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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내 앉아있는 자리
    스산한 바람에 비까지 흩뿌리니 단풍은 지고 낙엽만 우수수 쌓입니다. 이렇듯 나무도 꽃도 지상의 모든 생명들이 사이즈를 줄이는 시기입니다. 그것이 한 주기의 마지막 겨울을 상대하는 지혜입니다. 사람이 나이가 든다는 것 또한 사이즈를 줄이는 것으로 시작됩니다. 몸집이 줄고, 먹는 게 줄듯 이것이 절제의 근본이며 이치입니다. 세상에 나올 때 작게 나왔으니 돌아갈 때도 비우고 작게 돌아가야 합니다. 여기에는 실상과 허상이 공존하지만 스스로 말수를 줄이고, 욕심도 미움도 줄이고, 자랑, 명예 같은 덧없는 것은 날려야 합니다. 그래야 사이즈가 줄지요. 루디 세네카는 “인간은 마치 시간이 모자란다고 불평하면서, 마치 시간이 무한정인 것처럼 행동한다.”고 사람의 어리석음을 비꼬았지요. 그런데 사람은 이를 알면서도 어제의 습관을 오늘도 고집하고 삽니다. 친구가 많다고 자랑하시나요? 바쁜 것을 미덕으로 생각하셨나요? 그보다는 흉금을 터놓고 말할 한 사람의 친구가 더 소중한 때입니다. 친구도, 만남도, 분주함도 지혜롭게 줄여가는 것이 노년의 삶을 가볍게 하고 실수를 줄이는 방법입니다. 우리 몸은 수분이 80% 이상이라고 하죠. 비슷한 비율로 우리 삶을 주장하고 있는 것이 말입니다. 그만큼 물과 말은 몸을 유지하고 삶을 구성하는 중요한 요소입니다. 그래서 절제를 말할 때 가장 먼저 꼽는 게 말입니다. 내가 살면서 토해낸 말을 양으로 계측한다면 얼마나 될까. 그중 꼭 필요했던 말은 얼마쯤 일까. 이제는 할 말 못할 말, 안 해도 좋을 말, 상처 주는 말을 가려가며 했으면 합니다. 내뱉은 말은 흘러간 세월처럼 돌릴 수 없으니... 그래서 이랬으면 좋겠습니다. “이제는 많이 들어주자. 듣는 귀는 8로 열고 말하는 입은 2로 줄이자. 남이 말할 때 자르지 말자. 중간에 끼어들지 말자. 말 줄기를 돌리지 말자.” 비위 상한다고 파르르, 욱, 버럭 하는 감정도 이젠 삭혀 없애야 합니다. 행여 그런 상황이 되면 심호흡 한 번으로 날려버리세요. 대신 많이 웃어주면 좋겠습니다. 상대가 가족, 친구, 이웃, 누구든 만나면 웃는 것으로 말문을 열어요. 나이가 들면 웃는 근육도 굳는다는데, 얼굴에 웃음기마저 빠지면 노인 특유의 표정 없는 일그러진 인상만 남아요. 나이가 든다는 것은 옻칠을 더하는 것처럼 윤을 내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미움이나 시기, 질투는 다 헛된 뜬구름이지요. 뜬구름을 좇다가 낯선 곳에 서 있는 나를 발견하는 건 아픈 일입니다. 살고 있는 이날, 앉아 있는 이 자리가 내가 족해야 할 자리임을 아는 사람은 행복합니다. 이 나이에 맘대로 못할 게 뭐야. 하지만 나이가 들수록 남을 배려하며 사는 인생이 아름답습니다. 살아보니 ‘역지사지(易地思之)’ 이상의 스승은 없더군요. 사서삼경이 대단한 게 아니라, 상대편 입장을 늘 먼저 헤아리면 그것이 상선의 절제입니다. “오죽했으면... 그래 저럴 수 있겠다... 나도 그 입장이면... 저도 사람인데.” 글 이관순(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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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4-22
  • 너도 죽는다‘메멘토 모리’
    말에는 묘한 힘이 있어 곱씹을수록 향기를 내는 말이 있고, 겸손함을 가르치는 말도 있지요. 라틴어는 그런 철학적 의미를 함의한 말과 글이 꽤 많습니다. 언젠가의 기억입니다. KBS TV '도전 골든벨‘에서 최후 1인이 된 학생에게 50번 마지막 골든벨 문제가 주어집니다. “고대 로마에서 승리를 쟁취한 장군이 개선행진을 할 때 주위에서 외쳤던 라틴어는?“ “메멘토 모리" 영예의 골든벨이 울리는 짜릿한 순간을 지켜보았지요. 다소 생소한 라틴어 '메멘토 모리(memento mori)'는 '죽음을 기억하라‘는 뜻입니다. 유래는 로마 공화정의 개선식으로 거슬러 올라가요. 개선식은 전쟁에서 승리한 장군에게 주어지는 영예입니다. 개선장군은 관습에 따라 전차를 타고 퍼레이드를 벌입니다. 영웅이 탄 마차가 시민의 환호 속을 헤치고 행진하는 동안 뒤에서 노예들이 큰소리로 외쳐댑니다. 메멘토 모리! 메멘토 모리! “오늘은 개선장군이지만 너도 언젠가는 죽는다. 겸손하게 행동하라.” 승리에 도취된 장군에게 본분을 잊지 않도록 경각심을 주는 장치인 셈이죠. 로마 최고의 환대 속에서도 너는 신이 아닌, 한 인간일 뿐임을 알린 것입니다. 메멘토 모리에는 세 가지 철학적 가치가 내재되어 있습니다. ‘죽음을 기억하라. 운명을 사랑하라. 현재에 충실하라.’ 이 셋은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도 적용되는 훌륭한 교훈입니다. 스티브 잡스도 스탠퍼드대 졸업식 축하 연설에서 이를 강조했습니다. 췌장암 투병으로 힘든 시기를 보내던 그는 ‘죽음은 삶이 만든 최고의 발명품‘이라고 격찬합니다. 그러므로 제한된 인간의 시간을 다른 누군가의 인생을 살 듯 낭비하지 말고 자신을 믿고 집중하라고 졸업하는 학생들에게 말합니다. 뜻이 통하는 라틴어에 ‘카르페 디엠(carpe diem)'이 있습니다. 몬래 이 말은 신을 공경하고 오만해지지 말라는, 현재를 가치 있게 살라는 뜻인데 이후 기독교 영향을 받아 현세의 부귀나 영화의 부질없음을 알립니다. 우리에게도 ‘화무십일홍’이란 말이 있죠. 열흘 가는 붉은 꽃이 없다는 이 말엔 ‘한 번 흥한 것은 반드시 쇠한다.’ 는 속뜻을 지닙니다. 트로트 가수 김연자가 불러 유명한 노래 ‘아모르 파티’도 같은 말입니다. 사랑을 뜻하는 아모르와 운명을 뜻하는 파티가 합성된 라틴어로 이 또한 ‘운명을 사랑하라’는 말이지요. 인간이 가져야 할 삶의 태도로 철학자 니체가 처음 사용했습니다. 메멘토 모리는 미국 남서부에 거주해온 나바호족에서도 찾을 수 있어요. 그들은 “네가 세상에 울면서 태어날 때 세상은 기뻐했으니, 네가 죽을 때 세상은 울어도 너는 기뻐할 수 있도록, 그러한 삶을 살아라.”는 의미심장한 철학을 닮고 있습니다. <메멘토 모리>, <카르페 디엠>, <아모르 파티>, <화무십일홍>까지 모두 겸손한 삶을 가르칩니다. 제한된 시간을 사는 인생에게 죽음을 기억하고, 운명을 사랑하고, 오늘에 충실하라.... 이보다 더 삶을 성찰하게 하는 말이 또 있을까 싶습니다. 글/ 이관순(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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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4-15
  • 의리가 사라진 세상
    짓궂은 질문을 해봅니다. ‘사람’과 ‘인간’은 같은 거야? 사전의 설명은 비슷 하지만, 아무래도 “저 인간!” 하면 부정적 이미지가 앞서죠. “저 사람 인품이 좋아”로는 써도 “저 인간 인품이 좋다”고 말하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세상에 사람 같지 않은 인간이 많다보니 용례까지 헷갈립니다. 초등학교 국어 교과서의 ‘의좋은 형제’를 생각하면 지금도 마음이 훈훈합니다. 우애 좋은 형제가 가을 수확을 마치고 들판에 볏단으로 노적가리를 만듭니다. 형이 보니 아우네 것이 적어 보입니다. 그날 밤, 어려운 아우 형편을 안 형이 자신의 볏단을 옮겨 놓고, 다음날 밤은 식솔 많은 형을 생각한 아우가 반대로 볏단을 옮기지요. 노적가리가 줄지 않자 형제 다 고개를 갸우뚱합니다. 마침내 볏단을 옮기던 형제가 달빛 아래 마주치면서 얘기는 끝나죠. 그때의 감동으로 습자시간이면 붓글씨를 ‘노적가리 풍년일세’만 썼던 기억이 납니다. 가난해도 마음은 풍년인 사람들이 살던 시절이 있었지요. 엊그제 복권 당첨금이 살인흉기가 된 사건이 났습니다. 우애 좋은 형제가 복권 당첨으로 수억 원의 당첨금을 받아 배분까지는 성공했는데, 그 돈으로 사업을 했던 형이 망하며 사단이 납니다. 돈을 더 요구하는 형과 보증을 선 동생 간에 감정이 충돌하다 동생을 살해하는 일이 벌어진 겁니다. 황금만큼 요괴스러운 것은 없습니다. 돈 앞에 장사가 없다지요. 일본 속담에 ‘담배꽁초와 돈은 쌓일수록 냄새가 난다’고 했습니다. 돈이 사람을 부패하게 만든다는 뜻이겠지요. 사는 것은 전보다 풍족해도 인성은 강퍅해졌습니다. 돈을 둘러싼 이기적 욕망이 칼끝처럼 첨예하게 부딪치는 세상입니다. 개신교의 큰 어른이셨던 목사님이 생전에 우리교회에 오셔서 당신이 붓으로 큼직하게 쓴 ‘의리를 지키자’란 글귀를 강단에 내리고 설교를 하신 적이 있습니다. 세상이 오죽하면 의리를 부탁했을까요. 사람과 사람,관계 사이에 의리가 사라졌다고 탄식하는 소리가 높아만 집니다. 제목을 잊은 영화입니다. 세 친구가 딱 한 번 은행을 털어 깨끗하게 살자며 치밀한 준비를 합니다. 그들의 거사는 성공했고 무사히 안전지대에 도착하자 돈다발을 놓고 환호합니다. 한 친구가 축배를 들자며 나갔다가 술에 독을 타서 옵니다. 욕심이 생긴 거죠. 태연하게 돌아온 친구가 술잔을 건네고 축배를 외칠 때, 팡팡! 술 사온 친구가 고꾸라지고 남은 둘은 낄낄댑니다. 뛰는 놈 위에 나는 놈이 있거든요. 둘은 더 큰소리로 건배를 외치지만 독배를 든 이들도 쓰러집니다. ‘사람에게 의리 빼면 시체’ 라고 말하던 세상이 있었지요. 의리란 뜻은 ‘사람관계에서 마땅히 지켜야 할 도리’로, 여기엔 사람이 갖춰야 할 덕목이 다 녹아져 있죠. 가난은 견뎌내기 어려운 것임을 경험한 세대가 모이면 그래도 그때가 좋았다고 반추합니다. 의리가 사라진 곳에 먹잇감을 놓고 으르렁 대는 동물세계가 어른댑니다. 사람 사이 흐르는 체온 대신 물질을 향한 충혈 된 눈빛만 섬뜩하니 사람은 없고 인간만 남아 보입니다. 다시 사전을 봅니다. ‘인간’이란 단어의 기본설명 뒤로 ‘사람의 모습은 하고 있되 사람답지 못하다는 뜻.’을 추가하고 예문도 달았군요. “저 인간이 한 짓을 생각하면 돌아버리겠어.” 너무도 흔히 듣는 슬픈 말이 됐습니다. 글 이관순(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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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4-08
  • 의리가 사라진 세상
    짓궂은 질문을 해봅니다. ‘사람’과 ‘인간’은 같은 거야? 사전의 설명은 비슷 하지만, 아무래도 “저 인간!” 하면 부정적 이미지가 앞서죠. “저 사람 인품이 좋아”로는 써도 “저 인간 인품이 좋다”고 말하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세상에 사람 같지 않은 인간이 많다보니 용례까지 헷갈립니다. 초등학교 국어 교과서의 ‘의좋은 형제’를 생각하면 지금도 마음이 훈훈합니다. 우애 좋은 형제가 가을 수확을 마치고 들판에 볏단으로 노적가리를 만듭니다. 형이 보니 아우네 것이 적어 보입니다. 그날 밤, 어려운 아우 형편을 안 형이 자신의 볏단을 옮겨 놓고, 다음날 밤은 식솔 많은 형을 생각한 아우가 반대로 볏단을 옮기지요. 노적가리가 줄지 않자 형제 다 고개를 갸우뚱합니다. 마침내 볏단을 옮기던 형제가 달빛 아래 마주치면서 얘기는 끝나죠. 그때의 감동으로 습자시간이면 붓글씨를 ‘노적가리 풍년일세’만 썼던 기억이 납니다. 가난해도 마음은 풍년인 사람들이 살던 시절이 있었지요. 엊그제 복권 당첨금이 살인흉기가 된 사건이 났습니다. 우애 좋은 형제가 복권 당첨으로 수억 원의 당첨금을 받아 배분까지는 성공했는데, 그 돈으로 사업을 했던 형이 망하며 사단이 납니다. 돈을 더 요구하는 형과 보증을 선 동생 간에 감정이 충돌하다 동생을 살해하는 일이 벌어진 겁니다. 황금만큼 요괴스러운 것은 없습니다. 돈 앞에 장사가 없다지요. 일본 속담에 ‘담배꽁초와 돈은 쌓일수록 냄새가 난다’고 했습니다. 돈이 사람을 부패하게 만든다는 뜻이겠지요. 사는 것은 전보다 풍족해도 인성은 강퍅해졌습니다. 돈을 둘러싼 이기적 욕망이 칼끝처럼 첨예하게 부딪치는 세상입니다. 개신교의 큰 어른이셨던 목사님이 생전에 우리교회에 오셔서 당신이 붓으로 큼직하게 쓴 ‘의리를 지키자’란 글귀를 강단에 내리고 설교를 하신 적이 있습니다. 세상이 오죽하면 의리를 부탁했을까요. 사람과 사람,관계 사이에 의리가 사라졌다고 탄식하는 소리가 높아만 집니다. 제목을 잊은 영화입니다. 세 친구가 딱 한 번 은행을 털어 깨끗하게 살자며 치밀한 준비를 합니다. 그들의 거사는 성공했고 무사히 안전지대에 도착하자 돈다발을 놓고 환호합니다. 한 친구가 축배를 들자며 나갔다가 술에 독을 타서 옵니다. 욕심이 생긴 거죠. 태연하게 돌아온 친구가 술잔을 건네고 축배를 외칠 때, 팡팡! 술 사온 친구가 고꾸라지고 남은 둘은 낄낄댑니다. 뛰는 놈 위에 나는 놈이 있거든요. 둘은 더 큰소리로 건배를 외치지만 독배를 든 이들도 쓰러집니다. ‘사람에게 의리 빼면 시체’ 라고 말하던 세상이 있었지요. 의리란 뜻은 ‘사람관계에서 마땅히 지켜야 할 도리’로, 여기엔 사람이 갖춰야 할 덕목이 다 녹아져 있죠. 가난은 견뎌내기 어려운 것임을 경험한 세대가 모이면 그래도 그때가 좋았다고 반추합니다. 의리가 사라진 곳에 먹잇감을 놓고 으르렁 대는 동물세계가 어른댑니다. 사람 사이 흐르는 체온 대신 물질을 향한 충혈 된 눈빛만 섬뜩하니 사람은 없고 인간만 남아 보입니다. 다시 사전을 봅니다. ‘인간’이란 단어의 기본설명 뒤로 ‘사람의 모습은 하고 있되 사람답지 못하다는 뜻.’을 추가하고 예문도 달았군요. “저 인간이 한 짓을 생각하면 돌아버리겠어.” 너무도 흔히 듣는 슬픈 말이 됐습니다. 글 이관순(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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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4-04
  • 슬픔이여 안녕!
    죄 없는 어린 생명이 희생될 때 더없이 고통스럽습니다. 남달리 알레르기 반응을 보이는 것은 일종의 트라우마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여덟 살에 충북 영동의 한 초등학교에 입학했습니다. 여름이 되면 아이들과 몰려서 마을 앞에 흐르는 강에 나갑니다. 겨울엔 썰매를 타고 여름엔 물놀이를 하는 곳. 경부선이 지나가는 철교 아래가 또래들의 여름 아지트지요. 흰줄 하나를 내린 검정 팬티를 입고 상급생들은 수영으로 강을 건너고, 하급생들은 교각 중턱에 걸터앉아 형들을 부럽게 바라보다가 텀벙 강물에 몸을 던집니다. 이날도 철교 아래에 한 떼의 아이들이 모였습니다. 비가 와서 물이 좀 불었지만 누구도 겁내지 않았지요. 그런데 물이 불면 수심에서 물돌이가 이는 걸 모른 게 비극입니다. 형들이 수영을 가르친다고 아이들을 밀어 넣는데 그만 1학년 쌍둥이 동생이 소용돌이에 말려든 겁니다. 아이가 물속에서 허우적이자 더럭 겁이 난 아이들이 달아나기 시작합니다. 나도 겁에 질려 뛰다가 뒤를 돌아봤는데, 발을 구르며 울부짖는 쌍둥이 형의 모습이 보였습니다. 죽은 아이는 내 짝꿍이었습니다. 마을이 발칵 뒤집어지고... 나도 밤마다 경기를 일으켰습니다. 땀을 흘리며 악몽에 시달렸지요. 물에 퉁퉁 부은 친구가 나를 원망했기 때문입니다. 넋이 나간 친구 엄마, 고래고래 소리질러 아들 이름을 부르는 아빠, 나를 원망스레 쳐다보는 쌍둥이 형... 나는 누구 앞에서도 고개를 들 수 없는 죄인이었습니다. 친구를 버리고 도망쳤다는 죄책과 슬픔이 어린 가슴을 쿵쿵 뛰게 했지요. 이로 인해 부모님 걱정도 덩달아 커졌습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아버지가 발령을 받아 새 임지로 이사하면서입니다. 가족이 아버지의 전근을 반색한 것도 나 때문이었죠. 아픈 기억은 상급학교로 진학할수록 많이 옅어졌습니다. 초등학교 동창들과 연락을 끊은 것도 도움이 됐습니다. 결혼 후로는 아예 잊다시피 지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어느날, 우연히도 길에서 쌍둥이 형을 만나면서 덜컥 상처가 뜯기고 말았습니다. 어머니는 우울증을 앓다가 목을 매셨고, 알코올 중독에 빠진 아버지도 암으로 돌아가셨답니다. 한 아이의 죽음이 이렇게 가족을 황폐화 시켰구나. 아물었던 내 상처에도 피가 나는 걸 느꼈습니다. 가족 중 유일한 생존자인 형의 얼굴에 깔린 그늘을 보았습니다. “가족 몫까지 잘 살아야지. 흔들릴 때마다 그렇게 위로해.” 예민한 성격 탓일까, 이후로 이따금 꿈을 꿉니다. 시골에서 놀던 추억들이, 떠난 어린 친구의 모습도 생생하게 포착됩니다. 더 힘들게 하는 건 잊을 만하면 날아드는 이런저런 또래 아이들 희생소식입니다. 줄어드는 인구도 걱정인데 죽었다하면 아이들이냐고 격분도 합니다. 지난 봄, 헝가리에서 유람선 전복으로 6세 소녀가 숨졌다는 비보가 그랬었죠. 외할머니 손을 꼭 잡은 아이의 인양된 모습은 더 애처로웠습니다. 그 아픔이 채 가시기도 전에 또, 엄마가 일곱 살 어린 아이를 데리고 동반자살을 했다는 비보가 들렸습니다. 죽음이 낯설기만 어린 나이에 얼마나 섬뜩했을까, 얼마나 설득했을까, 아니 강요했을까. 그래야 했던 엄마의 심정은? 푸른 6월에는 전 세계인을 슬픔에 잠기게 한 사고가 또 발생했습니다. 멕시코 국경에서 리오그란데 강을 건너 미국으로 밀입국하려던 25세 아빠와 두 살짜리 딸이 익사한 것입니다. 아빠가 아이를 셔츠 안에 넣고 아이는 아빠의 목을 끌어안은 채 떠내려 온 사진을 봤습니다. 물살을 이겨내려 했던 아빠의 다리는 물위에 떠 있고, 아이의 바지는 물먹은 기저귀로 불룩했습니다. 강 건너서 울부짖는 엄마의 얼굴이 오버랩됩니다. 멕시코 영화 ‘신 놈브레’는 중남미사람들이 ‘죽음의 열차’를 올라타고 미국으로 밀입국하려는 과정을 그린 영화입니다. 열차 지붕에 올라타다 떨어져 죽고 힘겹게 탄 뒤는 살해나 강간을 당하기도 합니다. 서글픈 것은 점쟁이가 찾아온 주인공에게 일러주는 말이죠. “넌 미국에 도착할거야. 그런데 안내는 신이 아닌 악마가 하지.”라고. 그 악마는 죽음의 열차를 올라 탄 아빠와 딸을 강물 속에 빠뜨린 것입니다. 스스로를 위로합니다. 어쩌면 아이들이 찾아간 저세상이 험난한 이 세상을 사느니 보다 낫지 않겠냐고. "여긴 낙원이 아냐. 슬퍼하지 말고 편히 쉬어라..." 오래전 읽은 프랑수아 사강이 쓴 ‘슬픔이여 안녕’ 이란 소설 제목이 떠오르는 것은 우연일까요? *글/이관순(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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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4-01
  • 노을처럼 아름답던 식탁의 축제
    사람들이 그렇게도 갈구하는 행복은 어디에 있는 걸까? 골드러시를 따라 미 서부로 향했던 그 많은 사람들은 무엇을 찾았을까. 공자는 제자의 질문에 ‘행복은 없다’고 간단명료하게 답합니다. 공자는 이에다 ‘인생에는 행복을 찾아가는 여정이 있을 뿐’이라고 덧붙였습니다. 공자가 말하고자 한 것은 행복이란 눈이 혹할 보석 같은 게 아니라고 내 나름 유추 해석합니다. 거대한 바위 밑 은밀한 곳이나 화려한 샹들리에 속에 숨겨진 것이 아니고, 우리가 사는 일상의 그 사소한 것들, 그 자체에 있음을 말하려 한 것으로 주석을 답니다. 행복은 더 이상 파랑새도 아니고 신기루도 아닌, 바로 우리의 일상에 흘러갑니다. 매일 우물에서 물을 길어오듯 행복도 일상이란 우물에서 길어 올려야 합니다. 돌아보니 그 많던 내 일상들이 다 허공에 흩어졌습니다. 우주의 어느 시간보다도 값진 것들입니다. 나이가 들면 외롭다고 합니다. 수많았던 그 일상들을 되돌릴 수 없고 함께 할 수도 없다는 것 때문이겠지요. 자식들로 들썩이던 공간은 소산하다 못해 적막감마저 흐릅니다. 전화도 오고 주말이면 찾아주니 반갑기도 하지만 잠시 머물다 떠나고 나면... 이젠 막내마저 직장 따라 지방으로 갔으니 그마저도 용이하지 않습니다. 옛말에 고개가 끄덕여 집니다. “마음이 지척이면 천리가 지척이고, 마음이 멀어지면 지척도 천리”라는 말... 형제간의 소통도 예전 같지 않습니다. 통화를 해도 쉽게 대화거리가 궁해지죠. 전 같으면 자식걱정에, 자랑에, 줄줄이 엮을 테지만 빈 둥지끼리 나눌 것은 그저 서로의 건강 걱정이나 해주면 끝입니다. 존경하는 선배와 만났습니다. 큰 아들은 미국에서 학위를 따고 현지에 눌러 앉은 지 11년째랍니다. 오늘은 손자가 화상통화를 할려나? “아참, 이번 주는 바쁘다 했지? 그래 바빠야지.” 일본에 있는 둘째 딸은 엊그제 통화에서 아이 교육이 힘들다고 넋두리하던데. “타지도 아닌 타국 생활이니 그렇겠지.” 제 둥지를 찾아간 자녀들한테 옛 일상을 더듬자고 할 일은 더욱 아닙니다. 그렇다고 넋두리만 하고 있을 수도 없습니다. 그것이 우리 인생이 거쳐야 할 여정으로 받아들여야 할 테니까요. 늘 아쉽고, 부족하고, 늘 그리움이 많은 게 우리네 인생인 듯합니다. 그래도 아직 남은 인생이 있고 걸어야 할 여정이 있고, 맞이할 일상이 남았으니 희망이란 새 한 마리 날아와 내 어깨에 앉아 주길 기대합니다. 그러다보니 더욱 간절해지는 것이 하늘의 은총입니다. 그분만이 내 남은 여정에 행복의 무늬를 함께 짜 주실 분이 시니까요. 식탁의 빈자리를 채워주시고 내가 입술을 열어 기도하면 응답해 주십니다. 성경을 펴면 말씀이 두런두런 대화를 나누자고 합니다. 예전에 느끼지 못한 행복감이 차오릅니다. 아이들과 즐기던 저녁 식탁의 축제는 흩어져갔지만, 그 분과 함께 하는 식탁의 축제는 노을빛처럼 아름답습니다. 오늘도 사랑과 그리움이 묻은 집에서, 가족의 기억들이 숨 쉬는 공간에서, ‘고뇌는 내가 갈아입는 옷 중 하나이니 나는 상처받은 사람에게 기분이 어떤지 묻지 않는다 나 스스로 그 상처받은 사람이 된다' (월트 휘트먼의 '나의 노래' 중에서 글 이관순(소설가/이관순의손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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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3-28
  • 시간보다 소중한, 함께 할 사람
    살면 살수록 강해지지 못하고 약해지는 게 사람입니다. 유독 사람만 신앙에 의지하는 것도 그 때문이겠지요. 몸집도 키도 작아지고, 꿈도 희미해지고, 늘어나는 건 나이테뿐입니다. 친구 병문안을 다녀오며 많은 생각이 따라왔습니다. “하나님이 새 생명을 선물하셨어. 받을 자격이 없는데 내게” 내 손을 잡으며 친구가 건넨 말입니다. 25일 동안 중환자실에 누워 있었다는 친구는 완전 다른 사람이 돼 있었습니다. 가장의 책무보다는 평생 자기가 좋아한 일에 빠져 살았지요. 전국의 명산을 섭렵하더니 세계의 명산 순례를 끝낼 만큼 건강도 좋았습니다. 이로 인해 가장으로서 아빠로서 지어야 할 짐을 고스란히 떠안은 건 아내였죠. 그가 만든 그늘 때문에 가족에게는 인기가 없었습니다. “당신 성당에만 나가요. 그 이상 더 바라지 않을 게요.” 모든 걸 체념하고 남편 구원에만 희망을 걸었지요. 그러한 아내에게 ‘죽을 때 가까워지면 고백해 볼게’라고 했던 그가 큰일을 겪더니 달라진 것입니다. 애나 어른이나 사람을 기분 좋게 하는 단어가 ‘선물’일 것입니다. 주고받는 쪽 모두를 만족시키는, ‘사랑’ 같은 귀한 어휘입니다. 친구를 눈물겹게 한 고결한 선물, 감당이 안 되는 분에 넘친 선물, 생명은 세상의 그 어느 것보다 값진 선물이겠지요. 작가 볼테르는 창조자가 내려주신 선물로 ‘생명’을 꼽았고, 프랜치스코 교황은 ‘시간’을 말했습니다. 친구는 나를 보기 며칠 전 병상에서 영화 ‘라스트 미션’을 보았다고 했습니다. 자신의 이야기를 콕 집어 말하는 것 같아 마음으로 많이 울었다고 합니다. ‘라스트 미션(the mule 노새)’은 어느 낙제점 가장의 참회록입니다. ‘시간보다 소중한 것’을 들려 줍니다. 실존인물을 각색한 주인공 역을 노장 클린트 이스트우드(사진)가 맡았습니다. 원제목에서 보듯 주인공 얼의 삶은 ‘노새’를 닮았지요. 한 가지만 생각하는 노새.... 가족과 떨어져 사는 삶에 익숙한 얼은 화훼농장을 가꾸는 일에 시간과 정성을 다 쏟아 붓습니다. 백합경연대회는 그가 기다려온 무대입니다. 대회마다 우승컵은 그의 차지였고, 그 순간 느끼는 행복감은 컸습니다. 이를 삶의 낙으로 삼았던 얼이 생의 끝자락에 이르면서 눈물을 짓습니다. 기회가 있었음에도 하지 못한 일들을 떠올리며 흘리는 눈물은 대개가 때늦은 ‘후회’입니다. 분신과도 같던 꽃 농장이 기울면서 깨닫게 된 것이지요. 어느 날, 가족에게 평생 좋은 일을 못해온 얼이 거금을 내밉니다. 꽃 농장이 압류될 만큼 쫄딱 망한 직후여서, 아내는 돈의 출처를 수상히 여깁니다. 비밀은 영화의 원제(原題)인 ‘mule'에 숨어있지요. 얼이 필요한 돈을 얻기 위해 마약 운반책을 맡은 것입니다. 운반 물품이 마약임을 모르는 채 말입니다. 얼은 가족에게 진 마음의 빚을 보상하기 위해 노새처럼 일합니다. 그러던 중 아내가 위독하다는 비보를 듣습니다. 매달 시간 엄수가 밀매조직의 생명임에도 얼은 병원으로 달려가 아내를 위로합니다. “사랑해 여보” 수십 년 만에 해보는 말이지만 낯설지 않습니다. 아내가 기뻐합니다. 얼은 아내의 눈을 보며 약속합니다. “앞으로 더 사랑할게 더 많이.” 그것이 불가능한 일이란 것을 알면서도. 범죄 조직은 규칙을 위반한 얼의 제거에 나섭니다. 이쯤에서 작가는 말합니다. “시간보다 더 중요한 하나는 시간을 함께 보낼 사람.“ 이라고. 너무 늦긴 했으나 이 진리를 깨달은 90세의 얼은 평생 등졌던 딸과 함께 할 시간을 그리며 마지막 배달에 나섭니다. 얼은 운반 물품이 마약임을 알게 되고 끝내 마약 단속국과 맞닥뜨리는 운명의 갈림길에 섭니다. 그는 어떤 길을 선택을 할까요? 원로 문학평론가 유종호는 최근 펴낸 신작에서 “삶의 곡절을 많이 겪었다고 각별한 지혜가 생기는 건 아니다”라고 했습니다. 오랜 세월 굽이쳐온 삶의 길목에서 찾아낸 인생의 지혜가 겸양으로 들리지만, 살고 또 살아봐도 알지 못할 게 인생이라는 고백처럼 들립니다. 퍼내고 퍼내도 줄지 않는 샘물 같이 말입니다. *글 이관순(소설가) 이관순의 손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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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3-25

실시간 기고 기사

  • 표범이 킬리만자로에 간 이유
    젊은 날, 제목에 끌려서 손에 잡은 것이 헤밍웨이의 소설 ‘킬리만자로의 눈’이었다. 그곳에 무엇인가 허기진 젊음을 눈 뜨게 할 신비함이 있을 것만 같았다. 헤밍웨이는 킬리만자로의 정상 부근에 표범이 말라붙어있는 것으로 묘사했다. 소설은 “그 높은 곳에서 표범이 무엇을 찾고 있었는지 아무도 말해 주지 않았다”라는 말로 도입부를 장식했다. 셀렝게티 평원에 있어야 할 표범이 왜 그 높은 정상에서 어슬렁거렸을까? 무엇을 찾으려고 했을까? 사람들은 본성이 높이 오르는 것을 좋아한다. 바벨탑을 쌓다가 저주를 받았듯이 산에 가도 낮든 높든 꼭 정상을 밟아야 성이 풀리고, 사업을 해도 고지를 정해 놓고 등산하듯 정복 전략을 세운다. 그 전략에는 오르는 건 있어도 후진은 없다. 정상에 오르려면 먼저 알아야 하는 하나가 있다. 정상에 가까워질수록 산세는 험하고 가팔라서 우리의 인내와 한계를 시험한다는 것. 가쁜 숨을 헉헉거리면서 몸을 숙이고 정점을 밟을 때까지 고난의 걸음을 이어가야 한다. 어느 데 건 만만한 정상은 없다. 모든 사람이 억척스럽게 정상에 오르기를 염원하지만 문제는 고지를 밟은 다음에 일어난다. 킬리만자로의 표범처럼 정상에 오른 후에 나타난 상황은 무엇일까. 다시 내려와야 한다는 것이다. 사방이 가파른 비좁은 정상에서 느낌은 길지 않으니까. ‘마음을 읽는 책’을 쓴 서천석은 우리에게 그 점을 묻고 있다. 정상이란 목표와 의미에 대해서…. 삶의 ‘목표’와 ‘의미’는 다르며, 이를 혼동해서는 안 된다고 했다. 소설 제목이 좋았듯이 조용필의 ‘킬리만자로의 표범’도 나에겐 매력적인 노래이다. “묻지 마라 왜냐고 왜 그렇게 높은 곳까지 오르려 애쓰는지 묻지를 마라”라고 노래하지만, 우리는 물어야 한다. 정상을 향한 나의 몸부림이 나의 인생에 무슨 의미가 있는지를…. 많은 사람들이 성과주의, 목표주의에 내몰리고 있다. 그것만 이루면 모든 것이 해결되는 것처럼 혼신을 다해 굵은 땀방울을 흘리고, 많은 것을 포기하면서 목표 하나를 향해 질주한다. 오르는 것에 천착할 뿐, 왜 올라야 하는지, 오른 다음에는 무엇을 해야 할지에 대해서는 집중하지 못한 채…. 목표인가? 의미인가? 햄릿이 울부짖는 ‘죽느냐’ ‘사느냐’ 만큼 이를 집요하게 묻고 되물어야 한다. 살아보면 영원히 지속할 것 같은 기쁨도, 행복도, 그리고 슬픔도, 아픔도 끝이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중요한 것은 올라갔으면 내려와야 하는, 하강의 때와 길을 잘 판독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때를 어떻게 찾고 보내느냐가 그다음의 삶을 결정지을 때가 많아서다. 시기를 놓치면 스스로 무너질 수도 있다. 간발의 차이인데 멀쩡하던 하늘에서 천둥이 치고 날벼락을 맞기도 하고 발을 헛디뎌 낭떠러지로 구를 수 있다. 지혜로운 삶이란, 이루려는 목표와 찾고자 하는 의미를 잘 구분하고 다루는 데 있다. ‘의미’는 언제나 ‘목표’ 위에 두어야 한다. 목표는 삶의 의미를 발화시키는 수단이지 목표가 의미를 지배하면 삶이 변질되어 버린다. 이를 깨달은 사람은 짧은 인생이지만 1기, 2기로 나누어 삶을 보다 의미 있게 살려고 한다. 1기 인생이 고지를 오르는 수고의 몫이라면, 2기 인생은 수고로 얻은 가치를 선하게 행사하는 것으로 연결 지으려 한다. 선한 영향력을 키우는 것이 삶의 의미이다. 학문을 얻은 사람은 가르침으로, 기업을 얻은 사람은 수확한 재화로, 예술가는 그만의 재능으로 사회에 선한 영향력을 전파하는 것이다. 파동을 키우고 울림을 남기는 사람이어야 한다. 세상의 칭송은 아니더라도 이 땅에 태어나 몇몇 사람에게 선한 영향을 주고 삶의 파장을 전할 수 있다면, 헛된 삶을 사는 것은 아닐 것이다. 일생을 살아도 삶에서 남는 건 가슴으로 느끼는 시간뿐이다. 그 많은 세월을 보내고도 가슴으로 느끼지 못한 시간은 포말처럼 덧없이 날린 시간들이다. 뒤를 돌아보면 안다. 한평생을 살았는데 내가 기억하는 시간을 합치면 몇 시간을 기억할 수 있는가. 모든 게 풀잎 위 이슬이고 광풍에 날리는 쭉정이고 굴뚝에서 사라진 연기처럼 흔적도 없다. ‘떨림과 울림’을 쓴 물리학자 김상욱이 이렇게 설명했다. ‘우주에 존재하는 것은 모든 것이 떨고 있다’라고. 우리의 삶도 떨림이라는 이야기다. 그렇다면 울림은 무엇인가? 그의 설명이 공감력을 높여주었다. “원자 주위를 도는 전자뿐 아니라, 사랑을 고백하는 심장의 두근거림, 딱딱한 건물도 각자의 진동으로 떨고 있다. 소리나 빛도 떨림이란 면에선 같다. 과학자들에게 모든 건 진동으로 환원된다”라고 했다. 그 진동에 보응하는 것으로 울림이 있다. “울림은 공명이다. 스마트폰도 주파수가 맞아야 울고, 우리가 엉엉 울거나 깔갈대며 웃는 것도 다 울림이다. 그러나 무수한 그 떨림에 공명을 맞추지 못하면 울림이란 없는 것.”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의 삶이 떨림이라면 울림은 떨림이 주는 선한 영향력에서 생겨나고 파동을 일으킨다. 그것이 우리 가슴이 느끼는 시간이다. 킬리만자로의 말라붙은 표범의 흔적을 보며, 나는 지금 어떻게 떨고 있는가? 삶의 의미를 묻는다. -소설가/ daumcafe 이관순의 손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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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4-03
  • 그냥 우리 모두 잘 됐으면 좋겠다
    좋은 삶이란 무엇일까? 때를 지켜서 나 다운 삶을 잘 사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성서의 가르침에도 천하 만사가 다 때가 있다고 했다. 이 시대가 아픈 것은 모든 세대가 자기 때를 지켜 나 다움으로 살지 못하는 데 있다. 젊은이가 꿈을 상실하고 세상 눈치나 슬슬 본다거나, 장년은 장년 다움을 지켜내지 못하고 심약함과 맹종으로 자신의 때를 잃어가고 있다. 그러다 한 번뿐인 때와 기회를 훅 날리면 인생의 ‘화양연화(花樣年華)’는 깃들 곳이 없게 된다. 나이가 든다는 것은 잘 익어간다는 것이고, 성숙해진다는 의미이다. 누구는 나이가 든다는 것을 옻칠을 더하는 것이라고 은유했다. 옻칠은 더할수록 내면의 빛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우리가 하늘로부터 받은 선물인 '생명(生命)'에는 ‘명(命)에 따라 잘 살라(生)’라는 뜻이 있다. 살되 혼자가 아니라 이웃과 더불어 공동체의 삶으로 잘 살라는…. 성서는 또 인생의 완성은 아름다운 공동체 삶에서 이루어짐을 깨닫게 한다.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께서 주리신 것이나 목마른 것이나 나그네 된 것이나 헐벗으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공양하지 아니하더이까. 이에 왕이 대답하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하지 아니한 것이 곧 내게 하지 아니한 것이니라.” 여기서 ‘작은 자’는 소외된 우리의 이웃이다. 1863년 영국 어느 추운 겨울밤이었다. 갓난아이를 품에 안은 한 여인이 남부 웨일스의 언덕을 넘어가고 있었다. 갑자기 세찬 눈보라가 몰아닥쳐 더는 걸을 수 없게 되었다. 사방을 향해 울부짖었지만, 누구의 도움도 받을 수 없었다. 다음 날 건초 더미를 짊어지고 눈 쌓인 언덕길을 걷던 한 농부가 이상한 형태의 눈더미를 발견했다. 언덕의 한 움푹한 곳에 쌓인 눈을 헤치자 알몸으로 얼어 죽은 여인이 나왔다. 품에는 자신의 옷으로 무엇인가를 꼭 감싸 안은 채…. 조심스럽게 옷을 헤치자 숨이 살아 있는 갓난아이가 울음을 터뜨렸다. 엄마는 추위에 하나씩 자기 옷을 벗어 아이에게 주고 자신은 얼어 죽었다. 엄마의 희생으로 살아난 아들은 훗날 1차 대전 중 전시내각을 이끌면서 베르사유 조약을 성사시킨 34대 영국 총리 데이비드 로이드 조지였다. 그는 자신을 키워준 농부에게 어머니 이야기를 자주 들었다. 어머니의 그 희생을 생각하며 죽을힘을 다해 공부했다. 아무리 피곤해도 5시간 이상 자지 않았고, 추위가 와도 따뜻한 옷은 사양했으며, 맛있는 음식을 배불리 먹지 않았다. 스스로 나태해진다는 생각이 들면, 웨일스 언덕에 올라 눈보라 속에서 아들을 위해 옷을 벗는 어머니를 떠올렸다. 일생 동안 어머니에 대한 고마움과 사랑에 보답하려는 간절함이 그를 영국의 지도자로 키웠다. 세상이 살만하게 느껴질 때는 사랑을 실천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음에서 난다. 늘 떨림으로 다가온 사랑 이야기는 울림으로 멀리멀리 퍼져나간다. 그것이 사람이 지녀야 할 선한 영향력이다. 2019년부터 ‘목마르거든’의 필진으로, 독자로, 함께 하면서 매월 새 책이 발간될 때마다 빼놓지 않고 읽는 글 꼭지가 있다. ‘여기에’…. 손가락이 가리키는 그곳엔 아프고 가슴 시린 사연들이 호(號)마다 빠지지 않고 올라왔다. 사랑의 손길을 펴고 기쁨의 발길을 돌리는 후원자 명단과 함께. 글을 읽다가, 가끔 인간의 근원적인 물음에 나설 때가 있다. 같은 공간에 살면서 누구는 복에 겨워하고, 누구는 찌든 불행에 가슴 떨어야 하나? 같은 시간대에 태어나 세상을 살아가는데 누구는 주위에 짐이 될 만큼 오래 살고, 어느 누구는 꽃다운 청춘조차 피어보지 못하고 떠나야 하나? 삶의 모순은 문학을 존립시키는 이유가 되었다. 하나님은 나에게 끊임없는 물음을 원하신다. 왜 일하는가? 왜 감사하는가? 왜 사랑해야 하는가? 나름의 치열한 삶을 살아온 사람들은 이 물음에 깨달음을 갖는다. 일과 인생에서 가장 우선시할 것이 ‘가치관’과 ‘태도’에 있다는 것을. 지난해 9월 회사 소유권(4조1800억 원)을 통째로 환경단체에 기부한 한 기업인의 기사가 화제가 되었다. 미국 아웃도어 브랜드 파타고니아의 창업주 이본 쉬나드 회장이 주인공이다. 그는 뉴욕타임스와의 인터뷰에서 “기업을 소유하는 것이 나의 인생 목표가 아니었다”며 “내 삶을 올바르게 정리할 수 있게 돼 안도감이 든다”라고 행복해했다. 쉬나드 회장은 일생을 바쳐 ‘아웃도어계 구찌’로 불릴 만큼 명품 브랜드 기업을 키우고도 이를 소유하지 않고 ‘아름다운 나’를 실천하는 수단으로 삼았다는 것이 존경스러웠다. 하나님의 사람이라면 사람들에게 존귀해지려고 일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며 자신을 향해 고개를 끄덕여 주시는 일을 할 때, 보다 큰 행복감을 느낄 것이다. 행복감이란 긍정적인 생각으로 이어지는 감정이다. 삶의 가치는 행복감을 키워나가는 방향성을 가지고 있을 때 더욱 또렷해진다. 특히 더불어 살아가는 관계 영역에서 나눔이란 사랑의 행위는 사람만이 향유하는 최고의 가치를 만들어 준다. 남이 나에게 무엇이 돼달라고 기대하기 전에 내가 먼저 다가가 이웃에 선물이 되자. 작더라도 기쁨을 전하는 선한 수단이 되자. ‘여기에’ 출간이 더 많은 우리의 이웃들을 보듬는 기회로 확대되었으면 좋겠다. “그냥 우리 모두 잘 됐으면 좋겠다.” 자식을 열 둔 엄마는 듣는 사람이 없어도 숨을 쉬듯 입버릇처럼 혼잣말을 멈추지 않는다. 능력이 없고 가진 것 없으니 독백처럼 기도할 수밖에 없는 늙은 엄마의 간절한 비원이 이 한 문장에 배어 있다. 그 선한 영향력이 이웃으로 널리 퍼져나갔으면, 그 기원을 책 출간에 얹고 싶다. -소설가 / daum cafe 이관순의 손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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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3-30
  • 어느 날, 모든 길이 다 막혔다
    가장 혼란스러울 때가 세상이 낯설게 보일 때입니다. 눈을 감고도 찾아갈 것 같은 데 어느 날 갑자기 ‘여기가 어디지?’ 하는 황당함과 마주할 때죠. 몽골에 빠져 뼈라도 묻을 것 같은 각오로 몽골승마체험 프로그램을 운영하며 광활한 평원을 누비던 친지 한 분이 지난 봄 귀국했습니다. 여행객이 뚝 끊어지면서였지요. 한번 묶인 발은 풀릴 기미가 보이지 않습니다. 오늘도 페이스북에 전국을 순례하는 모습이 올라왔어요. 글마다 초원을 향한 그리움과 회귀하고픈 간절함이 행간에 묻어납니다. 이 또한 코로나란 별종이 온 세상을 휘저어 생긴 일입니다. 인류도 옛날부터 동물같이 생존하기 위해 이동하며 살았어요. 아프리카에서 시작된 인류의 이동은 아시아 유럽 등으로 퍼져가고 아메리카 대륙으로 들어 갔습니다. ‘땀 흘려 살라’는 원죄의 굴레 때문일까? 문명인으로 사는 지금도 초장을 찾아다녔던 예전의 유목민과 크게 다를 바 없습니다. 아니, 더 바쁘게 돌아다니죠. 직장 따라, 상품 따라, 공부 따라, 떠도는 ‘글로벌 신(新)노마드’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사람의 본성엔 끊임없이 떠나고 싶은 노마드 욕망이 도사려요. 뭔가를 찾아 순례 하고픈 그 속성 말입니다. 이를 산뜻하게 포장하면 여행이 됩니다. 그래서 시간과 경제적 여유가 생길수록 여행의 욕망은 더 커질 수밖에요. 그 욕망이 봉쇄된 8개월. 다시금 인간은 ‘방목(放牧)’임을 확인합니다. 가슴 설레게 하는 인생의 로망, 여행이란 그런 것. 누구는 나를 찾으러가 나를 버리고 오는 것이며, 나를 버리러 갔다가 나를 찾아오는 것이라 했고. 다른 이는 우리가 사는 곳을 바꿔주고 우리의 생각과 편견을 바꿔주는 것이 여행이라고 했어요. 결국 여행은 시간과 공간의 변화를 경험함이 되겠지요.가끔은 생판 모르는 곳을 그리워하고, 먼 곳의 사람이 속절없이 보고 싶어질 때가 있습니다. 오래 전, 헝가리 옥탑술집에서 만난 수염으로 얼굴을 덮은 젊은 미국인도 그중 하나입니다. 오색안경을 걸치고 대마초를 뻑뻑 빨던 그의 화두는 내가 보는 세상이 혼란스럽다는 것이었어요. 가이드가 통역을 해 줍니다. “내가 타락한 사람 같나? 걱정 마. 다음 생에서는 착하게 살 거니까.” 불교신자라며 천진하게 웃던 그 친구는 지금쯤 지구여행을 끝냈을까? 몽골평원에서 휴식을 취하는 낙타떼 내 지인은 몽골의 별밤을 회상할 때, 그 어느 때보다 향수에 젖습니다. "난 혼자서 몽골 어디든 찾아다닐 수 있다. 몽골의 자연은 참으로 아름답다. 진정으로 몽골을 알려면 초원이 부르는 바람소리를 들어야 한다.” 그는 유하의 시 ‘어느 날 내가 사는 사막으로’ 를 이렇게 변주했어요. ?나 어느 날 내가 사는 초원으로 빗방울처럼 그대가 오리라. 그러면 전갈들은 꿀을 모으고, 낙타의 등은 풀잎 가득한 언덕이 되고, 햇빛아래 모래알들은 빵으로 부풀고 독수리의 부리는 썩은 고기 대신 꽃가루를 탐하리 ...어느 날 나의 초원으로 그대가 오면, 지평선과 하늘이 입맞춤하는 곳에서 나 그대를 맞으리라.? 승마여행 중에 만난 초원의 무지개와 신비의 구름과 바람들. 광야에 핀 꽃들. 나그네의 발길을 멈추게 하는 노을, 이 모두가 소리 내어 나를 찾는 곳. 그곳으로 속히 돌아가고 싶다는 그 소망이 찬란한 슬픔의 봄 같았어요. “줄이고 또 줄여본다. 견디고 또 견뎌본다. 그러나 답은 없다. 접어야 할지 말지. 이 현실이 어지럽다. 성을 쌓는 자 망하고, 길을 내는 자 흥한다. 이동이 곧 우리의 미래인데. 어느 날 그 이동이 막혀버렸다. 하늘길, 땅길, 물길도 모두. 텅 빈 인천국제공항에서 인간의 역사가 멈춤을 보았다.” 오늘은 17년간 몽골 초원을 함께 달린 낡은 모자 사진도 올렸습니다. 그의 글을 보다 ‘징기스칸’을 읽으며 밑줄을 쳤던 글이 떠오르네요. “빵을 먹는 자 길을 내고, 밥을 먹는 자 마을을 만든다.” 이 말에서 이동하지 못하는 자의 아픔을 느낍니다. 우리가 인생길을 계속 걷는 것은 희망이 보여서가 아닙니다. 계속 걸어야 희망이 보여서 입니다. 인내는 소극적으로 참는 것이나, 적극적으로는 이기는 것입니다. 코로나를 물리친 어느 훗날에, 참고 이겨낸 오늘을 회상하며 행복감에 젖을 그날을 생각하고, 부디 오늘을 잘 견디시게. 당신은 길을 내는 사람이지 마을을 지키는 사람은 아니지 않은가. (글 이관순 소설가 daumcafe/leeletter)1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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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3-27
  • 늙지도 않는 '긴 머리 소녀'
    대학을 졸업하던 그 해 여름. 처음으로 그 노래를 들었다. 친구들과 어울려 찾은 대천해수욕장에서였다. 젊은이들의 소리로 시끌벅적했던 바닷가에 비가 내리면서 정적이 일찍 찾아들었다. 아쉽지만 우리도 비를 피해 숙소로 돌아왔다. 잠을 청하기엔 아무래도 이른 시각이었다. 그날 밤 따라 내리는 빗소리가 정겹게 들렸다. 비록 해변의 낭만과 밤하늘의 별들은 빼앗겼지만. 그때 어디선가 노랫소리가 들려왔다. 처음 듣는 노래임에도 가락과 노랫말이 맑고 청아했다. 낭랑한 기타 반주음이 빗소리에 튕겨 올랐다. ‘오, 노래 좋은데?’ 갑자기 노래하는 그들이 궁금해졌다. 동시에 마주 본 친구와 눈빛이 오가자 둘이는 슬리퍼를 끌고 소리 나는 곳을 찾아 나섰다. 머지 않은 곳에 노래의 주인공들이 있었다. ‘대천장’이라고 쓰인 숙박업소에 들어서자 한 무리의 젊은이들이 통기타를 든 한 남자를 둘러싸고 있었다. 신입생 워크숍에 나온 대학생들이라고 했다. 그 밤에 처음 노래하는 그를 보았다. 신입생 신분으로 참석한 오세복이라는 학생이었다. 그날 밤 들려준 노래가 모두 그의 자작곡이란 것을 알았고, 그중에 학생들 요청으로 여러 번 들려준 노래가 ‘긴 머리 소녀’였다. 빗소리에 아롱지는 예쁜 노랫말과 서정적인 멜로디가 시처럼 아름답게 느껴졌다. 학생들은 그를 따라 가사와 멜로디를 익혔다. 그의 재능은 그날로 알아보았다. 후일 그가 친구의 조카라는 것을 알게 되었고, 그 인연으로 삼촌의 부름을 받아 여러 번 술자리에 불려 나오면서 우리와도 친근해졌다. 그때마다 꼬투리를 잡는 것이 호칭 문제였다. 삼촌 친구를 부르기가 좀은 애매하기도 했을 것이다. “세복아. 삼촌 친구도 삼촌이다. 형이라고 부르면 안 되지.” 삼촌을 형이라 부른다고 면박을 받으면서도 그는 나오는 대로 불렀다. 그때만 해도 가수로 본격적인 활동을 하기 전의 일이었다. ‘될성부른 나무는 떡잎부터 알아본다’고 그는 이미 가수로서 자질과 재능을 보여주고 있었다. 1970년대의 청년 문화는 포크음악 그중에서도 통기타 듀오의 전성시대였다. 음악으로 가는 오세복의 길은 이미 정해져 있었다. 그가 동국대에 입학하자 캠퍼스에서 우연하게 선배 이두진과 마주쳤다. 두 사람이 희문중고등학교와 대학 1년 선후배로 만나게 된 것이다. 하루는 이두진이 오세복을 찾아왔다. “신입생 환영회가 얼마 남지 않았는데 우리 노래해 보지 않을래?” “우리 둘이서?” “그래. 너 만들어 놓은 곡 많잖아. 한 곡 불러 보자.” 세복은 두진의 제의가 싫지 않았다. 습작한 곡이 꽤 쌓인 데다 한 번은 밖으로 알려 평가를 받고 싶었다. “좋아. 해보지 뭐.” 둘은 의기 투합했다. 세복과 두진은 그해 신입생 환영회 행사에 듀오로 출연하여 자작곡 “긴 머리 소녀”를 열창했다. 행사장에 난리가 났다. 학생들은 혜성처럼 나타난 듀오가 초청가수가 아닌 같은 학교 학생이란 것을 알고 더 열광했다. 노래하는 사진과 기사가 대학신문에 크게 실렸다. 이렇게 시작된 그들의 인기는 전 대학가로 확산되었다. 오세복은 이두진과 함께 듀오를 결성했다. 두 사람의 성(姓)을 따서 ‘둘다섯’이 란 이름을 붙였다. 음반사에서 거침없이 레코드 취입을 제의했다. 이렇게 ‘긴머리 소녀’를 타이틀곡으로 한 첫 앨범이 1974년 나오면서 젊은이들 사이에 뜨거운 반향을 일으켰다. “빗소리 들리면 떠오르는 얼굴 / 달처럼 탐스러운 하얀 얼굴 / 우연히 만났다 말 없이 가버린 / 긴 머리 소녀야. / 눈 먼 아이처럼 귀 먼 아이처럼 / 조심조심 징검다리 건너던 / 개울 건너 작은 집에 긴 머리 소녀야/ 눈 감고 두 손 모아 널 위해 기도하리라. 대학가에서 시작된 ‘긴 머리 소녀’의 인기는 여학생, 공단의 여공(여성 근로자), 여차장(버스안내원) 사이로 번졌다. 당시 구로공단에는 가족 생계를 위해 시골에서 올라와 취업한 나이 어린 소녀들이 많았다. 이들을 위한 위문공연이 있을 때면 단골로 등장한 노래가 ‘긴 머리 소녀’였다. 청순한 소녀와의 우연한 만남과 이별, 그리움의 노래는 얼핏 황순원의 소설 ‘소나기’를 떠올리게 했다. ‘둘다섯’은 이 빼어난 앨범 한 장으로 한국 포크계의 확고한 지분을 차지할 수 있었다. 같은 음반에 실렸던 ‘밤배’ 또한 히트곡 반열에 올랐다. ‘밤배’는 중고등학교 음악 교과서에 실릴 만큼 서정성 있는 가사와 멜로디, 아름다운 화음으로 많은 사랑을 받았다. 언젠가 오세복으로부터 ‘밤배’를 만들게 된 뒷얘기를 들었다. 대학 1학년 때, 기타를 메고 제주에 있는 친구를 찾아 작곡 여행을 떠나게 되었다. 가난한 학생 신분에 비행기는 탈 수 없으므로 목포에서 제주까지 14시간 걸리는 배를 탔다. 배는 긴 뱃고동소리를 울리며 항구를 떠났고 조금씩 멀어지던 육지는 어느새 아득하게 멀어졌다. 배가 공해상으로 들어서자 사방이 망망한 대해로 출렁였다. 어느새 배 위로 땅거미가 앉기 시작했다. 세복은 땅거미가 내리는 바다 위의 자신이 만경창파에 떠 있는 한 장의 낙엽처럼 느껴졌다. 그 순간 끝 모를 아득함과 아련함이 머릿속을 거미줄처럼 휘감았다. 세복은 갑판에 쭈그려 앉아 아득히 흔들리는 상념과 언어를 메모장에 옮겨 적었다. 그리고 서울로 돌아온 즉시, 갑판에서 쓴 메모지를 꺼내 작곡을 시작했다. ‘밤배’는 이렇게 태어났다. 훗날 ‘밤배’가 이두진의 곡이라는 주장이 제기되면서 논란이 일었다. 그가 대학생이던 시절, 남해를 여행 중에 있을 때의 일이었다. 보리암에 올라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남해바다가 한눈에 들어왔고, 상주해수욕장이 한 폭의 그림처럼 펼쳐졌다. 그날 밤 깜깜한 밤바다에 작은 불빛이 외롭게 떠 가는 것을 보았다. 그 모습이 너무나 인상적이었다. 그 감상을 그대로 메모해 즉석에서 흥얼거려 보았다. 노래는 다음 날 완성되었다. 그는 지금도 보리암에서 바라본 밤바다의 작은 불빛을 잊을 수 없다고 했다. 그 불빛에서 거친 바다와 싸우며 삶을 영위하는 어민들의 운명이 어른거렸다. 그들에게 파도 소리는 노래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만경창파에 홀로 떠 있는 작은 배. 흔들거리는 불빛 하나에 의지한 채 어디론가를 찾아가야 하는 밤배의 고달픈 숙명이 인간과 닮았다. 그래서 사람들에겐 스스로를 위로하고 달래줄 노래가 필요했을 것이다. 검은빛 바다 위를 밤배 저 밤배 / 무섭지도 않은가 봐 한없이 흘러가네 / 밤하늘 잔별들이 아롱져 비칠 때면 작은 노를 저어 저어 은하수 건너가네 / 끝없이 끝없이 자꾸만 가면 어디서 어디서 잠들 텐가 / 음~ 볼 사람 찾는 이 없는 조그만 밤배야 조그만 밤배야. 두 사람 다 웅숭깊은 서정적 감성으로 낭만 포크의 일가를 이루었다. 많은 자작곡을 잇따라 발표해 젊은 층을 중심으로 많은 사랑을 받았다. 밤배, 이름 모를 소녀, 얼룩고무신, 먼 훗날, 일기 등 지금도 이 노래들을 기억하는 장년들이 적지 않을 것이다. 술을 좋아했던 오세복은 간경화로 건강을 잃으면서 노래도 잃었다는 안타까운 소식을 들어야 했고, 그 뒤 아들의 간을 이식받아 활동을 재개했다는 반가운 소식을 들었다. 듀오를 재결성하고 새 음반을 내기 위해 재킷까지 준비를 마쳤다는데, 거기까지였다. 끝내 음반은 빛을 보지 못했다. 오세복은 67세 되던 2021년 8월 패혈증으로 세상에 마지막 작별 인사를 고했기 때문이다. 8월이면 그가 떠난 지 만 2년이다. ‘긴 머리 소녀’는 아직도 우리들 가슴 속에 긴 여운을 드리우는데, 노래의 주인공들은 기억 저편에서 희미한 메아리로 여울지고 있을 뿐이다. 인생이 한바탕 꿈이라 한다면, 꿈처럼 쓸쓸하고 허망한 것이 또 있을까. -소설가 / daum cafe 이관순의 손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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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3-23
  • 인생은 한바탕 꿈이 아닐까?
    몇 년 전 다뉴브 강 유람선 침몰로 26명의 귀한 생명을 잃는 사고가 있었다. 그중에도 특히 친정 부모님을 모시고 여섯 살 어린 딸과 헝가리 여행 중이던 3대 가족이 모두 변을 당했다는 소식엔 그렇게 가슴이 에일 수가 없었다. 죽음이 어울리지 않는 어린 손녀와 젊은 엄마, 아직 떠나기에는 이른 60대 초반의 할머니와 할아버지... 그들 가족은 여행을 떠나면서 얼마나 좋아했을까 마치 꿈인 것처럼. 삼국유사에 조신(調信)이란 젊은 스님이 있다. 젊은 스님이 하루는 새로 부임한 강릉 태수의 딸을 보고 한눈에 푹 빠져들고 말았다. 고개를 흔들어보지만 흠모하는 마음만 깊어질 뿐. 그는 매일 낙산사 부처님 앞에 나아가 사랑의 성취를 빌고 빌었다. 그런데 어쩌나, 소문도 없이 그녀가 혼처를 정해 떠나가 버렸으니. 고통을 명상으로 수행하는 스님이라도, 애욕을 명상으로 수행하기에 조신은 너무 젊었다. 마음의 정처를 잃고 부처님 앞에 심경을 호소하며 슬피 울다가 깜박 잠이 들었다. 눈물의 기도 때문일까 기적 같은 일이 벌어졌다. 꿈에도 못 잊을 여인이 홀연히 나타난 것이다. “부모님 명으로 혼인을 했지만 저도 당신을 사랑했어요.” 그래서 먼 길을 찾아왔으니 같이 살자고 한다. 순간, 조신의 심장은 얼마나 벌렁거렸을까. 두 사람은 벅찬 가슴을 안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비록 가진 건 없어도 거칠 것이 없었다. 비가 새는 오두막집이면 어떻겠나, 소박한 삶에 만족하며 행복해했다. 아이를 다섯 낳으면서 많은 세월이 흘렀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그렇게 행복했던 부부 사이에 이상 신호가 감지되었다. 더듬이 부러진 곤충처럼 서로에게 부담이 되는 존재가 된 것이다. 살림살이는 나물죽을 먹을 만큼 궁색해진 데다, 잇달아 비극이 찾아왔다. 젊음은 가고 몸은 쇠약해져 병들고, 춥고 배고픈 생활고가 그들을 덮쳤다. 열다섯 큰 아들이 배곯아 죽고, 또 하루는 열 살 된 딸아이가 구걸을 나갔다 개에 물려왔다. 아이를 방에 누이고 하염없이 흐느끼던 부인이 눈물을 훔치면서 남자에게 말했다. 내가 당신과 만났을 때는 젊고 얼굴도 아름다웠으며 입는 옷도 좋았지요. 음식이 있으면 나누어 먹었고, 몇 자의 옷감만 생겨도 함께 옷을 지어 입었습니다. 오랜 세월 정은 거슬림 없이 쌓였고, 사랑도 깊었으니 가히 두터운 인연입니다. 하지만, 몸은 쇠해지고 병은 깊어진 데다 춥고 배곯는 것도 지쳤습니다. 이젠 사람들조차 내미는 죽 사발을 외면하니 문전에서 당하는 부끄러움은 태산같이 무겁습니다. 아이들이 추위에 떨고 굶주려도 돌봐줄 방법이 없는 데 어찌 부부의 마음에 애정인들 견뎌내겠습니까? 붉은 얼굴과 예쁜 웃음은 풀 위의 이슬이고, 난초 같은 약속도 바람에 날리는 풀잎일 뿐. 내가 있어 당신에게 누가 되고, 나는 당신 때문에 괴롭습니다. 지난날의 즐거움을 생각하니 바로 근심과 걱정의 시작이었어요. 우리가 어쩌다 이 지경에 왔습니까. 새들이 함께 굶어 죽는 것보다는 짝 잃은 새가 거울 앞에서 짝을 찾는 것이 되레 나을 것입니다. 추울 때는 버리고 더울 때는 가까이 함이 사람으로 못할 짓이나, 나가고 멈춤이 인력으로 될 일도 아니고, 헤어지고 만남도 운명에 달린 일입니다. 우리 이만 헤어졌으면 합니다. 여인이 모든 것을 정갈하게 정리해 주니 남자는 기가 막힌 현실 앞에 고개를 떨굴 수밖에 없었다. 두 사람은 사랑도 삶도 허망함을 곱씹으면서 헤어져야 했다. 그녀는 떠나가고 남자는 밤새 비탄의 눈물을 흘렸다. 마지막 심지까지 타들어가는 초롱불이 꺼질 듯 흔들리고 있을 즈음, 어느새 깊었던 밤도 지나 먼동이 트고 있었다. 아침이 되자 조신의 수염과 머리털은 하얗게 세고, 주름 진 얼굴 위로 고통스럽던 인생살이가 넘실대며 흘러갔다. 그때 소리가 들렸다. “스님, 그만 일어나세요. 웬 낮잠이 이리 깊어요?” 조신은 법당에 들어온 눈 부신 햇살에 얼굴을 찡그리면서 눈을 떴다. 깨어보니 모든 게 법당에서의 꿈이었다. 인생이 한바탕 꿈처럼 지나갔다. 사방을 돌아봐도 흔적도 없는 꿈…. 사랑하는 여자와 한 몸을 이루어 파란만장한 삶을 겪은 뒤 다시 현실로 돌아온 조신은 혼란스럽기만 했다. 그 꿈과 현실의 경계는 무엇으로 나눌 수 있을까. 먼 옛날의 설화로만 돌리기에는 ‘조신의 꿈’이 일장춘몽으로 회오리치고 끝나는 우리네 인생과 너무도 닮아 있다. 다뉴브 강 유람선 사고가 난 뒤 한 주만에 희생된 여섯 살 여아의 시신을 수습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 소식을 듣는 순간, 죽은 아이 아빠의 얼굴이 떠올랐다. 사랑하는 아내도,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예쁜 딸도 없는 이 차가운 현실의 세계에 혼자서 덩그러니 남아 있을 아빠…. 그의 목울음이 동굴 속을 휘젓는 메아리처럼 들려왔다. “사랑하는 딸아, 엄마 할머니 손 꼭 잡고 즐거운 여행을 하렴. 영영 꿈에서 깨어나지 말고, 영원히 꽃길을 밟으렴.” 어쩌면 삶도 한낱 꿈이 아닐까? 한바탕 한 세상을 휘젓다 사라지는 꿈. 있다가 사라지고 없는 그림자처럼, 기억만 무성하고 실존은 없는 그런 꿈…. -소설가 / daum cafe 이관순의 손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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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3-20
  • 기적은 우연일까 필연일까
    ‘기적 같다’는 말을 곧잘 들어요. 인생사를 돌아보면 틀린 말도 아닙니다. ‘살아온 게 기적 같다’ ’꿈만 같아.‘ 모두를 기분 좋게 하는 말이지요. 기적이든 꿈이든 연약한 인생이 살아가는데 빛과 소금 같은 언어입니다. 지인 모임에서 영화평론가인 분이 뉴욕 가는 비행기에서 생긴 인연 을 이야기 했어요. 옆자리에 백인 여자가 앉았는데, 인사를 나누고 보니 같은 분야에서 일하는 사람임을 알고 친해졌답니다. 그녀는 1990년대 베스트셀러 소설인 ‘매디슨 카운티의 다리’를 영화로 만들 때 각색에 참여한 시나리오 작가였어요. 대화는 삶을 바꿔놓은 4일간의 사랑 이야기인 매디슨 카운티의 다리로 옮겨갑니다. 평범한 농부의 아내인 프란체스카(메릴 스트립)에게 길을 물으며 나타난 사진작가 킨 케이트(클린트 이스트우드) 와의 사랑에 대해. 평론가에게 작가가 물어요. 두 남녀의 만남이 우연일까요? 필연일까요? 각색하는 동안 떠나지 않은 화두였다고 해요. 우연일수도, 필연일 수도 있는 그 모호함... 두 사람은 대화 끝에 공감대를 찾습니다. ‘우연 없는 필연은 없다’고. 참 명료한 조합을 찾았어요. 덕분에 긴 비행시간을 지루한 줄 모르고 공항에 도착했다고 합니다. 헤어지면서 “즐거웠어요. 우연하게 귀한 분을 만났습니다.” 남자가 인사를 하자 여자가 “노, 이 만남은 필연예요. 좋은 분을 옆자리에 달라고 얼마나 기도했는데요.” 라며 해맑게 웃습니다. 어쨌든 인연의 정의 하나는 구한 셈입니다. ‘필연 없는 우연은 없다.’두 분은 현역에서 은퇴한 지금도 우정을 이어갑니다.사진작가 분도 오래 전의 경험을 들려줍니다. 4월 초, 강원도 한 목장으로 촬영을 나갔는데 날씨가 어찌나 변덕을 부리는지, 바람이 불다가 비가 오고 함박눈까지 쏟아졌다고 해요. 저 번에도 날씨 심술에 허탕친 적도 있어 입안에 쓴 맛이 돌았답니다. 포기하지 않고 기다렸다고 해요. 건초창고에 두 시간은 족하게 앉아 무심한 하늘을 바라보는데 뜻밖의 행운이 찾아오더랍니다. 방목지 위로 눈발이 그치더니 순백의 구름장이 몰려오고 그 틈새로 햇빛이 들면서 순식간에 신세계가 열렸답니다. 그날 얻은 행운의 컷이 자신을 해외에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고 합니다. LG재단의 총괄 임원을 지낸 친구가 파리에 들렀던 얘기를 합니다. 현지 주재원인 김 아무개 부장의 영접을 받았다고 해요. 주말에 불러낸 것 같아 점심이나 나누고 헤어지려했는데, 달팽이 요리를 대접하면서 시간에 신경 쓰지 말라고 합니다. 식당에서 현지인과 대화하는 것을 보고 불어가 어떻게 그리 유창하냐고 물었더니 고등학교 때 제2외국어로 공부했다고 합니다. “그래요? 불어를 택한 학교가 없었는데 혹시?” 갑자기 화제가 출신학교로 바뀝니다. “아이구 선배님이시네요.” 넙죽 인사부터 합니다. 우연하게 이역 땅에서 생각지 못한 선후배가 만난 겁니다. 얘기가 깊어질 수밖에요. 후배는 자신의 미래 걱정도 하면서, 주재원 생활 10년을 전합니다. 파리에 살다간 흔적이라도 남긴다는 생각에 쉬는 날이면 파리의 골목을 뒤지고 다녔다고 해요. 그러면서 골동품 마력에 빠지게 되었고, 여기에 세월이 덧대면서 취미 수준을 넘게 되었다는 군요. 듣고 보니 대단한 수집광임을 알게 됩니다. 그 뒤로 수년이 지났어요. LG재단에서 명지대의 고문서연구에 해마다 수억 원을 지원하던 때입니다. 어느 날, 그 후배로부터 귀국했다는 연락을 받고 만났답니다. “혹시 프랑스 고문서도 수집했나?” “그럼요.” 얘기를 들으니 내용물이 상당하다는 걸 알게 됩니다. 친구는 며칠 후 대학 총장과 고문서 연구 교수를 만난 자리에서 후배의 소장품 얘기를 전하자 당장 만났으면 합니다. 친구가 양쪽의 중재자로 나섰지요. 수집품을 다 기증할 테니, 교수자리를 달라. 그 결과 후배는 어렵다는 대학교수가 되었지요. 파리에서 후배와의 우연한 만남이 그의 인생에 일대 전환을 불렀습니다. 아인슈타인도 “우연은 하느님이 모습을 숨기고 행하는 기적의 방식”이라고 말했어요.그러나 우연이 필연으로 바뀌는 데는 전제조건이 갖추어져야 해요. 그의 10년 노력이 필연을 부른 것처럼. 세상을 인연에 기대여 살 수 없지만, 묵묵히 일에 정성을 쏟으면 온 우주가 도와준답니다.. 그게 인생사의 매력입니다. 그래야 지금 하는 일에 의미도 찾고. (글 이관순 소설가 daumcafe/leeletter) 1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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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3-16
  • 데카메론을 다시 읽는 이유
    코로나 바이러스를 피해 청정지역으로 피접하는 사람들이 는다고 해요. 바이러스가 또 다른 빈부 차를 드러냅니다. 부자들은 옛날 왕들이 역병을 피해 피접하듯, 오염된 도시를 떠나 청정한 시골(별장)로 몸을 숨깁니다. 요트를 타고 바다로 나가거나 무인도를 통째로 빌리기도 한답니다. 하지만 이러한 도피가 안전할까? 그곳에도 도우미는 들락거릴 테고, 아프면 병원을 찾아야 할 텐데... 이 세상 어디에 안전한 곳이 있을까. 지금의 나 홀로 상황이 길어지면서 젊은 날에 본 ‘데카메론(Decameron)’을 다시 읽게 합니다. 중세와 현세, 페스트와 코로나라는 대칭구조 속에 한쪽은 유럽인구의 1/3을 죽이고, 다른 한쪽은 지금까지 3천만 명에 가까운 감염자, 80만 명을 사망시킨 공포의 괴질입니다. 백신이나 치료제가 없어 허둥대는 모습도 많이 닮았어요 . ?겨드랑이와 사타구니에 종창이 생기고 검은 반점이 나타났다. 사흘이 지나면 극도의 고열로 환각상태에 빠지더니, 닷새가 되면 감염자의 절반 이상이 죽었다. 이렇게 매일 수많은 사망자가 생겨 시내는 아비규환의 상태였다. 돈이 있는 자는 술을 퍼마시며 공포를 잊으려 했고, 가난한 사람들은 두문불출, 사람과 접촉을 피했다. 이러한 혼란 속에서 일곱 명의 숙녀와 세 명의 청년이 인적이 드문 교외의 별장에서 사람을 피해 은둔생활을 하기로 했다.? 복카치오의 ‘데카메론’ 이야기예요. ‘페스트는 14세기 유럽을 초토화시킨 재앙입니다. 2500만명이 원인도 모른 채 검게 변한 몸으로 죽어갔지만, 18세기까지 병명조차 내놓지 못했어요. 감염되면 각혈과 종기가 나고 검은 농포가 온몸에 생겨 며칠안가 죽음을 안기는 괴질... 폐스트가 창궐하자 유럽은 극도의 혼란에 빠져요. 마스크착용, 손씻기 등 기본수칙도 없고, 진단방법이 없으니 증상만으로 감염 사실을 판단합니다.최선책은 감염자를 격리하고 그들에게서 멀리 떠나는 것뿐이었지요. 부자들은 잽싸게 안전한 곳으로 피신했지만, 서민층은 병든 부모와 자식을 서로 버려야 합니다. 밖에는 가축들이 떠돌다 죽고, 집안에선 병든 자가 쓸쓸히 죽음을 맞지만 사체를 치워줄 사람을 구하지 못해요. 사람이 사람을 접근하는 것 자체가 공포 그 자체이니까. 무지는 더 큰 화를 키웁니다. 감염경위를 모르고 고양이, 개 등의 사체를 거리에 방치한 것이 쥐의 급속한 번식을 부른 겁니다. 이것이 치명적 결과를 낳습니다. 페스트는 계급관계도 심화시켰어요. 피신한 부자들은 질병이 끝나면 가난한 여자를 먼저 보내 안전성을 확인한 후 집에 갑니다. “병은 가난한 사람을 공격하고 부자들을 면제해 준다.” 샤르트르의 가시돋은 날 선 비판이 나오는 이유입니다. 부자들은 피신처에서 발병소식이 들리기 무섭게 또 다른 지역에 마련해 둔 저택으로 쉽게 떠나곤 했어요. 데카메론은 페스트가 창궐하던 때, 피렌체의 한 별장으로 피신한 부잣집 선남선녀의 대화를 모은 형식입니다. 부자들은 시골 사람들과 맺은 임대 계약서에 전염병이 돌면 “방 하나를 빌려주며, 내 말들을 마구간에 들여 놓는다”는 조항도 두었어요. 유사시 피신장치인 셈이죠. 런던에서는 궁정이 옥스퍼드로 떠나자 지체 높은 사람들이 줄줄이 빠져나가 단 한 건의 재판도 열지 못합니다. 폐쇄된 도시엔 가난한 사람뿐이고, 파수꾼들만 활개 치는 죽음의 도시가 되었어요. 제노바에서는 쌓이는 시체를 감당하지 못해 바다로 실고 나가 통째로 태워버립니다. 14세기의 페스트, 21세기의 코로나. 두 바이러스의 진원지로 중국을 수상쩍게 바라봐요. 페스트의 확산이 교역확장과 경제의 유동이 커지며 빠른 전파를 불렀다면, 코로나는 글로벌 시대가 세계의 역병을 부른 셈입니다. 역사는 이래서 반복한다는 것일까. 코로나로 빈부차를 드러낸다면 슬픈 일입니다. 그러나 바이러스는 한쪽만 방역을 했다고 끝나지 않아요. 방역을 잘했다던 싱가포르가 외국인 노동자를 제때 건수 못해 불똥이 튄 것처럼, 결국은 모두가 질병의 위험에서 벗어날 때라야 정상적인 일상이 돌아옵니다. 코로나19는 이웃과의 공생에 답이 있습니다. 이웃 감염이 내 감염이고 내 감염이 곧 이웃 감염이라는. 코로나가 문명의 미래를 어디까지 호령할지 조심스러운 하루하루가 지나갑니다. (글 이관순 소설가/daumcafe/leelett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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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3-13
  • 신발장을 정리할 시간
    시름에 많이 아팠던 여름입니다 물에 잠긴 집들, 끊어진 다리, 파란 지붕위로 올라간 세 마리 소 한 아저씨가 쓰레기더미에서 사진액자를 찾아 수건으로 훔치고 한참을 들여다봅니다 단란했던 시절, 사진관에서 찍은 가족사진입니다 가족 넷이 환히 웃습니다. 한껏 차려 입고 맘껏 행복해 합니다. 아버지가 암으로 이승을 버릴 때도 동생이 교통사고로 사망할 때도 아들 힘들다며 어머니가 요양원을 자원할 때도 가족은 웃습니다. 웃음 속에 흐르는 애잔함이란, 아프다 저리다를 입에 달고 살던 한번 가면 오지 않는 시간입니다 9일은 가을을 알리는 한로(寒露). 풀잎에 영롱한 이슬이 맺히고 산위에서 신선한 바람이 불어옵니다. 여름을 위로하는 어진 손길입니다 늦지 않게 신발장을 정리할 시간입니다 어지럽게 널려있는 현관의 신발들 덕지덕지 떼 묻은 여름의 잔해들 신발 한 짝씩을 손에 들고서 물로 씻고 정성스레 닦아낸 후 가지런히 줄을 세워 말려야 해요 신발장의 신발박스는 내려서 그 속의 신발은 꺼내놓고 여름신발은 담아 올립니다 신발장이 정리되는 동안 신발은 새집에 들 생각에 부풀고 꿉꿉하고 눅눅한 마음은 가을바람에 부풀어 오를 시간입니다 (글 이관순 소설가/daumcafe/leelett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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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3-09
  • 우리가 사는 두 세상
    비대면과 디지털화가 가팔라지면서 너무 빠르게 변하는 세상이 종종 놀라움을 줘요. ‘모든 기회에는 어려움이 있고, 모든 어려움엔 기회가 있다’고 믿어왔는데 지금의 이 어려움은 끝이 보이지 않는 것 같아 때때로 두려움을 일으킵니다. 이탈리아 피렌체에는 거꾸로 도는 시계가 있어요. 르네상스 발상지인 이곳 두오모 성당에 우첼로가 디자인한 시계가 있는데, 세계에서 유일하게 바늘이 반대 방향으로 돕니다. 이를 보면서 집단양식에 반하는 것이 얼마나 낯선 것인가를 느꼈습니다. 인류의 오랜 삶의 양식인 먹고, 만나고, 일하고, 즐기고, 나누는 일체의 희로애락을 찾는 방식이 일순에 뒤바뀌는 아뜩함을 느낍니다. 그러면서 비정상이던 비대면, 탈모임 같은 역방향의 양식으로 대체돼 가는 현실을 속절없이 바라봅니다. 좋든 싫든 2020년의 우리는 현실 세계와 디지털 세계라는 두 개의 세상을 살아가야 합니다. 언택트는 일상이 되었고, 디지털과 마주하는 시간은 갈수록 늘면서 적지 않은 사람이 두 세계 사이에서 혼란을 경험합니다. SNS 같은 공간에서 보내는 시간이 길어지다 보니 나 자신을 잊고 지내는 순간도 함께 늘었어요. 엄연한 현실 속의 물리적 존재란 사실까지 살짝살짝 잊습니다. 루이스 캐럴의 소설 ‘이상한 나라의 엘리스’를 보면 이상한 나라에 빠지는주인공이 있어요. 이상한 나라의 엘리스는 매력적인 판타지와 해학을 담아 아이들에겐 환상을 주고, 어른들에겐 시공을 넘는 철학적 의미를 전합니다. 전혀 낯선 세상에 가게 된 엘리스가 오히려 이상한 사람이 돼버리는 정말 이상하고 신비한 이야기지요. 한 번도 경험해 보지 않은 세상이 이런 것인가.가상과 현실의 두 세계가 복선처럼 깔려듭니다. 엘리스가 고양이와 나누는 대화부터 의미심장하게 들립니다. “고양이야, 여기서 내가 어디로 가야할지 알려줘. 그건 네가 어디를 가고 싶으냐에 따라 달라. 아무데든 상관없어 가기만 하면 돼. 그래? 그럼 어디든 가면 되잖아. 어떻게? 계속 걷기만 해. 계속 걷다보면 그렇게 될 거야.” 목표가 없으면 우리 인생이 어디로 흘러가는지 알 수 없어요. 사는 게 혼미할수록 목표는 확실해야 합니다. 바다가 흉흉하고 풍랑이 심할수록 키를 놓치면 안 되는 이치와 같아요. 세상은 자신이 가고자 하는 길을 아는 사람에게만 길을 열어주는 법. 좌표가 그래서 중요합니다. 우리가 겪는 이상한 세상이 해피엔딩으로 끝나면 좋겠지만 낙관만은 할 수 없는 현실이 불안감을 키웁니다. 이런 때일수록 내 삶의 중심을 잘 잡고 균형과 조화를 이룬 일상을 만들어가는 일이 중요하겠지요. 멈춤이 없는 코로나 감염확대, 부동산 폭등, 일자리 부족사태, 의사파업, 세상 돌아가는 것이 모두 아픈 것 밖에 없어 보이지만, 조금만 시선을 돌리면 더 많은 희망과 따뜻함이 흐르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아직도 방역복을 벗지 못한 방역현장의 의료진, 생명을 구하는 119요원, 큰물에 허물어진 집에서 생존의 땀을 흘리는 사람들, 무너진 제방을 쌓고, 수마에 휩쓸린 논밭과 과수원으로 발길을 돌리는 사람들. 끈질긴 삶의현장이 가슴 뭉클하게 합니다. 확진보다 더 무서운 건 심리방역의 붕괴입니다. 경직된 얼굴, 시름에 쌓인 눈빛, 지쳐가는 내 모습에 균열이 생기지는 않는지. 이마저 쉽게 호소하지 못하는 현실에서 우리가 나서서 해야 할 일이 있어요. 서로를 위로하고 격려해 주는, ‘1초의 짧은 말’을 자주 주고받는 일입니다.*.고마워요... 말이 주는 따뜻함에 의지가 될 때가 있습니다.*.힘내세요.나는 누구인가의 에너지가 될 수 있습니. *.. 잘계시죠... 언제 들어도 살갑고 편하고 좋은 인사입니다. 1970년대 새마을운동이 한창일 때, 새마을 중앙연수원을 진원지로 한 ‘수·미·고 운동’이 벌어졌었지요. 가난한 사람들 서로의 가슴에 신바람을 불어넣었던 아름다운 추억이 우리에게는 있습니다. *.. 수고하십니다.*.. 미안합니다.*.. 고맙습니다. 1초에 기뻐하고 1초에 우는 것이 인생입니다. 한 번쯤 뒤돌아보고 확인하고 싶었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두 개의 세상 사이 어느 지점에 있을 나의 존재에 대해. (글 이관순 소설가/ daumcafe/ leelett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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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3-06
  • 잘 먹어야 할 다섯 가지
    ‘강산은 바꾸기 쉽지만, 본성은 고치기 힘들다(江山易改 本性難改)’라는 문장이 있다. 나이 들수록 본성이 잇몸처럼 부드러워져야 하는데, 송곳처럼 뾰족해지는 경우를 지적하는 말이다. 소크라테스가 ‘너 자신을 알라’라고 일렀을 때, 그의 친구들이 되물었다. ‘그러는 당신은 자신을 잘 아는가? 그러자 소크라테스는 ’나도 모른다’라고 운을 뗀 뒤 ‘하지만 나는 적어도 나 자신을 모른다는 것은 안다’라고 했다. 자신의 부끄러움을 아는 것이 인간의 본성을 다듬어 나갈 수 있는 시작점이다. 존중받는 인격과 성품을 만들어가는 출발대가 되기 때문이다. 책 이름은 기억나지 않지만, 사람은 무릇 다음 다섯 가지 를 잘 먹어야 한다며 쉽게 정리해 놓은 것을 보고 공감한 적이 있다. ? 음식을 잘 먹어야 하고, ? 물을 잘 마셔야 하고, ? 좋은 공기를 마셔야 하고, ? 마음을 잘 먹어야 하고, ? 나이를 잘 먹어야 한다. 이것이 건강한 삶의 비결이기도 하면서, 우리가 존중받는 삶을 사는 길이기도 하겠다. 이 다섯 가운데 음식, 물, 공기는 일상의 노력으로 얻을 수 있는 것들이다. 하지만, ‘마음’과 ‘나이’에 관해서는 경험상 그리 만만한 일이 아닌 것이, 인간의 본성 문제를 건드리고 있기 때문이다. 하루 이틀의 수고로 될 일이면 얼마나 좋겠는가. 이 문제는 생의 보람을 찾아 나설 때 바뀔 수 있다. 그것이 학문이 됐든 수양이 됐든 봉사가 됐든…. 인생을 살만큼 살았다면, 스스로 자문해 볼 일이다. ‘생의 보람을 찾았느냐?’라고. 많은 사람이 쉽게 답을 내지 못하고 머뭇대거나 ‘자신 없다’는 표현으로 대신한다. 나이가 든 사람의 공통점은 시야가 ‘나’라는 문제로 좁혀든다는데 있다. 몸은 여기저기 아픈 데가 생겨나고, 사는 맛이 예전 같지 않다. 이룬 것이 변변하지 못하면 허망한 생각이 들고, 마땅히 행할 일이 없으면 삶이 공허해 보이기도 한다. 사람 소리로 시끌벅적했던 집안은 자식들이 제 살림을 꾸려 나간 뒤 적막강산이 되었다. 생이 쓸쓸해지고, 깜빡거리는 기억력을 탓하다 치매라는 울렁증을 느낄 때도 있다. 그러면서 문득 찾아오는 존재론적 의문에 빠지기도 한다. “내세가 있긴 한 건가?” “내가 죽으면 어떻게 되는 거지?” 사람이 생을 바라보며 허무감을 느낄 때, 인생의 아픔이나 좌절을 피할 수 있는 방법은 나를 내려놓고 누군가의 동료가 되고 벗이 되는 것이다. 더 이상 나의 욕구를 만족시키는데 몰두하지 말고, 누군가의 필요한 존재로 나서는 데 있다. 누군가의 필요한 존재로 살아내는 것만큼 인생을 보람차고 아름답게 사는 길이 없다. 나이가 들었다고 어른으로 대접받기를 원할 게 아니라, 연륜으로 존경을 받는 어른이 돼야 한다. 나이는 해가 바뀔 때마다 거듭되지만, 연륜은 나무의 나이테처럼 비바람 삭풍 한설을 이겨야 만들어진다. “스무 살의 얼굴은 당신의 얼굴이고, 예순 살의 얼굴은 당신의 공적이다’라고 패션 디자이너 샤넬이 적절하게 상기시켜 주었다. 나이를 잘 먹는다는 건 어른이 되는 것 이상으로 어려운 일이다. 마음도 다루기 힘들기는 마찬가지이다. ‘사향노루 이야기’가 있다. 어느 숲 속에 살던 사향노루가 코 끝에 와닿는 향기를 맡고 황홀감을 느꼈다. “나를 사로잡는 이 향기의 정체가 무엇이지? 내가 꼭 찾아내고 말 거야.” 그러던 어느 날, 사향 노루는 마침내 그 향기의 진원을 찾아 나섰다. 산을 넘고 강을 건너기를 비바람 눈보라가 몰아치는 때에도 쉬지 않았다. 몸이 지칠수록 향기의 유혹은 더욱 강렬해졌다. 하루는 절벽 끝에서 코끝을 맴도는 향기를 느꼈다. “이 절벽 밑에 있는 것이 틀림없겠구나.” 사향 노루는 희망에 들떠 향기가 나는 험한 절벽을 타고 아래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그러다 발을 헛디디고 수십 길 절벽 아래로 굴러 떨어졌다. 죽지는 않았지만 다리가 부러졌다. 사향노루는 몸을 가눌 수가 없었다. 그때 사향노루가 쓰러져 누운 자리에서 은은한 향기가 났다. 죽는 순간까지 향이 자신의 뿔에서 나는 줄을 몰랐던 사향노루…. 슬프고 안타까운 이 사연은 한 사슴의 이야기가 아니라 어리석은 우리 인생, 나 자신의 이야기일 수 있다. 지금 이 순간, 나는 무엇을 찾으러 어디에 가 있는가? 나 자신에 매몰되어 나를 필요로 하는 곳을 보지 못하고 있지는 않을까? 사람들에게 나눠줄 아름다운 사향을 가지고 있으면서 더 많은 것을 가지려고 위태한 절벽을 방황하는 사향노루가 된 것은 아닌지…. 나를 떠나 새로운 것을 찾고, 누군가를 통해 행복과 사랑을 찾고, 삶의 의미를 찾으려고 한다면, 나야 말로 자신의 가치를 발견하지 못한 채 끝내 비명 횡사하는 사향노루가 아니겠는가. ‘진정한 가치는 작은 결함에 나온다’라고 했다. 제목이 기억나지 않는 영화인데 한 보석상이 다이아몬드의 가치를 설명하면서 쓴 대사다. 때로는 내가 부끄러워했던 그 흠이 결정적 요소로 작용할 수 있다. 우리 인생은 모두 지하에서 채굴된 가공되지 않은 원석들이다. 원석을 오랜 시간 깎고 다듬고 디자인하는 것은 오롯이 나의 몫이다. 원석엔 저마다 흠이 있는 것이니 그것이 부끄러움이 될 수는 없다. 소크라테스 말처럼, 우선은 나의 부끄러움을 아는 것이고, 다음은 이를 드러내는 일이다. 그것이 사향노루가 갈망했던 향기를 찾아가는 첫걸음이다. -소설가 daum cafe 이관순의 손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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