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5-09(목)
 

남양주의 한 노래방에는 한 달에 한 번 모여 일본 노래를 부르는 모임이 있다. 말이 노래방이지 식당에서 손님들의 여흥을 위해 부대시설로 꾸며놓은 무허가 노래방이다. 일본 가요를 좋아한 식당 주인이 엔카(演歌. enka) 동호인들에게 장소를 제공했다. 회원 상당수가 7080 세대로, 식민기에 태어나 일본어를 배운 연배들이다. 약속 날이 되면 서울과 분당 춘천 등에 흩어져 살던 회원들이 이곳을 찾는다.

 

우연한 기회에 그곳 식당에 들렀다가 오랜만에 엔카를 들었다. 모임을 끝내고 나오는 80대 노신사와 인사를 나누었다. 엔카의 고전으로 불리는 가수 후리지야마 이치로의 그림자를 사모하여를 열창한 분이셨다. “어떻게 일본 노래를 그리 잘하시느냐?”라고 묻자 내 인생에는 그림자처럼 따라붙는 것이 일본이라고 대신했다.

 

나는 반평생을 일본에서 일본어만 쓰며 살았어요. 꽃다운 시절을 그렇게 보내다 보니 모든 게 엉켜져 있어요. 이젠 좋고 싫고를 떠나 이것도 내 인생의 일부다 생각하며 살아요. 다만 가슴 한 구석에 웅크리고 있는 그 시절을 가끔은 풀어주고 싶을 때가 있어요. 그날이 오늘 같은 날이죠. 끝까지 내 곁에 남아줄 친구는 노래밖에 없다는 생각을 해요.”

 

노신사의 말에서 어디선가 본 듯한 기시감을 느꼈다. 가물가물하게 느껴지는 어린 시절. 가슴에 잠들어 있던 친구가 부스스한 머리로 고개를 들었다. 고향 친구인 그와는 수다스럽게 만나 입씨름하는 사이는 아니어도, 언제라도 마음에서 꺼내볼 수 있는 내겐 참 무해(無害)한 친구였다. 한국인 아버지와 일본인 어머니 사이에 태어나 아버지를 6.25 전란으로 잃고, 청상의 어머니와 어렵게 어린 시절을 보냈다. 어른들은 그를 아이노코라고 불렀다.

 

그와 나는 단짝으로 초등학교 6, 중학교 3년을 함께 했다. 한없이 착하고 말수가 적고 마음이 여려서 학교에서는 존재감이 별로였지만, 노래 솜씨 하나는 출중했다. 나와 단 둘이 있을 때는 일본 가요 엔카를 슬프게 들려주었다. 삶의 시름을 노래로 풀어내던 어머니의 영향 탓일 게다. ‘그림자를 사모하여라는 노래도 그중 하나였다. 친구가 교대를 나와 음악 선생이 되어 지방으로 내려가기 전까지 우리 둘은 틈틈이 만나 우정을 나눴지만, 이후로는 거리적으로도 멀리 있고 각자 생활에 쫓기면서 편지와 전화로 안부를 주고받았다.

 

그날 집으로 돌아와 친구와 전화 통화를 했다. 난생처음 한 시간 가깝게 긴 통화를 했다. 그만큼 얼굴 본 지가 2년이 다 됐는데도 멀리 느껴지지 않는 친구였다. 그리고 한 주쯤 지났을 때, 친구로부터 연락이 왔다. 오늘 서울 가는데, 3시에 대한극장 뒤 필동면옥으로 나오라는 것이다. 예나 지금이나 친구와 나는 늘 이런 식으로 서로를 불러냈다.

 

비가 추적대는 날 그를 만났다. 여전히 나의 손을 잡는 그의 얼굴을 감싸는 착한 미소는 포근하고 살가웠다.

시간 괜찮아? 억지로 불려 나온 건 아니지?”

안 괜찮으면? 돌아가랴?”

 

1년 만에 만나서 이렇게 첫 대화를 열고 곰탕 한 그릇을 말아먹었다. 모습은 예전 그대로이나 딱 하나 변한 게 있다면 쉬지 않고 이야기를 쏟아내고 있다는 점이었다.

너 많이 변했다. 웬 수다가 이렇게 늘었지?”

그야 어찌 됐든 오늘 화자는 나고, 자네는 객석 손님인 거야. 원래 너 같이 지혜로운 사람은 듣는 게 장기잖아.”

 

그는 3년 전 학교를 정년퇴직하고 음성에 혼자 내려가 약초 밭을 가꾸며 지내고 있었다. 현지 생활을 묻자 다른 것은 다 좋은데 말 상대가 없다는 것이 아쉽다고 했다. 낙향하려면 부부가 같이 움직여야지 만년에 고생을 사서 하느냐고 말했다가 내가 무식한 사람이 되고 말았다.

 

요즘 어떤 여자가 시골로 따라가나? 내가 음성 내려간다니까 마누라가 연막부터 치더라. 시골 갈 생각은 털끝도 없으니, 그러려면 이혼할 각오부터 하라더라.”

평생을 남편과 자식 뒷바라지에 헌신했으면 됐지, 새삼 이 나이에 시골 구석에 내려가 생고생을 하느냐고 손사래를 친 부인 말도 틀리진 않았다. 부부는 자연스럽게 구획 정리를 해 아내는 서울에서, 남편은 음성에서 각자의 삶을 산 지 3년인데, 결론은 서로가 편하다는 것이었다. 주위를 둘러보면 부부가 떨어져 사는 사람이 의외로 많이 있다. 딱히 부부 사이가 나빠서가 아니었다. 삼시세끼 식사 준비하는 것도 신경 쓰이고, 종일 얼굴 맞대고 있는 게 서로가 불편하다는 것이다.

 

그날 나는 다섯 시간을 친구에게 붙잡혔다. 다른 자리 같으면 일어나도 몇 번을 박찼을 텐데, 긴 시간을 진득하게 자리보전하고 그의 말을 들었다. 필동면옥에서 시간 반, 호프집에서 3시간 반을 친구에게 귀를 열어준 셈이다. 마을과 떨어져 혼자 살다 보니 대화가 궁하다는 것을 눈치채면서였다. 처음엔 주말마다 서울 집에 올라오다가, 시간 맞추어 사람 만나는 것도 마뜩잖아 1년 전부터는 필요할 때만 올라온다고 했다.

 

500CC 한 조끼만 하겠다고 붙잡힌 것이 하나만 더, 하나만 더 하다가 여섯 조끼로 늘어났다. 고향 이야기, 학창 시절 이야기, 군대 이야기, 직장 이야기, 농장 이야기까지 슬프고도 아름다운 이야기가 그의 입에서 수없이 교직 되었다. 암 투병 끝에 하늘나라로 떠나는 어머니를 두 팔로 가슴에 안고 마지막 임종을 눈물로 지켜보았다는 이야기를 들을 적엔 친구의 아팠던 마음이 절로 헤아려졌다.

 

10개월을 동거한 누렁이 이야기도 잔잔한 파동을 느끼게 했다. 동네 이장이 혼자 있으면 적적할 거라면서 강아지 한 마리를 주어 키운 것이 그동안 정이 듬뿍 들었다. 이젠 떨어져서는 못 살 것 같은 가족이 되어, 아예 이름을 양순이로 지어 불렀다. 때로는 사람 그림자 하나 비치지 않고 걸려오는 전화 한 통이 없는 날에는 하루 종일 입을 닫고 살았는데, 누렁이가 온 후 생활에 활기가 생겼다고 했다.

 

반갑다고 꼬리를 흔들고, 그림자처럼 졸졸 따라다니면서 대화의 상대가 돼 주었다. 아침마다 내가 나오기를 문 앞에서 기다려 주고, 늦잠이라도 자는 날엔 컨테이너 철문을 발톱으로 박박 긁으면서 주인을 깨웠다. 새우깡 한 봉지면 녀석과 한 시간을 약 올리면서 즐길 수도 있었다.

 

그렇게 좋은 세월을 함께 한 누렁이가 어느 날 이상한 낌새를 보였다. 사료 먹는 양이 줄더니 자꾸 집에 들어가 누우려고 했다. 체증이 있나 싶어 활명수를 입을 벌려 털어 붓기도 했으나, 먹는 것을 포기했는지 밥그릇에 사료를 그대로 남겼다. 녀석이 좋아하는 새우깡을 코앞에 대고 냄새를 풍기자 그제사 억지 힘을 써 집에서 나왔다. 예전 같으면 손에 든 새우깡을 채려고 껑충껑충 뛰어올랐을 텐데 눈망울만 굴리다 집으로 기어들어갔다.

 

이튿날은 잠을 설치느라 늦잠을 잤다. 필연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어야 하는데 기척이 없었다. 이상한 느낌이 들어 나가 보니 누렁이가 피똥을 싸고 죽어 있었다. 참으로 허망했다. 정 붙이고 산다 했는데 이렇게 죽다니, 마음이 가족이 떠난 것처럼 아프고 쓰라렸다. 녀석을 끌어다 농장 한구석에 묻어주었다. 일손이 안 잡히고 한참을 멍 때리다가 나중에는 녀석이 환영으로 보이기까지 했다. 동물인데도 이별 의식이란 이렇게 모질고 슬펐다. 그것으로 5시간 이야기는 끝이 났다.

 

새드무비로 끝내서 좀 그렇다 그렇지?”

"얘기 잘 들었다. 건강 잘 챙기게."

그와 헤어져 집에 오니 밤 10시가 넘었다. 샤워를 하고 나와 서재에 앉았는데 전화가 왔다. 친구였다.

친구, 오늘 미안했어. 내 말 들어주느라고 고생했지?”

알긴 아는구나.”

자네 덕분에 스트레스가 확 풀렸다. 친구가 그래서 좋다는 거 아냐? 자네 같은 친구가 곁에 있다는 게 나로선 복이지. 고맙다 친구, 잘 자게.”

 

친구는 나랑 헤어진 후 서울 집으로 가지 않고 그 길로 음성 농장으로 내려갔단다. 그것이 편하다고 했다. 나이가 드니 삶의 변화가 이렇게도 찾아오는구나. 다섯 시간이나 나를 붙잡아놓기도 하고, 비 오는 밤에 농장으로 내려간 친구나, 서울에서 편안한 삶을 즐기는 아내나, 좀은 이기적인 모습이지만 양쪽 다 너그럽게 이해가 되었다. 가슴 한 구석에 나를 가두고 일생을 희생과 봉사로 살았으니까. 나도 이제는 가끔 봉인해 둔 나를 풀어주고 싶을 때가 있다. 남양주에서 만난 그 노신사처럼.

 

그만하면 우리 모두 애써 살지 않았나? 평생 가족 부양이란 고달픔을 끼고 살았던 몸을 생각한다면, 좀은 그렇게 살아도 크게 흉이 될 것 같지 않았다. 세월이 이렇게 소리 없이 나를 휘감아 가며 끊임없이 변화시켜 이곳까지 왔는데, 그 작은 융통 하나를 못 준다면 야박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소설가 daum cafe 이관순의 손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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