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4-2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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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음악은 천상의 소리
    밤바람이 선득한 주말. 저녁을 먹고 장자호수공원으로 산책을 나섰습니다. 사람들이 오가는 사이로 청아한 색소폰 연주음이 들려옵니다. 발길이 절로 이끌려 간 곳엔 한 분이 ‘셀프 콘서트’를 열고 있네요. 잔디밭에 앉아 연주가 끝날 때마다 박수를 칩니다. 연주력이 준수한데다 가을밤의 정취까지 더해져 색소폰 선율에 젖는 아름다운 가을밤을 즐겼지요. 음악은 사랑을 전하는 신의 소리라고 합니다. 모든 사람을 하나로 묶어 주지요. 음악은 연주자의 기쁨도 되지만 만인의 즐거움도 됩니다. 연주가의 재능을 부럽게 바라본 영화가 있습니다. ‘어거스트 러쉬.’ ‘음악은 사랑을 낳고 사랑은 운명을 부른다.‘는 말이 잘 어울린 영화지요. 밴드 싱어이자 기타리스트인 루이스와 촉망 받는 첼리스트 라일라의 보석보다 반짝였던 단 하루 밤 이후, 남자는 그녀를 한 번도 잊은 적 없고, 여자는 얼굴도 모르는 낳은 아이에 대한 그리움을 놓은 적이 없지요. 이들의 믿음 하나는 “음악이 있는 한 우리는 다시 만날 거야”라는 것. 부모의 DNA를 받은 아이는 일찍부터 놀라운 음악적 재능을 보입니다. 시설에서 자란 11세의 소년은 부모만이 자신의 음악을 알아볼 수 있다는 믿음 하나로 뉴욕을 찾아갑니다. 모든 게 신비한 뉴욕. 도시가 만드는 수많은 소리들이 소년의 청각에 음계로 포착됩니다. 소년은 아이들을 모아 거리에서 노래를 시키는 워저드를 만나 어거스트란 이름으로 거리 연주자로 등장해 천부적인 실력을 보입니다. 하루는 소리에 끌려 교회 합창단 연습장에 들렸다가 처음 보는 오선지와 오르간 앞에서 작곡하고 연주하는 놀라운 재능을 발휘합니다. 이를 지켜본 목사님이 줄리어드에 음악천재로 추천합니다. 줄리어드에서 사모곡 라프소디를 작곡해 주위를 놀라게 한 어거스트. 마침내 뉴욕필하모니 콘서트에 특별 출연자로 초청됩니다. 줄리어드 출신의 유명 첼리스트(엄마)와 함께. 하지만, 연주회를 앞두고 위기가 오죠. 워저드가 연습장에 나타나 아버지라며 친권을 주장하고 데려갑니다. 학교는 간곡히 연주회만큼은 보내달라고 부탁을 하지만 거절당하죠. 금관악기가 아이의 영혼을 뽑는다는 그릇된 인식으로... 다시 광장 연주에 나서는 어거스트. 부근을 지나던 루이스가 소리에 홀려 찾아오고, 금세 호흡을 맞추더니 황홀한 기타 2중주를 펼칩니다. 어거스트가 오늘 밤 있을 센트럴파크 공연을 알려주지만, 루이스는 귀에 담지 않고 “용기를 잃지 말라”는 말만 주고 떠납니다. 그날 밤, 어거스트는 친구의 도움으로 탈주에 성공해 연주장으로 달려가고, 지방공연에 나서던 루이스는 뉴욕 중심가에서 아이 얼굴이 나온 배너광고를 보지요. 전율을 느낀 그도 차를 버리고 연주회장으로 내달립니다. 환호 속에 첼로 연주를 끝낸 라일라가 아이를 생각하며 공원을 빠져나올 때, 줄리어드 총장이 특별초청 지휘자를 소개합니다. 무대에 등장하는 어거스트. 환호하는 청중... 놀라운 자작곡이 그의 지휘 속에 연주를 시작합니다. 밖을 향하던 라일라가 연주음에 끌려 뒤돌아서고, 또 반대편에서는 황홀한 눈빛의 루이스가 나타납니다. 마침내 무대 앞에 이르러 12년 만에 마주 서는 남과 여... 환희의 포옹을 할 때 지휘하는 아이의 모습이 비칩니다. 세상에는 수많은 소리들로 가득 차 있지요. 귀를 기울인 만큼 들리기도 하고 지나치기도 합니다. 끊임없이 들리는 세상의 소리를 옮겨 작곡하고 연주하는 음악천재가 말하죠. “아이들이 동화를 믿듯 저는 음악을 믿어요. 부모님이 살아계신다면 제 음악을 꼭 듣게 될 거야요.” 어거스트의 간절한 믿음처럼 나는 어떤 믿음을 확신하며 살고 있나요? 글 이관순(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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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4-29
  • 내 앉아있는 자리
    스산한 바람에 비까지 흩뿌리니 단풍은 지고 낙엽만 우수수 쌓입니다. 이렇듯 나무도 꽃도 지상의 모든 생명들이 사이즈를 줄이는 시기입니다. 그것이 한 주기의 마지막 겨울을 상대하는 지혜입니다. 사람이 나이가 든다는 것 또한 사이즈를 줄이는 것으로 시작됩니다. 몸집이 줄고, 먹는 게 줄듯 이것이 절제의 근본이며 이치입니다. 세상에 나올 때 작게 나왔으니 돌아갈 때도 비우고 작게 돌아가야 합니다. 여기에는 실상과 허상이 공존하지만 스스로 말수를 줄이고, 욕심도 미움도 줄이고, 자랑, 명예 같은 덧없는 것은 날려야 합니다. 그래야 사이즈가 줄지요. 루디 세네카는 “인간은 마치 시간이 모자란다고 불평하면서, 마치 시간이 무한정인 것처럼 행동한다.”고 사람의 어리석음을 비꼬았지요. 그런데 사람은 이를 알면서도 어제의 습관을 오늘도 고집하고 삽니다. 친구가 많다고 자랑하시나요? 바쁜 것을 미덕으로 생각하셨나요? 그보다는 흉금을 터놓고 말할 한 사람의 친구가 더 소중한 때입니다. 친구도, 만남도, 분주함도 지혜롭게 줄여가는 것이 노년의 삶을 가볍게 하고 실수를 줄이는 방법입니다. 우리 몸은 수분이 80% 이상이라고 하죠. 비슷한 비율로 우리 삶을 주장하고 있는 것이 말입니다. 그만큼 물과 말은 몸을 유지하고 삶을 구성하는 중요한 요소입니다. 그래서 절제를 말할 때 가장 먼저 꼽는 게 말입니다. 내가 살면서 토해낸 말을 양으로 계측한다면 얼마나 될까. 그중 꼭 필요했던 말은 얼마쯤 일까. 이제는 할 말 못할 말, 안 해도 좋을 말, 상처 주는 말을 가려가며 했으면 합니다. 내뱉은 말은 흘러간 세월처럼 돌릴 수 없으니... 그래서 이랬으면 좋겠습니다. “이제는 많이 들어주자. 듣는 귀는 8로 열고 말하는 입은 2로 줄이자. 남이 말할 때 자르지 말자. 중간에 끼어들지 말자. 말 줄기를 돌리지 말자.” 비위 상한다고 파르르, 욱, 버럭 하는 감정도 이젠 삭혀 없애야 합니다. 행여 그런 상황이 되면 심호흡 한 번으로 날려버리세요. 대신 많이 웃어주면 좋겠습니다. 상대가 가족, 친구, 이웃, 누구든 만나면 웃는 것으로 말문을 열어요. 나이가 들면 웃는 근육도 굳는다는데, 얼굴에 웃음기마저 빠지면 노인 특유의 표정 없는 일그러진 인상만 남아요. 나이가 든다는 것은 옻칠을 더하는 것처럼 윤을 내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미움이나 시기, 질투는 다 헛된 뜬구름이지요. 뜬구름을 좇다가 낯선 곳에 서 있는 나를 발견하는 건 아픈 일입니다. 살고 있는 이날, 앉아 있는 이 자리가 내가 족해야 할 자리임을 아는 사람은 행복합니다. 이 나이에 맘대로 못할 게 뭐야. 하지만 나이가 들수록 남을 배려하며 사는 인생이 아름답습니다. 살아보니 ‘역지사지(易地思之)’ 이상의 스승은 없더군요. 사서삼경이 대단한 게 아니라, 상대편 입장을 늘 먼저 헤아리면 그것이 상선의 절제입니다. “오죽했으면... 그래 저럴 수 있겠다... 나도 그 입장이면... 저도 사람인데.” 글 이관순(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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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4-22
  • 너도 죽는다‘메멘토 모리’
    말에는 묘한 힘이 있어 곱씹을수록 향기를 내는 말이 있고, 겸손함을 가르치는 말도 있지요. 라틴어는 그런 철학적 의미를 함의한 말과 글이 꽤 많습니다. 언젠가의 기억입니다. KBS TV '도전 골든벨‘에서 최후 1인이 된 학생에게 50번 마지막 골든벨 문제가 주어집니다. “고대 로마에서 승리를 쟁취한 장군이 개선행진을 할 때 주위에서 외쳤던 라틴어는?“ “메멘토 모리" 영예의 골든벨이 울리는 짜릿한 순간을 지켜보았지요. 다소 생소한 라틴어 '메멘토 모리(memento mori)'는 '죽음을 기억하라‘는 뜻입니다. 유래는 로마 공화정의 개선식으로 거슬러 올라가요. 개선식은 전쟁에서 승리한 장군에게 주어지는 영예입니다. 개선장군은 관습에 따라 전차를 타고 퍼레이드를 벌입니다. 영웅이 탄 마차가 시민의 환호 속을 헤치고 행진하는 동안 뒤에서 노예들이 큰소리로 외쳐댑니다. 메멘토 모리! 메멘토 모리! “오늘은 개선장군이지만 너도 언젠가는 죽는다. 겸손하게 행동하라.” 승리에 도취된 장군에게 본분을 잊지 않도록 경각심을 주는 장치인 셈이죠. 로마 최고의 환대 속에서도 너는 신이 아닌, 한 인간일 뿐임을 알린 것입니다. 메멘토 모리에는 세 가지 철학적 가치가 내재되어 있습니다. ‘죽음을 기억하라. 운명을 사랑하라. 현재에 충실하라.’ 이 셋은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도 적용되는 훌륭한 교훈입니다. 스티브 잡스도 스탠퍼드대 졸업식 축하 연설에서 이를 강조했습니다. 췌장암 투병으로 힘든 시기를 보내던 그는 ‘죽음은 삶이 만든 최고의 발명품‘이라고 격찬합니다. 그러므로 제한된 인간의 시간을 다른 누군가의 인생을 살 듯 낭비하지 말고 자신을 믿고 집중하라고 졸업하는 학생들에게 말합니다. 뜻이 통하는 라틴어에 ‘카르페 디엠(carpe diem)'이 있습니다. 몬래 이 말은 신을 공경하고 오만해지지 말라는, 현재를 가치 있게 살라는 뜻인데 이후 기독교 영향을 받아 현세의 부귀나 영화의 부질없음을 알립니다. 우리에게도 ‘화무십일홍’이란 말이 있죠. 열흘 가는 붉은 꽃이 없다는 이 말엔 ‘한 번 흥한 것은 반드시 쇠한다.’ 는 속뜻을 지닙니다. 트로트 가수 김연자가 불러 유명한 노래 ‘아모르 파티’도 같은 말입니다. 사랑을 뜻하는 아모르와 운명을 뜻하는 파티가 합성된 라틴어로 이 또한 ‘운명을 사랑하라’는 말이지요. 인간이 가져야 할 삶의 태도로 철학자 니체가 처음 사용했습니다. 메멘토 모리는 미국 남서부에 거주해온 나바호족에서도 찾을 수 있어요. 그들은 “네가 세상에 울면서 태어날 때 세상은 기뻐했으니, 네가 죽을 때 세상은 울어도 너는 기뻐할 수 있도록, 그러한 삶을 살아라.”는 의미심장한 철학을 닮고 있습니다. <메멘토 모리>, <카르페 디엠>, <아모르 파티>, <화무십일홍>까지 모두 겸손한 삶을 가르칩니다. 제한된 시간을 사는 인생에게 죽음을 기억하고, 운명을 사랑하고, 오늘에 충실하라.... 이보다 더 삶을 성찰하게 하는 말이 또 있을까 싶습니다. 글/ 이관순(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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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4-15
  • 의리가 사라진 세상
    짓궂은 질문을 해봅니다. ‘사람’과 ‘인간’은 같은 거야? 사전의 설명은 비슷 하지만, 아무래도 “저 인간!” 하면 부정적 이미지가 앞서죠. “저 사람 인품이 좋아”로는 써도 “저 인간 인품이 좋다”고 말하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세상에 사람 같지 않은 인간이 많다보니 용례까지 헷갈립니다. 초등학교 국어 교과서의 ‘의좋은 형제’를 생각하면 지금도 마음이 훈훈합니다. 우애 좋은 형제가 가을 수확을 마치고 들판에 볏단으로 노적가리를 만듭니다. 형이 보니 아우네 것이 적어 보입니다. 그날 밤, 어려운 아우 형편을 안 형이 자신의 볏단을 옮겨 놓고, 다음날 밤은 식솔 많은 형을 생각한 아우가 반대로 볏단을 옮기지요. 노적가리가 줄지 않자 형제 다 고개를 갸우뚱합니다. 마침내 볏단을 옮기던 형제가 달빛 아래 마주치면서 얘기는 끝나죠. 그때의 감동으로 습자시간이면 붓글씨를 ‘노적가리 풍년일세’만 썼던 기억이 납니다. 가난해도 마음은 풍년인 사람들이 살던 시절이 있었지요. 엊그제 복권 당첨금이 살인흉기가 된 사건이 났습니다. 우애 좋은 형제가 복권 당첨으로 수억 원의 당첨금을 받아 배분까지는 성공했는데, 그 돈으로 사업을 했던 형이 망하며 사단이 납니다. 돈을 더 요구하는 형과 보증을 선 동생 간에 감정이 충돌하다 동생을 살해하는 일이 벌어진 겁니다. 황금만큼 요괴스러운 것은 없습니다. 돈 앞에 장사가 없다지요. 일본 속담에 ‘담배꽁초와 돈은 쌓일수록 냄새가 난다’고 했습니다. 돈이 사람을 부패하게 만든다는 뜻이겠지요. 사는 것은 전보다 풍족해도 인성은 강퍅해졌습니다. 돈을 둘러싼 이기적 욕망이 칼끝처럼 첨예하게 부딪치는 세상입니다. 개신교의 큰 어른이셨던 목사님이 생전에 우리교회에 오셔서 당신이 붓으로 큼직하게 쓴 ‘의리를 지키자’란 글귀를 강단에 내리고 설교를 하신 적이 있습니다. 세상이 오죽하면 의리를 부탁했을까요. 사람과 사람,관계 사이에 의리가 사라졌다고 탄식하는 소리가 높아만 집니다. 제목을 잊은 영화입니다. 세 친구가 딱 한 번 은행을 털어 깨끗하게 살자며 치밀한 준비를 합니다. 그들의 거사는 성공했고 무사히 안전지대에 도착하자 돈다발을 놓고 환호합니다. 한 친구가 축배를 들자며 나갔다가 술에 독을 타서 옵니다. 욕심이 생긴 거죠. 태연하게 돌아온 친구가 술잔을 건네고 축배를 외칠 때, 팡팡! 술 사온 친구가 고꾸라지고 남은 둘은 낄낄댑니다. 뛰는 놈 위에 나는 놈이 있거든요. 둘은 더 큰소리로 건배를 외치지만 독배를 든 이들도 쓰러집니다. ‘사람에게 의리 빼면 시체’ 라고 말하던 세상이 있었지요. 의리란 뜻은 ‘사람관계에서 마땅히 지켜야 할 도리’로, 여기엔 사람이 갖춰야 할 덕목이 다 녹아져 있죠. 가난은 견뎌내기 어려운 것임을 경험한 세대가 모이면 그래도 그때가 좋았다고 반추합니다. 의리가 사라진 곳에 먹잇감을 놓고 으르렁 대는 동물세계가 어른댑니다. 사람 사이 흐르는 체온 대신 물질을 향한 충혈 된 눈빛만 섬뜩하니 사람은 없고 인간만 남아 보입니다. 다시 사전을 봅니다. ‘인간’이란 단어의 기본설명 뒤로 ‘사람의 모습은 하고 있되 사람답지 못하다는 뜻.’을 추가하고 예문도 달았군요. “저 인간이 한 짓을 생각하면 돌아버리겠어.” 너무도 흔히 듣는 슬픈 말이 됐습니다. 글 이관순(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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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4-08
  • 의리가 사라진 세상
    짓궂은 질문을 해봅니다. ‘사람’과 ‘인간’은 같은 거야? 사전의 설명은 비슷 하지만, 아무래도 “저 인간!” 하면 부정적 이미지가 앞서죠. “저 사람 인품이 좋아”로는 써도 “저 인간 인품이 좋다”고 말하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세상에 사람 같지 않은 인간이 많다보니 용례까지 헷갈립니다. 초등학교 국어 교과서의 ‘의좋은 형제’를 생각하면 지금도 마음이 훈훈합니다. 우애 좋은 형제가 가을 수확을 마치고 들판에 볏단으로 노적가리를 만듭니다. 형이 보니 아우네 것이 적어 보입니다. 그날 밤, 어려운 아우 형편을 안 형이 자신의 볏단을 옮겨 놓고, 다음날 밤은 식솔 많은 형을 생각한 아우가 반대로 볏단을 옮기지요. 노적가리가 줄지 않자 형제 다 고개를 갸우뚱합니다. 마침내 볏단을 옮기던 형제가 달빛 아래 마주치면서 얘기는 끝나죠. 그때의 감동으로 습자시간이면 붓글씨를 ‘노적가리 풍년일세’만 썼던 기억이 납니다. 가난해도 마음은 풍년인 사람들이 살던 시절이 있었지요. 엊그제 복권 당첨금이 살인흉기가 된 사건이 났습니다. 우애 좋은 형제가 복권 당첨으로 수억 원의 당첨금을 받아 배분까지는 성공했는데, 그 돈으로 사업을 했던 형이 망하며 사단이 납니다. 돈을 더 요구하는 형과 보증을 선 동생 간에 감정이 충돌하다 동생을 살해하는 일이 벌어진 겁니다. 황금만큼 요괴스러운 것은 없습니다. 돈 앞에 장사가 없다지요. 일본 속담에 ‘담배꽁초와 돈은 쌓일수록 냄새가 난다’고 했습니다. 돈이 사람을 부패하게 만든다는 뜻이겠지요. 사는 것은 전보다 풍족해도 인성은 강퍅해졌습니다. 돈을 둘러싼 이기적 욕망이 칼끝처럼 첨예하게 부딪치는 세상입니다. 개신교의 큰 어른이셨던 목사님이 생전에 우리교회에 오셔서 당신이 붓으로 큼직하게 쓴 ‘의리를 지키자’란 글귀를 강단에 내리고 설교를 하신 적이 있습니다. 세상이 오죽하면 의리를 부탁했을까요. 사람과 사람,관계 사이에 의리가 사라졌다고 탄식하는 소리가 높아만 집니다. 제목을 잊은 영화입니다. 세 친구가 딱 한 번 은행을 털어 깨끗하게 살자며 치밀한 준비를 합니다. 그들의 거사는 성공했고 무사히 안전지대에 도착하자 돈다발을 놓고 환호합니다. 한 친구가 축배를 들자며 나갔다가 술에 독을 타서 옵니다. 욕심이 생긴 거죠. 태연하게 돌아온 친구가 술잔을 건네고 축배를 외칠 때, 팡팡! 술 사온 친구가 고꾸라지고 남은 둘은 낄낄댑니다. 뛰는 놈 위에 나는 놈이 있거든요. 둘은 더 큰소리로 건배를 외치지만 독배를 든 이들도 쓰러집니다. ‘사람에게 의리 빼면 시체’ 라고 말하던 세상이 있었지요. 의리란 뜻은 ‘사람관계에서 마땅히 지켜야 할 도리’로, 여기엔 사람이 갖춰야 할 덕목이 다 녹아져 있죠. 가난은 견뎌내기 어려운 것임을 경험한 세대가 모이면 그래도 그때가 좋았다고 반추합니다. 의리가 사라진 곳에 먹잇감을 놓고 으르렁 대는 동물세계가 어른댑니다. 사람 사이 흐르는 체온 대신 물질을 향한 충혈 된 눈빛만 섬뜩하니 사람은 없고 인간만 남아 보입니다. 다시 사전을 봅니다. ‘인간’이란 단어의 기본설명 뒤로 ‘사람의 모습은 하고 있되 사람답지 못하다는 뜻.’을 추가하고 예문도 달았군요. “저 인간이 한 짓을 생각하면 돌아버리겠어.” 너무도 흔히 듣는 슬픈 말이 됐습니다. 글 이관순(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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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4-04
  • 슬픔이여 안녕!
    죄 없는 어린 생명이 희생될 때 더없이 고통스럽습니다. 남달리 알레르기 반응을 보이는 것은 일종의 트라우마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여덟 살에 충북 영동의 한 초등학교에 입학했습니다. 여름이 되면 아이들과 몰려서 마을 앞에 흐르는 강에 나갑니다. 겨울엔 썰매를 타고 여름엔 물놀이를 하는 곳. 경부선이 지나가는 철교 아래가 또래들의 여름 아지트지요. 흰줄 하나를 내린 검정 팬티를 입고 상급생들은 수영으로 강을 건너고, 하급생들은 교각 중턱에 걸터앉아 형들을 부럽게 바라보다가 텀벙 강물에 몸을 던집니다. 이날도 철교 아래에 한 떼의 아이들이 모였습니다. 비가 와서 물이 좀 불었지만 누구도 겁내지 않았지요. 그런데 물이 불면 수심에서 물돌이가 이는 걸 모른 게 비극입니다. 형들이 수영을 가르친다고 아이들을 밀어 넣는데 그만 1학년 쌍둥이 동생이 소용돌이에 말려든 겁니다. 아이가 물속에서 허우적이자 더럭 겁이 난 아이들이 달아나기 시작합니다. 나도 겁에 질려 뛰다가 뒤를 돌아봤는데, 발을 구르며 울부짖는 쌍둥이 형의 모습이 보였습니다. 죽은 아이는 내 짝꿍이었습니다. 마을이 발칵 뒤집어지고... 나도 밤마다 경기를 일으켰습니다. 땀을 흘리며 악몽에 시달렸지요. 물에 퉁퉁 부은 친구가 나를 원망했기 때문입니다. 넋이 나간 친구 엄마, 고래고래 소리질러 아들 이름을 부르는 아빠, 나를 원망스레 쳐다보는 쌍둥이 형... 나는 누구 앞에서도 고개를 들 수 없는 죄인이었습니다. 친구를 버리고 도망쳤다는 죄책과 슬픔이 어린 가슴을 쿵쿵 뛰게 했지요. 이로 인해 부모님 걱정도 덩달아 커졌습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아버지가 발령을 받아 새 임지로 이사하면서입니다. 가족이 아버지의 전근을 반색한 것도 나 때문이었죠. 아픈 기억은 상급학교로 진학할수록 많이 옅어졌습니다. 초등학교 동창들과 연락을 끊은 것도 도움이 됐습니다. 결혼 후로는 아예 잊다시피 지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어느날, 우연히도 길에서 쌍둥이 형을 만나면서 덜컥 상처가 뜯기고 말았습니다. 어머니는 우울증을 앓다가 목을 매셨고, 알코올 중독에 빠진 아버지도 암으로 돌아가셨답니다. 한 아이의 죽음이 이렇게 가족을 황폐화 시켰구나. 아물었던 내 상처에도 피가 나는 걸 느꼈습니다. 가족 중 유일한 생존자인 형의 얼굴에 깔린 그늘을 보았습니다. “가족 몫까지 잘 살아야지. 흔들릴 때마다 그렇게 위로해.” 예민한 성격 탓일까, 이후로 이따금 꿈을 꿉니다. 시골에서 놀던 추억들이, 떠난 어린 친구의 모습도 생생하게 포착됩니다. 더 힘들게 하는 건 잊을 만하면 날아드는 이런저런 또래 아이들 희생소식입니다. 줄어드는 인구도 걱정인데 죽었다하면 아이들이냐고 격분도 합니다. 지난 봄, 헝가리에서 유람선 전복으로 6세 소녀가 숨졌다는 비보가 그랬었죠. 외할머니 손을 꼭 잡은 아이의 인양된 모습은 더 애처로웠습니다. 그 아픔이 채 가시기도 전에 또, 엄마가 일곱 살 어린 아이를 데리고 동반자살을 했다는 비보가 들렸습니다. 죽음이 낯설기만 어린 나이에 얼마나 섬뜩했을까, 얼마나 설득했을까, 아니 강요했을까. 그래야 했던 엄마의 심정은? 푸른 6월에는 전 세계인을 슬픔에 잠기게 한 사고가 또 발생했습니다. 멕시코 국경에서 리오그란데 강을 건너 미국으로 밀입국하려던 25세 아빠와 두 살짜리 딸이 익사한 것입니다. 아빠가 아이를 셔츠 안에 넣고 아이는 아빠의 목을 끌어안은 채 떠내려 온 사진을 봤습니다. 물살을 이겨내려 했던 아빠의 다리는 물위에 떠 있고, 아이의 바지는 물먹은 기저귀로 불룩했습니다. 강 건너서 울부짖는 엄마의 얼굴이 오버랩됩니다. 멕시코 영화 ‘신 놈브레’는 중남미사람들이 ‘죽음의 열차’를 올라타고 미국으로 밀입국하려는 과정을 그린 영화입니다. 열차 지붕에 올라타다 떨어져 죽고 힘겹게 탄 뒤는 살해나 강간을 당하기도 합니다. 서글픈 것은 점쟁이가 찾아온 주인공에게 일러주는 말이죠. “넌 미국에 도착할거야. 그런데 안내는 신이 아닌 악마가 하지.”라고. 그 악마는 죽음의 열차를 올라 탄 아빠와 딸을 강물 속에 빠뜨린 것입니다. 스스로를 위로합니다. 어쩌면 아이들이 찾아간 저세상이 험난한 이 세상을 사느니 보다 낫지 않겠냐고. "여긴 낙원이 아냐. 슬퍼하지 말고 편히 쉬어라..." 오래전 읽은 프랑수아 사강이 쓴 ‘슬픔이여 안녕’ 이란 소설 제목이 떠오르는 것은 우연일까요? *글/이관순(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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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4-01
  • 노을처럼 아름답던 식탁의 축제
    사람들이 그렇게도 갈구하는 행복은 어디에 있는 걸까? 골드러시를 따라 미 서부로 향했던 그 많은 사람들은 무엇을 찾았을까. 공자는 제자의 질문에 ‘행복은 없다’고 간단명료하게 답합니다. 공자는 이에다 ‘인생에는 행복을 찾아가는 여정이 있을 뿐’이라고 덧붙였습니다. 공자가 말하고자 한 것은 행복이란 눈이 혹할 보석 같은 게 아니라고 내 나름 유추 해석합니다. 거대한 바위 밑 은밀한 곳이나 화려한 샹들리에 속에 숨겨진 것이 아니고, 우리가 사는 일상의 그 사소한 것들, 그 자체에 있음을 말하려 한 것으로 주석을 답니다. 행복은 더 이상 파랑새도 아니고 신기루도 아닌, 바로 우리의 일상에 흘러갑니다. 매일 우물에서 물을 길어오듯 행복도 일상이란 우물에서 길어 올려야 합니다. 돌아보니 그 많던 내 일상들이 다 허공에 흩어졌습니다. 우주의 어느 시간보다도 값진 것들입니다. 나이가 들면 외롭다고 합니다. 수많았던 그 일상들을 되돌릴 수 없고 함께 할 수도 없다는 것 때문이겠지요. 자식들로 들썩이던 공간은 소산하다 못해 적막감마저 흐릅니다. 전화도 오고 주말이면 찾아주니 반갑기도 하지만 잠시 머물다 떠나고 나면... 이젠 막내마저 직장 따라 지방으로 갔으니 그마저도 용이하지 않습니다. 옛말에 고개가 끄덕여 집니다. “마음이 지척이면 천리가 지척이고, 마음이 멀어지면 지척도 천리”라는 말... 형제간의 소통도 예전 같지 않습니다. 통화를 해도 쉽게 대화거리가 궁해지죠. 전 같으면 자식걱정에, 자랑에, 줄줄이 엮을 테지만 빈 둥지끼리 나눌 것은 그저 서로의 건강 걱정이나 해주면 끝입니다. 존경하는 선배와 만났습니다. 큰 아들은 미국에서 학위를 따고 현지에 눌러 앉은 지 11년째랍니다. 오늘은 손자가 화상통화를 할려나? “아참, 이번 주는 바쁘다 했지? 그래 바빠야지.” 일본에 있는 둘째 딸은 엊그제 통화에서 아이 교육이 힘들다고 넋두리하던데. “타지도 아닌 타국 생활이니 그렇겠지.” 제 둥지를 찾아간 자녀들한테 옛 일상을 더듬자고 할 일은 더욱 아닙니다. 그렇다고 넋두리만 하고 있을 수도 없습니다. 그것이 우리 인생이 거쳐야 할 여정으로 받아들여야 할 테니까요. 늘 아쉽고, 부족하고, 늘 그리움이 많은 게 우리네 인생인 듯합니다. 그래도 아직 남은 인생이 있고 걸어야 할 여정이 있고, 맞이할 일상이 남았으니 희망이란 새 한 마리 날아와 내 어깨에 앉아 주길 기대합니다. 그러다보니 더욱 간절해지는 것이 하늘의 은총입니다. 그분만이 내 남은 여정에 행복의 무늬를 함께 짜 주실 분이 시니까요. 식탁의 빈자리를 채워주시고 내가 입술을 열어 기도하면 응답해 주십니다. 성경을 펴면 말씀이 두런두런 대화를 나누자고 합니다. 예전에 느끼지 못한 행복감이 차오릅니다. 아이들과 즐기던 저녁 식탁의 축제는 흩어져갔지만, 그 분과 함께 하는 식탁의 축제는 노을빛처럼 아름답습니다. 오늘도 사랑과 그리움이 묻은 집에서, 가족의 기억들이 숨 쉬는 공간에서, ‘고뇌는 내가 갈아입는 옷 중 하나이니 나는 상처받은 사람에게 기분이 어떤지 묻지 않는다 나 스스로 그 상처받은 사람이 된다' (월트 휘트먼의 '나의 노래' 중에서 글 이관순(소설가/이관순의손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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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3-28

실시간 기고 기사

  • 엄마 나무
    ‘발설한 걸 알면 난 죽어.’ 하면서도 결국엔 근질거리는 입을 열어야만 성이 풀리는 게 사람입니다. 사람이 할 말을 못하고 살면 병이 된다고, 그래서 세상에는 비밀이 없는 모양입니다. 동서에 산재한 설화 중 ‘임금님 귀는 당나귀’가 대표적인 것이겠지요. 신라 경문왕과 두건지기 이야기는 어떤 설화보다 현실감이 팽만합니다. 왕의 두상 비밀을 지키느라 두건장이의 속병은 평생을 이어갑니다. 죽음이 가까워지자 두건장이는 이판사판이란 생각으로 가슴속 비밀을 대밭에 나가 시원하게 토설하고 말지요. 그런데, 속은 시원해졌지만 바람이 불면 대숲에서 소리가 납니다. ‘임금님 귀는 당나귀’라고. 어쩌면 그렇게 착상이 사람 심리를 콕 집었습니다. 사람들 이야기 잘 들어주는 한의사 한 분을 알고 있습니다. 진료차 내원한 사람이 엉뚱한 고민을 털어놔도 다 받아줍니다. 주말에 그 분과 수락산을 오르는데 일행 중 여성이 자신이 겪는 힘든 얘기를 꺼냈어요. 쉬지 않고 이어지는 이야기···. 정상에 올라 하산 때까지 그녀의 불행과 함께 하느라 이날 등산은 재미는커녕 입안에 쓴 맛만 돌았습니다. 한의사가 시종 여성의 아픈 사연을 경청 위로했기 때문입니다. 그 날 산행도 그에겐 수행의 도장임을 알게 되었지요. 그는 10년 전 티베트에 갔다가 티베트 불교의 ‘통렌’에 심취하여 이를 실제 삶의 현장에서 실천하는 사람입니다. 통렌은 남의 고통과 내 행복을 바꾸는 호흡 명상 수행법입니다. 모든 사람들의 고통을 들이마시고 내 안에 있는 행복의 기운을 내주는 것입니다. 그럴수록 괴로워하는 이들의 고통은 점차 사라지고 더불어 나도 행복해진다는, 아름다운 수행법이죠. 삶을 교정할 수 있는 나만의 수양법이 있다는 건 복된 일입니다. 한 어머니가 멀리 시집보낸 딸을 생각하면 가슴부터 미어집니다. 새파란 서른 살 나이에 어쩌다 청상이 되어 어린 아들과 시모를 모시고 사는 딸의 기구한 팔자가 눈물겨웠기 때문입니다. 하루는 딸이 얼마나 힘들게 살고 있는지 어렵게 시간을 내어 먼 길을 찾아갔습니다. 불시에 나타난 엄마를 보고 놀라는 딸의 모습에서 어머니는 얼마나 삶이 고된지 한눈에 알아챕니다. 딸과 바람을 쐬려 한다고 사돈의 양해를 구해 밖으로 나왔습니다. 마을 뒷산에 올라 깊은 숲길로 들어선 어머니가 딸의 손을 잡습니다. “내 기구함이 내 딸 정수리로 흘러내릴 줄은 몰랐구나.” 대를 이어 청상이 된 딸의 운명을 가슴 아파한 것입니다. 6.25전쟁 때 남편을 잃고 딸 하나에 모든 걸 걸고 홀로 키워낸 친정어머니입니다. “엄마, 나 괜찮아요. 이건 내 운명이지 엄마 하고는 상관없어요.” 솔숲에 이르자 어머니는 주위를 살핀 후 딸의 손을 이끌고 수령이 백 년은 됐을 소나무 앞으로 다가갔습니다. “잘 들어라. 나도 널 키울 때 이래 살았다. 가슴이 아프고 터질 것 같거든 참지 말고 여기 와서 다 쏟아라. 나무가 엄마다 생각하고.” 딸은 그러겠다고 약속했습니다. 모녀는 하룻밤을 함께 하고 헤어집니다. 그리고 세월이 흐른 뒤 아카시아 꽃향이 산골에 가득 차오르던 5월에 친정어머니가 다시 딸네를 찾아왔습니다. “좋은 일이라도 있느냐? 얼굴이 많이 나아보이는구나.” 딸이 배시시 웃기만 합니다. “어쨌든 편해 보이니 좋다.” 이번엔 딸이 어머니 손을 잡고 뒷산 숲길로 이끌었어요. 그리고 그 나무 앞으로 안내했습니다. 딸이 나무를 바라보면서 엄마에게 말합니다. “엄마가 시킨 대로 했어요. 나무가 엄마라 생각하고 슬프면 와서 앙탈 부리고 통곡하고, 그랬더니 가슴이 뚫렸나 봐요.” “그래, 아주 잘했구나.”ㆍ 어머니가 나무를 살핍니다. 나무는 몇 년 사이 많이 쇠해 보였습니다. 지난 태풍에 오른쪽 큰 가지가 부러져 몽똑한 모습이 안쓰럽고, 한쪽 가지는 솔잎이 누렇게 말라 기진함이 역력합니다. 그런 나무를 향해 친정어머니가 심정을 전합니다. “미안하네. 우리 딸 설움 받아주느라 자네가 이리됐구먼. 그래도 자네가 사람 하나를 살렸네. 한없이 고맙네.” 나무에 정령이 있다고 믿는 어머니처럼, 통렌 수양을 하는 한의사 처럼, 나무도 연민을 내보내고 괴로움을 받아들이는 기쁨을 느꼈을지 모릅니다. 자연은 모든 존재를 대상으로 자비와 자애의 마음을 나누니까요···.가족으로 존재하는 이유 -소설가/daumcafe 이관순의손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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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8-24
  • 스위스, 안락사 현장 동행
    ‘극강 호우’에 숨죽이던 지난 7월, 제목조차 낯선 책 한 권과 마주했다. <스위스, 안락사 현장에 다녀왔습니다.> ‘조력 자살 한국인과 동행한 4박 5일’이란 부제가 달렸다. 작가 신아연은 어느 날, 생의 마지막 순간을 기록해 달라는 부탁과 함께 스위스 조력사(존엄사) 현장에 동행해 달라는 제안을 받는다. 그리고 난해하기 짝이 없는 죽음의 여행을 하면서 삶과 죽음이 동전처럼 붙어 있다는 사실을 성찰하고 이 책을 썼다. 독자의 이해를 위해 작가와 그분과의 대화를 간추려보았다. 2021년 8월 26일, 스위스 바젤에서 64세로 생을 마감한 한 남자가 있다. 독자라는 인연으로 스위스까지 동행했지만, 그전에는 얼굴 한 번 본 적 없던 사람이었다. 그분은 폐암 말기 환자로, 두 번의 시술을 받고 다시 재발해 작가와 연결이 될 때는 주치의가 예상한 여명을 석 달 남짓 남기고 있었다. 마련해 준 비즈니스석을 타고 스위스까지 ‘거창한’ 죽음 배웅에 나서면서 생각했다. 어떻게든 그의 마음을 돌려보리라고 마음을 다잡지만 결국 죽음의 침상에 눕고 마는 그를 보며 무기력과 혼란에 빠져들었다. 내가 그때 하나님을 만난 후라면 그분 손에 천국행 티켓을 쥐어드렸을 텐데, 그리고 천국행 티켓은 스위스에서 발행하지 않는다는 것을 분명히 알려드렸을 텐데, 모두 돌이킬 수 없는 일이 되어버렸다고 했다. "스위스로부터 안락사가 승인되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담담했어요. 그동안 깊이 생각했고 오래 준비해 왔기 때문인지 슬픔이나 아쉬움, 회한, 두려움 같은 감정은 없었어요. 남은 건 언제 생을 마감할 것인가만 결정하면 됩니다. 이제 버킷리스트 같은 건 없어요. 하루하루 편안하게 평범한 일상을 살다 때가 되면 스위스로 마지막 여행을 떠날 것입니다. ‘원 웨이 티켓’을 손에 쥐고.” 한 사람은 왕복 티켓, 또 한 사람은 편도 티켓을 쥔 그 엇갈린 경로를 머릿속에 그리며 스위스 여행을 시작했다. 현지에서 그분을 처음 만났을 때, 비행기를 오래 탄 사람처럼 약간 지친 모습일 뿐 말기암 환자라 할 만한 동태는 찾아볼 수 없었다. "신 작가님, 와 줘서 고마워요. 먼 길 오느라 고생 많았지요?" 그가 분위기를 띄우자 동행자들의 긴장도 누그러지면서 약간의 농담을 주고받을 수 있었다. “뭐야, 형님 멀쩡하구먼. 이렇게 건강한데 왜 이런 결정을 하고 그래요." "내가 너무 생생해 서운한가. 모두들 따끈할 때 날 만져 봐. 이틀 후면 싸늘하게 식을 테니까." 스위스 2일째, 조력사 단체에서 담당 의사가 찾아왔고, 마지막 면담을 가진 후 그는 이생에서 남기는 마지막 ㅅ사인을 했다. "두렵지는 않은데 어릴 때 달리기 출발선에 섰을 때처럼, 대중 앞에서 연설하기 전처럼 가슴이 두근거리고 긴장되네요. 어떤 면에선 설레기도 해요. 내일 아침에 데리러 온다고 했어요. 저승사자가 찾아오는 거지만, 엄밀히는 내가 찾아가는 거지요." 조력사 시행 하루 전, 생애의 마지막 밤이 찾아왔다. 눈치 챌만큼 감정의 기복을 보이지 않은 채 주위를 향해 담담하게 말했다. "오늘 밤은 잠들지 않으려고 해요. 인생의 마지막 밤을 잠으로 보내고 싶지 않으니까. 모든 순간을 깨어서 느껴보려고 해요. 지상의 모든 순간, 모든 마지막을." 날이 밝았다. 모두에게는 새날이지만 그분에겐 이생에서의 마지막 날이 밝은 것이다. 오전 10시경 안락사 시행장소로 이동했다. 동행자들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한 명씩 돌아가며 각자의 휴대전화로 그분과 사진을 찍었다. 일부러 환하게 웃고 최대한 고개를 꺾어 얼굴이 닿는 포즈를 취했다. 팔짱을 끼거나 한쪽 손은 그러쥐고 다른 손으로는 어깨를 얼싸안기도 하면서…. 그분은 표정이나 몸에 움직임이 없었다. 마치 동상을 배경 삼아 사진을 찍는 것처럼 움직이는 것은 우리뿐이었다. 우리의 호들갑에 잠시 희미한 미소를 짓던 얼굴에 쓸쓸한 표정이 짧게 스쳤다. 그 분은 농담을 거는 여유도 보였다. "야, 내가 무슨 연예인 같구나. 나하고 사진들 찍느라고 난리인 걸 보니." 정적이 흐르던 공간에 웃음이 깃털처럼 흩어졌다. 그곳 담당자가 말했다. "이제부터 충분히 시간을 드릴 겁니다.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을 모두 하고 작별 인사를 나눈 후 준비가 되면 저희를 부르시면 됩니다." 직원이 나가자 그분의 시선이 우리를 향했다. "이렇게 와 줘서 고마워요. 모두들 수고 많았어요." 담담한 어투로, 엷은 미소까지 얹으며 하직 인사를 했다. 이 순간을 위해 얼마나 ‘예행연습’을 했으면 저럴 수 있을까. 작가가 어디로 가시느냐고 물었다. "글쎄요... 어디든 가겠지요." "좋은 데로 가실 것 같나요?" "있다면 갈 것 같아요." "지금 누가 가장 보고 싶으신가요?" "어머니요. 부모님이 마중 나와 계시면 좋겠어요. 수목장을 할 테니 한 번 와줘요." 잠시 정막이 흐를 때 그분이 말했다. "이제 가야겠어. 밖에 사람을 불러요." 그러나 선득 나서는 사람이 없었다. "어서. 모두 배고플 거야. 내가 어서 가야 점심을 먹지." 그분은 마지막 순간까지 남는 자에 대한 배려를 잊지 않았다. 본인이 어서 떠나야 우리가 점심을 먹는다니. 조카가 마지못해 문밖에 사인을 보내자 작은 카메라와 거치대를 들고 담당자가 들어왔다. "이제 모두 조용히 하세요. 짧은 동영상을 찍어야 하니까요." 그리고는 그분을 향해 정면으로 카메라를 설치했다. 그리고 카메라의 녹음 버튼을 누르고는 자기의 말을 또렷하게 복창하라고 했다. I'm sick, I want to die. I will die. 나는 아프고 죽길 원하며 죽을 것이다 그분이 그 말을 따라 하자 녹화는 끝났고, 약물 팩이 걸렸다. "마음의 준비가 되면 밸브를 손수 돌리세요. 그러면 수 초 안에 편안히 잠드실 겁니다." 설명이 끝나기 무섭게 그분 스스로 밸브를 돌렸다. 순식간의 일이었다. 설명을 하던 남자도 흠칫했고 우리의 입에서도 짧은 탄식이 나왔다. "아, 졸리다..." 그 말을 끝으로 5~8초 남짓한 사이에 고개가 옆으로 떨어졌고, 입가에는 희미한 미소가 흘렀다.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삶과 죽음의 경계를 찰나의 순간에 넘어 스스로 생명을 내놓은 그분의 발을 작가는 식어갈 때까지 잡고 있었다. 두 번 다시 볼 수 없는 강렬한 체험이었다. 그러면서 깨달았다. 삶과 죽음은 따로 있지 않다는 사실을…. 그 분은 현지에서 화장 돼 지금 공주의 한 추모공원에 잠들어 있다. 디그니타스는 스위스 취리히의 ‘조력 자살(존엄사)’을 돕는 기관이다. 이곳에 가입한 한국 사람만300여 명. 그동안 10명이 이곳을 찾아 생명을 내려놓았다. 우리 사회에 안락사 논쟁이 물살을 타고 있는 것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스위스의 조력사 현장을 경험한 작가는 돌아와 기독교인이 되어 이렇게 말했다. “생명의 주인은 우리가 아니며, 태어나는 것도 죽는 것도 우리의 선택이 될 수 없다”라고. 그가 소중하게 느낀 것은 생명의 존엄이 아닌가 싶다. 조력자살은 죽음이 금기시 된 우리 사회에 어떤 변화를 부를까. -소설가/daumcafe 이관순의손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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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8-21
  • 내 인생에 상비약은 있는가
    우울 바이러스가 세상을 삼켰을 때, 사람들은 무엇에 기대어 하루를 살까? 주저앉은 나를 일으켜 세울 주술 하나 없이, 상비약 하나 챙기지 못하고 마주친 현실이란 시간 앞에서 말이다. 지난 팬데믹 3,4년을 보내면서 가끔 그런 생각을 했다. 때로는 나를 향한 질문이기도 했다. 그때 그 사람들은 어떻게 되었을까? 물안개처럼, 천겁을 두른 인연도 맥없이 사라지는 인생인데, 때론 엉뚱한 이들이 뜬금없이 생각나고 실없이 마주쳤던 얼굴이 떠오를 때가 있다. 30년 전 러시아에서 만난 사람들도 그중 하나였다. 유럽에 왔다가 짬을 내 러시아 여행을 한 적이 있었다. 1991년 말로 사라진 소련을 러시아가 계승한 후, 모스크바는 어떻게 변했을까 궁금했다. 언론을 통해 보고 들은 대로 옛 소련의 위세는 간 곳 없고 김 빠진 거리와 온기 잃은 사람들의 표정뿐이었다. 빵을 구하려는 사람들이 줄 서 있고, 상가는 을씨년스럽고 마트의 매대는 빈 곳이 허다했다. 짧은 시간에 영고성쇠의 필름이 빠른 속도로 눈앞을 스쳐갔다. 때마침 주말이었는데도 거리는 한산했다. 사방을 돌아봐도 딱히 눈을 끄는 곳이 없다. 찾아간 곳이 전쟁기념관이었는데, 그곳에서 예상하지 못한 뜻밖의 풍경과 마주쳤다. 10여 명의 신혼부부 일행과 만난 것이다. 드레스 코드 일색인 것이 예식장에서 금방 나온 젊은이들 같았다. 말쑥하게 차려입은 신랑들과 꽃단장을 한 신부들이 하얀 드레스를 입은 채 환히 웃는 모습이 식은 거리 풍경과는 딴 세상이었다. 어, 이건 또 뭐지? 신랑 신부가 줄지어 분향을 하는 것이다. 여기선 결혼하면 충혼탑 분향부터 하나? 역시 공산국가의 후예다웠다. 분향이 끝나자 이들은 광장에서 요란하게 웃고 들레며 춤판을 벌였다. 시내의 우울한 거리 풍경과는 전혀 다른 딴 세상이 펼쳐졌다. 근심이란 없는 젊음의 군무는 관광객들의 시선을 잡았다. 이어서 찾은 곳이 레닌의 언덕이었다. 평원지대인 모스크바에 유일하게 솟은 구릉에 위치했다. 모스크바 시내가 조망되는 이곳도 주말 주인공은 신혼부부들이었다. 약속이나 한 듯 자축하는 파티가 한창 진행 중이었다. 그들은 관광객을 붙잡고 함께 춤을 추지 않겠느냐고 손을 내밀기도 했다. 그 질문이 나를 향할 때, 그 훤칠한 여성의 키와 백옥 같은 피부, 파란 눈, 팔등신 몸매에 눈이 부셔 웃기만 했다. 숙소로 돌아온 그날 저녁, 많은 생각이 머릿속에 차올랐다. 세상은 온통 잿빛뿐인데, 무엇이 그들을 신바람 나게 했을까? 외관상으로 모스크바는 희망이 없는 도시였다. 일이 백 달러로 한 달을 살아야 하고, 모든 경제권은 마피아가 틀어쥐고, 일자리는 없고, 물가는 매일 같이 뜀박질하던 때였다. 희망이라고는 찾아보기 힘든 도시에서 무엇이 그들을 춤추게 했을까? 답은 의외로 쉽게 찾아졌다. 성서 속 야곱이란 인물을 떠올리면서…. 희망을 꿈꾸고 마음을 줄 수 있는 짝을 구했기 때문이다. 야곱은 내일을 꿈꾼 사람이었다. 아내 라헬을 얻기 위해 약속을 열 차례나 어기는 외삼촌 밑에서 20년을 일했다. 그럼에도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인내하며 견뎌내 라헬을 아내로 맞는 과정이, 슬프고도 아름다운 로망의 대서사다. 성경에는 곳곳에 이러한 서사 구조가 녹아 있어 흥미를 돋운다. 20년을 희망으로 살은 야곱이지만 인생은 파란만장했다. 사랑했던 아내 라헬이 아이를 낳다 죽고, 외동딸은 이방인에게 성폭행을 당하고, 아들 하나는 객사를 했다. 어디 그뿐인가. 장자권을 빼앗기고 복수의 칼을 갈아온 형의 군대가 턱밑까지 추격하는 상황에도 내몰렸다. 그럼에도 야곱은 이 모든 시련을 감내하고 이겨냈다. 그를 구원한 것은 믿음의 힘이었다. 여기서 인생을 살리는 상비약 두 가지를 찾는다. 하나는 ‘꿈’이고 또 하나는 ‘믿음’이다. 쓸쓸한 모스크바 광장에서 신명을 다해 파티를 즐기는 신혼 남녀들, 그 순간 그들은 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얼굴을 지닌 사람들이었다. 그들의 얼굴을 활짝 웃게 만든 것은? 하나는 짝을 만남에서 갖는 꿈일 테고, 또 하나는 일생을 동행하는 반려자에 대한 믿음을 확인하는 자리였기 때문이리라. 꿈은 내가 꾸는 것이 있고, 심어주는 꿈이 있다. 내가 꾸는 것보다 심어주는 꿈이 끈기 있고 힘이 있다. 심어준 꿈은 오래 걸리면서, 많은 아픔과 고난 등을 거쳐 이루어진다. 그러나 그것이 고통스럽지만 좌절하지 않는다. 내 꿈은 생각만큼 쉽게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고 있기 때문이다. 위기의 순간순간, 이를 견뎌내게 하는 것은 서로가 심어준 사랑의 꿈을 확인하는 데 있다. 30년 전 모스크바 광장에서 만났던 그들은 지금 어디서 무엇을 하며 살아갈까? 그들이 열망했던 ‘꿈’과 ‘믿음’은 여전히 살아 있을까? 생뚱맞게도 이따금 스쳐간 사람들이 기억 속에서 깃발처럼 흔들릴 때가 있다. -소설가/daumcafe 이관순의손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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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8-17
  • 사라진 설렘과 기다림의 시간
    코로나의 일상이 정상으로 향하면서 지난 주말 오랜만에 결혼식장을 찾았다. 마흔 된 딸을 시집보낸다고 감격하는 친구를 축하하기 위해 찾은 예식장에서 반가운 옛 친구들을 만났다. 예식을 마치고 카페로 자리를 옮겨 70년대 젊은 날의 기억을 떠올리며 회포를 풀었다. 사진을 전공한 친구와 성악을 한 친구, 문학을 한 내가 친구가 된 것은 같은 대학을 다녀서였다. 전공은 달라도 기독 학생으로 함께 서클활동을 하면서 가까운 친구가 되었다. 출신 학교와 고향이 제각각임에도 흉허물 없는 친구로 젊은 한 시절을 같이 걸었다. 이젠 다들 원로급 나이가 되었으니 주고받는 대화가 모두 지난날 그 이야기지만, 우리는 그때를 회상하는 재미에 빠져 시간 가는 줄을 몰랐다. 이렇듯 친구는 10년을 못 만나도 금방 퍼즐이 맞추어진다. 성악을 전공한 친구가 들려주었다. 아버지가 딸에게 오래된 상자를 열어 소장해온 3.5인치 플로피 디스크를 보여주며 의중을 물었다. “얘야, 아빠가 아꼈던 것인데 네가 보관할래?” “아빠, 이런 건 박물관이나 수집가들에게나 필요하잖을까? 난 사양할래요.” 딸은 단 1초의 고민도 없이 시답잖다는 표정을 얼굴에 그렸다. 환영받지 못할 수 있다는 생각을 안 하진 않았지만, ‘박물관’ 운운하는 표현에서 섭섭함이 살짝 마음에 깔렸다. 아비가 박물관 갈 나이라도 됐다는 뜻인가? 호불호가 분명한 것은 좋지만 요즘 젊은 얘들은 같은 말을 해도 상대의 마음을 헤아리는 데 둔감해 있다. 디스크로 음악을 듣던 시절이 불과 얼마 전인데, 세상이 그리도 빠르게 변했구나, 하는 생각이 가슴을 향해 불화살을 당기는 느낌이었다. 음원을 파일로 다운받아 듣고, 모든 정보를 핸드폰에 담고 사는데 익숙한 세대들이 흘리는 얘기를 듣다 보면, 불쑥불쑥 현대판 청맹과니의 부적응력이 잉어처럼 튀어 오를 때가 있다. 사진가 친구도 한 수 거들었다. 그 시절은 필름 값도 비싼 데다 일단 카메라에 필름을 넣은 후에는 다시 뺄 수도 없으니 순간순간 판단을 잘하고 찍어야 했다. 게다가 필름 한통에 20~30여 컷으로 제한돼 있어 필름이 떨어질까 봐 남은 컷을 셈하면서 셔터를 눌러야 했다. 사진을 찍어도 확인해 볼 수가 없으니 다 찍은 필름은 서둘러 현상소에 맡기는 것이 상수였다. 그리고 사진이 인화되어 나오기까지 몇 날을 또 기다렸던가. 사진은 나온 대로가 다였다. 보태고 뺄 것이 없으니까. 지금 같으면 온갖 수정으로 아예 딴 얼굴을 만들기도 하지만, 수정 불가의 시절에는 인화된 사진을 보고야 모든 것이 결판났다. 잘 나왔다, 못 나왔다 볼멘소리가 나오고, 더불어 사진 몇 장으로 카메라 맨의 실력을 평가했다. “이게 뭐야. 나 눈 감고 있잖아?” “내 사진 뽑지마. 안 찾을 거야.” 제 얼굴 잘못 나왔다고 토라지는 여학생들에게 핀잔만 듣고 ‘미안해’ 하던 얼굴이 지금 말하고 있는 그 친구였다. 카메라 들고 나온 죄로 구박을 받고도 싱글싱글 웃는 데는 여전히 사진 잘 찍어달라고 부탁할 수밖에 없는 친구들의 형편을 알기 때문이다. 그 시절, 약속은 기다림의 시간이었다. 영화를 보거나 야외로 놀러 가기로 약속을 한 날이면 으레 한 친구는 20~30분 늦게 나타났다. 모임마다 그런 짓하는 사람은 거의 정해져 있지만, 그중에도 기다림의 끝판왕은 오늘 혼주였다. 그래도 그때는 인성들이 너그러워 한참을 기다려 주고도 크게 타박하지는 않았다. 모든 것이 핸드폰으로 실시간 확인이 가능한 요즘 세상에는 어디 용납이나 될 일인가. 세상이 편리해진 만큼 기다리는 데 쓰는 시간이 줄면서 분단위 시간관리가 가능해진 세상이지만, 반대로 잃는 것도 있었다. 무엇보다 마음에 설렘이 사라져 버렸다는 것이다. “이 노래를 LP로 들으면 어떤 느낌일까.” “역광으로 찍었는데 잘 나왔을까” “그 여학생은 어디쯤 오고 있을까.” 지금처럼 영악하지 못했던 그때는 모든 것을 선의로 해석하고 받아들였다. 실시간으로 추적을 당할 리도 없었으니 둘러대는 요령이 생기고 대충 넘어갈 틈도 주었다. 주변의 간섭이나 통제에서 수월하게 벗어나 나만이 즐기는 공상과 상상의 여백도 가질 수 있었다. 지금은 나의 모습이 너무나 투명하게 드러나는 세상이라서 불편하게 느껴질 때가 더 많아졌다. 세상이 편해졌다고 날개를 달아준 것도 아닌데…. 어떡하든 디지털 삶에 뒤지지 않으려고 머리를 쥐어짜느라 삶은 더 고달파졌다. 모처럼 해묵은 친구들과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웃고 떠들다가 날이 어둑해져서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집으로 돌아오는 전철에서 다시 익숙한 일상으로 돌아왔다. 손에 쥔 휴대폰에 머리를 박고 삶의 시간을 촘촘히 쓰고 있는 사람들과 어깨를 나란히 했다. 연신 화면을 굴려 패션을 찾고, 먹방을 살피고, 게임에 몰입하는 사람들. 그들을 보면서, 내게서 사라져 간 그리움들이 생각났다. 마치 일상의 여백 같던 그 기다림의 시간들이 아득하고 아련하게 멀리서 요령처럼 흔들렸다. 가수 진성이 노래한 ‘안동역 앞에서’가 그런 것일까? “첫눈이 내리던 날~ 안동역 앞에서 만나자고 약속한 사람~ 못 오는 걸까 안 오는 걸까~ 오지 않는 사람아~ 기다리는 내 마음만 녹고 녹는다~” 퍼즐의 한 조각씩을 들고 서로를 기다리던 두 사람은 끝내 못 만나고 마는 걸까? 노년의 삶이란 ‘그리움’이고 ‘추억의 퍼즐’이다. 각자가 쥔 퍼즐을 들고 친구들과 한 자리에 모여 빠진 조각들을 채울 때, 잊혔던 그 시절이 온전한 모습으로 살아날 때, 그 환한 기쁨은 반갑고도 놀라움이었다. 그날 오래된 친구들과의 만남에서 느꼈던 그 감정처럼. 때때로 그 시절을 꺼내보고 싶을 때가 있다. -소설가 daumcafe 이관순의 손편지
    • 오피니언
    • 기고
    2023-08-14
  • 이젠 좀 이기적으로 살아도 된다
    남양주의 한 노래방에는 한 달에 한 번 모여 일본 노래를 부르는 모임이 있다. 말이 노래방이지 식당에서 손님들의 여흥을 위해 부대시설로 꾸며놓은 무허가 노래방이다. 일본 가요를 좋아한 식당 주인이 ‘엔카(演歌. enka) 동호인들에게 장소를 제공했다. 회원 상당수가 7080 세대로, 식민기에 태어나 일본어를 배운 연배들이다. 약속 날이 되면 서울과 분당 춘천 등에 흩어져 살던 회원들이 이곳을 찾는다. 우연한 기회에 그곳 식당에 들렀다가 오랜만에 엔카를 들었다. 모임을 끝내고 나오는 80대 노신사와 인사를 나누었다. 엔카의 고전으로 불리는 가수 후리지야마 이치로의 ‘그림자를 사모하여’를 열창한 분이셨다. “어떻게 일본 노래를 그리 잘하시느냐?”라고 묻자 “내 인생에는 그림자처럼 따라붙는 것이 일본”이라고 대신했다. “나는 반평생을 일본에서 일본어만 쓰며 살았어요. 꽃다운 시절을 그렇게 보내다 보니 모든 게 엉켜져 있어요. 이젠 좋고 싫고를 떠나 이것도 내 인생의 일부다 생각하며 살아요. 다만 가슴 한 구석에 웅크리고 있는 그 시절을 가끔은 풀어주고 싶을 때가 있어요. 그날이 오늘 같은 날이죠. 끝까지 내 곁에 남아줄 친구는 노래밖에 없다는 생각을 해요.” 노신사의 말에서 어디선가 본 듯한 기시감을 느꼈다. 가물가물하게 느껴지는 어린 시절…. 가슴에 잠들어 있던 친구가 부스스한 머리로 고개를 들었다. 고향 친구인 그와는 수다스럽게 만나 입씨름하는 사이는 아니어도, 언제라도 마음에서 꺼내볼 수 있는 내겐 참 무해(無害)한 친구였다. 한국인 아버지와 일본인 어머니 사이에 태어나 아버지를 6.25 전란으로 잃고, 청상의 어머니와 어렵게 어린 시절을 보냈다. 어른들은 그를 ‘아이노코’라고 불렀다. 그와 나는 단짝으로 초등학교 6년, 중학교 3년을 함께 했다. 한없이 착하고 말수가 적고 마음이 여려서 학교에서는 존재감이 별로였지만, 노래 솜씨 하나는 출중했다. 나와 단 둘이 있을 때는 일본 가요 ‘엔카’를 슬프게 들려주었다. 삶의 시름을 노래로 풀어내던 어머니의 영향 탓일 게다. ‘그림자를 사모하여’라는 노래도 그중 하나였다. 친구가 교대를 나와 음악 선생이 되어 지방으로 내려가기 전까지 우리 둘은 틈틈이 만나 우정을 나눴지만, 이후로는 거리적으로도 멀리 있고 각자 생활에 쫓기면서 편지와 전화로 안부를 주고받았다. 그날 집으로 돌아와 친구와 전화 통화를 했다. 난생처음 한 시간 가깝게 긴 통화를 했다. 그만큼 얼굴 본 지가 2년이 다 됐는데도 멀리 느껴지지 않는 친구였다. 그리고 한 주쯤 지났을 때, 친구로부터 연락이 왔다. 오늘 서울 가는데, 3시에 대한극장 뒤 필동면옥으로 나오라는 것이다. 예나 지금이나 친구와 나는 늘 이런 식으로 서로를 불러냈다. 비가 추적대는 날 그를 만났다. 여전히 나의 손을 잡는 그의 얼굴을 감싸는 착한 미소는 포근하고 살가웠다. “시간 괜찮아? 억지로 불려 나온 건 아니지?” “안 괜찮으면? 돌아가랴?” 1년 만에 만나서 이렇게 첫 대화를 열고 곰탕 한 그릇을 말아먹었다. 모습은 예전 그대로이나 딱 하나 변한 게 있다면 쉬지 않고 이야기를 쏟아내고 있다는 점이었다. “너 많이 변했다. 웬 수다가 이렇게 늘었지?” “그야 어찌 됐든 오늘 화자는 나고, 자네는 객석 손님인 거야. 원래 너 같이 지혜로운 사람은 듣는 게 장기잖아.” 그는 3년 전 학교를 정년퇴직하고 음성에 혼자 내려가 약초 밭을 가꾸며 지내고 있었다. 현지 생활을 묻자 다른 것은 다 좋은데 말 상대가 없다는 것이 아쉽다고 했다. 낙향하려면 부부가 같이 움직여야지 만년에 고생을 사서 하느냐고 말했다가 내가 무식한 사람이 되고 말았다. “요즘 어떤 여자가 시골로 따라가나? 내가 음성 내려간다니까 마누라가 연막부터 치더라. 시골 갈 생각은 털끝도 없으니, 그러려면 이혼할 각오부터 하라더라.” 평생을 남편과 자식 뒷바라지에 헌신했으면 됐지, 새삼 이 나이에 시골 구석에 내려가 생고생을 하느냐고 손사래를 친 부인 말도 틀리진 않았다. 부부는 자연스럽게 구획 정리를 해 아내는 서울에서, 남편은 음성에서 각자의 삶을 산 지 3년인데, 결론은 서로가 편하다는 것이었다. 주위를 둘러보면 부부가 떨어져 사는 사람이 의외로 많이 있다. 딱히 부부 사이가 나빠서가 아니었다. 삼시세끼 식사 준비하는 것도 신경 쓰이고, 종일 얼굴 맞대고 있는 게 서로가 불편하다는 것이다. 그날 나는 다섯 시간을 친구에게 붙잡혔다. 다른 자리 같으면 일어나도 몇 번을 박찼을 텐데, 긴 시간을 진득하게 자리보전하고 그의 말을 들었다. 필동면옥에서 시간 반, 호프집에서 3시간 반을 친구에게 귀를 열어준 셈이다. 마을과 떨어져 혼자 살다 보니 대화가 궁하다는 것을 눈치채면서였다. 처음엔 주말마다 서울 집에 올라오다가, 시간 맞추어 사람 만나는 것도 마뜩잖아 1년 전부터는 필요할 때만 올라온다고 했다. 500CC 한 조끼만 하겠다고 붙잡힌 것이 하나만 더, 하나만 더 하다가 여섯 조끼로 늘어났다. 고향 이야기, 학창 시절 이야기, 군대 이야기, 직장 이야기, 농장 이야기까지 슬프고도 아름다운 이야기가 그의 입에서 수없이 교직 되었다. 암 투병 끝에 하늘나라로 떠나는 어머니를 두 팔로 가슴에 안고 마지막 임종을 눈물로 지켜보았다는 이야기를 들을 적엔 친구의 아팠던 마음이 절로 헤아려졌다. 10개월을 동거한 누렁이 이야기도 잔잔한 파동을 느끼게 했다. 동네 이장이 혼자 있으면 적적할 거라면서 강아지 한 마리를 주어 키운 것이 그동안 정이 듬뿍 들었다. 이젠 떨어져서는 못 살 것 같은 가족이 되어, 아예 이름을 ‘양순이’로 지어 불렀다. 때로는 사람 그림자 하나 비치지 않고 걸려오는 전화 한 통이 없는 날에는 하루 종일 입을 닫고 살았는데, 누렁이가 온 후 생활에 활기가 생겼다고 했다. 반갑다고 꼬리를 흔들고, 그림자처럼 졸졸 따라다니면서 대화의 상대가 돼 주었다. 아침마다 내가 나오기를 문 앞에서 기다려 주고, 늦잠이라도 자는 날엔 컨테이너 철문을 발톱으로 박박 긁으면서 주인을 깨웠다. 새우깡 한 봉지면 녀석과 한 시간을 약 올리면서 즐길 수도 있었다. 그렇게 좋은 세월을 함께 한 누렁이가 어느 날 이상한 낌새를 보였다. 사료 먹는 양이 줄더니 자꾸 집에 들어가 누우려고 했다. 체증이 있나 싶어 활명수를 입을 벌려 털어 붓기도 했으나, 먹는 것을 포기했는지 밥그릇에 사료를 그대로 남겼다. 녀석이 좋아하는 새우깡을 코앞에 대고 냄새를 풍기자 그제사 억지 힘을 써 집에서 나왔다. 예전 같으면 손에 든 새우깡을 채려고 껑충껑충 뛰어올랐을 텐데 눈망울만 굴리다 집으로 기어들어갔다. 이튿날은 잠을 설치느라 늦잠을 잤다. 필연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어야 하는데 기척이 없었다. 이상한 느낌이 들어 나가 보니 누렁이가 피똥을 싸고 죽어 있었다. 참으로 허망했다. 정 붙이고 산다 했는데 이렇게 죽다니, 마음이 가족이 떠난 것처럼 아프고 쓰라렸다. 녀석을 끌어다 농장 한구석에 묻어주었다. 일손이 안 잡히고 한참을 멍 때리다가 나중에는 녀석이 환영으로 보이기까지 했다. 동물인데도 이별 의식이란 이렇게 모질고 슬펐다. 그것으로 5시간 이야기는 끝이 났다. “새드무비로 끝내서 좀 그렇다 그렇지?” "얘기 잘 들었다. 건강 잘 챙기게." 그와 헤어져 집에 오니 밤 10시가 넘었다. 샤워를 하고 나와 서재에 앉았는데 전화가 왔다. 친구였다. “친구, 오늘 미안했어. 내 말 들어주느라고 고생했지?” “알긴 아는구나.” “자네 덕분에 스트레스가 확 풀렸다. 친구가 그래서 좋다는 거 아냐? 자네 같은 친구가 곁에 있다는 게 나로선 복이지. 고맙다 친구, 잘 자게.” 친구는 나랑 헤어진 후 서울 집으로 가지 않고 그 길로 음성 농장으로 내려갔단다. 그것이 편하다고 했다. 나이가 드니 삶의 변화가 이렇게도 찾아오는구나. 다섯 시간이나 나를 붙잡아놓기도 하고, 비 오는 밤에 농장으로 내려간 친구나, 서울에서 편안한 삶을 즐기는 아내나, 좀은 이기적인 모습이지만 양쪽 다 너그럽게 이해가 되었다. 가슴 한 구석에 나를 가두고 일생을 희생과 봉사로 살았으니까…. 나도 이제는 가끔 봉인해 둔 나를 풀어주고 싶을 때가 있다. 남양주에서 만난 그 노신사처럼. 그만하면 우리 모두 애써 살지 않았나? 평생 가족 부양이란 고달픔을 끼고 살았던 몸을 생각한다면, 좀은 그렇게 살아도 크게 흉이 될 것 같지 않았다. 세월이 이렇게 소리 없이 나를 휘감아 가며 끊임없이 변화시켜 이곳까지 왔는데, 그 작은 융통 하나를 못 준다면 야박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소설가 daum cafe 이관순의 손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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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8-10
  • 부부의 동고동락
    남녀가 손을 잡고 해외여행을 떠났다가 각기 다른 비행기를 타고 돌아온다는 우스갯말이 있다. 사람의 마음이 하나 되기가 그만큼 어렵다는 걸 빗댄 말이다. 남녀의 결혼도 다를 리 없는 것이, 시작은 설렘으로 ‘동고동락’을 약속하지만 살다 보면 이 네 글자 속에도 남편과 아내의 생각이 갈리기 때문이다. 남자가 ‘동고’를 떠올릴 때, 여자는 ‘동락’에 기대를 걸고, 한쪽에서 동을 가리키는데 다른 한쪽은 서를 연민하면서 오늘 밤도 부부는 한 지붕 아래 눕는다. 세상은 복잡하고 삶은 늘 혼선의 연속이다. 인생이 ‘아이러니’하다는 말이 그래서 잉태한다. 그만큼 아이러니는 인생사를 이야기할 때 종종 들먹이는 단어다. 때로는 사람의 이해를 훌쩍 뛰어넘어 당황하게, 때로는 당혹스럽게 만들기도 한다. 부부가 논리를 세우고 모델을 만들어 살지만, 결국 인생이 세상이 우리가 공들인 전략을 비웃고 간절한 기대를 배신할 때가 있다. 그래서 인생이란 아이러니하다는 것이다. 오순도순 지내다가도 한순간 다투고, 삐치고, 미움을 사다 화해도 하면서 해를 더하다 보니 부부가 다 환갑을 훌쩍 넘어 칠순이 눈앞에 와 있다. 그래도 식은 의기를 그러모아 부모가 짊어진 마지막 미션 수행에 나선 것이 마흔 넘은 딸을 결혼시키는 일이었다. 어렵게 혼처를 찾아 결혼을 시키고 이제 두 발 뻗고 살겠다 했는데 또 다른 걱정이 순번을 기다리고 있었다. 혼자 사는 장모님이 눈앞의 걱정으로 다가온 것이다. 근래에 부쩍 인지능력이 떨어져 더는 혼자 지내게 둘 수 없는 형편이 되었다. 남들은 듣기 좋은 말로 자식이 여섯인데 무슨 걱정이냐고 하지만, 형제 많은 집이라고 나을 것도 없었다. 저마다 이런저런 형편을 앞세워 눈치보기 바빴다. 혼자 사는 큰언니가 그중 낫지 않을까? 엄마가 끔찍하게 키운 막내딸이 정서적으로 좋지 않을까? 그래도 아들이 둘씩이나 있는데…. 막상 얘기가 나오면 모두 거북 목이 돼 움츠러들었다. 그러던 어느 날, 큰처남이 전화를 했다. 장모님이 콕 집어 막내딸이 좋고 홍서방이 편하다고 말씀하셨다는 것이다. 그러나 얘기를 들은 아내는 헛웃음부터 날리더니, 딱 부러지게 선을 긋고는 남편 입단속부터 시켰다. “뻔해. 큰올케가 부추긴 거야. 지금부터 당신은 모른 척해요. 내가 알아서 처리할 테니까.” 굳은 표정으로 말하는 아내를 보자니 5년 전 일이 생각났다. 돌아가신 어머니가 딱 지금의 상황이었다. 연로하신 데다 원인 불명의 어지럼증과 불면증에, 건망증까지 심해져 일상생활을 혼자 하시기에 무리라고 판단하면서였다. 자식은 아들인 나 하나뿐인데…. 남편이 고민 끝에 아내에게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 “여보 당분간 우리가 모시자. 더 어려워지면 그땐 요양시설을 생각할 테니까.” 그러자 아내는 한마디로 잘라 말했다. 미안하지만 나는 그런 그릇이 못 된다고 고개를 저었다. “어머니 시중드는 일은 다 내가 할 게. 철저히 당신 편에서 생각할 테니, 여보 용기를 내 보자.” 남편은 인내심을 가지고 아내를 설득하다가 깨달았다. 그렇게 힘들게 살아갈 자신이 없는 여자란 것을 알게 된 것이다. 막상 시어미를 시설로 보낸다 해도 마음 편히 지낼 여자가 아닌 것을 알지만 현실 앞에 장사가 없다는 것으로 방점을 찍은 남편은 어머니는 아들이 해결하겠다고 선언했다. 그랬는데 어쩌면 그때나 지금이나 그리도 판박이일까. 지금의 아내처럼 남편은 “내 선에서 해결하겠다”라는 말을 남기고 다음 날 어머니 집으로 가방을 꾸려 떠났다. 퇴직 후 텅 빈 시간을 어떻게 보낼까 걱정했는데 이런 일상이 기다리고 있을 줄은 몰랐다. 막상 부딪혀보니 밥 짓고 청소하고 빨래하고, 못할 바는 아니었다. 노모는 밥하고 빨래하는 늙은 아들을 쳐다보며 내가 할 테니 놔두라지만, 어떻게 키운 아들인데 멀쩡한 처자식 두고 와서 웬 고생이냐며 집으로 가라고 등을 떠밀지는 않으셨다. 노모는 아들의 어줍은 손놀림을 아는지 모르는지 은화처럼 가라앉는 눈빛으로 아들을 바라보았다. 아들과 그렇게 1년을 보내고 요양병원에서 넉 달 남짓 계시다 어머니는 돌아가셨다. 돌아보면 아들에겐 소중한 시간이었다. 마지막 어머니를 돌보는 일이 의미가 있고, 모자간 살뜰한 추억도 쌓았으니까. 만일 그 1년이 없었으면 지금처럼 마음이 편하지 않을 것이다. 그 시간이 있었기에 어머니를 생각하면 웃음이 나고 가슴이 따뜻해졌다. 남편은 자신의 경험을 전하며 당신도 어머니와의 마지막 시간을 나누면 좋겠다고 권했다. 장모님이 막내딸을 떠올렸다면 나름 이유가 되는 것이, 여섯 자식 중 장모님이 살아본 집은 막내뿐이었으니까. 아이들이 어렸을 때 막내딸이 안스러운지 자청해 3년을 같이 사셨다. 남편이 장모님 의중을 알 것 같아 내가 도와주겠다고 말했지만 아내는 ‘아니!’ 일언지하에 사양했다. 몸이 힘들어 싫고, 마음이 안 맞아 싫다고. 누군들 좋아서만 모시느냐고 한마디 얹었다가 조롱과 비난의 살이 돌아왔다. “이왕 말 나온 김에 말해 볼까? 나 그때 당신 짐 싸서 어머니 집에 갈 때 다시 봤어. 사람이 결혼했으면 아내와 자식에 대한 책무가 최우선이지 어떻게 그럴 수 있어? 이렇다 할 설명도 없이 어머니에게 훌쩍 가버렸을 때 내 심정 생각해 봤어? 당신에게 가정은 뭐고, 아내란 뭐지?” 남편은 그 말에 맥이 풀렸다. 충분히 대화했고 모시자는 안을 거부한 건 누구인데…. 배우자 처지를 그렇게 외통수로 몰아넣은 건 아내가 아닐까. 냉정히 따지면 그나마 그때 결정은 늙으신 어머니를 위한 아들의 마지막 선택이었지만, 지금은 딸이 제 어머니를 나 몰라라, 너무나 이기적인 심보 아닐까. 장모님을 위한 최선책을 생각해 보자는데 해묵은 이야기까지 꺼내서 싸잡아 비난을 하다니…. 남편이 서운함을 말하자 아내는 보다 냉정하게 짚고 나섰다. “당신 문제는 평생 나만 나쁜 여자로 만든다는 거야. 사람은 다 달라. 당신 같은 사람도 있지만 나 같은 사람도 있어. 나는 내 엄마든 당신 엄마든 누구도 우리 가정에 들이고 싶지 않아. 내가 당신처럼 가정을 팽개치고 엄마에게 갈 생각도 할 수 없고.” 아내는 정말 그때 일로 앙금이 남아 있는 것 같았다. 그러면 남편의 마음에 미안한 생각이 일어야 대화가 될 텐데 그렇지 않았다. 남편 가슴속에서도 눌러온 서운함이 감응하듯 굼틀거렸다. 남편은 생각했다. 어머니 모시는 일로 아파하고 밤잠을 못 이룰 때, 외면하던 아내가 지금의 나였다면 그렇게 무심하진 않았을 것이라고. 결혼 생활 40년을 넘긴 시점에서 스스로에게 되묻는다. 가정이 지켜야 할 소중한 가치가 무엇인가를. 평생에 걸친 희생과 봉사는 무엇이고 부부가 나누는 동고동락은 무엇인가? 부부가 평생을 함께 지내는데도 산다는 것은 이처럼 늘 복잡하고 혼선을 부른다. 그런 생각을 하며 부부는 오늘도 한 이불을 덮는다. -소설가/daumcafe 이관순의 손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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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8-07
  • 하늘에 별이 된 쿤데라
    7월 11일 세계문학의 일가를 이루었던 밀란 쿤데라가 아흔네 살의 일기로 하늘에 별이 되어 떠났다. 우리에겐 그의 소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으로 잘 알려진 작가다. 그는 공산당에서 두 번이나 제명된 후 모국인 체코를 떠나 프랑스에서 이방의 생을 살다가 ‘프라하의 봄’을 배경으로 쓴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으로 세계적인 명성을 얻었다. 그는 작품마다 냉소와 존재론적 탐구로 세상의 소란스러움을 이야기 했다. 그의 타계소식을 듣고 책장 깊숙이 잠자고 있던 소설 ‘느림’을 꺼냈다. 내가 그를 추모하는 방법은 그의 책을 다시 읽는 것이다. 나이가 들수록 세월이 ‘빠름빠름’ 이상으로 지나가고, 세상까지 ‘빠릿빠릿’을 재촉하니 내 생각이나 발걸음은 더욱 느려터지게 느껴지던 터이다. 초고속 초대용량 통신이 실현된 5G시대엔 영화 한 편 내려 받는데 걸리는 시간이 고작 0.8초. 인간의 초능력이 과학이란 날개를 달고 끝 모를 하늘로 날아오르는 것을 보자니 인간이 신의 영역을 침범하는 것같아 더럭 불안해지던 참이었다. 물음표를 계속 찍으면서 책을 읽었다. 시대의 아이콘인 ‘빠름’과 ‘편리성’이 우리네 삶을 마냥 행복하게 해줄까? 지금처럼 인생을 광속으로 내몰다가 틈새에서 빚어내는 농밀한 즐거움을 다 놓치는 건 아닌지. 임종을 앞둔 사람이 회상하는 건 거창한 것들이 아니라, 일상의 미세한 떨림으로 다가왔던 기억들이 아닌가. 인생을 살고나면 대단한 것들 보다 스치듯 지나간 순간들이 기억나고 그리워지는 법이다. 좀은 천천히, 좀은 늦더라도 놓쳐서는 안 될 것들을 느끼고 들추면서 사는 즐거움을 나는 얼마나 기억하고 있는가? 고즈넉한 저녁, 파리 근교의 고성을 향해 아내와 함께 한적한 길을 차를 몰고 달린다. 순간 뒤에서 빵빵~, 경적을 울리며 젊은 남녀가 차를 몰아 쏜살같이 추월해 달려간다. 그걸 보며 화자(話者)는 생각한다. 저 연인들은 이 아름다운 저녁을 감상하며 사랑의 밀어를 나눌 생각은 않고 저리도 달리는 충동에만 사로잡혀 있는가. 밀란 쿤테라의 소설 <느림(La Lenteur)>은 이렇게 첫 문장을 쓰고 있다. 쿤데라는 세상을 향해 탄식했다. “그는 아쉬워한다. 어찌하여 느림의 즐거움은 사라져 버렸는가. 아, 어디에 있는가 그 옛날의 그 한량들은.” 그의 작품은 늘 비극적이면서도 희극적인 인간 존재의 모호함과 불확실성에 대한 깊은 성찰로 다가갔다. 이 소설과는 IMF 광풍에 휩싸이던 1998년 처음 만난 후, 세상이 온통 희망으로 부풀었던 21세기 초입에서 두 번째, 그리고 20여 년 만에 세 번째 만남을 갖게 된 셈이다. 예전이나 지금이나 쿤데라가 던지는 화두는 늘 간결하면서 간절했다. 작중 화자인 ‘나’가 아내 베라와 함께 호텔로 개조한 프랑스의 한 성에서 하룻밤을 묵으며 소설을 구상한다는 것이 내용의 전부인 이 작품에서 쿤데라는 희화의 날을 세웠다. 그는 작품을 통해 느리고 한가로운 관조와 여유가 사라져버린 오늘날의 현실을 특유의 가벼움과 철학적 유머로 느릿느릿 끌질을 쉬지 않았다. 그는 느림의 한가로움은 게으른 빈둥거림과 다르며, 그것은 마치 신의 창(窓)을 열 수 있는 행복이라고 동의를 구하기도 한다. 다시금 관조하게 되는 말... ‘느림이란 기억이고, 빠름이란 망각’이 아니던가. 과거를 회상하고 미래를 구상할 때 발걸음은 느려지고, 모든 것을 잊고 싶어할 때 발걸음은 빨라지는 법이다. 슬픈 것은 우리의 발걸음이 계속 빨라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모락모락 이는 자괴감은 툭하면 뛰자고 했던 우리의 자화상이다. ‘빨리빨리’를 최고의 가치로 숭앙해온 우리를 떠올리며 다시금 쿤데라의 ‘느림의 철학’을 생각한다. 속도를 멈추고 달려온 길을 되돌아보며 무엇이 잘못 됐는지, 고칠 것은 고치고 다시 나갈 길을 곰곰 따져볼 때가 아닌지. 코로나 덫에 갇힌 때가 이를 취할 수 있는 적기였다. 작품을 통해 “느림의 정도는 기억의 강도에 정비례하고, 빠름의 정도는 망각의 강도에 정비례한다”라는 말은 너나없이 속도에만 집착해온 세상에 대한 탄식과 날선 비판을 담았다. 작품 속의 춤꾼의 비유도, 오직 대중적인 인기에만 연연하는 광대 인생들에 대한 신랄한 비꼼이며, 욕망에 대한 인간들의 집착이 얼마나 허망한 것인지를 일깨웠다. 희극과 비극이 뒤엉킨 인간의 운명을 특유의 유머가 밴 철학적 사유로 보여주는 쿤데라의 매력은 <느림>에 이어 국내에 소개된 소설 <정체성>에서도 예외 없이 나타났다. 그는 외쳤다. “어느 날 그 여인이 변했다. 그렇다면 그 여자가 달라진 것인가, 아니면 나의 시선이 변한 것인가?” <농담>,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느림>에 이어 <정체성>에서 그가 던지는 또 하나의 번뜩이는 비수다. 그는 도대체 삶의 비밀을 어느 정도 인식하며 살았을까. 부서지는 햇살이 천지에 피를 돌리고, 이슬에 낯을 씻은 연한 풀잎들이 옷깃을 여밀 때, 바람이 잉태한 나뭇잎들의 노래를 들으며 쿤데라는 별이 되어 하늘로 이사를 했다. 이제 내가 할 일은 그가 남기고 간 <느림>의 체온으로 나만의 순결을 찾아 떠나는 것이다. 열차가 발정 난 멧돼지처럼 삽시에 지나간 양수리 간이역 자리에는 지금쯤 무슨 꽃이 피고 있을까. -소설가/daumcafe 이관순의손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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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8-03
  • 26년 전 딸에게 보낸 편지
    신록의 푸름이 시름을 달래주던 5월도 하순에 들어섰구나. 가족들이 썰물처럼 빠져나간 텅 빈 집안에 허물로 벗어놓은 너의 잔영과 목소리가 갱엿처럼 눌어붙는 아침이란다. 아직도 실감나지 않은 고3이란 현실이. 부모 품 떠나면 아무 것도 못할 것 같던 네가 어느새 커서 제 앞가림하겠다고 애쓰는 걸 보다니···. 오늘따라 약수터에서 날아오는 아카시아 잔향이 네 어릴 적 목욕시키던 아이보리 비누 향처럼 감미롭구나. 샛노란 개나리가 화사하게 펴오르던 3월, 아니 그보다 훨씬 먼저 너의 고3 레이스는 시작됐었지. 당찬 구석도 없는 게 그 황량한 고3 언덕을 잘 오를 수 있을까. 사실 걱정이 많았단다. 도시락 두 개 싸들고 아침에 나가면 자정을 넘겨 돌아오는 널 보면서 자식 위한 일이면 뭐든 다 할 것 같았는데, 막상 당하고 보니 내가 더 도와줄 게 없다는 걸 알면서 무력해 지는 나를 바라보기도 했지. 어느새 진달래, 철쭉, 목련화, 라일락까지 차례로 피었다지고, 지금은 담장마다 넝쿨장미가 한창인데, 아직도 넌 올라야 할 가파른 언덕에서 눈을 돌리지 못하는 모습이, 마치 군화 신고 행군에 나선 군인 같아 안쓰럽기도 하다. 엄마가 그러더라. 그래도 고마운 건 짜증내지 않고 “다녀왔습니다.” 하얀 잇속 드러내며 웃는 너의 인사가 고맙다고. “왜 그래 엄마? 고3이 별 건가? 다 그렇게 지내.” 그 말에 자식을 위로하려던 엄마에겐 위안이 되고 덤으로 힘까지 얻는다더라. 너는 내게도 늘 그렇게 썰렁한 표정으로 말하지만 너를 기다리는 밤엔 때때로 마틴 루터의 고백을 되뇐단다. “난 네게 부귀를 주지 못하나 자랑스러운 하나님을 유산으로 물려준다”고···. 할머니가 물려준 유산을 엄마 아빠가 이어받고, 다시 너희가 귀히 받아 누리다가 너희 자식대로 물려진다면 그 이상의 복이 어디 있겠냐고. 우리 가족 모두 그 유산으로 삶에 자부심을 가지고 살았으면 좋겠다. 아직도 네게는 달려온 길보다 달려갈 더 먼 길이 남아있단다. 미래가 불안한 사람의 걸음은 빨라지고 조급해 지는 법이다. 그러나 신뢰하는 자는 달에 첫 발자국을 남긴 암스트롱처럼 두려움 없이 발걸음을 내딛는단다. 그 힘이 어디서 나오는 지 넌 알지? 전능하신 하나님을 신뢰하고 모든 것을 맡기며 쉬지 않고 기도하는 것이고, 연약한 나는 매일 죽이고, 아침마다 새롭게 태어나는 것이어야 한다. 오늘도 무거운 책가방을 메고 또 하루 고단한 생활을 시작한 내 사랑하는 딸을 위해 기도한다. “하나님, 저 아이가 고등학교 3년 과정을 통해 사랑과 능력의 하나님을 체험하는 기회가 되도록 도우시고, 최후의 승리자로 남아 주 앞에 감사가 고백이 되는 길로 인도해 주소서.” 1995년 5월 21일 *얼마 전 책장에서 찾은 편지. 생경하면서도 반가운··· 내게 이러한 시간이 있었구나. -소설가daumcafe 이관순의 손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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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7-31
  • 젓가락 한 짝
    친구로부터 존경받기란 쉬운일이 아니죠. 예수님도 고향에서 배척당하는 쓴 경험을 하셨으니까요. 그럼에도 ‘존경’이란 수식어를 달아주고 싶은 기업가 친구가 있습니다. 얼마전 그의 사무실을 방문했다가 놀랐습니다. 출퇴근을 전동 킥보드를 타고 한다는 사실 때문입니다. 그동안 1시간을 걸어서 출퇴근한다는 건 알은 터이지만, 그 일도 예사롭지 않은 데 일흔 넘은 나이에 전동 킥보드라니! 돌아보니 한쪽에 킥보드와 헬멧, 무릎보호대 등 안전 장구가 보입니다. 늘 풍부한 아이디어로 새로운 걸 찾고 도전하기를 즐기는 것이 그의 일상이라해도 이런 사고를 칠 줄은 몰랐습니다. 시작한 지 달포 남짓, 엉치에 든 멍과 발목에 남은 부기를 직접 보고야 그 가상한 용기와 기백에 새삼 눈을 떴지요. 시작하면서 열 번만 넘어 지자고 계획했는데 아직 여섯 번 남았다고 자신이 넘칩니다. 친구는 지난 해 사랑하는 아내를 잃었습니다. ‘내 인생에 가장 비참한 날’ 이라고 조용히 아픔을 알려왔었지요. 고인의 뜻에 따라 부음이란 상례없이 간소한 가족장으로 아내이자 애들 엄마와 이별을 했습니다. 친구는 지난 1년을 아무도 모르 게 두 얼굴로 보냈지요. 낮에는 1조 클럽의 기업 CEO로 열정적인 활동을 하다가, 퇴근하면 투병 중인 아내의 병 시중을 드는 남편으로, 또 다른 삶을 살았습니다. 퇴근길에 마트에서 아내가 원하는 식재료를 사다 조리하고, 밥하고, 청소하고, 통증을 호소하는 아내를 연민하지만, 주위에선 이런 사정을 몰랐습니다. 외부의 조력없이 홀로 아내의 곁을 지킨 겁니다. 그동안 내 주변에 짝 잃은 분들이 여럿 생겼습니다. 사람들이 죽음처럼 준비없이 만나는 게 또 있을까? 나름 준비를 한다고 하지만 막상 일을 당하면 광야에 홀로 떨어진 자신과의 만남은 똑 같습니다. 흔히 여자 먼저 보내고 혼자 된 남자처럼 안 된 것이 없다고 해도 누가 먼저 가든 색깔만 달리할 뿐입니다. 배우자를 잃고 겪는 낯선 슬픔과 어려움은 남녀라고 유별할 게 없으니까요. 혼자된 친구들을 떠올리다 ‘젓가락 한 짝이 부러졌다’는 생각이 가슴에 공명을 일으켰습니다. 두개가 짝인 젓가락을 쓰다가 어느 날 하나가 부러진다면? 남은 한 짝으로 무엇을 할 수 있을까···. 감성이 풍부하고 섬세할수록, 부부 간 정이 깊고 다감한 사람일수록 젓가락 한짝의 상실감은 클 수밖에 없습니다. 그럼에도 친구의 홀로서기는 내 인식에 변화를 자극했지요. 친구는 아내와 이별도 내 인생이 늘 겪는 하나의 시련이고, 내가 넘어야 할 산이라고 했습니다. “내가 평생을 그렇게 살았잖아. 인생 전체로 보면 한 과정이라 생각해. 지금까지 많은 역경을 견뎠는데 그 중 하나. 이겨내야지 도리없잖아?” 오히려 아내가 ‘자유’라는 큰 선물을 주고 떠났다고 합니다. “나를 모든 속박에서 풀어주는 자유를 주었으니 그 선물을 즐기려 한다”는 말에서 ‘바로 저것!’ 삶은 인식하기 나름임을 재우쳐 깨닫습니다. 그는 회사 창업이래 43년 동안 사업가의 험한 도전의 길을 걸으면서 하나님과의 동행을 늘 갈망했습니다. 역경을 이겨내는 과정을 통해 온몸으로 체화한 것이 ‘감사’고, 감사 뒤엔 늘 열매가 따른다는 진리를 터득한 사람입니다. 이젠 아내가 준 자유에서 ‘기쁨’을 찾겠다고 합니다. 감사에서 한 발 더 나아가 ‘감사를 즐긴다’는 뜻입니다. 아내가 떠나면서 모든 관계를 정리해 주고 신경 써야 할 모든 것을 걷어갔으니, 내 관심은 미래에 있지 과거로 회귀할 수 없다는 겁니다. 더 일에 몰입하고, 새로운 것에 도전하고픈 열망이 생긴다고 해요. 아침에 일어나면 간밤에 들어온 메일을 꼼꼼히 살피고, 외국어 공부 시간을 늘리고, 주(週) 2회 하던 헬스는 전일로 확대했습니다. 전동 킥보드도 그중 하나죠. 건강이라는 기본에 충실하자는 겁니다. 떠난 지 한 달이 넘는 동안 아내한테는 한 번 갔다고 합니다. “가까우니까 갈려면 자주갔겠지. 그런데 집사람이 그러는 것 같아. 그동안 나 때문에 수고했는데 여긴 그만 오고 당신 좋아하는 일에 집중하라고.” 돌아오는 전철에서 생각합니다. “사랑도, 봉사도 살아있을 때 일” 임을. 아내를 보내고 자유의 날개를 새로 단 친구에게 마음의 편지를 씁니다. '그 날개는 아내가 선물로 준 것이니, 남은 여생을 더 열정적으로 살고, 매사에 감사하고 즐기시게.' -소설가daumcafe 이관순의 손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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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7-27
  • 일본은 아픈 나라이다
    아무리 슬퍼도 울지 않는 사람을 독하다고 말한다. 부모님이 돌아가셨는데, 눈가만 촉촉할 뿐 소리 내어 울지 않는 딸을 보고 ‘독한 년’이라고 숙덕이던 동네 어른들 모습이 기억에 남는다. 이러한 모습은 한국인의 정서상 극히 예외적인 경우라 하겠다. 우리는 영화보다 울고, 드라마 보다 울고, 심지어 남의 슬픈 사연을 듣다가도 화장지를 찾는다. 꼭 슬퍼서만 우는 것도 아닌 게 우리는 기뻐서도 울고 억울해서도 운다. 우리의 눈으로 일본사람을 보면, 잘 이해가 안 되는 부분이 그런 것 아닐까? 그들은 우리와 달리 좀처럼 눈물을 보이지 않는다. 여름철마다 태풍이 왔다 하면 열의 일곱여덟은 일본 열도로 상륙하는 걸 보면서 땅도 잘 만나 태어나는 것이 복이라는 생각을 했다. 그럼에도 의아한 것은 그 많은 재난을 겪으면서도 일본 사람들은 비통해할 뿐 우리처럼 대성통곡을 하지 않을까. 5년 전, 홋카이도 지진에 오사카 태풍 등 연이은 재난으로 열도가 쑥대밭이 됐을 때, 뉴스를 보다가 문득 그런 의문을 떠올렸다. 산사태로 깔려 죽은 남동생의 시신을 찾은 누나가 보인 첫 반응이 너무나 의외여서 놀랐다. 통곡을 해도 모자랄 판에 한다는 말이 “동생의 마지막을 볼 수 있어서 다행이네요’라는 반응을 보인 것이다. 어떻게 저리도 차분할 수가, 냉정할 수가 있지? 그 장면이 너무 인상 깊어 한동안 머릿속을 맴돌았다. 우리 같으면 몸을 가누지 못할 정도로 오열할 텐데, 저렇게 감정을 다스릴 수 있다는 것이 신기해 보였다. 하루는 한국 남자와 결혼해 서울에서 사는 일본여성과 일 때문에 만나는 자리가 있어서 물어봤다. “가족이 죽었는데 왜 슬피 울지를 않는 건가요?” 돌아온 답은 “일본 사람이라고 슬픔이 왜 없겠어요. 다만 남들 앞에 눈물을 보이지 않으려고 할 뿐”이라는 것이었다. 슬프면 우는 게 당연하지 않으냐고 되묻자 “울음을 터트리면 감정을 드러내게 되고, 감정을 억제하지 못하면 타인과 충돌할 수도 있잖아요.” 그날 만남에서 일본사람들 의식 속에 깊이 뿌린 내린 것이 남에게 피해 주는 일은 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가슴에 슬픔이 가득해도 겉으로 드러내지 않는 것이 오랜 역사 속에 굳어진 일본인의 습성임을 확인하게 된 것이다. 감정을 터뜨려 슬픔을 나누고 서로 의지하는 우리의 정서와는 크게 다른 점이었다. 그녀도 느끼는 게 있는지 고베지진 때 ‘눈물을 흘리는 만큼 강해질 수 있어’라는 노래가 일본에서 유행했다고 전한다. 감정을 가슴속으로 삭이지 말고 드러내고 살자는 그런 노래였단다. 노래까지 만들어 부를 정도였다면, 그들 스스로 감정을 드러내지 않고 사는 삶의 행태를 자각하고 있다는 뜻일 게다. 우리에겐 안 우는 일본인이 신기한데, 그녀의 눈엔 잘 우는 한국인이 기이했던 모양이다. 한국에 처음 와서 가장 낯설어한 것 중 하나가 한국인의 우는 문화였단다. 자식이 부모를 잃고 슬프게 우는 건 당연하다 해도 다른 사람들까지 함께 부둥켜 우는 모습은 한동안 이해불가였다며 웃어 보였다. 한국에는 일본에서 보기 힘든 눈물이 더 있다고 했다. 억울하고 분해서 흘리는 눈물 말이다. 분함은 똑같은 상정이지만, 일본인은 ‘분함’의 이유를 남이 아닌 내게서 찾으려고 한단다. 최선을 다하지 못한 내가 후회되고 속상하다는 것이다. 그런데, 한국 사람은 분함의 이유를 나보다 ‘너 때문’이라는 생각을 많이 하는 것 같다고 했다. 그들은 자연재해를 당해도 운명으로 돌리고 곧 잘 체념한다. 인간의 힘으로 어쩔 수 없는 재난이 잦다 보니 자연에 순응함이 몸에 밴 탓일까. 그렇게 감정 표현을 아끼면서 연애는 어떻게 하느냐고 되묻자 까르르 웃고는 이렇게 대꾸했다. “서울에 와서 놀란 일이 있어요. 공원에 앉아 있는데 연인끼리 심하게 싸우면서 지나가는 거예요. 이제 파탄이다 했는데, 좀 있으니까 언제 그랬느냐는 듯 손잡고 웃고 나오는 거예요.” 다시 웃음꽃이 폈다. 이번에는 그녀가 내게 질문을 했다. “일본서 한류 드라마의 주요 인기 요인이 뭔 줄 아세요?” 잠시 머뭇대다 꽃미남? 하자 고개를 흔들고는 “남자의 눈물이에요. 드라마에서 남자들이 우는 장면을 보면 너무 신기한 거예요. 남자가 사랑 때문에 우는 그 자체가 감동인데, 게다가 꽃미남이 울고 있는 거잖아요.” 그제야 절로 고개가 끄덕여졌다. 꽃미남의 눈물이 일본 아줌마들의 영혼을 흔들어놓는다는 이유를. 루스 베네딕트가 쓴 ‘국화와 칼’은 일본사회를 이해하는 고전이다. 국화의 상징이 다양하지만 대체로 심미적인 아름다움을 상징한다면, 칼은 그 이면에 숨긴 잔인한 죽음의 이미지를 떠올리게 한다. 오랜 바쿠후(幕府)의 지배 때문이겠으나 사무라이 문화와 할복의 전통이 칼을 일본의 이미지로 형상화했다. 무거운 죽음의 이미지가 심미적 태도와 만나 기이하게 죽음의 미학으로 표현되고, 그래서인지 일본문학에서의 죽음은 슬픔을 크게 내포하지 않고 있다. 그저 삶의 한 유형으로 담백하게 마주하고 때론 아름답게 보기도 한다. 많은 사람이 일본의 국화로 잘못 알고 있을 만큼 일본인들이 좋아하는 ‘사쿠라(벚꽃)’를 생활 문화 속에 자주 등장시키는 데서도 확인된다. 사쿠라는 우리 옛말 ‘사그라지다’에서 나왔다고 한다. 화사하게 피었다 어느 한순간 쏟듯이 져버리는 담백함에서 일본인의 기질을 보게 된다. 인양된 남동생의 시신 앞에서 차분하게 ‘동생의 마지막을 볼 수 있어 다행’이라고 한 누나의 말처럼 슬픔이 농익으면 저런 모습일까. -소설가daumcafe 이관순의 손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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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7-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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