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4-29(월)

오피니언
Home >  오피니언  >  기고

실시간뉴스
  • 음악은 천상의 소리
    밤바람이 선득한 주말. 저녁을 먹고 장자호수공원으로 산책을 나섰습니다. 사람들이 오가는 사이로 청아한 색소폰 연주음이 들려옵니다. 발길이 절로 이끌려 간 곳엔 한 분이 ‘셀프 콘서트’를 열고 있네요. 잔디밭에 앉아 연주가 끝날 때마다 박수를 칩니다. 연주력이 준수한데다 가을밤의 정취까지 더해져 색소폰 선율에 젖는 아름다운 가을밤을 즐겼지요. 음악은 사랑을 전하는 신의 소리라고 합니다. 모든 사람을 하나로 묶어 주지요. 음악은 연주자의 기쁨도 되지만 만인의 즐거움도 됩니다. 연주가의 재능을 부럽게 바라본 영화가 있습니다. ‘어거스트 러쉬.’ ‘음악은 사랑을 낳고 사랑은 운명을 부른다.‘는 말이 잘 어울린 영화지요. 밴드 싱어이자 기타리스트인 루이스와 촉망 받는 첼리스트 라일라의 보석보다 반짝였던 단 하루 밤 이후, 남자는 그녀를 한 번도 잊은 적 없고, 여자는 얼굴도 모르는 낳은 아이에 대한 그리움을 놓은 적이 없지요. 이들의 믿음 하나는 “음악이 있는 한 우리는 다시 만날 거야”라는 것. 부모의 DNA를 받은 아이는 일찍부터 놀라운 음악적 재능을 보입니다. 시설에서 자란 11세의 소년은 부모만이 자신의 음악을 알아볼 수 있다는 믿음 하나로 뉴욕을 찾아갑니다. 모든 게 신비한 뉴욕. 도시가 만드는 수많은 소리들이 소년의 청각에 음계로 포착됩니다. 소년은 아이들을 모아 거리에서 노래를 시키는 워저드를 만나 어거스트란 이름으로 거리 연주자로 등장해 천부적인 실력을 보입니다. 하루는 소리에 끌려 교회 합창단 연습장에 들렸다가 처음 보는 오선지와 오르간 앞에서 작곡하고 연주하는 놀라운 재능을 발휘합니다. 이를 지켜본 목사님이 줄리어드에 음악천재로 추천합니다. 줄리어드에서 사모곡 라프소디를 작곡해 주위를 놀라게 한 어거스트. 마침내 뉴욕필하모니 콘서트에 특별 출연자로 초청됩니다. 줄리어드 출신의 유명 첼리스트(엄마)와 함께. 하지만, 연주회를 앞두고 위기가 오죠. 워저드가 연습장에 나타나 아버지라며 친권을 주장하고 데려갑니다. 학교는 간곡히 연주회만큼은 보내달라고 부탁을 하지만 거절당하죠. 금관악기가 아이의 영혼을 뽑는다는 그릇된 인식으로... 다시 광장 연주에 나서는 어거스트. 부근을 지나던 루이스가 소리에 홀려 찾아오고, 금세 호흡을 맞추더니 황홀한 기타 2중주를 펼칩니다. 어거스트가 오늘 밤 있을 센트럴파크 공연을 알려주지만, 루이스는 귀에 담지 않고 “용기를 잃지 말라”는 말만 주고 떠납니다. 그날 밤, 어거스트는 친구의 도움으로 탈주에 성공해 연주장으로 달려가고, 지방공연에 나서던 루이스는 뉴욕 중심가에서 아이 얼굴이 나온 배너광고를 보지요. 전율을 느낀 그도 차를 버리고 연주회장으로 내달립니다. 환호 속에 첼로 연주를 끝낸 라일라가 아이를 생각하며 공원을 빠져나올 때, 줄리어드 총장이 특별초청 지휘자를 소개합니다. 무대에 등장하는 어거스트. 환호하는 청중... 놀라운 자작곡이 그의 지휘 속에 연주를 시작합니다. 밖을 향하던 라일라가 연주음에 끌려 뒤돌아서고, 또 반대편에서는 황홀한 눈빛의 루이스가 나타납니다. 마침내 무대 앞에 이르러 12년 만에 마주 서는 남과 여... 환희의 포옹을 할 때 지휘하는 아이의 모습이 비칩니다. 세상에는 수많은 소리들로 가득 차 있지요. 귀를 기울인 만큼 들리기도 하고 지나치기도 합니다. 끊임없이 들리는 세상의 소리를 옮겨 작곡하고 연주하는 음악천재가 말하죠. “아이들이 동화를 믿듯 저는 음악을 믿어요. 부모님이 살아계신다면 제 음악을 꼭 듣게 될 거야요.” 어거스트의 간절한 믿음처럼 나는 어떤 믿음을 확신하며 살고 있나요? 글 이관순(소설가)
    • 오피니언
    • 기고
    2024-04-29
  • 내 앉아있는 자리
    스산한 바람에 비까지 흩뿌리니 단풍은 지고 낙엽만 우수수 쌓입니다. 이렇듯 나무도 꽃도 지상의 모든 생명들이 사이즈를 줄이는 시기입니다. 그것이 한 주기의 마지막 겨울을 상대하는 지혜입니다. 사람이 나이가 든다는 것 또한 사이즈를 줄이는 것으로 시작됩니다. 몸집이 줄고, 먹는 게 줄듯 이것이 절제의 근본이며 이치입니다. 세상에 나올 때 작게 나왔으니 돌아갈 때도 비우고 작게 돌아가야 합니다. 여기에는 실상과 허상이 공존하지만 스스로 말수를 줄이고, 욕심도 미움도 줄이고, 자랑, 명예 같은 덧없는 것은 날려야 합니다. 그래야 사이즈가 줄지요. 루디 세네카는 “인간은 마치 시간이 모자란다고 불평하면서, 마치 시간이 무한정인 것처럼 행동한다.”고 사람의 어리석음을 비꼬았지요. 그런데 사람은 이를 알면서도 어제의 습관을 오늘도 고집하고 삽니다. 친구가 많다고 자랑하시나요? 바쁜 것을 미덕으로 생각하셨나요? 그보다는 흉금을 터놓고 말할 한 사람의 친구가 더 소중한 때입니다. 친구도, 만남도, 분주함도 지혜롭게 줄여가는 것이 노년의 삶을 가볍게 하고 실수를 줄이는 방법입니다. 우리 몸은 수분이 80% 이상이라고 하죠. 비슷한 비율로 우리 삶을 주장하고 있는 것이 말입니다. 그만큼 물과 말은 몸을 유지하고 삶을 구성하는 중요한 요소입니다. 그래서 절제를 말할 때 가장 먼저 꼽는 게 말입니다. 내가 살면서 토해낸 말을 양으로 계측한다면 얼마나 될까. 그중 꼭 필요했던 말은 얼마쯤 일까. 이제는 할 말 못할 말, 안 해도 좋을 말, 상처 주는 말을 가려가며 했으면 합니다. 내뱉은 말은 흘러간 세월처럼 돌릴 수 없으니... 그래서 이랬으면 좋겠습니다. “이제는 많이 들어주자. 듣는 귀는 8로 열고 말하는 입은 2로 줄이자. 남이 말할 때 자르지 말자. 중간에 끼어들지 말자. 말 줄기를 돌리지 말자.” 비위 상한다고 파르르, 욱, 버럭 하는 감정도 이젠 삭혀 없애야 합니다. 행여 그런 상황이 되면 심호흡 한 번으로 날려버리세요. 대신 많이 웃어주면 좋겠습니다. 상대가 가족, 친구, 이웃, 누구든 만나면 웃는 것으로 말문을 열어요. 나이가 들면 웃는 근육도 굳는다는데, 얼굴에 웃음기마저 빠지면 노인 특유의 표정 없는 일그러진 인상만 남아요. 나이가 든다는 것은 옻칠을 더하는 것처럼 윤을 내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미움이나 시기, 질투는 다 헛된 뜬구름이지요. 뜬구름을 좇다가 낯선 곳에 서 있는 나를 발견하는 건 아픈 일입니다. 살고 있는 이날, 앉아 있는 이 자리가 내가 족해야 할 자리임을 아는 사람은 행복합니다. 이 나이에 맘대로 못할 게 뭐야. 하지만 나이가 들수록 남을 배려하며 사는 인생이 아름답습니다. 살아보니 ‘역지사지(易地思之)’ 이상의 스승은 없더군요. 사서삼경이 대단한 게 아니라, 상대편 입장을 늘 먼저 헤아리면 그것이 상선의 절제입니다. “오죽했으면... 그래 저럴 수 있겠다... 나도 그 입장이면... 저도 사람인데.” 글 이관순(소설가)
    • 오피니언
    • 기고
    2024-04-22
  • 너도 죽는다‘메멘토 모리’
    말에는 묘한 힘이 있어 곱씹을수록 향기를 내는 말이 있고, 겸손함을 가르치는 말도 있지요. 라틴어는 그런 철학적 의미를 함의한 말과 글이 꽤 많습니다. 언젠가의 기억입니다. KBS TV '도전 골든벨‘에서 최후 1인이 된 학생에게 50번 마지막 골든벨 문제가 주어집니다. “고대 로마에서 승리를 쟁취한 장군이 개선행진을 할 때 주위에서 외쳤던 라틴어는?“ “메멘토 모리" 영예의 골든벨이 울리는 짜릿한 순간을 지켜보았지요. 다소 생소한 라틴어 '메멘토 모리(memento mori)'는 '죽음을 기억하라‘는 뜻입니다. 유래는 로마 공화정의 개선식으로 거슬러 올라가요. 개선식은 전쟁에서 승리한 장군에게 주어지는 영예입니다. 개선장군은 관습에 따라 전차를 타고 퍼레이드를 벌입니다. 영웅이 탄 마차가 시민의 환호 속을 헤치고 행진하는 동안 뒤에서 노예들이 큰소리로 외쳐댑니다. 메멘토 모리! 메멘토 모리! “오늘은 개선장군이지만 너도 언젠가는 죽는다. 겸손하게 행동하라.” 승리에 도취된 장군에게 본분을 잊지 않도록 경각심을 주는 장치인 셈이죠. 로마 최고의 환대 속에서도 너는 신이 아닌, 한 인간일 뿐임을 알린 것입니다. 메멘토 모리에는 세 가지 철학적 가치가 내재되어 있습니다. ‘죽음을 기억하라. 운명을 사랑하라. 현재에 충실하라.’ 이 셋은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도 적용되는 훌륭한 교훈입니다. 스티브 잡스도 스탠퍼드대 졸업식 축하 연설에서 이를 강조했습니다. 췌장암 투병으로 힘든 시기를 보내던 그는 ‘죽음은 삶이 만든 최고의 발명품‘이라고 격찬합니다. 그러므로 제한된 인간의 시간을 다른 누군가의 인생을 살 듯 낭비하지 말고 자신을 믿고 집중하라고 졸업하는 학생들에게 말합니다. 뜻이 통하는 라틴어에 ‘카르페 디엠(carpe diem)'이 있습니다. 몬래 이 말은 신을 공경하고 오만해지지 말라는, 현재를 가치 있게 살라는 뜻인데 이후 기독교 영향을 받아 현세의 부귀나 영화의 부질없음을 알립니다. 우리에게도 ‘화무십일홍’이란 말이 있죠. 열흘 가는 붉은 꽃이 없다는 이 말엔 ‘한 번 흥한 것은 반드시 쇠한다.’ 는 속뜻을 지닙니다. 트로트 가수 김연자가 불러 유명한 노래 ‘아모르 파티’도 같은 말입니다. 사랑을 뜻하는 아모르와 운명을 뜻하는 파티가 합성된 라틴어로 이 또한 ‘운명을 사랑하라’는 말이지요. 인간이 가져야 할 삶의 태도로 철학자 니체가 처음 사용했습니다. 메멘토 모리는 미국 남서부에 거주해온 나바호족에서도 찾을 수 있어요. 그들은 “네가 세상에 울면서 태어날 때 세상은 기뻐했으니, 네가 죽을 때 세상은 울어도 너는 기뻐할 수 있도록, 그러한 삶을 살아라.”는 의미심장한 철학을 닮고 있습니다. <메멘토 모리>, <카르페 디엠>, <아모르 파티>, <화무십일홍>까지 모두 겸손한 삶을 가르칩니다. 제한된 시간을 사는 인생에게 죽음을 기억하고, 운명을 사랑하고, 오늘에 충실하라.... 이보다 더 삶을 성찰하게 하는 말이 또 있을까 싶습니다. 글/ 이관순(소설가)
    • 오피니언
    • 기고
    2024-04-15
  • 의리가 사라진 세상
    짓궂은 질문을 해봅니다. ‘사람’과 ‘인간’은 같은 거야? 사전의 설명은 비슷 하지만, 아무래도 “저 인간!” 하면 부정적 이미지가 앞서죠. “저 사람 인품이 좋아”로는 써도 “저 인간 인품이 좋다”고 말하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세상에 사람 같지 않은 인간이 많다보니 용례까지 헷갈립니다. 초등학교 국어 교과서의 ‘의좋은 형제’를 생각하면 지금도 마음이 훈훈합니다. 우애 좋은 형제가 가을 수확을 마치고 들판에 볏단으로 노적가리를 만듭니다. 형이 보니 아우네 것이 적어 보입니다. 그날 밤, 어려운 아우 형편을 안 형이 자신의 볏단을 옮겨 놓고, 다음날 밤은 식솔 많은 형을 생각한 아우가 반대로 볏단을 옮기지요. 노적가리가 줄지 않자 형제 다 고개를 갸우뚱합니다. 마침내 볏단을 옮기던 형제가 달빛 아래 마주치면서 얘기는 끝나죠. 그때의 감동으로 습자시간이면 붓글씨를 ‘노적가리 풍년일세’만 썼던 기억이 납니다. 가난해도 마음은 풍년인 사람들이 살던 시절이 있었지요. 엊그제 복권 당첨금이 살인흉기가 된 사건이 났습니다. 우애 좋은 형제가 복권 당첨으로 수억 원의 당첨금을 받아 배분까지는 성공했는데, 그 돈으로 사업을 했던 형이 망하며 사단이 납니다. 돈을 더 요구하는 형과 보증을 선 동생 간에 감정이 충돌하다 동생을 살해하는 일이 벌어진 겁니다. 황금만큼 요괴스러운 것은 없습니다. 돈 앞에 장사가 없다지요. 일본 속담에 ‘담배꽁초와 돈은 쌓일수록 냄새가 난다’고 했습니다. 돈이 사람을 부패하게 만든다는 뜻이겠지요. 사는 것은 전보다 풍족해도 인성은 강퍅해졌습니다. 돈을 둘러싼 이기적 욕망이 칼끝처럼 첨예하게 부딪치는 세상입니다. 개신교의 큰 어른이셨던 목사님이 생전에 우리교회에 오셔서 당신이 붓으로 큼직하게 쓴 ‘의리를 지키자’란 글귀를 강단에 내리고 설교를 하신 적이 있습니다. 세상이 오죽하면 의리를 부탁했을까요. 사람과 사람,관계 사이에 의리가 사라졌다고 탄식하는 소리가 높아만 집니다. 제목을 잊은 영화입니다. 세 친구가 딱 한 번 은행을 털어 깨끗하게 살자며 치밀한 준비를 합니다. 그들의 거사는 성공했고 무사히 안전지대에 도착하자 돈다발을 놓고 환호합니다. 한 친구가 축배를 들자며 나갔다가 술에 독을 타서 옵니다. 욕심이 생긴 거죠. 태연하게 돌아온 친구가 술잔을 건네고 축배를 외칠 때, 팡팡! 술 사온 친구가 고꾸라지고 남은 둘은 낄낄댑니다. 뛰는 놈 위에 나는 놈이 있거든요. 둘은 더 큰소리로 건배를 외치지만 독배를 든 이들도 쓰러집니다. ‘사람에게 의리 빼면 시체’ 라고 말하던 세상이 있었지요. 의리란 뜻은 ‘사람관계에서 마땅히 지켜야 할 도리’로, 여기엔 사람이 갖춰야 할 덕목이 다 녹아져 있죠. 가난은 견뎌내기 어려운 것임을 경험한 세대가 모이면 그래도 그때가 좋았다고 반추합니다. 의리가 사라진 곳에 먹잇감을 놓고 으르렁 대는 동물세계가 어른댑니다. 사람 사이 흐르는 체온 대신 물질을 향한 충혈 된 눈빛만 섬뜩하니 사람은 없고 인간만 남아 보입니다. 다시 사전을 봅니다. ‘인간’이란 단어의 기본설명 뒤로 ‘사람의 모습은 하고 있되 사람답지 못하다는 뜻.’을 추가하고 예문도 달았군요. “저 인간이 한 짓을 생각하면 돌아버리겠어.” 너무도 흔히 듣는 슬픈 말이 됐습니다. 글 이관순(소설가)
    • 오피니언
    • 기고
    2024-04-08
  • 의리가 사라진 세상
    짓궂은 질문을 해봅니다. ‘사람’과 ‘인간’은 같은 거야? 사전의 설명은 비슷 하지만, 아무래도 “저 인간!” 하면 부정적 이미지가 앞서죠. “저 사람 인품이 좋아”로는 써도 “저 인간 인품이 좋다”고 말하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세상에 사람 같지 않은 인간이 많다보니 용례까지 헷갈립니다. 초등학교 국어 교과서의 ‘의좋은 형제’를 생각하면 지금도 마음이 훈훈합니다. 우애 좋은 형제가 가을 수확을 마치고 들판에 볏단으로 노적가리를 만듭니다. 형이 보니 아우네 것이 적어 보입니다. 그날 밤, 어려운 아우 형편을 안 형이 자신의 볏단을 옮겨 놓고, 다음날 밤은 식솔 많은 형을 생각한 아우가 반대로 볏단을 옮기지요. 노적가리가 줄지 않자 형제 다 고개를 갸우뚱합니다. 마침내 볏단을 옮기던 형제가 달빛 아래 마주치면서 얘기는 끝나죠. 그때의 감동으로 습자시간이면 붓글씨를 ‘노적가리 풍년일세’만 썼던 기억이 납니다. 가난해도 마음은 풍년인 사람들이 살던 시절이 있었지요. 엊그제 복권 당첨금이 살인흉기가 된 사건이 났습니다. 우애 좋은 형제가 복권 당첨으로 수억 원의 당첨금을 받아 배분까지는 성공했는데, 그 돈으로 사업을 했던 형이 망하며 사단이 납니다. 돈을 더 요구하는 형과 보증을 선 동생 간에 감정이 충돌하다 동생을 살해하는 일이 벌어진 겁니다. 황금만큼 요괴스러운 것은 없습니다. 돈 앞에 장사가 없다지요. 일본 속담에 ‘담배꽁초와 돈은 쌓일수록 냄새가 난다’고 했습니다. 돈이 사람을 부패하게 만든다는 뜻이겠지요. 사는 것은 전보다 풍족해도 인성은 강퍅해졌습니다. 돈을 둘러싼 이기적 욕망이 칼끝처럼 첨예하게 부딪치는 세상입니다. 개신교의 큰 어른이셨던 목사님이 생전에 우리교회에 오셔서 당신이 붓으로 큼직하게 쓴 ‘의리를 지키자’란 글귀를 강단에 내리고 설교를 하신 적이 있습니다. 세상이 오죽하면 의리를 부탁했을까요. 사람과 사람,관계 사이에 의리가 사라졌다고 탄식하는 소리가 높아만 집니다. 제목을 잊은 영화입니다. 세 친구가 딱 한 번 은행을 털어 깨끗하게 살자며 치밀한 준비를 합니다. 그들의 거사는 성공했고 무사히 안전지대에 도착하자 돈다발을 놓고 환호합니다. 한 친구가 축배를 들자며 나갔다가 술에 독을 타서 옵니다. 욕심이 생긴 거죠. 태연하게 돌아온 친구가 술잔을 건네고 축배를 외칠 때, 팡팡! 술 사온 친구가 고꾸라지고 남은 둘은 낄낄댑니다. 뛰는 놈 위에 나는 놈이 있거든요. 둘은 더 큰소리로 건배를 외치지만 독배를 든 이들도 쓰러집니다. ‘사람에게 의리 빼면 시체’ 라고 말하던 세상이 있었지요. 의리란 뜻은 ‘사람관계에서 마땅히 지켜야 할 도리’로, 여기엔 사람이 갖춰야 할 덕목이 다 녹아져 있죠. 가난은 견뎌내기 어려운 것임을 경험한 세대가 모이면 그래도 그때가 좋았다고 반추합니다. 의리가 사라진 곳에 먹잇감을 놓고 으르렁 대는 동물세계가 어른댑니다. 사람 사이 흐르는 체온 대신 물질을 향한 충혈 된 눈빛만 섬뜩하니 사람은 없고 인간만 남아 보입니다. 다시 사전을 봅니다. ‘인간’이란 단어의 기본설명 뒤로 ‘사람의 모습은 하고 있되 사람답지 못하다는 뜻.’을 추가하고 예문도 달았군요. “저 인간이 한 짓을 생각하면 돌아버리겠어.” 너무도 흔히 듣는 슬픈 말이 됐습니다. 글 이관순(소설가)
    • 오피니언
    • 기고
    2024-04-04
  • 슬픔이여 안녕!
    죄 없는 어린 생명이 희생될 때 더없이 고통스럽습니다. 남달리 알레르기 반응을 보이는 것은 일종의 트라우마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여덟 살에 충북 영동의 한 초등학교에 입학했습니다. 여름이 되면 아이들과 몰려서 마을 앞에 흐르는 강에 나갑니다. 겨울엔 썰매를 타고 여름엔 물놀이를 하는 곳. 경부선이 지나가는 철교 아래가 또래들의 여름 아지트지요. 흰줄 하나를 내린 검정 팬티를 입고 상급생들은 수영으로 강을 건너고, 하급생들은 교각 중턱에 걸터앉아 형들을 부럽게 바라보다가 텀벙 강물에 몸을 던집니다. 이날도 철교 아래에 한 떼의 아이들이 모였습니다. 비가 와서 물이 좀 불었지만 누구도 겁내지 않았지요. 그런데 물이 불면 수심에서 물돌이가 이는 걸 모른 게 비극입니다. 형들이 수영을 가르친다고 아이들을 밀어 넣는데 그만 1학년 쌍둥이 동생이 소용돌이에 말려든 겁니다. 아이가 물속에서 허우적이자 더럭 겁이 난 아이들이 달아나기 시작합니다. 나도 겁에 질려 뛰다가 뒤를 돌아봤는데, 발을 구르며 울부짖는 쌍둥이 형의 모습이 보였습니다. 죽은 아이는 내 짝꿍이었습니다. 마을이 발칵 뒤집어지고... 나도 밤마다 경기를 일으켰습니다. 땀을 흘리며 악몽에 시달렸지요. 물에 퉁퉁 부은 친구가 나를 원망했기 때문입니다. 넋이 나간 친구 엄마, 고래고래 소리질러 아들 이름을 부르는 아빠, 나를 원망스레 쳐다보는 쌍둥이 형... 나는 누구 앞에서도 고개를 들 수 없는 죄인이었습니다. 친구를 버리고 도망쳤다는 죄책과 슬픔이 어린 가슴을 쿵쿵 뛰게 했지요. 이로 인해 부모님 걱정도 덩달아 커졌습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아버지가 발령을 받아 새 임지로 이사하면서입니다. 가족이 아버지의 전근을 반색한 것도 나 때문이었죠. 아픈 기억은 상급학교로 진학할수록 많이 옅어졌습니다. 초등학교 동창들과 연락을 끊은 것도 도움이 됐습니다. 결혼 후로는 아예 잊다시피 지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어느날, 우연히도 길에서 쌍둥이 형을 만나면서 덜컥 상처가 뜯기고 말았습니다. 어머니는 우울증을 앓다가 목을 매셨고, 알코올 중독에 빠진 아버지도 암으로 돌아가셨답니다. 한 아이의 죽음이 이렇게 가족을 황폐화 시켰구나. 아물었던 내 상처에도 피가 나는 걸 느꼈습니다. 가족 중 유일한 생존자인 형의 얼굴에 깔린 그늘을 보았습니다. “가족 몫까지 잘 살아야지. 흔들릴 때마다 그렇게 위로해.” 예민한 성격 탓일까, 이후로 이따금 꿈을 꿉니다. 시골에서 놀던 추억들이, 떠난 어린 친구의 모습도 생생하게 포착됩니다. 더 힘들게 하는 건 잊을 만하면 날아드는 이런저런 또래 아이들 희생소식입니다. 줄어드는 인구도 걱정인데 죽었다하면 아이들이냐고 격분도 합니다. 지난 봄, 헝가리에서 유람선 전복으로 6세 소녀가 숨졌다는 비보가 그랬었죠. 외할머니 손을 꼭 잡은 아이의 인양된 모습은 더 애처로웠습니다. 그 아픔이 채 가시기도 전에 또, 엄마가 일곱 살 어린 아이를 데리고 동반자살을 했다는 비보가 들렸습니다. 죽음이 낯설기만 어린 나이에 얼마나 섬뜩했을까, 얼마나 설득했을까, 아니 강요했을까. 그래야 했던 엄마의 심정은? 푸른 6월에는 전 세계인을 슬픔에 잠기게 한 사고가 또 발생했습니다. 멕시코 국경에서 리오그란데 강을 건너 미국으로 밀입국하려던 25세 아빠와 두 살짜리 딸이 익사한 것입니다. 아빠가 아이를 셔츠 안에 넣고 아이는 아빠의 목을 끌어안은 채 떠내려 온 사진을 봤습니다. 물살을 이겨내려 했던 아빠의 다리는 물위에 떠 있고, 아이의 바지는 물먹은 기저귀로 불룩했습니다. 강 건너서 울부짖는 엄마의 얼굴이 오버랩됩니다. 멕시코 영화 ‘신 놈브레’는 중남미사람들이 ‘죽음의 열차’를 올라타고 미국으로 밀입국하려는 과정을 그린 영화입니다. 열차 지붕에 올라타다 떨어져 죽고 힘겹게 탄 뒤는 살해나 강간을 당하기도 합니다. 서글픈 것은 점쟁이가 찾아온 주인공에게 일러주는 말이죠. “넌 미국에 도착할거야. 그런데 안내는 신이 아닌 악마가 하지.”라고. 그 악마는 죽음의 열차를 올라 탄 아빠와 딸을 강물 속에 빠뜨린 것입니다. 스스로를 위로합니다. 어쩌면 아이들이 찾아간 저세상이 험난한 이 세상을 사느니 보다 낫지 않겠냐고. "여긴 낙원이 아냐. 슬퍼하지 말고 편히 쉬어라..." 오래전 읽은 프랑수아 사강이 쓴 ‘슬픔이여 안녕’ 이란 소설 제목이 떠오르는 것은 우연일까요? *글/이관순(소설가)
    • 오피니언
    • 기고
    2024-04-01
  • 노을처럼 아름답던 식탁의 축제
    사람들이 그렇게도 갈구하는 행복은 어디에 있는 걸까? 골드러시를 따라 미 서부로 향했던 그 많은 사람들은 무엇을 찾았을까. 공자는 제자의 질문에 ‘행복은 없다’고 간단명료하게 답합니다. 공자는 이에다 ‘인생에는 행복을 찾아가는 여정이 있을 뿐’이라고 덧붙였습니다. 공자가 말하고자 한 것은 행복이란 눈이 혹할 보석 같은 게 아니라고 내 나름 유추 해석합니다. 거대한 바위 밑 은밀한 곳이나 화려한 샹들리에 속에 숨겨진 것이 아니고, 우리가 사는 일상의 그 사소한 것들, 그 자체에 있음을 말하려 한 것으로 주석을 답니다. 행복은 더 이상 파랑새도 아니고 신기루도 아닌, 바로 우리의 일상에 흘러갑니다. 매일 우물에서 물을 길어오듯 행복도 일상이란 우물에서 길어 올려야 합니다. 돌아보니 그 많던 내 일상들이 다 허공에 흩어졌습니다. 우주의 어느 시간보다도 값진 것들입니다. 나이가 들면 외롭다고 합니다. 수많았던 그 일상들을 되돌릴 수 없고 함께 할 수도 없다는 것 때문이겠지요. 자식들로 들썩이던 공간은 소산하다 못해 적막감마저 흐릅니다. 전화도 오고 주말이면 찾아주니 반갑기도 하지만 잠시 머물다 떠나고 나면... 이젠 막내마저 직장 따라 지방으로 갔으니 그마저도 용이하지 않습니다. 옛말에 고개가 끄덕여 집니다. “마음이 지척이면 천리가 지척이고, 마음이 멀어지면 지척도 천리”라는 말... 형제간의 소통도 예전 같지 않습니다. 통화를 해도 쉽게 대화거리가 궁해지죠. 전 같으면 자식걱정에, 자랑에, 줄줄이 엮을 테지만 빈 둥지끼리 나눌 것은 그저 서로의 건강 걱정이나 해주면 끝입니다. 존경하는 선배와 만났습니다. 큰 아들은 미국에서 학위를 따고 현지에 눌러 앉은 지 11년째랍니다. 오늘은 손자가 화상통화를 할려나? “아참, 이번 주는 바쁘다 했지? 그래 바빠야지.” 일본에 있는 둘째 딸은 엊그제 통화에서 아이 교육이 힘들다고 넋두리하던데. “타지도 아닌 타국 생활이니 그렇겠지.” 제 둥지를 찾아간 자녀들한테 옛 일상을 더듬자고 할 일은 더욱 아닙니다. 그렇다고 넋두리만 하고 있을 수도 없습니다. 그것이 우리 인생이 거쳐야 할 여정으로 받아들여야 할 테니까요. 늘 아쉽고, 부족하고, 늘 그리움이 많은 게 우리네 인생인 듯합니다. 그래도 아직 남은 인생이 있고 걸어야 할 여정이 있고, 맞이할 일상이 남았으니 희망이란 새 한 마리 날아와 내 어깨에 앉아 주길 기대합니다. 그러다보니 더욱 간절해지는 것이 하늘의 은총입니다. 그분만이 내 남은 여정에 행복의 무늬를 함께 짜 주실 분이 시니까요. 식탁의 빈자리를 채워주시고 내가 입술을 열어 기도하면 응답해 주십니다. 성경을 펴면 말씀이 두런두런 대화를 나누자고 합니다. 예전에 느끼지 못한 행복감이 차오릅니다. 아이들과 즐기던 저녁 식탁의 축제는 흩어져갔지만, 그 분과 함께 하는 식탁의 축제는 노을빛처럼 아름답습니다. 오늘도 사랑과 그리움이 묻은 집에서, 가족의 기억들이 숨 쉬는 공간에서, ‘고뇌는 내가 갈아입는 옷 중 하나이니 나는 상처받은 사람에게 기분이 어떤지 묻지 않는다 나 스스로 그 상처받은 사람이 된다' (월트 휘트먼의 '나의 노래' 중에서 글 이관순(소설가/이관순의손편지)
    • 오피니언
    • 기고
    2024-03-28

실시간 기고 기사

  • 나는 무엇을 지키는 자인가?
    사람들이 쓰는 언어에서 그들이 사는 세상이 보입니다. 예나 지금이나 ‘가정’ ‘가족’ 이상의 소중한 가치를 지닌 것이 있을까 싶지만, 사회가 개인 중심의 늪에 빠지면서 이기적 생각이 일상을 지배합니다. 고통을 주려고 상대 가족을 범죄 대상으로 삼는 건 영화 속 얘기만이 아닙니다. 자녀를 납치하고 아내를 폭행하고 가족을 볼모로 한 범죄가 계속 느는 것은 사람에게 가장 아픈 곳이 가족이어서죠. 우리 생활에 가족이란 용어가 일상화된 것은 그리 오래되지 않아요. 전엔 투박하지만 정감 있는 ‘식구(食口)’란 말을 많이 썼는데, 언젠가부터 가족이란 말로 대체된 모양새가 됐습니다. 가족은 사전적 의미로 ‘부모, 자식, 부부 관계로 맺어져 한집에서 함께 생활하는 공동체’라는 뜻이지만, 식구는 ‘같은 집에서 같이 살며 끼니를 함께 하는 사람’을 이릅니다. “여섯 식구가 코딱지만 한 방 두 칸에 기거하면서 아버지는 식솔의 입들을 책임지느라 평생을 힘겹게 사셨다….”필자 소설 중 가난과 싸우던 시절, 먹는 일만큼 중한 것은 없었죠. 그래서 아버지는 딸린 식구의 입을 책임지는 막중한 짐을 지셨어요. 식솔, 가솔 등의 말은 다 가장의 무게를 느끼게 하는 아버지 용어입니다. 가족이 먹는 입을 따지는 식구보다 격이 있어 보이기도 하지만, 끈끈한 정분과 생명력은 ‘식구’가 더 우직하면서도 살갑습니다. 먹고사는 생존 운명체로서의 질긴 연(緣)입니다. 식구와는 또 다른 의미의 ‘생구(生口)’란 말이 있습니다. 식구뿐 아니라, 노비나 식객, 집에서 기르는 소, 닭, 개 같은 짐승들을 통틀어 ‘생구’라 불렀어요. 함께 기식한다는 뜻입니다. 조선일보 인기 칼럼을 연재한 이규태 선생의 ‘한국인의 의식구조’에서 찾은 말입니다. 선생은 “이 세상에서 짐승을 사람과 동격으로 표현하는 말을 가진 나라는 아마 우리 외엔 없을 것”이라고 통찰했지요. 소설 <대지>로 노벨문학상을 탄 펄벅 여사가 오래전 한국에 왔을 때 소 달구지를 모는 지게꾼에게 큰 감동을 받았다고 했죠. 다큐 영화 <워낭소리>에 전율했던 그 짠함이 펄벅의 감성을 흔든 겁니다. 소는 40년을 동고동락한 할아버지의 식구요 생구입니다. 할아버지는 소가 무거워할까봐 얼마 안 되는 짐도 나눠지고, 소가 늙어 죽으면 묘도 써 줍니다. 그 공생의 삶이 눈물겹도록 아름다웠어요. 지구의 육지 면적에서 매년 남한 면적의 60%만 한 사막이 늘어나고, 아마존 밀림은 매년 여의도 면적의 6배가 사라진답니다. 이 모두 공생의 삶을 저 버린 인간의 탐욕이 빚는 참사입니다. 사람이 지켜야 할 기본은 무엇일까? 이에 오바마 대통령이 답합니다. 2004년 민주당 전당대회에서 청중을 감동시킨 연설에서죠. 정치적 수사 가득한 연설문 대신, 가슴의 언어로 국민 마음을 흔들었습니다. 텍스트는 인류 최초의 살인사건을 다룬 성서입니다. 신이 아벨의 제사를 즐겨 받는데 화가 난 형 카인이 동생을 죽이자 카인에게 묻습니다. “네 동생 아벨은 어디 있느냐?” 그 대답을 21세기의 오바마가 대신한 것입니다. “만일 시카고 남부에 글을 읽지 못하는 소년이 있다면, 그 아이가 제 아이가 아니어도 그 사실은 제게 중요합니다. 만일 어딘가에 약값을 지불하지 못하는 노인이 의료비와 월세 중 하나를 택해야 한다면, 그녀가 제 할머니가 아니라도 제 삶마저 가난해집니다. 만일 어떤 아랍계 미국인이 정당한 법적 절차 없이 체포당했다면, 그것은 제 시민권에 대한 침해입니다...” 전 미국인이 숨을 죽입니다. 그들 마음 깊은 곳에 숨어 있는 자비와 희망에 불씨를 살려주었기 때문이죠. 강퍅한 세상에 찌든 사람들의 눈물샘을 자극하면서 오바마의 연설은 절정을 향합니다. “저는 다음 같은 근본적인 믿음이 있습니다. 저는 제 동생을 지키는 자입니다. 저는 제 여동생을 지키는 자입니다. 이것이 바로 이 나라를 작동하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의 미국이란 가족으로 모이게 하는 것입니다.” ‘저는 동생을 지키는 자’란 말은 구약성서 창세기 4장에 나옵니다. 오바마는 카인처럼 “내가 동생을 지키는 자입니까?” 항변하지 않고 성서를 깊이 묵상한 지혜로 가족애와 이타적 사랑을 말했어요. 결국은 가족입니다. 내가 우선할 일은 먼저 나를 보호하고 가족을 지키는 일입니다. 세상의 많은 문제는 가족을 지키지 못하면서, 이타적 사랑을 저버리는 이기적 행위에서 생성됩니다. 동시에 우리가 지켜야 할 가치는 ‘생구’입니다. 통섭을 주창하는 최재천 교수의 ‘호모 심비우스(공생인)’와도 통하는 말입니다. 그것이 내 가족과 인류와 자연을 지키는 진정한 공생인이 되는 길이 아닐까? -소설가/ daumcafe 이관순의 손편지
    • 오피니언
    • 기고
    2023-06-15
  • 복어(福語)와 독어(毒語)
    한국인은 심성은 착한 데 거친 입이 문제라고 한다. 서울대에서 조선의 유학을 연구하고 이를 풀어쓴 <한국은 하나의 철학이다>의 저자 오구라 기조 도쿄대 교수가 이를 지적했다. 한국을 접하는 많은 일본인들이 가장 놀라워하는 것으로 한국인의 거친 입을 꼽았다. 저자는 한국인의 입이 거친 이유를 유교 문화와 사무라이 문화의 차이에서 살폈다. 일본인은 칼로 싸우는데, 한국인은 말로 싸운다는 것이다. 하긴 칼의 나라 일본에서 입을 마구 놀렸다가는 목숨을 부지하기 어려울 터. 이에 비해 유교문화권의 한국에선 목숨이라도 걸 것처럼 말싸움이 격렬하다. 애어른 할 것 없이 모였다 하면 조자룡의 헌 칼 쓰듯 말을 함부로 휘두른다는 것이다. 담장마다 5월의 붉은 장미가 만개한 날, 한 친구가 모임에 나오지 못했다. 손자를 봐야 한단다. 그 사정을 모를 리 없지만 유독 한 친구가 버럭 소리를 냈다. “그 친구 왜 그리 살아? 그러니 허구한 날 붙잡혀 살지.” 그러자 다른 친구가 “자넨 손자랑 같이 살지 않으니 몰라. 옆에 있어봐 똑같네.” 대화가 손자 양육 논쟁으로 번졌다. “난 그렇게 안 살아. 내가 애를 보면 성을 갈겠다!”라고 선언까지 했다. ‘눈이 작은 여자와는 절대 결혼하지 않겠다’라고 한 조카. ‘절대 화장은 안 하겠다’고 했던 친구. ‘난 100세까지만 살 거야! 딱 100세!’ 호언했던 고교 동창... 그런데 어쩌나, 다들 헛맹세가 되고 말았다. 조카는 어쩌면 그렇게도 작은 눈의 여자와 천생연분을 맺고, 뜨겁다고 화장을 입버릇처럼 거부한 친구는 자손들에 의해 화장을 했다. 100세 건강을 장담했던 동창은 아홉 수에 걸려 69세에 심장마비로 떠나고 말았다. 나이 들며 갖춰야 할 덕목이 ‘절제’이다. 삶에 고루 적용되는 말이지만, 여기에는 ‘조심’하라는 뜻이 있다. 조심 중에는 ‘말조심’이 으뜸이다. 듣는 귀가 둘인데 말하는 입이 하나뿐인 것은 죽은 사람 앞에서조차 함부로 말하지 말라는 것이다. 죽어도 마지막까지 듣는 귀는 열려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수없이 내뱉는 말에는 사람을 살리는 말도 있지만 죽이는 말도 허다하다. 같은 말인데도 누구는 복스럽게 하고, 누구는 싸가지 없이 말한다. 말에는 ‘말씨’ ‘말씀’ ‘말투’ 등 세 부류가 있다. 말로 씨를 뿌리는 사람(말씨), 같은 말도 품위 있게 전하는 사람(말씀), 말을 생각나는 대로 툭툭 던지는 사람(말투)이 있다. 그래서 말에도 등급이 있다. 말씀은 말과 다르다. 때때로 어떤 분의 이야기를 들으면 나도 저렇게 살아야 되겠다고 다짐하는 경우가 있다. 이같이 감동을 전하는 사람의 말을 우리는 말씀이라 한다. 말로 좋은 씨를 뿌리는 사람도 있다. 유치원에서 만난 어린이에게 “야, 너 씩씩하고 멋지다. 이순신 장군처럼 훌륭한 장군이 돼라.” 운동장에서 공을 차는 만난 어린이에게는 “공 다루는 솜씨가 대단하구나. 손흥민 선수 같이 될 것 같다.” 말에 복을 담아 전하는 습관을 들여야 한다. 좋은 언어 습관은 말씨를 잘 뿌리고, 말씀을 잘 전하도록 인도해 준다. 하지만 생각 없이 말을 하면 한두 마디로도 사람에게 상처를 준다. 전철에서 중년 여자가 경로석에 앉은 할머니에게 말을 건넸다. “여든은 돼 보이는데 젊어 보이시네요?” 그런데 할머니의 반응이 시큰둥한 표정이다. 다음 역에서 여자가 내리기 무섭게 할머니가 풀 먹은 소리를 냈다. “그냥 고우시네요 하면 좋잖아. 나이는 왜 물어? 두 살씩이나 더 붙여서. 말을 싸가지 없이 해.” 우리에겐 책 <꼬마 리콜라><좀머 씨 이야기>로 낯익은 프랑스의 세계적인 그림작가 장자크 상뻬는 자신의 책 <뉴욕 스케치>에서 뉴요커들의 긍정적인 말버릇을 관찰했다. 이를 그림과 문장으로 재미있게 풀어놓았다. 뉴요커들의 말하는 특징은 빤한 얘기를 해도 습관처럼 상대의 말꼬리에 감탄사(!)를 붙이고, 물음표(?)를 달아준다는 것이다. 이때의 물음표와 감탄사는 내 말에 관심을 갖는다는 표시이고, 이야기를 격려하는 ‘말 효과’를 높여준다. 이를테면, 누가 “나 지난주에 단체관광으로 스위스 다녀왔거든요. 너무 좋았어요.”라고 말했을 때, 꼭 이렇게 끼어드는 사람이 있다. “난 스위스를 두 번 가봤어요. 스위스는 자유여행으로 다녀와야 제대로 느낄 수 있어요. 알프스 트레킹도 하면서.” 이렇게 말을 받으면 말문을 열고 있던 사람을 뻘쭘하게 만들기 십상이다. 이런 경우 뉴요커들은 자기 경험을 내세우지 않고 이렇게 말한다. “스위스요? 어머, 참 좋았겠다!” “일정은 어땠어요?” “어디가 제일 좋았어요?” 물음표와 느낌표를 번갈아 쓰면서 말머리를 계속 상대에게 돌려주며 묻는다. 얼쑤~와 같이 상대의 말에 추임새를 넣어주면서 말하는 사람을 신나게 해 준다. <뉴욕스케치>가 그리고 있는 뉴요커의 말 습관이 좋아 보이는 이유다. 우리는 대화를 하면서 느낌표와 물음표를 얼마나 자주 사용할까? 자기를 먼저 앞세워 대화를 하게 되면 상대의 말에 이러한 부호를 찍어주기가 어려워진다. 오늘도 내가 한 말을 돌아보면서 느낌표와 물음표를 달아주는데 인색했음을 깨닫게 된다. 내 말에 감탄하며 나의 감정과 안부를 물어주는 사람만큼 귀한 사람은 없다. 모두가 자기 할 말만 생각하는 세상에서는 더더욱 귀하다. 말이란 다듬을수록 빛과 향이 난다. 말할 때는 늘 역지사지(易地思之)가 필요하다. 상대방의 입장을 염두에 두라는 것이다. 적어도 실언이나 허언 같은 말실수는 막아야 할 테니까. 그러다 보면 덤으로 얻는 것도 있다. “어쩌면 그리도 말을 예쁘게 하세요?” “복 들어올 말씀만 하시네요.” 정겨운 말은 모두를 기분 좋게 한다. ‘말은 비단이어야 한다’라는 말이 그래서 귀하다. -소설가/ daumcafe 이관순의 손편지
    • 오피니언
    • 기고
    2023-06-12
  • 복이 되는 말, 독이 되는 말
    “개떡같이 말해도 찰떡같이 알아듣는다”라는 옛 어른들의 말이 생각난다. 원래 말이란 대충 말해도 통하도록 돼 있다. 언어 장애가 있는 사람이나 말을 배우는 아기들이 한두 단어만 오물거려도 가족들과 소통이 이뤄진다. 주어와 술어가 상응하지 않은 비문이거나 표현이 정확하지 않아도 의사 전달이 가능한 게 언어다. 말이 안 되는 말도 말이 될 때가 있다. 언어의 잉여성 또는 융통성 때문이다. 언어는 원래 품이 넉넉해서 표현이 조금 모자라도 소통에 크게 지장을 주지 않는다. 언어에 융통성이 없다면 인생이 얼마나 피곤할까. 하지만 이러한 언어의 융통성이 가져오는 해악도 만만치 않다. 요즘 세태를 보면 이를 악용해 별 이상한 신조어들이 양산돼 언어시장을 장악하고 있다. 정말 ‘개떡 같이 말해도 찰떡 같이 알아듣는 세상’에 놀랄 따름이다. 말은 문법이 아니라 마음으로 주고받도록 설계되어 있다. “말에서 사람의 인격을 본다”라는 말이 그래서 나왔다. 같은 말을 해도 사람에 따라 말이 되고, 말씀이 되고, 말투가 된다. 말에서 가장 고약한 것이 ‘말투’다. 사람의 마음에 상처를 주기 때문이다. 상처가 되는 말은 가장 친근해야 할 부부간에 가장 많다는 연구도 있다. 일반 관계에서 생기는 상처는 쉽게 아물어도, 가까운 사람일수록 상처가 깊다. 개에 물리면 병원에 가면 되지만 말에 베이면 반영구적 상처가 될 수 있다. 말도 흉기처럼 마음을 해친다. 어릴 적 살던 동네에 ‘욕쟁이 엄마’로 불리던 분이 계셨다. 아들 쌍둥이에, 연년생 아들을 둔… 7남매의 엄마였다. 어디 그 엄마뿐일까? 60년대의 척박한 경제 환경에서 자식을 키운 엄마들에게 거친 말은 흔히 있는 일이었다. 그럼에도 자식들을 향한 말투가 얼마나 험하면 ‘욕쟁이 엄마’로 불렸을까? 내가 어른이 되어서야 그 시절 엄마들의 말투가 이해되었다. 그때를 생각하면 연민부터 앞선다. 얼마나 사는 게 고단하고 힘들었으면 해서는 안 될 그 모진 말을 엄마가 자식들에게 했을까? 6.25 전쟁의 상흔 속에서 나남 없이 경제적 궁핍과 찌든 생활로 고통스럽기 짝이 없을 때의 일들이다. 집집에 자식들도 많아 생기는 대로 낳다 보니 예닐곱은 보통이고 10남매도 흔했다. 그 많은 자식들 배곯지 않게 먹이고 입히고 대가족의 수발을 다 들어야 하니 그 삶이 얼마나 고달프고 힘들었을까 짐작된다. 그 많은 빨래가지들 손목이 아프도록 비벼 빨아 입혀 보냈더니 한 나절도 안 돼 흙장난으로 후질러 돌아오질 않나. 썰매 타러 나간 형제가 얼음이 깨쳐 젖은 바지를 불에 말리다가 태워먹고 오질 않나. 자식은 자식대로 엄마의 애간장을 태우는데 어디 그뿐인가. 가장이란 분은 술주정이라는 이름 아래 아내에게 스트레스를 풀었다. 어쩌면 자식을 향한 모진 말투는 엄마의 화를 푸는 통로였는지 모른다. 일에 치어 머리는 터질 듯한 데, 도와주는 사람은 없고, 자식들은 일만 저질러 엄마를 울리니... 쏟아낼 입마저 없었으면 쌓이는 스트레스로 정신인들 온전했을까?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면 고달팠던 그 시대 여인들의 삶에 가슴이 짠해진다. 많이 좋아졌다지만, 지금도 자녀에게 상처 주는 말투가 사라진 건 아니다. “그래 커서 뭐가 될래?” “널 보면 내가 한심하다.” 곳곳에 찔리면 상처가 되는 말의 가시들이있다. 친구와 노천카페에 앉았는데, 중학생 또래들이 시끌벅적 지나간다. 놀라운 것은 이들의 대화가 하나같이 상스러운 비속어로 이어진다는 것이다. SNS상에 오르는 언어는 더 심각하다. 애도 어른도 욕지거리로 도배를 하고, 댓글 창에는 인격이란 아예 없는 쓰레기들로 난무한다. 낯 뜨거운 말은 방송에도 버젓이 나오고 있다. 예전엔 방송심의실이라는 곳에서 방송에 부적합한 말을 엄격히 걸렀는데 지금은 그러한 제방이 무너졌다. 말의 유희를 좇는 사투리, 외래어의 범람은 물론, 술자리에서나 주고받을 비속어, 천박한 말들이 출연자의 입에서 거침없이 쏟아지고, 여기에 자막까지 달아 흥행을 돋운다. ‘말이 타락하면 나라가 타락한다’는 말이 실감 나는 요즘이다. 그만큼 우리 사회의 언어 타락이 심각한 수준에 와 있다. 말은 어려서부터 부모가 가장 신경 써야 할 부분이다. 예부터 선비의 덕목으로 꼽는 것이 신언서판(身言書判)이다. 처신을 잘하고(身), 덕이 되는 말(言)을 앞세우라는 것이다. 어려서부터 덕스러운 언어의 습관을 들여야 함은 말이 곧 사람이고 말이 그 사람의 인격이기 때문이다. 친구들끼리 존댓말을 쓰게 하는 초등학교가 늘고 있다는 기사를 보았다. 어려서부터 말만 곱게 쓰도록 가르쳐도 갈수록 빨라지고 있는 언어폭력을 예방할 수 있는 좋은 처방이 될 것 같다. 친구 사이에 존댓말을 쓰고 아무개 님으로 부르는 초등학교도 있단다. 100년 전 소파 방정환 선생이 어린이날을 맞아 어린이끼리라도 존댓말을 쓰자고 제안했다. 지금도 학창 시절 교단에서 존댓말을 쓰시던 선생님을 존경했던 기억이 난다. 언어예절이 살아야 교육도 사회도 정화된다. 언어는 우리의 일상을 휘감고 있는 산의 숲과 같다. 나무 한 그루 한 그루가 모여 숲을 이루듯, 한 나무가 해충으로 병들면 온 숲이 망가지기 쉽다. 겸손하고 선한 말, 배려하고 정제된 말이 향기 나는 언어의 숲이다. 처세의 으뜸은 사람의 말에서 시작된다. 처음에는 내가 습관을 찾아다니지만 뒤에는 습관이 나를 부린다. 좋은 언어 습관이 자연스럽게 몸에 밸 때, 비로소 웅변은 은(銀)이고 침묵은 금(金)이 된다. 사람 간에 궁합이 있다면 말에도 궁합이 있다. 내가 아무리 언변이 뛰어나고 모두가 내 말에 귀를 종끗하는 것 같지만, 저들 중엔 나와 궁합이 틀린 사람이 있다. 말을 할 때마다 이를 깨닫는다면 말이 길어지지 않고, 말수를 줄이게 된다. 언어는 정신의 지문(指紋)이다. 생각과 정신, 내 영혼까지 담아내니까. 말에는 정령(精靈)이 있다고 한다. 그래서 말이 씨가 되는 법이다. 험한 세상을 사는 데는 위로와 격려, 보듬는 말이 최고의 표현이자 선물이다. 나는 오늘 누구를 칭찬하고 위로하는 말을 건넸을까. 내 말버릇은 어떠한지, 돌아보면 어떨까. (*) -소설가/ daumcafe 이관순의 손편지
    • 오피니언
    • 기고
    2023-06-08
  • 목적이 분명한 삶
    한때 좋은 영화를 보면 내가 영화 속 주인공이 되고 싶을 때가 있었죠. 소설을 읽고도 소설 속 주인공이 돼 상념에 잠기기도 합니다. 상상의 나래만으로 가슴 뛰고 얼굴 붉어지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언젠가부터 나이 듦에 대한 조바심이 들면서 냉정한 현실주의자가 되어 버렸지요. 그 많던 동경과 상상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연말이면 이렇다 할 내세울 것이 없는 날들을 돌아보며 애먼 나이를 탓합니다. ‘절반의 성공’이란 대부분 구차한 변명입니다. 절반의 실패란 없으니까요. 사안 따라 대박도 터뜨리고 피박도 썼겠지만, 대부분 아슬아슬한 성공, 아슬아슬한 실패를 오갔습니다. 중요한 것은 모든 정보가 아슬아슬한 성공과 실패에 들어 있다는 것이죠. 그게 바로 나입니다. 아슬아슬한 패배, 아슬아슬한 성공은 아슬아슬 이란 같은 씨앗을 품고 있어서 언제나 뒤바뀔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뿐인 인생, 당연히 성공해야지요. 성공이란 무엇일까? 재력과 권력, 명예를 말하기도 하지만, 보다 확실한 것은 후회 없이 사는 것입니다. 후회가 남으면 이미 성공한 삶이 아닙니다. 그러려면 결국 나 자신과의 싸움에서 이겨야 합니다. 자신을 괴롭혀 온 불안, 강박, 울분에 눌린 채 비분강개하고 좌절하고 현실 도피에 급급하다 보면, 진즉 나 자신과의 싸움은 뒤로 미뤄집니다. 그리고 엉뚱한 곳에다 기력을 소진하기 쉽지요. 삶은 헌신과 노력이 조합할 때 가장 빛납니다. 프리츠 크라이슬러는 20세기가 낳은 바이올리니스트로 꼽히는 연주가입니다. 그는 불행히도 군에서 부상을 입고 전역하면서 상당기간을 방황하며 살았습니다. 방황 끝에 자각한 것이 어린 시절 배워 둔 바이올린을 잡는 것이었어요. 그로부터 온 정성을 쏟아부어 세계적인 연주가로 명성을 얻습니다. 어느 날 젊은 음악도가 그의 연주에 감동하여 찾아왔어요. “제가 선생님 같이 연주할 수 있다면 막대한 유산도 포기하겠어요.” 그러자 이렇게 말해 줍니다. “오늘의 연주는 지금까지 나 자신을 바친 결과라네. 하지만 젊은이, 나는 자네가 음악을 위해 자신을 바칠 때 무엇을 위해 바치고자 하는지를 잊지 않길 바라네.” 한 아이가 평소 좋아하는 만화가와 만났어요. 만화가가 즉석에서 그림을 그려 사인까지 해주자 흥분합니다. “이 멋진 그림을 어떻게 빨리 그려요?” 화가가 무릎을 접고 아이와 눈을 맞추며 말해요. “얘야. 이 그림을 그릴 수 있기까지 30년이 걸렸단다”. 여름이면 건물 벽체를 덮은 담쟁이와 만납니다. 벽면을 녹색 잎으로 빼곡히 채우기까지 담쟁이의 처절한 떨림의 사투가 있습니다. 지지대를 오르는 나팔꽃, 벽을 타는 담쟁이를 현미경으로 관찰하면 놀라운 현상을 발견합니다. 혼신을 다해 암반을 오르는 등벽가처럼 다음 발판을 겨냥하고 무수히 몸을 떨다가 한 순간 벽을 잡고, 다시 호흡을 조정해 몸을 떨다 발판을 잡아요. 그 과정을 생각하면 담쟁이가 벽체를 덮기까지 얼마나 많은 떨림과 사력을 다했을까. 들판에 피는 들꽃도 한 송이 꽃을 피우려고 비바람을 견디며 필사적으로 뿌리를 뻗습니다. 하물며 사람이 꽃피운 노력의 결과는 단순히 얻을 수 있는 게 아니지요. 자신을 바치는 헌신과 피나는 노력의 결정입니다. 선물이 사람의 마음을 기쁘게 함은 물건의 값어치가 아닙니다. 나를 존중해 준다는 느낌이 좋아서죠. 값으로 치면 뇌물이 클 테지만 선물의 기쁨을 앞서지 못합니다. 숲에서 새가 노래하며 살 듯, 사람은 기쁨이 있어야 삽니다. 성공한 삶을 원한다면 사람들을 기쁘게 하는데 목표를 두어야 합니다. 이타적인 보람 말입니다. 사람들의 욕망은 거개가 비슷해요. 돈, 명예, 권력을 선망하고 남들에게 존중받기를 원하지요. 그러나 사람들이 지닌 소망은 각기 다릅니다. 가치와 철학이 다르기 때문이죠. 문제는 끝 모를 욕망입니다. 설령 누가 욕망을 충족시켜 준다 해도 기쁨은 잠시뿐. 다시 더 많은 걸 원하죠. 성에 차지 않으면 원망이 되고 원망은 어디로 튈지 모릅니다. 그러나 소망은 달라요. 소망이란 나만이 원하는 간절한 바람입니다. 그래서 소망이 이뤄지면 이때의 기쁨과 감사는 오래오래 이어집니다. 세상에는 욕망으로 가득 찬 사람들이 훨씬 많아요. 내 소망이 무언지 잘 모르는 사람도 많습니다. 소망과 욕망을 구별하기란 그리 어렵지 않아요. 평소 간절히 원했지만 내가 곧 죽는다고 생각할 때, 연기처럼 사라지면 부질없는 욕망입니다. 부귀 명예 영화 같은 것. 죽을 사람에게는 천박한 것입니다. 하지만 소망은 끝까지 남아요. 죽음이 가까이 다가오면 올수록 더욱 간절함이 커지는 것이 소망입니다. ‘내일 지구가 멸망해도 사과나무를 심겠다’는 그런 사람처럼…. 누가 말했어요. “돈이 없는 사람은 가난하다. 그러나 소망이 없는 사람은 더 가난하다”라고. 내가 목표하는 삶은 지금 어디를 향하여 떨고 있습니까? -소설가 daumcafe 이관순의 손편지
    • 오피니언
    • 기고
    2023-06-04
  •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괴로워하지 말지어다 슬픔의 날을 참고 견디면 기쁨의 날이 찾아오리니 마음은 미래에 사는 것 현실은 언제나 괴로운 것 모든 것이 순간이고 모든 것은 지나가나니 지나간 것은 모두가 그리워진다. -푸시킨 지금도 시골에 가면 그 흔적이 남아 있는 다방들이 있습니다. 멀지도 않은 한 시절, 우리 삶의 공간을 아름답게 장식해 주었던 ‘이발소 그림’들이 그 주인공입니다. 이발소 그림이란 목가적인 풍경을 그린 복사 그림, 서정성 깊은 시, 명문장들을 액자에 넣어 이발소, 다방, 미장원, 목욕탕 등 대중업소를 꾸미는 장식품으로 걸려있던 것들을 통칭하는 말이죠. 중학교 때 처음 익힌 시가 푸시킨의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입니다. 동네 이발소에서였지요. 르누아르의 ‘피아노 치는 소녀’ 밀레의 ‘만종’ ‘가화만사성’ 같은 그림과 글귀를 그때 접했습니다. 이발소는 내게 작은 도서관이고 미술관이었지요. 푸시킨의 이 시는 지금 읽어도 마음에 와닿아요. 담담함과 관조적인 태도로 인생의 섭리를 통찰하고, 서정적인 시어와 낭만적인 비유로 아련하며 애잔한 분위기를 형성한 시가 마음에 평안을 줍니다. 시를 암송하면서도 출처를 잘 몰랐던 것은 소련이란 단어조차 금기시했던 냉전시대였기 때문입니다. 뒤늦게 푸시킨이 러시아 국민시인이며 20대에 7년을 유배지에서 보낼 때 쓴 시란 것도 알게 되었지요. 푸시킨은 이웃에 살던 16세 소녀에게 이 시를 써주었어요. 인생의 많은 아픔을 막 피어나는 꽃송이에게 기품 있는 잠언으로 남겨준 것입니다. 장차 몰아칠 풍우를 모르고 즐겁기만 한 소녀에게 시인은 연민을 느꼈을 지도 모릅니다. 푸시킨의 이 시는 ‘쨍하고 해 뜰 날’을 바라는 단순한 희망가가 아닙니다. 희망을 흩날리지만 전체적인 분위기는 쓸쓸함에 무게를 느끼기 때문이죠. ‘현재는 괴로운 법’이라는 안타까움을 긍정부터 하고 있으니까요. 늘 삶은 우리를 배반했다는 슬픔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합니다. 오늘을 참고 견디어 맞은 내일이 오늘이 되는 순간 늘 인생은 괴로움이었지요. 다만 모든 건 ‘다 지나간다’는 세월의 치유력에 기대는 정도입니다. 그럼에도 지나간 모든 것을 받아들임에는 그것이 삶이고 그럴수록 삶은 포기할 수 없는 것이니까요. 푸시킨도 우리가 겪는 코로나 시대처럼 콜레라 시대란 엄혹한 시기를 살았습니다. 치사율 50%의 역병이 모스크바를 점령할 때, 시인은 약혼녀를 그곳에 두고 몇 달을 멀리 떨어진 곳에서 격리된 삶을 살아야 했지요. 죽음이 휩쓸고 지날 때도 시를 썼습니다. ‘언젠가 내게도 기쁨이 있으리라’며.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는 한국 현대사의 증언입니다. 해방기가 그랬고, 경제개발기가 그랬고 모두 희망의 솟대였지요. 달동네, 쪽방, 구로공단, 콩나물 버스, 고시생 책상 모퉁이에도 출처 모를 희망가가 붙었습니다. 세월이 좋아질 때도 그 시절 나름의 운율을 입혔고 시대 따라 우리 삶의 희망과 슬픔을 녹여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맞은 오늘의 고달픔은 과거 경험한 역경과는 또 다른 무늬와 결입니다. 예전엔 ‘미래를 찾는다’고 괴로워했는데, 요즘 사람들은 ‘미래가 없다’며 아파합니다. 전엔 앞만 보느라 정신이 없었는데, 지금은 지난 것들과 싸우느라 내일을 준비할 여유가 없어 방황합니다. 오늘 다시 이 시를 소환해 본 것은 현실이 차단해 버린 희망의 불씨를 되살리고, 낙심한 서로를 위로 격려하기 위함입니다. 그렇게 우리는 치유 없는 시대를 살며, 치유해야 하는 아픔을 앓고 있습니다. 슬프고 허망한 것은 우리에게 위로를 주었던 푸시킨이 38세 이른 나이에 죽음을 자초했다는 것입니다. 장교 출신 단테스와 법으로 금지한 결투를 신청한 것이 죽음으로 자신을 내몰았기 때문이지요. 결투 신청은 푸시킨이지만, 원인은 러시아 사교계의 꽃인 시인의 아내를 사랑한 단테스가 제공해 벌어진 일입니다. 총에 맞은 푸시킨이 집으로 옮겨져 혼수상태를 이어갑니다. 그 안타까운 시간에, 자택 부근에는 2만 명의 군중이 모여들었습니다. 러시아에서 푸시킨의 위상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지요.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를 설파한 푸시킨의 마지막 상념은 무엇일까? 또, 이 시를 읽는 지금의 내 생각은…목적이 분명한 삶 -소설가 daumcafe 이관순의 손편지
    • 오피니언
    • 기고
    2023-06-01
  • 아버지가 미안하다, 널 몰랐구나
    코로나 사태로 중단되기 전, 전국 청소년 글짓기 심사를 끝내며 갖는 유감이다. 유한양행을 설립한 유일한 박사의 정신을 기려 유한재단이 해마다 5월이면 전국 초?중?고생을 대상으로 백일장을 개최했다. 28년째를 맞았으니 연륜이나 규모면에서 대표적인 전국 규모의 백일장이다. 그해도 천여 명의 청소년이 아카시아 향이 진동하는 유한공고 교정에 모여 글제에 따라 글 향기를 뽐냈다. 공유하고 싶은 것은 ‘내가 아버지라면’ 이란 글제를 놓고 중학생들이 보여준 아버지에 대한 인식이다. 글제를 택할 때 10대의 자녀들이 평소 아버지란 존재에 대해 어떤 생각을 할까? ‘아버지 상(像)’을 유추해 보자는 의도가 있었다. 글제를 내면서 ‘혹시나’ 했는데, 적지 않은 학생에게서 아버지의 이미지가 역시나인 것을 확인하고 말았다. 학생들은 아버지가 칭찬에 인색하다는데 불만이 컸다. “잘했네.” “수고했어.” 정감 없는 아버지의 말투에 아이들도 묻는 말에나 답하는 단답식 대화가 늘어남을 알 수 있었다. 아버지의 칭찬이 있을 때도 그 뒤 따라오는 말에 신경이 쓰인다는 아이들도 많았다. “그래 그건 잘했어. 그런데 넌…” 말 나온 김에 한다면서 한숨까지 섞인 조언을 듣노라면 마음부터 움츠러든다고 했다. 아이들은 순수한 칭찬에 목말라했다. 감정의 표현이 없다는 것도 그중 하나였다. 무뚝뚝한 아버지, 어려운 아버지로 생각하는 학생이 의외로 많았다. 그러면서 아이들은 원했다. 내 이름을 자주 불러주는 아빠, 사랑한다고 말해주는 그러한 아빠를 기다린다. “이리 와 봐.” 식의 부름보다 격려의 부름이, 사랑의 부름이었으면 한다. “넌 왜 엄마를 통해서만 말하지?” 아버지의 불만도 이해되지만 실은 자초한 면이 없지 않다. 평소 대화가 부족했다는 방증이다. 아이들은 생각만큼 철부지가 아니었다. 속에 넣고 말을 안 할 뿐, 아버지가 가족을 위해 희생한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아는데도 다가서기가 쉽지 않을 뿐이다. 역지사지로 사고의 전환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했다. 자녀의 입장에서 생각하는 그런 자세가 필요하다는 것을 느꼈다. 어버이날, 친구들과 나눈 에피소드이다. 어버이날이라고 서울에서 대학을 다니던 친구가 시골에 계시는 아버지에게 전화를 했다. 전화를 받는 아버지의 첫마디는 늘 이러셨다. “그래 나다. 기다려 엄마 바꿔줄게” 아들이 서둘러 “아버지 그게 아니고요.”라고 말하면 이렇게 말씀하신다. “왜? 벌써 돈 떨어졌냐?” 그래도 아들이 용기를 내 “아버지 사랑합니다”라고 말할 때 아버지의 대답은 더 파격이셨다. “뚱딴지같은 녀석! 여보 전화받아.” 말투가 그러셨다. 우리는 옛날 아버지들의 모습을 떠올리며 파안대소했다. 마음은 아니면서 말씀은 참 멋없게 하셨다고. 이 또한 유교문화의 영향 탓이리라. 따지고 보면 그러한 아버지 밑에서 자라나 자식을 낳아 키운 아들이 지금의 아빠들이다. 대대로 물려온 언어의 관습이 우리 세대를 거치면서 얼마나 달라졌을까? 아직도 자녀들과 단답식 대화를 나누는 아빠들이 많은 모양이다. 대화도 훈련이다. 훈련되지 않으면 쉽게 끊기고 단절되기 십상이다. 대화 부족이나 불만은 그것으로 끝나지 않고 자녀들의 정서적 불만으로 이어진다. 커가면서 멀어지는 아버지, 외톨이가 되는 아버지는 현대사회가 만든 자화상일지 모른다. 피곤에 절어 밤늦게 퇴근하고 새벽처럼 나가는 아버지. 가뜩이나 어려워진 자영업자 아버지. 그 침통함이 무의식 중에 내비친 지도 모르겠다. 아버지의 노고에 감사하면서도 이미지 탓에 접근이 쉽지 않다는 아들도 있었다. 아이들은 크면서 아버지가 힘없는 존재라는 것을 안다. 자녀와의 대화를 엄마가 독점할 때, 혼자 떨어져 담배를 피우는 아버지 모습이 쓸쓸해 보였다는 딸도 있었다. “나 요즘 힘들다”라고 엄마에게 말할 때는 아버지의 어깨를 짓누르는 책임감도 느껴졌단다. 세상이 바뀐 줄 알았는데 예나 지금이나 아버지는 외로운 존재인가. 사람은 태어난 후 ‘아빠‘ 로 부르며 성장기를 보내다 때가 되면 '아버지'로 바꿔 부르기 시작한다. 멀리 이스라엘에서도 같은 호칭을 사용한다고 해 놀랐다. 친구 목사님이 전하는 말이다. 이스라엘에 갔는데, 뒤에서 누가 아빠하고 부르더란다. 깜짝 놀라 돌아보니 현지의 아이가 제 아빠를 부르는 소리였다. 같은 뜻의 어휘지만 '아빠'와 '아버지'는 의미가 사뭇 다르다. 아빠는 아버지를 뜻하는 아람어고, 아버지는 역어인 헬라어. 아빠로 불리는 아버지는 자식에게 무한책임을 지지만, 아버지로 부르는 아들은 부모를 섬기는 모습을 뜻한다. 그런 역할 구분이 어휘에 담겼다. 자녀들에 대해 무한책임으로 모든 헌신을 다해 아이들을 키우지만, 어느 날이면 아버지의 자리로 옮겨 앉아야 한다. 그 과정이 매끄럽고 아름다우려면 아버지가 자녀들과의 대화에 새로운 눈을 뜨고 다가가야 한다. “아버지가 미안하다. 그때 네 맘을 헤아리지 못해서.” -소설가 daumcafe 이관순의 손편지
    • 오피니언
    • 기고
    2023-05-30
  • 사랑보다 측은지심
    동물의 세계에도 먹이보다 더 집중하는 것이 새끼를 낳아 번식하는 일이다. 하물며 사람은 말해 무엇하리. 인류가 자식을 낳고 기르는 생육의 토대는 우선 남녀 사이의 결합에 있다. 그런 둘 사이를 대개 ‘정(情)’이라는 글자로 엮어놓는다. ‘정’이라는 감정을 말랑말랑하게 잘 포장해 놓은 단어가 ‘사랑’ 일 것이다. 우리는 사랑을 나누는 사람을 ‘연인’이나 ‘애인’이란 말로 즐겨 쓰지만, 옛사람들은 정인(情人), 정려(情侶)라는 표현을 선호했다. 우리는 나남 없이 정을 나누면서 아이를 낳아 기른다. 그래서 부부가 되고 평생의 반려자로 남는다. 검은 머리가 파뿌리가 되도록 평생을 맹세한 데는 분명 사랑이란 정분이 깔렸을 텐데, 사랑도 세월 따라 변하는 것일까? 이따금 사랑의 정체에 대해 궁금해질 때가 있다. 뜨겁던 부부애가 왜 노인이 되면 시들해지는 걸까. 신혼기의 살뜰한 감정을 끝까지 이어가는 사람을 경험하지 못했다. 딱히 정이 시들해진 것도 아니고 관계의 변화가 생긴 것도 아닌데, 무덤덤해지고 주고받는 말수가 줄어든다. 때로는 말하기조차 귀찮아진다. 변하지 않은 것이라면 오늘도 한 이불을 덮고 잔다는 것이다. 자연 다큐멘터리를 통해 동물의 세계를 보았다. 수컷들은 암컷을 차지하기 위해 처절하게 전투를 치르고 최후의 승자만이 암컷을 차지한다. 전리품으로 주어진 짧은 시간에 운우지정을 나누고, 그렇게 해서 새끼를 얻는다. 하지만 그들의 관계는 거기까지이다. 그러고 나면 뿔뿔이 자기 길을 찾아간다. 뒤도 돌아보지 않고 붙잡거나 연민도 없이 헤어진다. 애당초 사랑 같은 건 그들 사이에 없었던 것처럼. 있다면 충만한 사명이 있을 뿐이다. 그 사명을 포장한 것이 사랑이라면 사랑은 신기루와 같은 것이다. 인생이 한바탕 꿈이라면 사랑은 스치는 한 줄기 바람이다. 신록의 정기가 온 산을 뒤덮던 날, 학창 시절 서클에서 만난 묵은 친구들과 청계산으로 산행을 갔다. 두 달에 한 번 모이는 산행 모임이다. 함께 한 일곱 친구 중에 셋이 여성이었다. 산에서 내려와 식당의 두 테이블을 차지하고 흔한 말로 뒤풀이를 했다. 큰일을 했다고 하산주가 돌았다. 남자 테이블에서는 저마다 철 지난 월남전의 무용담을 화제로 삼고, 여자 테이블에선 철 지난 남자들의 쓸모없음에 대해 말하는 것 같았다. 나의 귀가 여자 테이블로 열린 것은 그들의 이야기가 우리들 얘기로 들려서였다. “서방님은 아직도 집에만 계셔?” “어디 가겠어. 처음엔 껌딱지처럼 집에만 있다고 면박도 주고 미워도 했는데. 이젠 측은해. 기가 빠져선지 잔소리도 줄고, 뭔가 돕겠다고 주방에서 어정거리는 것도 측은해 보이더라.” “그래도 그 집 어른은 양반이네. 우리 집 박사님은 지금도 손가락 하나 까딱 하는 법이 없어.” “아직도? 세상에!” 두 여자가 동시에 한 여자를 바라보았다 너 참 힘들겠다는 표정으로. 그런 봉건시대 남자가 지금도 있느냐고 타박하는 눈빛을 찔끔거렸다. “지금도 밥상 차려줘야 먹고, 과일 깎아 대령해야 들고, 라면 하나도 못 끓여 먹는단다. 할 줄 아는 게 없어. 이젠 포기하고 살아.” 남편 걱정 때문에 외출도 자유롭지 못하다는 여자다. 밖에서 친구들을 만나다가도 시계를 보다 벌떡 일어나는 여자는 그 친구뿐이었다. 학교 다닐 때, 누구 하면 다들 고개를 흔들 만큼 까다롭고 자아가 강했던 여자가 어찌 저리도 변했을까. “지금도 하루 삼시세끼 따뜻한 밥을 지어 봉양하니?” “어쩌겠니. 그래야 좋아하는 걸. 그것도 돌솥밥. 맛있다고 돌솥밥만 찾으니까.” “그러고도 사는 네가 존경스럽다.” “불쌍해서 산다. 어떤 땐 얄밉다가도 나 없으면 하루도 못 살 위인이지 생각하면 안 됐어. 다 떠나서 불쌍하단 생각이 들어 이젠.” 그 말을 용케도 들었는지 건너 테이블의 남자 친구가 여자들 대화에 끼어들었다. “불쌍한 건 할머니 당신들도 마찬가질세. 어느 날 소파에 기대어 입 딱 벌리고 코를 고는 마누라 모습 보니까 슬프더라. 그래서 내가 지고 산다.” 결혼한 지 40년이 다 넘은 친구들이다. 한 친구는 불쌍해서 살고, 또 한 친구는 측은해서 살고…. 그날 일곱 친구 모두는 사랑보다 ‘측은지심’으로 산다는 데 동의했다. 그러면서 끝까지 나를 위해 기도하고 울어주고 기억해 줄 사람은 그 사람뿐임을 이심전심으로 깨닫는다. 어떤 언어에 측은지심 만한 웅숭 깊은 어휘가 있을까. "물고기들은 샘이 마르면 서로를 침으로 적셔준다"라고 했다. 노년의 부부는 사랑이 아니라, 서로를 연민하면서 측은히 여기면서 산다. 젊어서 한가닥 안 한 남자 없고, 모두 콧대 높은 여자들이었는데... 어느새 세월이 우리들의 표정까지 이렇게 두리뭉실 무색무취, 무정한 사람으로 바꾸어 놓았다. -소설가/daum cafe 이관순의손편지
    • 오피니언
    • 기고
    2023-05-25
  • 멸치의 꿈
    멸치가 고등어에게 묻습니다. “고등어야, 어떻게 하면 너처럼 반짝반짝 등에서 윤이 나고, 건강한 몸을 가질 수 있니?” 그러자 고등어가 “비결은 딱하나! 무조건 잘 먹는 거야.” 고등어와 멸치가 나오는 신문광고를 보고 피식 웃던 여자가 돌연 울음을 삼킵니다. 마흔 살 젊음이 할 말을 멸치가 대신하니 설움에 울컥한 것입니다. 일상이 비교적 잘 흘러간다고 생각했는데 어느 날 덜컥 암 환자가 된 뒤 생긴 감정 변화입니다. 일생을 싱글로 살려면 몸이 건강해야 한다고 요가도 하고 피트니스도 빼먹지 않고 다녔어요. 노후를 생각해 꼼꼼히 내일을 준비했고, 규모 있는 지출로 꼬박꼬박 적금도 부었습니다. 요즘 그 답지 않게 매우 불성실한 삶을 살고 있습니다. 시도 때도 없이 찾아오는 통증에 대한 두려움 때문입니다. 짜 놓은 스케줄에 맞춰 사람을 만나야 하는 환경이 너무 싫고 겁이 나서. 스스로 ‘운명’이란 마지막 카드를 꺼내든 후로 좀은 마음이 편해졌습니다. 아침에 눈 뜨면 다 잊고 오늘 하루가 전부인양 하루살이처럼 살아요. 더이상 연명 따윈 빌지 않을 테니 잠자는 동안 고통 없이 떠났으면, 기도할 뿐입니다. 먹을 만할 때 잘 먹어두려고 맛집 검색하고 찾아다니는데 시간을 씁니다. 절약하자고 먹고 싶은 것 미뤄둔 게 많고, 직장 다닐 때는 시간 없다는 핑계를 대며 깐깐하게 사람들과 어울렸거든요. 병이 들고는 먹지 못했던 것들 일부러 찾아다닙니다. 식당 갈 때는 옷을 가급적 우아하게 차려입고 가족이나 가까운 친구를 불러내요. 오늘은 엄마와 별 넷짜리 레스토랑에서 스테이크를 먹다 뜨건 눈물이 목을 넘어갔습니다. 슬그머니 화장실로 가 한참을 멍하게 앉았어요. “미루고 참다가 내 짧은 인생 다 써버렸네.” 참 멍청하게 살았다는 회한이 고개를 쳐듭니다. 세계 명소를 찾아 여행이나 실컷 다닐 걸. “야, 그렇다고 그런 생각을 맛집 화장실에서 하니?” 자신에게 모질게 쏘아붙입니다. 통증도 쉴 때가 있어요. 그 틈을 이용해 요즘엔 죽음에 대한 책을 많이 읽어요. 그러다보면 예전에 생각이 없었던 것들을 살피게 됩니다. 관심조차 없던 일들이 지금은 맨 앞 순위에 나와 있어요. 숨이 멎으면 그다음은 어떻게 되는 거지? 내 영혼은 어떤 모습일까? 이런 것들이 궁금해집니다. 암세포가 야금야금 생명을 갉아먹고 있다는 생각이 들 때는 얼른 예전에 재미있던 일을 떠올려요. 오늘은 사두고 묵혀놓은 ‘꾸뻬 씨의 행복여행’이란 책을 폈습니다. 그는 정신과 의사였죠. 정신과 의사가 가장 많다는 프랑스 파리 중심가에 있는 진료실은 늘 환자로 넘쳐났습니다. 많은 걸 갖고 있으면서도 불행하다고 여기는 사람들 틈에서 의사인 자신마저 행복하지 않다는 결론에 이르죠. 그리고 진정한 행복을 찾아 세계 곳곳을 여행합니다. 그러면서 체득한 행복의 조건을 정리했습니다. 그중 눈길을 잡은 것은 중국 노승에게서 터득한 행복의 비밀입니다. 그 비밀은 “행복은 미래의 목표가 아니라 현재의 선택” 이란 것. 알고도 선택하지 못한 것들입니다. 대부분의 사람은 행복을 목표로 삼고도 이 순간이 행복해야 한다는 사실을 잊고 삽니다. 조금만 달리 생각해 눈을 뜨면 보이는 게 행복인데. 새롭게 눈 뜬 행복에 눈물이 핑 돌았습니다. 우리가 초승달, 반달, 보름달로 부르는 저 달은 한 번도 이지러진 적이 없잖아? 매일이 둥근달인데 왜 정월 대보름만 기다려 소원을 빌었을까. 늘 밝고 둥글게 살 수 있었는데 왜 행복을 착각하며 살았을까? 행복은 ‘바로 지금 여기에’ 있다는 걸 병이 든 후 실감합니다. 평범하게 여겼던 순간이 얼마나 값진 건지, 소소한 성취를 이뤄가는 보통사람의 삶이 얼마나 축복인지 때늦은 후회를 합니다. 아침에 읽은 '연금술'이라는 시 구절이 불쑥 고개를 내밀었습니다. '봄이 빗속에 노란 데이지 꽃을 들어 올리듯/ 나도 내 마음 들어 건배해요/ 고통만을 담고 있어도/ 내 마음은 예쁜 잔이 될 거예요' 지금 마음에는 고통만이 담겼어도 시인처럼 고통을 기쁨으로 바꾸자고 다짐합니다. 그렇게 머리로는 받아들이면서 그러한 삶의 연금술사가 되기란 얼마나 힘든지. 그래도 마음을 다잡습니다. 주어진 오늘, 더이상 오늘이란 일상을 기죽이지 말자. 지금이 축복임을 안 이상, 울지 말자! 눈물이 나도 소리는 내지 말자! 글 이관순 소설가 ks8120@hanmail.net
    • 오피니언
    • 기고
    2023-05-22
  • 누가 세상을 이끌어가나
    산업혁명은 영국이 일으켰어도 이를 개화시킨 곳은 미국입니다. 선수를 잡고도 주도권을 내준 셈이죠. 찰스 디킨스의 소설 ‘크리스마스 캐럴’이 이해력을 높여줍니다. 탐욕스럽고 냉혈한인 스크루지는 영국 상인의 한 단면이기도 해요.이들은 돈을 벌면 호화스러운 별장이나 저택을 짓고 고귀하게 살려고 합니다. 이러한 풍토에서는 대기업이 나올 수 없습니다. 캘빈의 종교개혁은 이러한 인식을 깨뜨렸어요. 부지런히 돈 버는 것도 편안하게 사는 방법임을 알린 겁니다. 가치의 변화를 불러일으켰지만, 산업혁명의 결과물인 대기업은 미국에서 먼저 등장합니다. 증기기관차를 만든 영국 회사는 중기업이었어요. 종업원 수가 이백명 정도였으니까. 미국의 비즈니스는 청교도라는 특별한 인간에 의해 시작됩니다. 바탕에 종교를 깔고 있어요. 이런 토양에서 미국의 철도, 자동차, 석유, 철강 등이 산업화되고 대기업이 탄생합니다. 대륙횡단철도 건설이 그 출발점에 있어요. 방대한 사업규모가 자본을 키우고 연관 사업을 만들면서 종업원 천 명이란 상상 못 할 기업조직이 만들어집니다. 당시는 군대에나 있을 법한 큰 조직입니다. 초기에 적자가 컸던 것은 큰 조직을 통제, 관리할 능력이 없어서였죠.이 같은 역경을 경험하면서 관리, 회계 등 전문 분야, 전문 인력이 양성되고, 새로운 경영기법이 만들어져 마침내 철도 정상화가 이뤄집니다. 미국의 기업풍토가 영국과 비교됨은 남의 것을 빼앗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한 청교도 정신이 대기업의 등장을 거부감 없이 용인했어요. 이는 곧 대량생산, 대량 판매라는 새 경제 질서를 만드는 배경이 됩니다. 철도왕 벤더 빌트는 선박으로 번 돈을 몽땅 철도에 부어 철도 산업화에 시너지를 높였지요. 록펠러도 수백 개에 이르는 석유기업을 통제하고자 경쟁사를 사들여 대규모 트러스트인 스탠더드석유회사를 만듭니다. GM의 자동차, 철강 왕 카네기 등의 등장이 잇따랐습니다. 여기에 기업인의 천부적 기질이 더해져 그들만의 기업문화를 만들고 대기업의 발전을 통해 대량소비사회를 이끌어 냅니다. 대량 소비사회와 대량 생산체제가 밀고 당기면서 세계최강의 미국이 만들어집니다. 1920년대 말에 이미 인구 90%가 전기를 쓰고, 4분의 3이 자동차를 소유했어요. 미국 기업문화의 요체는 네 가지입니다. ‘정직하게 번다. 낭비하지 않는다, 끝까지 번다. 죽으면 기부한다.’ 그 중심에 캘빈이즘, 청교도정신이 흐릅니다. 록펠러센터, 카네기재단, 벤더빌트 대학 등의 설립은 부(富)를 대물림하지 않고 사회로 환원한 사례입니다. 스탠다드석유회사 재무담당 세브란스는 록펠러의 친구입니다. 어느 날, 선교사를 통해 병원이 없어 사람들이 죽어나간다는 한국의 실상을 듣고병원 건립에 거금 1만 달러를 내놓았어요. 그리고 4대에 걸쳐 지속적인 투자로 오늘의 세브란스병원이 만들어졌습니다. 일본의 자각도 빨랐어요. 근대혁명으로 청년층까지 새로운 인식을 깨친 데는, 중심에 서양의 지식을 습득한 일본인들이 있습니다. 미국 기업의 형태에 조국이 접목된 일본식 재벌을 만듭니다. 사무라이들도 애국심을 앞세워 사업가로 변신하는 기회를 갖지요. 우리의 자각은 갑오혁명으로 시작됩니다. 좋든 싫든 일본 기업의 영향을 받으면서요. 한국기업의 애국적 태도는 이러한 환경에서 배울 수밖에요. 이에 더해 미국의 기업 형태와 기업인의 자세를 접하게 됩니다. 우리는 짧은 기간에 세계 톱클래스 기업을 만들었습니다. 해방 이후 우후죽순으로 생성된 기업이나, 훌륭한 지도자를 만난 것도 행운입니다. 20세기 신흥 독립국 중 대부분 지도자들은 정부가 일을 직접 하려다가 무능과 부패, 독재, 파탄을 불렀지요. 한국엔 개인의 자유를 중시한 이승만, 경제개발을 기치로 한 박정희의 역할이 있었습니다. 계획은 나라가 세워도 일만은 기업인에 맡겼어요. 서구의 시민혁명이 이끈 일을 각성한 몇 사람이 주도한 셈입니다. 25년 전 “반도체 다음엔 의료산업이 21세기 꽃이 될 것”이라고 예측한 이건희 회장의 육성이 공개됐습니다. 그의 통찰과 혜안이 돋보여요. 세상은 대기업의 싸움터입니다. 여기서의 승자가 세계를 지배합니다. 진정한 창의와 혁신은 어디에서 나오나? 국가의 부(富)는 어디에서 창출되나? 맥박이 쿵쿵 뛰어야 할 기업 현장의 숨결이 약하게 들림에서 왜 두려움이 느껴지는 걸까? 무엇이 문제지? (글 이관순 소설가/ daumcafe/ leeletter)
    • 오피니언
    • 기고
    2023-05-18
  • 링컨이 간교한 정상배라면
    살면서 ‘저 사람은 정말 훌륭하다’라고 믿었다가 ‘그럴 줄 몰랐다’ ‘진짜 모를 건 사람 속’이라며 탄식하는 경우가 있다. 그것이 우리가 사는 세상이고 모습이다. 수많은 위인전의 인물들도 일생을 현미경으로 들여다보면 명과 암이 교차한다. 어쩌면 그들도 어둠을 입고 빛나는 별들이다. 우리가 아는 링컨은 노예를 해방하고 조각날 뻔한 미국을 한 국가로 건설한 위대한 대통령이다. 하지만 미국 남부 사람들은 링컨을 결코 우호적으로 보지 않는다. 치적에 대해서도 아직 많은 논쟁거리가 사라지지 않았다. 메릴랜드 로욜라 대학의 토마스 딜로렌조 교수가 펴낸 <링컨의 진실>은 링컨을 간교한 정상배이며, 남북전쟁은 불필요한 전쟁이었다고 주장해 링컨에 관한 토론을 촉발시켰다. 링컨의 진면목은 통념과 다르다는 주장을 폈다. 변호사로서 링컨은 철도 회사 같은 대기업을 변론했고, 흑인을 변호하기커녕 노예 소유주를 법정에서 대리했다. 대다수 북부 사람처럼 흑인을 혐오했다. 링컨은 북부와 서부 지지로 대통령에 당선된 보호무역주의자이다. 자유무역을 지지한 남부는 링컨이 남부경제를 파멸시킬 걸로 보았으니, 남북전쟁은 보호무역주의와 자유무역주의가 충돌한 비극인 셈이다. 링컨은 남부의 군사력을 얕잡아 보고 몇 달이면 남부 연합을 굴복시킬 것으로 생각했다. 하지만북부 버지니아의 전투에서 북군은 스톤윌 잭슨이 이끈 남군에 대패했다. 그러자 링컨은 느닷없이 노예 해방을 선언했다. 대외적으로 북부의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함이었다는 게 저자의 해석이다. 노예 해방선언은 북군에도 큰 동요를 일으켰다. 남군의 전술에 놀라고 흑인을 위해 전쟁을 한다는 데 환멸을 느껴 20만 명이 탈영하고, 9만 명이 징집을 피해 캐나다로 도주했다. 그러자 링컨은 유럽에서 건너온 부랑자 이민자들을 전선으로 보냈다. 북군은 남부지역을 무참하게 약탈했다. 애틀랜타 등 많은 도시와 숱한 농장, 교회가 불탔다. 남부에 대한 조직적 파괴는 북군 최고 지휘부의 지시에 의한 것이었다. 링컨은 전쟁을 반대하는 신문을 탄압하고, 인신보호 영장을 정지시키는 등 인권을 유린했다. 전쟁으로 무려 62만 명이 사망했는데, 특히 남부 청장년 남성은 넷 중 한 명이 사망했다. 이를 두고 링컨을 지지한 학자들은 이 엄청난 대가가 연방 수호를 위해 불가피함을 주장하지만, 저자는 이런 해석에 반대했다. 영국 등 유럽 국가가 노예 해방을 국가 보상으로 해결한 점을 근거로 삼았다. 그러므로 전쟁 불기피론을 주장하는 것은 터무니없다는 것이고, 링컨의 진짜 속셈은 보호무역으로 거둔 세금을 철도와 운하 회사를 지원해 정경 유착의 관제를 확립하는 것이라고 보았다. 특히 남북전쟁으로 남부에 씻을 수 없는 깊은 상처를 남겼으며, 링컨 때문에 중앙 정부가 필요 이상으로 비대해져 정치가 부패해졌다는 것이다. 링컨이 아니었으면 미국이 조각났을 것이란 주장에는 이렇게 반론했다. 남부는 단지 연방 탈퇴를 위협했을 뿐, 결국 협상으로 타결됐을 것이고 노예문제도 보상으로 해결됐을 것이라고. 또한 미국 · 스페인전쟁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며, 1차 세계대전에 미국이 개입해 독일이 완전히 패배하는 일도 없었을 것이고, 그랬으면 끔찍한 2차 세계대전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이다. 이를 비판하는 학자들은 그래도 링컨 때문에 오늘날 미합중국이라는 강대국이 탄생했다고 옹호한다. 미국 역사에서 링컨이 차지하는 역할을 간과하고 있다는 것이다. 사람에게 사랑과 존중을 받을 자격은 어디에 있나를 생각하게 하는 책이었다. 일생을 아프리카에서 질병으로 신음하는 사람을 위해 헌신 봉사한 슈바이처 박사도 현지에서는 비우호적인 평가를 받았다. 박사가 병원을 세워 구호활동을 폈던 가봉 랑바라네에 이런 글을 쓴 비석이 있다. “슈바이처 박사, 당신이 아프리카에 와서 노벨상도 탔지만 우리 아프리카 사람을 위해서 한 일이 뭐요?” 슈바이처 박사가 아프리카 사람들의 병을 고쳐준 것은 훌륭한 일이나, 이들이 스스로 살아갈 수 있게 의사와 간호사를 양성했어야 옳았는데, 그렇지 않아 결과적으로 자기 명성만 높였다는 얘기다. 하지만 우리는 잘 알고 있다. 매끈하게 정리된 앨범처럼, 깔끔하게 단장한 소셜미디어처럼 사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것을. 위대한 삶도 시시한 삶도 삶이란 내밀함 속에 교차하는 명과 암의 모습은 크게 다르지 않다. 어느 인생인들 반짝반짝 빛나기만 할까. 화려한 샹데리아를 가깝게 다가가 본 사람은 안다. 실망스럽게도 상처 투성이란 것을. 별이 빛나는 것은 상처와 허물을 어둠 속에 묻어주는 밤하늘이 있어서다. 약간의 자존감조차 붙잡기가 어려운 세상이 돼서일까? 칭찬보다는 비판에, 끌어내리는 것이 밀어주는 것보다 달콤한 시대를 사는 것만 같다. 서점에서 ‘당신은 옳고, 괜찮아. 할 수 있어!’라는 문구로 가득한 에세이 코너에 가면 마음은 더 착잡해진다. 다들 저 말을 간절히 듣고 싶어 하는구나…. 사람은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모두가 사랑과 존중의 대상이다. 그럼에도 이를 선뜻 내주지 못하고 타박하는 건 우리가 너무 이기적인 존재여서 일까. 사람은 다 어둠을 입고 빛나는 별일 뿐이다. 누구는 붙박이별로, 누구는 떠돌이별로, 또 누구는 꼬리별로... -소설가/daumcafe 이관순의손편지
    • 오피니언
    • 기고
    2023-05-15
비밀번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