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초적 그리움 사랑의 정체
사랑은 유한하고 외로운 인생을 완전한 것으로 끌어올릴 수 있는 유일한 구원의 빛이자 출구이지만 현실은 사랑을 가능하지 못하게 하는 상처와 조건으로 가득 차 있는 것이 비극입니다.
“우리는 하나의 심연에서 솟아올라 또 다른 심연으로 사라져간다. 이 심연과 심연 사이를 인생이라고 부른다.” 니코스 카잔차키스.
이 심연과 심연 사이에 여전히 난해하게 다가오는 것은 ‘사랑’입니다. 사랑이 강인한 생명력을 지닌 것은 인간의 원초적 그리움 때문이겠죠. 생명의 그리움, 자연의 그리움, 우리가 사는 일생도 따지고 보면 ‘그리움의 집짓기’에 다름 아닙니다. 평생을 매달려도 그 끝에 닿지 못하는 것. 다만 예술작품을 들추어 그 정체를 유추해볼 뿐이지요.
에리히 프롬은 사랑을 다섯 단계로 정의하고, 첫 단계를 ‘관심’으로 꼽았지요. 사랑은 관심에서 출발하기 때문입니다.
다음으로 ‘존중’을 꼽고, 여기서 발전한 단계가 ‘이해’입니다. 일방적 이해는 외눈박이 사랑을 부르지만 상호이해로 충족되면 뒷골목 사람이든 거리의 여자든 문제될 게 없다는 거지요. 그러나 이것만으로 참사랑의 척도를 가늠하기 어려운 게, 여기까지는 가식이나 정략적으로도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현대인의 사랑에서 가장 미덥지 못한 부문, 그래서 가장 강조돼야 할 덕목으로 에리히 프롬은 4단계의 ‘책임’을 들었지요. 사랑이 주는 감동은 책임부분에서 나옵니다. 책임이 담보되지 않은 사랑은 어느 한계 앞에 좌초할 수밖에 없지요. 그래서 사랑이 책임을 넘어설 때 비로소 ‘사랑은 주는 것’으로 완성됩니다.
흔히 사랑은 소프트한 것으로 생각하기 쉽지만, 사랑에는 고난이 전제돼야 합니다. 그 고난이 왔을 때, 맞서서 대응할지, 아니면 피할지. 여기서 사랑은 극명한 갈림길에 서지요. 사랑을 주제로 한 문학작품이나 영화를 읽고 보면서 사랑에 전율함은 사랑의 고귀한 가치인 ‘책임’을 다루기 때문입니다.
웨스트민스터 사원에는 유명작가의 작품이 아닌데도 관람객이 끊이지 않는 동상 하나가 있습니다. 왼팔이 없는 ‘팔 없는 여인상’. 사람들은 이 앞에서 옷깃을 여미고 상념에 잠깁니다. 그녀의 빈 어깨를 사람들이 얼마나 쓰다듬고 갔으면 반들반들 윤이 났을까요.
십자군전쟁 때의 일입니다. 무모한 원정 전을 벌인 십자군은 참패했고, 많은 병사가 모슬렘의 포로가 되었지요. 모두가 절망할 때 한 젊은 영국군 장교가 구명을 호소합니다. 그는 수용소의 놀림감이 되고, 마침내 모슬렘 사령관의 호출을 받습니다.
“내가 없으면 아내는 죽습니다. 그녀를 위해 꼭 살아가야 합니다.” 사령관이 웃으며 “걱정 말게. 여자는 다른 남자가 책임질 걸세.” 이에 장교는 우리 사랑을 몰라서라고 강변했고, 그 말끝에 사령관은 야릇한 도박을 겁니다. “좋아, 그럼 내기하지. 자네를 사랑한다는 징표로 여자의 팔 하나를 가져오면 고려하겠네.”
이일을 까맣게 잊고 지내던 어느 날, 사령관 앞으로 썩은 팔 하나가 배달됩니다. 그제서 사령관은 과오를 사죄하고 장교를 풀어줍니다. 팔 없는 여인상의 모델은 장교의 부인입니다. 진한 감동으로 전율시켰던 그 여인의 빈 어깨는 시공을 넘어 뭇사람의 시선을 붙잡습니다.
생 페테르부르크중앙박물관에는 시선을 사로잡는 유화 한 점이 있습니다. 노인이 젊은 여인의 젖을 물고 있는, 좀은 해괴한 그림이지요. 그럼에도 이 유화가 보는 이의 마음을 사로잡는 것은 나폴레옹 전쟁 때의 일입니다. 내 사전에 불가능이 없다던 나폴레옹이 러시아를 침공했다가 폭설과 추위로 패퇴하는 비극을 맞지요.
그러나 비참하긴 눈구덩이에 갇힌 마을도 마찬가지. 먹을 것이 떨어진 가족들이 서로의 앞에서 굶어죽는 상황이 벌어집니다. 유화는 이 참담함 속에서 늙은 아버지에게 자신의 젖을 물려 마지막 사랑을 전하는 딸의 모습을 화폭에 담았습니다. 사랑은 이런 빛깔로도 직조돼 전율을 주지요.
사람들이 사랑에 열광하는 것은 타인과 통하려는 욕구 때문입니다. 한편의 영화를 보고자 하는 사소한 욕구 저변에도 타인과 통하고 싶은 욕망이 깔려 있습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가장 완성된 소통형태는 사랑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한다는 것은 유한하고 외로운 인생을 완전한 것으로 끌어올릴 수 있는 유일한 구원의 빛이자 출구로 다가가는 것이지요. 그러나 현실은 사랑을 가능하지 못하게 하는 상처와 조건으로 가득 차 있는 것이 비극입니다. (소설가 이관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