다. 그곳에 유달리 많았던 박달나무는 민초들이 새재를 넘으면서 숨을 돌리고 빈궁한 처지를 하소연했던 신목입니다. 그러던 어느 순간, 아리랑의 상징목이 될 만큼 민초의 애환이 서린 박달나무가 몽땅 벌목돼 사라진 사실이 알려집니다. 경복궁 중수에 쓰기 위해 모두 공출당한 것이지요. 그래서 자조적 언어로 “문경새재 박달나무는 홍두깨 방망이로 다 나간다” 며 장탄식을 쏟았지요. 이는 학정을 비웃는 상실감의 표현이기도 했습니다. 아리랑은 부역꾼들이 전국에서 모였다 흩어지며 부르던 아라리가 아리랑으로 변주되었다는 게 정설로 보입니다. 경복궁 중수가 끝나자 부역꾼 상당수가 일을 찾아 철도 노동자로 변합니다. 나운규는 이들이 철길을 놓으며 절절하게 부르는 아리랑을 가슴에 담았다가 후일 영화로 만들게 되었다는 군요. “극장에는 손구락 하나를 꼬즐 틈 없시” 당시 신문 기사 표현대로 흥행에 성공한 당대 최고의 영화인 나운규의 ‘아리랑’도 탄압의 대상이 되었지요. 조선총독부가 아리랑에 탄압을 가하자 아리랑이 지하로 흘러들면서 항일 감정을 담는 등 다양한 가사가 만들어지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우리 대중가요에는 ‘고개’를 붙인 노래가 유난히 많습니다. 사람들의 가슴을 저미는 ‘단장의 미아리고개’, 구름도 쉬었다 넘을 만큼 높은 ‘추풍령고개’, 기약 없는 이별의 슬픔을 담은 ‘울고 넘는 박달재’, 징용으로 아들을 기차에 실어 보내는 사연 많은 ‘비나리는 고모령’도 있어요. 고개는 곧 한의 상징이고, 고개를 넘는 일은 고통의 표징이었습니다. 사람들은 아리랑고개가 어딘 지엔 별 관심이 없습니다. 김연갑 선생은 아리랑고개를 문경새재로 말하지만, 많은 문인들은 아리랑고개를 ‘마음 속 상상의 고개’로 생각합니다. 재밌는 것은 밀양아리랑에도, 진도아리랑에도 문경새재 박달나무가 나온다는 점이지요. 정확히 알려진 건 없지만, 신목처럼 아낀 새재의 박달나무를 몽땅 베간데 대한 불만이 전국으로 퍼지면서 가락에 녹아든 걸로 유추해 볼 수는 있겠지요. (소설가 이관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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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랑과 아리랑고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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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밥 한 번 먹어요.
- “우리 언제 밥 한번 먹어요.” 이처럼 살가운 말이 있을까. 아부하는 것도 아니고, 지나침과 모자람도 없는, 정감을 주는 이만한 표현도 없습니다. 말하고 듣는 사람 다 기분 좋게 하니 참 좋아요. 먹는 것에 허기진 보릿고개 시절도 아니지만, 예나 지금이나 먹는 일은 귀하고 소중합니다. 두 사람이 마주앉아/ 밥을 먹는다/ 흔하디 흔한 것/ 동시에 최고의 것/ 가로되 사랑이어라.”고은 친구든 남녀든 사람끼리 마주앉아 밥 먹는 것만큼 일상사가 어디 있겠어요. 좋아하는 사람들과 한 끼를 같이 하는 일은, 유한한 삶을 사는 인생들이 정분과 위로를 나누는 시간입니다. 그 짧은 순간이 기억이 되고 추억이 되고 그리움으로 남습니다. 순대국 그릇 사이에 깍두기 한 접시 놓고 웃음 짓는 사이, 따뜻한 마음과 행복이 익어갑니다. 바쁘다는 핑계로 친구의 청을 사양한 적 없나요? 내가 후회하는 게 그런 것들입니다. 이번 일만 마치면 연락하겠다고 했는데, 사는 게 늘 그렇지요. 일이 끝나기도 전에 또 일이 터지고, 출장가고, 그러다 1년이 후딱 갑니다. 나이 들며 그런 기억이 안쓰럽습니다. “승진만 하면, 적금 붓는 것 끝내면” 이란 가정법에 주술을 걸다 해가 바뀌고 1년이 갑니다. KBS 1TV ‘개그콘서트’에 ‘밥 묵자’ 코너가 있었지요. 권위적인 가장이 가족들의 공격을 받을 때면 “자, 우리 밥 묵자.”로 분위기 반전을 꾀합니다. 밥 먹을 때는 개도 안 건드린다니까 마음이 상했어도 밥상 앞에서는 일단 감정부터 추스르지요. 대화 없이 숟가락 소리만 달그락거릴 땐 식후 분위기가 점쳐집니다. 그래도 칭찬만은 밥상머리가 제격이지요. “여보. 야가 이번 시험서 평균 10점이나 올랐대요.” “정말? 그래 잘했다. 우리 외식하자 주말에.” 독신으로 사는 여자의 말입니다. 사람들과 메신저로 대화를 나누지만, 대부분 끝머리에 “우리 얼굴보고 밥 한 번 먹자”는 말을 빼먹지 않습니다. 곤혹스러운 것은 다른 직장처럼 밥시간을 맞추기가 어려운 데 있죠. 자칭 ‘노가다’라는 무대 일을 하다보면 삼시세끼 제때 찾기가 어렵습니다. 낮에 잠자고 남잘 때 일어나 일하는 뒤바뀐 생활이 많다보니까요. 성격이 불같은 친구가 아침부터 전화에다 “밥 한번 먹자는 데 그리 힘드냐? 세상일 혼자 해?” 약속에 빠졌다고 십자포화를 맞습니다. 가까스로 전화를 끊자 “밥은 먹고 다니냐?” 엄마가 빈집에 들렀다가 텅 빈 냉장고 문짝에 붙인 메모 글이 눈에 띕니다. 영화 ‘살인의 추억’ 에서 송강호가 용의자에게 던진 대사와 같은 말이죠. 가끔 그런 말을 들으면 “잘 먹어. 다 먹고 살자는 거알아.” 그렇게 해석합니다. 먹자고 일하든, 일하려고 먹든 밥은 참 중요합니다. 대학생 때 교수님이 설렁탕 한 그릇을 사주셨지요. 학생에겐 은총의 날입니다. 감사한 마음으로 국물까지 싹 비웠는데 다음 날 연락이 옵니다. “설렁탕 맛있었냐?” “네 교수님. 다음에도 그런 기회를.” 이틀 후 똑 같은 말을 들을 때도 우스개다 했는데 “그 집 깍두기 맛있지?” “내가 사준 설렁탕 안 잊었지?” 나중에는 토하고 싶을 정도로 후회가 됐지만, 돌이켜 보면 학창의 추억 하나를 내게 주신 분입니다. 오늘 그 교수님께 점심을 대접했습니다. ‘밥 한번’이 인연이 돼 차진 관계로 발전했지요. 그러면서 깨닫습니다. 인생에서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이 타이밍임을. 팀 페리스가 쓴 '지금 하지 않으면 언제 하겠는가‘ 에는 인생에서 소중한 것들을 일렬로 세워 처리하지 말라고 합니다. 건강, 가족, 사람관계 등은 하나씩 순차방식으로 해내는 게 아니라고 했지요. 삶은 동시적으로 이루어지는 것. 열심히 꿈을 좇아 일하면서 가족과 따뜻한 대화를 나누고, 시간내 운동하고, 소중한 사람들의 안부를 챙기는 일들이 그렇습니다. 우리는 생각보다 핑계가 많습니다. 바쁘다고 피곤하다고 미루며 사양하죠. 실수하는 것입니다. 사람들과 부지런히 만나고 한 끼 밥을 나누세요. 그게 삶을 풍요롭게 하는 보약입니다. 살아온 세월에서 이런 메시지를 깨칩니다. “당신이 누군가에게 줄 수 있는 가장 위대한 선물은 시간이다”란 것을. 이때 시간은 누군가와 함께 한 시간에 깃든 소중한 추억이지요. 그래서 시간은 첫째도, 둘째도 ‘내는 것!’ (소설가 이관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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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밥 한 번 먹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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탁월한 선택, 최고의 만남
- 독일작가 한스 카로사는 “인생은 만남의 연속이다. 만남이 없는 건 죽음뿐” 이라했습니다. 운명적 요소가 다분한 만남은 축복이기도 하지만 비극의 출발도 됩니다. 만남은 내구성이 길지 못한 흠이 있어서죠. 그래서 만남은 이별을 잉태한다는 슬픈 가설을 낳습니다. 아이에게 그토록 조르던 장난감을 사줘 보세요. 잠을 잘 때도 끼고 잘 만큼 아끼는 것 같지만 실은 오래가지 못합니다. 곧 한 구석에 버려놓고 흥을 잃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한 번뿐인 생애에서 우리가 찾는 행복은 무엇일까요. 그것이 무엇이든 막상 얻고 나면 세월과 함께 시들해지는 경우를 경험합니다. 세상에 영원한 만족을 주는 건 없습니다. 사람들은 끊임없이 새 것을 갈망하고, 어제의 새 것을 오늘의 헌 것으로 버리며 삽니다. 지구력이 세다는 남녀의 사랑도 그래요. 지순지고로 연모한 사랑이 어느새 희미한 옛 사랑의 그림자로 돌아서는 건 숱한 노래 가사로도 확인됩니다. 그래서일까요? 벼락처럼 나타난 순애보 사랑, 짧고도 긴사랑, 부귀와 명예도 다 버리는 사랑 이야기는 물씬한 감동을 전합니다. 이 세상에는 영화보다 더 영화 같은 러브 스토리들이 있습니다. 절묘한 선택을 한 세기의 커플들 사랑 이야기가 이에 해당하겠지요. 세기의 톱스타 리즈 테일러와 리처드 버튼은 두 번의 결혼, 두 번의 이혼을 합니다. 테일러는 이혼하면서 사유를 “너무 사랑했기 때문에... 우리의 별거가 다시 우리를 결합시켜 줄 것으로 믿는다.”고 했지요. 남편과 아내를 버려 불륜커플이란 곱지 않은 시선 속에 결혼식을 올린 두 사람. 버튼은 테일러에게 33캐럿짜리 다이아 반지를 선물해 온 세계 여성의 가슴을 달뜨게 했지요. 하지만 알코올중독에 빠진 버튼 때문에 9년 만에 파경을 맞고, 이후 식지 않은 사랑으로 재결합을 하지만 반년도 못가 다시 헤어집니다. ‘7명의 남편과 8번의 결혼’ 이력을 남긴 테일러는 가장 사랑한 남자로 버튼을 꼽고, 죽으면 그의 고향에 뿌려달라는 유언도 남겼지요. 그녀는 배우자만 여덟 번의 선택을 한 셈이지요. 현대판 신데렐라, 다이애나와 찰스 왕세자의 사랑도 그렇습니다. 이들의 결혼은 전 세계의 이목을 모은 세기의 결혼식이란 기록을 남겼지요. 찰스는 원래 다이애나의 언니와 교제하다가 실제 반려자로는 청순한 이미지의 동생을 선택했습니다. 두 아들을 낳으며 영국민의 총애를 받은 다이애나였지만, 찰스의 계속되는 여자문제로 괴로워하다가 한순간 신데렐라에서 비련의 여인으로 전락하고 맙니다. 그리고 중동의 한 왕자와 자동차로 이동 중 파파라치의 추적을 따돌리려다가 전복사고를 내고 비운의 삶을 마감합니다. “사람들은 나를 마린 먼로와 비교하지만 그녀와 비교되고 싶진 않아요. 그녀의 죽음이 빨라서가 아니라 사랑을 못 이루고 죽었기 때문이죠. 난 사랑을 이루고 싶어요.” 다이애나의 간절했던 소망은 잘못된 만남과 선택으로 슬프게 막을 내립니다. 천사 같은 여자, 능력 있는 남자, 모두가 넋을 놓을 그런 만남을 부러워 하지 마세요. 그 선택이 탁월하지도 최고인 것도 아니니까요. 좀 부족해도 내 옆구리를 한 결 같이 지키고 있는 남자, 살뜰하게 가족을 잘 돌보는 내 옆의 여자가 더 탁월한 선택입니다. 그런 생각으로 내 옆 사람을 바라보고 한 번 빙그레 웃어보면 어떨까요? “당신 왜 웃어요? 얼굴에 뭐 묻었어요?” “아니, 그냥 예뻐서” “사람 싱겁긴!” 핀잔하면 한 번 더 웃어보이세요. 치즈라고 말하면서... 저물어가는 2019년의 끝말로 ‘사랑’이란 말을 선택해 보세요. ( 글 소설가 이관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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탁월한 선택, 최고의 만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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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보들의 천국
- 우리사회에 점점 꿈을 잃는 사람이 많아지는 것 같아 안타깝습니다. 젊은이를 보면서 그런 생각을 더합니다. 꿈이 메마른 사회는 가뭄 날의 풀밭같이 까칠해져 온기가 없고 스칠 때마다 소리가 납니다. 사람들이 자기자리를 진득하게 찾으려 하지 않아요. 파르르 끓는 냄비처럼 금세 싫증을 내고 다른 사람의 동향에 민감합니다. 찰나적인 것을 좇아가고 순간에 많은 이익을 낸 사람을 승자로 부러워합니다. 임시변통에 능하면 아예 재주꾼으로 묘사되기도 하지요.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아이작 싱어의 소설 ‘바보들의 천국’은 이렇게 전개 됩니다. 주인공 아첼은 부자 상인의 외아들입니다. 너무 게을러서 공부도, 일도, 만사를 귀찮게 생각할 뿐입니다. 훗날, 아버지의 사업을 물려받아야 한다는 걸 생각하면 벌써부터 머리가 지끈 지끈 아파온데요. 그러던 중 유모로부터 천국에는 일할 필요가 없고 매일 놀고먹을 수 있다는 말에 혹합니다. “그래 이렇게 살 바엔 죽어 천국에나 가야지.” 그는 천국에 가려는 욕망으로 죽기를 바라며 꼼짝 않고 침대에만 누워있자 아첼 부모는 고민 끝에 여러 사람들과 상의를 합니다. 어느 날, 눈을 뜨니 딴 세상이 열렸습니다. 아첼은 화려한 방에 누워있었고 날개가 달린 천사들이 찾아옵니다. “천국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천국? 여기가요?” 아첼은 날듯이 기뻐합니다. 하루 종일 아무 일도 하지 않아도 잔소리하는 사람이 없고, 잘 때가 되면 천사들이 포근한 침대에 눕혀 줍니다. 식사시간엔 온갖 산해진미를 담은 금 접시, 금 쟁반이 들어옵니다. 그렇게 꿈같은 시간이 며칠 지나자 아첼은 갓 구은 빵과 버터, 커피가 먹고 싶어 천사에게 주문합니다. 그랬더니 천국에는 그런 음식이 없다고 하네요. 실망한 아첼은 “지금 몇 시나 되었어요?” 하고 물으니 저런 “천국엔 시간이 존재하지 않습니다”라는 말로 돌아옵니다. “그럼 난 이제부터 무얼 하나요?” 천사가 말합니다. “천국에서 할 일이란 없어요.” 아첼은 맛난 산해진미를 먹어도 잠자는 일밖에 할 일이 없음을 알게 됩니다. 처음으로 뭔가 일하고 싶은 마음이 간절해집니다. 그러나 천사의 말은 똑 같지요. “천국에서 할일이 없어요.”라고. 아첼은 가짜 천국에서 한 주를 보내자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습니다. 화난 소리로 크게 외칩니다. “이렇게는 못 살아! 차라리 죽는 게 백번 낫겠어!” 하지만 왕 실망! 천사는 ‘천국에는 죽음조차 없다’는 걸 알려줍니다. 8일째 되는 날, 그의 부모는 아들을 데리고 지상으로 오지요. 이로부터 아첼은 열심히 일하고 생각하는 사람이 되었다고 합니다. 싱어 특유의 우화적이면서도 단순한 이야기지만 사람에게 주는 메시지는 명증합니다. 모든 것을 완벽하게 갖춘 곳, 아무 할 일도, 희망도 없는 곳, 그런 곳이 진정한 천국은 아닐 테니까요. 삶에 조급증을 느끼는 사람일수록 멀리 볼 줄을 모릅니다. 그러면 산 너머에 도도히 흐르는 강을 바라보는 시력을 잃게 됩니다. 눈에 꿈이 담기지 않으면 산 너머가 보이지 않습니다. 우직하게 내 일을 찾고 꾸준히 노력하는 곳에서, 우리가 만나는 하루하루의 일상 속에서, 꿈꾸는 만들어지고 있습니다. 오늘이 힘들어도 내 눈에 꿈을 담고 고통의 시간을 견뎌내는 마음의 근력을 키우면. 그리던 천국이 다가오지 않을까요? (글 소설가 이관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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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보들의 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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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초적 그리움 사랑의 정체
- “우리는 하나의 심연에서 솟아올라 또 다른 심연으로 사라져간다. 이 심연과 심연 사이를 인생이라고 부른다.” 니코스 카잔차키스. 이 심연과 심연 사이에 여전히 난해하게 다가오는 것은 ‘사랑’입니다. 사랑이 강인한 생명력을 지닌 것은 인간의 원초적 그리움 때문이겠죠. 생명의 그리움, 자연의 그리움, 우리가 사는 일생도 따지고 보면 ‘그리움의 집짓기’에 다름 아닙니다. 평생을 매달려도 그 끝에 닿지 못하는 것. 다만 예술작품을 들추어 그 정체를 유추해볼 뿐이지요. 에리히 프롬은 사랑을 다섯 단계로 정의하고, 첫 단계를 ‘관심’으로 꼽았지요. 사랑은 관심에서 출발하기 때문입니다. 다음으로 ‘존중’을 꼽고, 여기서 발전한 단계가 ‘이해’입니다. 일방적 이해는 외눈박이 사랑을 부르지만 상호이해로 충족되면 뒷골목 사람이든 거리의 여자든 문제될 게 없다는 거지요. 그러나 이것만으로 참사랑의 척도를 가늠하기 어려운 게, 여기까지는 가식이나 정략적으로도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현대인의 사랑에서 가장 미덥지 못한 부문, 그래서 가장 강조돼야 할 덕목으로 에리히 프롬은 4단계의 ‘책임’을 들었지요. 사랑이 주는 감동은 책임부분에서 나옵니다. 책임이 담보되지 않은 사랑은 어느 한계 앞에 좌초할 수밖에 없지요. 그래서 사랑이 책임을 넘어설 때 비로소 ‘사랑은 주는 것’으로 완성됩니다. 흔히 사랑은 소프트한 것으로 생각하기 쉽지만, 사랑에는 고난이 전제돼야 합니다. 그 고난이 왔을 때, 맞서서 대응할지, 아니면 피할지. 여기서 사랑은 극명한 갈림길에 서지요. 사랑을 주제로 한 문학작품이나 영화를 읽고 보면서 사랑에 전율함은 사랑의 고귀한 가치인 ‘책임’을 다루기 때문입니다. 웨스트민스터 사원에는 유명작가의 작품이 아닌데도 관람객이 끊이지 않는 동상 하나가 있습니다. 왼팔이 없는 ‘팔 없는 여인상’. 사람들은 이 앞에서 옷깃을 여미고 상념에 잠깁니다. 그녀의 빈 어깨를 사람들이 얼마나 쓰다듬고 갔으면 반들반들 윤이 났을까요. 십자군전쟁 때의 일입니다. 무모한 원정 전을 벌인 십자군은 참패했고, 많은 병사가 모슬렘의 포로가 되었지요. 모두가 절망할 때 한 젊은 영국군 장교가 구명을 호소합니다. 그는 수용소의 놀림감이 되고, 마침내 모슬렘 사령관의 호출을 받습니다. “내가 없으면 아내는 죽습니다. 그녀를 위해 꼭 살아가야 합니다.” 사령관이 웃으며 “걱정 말게. 여자는 다른 남자가 책임질 걸세.” 이에 장교는 우리 사랑을 몰라서라고 강변했고, 그 말끝에 사령관은 야릇한 도박을 겁니다. “좋아, 그럼 내기하지. 자네를 사랑한다는 징표로 여자의 팔 하나를 가져오면 고려하겠네.” 이일을 까맣게 잊고 지내던 어느 날, 사령관 앞으로 썩은 팔 하나가 배달됩니다. 그제서 사령관은 과오를 사죄하고 장교를 풀어줍니다. 팔 없는 여인상의 모델은 장교의 부인입니다. 진한 감동으로 전율시켰던 그 여인의 빈 어깨는 시공을 넘어 뭇사람의 시선을 붙잡습니다. 생 페테르부르크중앙박물관에는 시선을 사로잡는 유화 한 점이 있습니다. 노인이 젊은 여인의 젖을 물고 있는, 좀은 해괴한 그림이지요. 그럼에도 이 유화가 보는 이의 마음을 사로잡는 것은 나폴레옹 전쟁 때의 일입니다. 내 사전에 불가능이 없다던 나폴레옹이 러시아를 침공했다가 폭설과 추위로 패퇴하는 비극을 맞지요. 그러나 비참하긴 눈구덩이에 갇힌 마을도 마찬가지. 먹을 것이 떨어진 가족들이 서로의 앞에서 굶어죽는 상황이 벌어집니다. 유화는 이 참담함 속에서 늙은 아버지에게 자신의 젖을 물려 마지막 사랑을 전하는 딸의 모습을 화폭에 담았습니다. 사랑은 이런 빛깔로도 직조돼 전율을 주지요. 사람들이 사랑에 열광하는 것은 타인과 통하려는 욕구 때문입니다. 한편의 영화를 보고자 하는 사소한 욕구 저변에도 타인과 통하고 싶은 욕망이 깔려 있습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가장 완성된 소통형태는 사랑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한다는 것은 유한하고 외로운 인생을 완전한 것으로 끌어올릴 수 있는 유일한 구원의 빛이자 출구로 다가가는 것이지요. 그러나 현실은 사랑을 가능하지 못하게 하는 상처와 조건으로 가득 차 있는 것이 비극입니다. (소설가 이관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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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초적 그리움 사랑의 정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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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정한 나를 찾는 길
- 고통과 역경의 연속이 우리가 사는 삶입니다. 게다가 삶을 불완전한 존재로 살아야 하니 바람에 날리는 연약한 갈대와 같습니다. 한없이 약하고 불완전한 인생에 더 마음 쓰이는 것은, 인생은 동전과 같다는데 있어요. 무엇이든 원하는데 사용할 수 있지만, 딱 한 번밖에 쓸 수 없습니다. 그래서 허투루 소비할 수 없는 1회성 시간을 손에 들고 있는 셈이지요. 이처럼 운신의 폭은 제한돼 있고, 사는 시간은 유한하고, 한치 앞을 내다보지 못한 채 사는 우리입니다. 파도에 떠밀려 다니는 부평초처럼 아무 힘도 능력도 없는 인생을 살면서, 왜 사람들은 하늘 높이 나는 새처럼 오르고 싶어 하고, 무한한 욕망에 사로잡혀 있는지, 온전한 자신의 모습엔 눈을 감습니다. 얼마나 문제가 있으면 성경에 “사람이 자기의 약한 것을 인정하는 것이 온전해 지는 것의 첫걸음”이라고 했을까. 만물의 영장이라고 하는 사람들의 언행을 보면, 어찌 저리도 허술하나 생각할 때가 종종 있습니다. 요즘 사람들은 자신의 약점과 한계를 인정하기보다 ‘할 수 있다’는 자기 최면을 끊임없이 걸고 오직 그것만 꿈꾸며 사는 듯합니다. 수많은 자기계발 ? 인생수험서가 넘쳐나고, 소셜 미디어에서 쏟아져 나오는 과잉정보에 무엇이 진짜고 가짜인지, 누가 적인지 아군인지 구분 못하고, 내 좋으면 그만이라는 ‘확증현상’에 매몰됩니다. 내 취향에 맞는 것만 찾으려고 하니까요. 자신을 살피지 못하면 욕망은 과잉되고, 교만은 웃자랍니다. 자칫하면 모방된 의식과 방식으로 한 번뿐인 삶을 그림자 인생으로 살아가기가 쉽습니다. 어떻게 해야 나답게, 나다운 삶을 살 수 있을까? 성경은 먼저 자기와의 조화를 이루라고 합니다. 진정한 나를 찾는 길은 있는 그대로의 나, 내 약점과 단점을 인정하는 것에서 시작됩니다. 그렇게 시작하기가 좀은 힘들 수 있어도, 나의 능력과 한계를 드러내놓고 인정할 때, 비로소 진짜 나를 찾아 나갈 이정표를 세울 수 있습니다. 남들이 ‘할 수 있다’고 외치니까 나도 따라 외친다거나 남들의 시선을 생각해 ‘척’ 하며 사는 것은 자기와의 부조화를 재촉하는 일입니다. 착한 사람처럼 보이려고 하면 정작 착한 사람은 될 수 없고, 남에게 보이는 일에 신경 쓰면 정작 자신의 삶에서 주인공이 될 수 없습니다. 결국 삶의 주도권을 뺏기고 정작 해야 할 내 일은 하지 못하게 됩니다. 자신에게 주어진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며 소소한 일상에 기뻐하고 정한 목표를 향해 끊임없이 나가려는 사람이 진짜 나를 발견한 사람입니다. 오늘을 열심히 살면서 드러나는 자신의 모습을 그대로 인정하는 사람, 이것이 나와 조화를 이룬 사람의 모습이지요. 자신에 대해 눈 감고 있는 사람은 결코 진정한 나를 찾아낼 수 없고, 변화를 기대할 수도 없습니다. 인간사회는 다양한 능력, 성격, 취향과 다른 얼굴의 사람들이 모여 서로를 이웃하며 사는 곳입니다. 그러려면 진실 돼야 하고 서로에게 믿음을 줘야 합니다. 나와의 조화를 이룬 사람만이 진실로 이웃과 조화를 이루며 살 수 있습니다. 가면을 쓰거나 가식된 행실로는 소소한 일상의 행복을 못 보는 청맹과니가 되기 쉽습니다. 나무는 홀로 서 있는 것 같지만 숲을 이루면서 완전해 집니다. 풀과 꽃, 벌레들과 생명력을 교감하며 올곧게 자라날 수 있는 것이지요. 숲이 돼 숲의 눈으로 세상을 보면 나무도 풀도 꽃도 벌레도 모두 평등한 생명체이듯 세상의 모든 사람은 소중한 내 이웃입니다. 홀로 선 나무라고 생각했던 나 역시, 이웃과 더불어 숲을 이루며 자연과 조화를 이루어 살 때 완성되는 존재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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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정한 나를 찾는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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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하나의 세상, 그래도
- 누구처럼 말하고 누구처럼 사는 사람의 차이는 뭘까. 이태석 신부같이, 데레사 수녀처럼 우리 곁에 사셨던 분들이 그리움으로 숨 쉬는 오늘입니다. “간절히 원하면 이루어진다.”고 한 파울로 코엘료, 직관을 따랐을 뿐이라는 스티브 잡스, “공부가 가장 쉬웠다”고 말하는 수능 만점자까지. 그렇게 쉬운 일들이 왜 내가 손을 댔다하면 껀껀이 망하는 걸까. 바닷가 질척한 펄 아래 ‘그래도(島)’ 라는 섬이 섰습니다. 세상에서 상처 받고, 고통 받고 살다가 세상이 왜 이래? 이건 아니잖아! 숨이 찬 사람들이 모여들어 살아가는 곳 입니다. 더 이상 갈 곳이 없으니 숨길 것도 없다는 사람들이 어우렁더우렁 사는 섬입니다. 아름다운 섬 그래도. 섬마을 초입에 걸린 슬로건부터 철학적입니다. 셰익스피어를 전공했다는 분이 내걸었습니다. ‘To be or not to be that is Question.’ 그가 마을 사람들에게 해준 설명은 보다 심오합니다. “사람답게 죽을 텐가, 죽은 듯이 살 텐가, 삶이란 평생의 업이로다.” 오늘은 그래도가 열린지 100일. 주민전체회의가 열렸습니다. 그동안 통성명에 인사는 주고받았지만 인생 족보에 대해선 서로가 함구해 왔지요. 오늘은 상처는 상처대로 아픔은 아픔대로 살아온 인생을 털어놓고, 그래도 사람답게 살자고 만든 자리입니다. 턱수염이 짙은 운영회장이 일어나 “지금까지 돈 낳고 사람 낳다고 우겨댄 게 바로 나여” 하고 말머리를 엽니다. 당초 돈이란 사람을 위해 생긴 것인데, 돈에 집착하다가 돈의 노예가 돼버린 바보가 여기 서 있다며 돈 때문에 실패한 자신을 고백합니다. 섬에서 가장 예쁜 부녀회장도 상처가 커 보입니다. 옷이란 원래 몸을 보호하려고 생겨난 건데 어쩌다 명품만 치렁치렁 감고 살다가 옷을 보호하는 치사한 여자가 되었답니다. “아무리 옷이 명품이고 화려하면 뭘 해요 저녁엔 다 벗어야 하는 데.” 사치하다 탈난 여자의 변입니다. 이런 남자도 있습니다. 사람이 살려고 집을 지었는데, 집에 환장한 사람처럼 집에다 처바르고 비까번쩍 치장했더니, 뭐야! 내가 집을 지키는 개 신세가 됐다고 합니다. 인생에 너무 많은 의미를 부여하다가 거꾸로 생각의 노예가 됐다는 생각장이 40대. 핸드폰 충전은 열심히 하면서 진짜 인생은 충전하지 못했다는 30대 고백이 이채롭습니다. 많은 걸 쟁여만 두었지 한 푼 제대로 써보지 못하고 갈 날을 기다리는 현대인이 나라는 60대 말기암 남자의 얘기는 주위를 숙연하게 합니다. 오지도 않은 노후대책에 매달리다가 오늘을 잃고, 구제받지 못할 희귀성 괴질에 걸렸다는 분의 스토리는 바로 내 일처럼 들려옵니다. 나누면 행복이 온다는 평범한 진리를 실천하지 못한, 스스로 장애인이라는 현대인도 있습니다. 사랑할 수 있는 시간이 얼마 남지 않음을 알고도 어영부영하다 아내를 저세상으로 보낸 자칭 바보천치도 있습니다. 인류가 파멸하는 길이라고 방방 뜨다가 슬그머니 돈 챙기고 폐수방류에 눈 감은 환경운동가. 모두 그래도 사람들의 자화상입니다. 아등바등 벌어 쌓아놨더니 자식들 재산 싸움 되고 결국 큰 아들 칼부림에 둘째가 죽었다는 노부부의 탄식도 쏟아집니다. 어깨를 들썩이며 우는 부부 앞에 다들 눈시울이 붉습니다. 버스 떠나면 파장이 빤한데 어쩌자고 일만하다가 낙상으로 고관절을 깨먹었다며, 평생 꿈인 세계여행까지 일장춘몽이 됐다고 뒤돌아 앉는 여자도 있습니다. 그래도 사람들의 공통점은 딱 둘입니다. 모두가 슬픈 사연을 안고, 세상을 거꾸로 보며 살았다는 점이죠. 머리를 숙여 다리가랑이 사이로 본 세상이 진짜로 생각하며 전도몽상(顚倒夢想)의 삶을 산 사람들. 사물을 바로보지 못하고 거꾸로 보거나, 헛된 꿈을 꾸면서도 현실로 착각하며 헤맨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더 행복하고 아름다운 섬이 되고픈 그래도. 어떤 경우에도 목숨만은 끊지 말고 희망의 끈은 쥐자는 사람들의 삶의 터전입니다. GPS 에도 잡히지 않은 곳, 그래서 더 아련하고 외로운 섬, 그래도 꽃은 피고 봄은 깊어 갑니다. 오늘도 그래도 사람들은 “우리는 모두 사라진 일상을 찾아 나선 순례자” 라면서 헛헛한 웃음을 하늘에 날리지요. (소설가 이관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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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하나의 세상, 그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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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랑과 아리랑고개
- 외국인이 내게 ‘아리랑’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어떻게 말하시겠어요? 나도 똑 부러지게 답하지 못한 아쉬운 기억을 지닙니다. 사람들은 대부분 우리민족이 가장 사랑하는 노래로 ‘아리랑’을 떠올릴 것입니다. 아리랑만큼 우리 민족의 서정이 곰삭혀진 노래는 없을 테니까요. 민초들이 토해내는 세상살이의 서러움, 모진 시집살이를 탄식하는 아낙네, 어느 감정이든 얹기만 하면 노랫가락이 되는 아리랑입니다. 아리랑의 고개는 거친 세상을 살면서 숱한 애환과 희비애락을 겪을 때마다 숱하게 넘었을 마음 속 고개이기도 합니다. 아리랑은 혼자 부를 때보다 여럿이 ‘떼창’을 할 때가 더 감흥을 주지요. 정교하게 짜인 흥과 한이 공명을 일으키니까요. 임권택 감독의 영화 ‘서편제’의 명장면은 오정해(송화 역)가 구성지게 아리랑을 육자배기로 뽑는 장면입니다. “아리아리랑 스리스리랑 아라리가 났네/ 문경새재는 어느 고개인고...” 무심코 듣는 가락에 의문이 듭니다. 진도 아리랑에 문경새재가 왜 등장하지? 한동안 나를 낯설게 했던 대목입니다. 나운규 영화 ‘아리랑’ 마지막 장면도 아리랑고개입니다. 주인공이 이 고개에서 일본 경찰에 연행될 때 절규합니다. “나를 위해 울지 마오. 나는 반드시 돌아옵니다. 나와 함께 아리랑을 부른 생각을 하며 아리랑을 기억해 주시오.”라는 대사가 심금을 울립니다. 열사의 땅 중동 건설근로자도, 파독 광부들도, 2002 월드컵 순간에도 목청을 높였던 노래는 아리랑입니다. 슬퍼서 부르고 좋아서 부르고... 아리랑 연구가인 서지학자 김연갑 선생은 문경새재를 아리랑고개로 지목합니다. 그는 “아리랑은 한국인에게 보편적이면서도 특별한 것‘이라고 하면서 ”만일 아리랑에서 아리랑고개가 없다면 그 많은 영화, 연극, 시, 소리 등에서 많은 어려움을 겪었을 것”이라고 민족정서에 끼친 영향이 매우 크다고 전합니다. 아리랑은 1869년부터 큰 변화기를 맞습니다. 7년 동안 진행된 경복궁 중수 때 영향을 받으면서죠. 삼남에서 차출된 부역꾼들이 한양으로 올라오는데 대부분 문경새재를 넘어야했습니다. 그곳에 유달리 많았던 박달나무는 민초들이 새재를 넘으면서 숨을 돌리고 빈궁한 처지를 하소연했던 신목입니다. 그러던 어느 순간, 아리랑의 상징목이 될 만큼 민초의 애환이 서린 박달나무가 몽땅 벌목돼 사라진 사실이 알려집니다. 경복궁 중수에 쓰기 위해 모두 공출당한 것이지요. 그래서 자조적 언어로 “문경새재 박달나무는 홍두깨 방망이로 다 나간다” 며 장탄식을 쏟았지요. 이는 학정을 비웃는 상실감의 표현이기도 했습니다. 아리랑은 부역꾼들이 전국에서 모였다 흩어지며 부르던 아라리가 아리랑으로 변주되었다는 게 정설로 보입니다. 경복궁 중수가 끝나자 부역꾼 상당수가 일을 찾아 철도 노동자로 변합니다. 나운규는 이들이 철길을 놓으며 절절하게 부르는 아리랑을 가슴에 담았다가 후일 영화로 만들게 되었다는 군요. “극장에는 손구락 하나를 꼬즐 틈 없시” 당시 신문 기사 표현대로 흥행에 성공한 당대 최고의 영화인 나운규의 ‘아리랑’도 탄압의 대상이 되었지요. 조선총독부가 아리랑에 탄압을 가하자 아리랑이 지하로 흘러들면서 항일 감정을 담는 등 다양한 가사가 만들어지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우리 대중가요에는 ‘고개’를 붙인 노래가 유난히 많습니다. 사람들의 가슴을 저미는 ‘단장의 미아리고개’, 구름도 쉬었다 넘을 만큼 높은 ‘추풍령고개’, 기약 없는 이별의 슬픔을 담은 ‘울고 넘는 박달재’, 징용으로 아들을 기차에 실어 보내는 사연 많은 ‘비나리는 고모령’도 있어요. 고개는 곧 한의 상징이고, 고개를 넘는 일은 고통의 표징이었습니다. 사람들은 아리랑고개가 어딘 지엔 별 관심이 없습니다. 김연갑 선생은 아리랑고개를 문경새재로 말하지만, 많은 문인들은 아리랑고개를 ‘마음 속 상상의 고개’로 생각합니다. 재밌는 것은 밀양아리랑에도, 진도아리랑에도 문경새재 박달나무가 나온다는 점이지요. 정확히 알려진 건 없지만, 신목처럼 아낀 새재의 박달나무를 몽땅 베간데 대한 불만이 전국으로 퍼지면서 가락에 녹아든 걸로 유추해 볼 수는 있겠지요. (소설가 이관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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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랑과 아리랑고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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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밥 한 번 먹어요.
- “우리 언제 밥 한번 먹어요.” 이처럼 살가운 말이 있을까. 아부하는 것도 아니고, 지나침과 모자람도 없는, 정감을 주는 이만한 표현도 없습니다. 말하고 듣는 사람 다 기분 좋게 하니 참 좋아요. 먹는 것에 허기진 보릿고개 시절도 아니지만, 예나 지금이나 먹는 일은 귀하고 소중합니다. 두 사람이 마주앉아/ 밥을 먹는다/ 흔하디 흔한 것/ 동시에 최고의 것/ 가로되 사랑이어라.”고은 친구든 남녀든 사람끼리 마주앉아 밥 먹는 것만큼 일상사가 어디 있겠어요. 좋아하는 사람들과 한 끼를 같이 하는 일은, 유한한 삶을 사는 인생들이 정분과 위로를 나누는 시간입니다. 그 짧은 순간이 기억이 되고 추억이 되고 그리움으로 남습니다. 순대국 그릇 사이에 깍두기 한 접시 놓고 웃음 짓는 사이, 따뜻한 마음과 행복이 익어갑니다. 바쁘다는 핑계로 친구의 청을 사양한 적 없나요? 내가 후회하는 게 그런 것들입니다. 이번 일만 마치면 연락하겠다고 했는데, 사는 게 늘 그렇지요. 일이 끝나기도 전에 또 일이 터지고, 출장가고, 그러다 1년이 후딱 갑니다. 나이 들며 그런 기억이 안쓰럽습니다. “승진만 하면, 적금 붓는 것 끝내면” 이란 가정법에 주술을 걸다 해가 바뀌고 1년이 갑니다. KBS 1TV ‘개그콘서트’에 ‘밥 묵자’ 코너가 있었지요. 권위적인 가장이 가족들의 공격을 받을 때면 “자, 우리 밥 묵자.”로 분위기 반전을 꾀합니다. 밥 먹을 때는 개도 안 건드린다니까 마음이 상했어도 밥상 앞에서는 일단 감정부터 추스르지요. 대화 없이 숟가락 소리만 달그락거릴 땐 식후 분위기가 점쳐집니다. 그래도 칭찬만은 밥상머리가 제격이지요. “여보. 야가 이번 시험서 평균 10점이나 올랐대요.” “정말? 그래 잘했다. 우리 외식하자 주말에.” 독신으로 사는 여자의 말입니다. 사람들과 메신저로 대화를 나누지만, 대부분 끝머리에 “우리 얼굴보고 밥 한 번 먹자”는 말을 빼먹지 않습니다. 곤혹스러운 것은 다른 직장처럼 밥시간을 맞추기가 어려운 데 있죠. 자칭 ‘노가다’라는 무대 일을 하다보면 삼시세끼 제때 찾기가 어렵습니다. 낮에 잠자고 남잘 때 일어나 일하는 뒤바뀐 생활이 많다보니까요. 성격이 불같은 친구가 아침부터 전화에다 “밥 한번 먹자는 데 그리 힘드냐? 세상일 혼자 해?” 약속에 빠졌다고 십자포화를 맞습니다. 가까스로 전화를 끊자 “밥은 먹고 다니냐?” 엄마가 빈집에 들렀다가 텅 빈 냉장고 문짝에 붙인 메모 글이 눈에 띕니다. 영화 ‘살인의 추억’ 에서 송강호가 용의자에게 던진 대사와 같은 말이죠. 가끔 그런 말을 들으면 “잘 먹어. 다 먹고 살자는 거알아.” 그렇게 해석합니다. 먹자고 일하든, 일하려고 먹든 밥은 참 중요합니다. 대학생 때 교수님이 설렁탕 한 그릇을 사주셨지요. 학생에겐 은총의 날입니다. 감사한 마음으로 국물까지 싹 비웠는데 다음 날 연락이 옵니다. “설렁탕 맛있었냐?” “네 교수님. 다음에도 그런 기회를.” 이틀 후 똑 같은 말을 들을 때도 우스개다 했는데 “그 집 깍두기 맛있지?” “내가 사준 설렁탕 안 잊었지?” 나중에는 토하고 싶을 정도로 후회가 됐지만, 돌이켜 보면 학창의 추억 하나를 내게 주신 분입니다. 오늘 그 교수님께 점심을 대접했습니다. ‘밥 한번’이 인연이 돼 차진 관계로 발전했지요. 그러면서 깨닫습니다. 인생에서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이 타이밍임을. 팀 페리스가 쓴 '지금 하지 않으면 언제 하겠는가‘ 에는 인생에서 소중한 것들을 일렬로 세워 처리하지 말라고 합니다. 건강, 가족, 사람관계 등은 하나씩 순차방식으로 해내는 게 아니라고 했지요. 삶은 동시적으로 이루어지는 것. 열심히 꿈을 좇아 일하면서 가족과 따뜻한 대화를 나누고, 시간내 운동하고, 소중한 사람들의 안부를 챙기는 일들이 그렇습니다. 우리는 생각보다 핑계가 많습니다. 바쁘다고 피곤하다고 미루며 사양하죠. 실수하는 것입니다. 사람들과 부지런히 만나고 한 끼 밥을 나누세요. 그게 삶을 풍요롭게 하는 보약입니다. 살아온 세월에서 이런 메시지를 깨칩니다. “당신이 누군가에게 줄 수 있는 가장 위대한 선물은 시간이다”란 것을. 이때 시간은 누군가와 함께 한 시간에 깃든 소중한 추억이지요. 그래서 시간은 첫째도, 둘째도 ‘내는 것!’ (소설가 이관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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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밥 한 번 먹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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탁월한 선택, 최고의 만남
- 독일작가 한스 카로사는 “인생은 만남의 연속이다. 만남이 없는 건 죽음뿐” 이라했습니다. 운명적 요소가 다분한 만남은 축복이기도 하지만 비극의 출발도 됩니다. 만남은 내구성이 길지 못한 흠이 있어서죠. 그래서 만남은 이별을 잉태한다는 슬픈 가설을 낳습니다. 아이에게 그토록 조르던 장난감을 사줘 보세요. 잠을 잘 때도 끼고 잘 만큼 아끼는 것 같지만 실은 오래가지 못합니다. 곧 한 구석에 버려놓고 흥을 잃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한 번뿐인 생애에서 우리가 찾는 행복은 무엇일까요. 그것이 무엇이든 막상 얻고 나면 세월과 함께 시들해지는 경우를 경험합니다. 세상에 영원한 만족을 주는 건 없습니다. 사람들은 끊임없이 새 것을 갈망하고, 어제의 새 것을 오늘의 헌 것으로 버리며 삽니다. 지구력이 세다는 남녀의 사랑도 그래요. 지순지고로 연모한 사랑이 어느새 희미한 옛 사랑의 그림자로 돌아서는 건 숱한 노래 가사로도 확인됩니다. 그래서일까요? 벼락처럼 나타난 순애보 사랑, 짧고도 긴사랑, 부귀와 명예도 다 버리는 사랑 이야기는 물씬한 감동을 전합니다. 이 세상에는 영화보다 더 영화 같은 러브 스토리들이 있습니다. 절묘한 선택을 한 세기의 커플들 사랑 이야기가 이에 해당하겠지요. 세기의 톱스타 리즈 테일러와 리처드 버튼은 두 번의 결혼, 두 번의 이혼을 합니다. 테일러는 이혼하면서 사유를 “너무 사랑했기 때문에... 우리의 별거가 다시 우리를 결합시켜 줄 것으로 믿는다.”고 했지요. 남편과 아내를 버려 불륜커플이란 곱지 않은 시선 속에 결혼식을 올린 두 사람. 버튼은 테일러에게 33캐럿짜리 다이아 반지를 선물해 온 세계 여성의 가슴을 달뜨게 했지요. 하지만 알코올중독에 빠진 버튼 때문에 9년 만에 파경을 맞고, 이후 식지 않은 사랑으로 재결합을 하지만 반년도 못가 다시 헤어집니다. ‘7명의 남편과 8번의 결혼’ 이력을 남긴 테일러는 가장 사랑한 남자로 버튼을 꼽고, 죽으면 그의 고향에 뿌려달라는 유언도 남겼지요. 그녀는 배우자만 여덟 번의 선택을 한 셈이지요. 현대판 신데렐라, 다이애나와 찰스 왕세자의 사랑도 그렇습니다. 이들의 결혼은 전 세계의 이목을 모은 세기의 결혼식이란 기록을 남겼지요. 찰스는 원래 다이애나의 언니와 교제하다가 실제 반려자로는 청순한 이미지의 동생을 선택했습니다. 두 아들을 낳으며 영국민의 총애를 받은 다이애나였지만, 찰스의 계속되는 여자문제로 괴로워하다가 한순간 신데렐라에서 비련의 여인으로 전락하고 맙니다. 그리고 중동의 한 왕자와 자동차로 이동 중 파파라치의 추적을 따돌리려다가 전복사고를 내고 비운의 삶을 마감합니다. “사람들은 나를 마린 먼로와 비교하지만 그녀와 비교되고 싶진 않아요. 그녀의 죽음이 빨라서가 아니라 사랑을 못 이루고 죽었기 때문이죠. 난 사랑을 이루고 싶어요.” 다이애나의 간절했던 소망은 잘못된 만남과 선택으로 슬프게 막을 내립니다. 천사 같은 여자, 능력 있는 남자, 모두가 넋을 놓을 그런 만남을 부러워 하지 마세요. 그 선택이 탁월하지도 최고인 것도 아니니까요. 좀 부족해도 내 옆구리를 한 결 같이 지키고 있는 남자, 살뜰하게 가족을 잘 돌보는 내 옆의 여자가 더 탁월한 선택입니다. 그런 생각으로 내 옆 사람을 바라보고 한 번 빙그레 웃어보면 어떨까요? “당신 왜 웃어요? 얼굴에 뭐 묻었어요?” “아니, 그냥 예뻐서” “사람 싱겁긴!” 핀잔하면 한 번 더 웃어보이세요. 치즈라고 말하면서... 저물어가는 2019년의 끝말로 ‘사랑’이란 말을 선택해 보세요. ( 글 소설가 이관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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탁월한 선택, 최고의 만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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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보들의 천국
- 우리사회에 점점 꿈을 잃는 사람이 많아지는 것 같아 안타깝습니다. 젊은이를 보면서 그런 생각을 더합니다. 꿈이 메마른 사회는 가뭄 날의 풀밭같이 까칠해져 온기가 없고 스칠 때마다 소리가 납니다. 사람들이 자기자리를 진득하게 찾으려 하지 않아요. 파르르 끓는 냄비처럼 금세 싫증을 내고 다른 사람의 동향에 민감합니다. 찰나적인 것을 좇아가고 순간에 많은 이익을 낸 사람을 승자로 부러워합니다. 임시변통에 능하면 아예 재주꾼으로 묘사되기도 하지요.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아이작 싱어의 소설 ‘바보들의 천국’은 이렇게 전개 됩니다. 주인공 아첼은 부자 상인의 외아들입니다. 너무 게을러서 공부도, 일도, 만사를 귀찮게 생각할 뿐입니다. 훗날, 아버지의 사업을 물려받아야 한다는 걸 생각하면 벌써부터 머리가 지끈 지끈 아파온데요. 그러던 중 유모로부터 천국에는 일할 필요가 없고 매일 놀고먹을 수 있다는 말에 혹합니다. “그래 이렇게 살 바엔 죽어 천국에나 가야지.” 그는 천국에 가려는 욕망으로 죽기를 바라며 꼼짝 않고 침대에만 누워있자 아첼 부모는 고민 끝에 여러 사람들과 상의를 합니다. 어느 날, 눈을 뜨니 딴 세상이 열렸습니다. 아첼은 화려한 방에 누워있었고 날개가 달린 천사들이 찾아옵니다. “천국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천국? 여기가요?” 아첼은 날듯이 기뻐합니다. 하루 종일 아무 일도 하지 않아도 잔소리하는 사람이 없고, 잘 때가 되면 천사들이 포근한 침대에 눕혀 줍니다. 식사시간엔 온갖 산해진미를 담은 금 접시, 금 쟁반이 들어옵니다. 그렇게 꿈같은 시간이 며칠 지나자 아첼은 갓 구은 빵과 버터, 커피가 먹고 싶어 천사에게 주문합니다. 그랬더니 천국에는 그런 음식이 없다고 하네요. 실망한 아첼은 “지금 몇 시나 되었어요?” 하고 물으니 저런 “천국엔 시간이 존재하지 않습니다”라는 말로 돌아옵니다. “그럼 난 이제부터 무얼 하나요?” 천사가 말합니다. “천국에서 할 일이란 없어요.” 아첼은 맛난 산해진미를 먹어도 잠자는 일밖에 할 일이 없음을 알게 됩니다. 처음으로 뭔가 일하고 싶은 마음이 간절해집니다. 그러나 천사의 말은 똑 같지요. “천국에서 할일이 없어요.”라고. 아첼은 가짜 천국에서 한 주를 보내자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습니다. 화난 소리로 크게 외칩니다. “이렇게는 못 살아! 차라리 죽는 게 백번 낫겠어!” 하지만 왕 실망! 천사는 ‘천국에는 죽음조차 없다’는 걸 알려줍니다. 8일째 되는 날, 그의 부모는 아들을 데리고 지상으로 오지요. 이로부터 아첼은 열심히 일하고 생각하는 사람이 되었다고 합니다. 싱어 특유의 우화적이면서도 단순한 이야기지만 사람에게 주는 메시지는 명증합니다. 모든 것을 완벽하게 갖춘 곳, 아무 할 일도, 희망도 없는 곳, 그런 곳이 진정한 천국은 아닐 테니까요. 삶에 조급증을 느끼는 사람일수록 멀리 볼 줄을 모릅니다. 그러면 산 너머에 도도히 흐르는 강을 바라보는 시력을 잃게 됩니다. 눈에 꿈이 담기지 않으면 산 너머가 보이지 않습니다. 우직하게 내 일을 찾고 꾸준히 노력하는 곳에서, 우리가 만나는 하루하루의 일상 속에서, 꿈꾸는 만들어지고 있습니다. 오늘이 힘들어도 내 눈에 꿈을 담고 고통의 시간을 견뎌내는 마음의 근력을 키우면. 그리던 천국이 다가오지 않을까요? (글 소설가 이관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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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보들의 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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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은 자리를 지켜주는 힘
- 새해가 되면 하는 일이 있습니다. 지난 해 일기를 살피면서 나쁜 습관이나 고쳐 야 할 것은 무엇인지 찾아 기도하는 일입니다. 그럼에도 매년 계속해 이름을 올리는 제목들이 있습니다. 하나는 ‘편리함에 물들고 있다’는 모습을 확인하는 일이죠. 이는 ‘게을러터지다’는 뜻과도, 이기적인 생각과도 통하죠. 편리하고 빠른 것만 눈에 들어 했으니까요. 자잘한 욕심들도 내가 버려야 할 짐입니다. 곳곳에 독버섯처럼 일었다 시든 욕망의 분칠을 보면 아직도 내가 내려놓지 못했구나 하는 자책의 마음이 듭니다. 누군가 사람은 죽을 때까지 욕망의 포로라고 했습니다. 그것이 크든 작든 좋든 나쁘든 그러한 유혹에 시달려야 한다고. 하지만 이 둘은 내가 있어야 할 자리를 이탈할 때 생겼다는 점에서 되돌아보게 합니다. 사람이든 물건이든 각기 정해진 자기 자리가 있습니다. 별은 하늘에 있을 때 밝게 빛나고, 들꽃은 들판에 있을 때 가장 아름다우며, 아이는 엄마 아빠랑 있을 때 가장 행복합니다. 들꽃이 예쁘다고 몇 송이를 꺾어 집에 가져와 꽃병에 꽂아두면 며칠은 마음이 즐겁기도 하겠지요. 하지만 그 꽃을 꺾지 않았다면 집에서 사는 날보다 훨씬 많은 날을 살며 많은 사람을 기쁘게 하고, 꽃이 진자리엔 더 많은 꽃을 피울 씨앗이 땅에 뿌려졌겠죠. 그걸 알면서도 순간의 이기적 충동으로, 사랑해서라는 말로, 제자리에 잘 있던 것을 내 옆에 슬쩍한 적은 없나요? 모든 사람이 이 같은 이기적 사랑을 한다면 어떤 일이 생길까. 세상은 기쁜 사람보다 슬픈 사람이 많아지겠죠. 제자리를 찾아 행복한 사람보다, 제자리를 잃고 슬퍼하는 사람이 늘어날 것입니다. 파블로 네루다가 쓴 ‘안녕, 나의 별’은 제자리를 잃고 슬픔에 빠진 별 이야기 입니다. 밤하늘에 빛나는 별을 갖고 싶었던 소년이 별 하나를 따서 주머니 속에 넣습니다. 그 순간 도시가 새까맣게 어두워집니다. 밤하늘에서 반짝 이다가 소년의 주머니 속에 들어간 별은 무서워 떱니다. 몸이 추우니 마음도 춥습니다. 소년의 마음은 어떠할까요? 별과 다르지 않습니다. 그토록 갖고 싶었던 별을 가지면 행복할 줄 알았는데, 이상하게도 행복하지 않았어요. 매일 반복하는 일상이 낯설기조차 합니다. 무엇이 소년을 이렇게 만들었을까요. 집에 온 소년은 주머니에서 별을 꺼냅니다. 그러나 별빛이 너무 강해 숨길 수 없는 데다 사람들이 별빛을 보고 몰려올 것 같습니다. 별을 훔쳤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어쩌나, 소년의 마음이 불안해 집니다. 이러다가 엄청난 벌을 받지 않을까 두려운 생각이 들었습니다. 소년은 별을 손수건에 싸서 몰래 집밖으로 나옵니다. 별은 싸늘하게 식었습니다. 소년은 별이 잘못될까봐 죄책감이 들어, 별을 강물에 놓아줍니다. 별은 물결에 흔들리며 멀어져갑니다. 미안한 마음에 소년은 별에게 제대로 인사도 못했어요. 별을 두려움에 빠뜨리고, 소년을 불안하게 만든 건 무얼까? 바로 ‘욕심 많은 나’ 입니다. 이기적인 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사랑은 그가 있어야 할 자리를 알고 지켜주는 힘이지요. (글 소설가 이관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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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은 자리를 지켜주는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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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란 고유명사로 살기
- 어떡하면 좀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을까. 은퇴한 사람들이 자주 주고받는 말입니다. 누구는 생각을 바꾸라고 하고, 누구는 삶의 프레임을 확 뜯어 고치 라고 합니다. 하지만 말처럼 쉬운 일이라면 굳이 이러한 대화에 눈을 맞출 필요는 없겠지요. 연초에, 암 투병에서 가까스로 빠져나온 친구와 만나, 얼마나 힘든 나날을 보냈을까 연민했습니다. 통증에 매몰된 자신이 너무 비참했다고 합니다. 그러한 고통의 날을 반복하다가 문득 깨달음이 찾아왔다고 합니다. 내가 마지못해 살고 있는 오늘이 ‘누군가의 간절한 내일’ 임을 자각하면서 생명의 소중함이 뼛속 깊이 파고들더라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당연하게 여겼던 일상의 소소한 것들이 기적으로 변하면서 감사와 행복을 되찾을 수 있었답니다. 고통으로 포기하고 싶은 오늘을 새롭게 정의 하자 삶의 태도가 확 달라졌고, 용기와 희망을 되찾게 됐다고 말할 때는 눈가에 이슬이 맺힙니다. 인생은 몸으로 살은 만큼 안다고 하죠. ‘프레임을 바꾼다’는 말도 친구가 온몸 으로 전해줄 때 비로소 그런 것임을 느꼈습니다. ‘모든 끝은 어딘가로 들어가는 입구’입니다. 절망의 ‘끝’에 새 프레임을 씌우니 희망의 출구가 보입니다. 어느 작가는 자신의 서재를 ‘외부와 격리된 방’으로 규정했습니다. 단순히 서재로 부를 때는 걸려온 전화를 다 받았는데, ‘격리’로 바꾼 뒤는 전원부터 끄게 되더라고 합니다. 자신의 업을 ‘직업’으로 부르고, 누구는 ‘소명’으로 생각한다면, 이들 사이의 간극은 갈수록 벌어지게 됩니다. 소명으로 여긴 사람이 느끼는 행복감이 훨씬 더 클 테니까요. 많은 사람들이 행복한 삶을 사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 ‘난 행복하다’고 단정할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주변의 시선을 의식하며, 비교하며 살 뿐, 정작 난 누구이며 어떤 삶을 사는지 들여다보는 데는 생각보다 소홀합니다. 나보다도 남에게 보여 지는 나를 위해 더 많은 시간을 쓰고, 나만의 일을 사랑하기보다 대중의 모습을 따라가려고 합니다. 하루에도 수십 번 익명이 판치는 SNS에 접속해 ‘좋아요’ ‘멋져요’ 같은 버튼에 손이 가고, 남 일에 끼어들며 존재감을 지키려고 합니다. 가장 편한 삶은 나다울 때 찾아옵니다. 사람들에게 보이는 나를 살려고 하면 복제된 인생을 사는 것에 다름 아니지요. 여기엔 가식과 과장이 도사립니다. 나라는 고유명사로 살아야 행복의 기준이 내가 되고 편안함을 얻습니다. 사람이 사람다운 삶을 살 때처럼, 내가 나다울 때 안락함을 느끼게 되지요. 행복의 기준을 타인과 공유하면, 그때부터 나는 소외되기 시작합니다. 마을사람이 나를 아는 고향에서 사는 삶과 나를 모르는 도시에서 사는 삶은 크게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어느 집 누구로 살면 몸가짐부터 조심하지만, 익명으로 사는 도시의 삶은 규제받지 않아 훨씬 편하죠. 4차 산업, 5G시대가 행복을 가져다줄까요? 편리함은 주겠지만 외로움은 더 격해 지고, 나는 더 흐릿해 집니다. 진짜와 가짜, 진실과 조작, 실상과 허상의 혼란은 더 커 지겠죠. 올해는 나만의 사전으로 살았으면 합니다. 관습이란 프레임부터 거둬내고 고유명사로서의 나를 찾아, 잃어버린 나의 풍경을 만들며 살았으면 합니다. ‘나 자신을 아는 것이 참된 진보’ 라고 한 안데르센 말처럼. (소설가 이관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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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란 고유명사로 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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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벽주의자라는 불행의 레시피
- 이 세상은 내가 주인으로 당당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행운이 주어진다는 사실을 명심하고 완벽주의자가 아닌 인생의 주인으로 살아가는 법을 배워야 할 것이다. 우린 경쟁사회를 살아가면서 다른 사람보다 앞서지 못하는 죽을 수밖에 없다는 강박관념에 시달리면서 평생을 살아왔다. 다른 사람보다 앞서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완벽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다짐을 한다. 그리고 소소한 일까지 완벽하게 챙기고 챙겨서 남보다 앞서야 한다는 결의를 다지게 된다. 그렇지만 세상이란 복잡미묘하게 변하는 것이기에 내가 아무리 열심히 한다고 해서 다른 사람보다 앞설 수 있는 기회보다도 실패를 하는 경우가 더 많게 된다. 실패를 맛보고 좌절도 하면서도 다른 사람에게 밀리는 안된다는 강박관념으로 또 다시 완벽한 인간이 되길 다짐하게 된다. 최근 스위스 취리히대학의 페트라 비르츠 박사팀이 스위스 중년 남성 50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연구 결과가 발표되었다. 보고서에 따르면 “완벽주의자들은 일반인에 비해 스트레스 호르몬인 코르티졸의 분비가 더 많고 피로를 쉽게 느껴 신경질적이 되며 의기소침해지는 양상을 보였다”고 발표하였다. 연구팀은 설문지를 통해 답변을 받은 뒤 그 중에서 가장 높은 수준의 완벽주의자를 선정해 개인의 신경 및 호르몬 시스템이 스트레스에 반응하는 방식에 완벽주의적 성향이 영향을 주는지를 추적했다. 그 결과 완벽주의적인 사람들은 실수나 실패에 대한 불안이 비교적 높은 편이다. 그리고 불안은 보통 사람들의 수행 능력을 깎아 먹는 역할을 한다. 예컨대 단 1점이라도 깎이는 것을 허용하지 않겠다는 완벽주의적인 학생들은 그렇지 않은 학생들에 비해 시험 불안이 높고 그 결과 실제 공부하는 것에 비해 결과가 좋지 않은 경우가 허다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완벽을 추구하다가 아예 아무것도 안 해버리는 경향이 높아 일에 대한 성취도가 오히려 평범한 사람보다 낮아 완벽주의자는 불행의 레시피라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완벽주의자는 어떤 일을 완벽하게 해 낼 수 있다는 자신감이 생기기 전까지 일을 시작조차도 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 때로는 조금 더 좋은 결과물을 내겠다며 결과에 지나치게 집착해서 기한을 넘어서도 일을 붙들고 있는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그 결과 완벽주의적인 교수들이 그렇지 않은 교수들에 비해 출간한 논문의 수가 적고 논문의 질 또한 낮은 것으로 나타났다. 이런 완벽주의가 정신건강에도 좋지 않고 수행 능력에도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데도 과잉 경쟁사회에서 살아온 많은 사람들이 완벽주의에 시달림을 받고 있다. 사실 직장생활을 하면서 내 자신이 완벽주의자가 되어야 하겠다는 틀에서 벗어날 생각을 하지 못한다. 다람쥐 체 바퀴 돌 듯이 반복적인 직장생활에서도 몇 번이고 완벽주의자가 되기를 다짐하면서 열심히 앞만 보고 달려왔다. 그런데 직장을 은퇴한 후 그간 쓸데없이 완벽주의자의 테두리를 벗어나지 못하고 살았다는 것을 후회하게 된다. 현대문명 사회에서 너무나 복잡다기한 환경변화를 경험하게 되는데 완벽주의자의 함정에 빠지게 되면 세상을 제대로 읽고 대처하여 나가는 능력을 갖지 못하게 된다. 결국 열심히 살아왔지만 살아온 결과는 노력한 만큼 보상을 받지 못하고 항상 실패와 좌절 속에서 스트레스를 받으면서 살아가기 마련이다. 더욱이 친구와 이웃과 함께 차 한 잔이라고 나누면서 세상살이 이야기를 나눈다면 오히려 이런 실수를 줄일 수 있는데 허망 된 욕망에 파묻혀 무모하리만큼 열심히만 살아왔던 것이다. 팔순이 된 요즈음 젊은이에게 너무 완벽주의자로 열심히 살아가지 말 것을 권유하고 싶다. 인생이란 내가 주인으로 살아갈 때가 가장 행복감을 느낄 수 있는 계기가 주어지는 법이다. 앞만 보고 열심히 달려 온 인생은 결코 성공할 수 없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닫게 된다. 이 세상에는 두 부류의 인간이 살아가고 있다고 한다. 한 부류는 귀인을 만나 귀인에게 충성하면서 주인으로 섬기면서 살아가는 타입이다. 다른 한 부류는 내가 주인으로 모든 책임을 내 스스로 감당하면서 당당하게 살아가는 타입이다. 귀인을 만나 이에 충성을 다 바친다면 일시적으로 쉽게 성공할 수 있는 기회를 잡을 수는 있다. 그렇지만 결국에는 주인의 운명과 같은 배를 타기 마련이기 때문에 결국에는 난파선이 되어 큰 함정에 빠지기 마련이다. 그렇지만 내 스스로 주인으로 모든 책임을 감당하면서 당당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은 처음에는 모진 풍파를 겪으면서 오랜 세월을 힘들고 밫을 볼 수는 어려움을 겪기 마련이다. 굵고 짧게 영광을 누리면서 횡재를 바라면서 살아가는 사람에겐 결코 영광도 횡재도 찾아오지 않고 함정에 빠지는 경우를 겪게 된다. 인생이란 길고 먼 길을 내 스스로 감당하면서 당당하게 살아가겠다는 내 인생의 주인으로 살아가야 한다. 세상은 내가 주인으로 살아갈 때 행복감도 성공도 얻어낼 수 있는 법이다. 아부를 하면서 비굴하게 고개를 숙이고 주인을 모시는 하인에겐 일시적인 영광을 쉽게 차지할 수는 있을런지 모르지만 결국 성공도 행복도 차지할 수 없는 법이다. 결국 이 세상은 내가 주인으로 당당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행운이 주어지는 법이라는 사실을 명심하고 완벽주의자가 아닌 인생의 주인으로 살아가는 법을 배워야 할 것이다. 요즈음 정치권의 움직임을 부면서 출세욕에 사라잡혀 주인을 모시면서 살아가려는 사람들의 수모를 겪는 광경을 지켜보면서 내가 내 인생을 어떻게 살아가야 될지를 생각하게 된다. 완벽주위자란 불행의 레시피이지만 귀인을 만나 출세를 해보겠다는 사람들은 함정의 레시피를 갖고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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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벽주의자라는 불행의 레시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