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5-13(월)
 

발설한 걸 알면 난 죽어.’ 하면서도 결국엔 근질거리는 입을 열어야만

성이 풀리는 게 사람입니다. 사람이 할 말을 못하고 살면 병이 된다고,

그래서 세상에는 비밀이 없는 모양입니다.

 

동서에 산재한 설화 중 임금님 귀는 당나귀가 대표적인 것이겠지요.

신라 경문왕과 두건지기 이야기는 어떤 설화보다 현실감이 팽만합니다.

왕의 두상 비밀을 지키느라 두건장이의 속병은 평생을 이어갑니다.

 

죽음이 가까워지자 두건장이는 이판사판이란 생각으로 가슴속 비밀을

대밭에 나가 시원하게 토설하고 말지요. 그런데, 속은 시원해졌지만

바람이 불면 대숲에서 소리가 납니다. ‘임금님 귀는 당나귀라고.
어쩌면 그렇게 착상이 사람 심리를 콕 집었습니다.

 

사람들 이야기 잘 들어주는 한의사 한 분을 알고 있습니다. 진료차

내원한 사람이 엉뚱한 고민을 털어놔도 다 받아줍니다. 주말에 그 분과

수락산을 오르는데 일행 중 여성이 자신이 겪는 힘든 얘기를 꺼냈어요.

 

쉬지 않고 이어지는 이야기···. 정상에 올라 하산 때까지 그녀의 불행과

함께 하느라 이날 등산은 재미는커녕 입안에 쓴 맛만 돌았습니다.

한의사가 시종 여성의 아픈 사연을 경청 위로했기 때문입니다.

 

그 날 산행도 그에겐 수행의 도장임을 알게 되었지요. 그는 10년 전

티베트에 갔다가 티베트 불교의 통렌에 심취하여 이를 실제 삶의

현장에서 실천하는 사람입니다. 통렌은 남의 고통과 내 행복을 바꾸는

호흡 명상 수행법입니다.

 

모든 사람들의 고통을 들이마시고 내 안에 있는 행복의 기운을 내주는

것입니다. 그럴수록 괴로워하는 이들의 고통은 점차 사라지고 더불어

나도 행복해진다는, 아름다운 수행법이죠. 삶을 교정할 수 있는

나만의 수양법이 있다는 건 복된 일입니다.

 

한 어머니가 멀리 시집보낸 딸을 생각하면 가슴부터 미어집니다.

새파란 서른 살 나이에 어쩌다 청상이 되어 어린 아들과 시모를 모시고

사는 딸의 기구한 팔자가 눈물겨웠기 때문입니다.

 

하루는 딸이 얼마나 힘들게 살고 있는지 어렵게 시간을 내어 먼 길을

찾아갔습니다. 불시에 나타난 엄마를 보고 놀라는 딸의 모습에서

어머니는 얼마나 삶이 고된지 한눈에 알아챕니다.

 

딸과 바람을 쐬려 한다고 사돈의 양해를 구해 밖으로 나왔습니다.

마을 뒷산에 올라 깊은 숲길로 들어선 어머니가 딸의 손을 잡습니다.

내 기구함이 내 딸 정수리로 흘러내릴 줄은 몰랐구나.”

 

대를 이어 청상이 된 딸의 운명을 가슴 아파한 것입니다. 6.25전쟁 때

남편을 잃고 딸 하나에 모든 걸 걸고 홀로 키워낸 친정어머니입니다.

엄마, 나 괜찮아요. 이건 내 운명이지 엄마 하고는 상관없어요.”

 

솔숲에 이르자 어머니는 주위를 살핀 후 딸의 손을 이끌고 수령이

백 년은 됐을 소나무 앞으로 다가갔습니다. “잘 들어라. 나도 널 키울 때

이래 살았다. 가슴이 아프고 터질 것 같거든 참지 말고 여기 와서 다

쏟아라. 나무가 엄마다 생각하고.”

 

딸은 그러겠다고 약속했습니다. 모녀는 하룻밤을 함께 하고 헤어집니다.

그리고 세월이 흐른 뒤 아카시아 꽃향이 산골에 가득 차오르던 5월에

친정어머니가 다시 딸네를 찾아왔습니다.

 

좋은 일이라도 있느냐? 얼굴이 많이 나아보이는구나.” 딸이 배시시

웃기만 합니다. “어쨌든 편해 보이니 좋다.” 이번엔 딸이 어머니 손을

잡고 뒷산 숲길로 이끌었어요. 그리고 그 나무 앞으로 안내했습니다.

 

딸이 나무를 바라보면서 엄마에게 말합니다. “엄마가 시킨 대로 했어요.

나무가 엄마라 생각하고 슬프면 와서 앙탈 부리고 통곡하고, 그랬더니

가슴이 뚫렸나 봐요.” “그래, 아주

잘했구나.”

 

어머니가 나무를 살핍니다. 나무는 몇 년 사이 많이 쇠해 보였습니다.

지난 태풍에 오른쪽 큰 가지가 부러져 몽똑한 모습이 안쓰럽고, 한쪽

가지는 솔잎이 누렇게 말라 기진함이 역력합니다.

 

그런 나무를 향해 친정어머니가 심정을 전합니다. “미안하네. 우리

딸 설움 받아주느라 자네가 이리됐구먼. 그래도 자네가 사람 하나를

살렸네. 한없이 고맙네.”

 

나무에 정령이 있다고 믿는 어머니처럼, 통렌 수양을 하는 한의사

처럼, 나무도 연민을 내보내고 괴로움을 받아들이는 기쁨을 느꼈을지 모릅니다.

자연은 모든 존재를 대상으로 자비와 자애의 마음을 나누니까요···.가족으로 존재하는 이유

-소설가/daumcafe 이관순의손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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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 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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