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5-09(목)
 

신록의 푸름이 시름을 달래주던 5월도 하순에 들어섰구나. 가족들이

썰물처럼 빠져나간 텅 빈 집안에 허물로 벗어놓은 너의 잔영과 목소리가

갱엿처럼 눌어붙는 아침이란다.

 

아직도 실감나지 않은 고3이란 현실이. 부모 품 떠나면 아무 것도 못할

것 같던 네가 어느새 커서 제 앞가림하겠다고 애쓰는 걸 보다니···.

오늘따라 약수터에서 날아오는 아카시아 잔향이 네 어릴 적 목욕시키던

아이보리 비누 향처럼 감미롭구나.

 

샛노란 개나리가 화사하게 펴오르던 3, 아니 그보다 훨씬 먼저 너의

3 레이스는 시작됐었지. 당찬 구석도 없는 게 그 황량한 고3 언덕을

잘 오를 수 있을까. 사실 걱정이 많았단다.

 

도시락 두 개 싸들고 아침에 나가면 자정을 넘겨 돌아오는 널 보면서

자식 위한 일이면 뭐든 다 할 것 같았는데, 막상 당하고 보니 내가 더

도와줄 게 없다는 걸 알면서 무력해 지는 나를 바라보기도 했지.

 

어느새 진달래, 철쭉, 목련화, 라일락까지 차례로 피었다지고, 지금은

담장마다 넝쿨장미가 한창인데, 아직도 넌 올라야 할 가파른 언덕에서

눈을 돌리지 못하는 모습이, 마치 군화 신고 행군에 나선 군인

같아 안쓰럽기도 하다.

 

엄마가 그러더라. 그래도 고마운 건 짜증내지 않고 다녀왔습니다.”

하얀 잇속 드러내며 웃는 너의 인사가 고맙다고. “왜 그래 엄마? 3

별 건가? 다 그렇게 지내.” 그 말에 자식을 위로하려던 엄마에겐 위안이

되고 덤으로 힘까지 얻는다더라.

 

너는 내게도 늘 그렇게 썰렁한 표정으로 말하지만 너를 기다리는 밤엔

때때로 마틴 루터의 고백을 되뇐단다. “난 네게 부귀를 주지 못하나

자랑스러운 하나님을 유산으로 물려준다···.

 

할머니가 물려준 유산을 엄마 아빠가 이어받고, 다시 너희가 귀히 받아

누리다가 너희 자식대로 물려진다면 그 이상의 복이 어디 있겠냐고.

우리 가족 모두 그 유산으로 삶에 자부심을 가지고 살았으면 좋겠다.

 

아직도 네게는 달려온 길보다 달려갈 더 먼 길이 남아있단다. 미래가

불안한 사람의 걸음은 빨라지고 조급해 지는 법이다. 그러나 신뢰하는

자는 달에 첫 발자국을 남긴 암스트롱처럼 두려움 없이 발걸음을

내딛는단다. 그 힘이 어디서 나오는 지 넌 알지?

 

전능하신 하나님을 신뢰하고 모든 것을 맡기며 쉬지 않고 기도하는

것이고, 연약한 나는 매일 죽이고, 아침마다 새롭게 태어나는 것이어야

한다. 오늘도 무거운 책가방을 메고 또 하루 고단한 생활을 시작한 내

사랑하는 딸을 위해 기도한다.

 

하나님, 저 아이가 고등학교 3년 과정을 통해 사랑과 능력의 하나님을

체험하는 기회가 되도록 도우시고, 최후의 승리자로 남아 주 앞에

감사가 고백이 되는 길로 인도해 주소서.”

 

1995521

*얼마 전 책장에서 찾은 편지.

생경하면서도 반가운··· 내게 이러한 시간이 있었구나.

-소설가daumcafe 이관순의 손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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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년 전 딸에게 보낸 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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