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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음악은 천상의 소리
    밤바람이 선득한 주말. 저녁을 먹고 장자호수공원으로 산책을 나섰습니다. 사람들이 오가는 사이로 청아한 색소폰 연주음이 들려옵니다. 발길이 절로 이끌려 간 곳엔 한 분이 ‘셀프 콘서트’를 열고 있네요. 잔디밭에 앉아 연주가 끝날 때마다 박수를 칩니다. 연주력이 준수한데다 가을밤의 정취까지 더해져 색소폰 선율에 젖는 아름다운 가을밤을 즐겼지요. 음악은 사랑을 전하는 신의 소리라고 합니다. 모든 사람을 하나로 묶어 주지요. 음악은 연주자의 기쁨도 되지만 만인의 즐거움도 됩니다. 연주가의 재능을 부럽게 바라본 영화가 있습니다. ‘어거스트 러쉬.’ ‘음악은 사랑을 낳고 사랑은 운명을 부른다.‘는 말이 잘 어울린 영화지요. 밴드 싱어이자 기타리스트인 루이스와 촉망 받는 첼리스트 라일라의 보석보다 반짝였던 단 하루 밤 이후, 남자는 그녀를 한 번도 잊은 적 없고, 여자는 얼굴도 모르는 낳은 아이에 대한 그리움을 놓은 적이 없지요. 이들의 믿음 하나는 “음악이 있는 한 우리는 다시 만날 거야”라는 것. 부모의 DNA를 받은 아이는 일찍부터 놀라운 음악적 재능을 보입니다. 시설에서 자란 11세의 소년은 부모만이 자신의 음악을 알아볼 수 있다는 믿음 하나로 뉴욕을 찾아갑니다. 모든 게 신비한 뉴욕. 도시가 만드는 수많은 소리들이 소년의 청각에 음계로 포착됩니다. 소년은 아이들을 모아 거리에서 노래를 시키는 워저드를 만나 어거스트란 이름으로 거리 연주자로 등장해 천부적인 실력을 보입니다. 하루는 소리에 끌려 교회 합창단 연습장에 들렸다가 처음 보는 오선지와 오르간 앞에서 작곡하고 연주하는 놀라운 재능을 발휘합니다. 이를 지켜본 목사님이 줄리어드에 음악천재로 추천합니다. 줄리어드에서 사모곡 라프소디를 작곡해 주위를 놀라게 한 어거스트. 마침내 뉴욕필하모니 콘서트에 특별 출연자로 초청됩니다. 줄리어드 출신의 유명 첼리스트(엄마)와 함께. 하지만, 연주회를 앞두고 위기가 오죠. 워저드가 연습장에 나타나 아버지라며 친권을 주장하고 데려갑니다. 학교는 간곡히 연주회만큼은 보내달라고 부탁을 하지만 거절당하죠. 금관악기가 아이의 영혼을 뽑는다는 그릇된 인식으로... 다시 광장 연주에 나서는 어거스트. 부근을 지나던 루이스가 소리에 홀려 찾아오고, 금세 호흡을 맞추더니 황홀한 기타 2중주를 펼칩니다. 어거스트가 오늘 밤 있을 센트럴파크 공연을 알려주지만, 루이스는 귀에 담지 않고 “용기를 잃지 말라”는 말만 주고 떠납니다. 그날 밤, 어거스트는 친구의 도움으로 탈주에 성공해 연주장으로 달려가고, 지방공연에 나서던 루이스는 뉴욕 중심가에서 아이 얼굴이 나온 배너광고를 보지요. 전율을 느낀 그도 차를 버리고 연주회장으로 내달립니다. 환호 속에 첼로 연주를 끝낸 라일라가 아이를 생각하며 공원을 빠져나올 때, 줄리어드 총장이 특별초청 지휘자를 소개합니다. 무대에 등장하는 어거스트. 환호하는 청중... 놀라운 자작곡이 그의 지휘 속에 연주를 시작합니다. 밖을 향하던 라일라가 연주음에 끌려 뒤돌아서고, 또 반대편에서는 황홀한 눈빛의 루이스가 나타납니다. 마침내 무대 앞에 이르러 12년 만에 마주 서는 남과 여... 환희의 포옹을 할 때 지휘하는 아이의 모습이 비칩니다. 세상에는 수많은 소리들로 가득 차 있지요. 귀를 기울인 만큼 들리기도 하고 지나치기도 합니다. 끊임없이 들리는 세상의 소리를 옮겨 작곡하고 연주하는 음악천재가 말하죠. “아이들이 동화를 믿듯 저는 음악을 믿어요. 부모님이 살아계신다면 제 음악을 꼭 듣게 될 거야요.” 어거스트의 간절한 믿음처럼 나는 어떤 믿음을 확신하며 살고 있나요? 글 이관순(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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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4-29
  • 내 앉아있는 자리
    스산한 바람에 비까지 흩뿌리니 단풍은 지고 낙엽만 우수수 쌓입니다. 이렇듯 나무도 꽃도 지상의 모든 생명들이 사이즈를 줄이는 시기입니다. 그것이 한 주기의 마지막 겨울을 상대하는 지혜입니다. 사람이 나이가 든다는 것 또한 사이즈를 줄이는 것으로 시작됩니다. 몸집이 줄고, 먹는 게 줄듯 이것이 절제의 근본이며 이치입니다. 세상에 나올 때 작게 나왔으니 돌아갈 때도 비우고 작게 돌아가야 합니다. 여기에는 실상과 허상이 공존하지만 스스로 말수를 줄이고, 욕심도 미움도 줄이고, 자랑, 명예 같은 덧없는 것은 날려야 합니다. 그래야 사이즈가 줄지요. 루디 세네카는 “인간은 마치 시간이 모자란다고 불평하면서, 마치 시간이 무한정인 것처럼 행동한다.”고 사람의 어리석음을 비꼬았지요. 그런데 사람은 이를 알면서도 어제의 습관을 오늘도 고집하고 삽니다. 친구가 많다고 자랑하시나요? 바쁜 것을 미덕으로 생각하셨나요? 그보다는 흉금을 터놓고 말할 한 사람의 친구가 더 소중한 때입니다. 친구도, 만남도, 분주함도 지혜롭게 줄여가는 것이 노년의 삶을 가볍게 하고 실수를 줄이는 방법입니다. 우리 몸은 수분이 80% 이상이라고 하죠. 비슷한 비율로 우리 삶을 주장하고 있는 것이 말입니다. 그만큼 물과 말은 몸을 유지하고 삶을 구성하는 중요한 요소입니다. 그래서 절제를 말할 때 가장 먼저 꼽는 게 말입니다. 내가 살면서 토해낸 말을 양으로 계측한다면 얼마나 될까. 그중 꼭 필요했던 말은 얼마쯤 일까. 이제는 할 말 못할 말, 안 해도 좋을 말, 상처 주는 말을 가려가며 했으면 합니다. 내뱉은 말은 흘러간 세월처럼 돌릴 수 없으니... 그래서 이랬으면 좋겠습니다. “이제는 많이 들어주자. 듣는 귀는 8로 열고 말하는 입은 2로 줄이자. 남이 말할 때 자르지 말자. 중간에 끼어들지 말자. 말 줄기를 돌리지 말자.” 비위 상한다고 파르르, 욱, 버럭 하는 감정도 이젠 삭혀 없애야 합니다. 행여 그런 상황이 되면 심호흡 한 번으로 날려버리세요. 대신 많이 웃어주면 좋겠습니다. 상대가 가족, 친구, 이웃, 누구든 만나면 웃는 것으로 말문을 열어요. 나이가 들면 웃는 근육도 굳는다는데, 얼굴에 웃음기마저 빠지면 노인 특유의 표정 없는 일그러진 인상만 남아요. 나이가 든다는 것은 옻칠을 더하는 것처럼 윤을 내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미움이나 시기, 질투는 다 헛된 뜬구름이지요. 뜬구름을 좇다가 낯선 곳에 서 있는 나를 발견하는 건 아픈 일입니다. 살고 있는 이날, 앉아 있는 이 자리가 내가 족해야 할 자리임을 아는 사람은 행복합니다. 이 나이에 맘대로 못할 게 뭐야. 하지만 나이가 들수록 남을 배려하며 사는 인생이 아름답습니다. 살아보니 ‘역지사지(易地思之)’ 이상의 스승은 없더군요. 사서삼경이 대단한 게 아니라, 상대편 입장을 늘 먼저 헤아리면 그것이 상선의 절제입니다. “오죽했으면... 그래 저럴 수 있겠다... 나도 그 입장이면... 저도 사람인데.” 글 이관순(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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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4-22
  • 너도 죽는다‘메멘토 모리’
    말에는 묘한 힘이 있어 곱씹을수록 향기를 내는 말이 있고, 겸손함을 가르치는 말도 있지요. 라틴어는 그런 철학적 의미를 함의한 말과 글이 꽤 많습니다. 언젠가의 기억입니다. KBS TV '도전 골든벨‘에서 최후 1인이 된 학생에게 50번 마지막 골든벨 문제가 주어집니다. “고대 로마에서 승리를 쟁취한 장군이 개선행진을 할 때 주위에서 외쳤던 라틴어는?“ “메멘토 모리" 영예의 골든벨이 울리는 짜릿한 순간을 지켜보았지요. 다소 생소한 라틴어 '메멘토 모리(memento mori)'는 '죽음을 기억하라‘는 뜻입니다. 유래는 로마 공화정의 개선식으로 거슬러 올라가요. 개선식은 전쟁에서 승리한 장군에게 주어지는 영예입니다. 개선장군은 관습에 따라 전차를 타고 퍼레이드를 벌입니다. 영웅이 탄 마차가 시민의 환호 속을 헤치고 행진하는 동안 뒤에서 노예들이 큰소리로 외쳐댑니다. 메멘토 모리! 메멘토 모리! “오늘은 개선장군이지만 너도 언젠가는 죽는다. 겸손하게 행동하라.” 승리에 도취된 장군에게 본분을 잊지 않도록 경각심을 주는 장치인 셈이죠. 로마 최고의 환대 속에서도 너는 신이 아닌, 한 인간일 뿐임을 알린 것입니다. 메멘토 모리에는 세 가지 철학적 가치가 내재되어 있습니다. ‘죽음을 기억하라. 운명을 사랑하라. 현재에 충실하라.’ 이 셋은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도 적용되는 훌륭한 교훈입니다. 스티브 잡스도 스탠퍼드대 졸업식 축하 연설에서 이를 강조했습니다. 췌장암 투병으로 힘든 시기를 보내던 그는 ‘죽음은 삶이 만든 최고의 발명품‘이라고 격찬합니다. 그러므로 제한된 인간의 시간을 다른 누군가의 인생을 살 듯 낭비하지 말고 자신을 믿고 집중하라고 졸업하는 학생들에게 말합니다. 뜻이 통하는 라틴어에 ‘카르페 디엠(carpe diem)'이 있습니다. 몬래 이 말은 신을 공경하고 오만해지지 말라는, 현재를 가치 있게 살라는 뜻인데 이후 기독교 영향을 받아 현세의 부귀나 영화의 부질없음을 알립니다. 우리에게도 ‘화무십일홍’이란 말이 있죠. 열흘 가는 붉은 꽃이 없다는 이 말엔 ‘한 번 흥한 것은 반드시 쇠한다.’ 는 속뜻을 지닙니다. 트로트 가수 김연자가 불러 유명한 노래 ‘아모르 파티’도 같은 말입니다. 사랑을 뜻하는 아모르와 운명을 뜻하는 파티가 합성된 라틴어로 이 또한 ‘운명을 사랑하라’는 말이지요. 인간이 가져야 할 삶의 태도로 철학자 니체가 처음 사용했습니다. 메멘토 모리는 미국 남서부에 거주해온 나바호족에서도 찾을 수 있어요. 그들은 “네가 세상에 울면서 태어날 때 세상은 기뻐했으니, 네가 죽을 때 세상은 울어도 너는 기뻐할 수 있도록, 그러한 삶을 살아라.”는 의미심장한 철학을 닮고 있습니다. <메멘토 모리>, <카르페 디엠>, <아모르 파티>, <화무십일홍>까지 모두 겸손한 삶을 가르칩니다. 제한된 시간을 사는 인생에게 죽음을 기억하고, 운명을 사랑하고, 오늘에 충실하라.... 이보다 더 삶을 성찰하게 하는 말이 또 있을까 싶습니다. 글/ 이관순(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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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4-15
  • 의리가 사라진 세상
    짓궂은 질문을 해봅니다. ‘사람’과 ‘인간’은 같은 거야? 사전의 설명은 비슷 하지만, 아무래도 “저 인간!” 하면 부정적 이미지가 앞서죠. “저 사람 인품이 좋아”로는 써도 “저 인간 인품이 좋다”고 말하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세상에 사람 같지 않은 인간이 많다보니 용례까지 헷갈립니다. 초등학교 국어 교과서의 ‘의좋은 형제’를 생각하면 지금도 마음이 훈훈합니다. 우애 좋은 형제가 가을 수확을 마치고 들판에 볏단으로 노적가리를 만듭니다. 형이 보니 아우네 것이 적어 보입니다. 그날 밤, 어려운 아우 형편을 안 형이 자신의 볏단을 옮겨 놓고, 다음날 밤은 식솔 많은 형을 생각한 아우가 반대로 볏단을 옮기지요. 노적가리가 줄지 않자 형제 다 고개를 갸우뚱합니다. 마침내 볏단을 옮기던 형제가 달빛 아래 마주치면서 얘기는 끝나죠. 그때의 감동으로 습자시간이면 붓글씨를 ‘노적가리 풍년일세’만 썼던 기억이 납니다. 가난해도 마음은 풍년인 사람들이 살던 시절이 있었지요. 엊그제 복권 당첨금이 살인흉기가 된 사건이 났습니다. 우애 좋은 형제가 복권 당첨으로 수억 원의 당첨금을 받아 배분까지는 성공했는데, 그 돈으로 사업을 했던 형이 망하며 사단이 납니다. 돈을 더 요구하는 형과 보증을 선 동생 간에 감정이 충돌하다 동생을 살해하는 일이 벌어진 겁니다. 황금만큼 요괴스러운 것은 없습니다. 돈 앞에 장사가 없다지요. 일본 속담에 ‘담배꽁초와 돈은 쌓일수록 냄새가 난다’고 했습니다. 돈이 사람을 부패하게 만든다는 뜻이겠지요. 사는 것은 전보다 풍족해도 인성은 강퍅해졌습니다. 돈을 둘러싼 이기적 욕망이 칼끝처럼 첨예하게 부딪치는 세상입니다. 개신교의 큰 어른이셨던 목사님이 생전에 우리교회에 오셔서 당신이 붓으로 큼직하게 쓴 ‘의리를 지키자’란 글귀를 강단에 내리고 설교를 하신 적이 있습니다. 세상이 오죽하면 의리를 부탁했을까요. 사람과 사람,관계 사이에 의리가 사라졌다고 탄식하는 소리가 높아만 집니다. 제목을 잊은 영화입니다. 세 친구가 딱 한 번 은행을 털어 깨끗하게 살자며 치밀한 준비를 합니다. 그들의 거사는 성공했고 무사히 안전지대에 도착하자 돈다발을 놓고 환호합니다. 한 친구가 축배를 들자며 나갔다가 술에 독을 타서 옵니다. 욕심이 생긴 거죠. 태연하게 돌아온 친구가 술잔을 건네고 축배를 외칠 때, 팡팡! 술 사온 친구가 고꾸라지고 남은 둘은 낄낄댑니다. 뛰는 놈 위에 나는 놈이 있거든요. 둘은 더 큰소리로 건배를 외치지만 독배를 든 이들도 쓰러집니다. ‘사람에게 의리 빼면 시체’ 라고 말하던 세상이 있었지요. 의리란 뜻은 ‘사람관계에서 마땅히 지켜야 할 도리’로, 여기엔 사람이 갖춰야 할 덕목이 다 녹아져 있죠. 가난은 견뎌내기 어려운 것임을 경험한 세대가 모이면 그래도 그때가 좋았다고 반추합니다. 의리가 사라진 곳에 먹잇감을 놓고 으르렁 대는 동물세계가 어른댑니다. 사람 사이 흐르는 체온 대신 물질을 향한 충혈 된 눈빛만 섬뜩하니 사람은 없고 인간만 남아 보입니다. 다시 사전을 봅니다. ‘인간’이란 단어의 기본설명 뒤로 ‘사람의 모습은 하고 있되 사람답지 못하다는 뜻.’을 추가하고 예문도 달았군요. “저 인간이 한 짓을 생각하면 돌아버리겠어.” 너무도 흔히 듣는 슬픈 말이 됐습니다. 글 이관순(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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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4-08
  • 의리가 사라진 세상
    짓궂은 질문을 해봅니다. ‘사람’과 ‘인간’은 같은 거야? 사전의 설명은 비슷 하지만, 아무래도 “저 인간!” 하면 부정적 이미지가 앞서죠. “저 사람 인품이 좋아”로는 써도 “저 인간 인품이 좋다”고 말하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세상에 사람 같지 않은 인간이 많다보니 용례까지 헷갈립니다. 초등학교 국어 교과서의 ‘의좋은 형제’를 생각하면 지금도 마음이 훈훈합니다. 우애 좋은 형제가 가을 수확을 마치고 들판에 볏단으로 노적가리를 만듭니다. 형이 보니 아우네 것이 적어 보입니다. 그날 밤, 어려운 아우 형편을 안 형이 자신의 볏단을 옮겨 놓고, 다음날 밤은 식솔 많은 형을 생각한 아우가 반대로 볏단을 옮기지요. 노적가리가 줄지 않자 형제 다 고개를 갸우뚱합니다. 마침내 볏단을 옮기던 형제가 달빛 아래 마주치면서 얘기는 끝나죠. 그때의 감동으로 습자시간이면 붓글씨를 ‘노적가리 풍년일세’만 썼던 기억이 납니다. 가난해도 마음은 풍년인 사람들이 살던 시절이 있었지요. 엊그제 복권 당첨금이 살인흉기가 된 사건이 났습니다. 우애 좋은 형제가 복권 당첨으로 수억 원의 당첨금을 받아 배분까지는 성공했는데, 그 돈으로 사업을 했던 형이 망하며 사단이 납니다. 돈을 더 요구하는 형과 보증을 선 동생 간에 감정이 충돌하다 동생을 살해하는 일이 벌어진 겁니다. 황금만큼 요괴스러운 것은 없습니다. 돈 앞에 장사가 없다지요. 일본 속담에 ‘담배꽁초와 돈은 쌓일수록 냄새가 난다’고 했습니다. 돈이 사람을 부패하게 만든다는 뜻이겠지요. 사는 것은 전보다 풍족해도 인성은 강퍅해졌습니다. 돈을 둘러싼 이기적 욕망이 칼끝처럼 첨예하게 부딪치는 세상입니다. 개신교의 큰 어른이셨던 목사님이 생전에 우리교회에 오셔서 당신이 붓으로 큼직하게 쓴 ‘의리를 지키자’란 글귀를 강단에 내리고 설교를 하신 적이 있습니다. 세상이 오죽하면 의리를 부탁했을까요. 사람과 사람,관계 사이에 의리가 사라졌다고 탄식하는 소리가 높아만 집니다. 제목을 잊은 영화입니다. 세 친구가 딱 한 번 은행을 털어 깨끗하게 살자며 치밀한 준비를 합니다. 그들의 거사는 성공했고 무사히 안전지대에 도착하자 돈다발을 놓고 환호합니다. 한 친구가 축배를 들자며 나갔다가 술에 독을 타서 옵니다. 욕심이 생긴 거죠. 태연하게 돌아온 친구가 술잔을 건네고 축배를 외칠 때, 팡팡! 술 사온 친구가 고꾸라지고 남은 둘은 낄낄댑니다. 뛰는 놈 위에 나는 놈이 있거든요. 둘은 더 큰소리로 건배를 외치지만 독배를 든 이들도 쓰러집니다. ‘사람에게 의리 빼면 시체’ 라고 말하던 세상이 있었지요. 의리란 뜻은 ‘사람관계에서 마땅히 지켜야 할 도리’로, 여기엔 사람이 갖춰야 할 덕목이 다 녹아져 있죠. 가난은 견뎌내기 어려운 것임을 경험한 세대가 모이면 그래도 그때가 좋았다고 반추합니다. 의리가 사라진 곳에 먹잇감을 놓고 으르렁 대는 동물세계가 어른댑니다. 사람 사이 흐르는 체온 대신 물질을 향한 충혈 된 눈빛만 섬뜩하니 사람은 없고 인간만 남아 보입니다. 다시 사전을 봅니다. ‘인간’이란 단어의 기본설명 뒤로 ‘사람의 모습은 하고 있되 사람답지 못하다는 뜻.’을 추가하고 예문도 달았군요. “저 인간이 한 짓을 생각하면 돌아버리겠어.” 너무도 흔히 듣는 슬픈 말이 됐습니다. 글 이관순(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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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4-04
  • 슬픔이여 안녕!
    죄 없는 어린 생명이 희생될 때 더없이 고통스럽습니다. 남달리 알레르기 반응을 보이는 것은 일종의 트라우마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여덟 살에 충북 영동의 한 초등학교에 입학했습니다. 여름이 되면 아이들과 몰려서 마을 앞에 흐르는 강에 나갑니다. 겨울엔 썰매를 타고 여름엔 물놀이를 하는 곳. 경부선이 지나가는 철교 아래가 또래들의 여름 아지트지요. 흰줄 하나를 내린 검정 팬티를 입고 상급생들은 수영으로 강을 건너고, 하급생들은 교각 중턱에 걸터앉아 형들을 부럽게 바라보다가 텀벙 강물에 몸을 던집니다. 이날도 철교 아래에 한 떼의 아이들이 모였습니다. 비가 와서 물이 좀 불었지만 누구도 겁내지 않았지요. 그런데 물이 불면 수심에서 물돌이가 이는 걸 모른 게 비극입니다. 형들이 수영을 가르친다고 아이들을 밀어 넣는데 그만 1학년 쌍둥이 동생이 소용돌이에 말려든 겁니다. 아이가 물속에서 허우적이자 더럭 겁이 난 아이들이 달아나기 시작합니다. 나도 겁에 질려 뛰다가 뒤를 돌아봤는데, 발을 구르며 울부짖는 쌍둥이 형의 모습이 보였습니다. 죽은 아이는 내 짝꿍이었습니다. 마을이 발칵 뒤집어지고... 나도 밤마다 경기를 일으켰습니다. 땀을 흘리며 악몽에 시달렸지요. 물에 퉁퉁 부은 친구가 나를 원망했기 때문입니다. 넋이 나간 친구 엄마, 고래고래 소리질러 아들 이름을 부르는 아빠, 나를 원망스레 쳐다보는 쌍둥이 형... 나는 누구 앞에서도 고개를 들 수 없는 죄인이었습니다. 친구를 버리고 도망쳤다는 죄책과 슬픔이 어린 가슴을 쿵쿵 뛰게 했지요. 이로 인해 부모님 걱정도 덩달아 커졌습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아버지가 발령을 받아 새 임지로 이사하면서입니다. 가족이 아버지의 전근을 반색한 것도 나 때문이었죠. 아픈 기억은 상급학교로 진학할수록 많이 옅어졌습니다. 초등학교 동창들과 연락을 끊은 것도 도움이 됐습니다. 결혼 후로는 아예 잊다시피 지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어느날, 우연히도 길에서 쌍둥이 형을 만나면서 덜컥 상처가 뜯기고 말았습니다. 어머니는 우울증을 앓다가 목을 매셨고, 알코올 중독에 빠진 아버지도 암으로 돌아가셨답니다. 한 아이의 죽음이 이렇게 가족을 황폐화 시켰구나. 아물었던 내 상처에도 피가 나는 걸 느꼈습니다. 가족 중 유일한 생존자인 형의 얼굴에 깔린 그늘을 보았습니다. “가족 몫까지 잘 살아야지. 흔들릴 때마다 그렇게 위로해.” 예민한 성격 탓일까, 이후로 이따금 꿈을 꿉니다. 시골에서 놀던 추억들이, 떠난 어린 친구의 모습도 생생하게 포착됩니다. 더 힘들게 하는 건 잊을 만하면 날아드는 이런저런 또래 아이들 희생소식입니다. 줄어드는 인구도 걱정인데 죽었다하면 아이들이냐고 격분도 합니다. 지난 봄, 헝가리에서 유람선 전복으로 6세 소녀가 숨졌다는 비보가 그랬었죠. 외할머니 손을 꼭 잡은 아이의 인양된 모습은 더 애처로웠습니다. 그 아픔이 채 가시기도 전에 또, 엄마가 일곱 살 어린 아이를 데리고 동반자살을 했다는 비보가 들렸습니다. 죽음이 낯설기만 어린 나이에 얼마나 섬뜩했을까, 얼마나 설득했을까, 아니 강요했을까. 그래야 했던 엄마의 심정은? 푸른 6월에는 전 세계인을 슬픔에 잠기게 한 사고가 또 발생했습니다. 멕시코 국경에서 리오그란데 강을 건너 미국으로 밀입국하려던 25세 아빠와 두 살짜리 딸이 익사한 것입니다. 아빠가 아이를 셔츠 안에 넣고 아이는 아빠의 목을 끌어안은 채 떠내려 온 사진을 봤습니다. 물살을 이겨내려 했던 아빠의 다리는 물위에 떠 있고, 아이의 바지는 물먹은 기저귀로 불룩했습니다. 강 건너서 울부짖는 엄마의 얼굴이 오버랩됩니다. 멕시코 영화 ‘신 놈브레’는 중남미사람들이 ‘죽음의 열차’를 올라타고 미국으로 밀입국하려는 과정을 그린 영화입니다. 열차 지붕에 올라타다 떨어져 죽고 힘겹게 탄 뒤는 살해나 강간을 당하기도 합니다. 서글픈 것은 점쟁이가 찾아온 주인공에게 일러주는 말이죠. “넌 미국에 도착할거야. 그런데 안내는 신이 아닌 악마가 하지.”라고. 그 악마는 죽음의 열차를 올라 탄 아빠와 딸을 강물 속에 빠뜨린 것입니다. 스스로를 위로합니다. 어쩌면 아이들이 찾아간 저세상이 험난한 이 세상을 사느니 보다 낫지 않겠냐고. "여긴 낙원이 아냐. 슬퍼하지 말고 편히 쉬어라..." 오래전 읽은 프랑수아 사강이 쓴 ‘슬픔이여 안녕’ 이란 소설 제목이 떠오르는 것은 우연일까요? *글/이관순(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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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4-01
  • 노을처럼 아름답던 식탁의 축제
    사람들이 그렇게도 갈구하는 행복은 어디에 있는 걸까? 골드러시를 따라 미 서부로 향했던 그 많은 사람들은 무엇을 찾았을까. 공자는 제자의 질문에 ‘행복은 없다’고 간단명료하게 답합니다. 공자는 이에다 ‘인생에는 행복을 찾아가는 여정이 있을 뿐’이라고 덧붙였습니다. 공자가 말하고자 한 것은 행복이란 눈이 혹할 보석 같은 게 아니라고 내 나름 유추 해석합니다. 거대한 바위 밑 은밀한 곳이나 화려한 샹들리에 속에 숨겨진 것이 아니고, 우리가 사는 일상의 그 사소한 것들, 그 자체에 있음을 말하려 한 것으로 주석을 답니다. 행복은 더 이상 파랑새도 아니고 신기루도 아닌, 바로 우리의 일상에 흘러갑니다. 매일 우물에서 물을 길어오듯 행복도 일상이란 우물에서 길어 올려야 합니다. 돌아보니 그 많던 내 일상들이 다 허공에 흩어졌습니다. 우주의 어느 시간보다도 값진 것들입니다. 나이가 들면 외롭다고 합니다. 수많았던 그 일상들을 되돌릴 수 없고 함께 할 수도 없다는 것 때문이겠지요. 자식들로 들썩이던 공간은 소산하다 못해 적막감마저 흐릅니다. 전화도 오고 주말이면 찾아주니 반갑기도 하지만 잠시 머물다 떠나고 나면... 이젠 막내마저 직장 따라 지방으로 갔으니 그마저도 용이하지 않습니다. 옛말에 고개가 끄덕여 집니다. “마음이 지척이면 천리가 지척이고, 마음이 멀어지면 지척도 천리”라는 말... 형제간의 소통도 예전 같지 않습니다. 통화를 해도 쉽게 대화거리가 궁해지죠. 전 같으면 자식걱정에, 자랑에, 줄줄이 엮을 테지만 빈 둥지끼리 나눌 것은 그저 서로의 건강 걱정이나 해주면 끝입니다. 존경하는 선배와 만났습니다. 큰 아들은 미국에서 학위를 따고 현지에 눌러 앉은 지 11년째랍니다. 오늘은 손자가 화상통화를 할려나? “아참, 이번 주는 바쁘다 했지? 그래 바빠야지.” 일본에 있는 둘째 딸은 엊그제 통화에서 아이 교육이 힘들다고 넋두리하던데. “타지도 아닌 타국 생활이니 그렇겠지.” 제 둥지를 찾아간 자녀들한테 옛 일상을 더듬자고 할 일은 더욱 아닙니다. 그렇다고 넋두리만 하고 있을 수도 없습니다. 그것이 우리 인생이 거쳐야 할 여정으로 받아들여야 할 테니까요. 늘 아쉽고, 부족하고, 늘 그리움이 많은 게 우리네 인생인 듯합니다. 그래도 아직 남은 인생이 있고 걸어야 할 여정이 있고, 맞이할 일상이 남았으니 희망이란 새 한 마리 날아와 내 어깨에 앉아 주길 기대합니다. 그러다보니 더욱 간절해지는 것이 하늘의 은총입니다. 그분만이 내 남은 여정에 행복의 무늬를 함께 짜 주실 분이 시니까요. 식탁의 빈자리를 채워주시고 내가 입술을 열어 기도하면 응답해 주십니다. 성경을 펴면 말씀이 두런두런 대화를 나누자고 합니다. 예전에 느끼지 못한 행복감이 차오릅니다. 아이들과 즐기던 저녁 식탁의 축제는 흩어져갔지만, 그 분과 함께 하는 식탁의 축제는 노을빛처럼 아름답습니다. 오늘도 사랑과 그리움이 묻은 집에서, 가족의 기억들이 숨 쉬는 공간에서, ‘고뇌는 내가 갈아입는 옷 중 하나이니 나는 상처받은 사람에게 기분이 어떤지 묻지 않는다 나 스스로 그 상처받은 사람이 된다' (월트 휘트먼의 '나의 노래' 중에서 글 이관순(소설가/이관순의손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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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고
    2024-03-28

실시간 기고 기사

  • 너무나 통속적인 생로병사
    주변에서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이 들릴 때마다 가슴에 소슬한 바람이 일었다. 늙어서나 병 들어서나 산자와 사자 사이를 가르는 건 벼락 치듯 한순간에 찾아온다. 그 찰나에 비포(before)와 애프터(after) 사이로 금이 생긴다. 전구의 필라멘트가 끊기는 순간의 빛과 어둠처럼. 그 앞에 생로병사는 더 이상 그 흔한 통속적인 이야기가 아니었다. 때로는 비통하고 때로는 먹먹하고 쓰디쓴 리얼한 현실의 아픔이었다. 제철 음식인 민어매운탕을 먹자고 몇몇 친구들과 식당에서 어울렸다. 다들 잊히는 것이 많아졌다고 멀어져가는 세월을 야속해했다. 반세기 동안 즐겨 마신 원두커피의 이름이 생각나지 않고, 50년 넘게 읽어온 성경 속 인물 이름이 가물거릴 때가 많아졌다. 핸드폰을 열고는 왜 열었는지 쓴웃음 짓는 것도 야속하지만, 외출하다 잊은 게 생각나 집으로 돌아왔는데 현관 앞에서 왜 왔지? 그처럼 어색한 연기도 없을 것이다. 후각에 문제가 생긴 친구는 가장 좋아한 된장국 끓는 냄새를 못 맡는 게 슬프다고 말했다. 그럼에도 잊히지 않는 것은 늘 따로 있었다. 뜬금없이 생각나기도 하고, 꿀꺽 삼켰는데도 꾸역꾸역 넘어오는 것들. 부끄러운 기억들이었다. 추억이란 원래 마음을 말랑말랑하게 만드는 법인데 도리어 얼굴을 붉히게 하는 기억들이 있다. 은사님 집에서 못하는 술을 홀짝홀짝 받아먹다가 통금시간에 걸려 일박을 청한 것까진 좋은데, 손님이라고 사모님이 깔아준 새 침구에 토설을 하고…. 위기에 처한 아들 사업을 지키려고 친구에게 돈 좀 융통하려다 면박을 당하고…. 약혼을 앞둔 여자가 백혈병이란 진단에 슬그머니 그녀 곁을 떠나버린 일…. 하나같이 도망치고 싶은 기억들을 얘기했다. 다른 건 잘도 잊으면서 부끄러운 기억은 화석처럼 선연했다. 사람들은 유의미한 것만 생각하려 들지만 세상에 존재하는 사물치고 무의미한 존재가 있을까. 누구는 누군가의 무엇이고 무엇은 또다른 무엇과 엮이는 세상에서. 짧은 손편지에도 우주와 세계가 들어갈 수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지구상의 모든 언어들은 생로병사라는 통속적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그러면서 기품 있고 고상하게 포장을 하지만 나이가 깊어지며 알게 되었다. 생로병사처럼 통속적인 소설도 없다는 것을. 눈이 녹으면 드러나는 산능선 같이, 때로는 통속성을 지닌 것이 더 또렷한 삶의 모습으로 나타날 때가 있다. 결혼하고 아홉 번 이사를 했다. 이삿짐을 쌀 때마다 섣불리 버리지 말자를 원칙으로 삼았다. 뒤늦게 찾거나 후회하지 않기 위해서였다. 그랬는데 언젠가부터 챙기는 것보다 버리는 것에 신경을 쓰는 나를 보았다. 그 점에서 아내도 비슷했다. 아내는 철 지난 옷이나 그릇, 낡은 가재도구를 내놓고, 나는 책을 골라내고 언제 산 건지 기억에도 없는 물건들을 걸러냈다. 그러면서 앞으로 꼭 필요한 물건이 아니면 사지 말자. 적어도 다섯 번은 생각한 후 사자고 다짐했다. 그런데 그 다짐이 쓸모없다는 건 몇 년 뒤 이사 갈 때 확인되었다. 또다시 비슷한 양의 쓰레기를 만들어 놓은 걸 발견하니까. 그것도 내 얼굴을 붉히는 부끄러움 중 하나였다. 그때는 분명 필요하다고 사들였을 텐데, 결국은 자신의 이미지 소모에 덧칠임을 몰랐다. 살면서 그렇게 이성적인 판단을 못하고 통속적인 호기심에 이끌렸다. 엊그제 친구가 고열로 실려간 병원으로부터 다급한 전화를 받았다. 코로나 감염환자로 아버지를 격리 치료실로 들여보낸 친구의 외동딸이 전화를 한 것이다. 병원에 들어선 나를 큰아버지라 부를 만큼 평생을 같이한 가족 같은 친구 딸이었다. 젊은 나이에 아내를 일찍 앞세운 친구는 비혼의 딸을 의지하고 산 지 십 년이 다 됐다. “최선의 의학 처치를 다했다고 해요. 지금으로서는 심정지가 발생할 확률이 높으니 마음의 준비를 할 때가 됐다고 해서...” 딸은 말끝을 잇지 못했다. 맥이 빠르고 호흡이 거칠어 산소를 투여해도 산소 포화가 좀처럼 오르지 않는다고 힘든 상황을 전했다. “의사 선생님 말씀이 흉부 CT 상에도 바이러스가 양쪽 폐를 모두 점령했다면서 고령이라 연명치료는 권해드리고 싶지 않다고. 가족분들이 의견을 모아 달라고 했어요.” 그래서 가족이란 없는 딸이 아버지 같은 나에게 전화를 한 것이다. 나는 말 대신 딸의 어깨를 보듬었다. “심폐소생술은 받지 않으려고요. 아빠를 편히 보내드리고 싶어요.” “그래. 내게도 그런 말을 하셨다.” 창너머로 임종을 앞둔 친구를 바라보았다. 삶과 죽음 사이의 아득한 거리가 가슴 저리게 느껴졌다. 스테이션에서 보호자에게 전화로 경과를 알렸다. “곧 돌아가실 것 같습니다. 마지막 하고 싶은 마음을 전하시죠. 짧게 시간 드리겠습니다.” 의사가 돌돌 말린 전화선을 길게 늘어뜨려 친구의 귓가에 댔다. 딸이 마지막 고해성사를 하듯 가슴속 언어를 실어 보냈다. “아빠 사랑해. 잊지 못할 거야.” “아빠랑 함께해서 행복했어.” “엄마가 기다리실 거야.” 잠시 후 의사가 수화기를 잡았다. “말씀 다 하셨지요? 지금 운명하셨습니다. 이제 시신을 정리하겠습니다.” 오열하던 딸이 갑자기 손을 들었다. “잠깐만요. 선생님. 하나만 답해 주세요. 아빠가 제 말을 분명히 다 들으셨을까요?” “네. 모두 들으시고 떠나셨습니다.” “감사합니다...” 딸의 신음 속에 커튼이 쳐졌다. 그래도 숨이 끊어지기 전, 마지막 언어를 전하며 아버지의 임종을 지켜보았다는 것으로 딸의 마음이 편해지길 바랐다. 한쪽에선 단장의 아픔을 삼키는 순간, 다른 한쪽에선 코에서 들숨이 멈추고…. 두 부녀 사이에 이승과 저승이 엇갈리는, 또 하나의 비포와 애프터의 금이 그어졌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흔들리는 버스 안에서 문득 생각이 스쳤다. 1950년대 명동의 댄디 보이, 모더니스트 시인 박인환. 그는 꼭 럭키스트라이크 담배만 피우고, 도시풍의 시를 쓰고, 서구적 분위기를 풍기며 당시 어두운 삶의 현실을 노래하곤했다. 그가 고해성사를 하듯 낮게 읊조렸다. “인생은 통속적인 대중잡지의 표지에 지나지 않는다”라고…. 인간의 생로병사가 그렇지 않은가. 목마름에 애태우고, 갈급함에 눈물짓던 날들. 그것이 세월로 흐르고 사람들 사이를 여울져 갈 때, 생로병사는 만경창파에 나뭇잎 하나로 떠내려가는 것이다. 박인환의 시에 곡을 붙여 박인희가 노래한 ‘세월이 가면’도 그랬다. 인간이란 슬픈 운명은 그렇게 통속적으로 이끌리는 것이다. “지금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 그 눈동자 입술은 내 가슴에 남아있네/ ... / 사랑은 가고 옛날은 남는 것/ 여름날의 호숫가 가을의 공원/ 그 벤치 위에 나뭇잎은 떨어지고/ 나뭇잎은 흙이 되고 나뭇잎이 덮여서/ 우리들 사랑이 사라진다 해도/ 내 서늘한 가슴에 남아 있네.” -소설가/daumcafe 이관순의손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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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고
    2023-07-20
  • 중이 고기 맛을 알면
    ‘밥은 먹고 잘 지내냐?’ 안부를 묻는 세상의 말 중에 이만한 것이 또 있을까. 짧은 토막말에 인생사의 근본인 먹는 일과 건강까지 챙기고 있으니 ‘한글은 위대하다.’ 찬사를 받을 만 합니다. 내 핸드폰 속 달력 칸에도 밥 먹는 약속이 최우선으로 저장 돼 있죠. 먹는 일만큼 중요한 게 어디 있겠어요? 잘 먹어야 건강하고 건강해야 잘 먹을 수 있는 불가분의 고리는 우주적 성찰입니다. 하지만 쓰는 말에 따라 어감이 달라요. “제가 식사 한 번 모시겠습니다.” 격식을 차리기도 하지만 “저랑 밥 한 번 먹어요” 라는 말이 한결 정겹고 친근감을 전합니다. 오래 전, 건강식이란 미명아래 사찰음식이 바람을 일으킨 적이 있었어요. 마침 사찰음식 연구가인 선재스님을 만날 자리가 있어서 물어봤습니다. 불가에서 밥이란 무엇인지 편하게 물었는데 경전 공부를 시킵니다. “석가모니의 가르침을 전하는 경전에 아함경이라고 있어요. 경에 이르길 ‘일체 제법은 식으로 말미암아 존재하고 식이 아니면 존재하지 않는다 (食自在 法自在)’ 라고 했어요.” 불가에서도 밥은 귀한 존재입니다. 말을 빌리면 ‘밥은 곧 음식이며 약’ 입니다. 사찰에 들려 관심 있게 살핀 사람은 알아요. 경내에 많은 식자재 식물이 자란다는 걸. 사찰 주변에 심어진 벚나무, 소나무, 은행나무 등은 단순히 풍광만을 위함이 아닙니다. 여기에 약효를 찾은 지혜가 있어요. 벚나무의 껍질을 진하게 달인 물은 기침 치료에 좋고, 속껍질 달인 물은 식중독에 잘 듣는다 하죠. 솔잎에 음식을 싸두면 쉽게 상하지 않고요, 은행나무 열매는 폐결핵을 예방할 뿐 아니라 양질의 단백질 공급원이기도 하답니다. 중요한 것은 무엇을 먹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먹느냐 입니다. 불가에서 말하는 ‘공양(供養)’에는 여럿의 뜻이 담겼습니다. 부처 앞에 음식과 재물을 바치는 ‘공양드림’ 에는, 음식이나 의복 등을 이바지하고 웃어른을 모시는 일(부모공양), 하루 세끼 음식을 먹는 일(식공양)이 다 해당됩니다. 공양에는 수천 년을 이어오는 계율이 있습니다. 발우(그릇) 공양에는 다섯 공덕이 들어 있어요. 평등함(같이 먹고)과 청결함(각자 발우 사용), 절약(밥 한 톨), 공동(한 솥밥), 복덕정진(음식 만든 이의 은혜)이 그것입니다. 반대로 승려들이 금기시하는 것도 있어요. 육류와 어패류, 오신채가 이에 포함됩니다. 육류 어패류를 금기시함은 불성을 지닌 생명에 대한 자비심 때문입니다. 어쩌다 해탈하지 못하고 윤회하는 과정에서 부모로 만난다면 난감한 일이겠죠. 육류 섭취는 마음을 밖으로 치닫게 해 수양에 방해가 되어서 입니다. 맵고 쓰고 시고 쓴 것이 오신채의 특징인데, 냄새가 지혜를 방해하고 스님들 공부에 지장을 준다고 본 것입니다. 산에 짐승이 흔할 때는 육류나 오신채를 먹으면 냄새를 맡고 호랑이 같은 짐승이 내려온다는 경계의 의미도 있습니다. 그런데 사찰음식으로 차려나온 상차림을 보면 궁금해지는 게 있습니다. 먹물 빛 의복을 지어 입는 스님들의 식생이 검소하다는 것은 상식인데 상차림이 꼭 그런 것만은 아닌 것 같아서죠. 꽃을 붙여 부친 부꾸미만 해도 그래요. 찹쌀가루 반죽에 철 따라 꽃을 붙여 기름에 지진 화전이 내 눈엔 화려해 보입니다. 화려함이 부처님 뜻은 아니지 않느냐며 어깃장을 놓았더니 스님의 설명은반대로 갑니다. “예를 들어 볼 게요. 사찰의 단청을 보세요. 화려하지 않던가요? 화려함도 공양의 참뜻을 받들기 위한 방법입니다.” “부처님 공양음식도 결국 먹는 이는 대중입니다. 화려한 신심은 대중을 화려하게 대하는 겁니다. 부처님 오실 때 오색광영이 비쳤듯이 일상을 검소하게 사는 건 무소유의 실천이지만 궁극의 경지는 화려함이죠.” 나는 그날 마음에 남아 있던 의문 하나를 더 풀었습니다. ‘중이 고기 맛을 알면 빈대가 남아나지 않는다’는 말···. 절에서 웬 빈대 얘기가 나오느냐고 묻자 웃기부터 합니다. “스님들이 즐겨 먹는 나물 중에 ‘고소’란 게 있습니다. 본 이름은 ‘고수’ 지만, 고소하다해서 그리 불렸나 봐요. 이 나물 맛이 좀 비릿합니다. 하지만 먹다가 참맛을 알게 되면 빠지게 되죠. 그래서 빈대(줄기)까지 먹는다는 말이 생겼나 봅니다.” ㅎㅎ~ 그래서 빈대가 남아나질 않았군요. 속뜻을 알고 나니 입가에 절로 고소(苦笑)가 돕니다. -소설가/daumcafe 이관순의 손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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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7-17
  • 카르마(karma) 경영
    해외에서는 자서전이 퓰리처상 시상분야로 자리 잡을 만큼 독자의 폭넓은 사랑을 받는 분야입니다. 하지만 우리나라에선 자서전, 회고록, 평전 등이 좋은 대접을 받지 못하고 있어요. 목적이 뻔한 이야기 틀에서 벗어나지 못한 이유입니다. 대부분 자신의 성공담 나열에 그쳐 문학적 가치는 둘째 치고, 저자의 솔직한 고백이나 인간적인 고뇌 같은 것을 기대하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일본 ‘경영의 신(神)’으로 존경받는 기업인은 교세라 그룹 창업자인 이나모리 가즈오 명예회장입니다. 27세에 창업해 90년대 버블 붕괴 후의 장기 복합 불황을 견뎌내며 첨단 전자부품 제조업체로 우뚝 서 ‘세계 100대기업’에 명패를 올린 입지전적 인물입니다. 또한 24조원의 부채를 안고 파산 직전에 몰린 일본항공의 경영자로 구원 등판해 2년 만에 흑자 전환시켜 마쓰시타의 고노스케, 혼다의 소이치로와 함께 ‘일본 3대 기업가’로 추앙을 받습니다. 도덕경영, 정도경영의 원조이며, 일본 벤처기업의 선구자로도 잘 알려져 있지요. 이나모리 경영철학을 전수하기 위해 설립한 경영 아카데미가 유명한 ‘세이와 주쿠(盛和塾)’입니다. 한국 등 세계 55개국에 설치될만큼 명성을 높였지요. 손정의 소프트뱅크 회장, 마윈 알리바바 회장 등이 이곳 출신입니다. 설명이 길어진 데는 이나모리 회장만의 독특한 경영철학 때문입니다. ‘아베마 경영’을 창안하고, 불가의 도(道)를 접목시킨 ‘카르마 경영’을 주창하며 기업 경영을 새로운 인식과 철학적 논리로 접근했습니다. 그의 자서전을 보면 이나모리 사전에는 불가능이나 한계가 없어 보입니다. 그가 손대는 사업마다 불가능해 보인 일들이 척척 이루어지고, 그 과정에서 겪는 실패까지 장래 성공을 위한 밑거름으로 쓰이니까요. 이나모리 회장이 기업 성장을 위해 도입한 ‘아메바 경영’도 눈여겨 볼만 합니다. 그가 성장기업이 직면하는 문제로 비대해진 조직의 경직성과 유연성의 둔화를 지적했습니다. 조직이 일정 규모 이상 커지면 일체감을 지속시켜 나가기가 어렵다는 이유에서죠. 창업 시의 열정과 활력을 유지하기 위해 회사를 군별로분리, 독립된 중소기업처럼 운영하는 아메바 조직을 창안합니다. 세포 분열로 자신을 복제해 나가는 아메바에서 새 기법을 찾은 게지요. ‘아메바 경영’의 핵심은 복제 능력입니다. 분열만으로 자기를 복제하는 단세포 아메바처럼 제2·제3의 교세라를 만들어 내는 것입니다. 그는 또 경영의 새 기법으로 ‘카르마 경영’을 주창해 주목을 받습니다. 스티브 잡스가 말년에 집착한 것도 불가의 말인 ‘카르마(karma·業)’ 였어요. 입과 몸, 뜻으로 짓는 모든 선악의 소행을 뜻합니다. 카르마 경영의 핵심은 “인생은 마음에 그리는 대로 이뤄지고 강렬하게 생각하는 것이 현실로 나타난다”는 믿음에 서 있습니다. 삶의 이치를 깊은 명상을 통해 경영 신념으로 다졌지요. 이나모리 명예회장은 지극히 불확실한 시대를 헤쳐 나가는 방법을 여기서 찾았어요. 무엇보다 필요한 것은 ‘인간은 무엇을 위해 사는가?’ 근본적인 물음에 마주 서야 하고, 확고한 인생 지침을 갖는 것입니다. 이 근본적인 물음을 통해 어떻게 살 것인가? 삶의 방식을 자문했죠. 그가 구한 인생의 목적은 선한 마음을 쌓는 것, 영혼을 맑게 닦아 나가는 것입니다. 이나모리 회장이 책을 낼 때마다 화두로 들고 나오는 것이 있습니다. “세상에서 태어나 단 한 번뿐인 귀한 삶을 사는데, 지금 나는 정말로 가치 있는 삶을 살고 있는가?” 늘 같은 질문을 던집니다. 기업 경영도 삶을 수행하는 과정으로 살폈어요. 일이란 자신을 수련해 나가는 가장 강력한 수단으로 삼은 것입니다. 그러한 관점에서는 돈만 보고 일하는 건 어리석고 불행한 일일 수밖에요. 그 역시 단순히 먹고 살기 위해서였더라면 60년 동안 일에 몰입하기란 어려웠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올해 89세인 이나모리 가즈오 회장은 2019년 36년간 봉사해온 ‘세이와 주쿠’를 해산하면서 뚜렷한 소신을 밝히기도 했지요. “세이와주쿠는 1대에서 끝내는 게 좋겠다. 내 경영철학을 누군가가 대신해 해석한다면 그것은 이미 ‘이나모리 철학’이 아니다.” 평생 한 가지 일에 전념하고 자신의 일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사람을 보면 감동을 느낍니다. 하지만 세상에는 단추 구멍으로 세상을 보는 사람이 많습니다. 인생을 사는 일이든 기업 경영의 일이든 가치는 같은데 사는 방법이 다를 뿐입니다. 무엇을 위해 사나, 어떻게 살고 있나, 끊임없이 묻고 답하는 일 말입니다. 독특한 경영철학을 쌓은 이나모리 가즈오 회장이 보는 삶의 평범과 비범의 차이는 바로 이 지점에서 갈리는 게 아닐지···. -소설가/daumcafe 이관순의 손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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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7-12
  • 엄마꽃 하얀 찔레꽃
    올봄에 유난히 사랑했던 분들이 차례로 이 땅을 버리셨다. 그것도 온 자연이 힘을 모아 푸른 생명을 풀어내는 싱그러운 5월에, 날아드는 세상을 등진 이들의 부음은 생명의 부활로서가 아닌 소멸로서의 잔인한 봄을 반추하게 했다. “아들을 군대에 보낸 엄마 눈엔 군인만 보인다더니, 나이가 드니 떠나는 사람만 보인다”라고 하신 생전의 어머니 말씀이 이젠 내게도 낯설지 않은 말이 되었다. 그 글귀에도 생성과 소멸이 공존하니 ‘생과 사’는 같은 길에 있고, 무엇이 먼저고 뒤인지 구분할 수 없으니 쌍태임이 분명했다. 외출에서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었다. 습관처럼 광나루 역에서 내려 아차산 능선을 타고 집으로 돌아오는 산자락에, 하얀 찔레꽃이 피었다. 볕 바른 곳이면 들이든 산이든 소담스레 피어나 향기를 풀어내는 찔레꽃은 어머니가 생전에 유난히 사랑했던 꽃이었다. 꽃을 보며 잠시 상념에 젖는데, 전화음이 울렸다. 청춘의 사랑과 아픔을 서로 싸매주고 아파했던 해묵은 친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목소리에 치받는 감정이 실려 있었다. 치매로 모시기 어려워진 어머니를 요양원에 모셔놓고 산길을 내려오다 “고려장이 이런 것이구나”하는 생각이 가슴에 들불처럼 타오르더라는 것이다. “나 지금 어머니 고려장하고 돌아온다. 불효막심한 자식이지.” 자책하는 친구의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 이야기를 듣는 나도 가슴이 먹먹해 말문을 열지 못했다. 지난달 만났을 때만 해도, 더는 감당이 안 될 것 같다면서도 자식 된 도리를 포기하지 않겠다고 했는데, 오죽했으면 치매에 걸린 어머니를 시설로 모시고 갔겠는가. 그의 아픈 마음을 헤아렸다. 그 어머니는 친구의 어머니만이 아니셨다. 대학시절 하숙생활로 늘 배고파할 때, 따뜻한 흰쌀밥을 밥그릇에 고봉으로 얹어 먹이셨던 사랑과 인자가 넘치는 우리들의 어머니이기도 했다. “그래, 힘든 결정을 했구나.” 그 마음을 헤아리면서도 더는 위로의 말을 찾지 못했다. 집으로 돌아와서도 친구의 모습이 한 동안 어른거렸다. 화려한 꽃철을 ‘고려장’이란 슬픈 어휘로 채색한 친구의 말이 가슴에 한줄기 스산한 바람으로 스쳤다 ‘늙은 말이 길을 안다(老馬識途)’라는 문장이 있다. 경험이 많은 사람의 지혜를 뜻하는 것으로 한비자가 쓴 말이다. 고죽국 정벌에 나섰던 제나라 군대가 너무 적진 깊숙이 들아갔다가 겨울이 돼서야 철군을 하면서 길을 잃게 되었다. 이때 지혜자가 늙은 말의 지혜를 이용하자며 말을 풀어놓고 그 뒤를 따라가도록 해 길을 찾게 되었다는 고사다. 친구의 말에서 ‘노마식도’란 말이 떠올랐다. 노모를 지게에 지고 산으로 올라가는 아들의 심정이 어땠을까? 실려가는 노모의 마음은 어땠을까? 마을을 지나고 산길을 넘어서 산자락에 휘감겨 숲길이 깊어지는 마지막 길에, 말은 없어도 어머니와 아들의 가슴에는 곡진한 사랑이, 아픔이 여울져 흘렀을 것이다. 끝내 아들이 눈물을 흘리며 절을 올리자 노모가 일러주었다. “아들아, 내려갈 길을 잃을까 봐 솔가지 꺾어 떨어뜨려 놓았다”라고…. 늙은 어머니가 바로 노마식도의 지혜자였다. \노모의 사랑과 지혜가 와락 눈물을 쏟게 한 슬프고도 아픈 어머니의 사랑 이야기를 시인 김형영이 ‘따뜻한 봄날’로 시를 썼다. 10년 전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내 기억을 맴돌던 시였는데 오늘은 친구를 생각하며 떠올렸다. 소리꾼 장사익이 한 맺힌 가락으로 풀어낸 ‘꽃구경’의 노랫말이 ‘세상에는 어머니의 사랑이 있을 뿐, 효자는 없다’라고 자탄한 친구의 얼굴에 오버랩되어 흔들렸다. 그러고 얼마 있다가 친구 어머니의 부음을 들었다. 요양원에 모신 지 딱 보름만이다. 그래서 마음이 더 많이 아려왔다. 그 보름을 못 참아서, 불효막심한 죄를 저질렀다고 친구는 얼마나 탄식하며 아파할까. 그의 아픔이 전류를 타고 내 가슴을 찌르는 것 같았다. 장례식장에서 친구의 손을 잡고 아무런 위로를 전하지 못했다. 그저 ‘안타깝다’는 말 말고는 할 말을 잊었다. 발인을 마치고, 장지인 충북 제천까지 버스를 타고 갔다. 가는 동안 차창밖으로 눈부신 신록이 흐르고 있었다. 상념이 정처를 잃고 한참을 떠다니는 동안 목적지에 도착했다. 버스에서 내려 사방을 둘러보았다. 줄지어 따라오던 산이며 숲들이며 모두 보이지 않았다. 다들 어디로 간 걸까. 간 곳을 물을 데도 없다. 그래, 모든 것은 잠시 스쳐갈 뿐이다. 세상도 세월도 너도 나도…. 낯선 광야에 덩그마니 홀로 선 나를 떠올렸다. 친구가 한 줌 재로 남은 어머니를 가슴에 품고 앞장서 걸었다. 우리 나이로 아흔여섯을 사셨다. 친구들 어머니 가운데 맨 마지막을 장식한 장수하신 어머니다. 그래서 친구를 효자라고 칭찬했고, 잘 모시라고 만날 때마다 안부를 물었는데, 이제 ‘어머니’라는 호칭마저 영영 길을 잃었다. 친구의 뒤를 따라 키 낮은 봉분 사이를 느릿느릿 걸었다. 한 발, 두 발, 세 발... 발걸음이 한참을 더할 때, 동트는 새벽빛 같은 푸르스름한 빛깔이 상념 속으로 잉크처럼 번져왔다. 그리고 명징하게 살아나는 가슴의 말을 들었다. “그래, 지금도 넌 무겁게 사는구나. 손 놓으면 큰일 날 줄 알고…. 훌훌 털고 빈손으로 가는 것을. 입으로는 말하면서도 천 년은 살 것처럼 움켜쥔 손은 여전하구나.” 유해를 안장하면서 장지 옆으로 제철을 만난 찔레가 무더기로 피어 있는 것을 보았다. 5월의 마지막 날. 삼우제를 끝낸 친구와 만나 위로를 건네고 집으로 오는 길이었다. 그날도 광나루역에서 내려 아차산으로 향했다. 산길을 넘어 숲길로 들어서는 가장자리에 아직도 군락을 이룬 찔레꽃과 다시 만났다. 다리도 쉴 겸 돌무더기 위에 걸터앉아 한참을 하얀 꽃과 마주했다. 그날 장지에 핀 찔레를 가리키며 나에게 말하던 친구가 떠올랐다. “어머니가 찔레꽃을 참 좋아하셨는데... 기뻐하실까?” “그래, 반가워하시겠다. 우리 어머니도 생전에 찔레를 사랑하셨지.” 나는 말끝을 흐렸다. 갑자기 어머니 무덤가에 심은 찔레꽃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작년 어머니 기일에 묘지 경계를 찔레꽃으로 울타리를 둘렀는데, 지금쯤 하얀 꽃들이 그들먹하게 피었을 것이다. 어머니는 유달리 다섯 장 하얀 꽃잎으로 노란 꽃술을 품은 찔레꽃을 좋아하셨다. 다리가 아프실 때도 오월이면 찔레를 보려고 들에 나가셨다. 볼수록 순박하다며 무척이나 정분을 주셨던, ‘울 엄마 꽃’이다. 지금쯤 햇빛을 잘 구슬려 만든 향긋한 찔레 향이 싱그러운 바람에 실려 연가처럼 퍼져나가겠지. 꽃잎에 물방울로 매달렸던 향기가 바람결에 톡톡 터지며 코끝을 스쳐 가슴속 골짜기로 스며들었다. 소복소복 쌓인 눈처럼 하얀 꽃들이 어머니의 흰 무명옷처럼 따뜻하고 정겹다. -소설가/daumcafe 이관순의 손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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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7-10
  • 잊힌 전쟁, 잊힌 영웅들
    전쟁이 끝나면 사람들은 참혹한 기억에서 도망치려고 한다. 그 점에서 우리는 할 말을 잊는다. 임진왜란 때도 그랬으니까. 7년 전쟁을 끝낸 일본이 전후사 연구에 몰입할 때,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유성룡의 ‘징비록’을 보고 조선에도 반성하는 사람이 있다며 놀라워했다는 얘기가 우리를 슬프게 했다. <6·25 전쟁 73주년>. 이념의 더께는 여전하고 무심한 세월만 덧씌워졌다. 폐허 위에 자유 민주주의의 기틀을 다지고 경제대국으로 나가는 발판을 제공한 전쟁이, 우리의 기억에서 멀리 도망가 있다. 잊힌 전쟁, 잊힌 승리, 잊힌 영웅들로.... 6·25 40주년이던 1990년, 서울시청 정문 위로 한 장의 대형 흑백사진이 걸렸다. 6·25의 참상을 상징적으로 보여준 사진이었다. 전쟁으로 부모 형제를 잃은 소년이 길을 헤매다가 덕수궁 우물가에 잠든 것을 외신기자가 찍어 라이프 지(誌)에 실었던 ‘우물가 소년’이다. 이후 소년은 어떻게 되었을까? 그를 추적한 조선일보가 그해 6월 25일 자에 “전쟁고아 ‘우물가 소년’ 하버드 박사 돼 40년 만에 돌아왔다”는 제목의 기사와 사진을 톱으로 올려놓았다. 임종덕(J. 화이트)씨. 고아 인생을 화려하게 반전시키고, 40년 만에 한국을 찾은 그의 첫 말은 “6·25를 잊고 살아온 사람들에게 그때의 참상을 알리고 싶다”는 것이었다. 나는 오래전 그분의 육성 증언을 직접 들은 적이 있다. 공무원이었던 소년의 아버지는 전쟁이 터지자 마루 밑에 구덩이를 파고 숨었다. 악착같은 인민군이 집안을 샅샅이 뒤져 아버지를 인민재판에 끌어냈다. 그들은 마당에서 아버지와 어머니를 총살하고, 형제들이 감금된 안방에 불을 질렀다. 이 광경을 14세 어린1 소년은 나무 위에서 숨이 멎은 채 지켜봐야 했다. 외신기자는 오갈 데 없는 소년을 데리고 전장을 누비고 다녔다. 그러다 1·4 후퇴로 전세가 뒤바뀌면서 전선을 취재하던 외신기자는 전사하고, 소년은 가까스로 살아나 서울의 한 고아원에 맡겨졌다. 소년은 불광동 고아원에서 생활하며 원장의 비리를 수없이 목격했다. 원생들은 시래기죽도 못 먹는데 그들은 쌀밥을 먹고, 그뿐이 아니었다. 미국인들이 원생들에게 나누어준 옷이며 신발이며 구호품까지 그들이 떠나기 무섭게 몽땅 회수해 팔아먹었다. 그때마다 트럭이 들락거렸다. 아이들은 숨어 이 광경을 지켜보면서도 고아원 총무의 서슬 퍼런 눈빛에 질려 입을 열지 못했다. 참다못한 소년이 당찬 결심을 했다. 쫓겨나면 그뿐, 어디 가면 못 살까. 아이들을 집합시킨 후 당돌하게 외쳤다. “우리 나가자. 나를 따라올 사람은 다 나오라.” 그 한마디에 82명이 따라나섰다. 너무나 많은 아이들이 호응하자 당황스러웠다. 이 많은 아이들을 데리고 어딜 가지? 두려운 생각이 교차하는 동안 발걸음은 어느새 무악재를 넘어 서울역에 이르렀다. 아이들은 남산 곳곳에 파놓은 방공호 자리를 아지트로 만들고, 다음날부터 서울역 부근 염천동 일대의 미군 쓰레기장을 뒤져 돈 될 것을 찾았다. 깡통 하나씩 옆구리에 차고서. 그러나 적자생존의 법칙은 이 바닥에도 있었다. 힘센 형들이 아이들의 것을 빼앗고 괴롭히자 소년은 대항할 조직을 만들었다. 싸울 때 대오와 공격 요령을 가르치고 남대문, 도동, 양동 일대를 돌아다니며 세 싸움을 벌였다. 소년은 맹렬하고 독했다. 금방 소문이 나면서 마침내 이 일대 양아치의 두목이 되었다. 별칭 ‘빨강셔츠’. 그가 빨강셔츠를 입고 나가면 아이들이 달려와 머리를 숙였다. 경찰들도 그를 알고 있지만 남을 괴롭히지는 않았으므로 단속은 하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멀쩡한 얘들이 고열로 쓰러지기 시작했다. 둘러업고 달려가 병원 문을 두드리지만 양아치라며 모두 문을 닫아걸었다. 하루사이 32명의 아이가 홍역으로 죽어나갔다. 시신을 그러 묻으며 소년은 돈독이 올랐다. 동생들이 죽은 건 모두 돈 때문이라며. 그런 소년에게 인생의 전환점이 찾아왔다. 하루는 서울역 앞에 미군 세단이 서고, 별을 단 미군 장군이 내리는데, 소년의 눈에 비친 건 뒷좌석에 놓인 가죽가방이었다. 직감에 ‘돈’이라 판단하고 모든 시선이 장군에게 쏠릴 때 순식간에 가방을 빼돌려 양동 골목으로 내달렸다. 그러나 가방 안에는 접힌 지도 한 장뿐이었다. 실망한 나머지 지도는 쓰레기통에 버리고 가죽가방만 챙겨 남대문시장에다 팔고 나오는데. 낯익은 형사들이 그를 덮쳤다. “네 놈 짓이지? 어딨어? 공군사령관 가방!” 가방에 비밀지도가 들었다며 방방 뛰는 형사에 붙들려 서울역으로 끌려왔다. 경찰과 헌병이 쫙 깔렸고, 동생들 수십 명이 무릎을 꿇고 있었다. 소년은 ‘아이엠소리, 베리소리, 이리 오케이, 저리 오케이’를 연발하며 형사들을 안내해 쓰레기통에 버린 지도를 찾아주었다. 그런 소동을 벌인 소년에게 찾아온 건 벌 대신 사랑이었다. 미공군사령관 화이트 장군이 지도를 돌려받은 고마움으로 사령관 가방보이로 채용한 것이다. 그리고 한국전에 참전 중인 아들이 전사하자 소년을 아예 양아들로 입양시켰다. 1952년 8월 그의 미국생활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타고난 영민함과 명석한 두뇌를 지닌 그는 양부모의 후원아래 하버드대 정치학과를 수석 졸업하고, 육군 대령으로 전역하기까지 대외정책을 결정하는 미군의 주요 보직을 수행했다. 한국을 찾으며 그가 말했다. “하버드 대에서 하루 3시간 자며 공부할 때나, 군에 복무할 때도 6·25의 아픔과 한국을 잊은 적이 없다”라고. 우물가 소년의 '비극과 승리'는 우리의 스토리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잊고 산다. 대한민국이 어떻게 만들어지고, 지켜지고, 융성해졌는지를 까맣게…. 올해는 <6·25 전쟁 정전 70주년>의 해다. 정부는 5만여 참전 용사들에게 명예 제복인 ‘영웅의 제복’을 만들어 선물했다. 그동안 참전 용사들이 조끼를 입고 다녔는데 일부에서 비하되는 것을 보고 헌신한 분들을 위한 최소한의 예우를 갖추자는 뜻으로 준비했단다. 늦은 감이 있지만 잘한 일이다. 제복을 받은 구순(九旬)의 용사들은 “나라에서 우릴 잊지 않아 감사하다.” “눈 감을 때 수의 대신 입고 싶다.”라며 자부심을 드러냈다. 참전 용사들은 영웅의 제복을 입고 오늘 6.25 기념식에 참석했다. 6.25 전쟁은 잊힌 전쟁이 돼서도 안 되지만 영웅들을 잊어서도 안 된다. 역사는 우리에게 그 점을 묻는다. ‘역사를 잊은 민족은 미래가 없다’고. -소설가/daumcafe 이관순의 손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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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7-06
  • 품위있게 늙어가기
    ‘만족함을 알면 욕되지 않고, 그칠 줄을 알면 위태롭지 않다.’ (知足不辱 知止不殆) 젊어서 선배들로부터 많이 듣던 말입니다. 세월이 흐른 지금은 너나 없이 입에 올리는 말이 ‘품위(品位)’입니다. 어떻게 하면 노년을 품위 있게 살며, 품위 있게 늙어갈 건가. 삶의 화두가 되었지요. 품위란 한자는 입구(口) 세 개가 모인 ‘물건 품(品)’과 인(人) 옆에 설 립(立)을 더한 ‘자리 위(位)’를 써요. 노년의 품위를 말할 때 나는 두 개의 원칙을 세워놓고 생각합니다. 첫째는 말을 때와 장소에 맞게 하는 것이고, 둘째는 스스로를 살펴 겸손하게 처신하는 것입니다. 아는 척하거나 말 길게 하지 않기, 다른 사람 말할 때 끼어들지 않기, 늘 나를 돌아보며 살펴 살기….하지만 나를 돌아보고 살기가 쉽지 않은 건 사람은 자신에게 관대한성향이 있어섭니다. 남에겐 관대하면서 자신에겐 엄격하기란 쉽지 않아요. 올해를 시작하며 ‘성찰’과 ‘자성’을 꼽은 건 그래서 입니다. 바쁨 속에도 짬을 내어 나를 돌아보지 않으면 영영 나 자신을 잃고 말 것이란 두려움이 가슴 한 구석에 늘 자리 잡고 있어요. 생각 없이 살고 주어지는 대로 산다는 게 너무 덧없어 보여섭니다. 아침에 명상을 하고, 낮엔 글을 쓰고, 밤에는 일기를 쓰면서, 나를 돌아보는 기회를 많이 가지려고 합니다. 때로는 간밤에 꾼 꿈에 대해 생각하는 것도 ‘나’를 돌아보는 기회일 수 있겠다 생각하죠. 한 여름 태양 같은 에너지는 기를 숙였어도 돌담에 속삭이는 햇살처럼 온기를 주는 사람이 되고픈 바람입니다. 예전처럼 사람들이 내 말에 귀를 쫑긋 세우지 않아도, 중심에서 멀어지면 멀어진 대로 받아 들이며 살아요. 우선은 중심에서 잘 빠져나오는 것이 중요합니다. 쨍쨍한 여름날이 다 가고 서늘한 가을인데, 비키니 입고 들레면 어찌 될까? 내 선 자리를 인지하고 다가올 겨울을 바라봐야 내게 보다 진지해질 수 있습니다. 퇴직한 지 수삼 년이 지났는데도, 외부와 선을 대는 일에 집착하거나, 그것을 복원하려고 아등바등하다 보면 내 삶은 위축되고 노년의 건강을 해치는 스트레스만 쌓입니다. 몸에 익은 것들과의 작별도 익숙해야 해요. 나만의 루틴을 만들어 실천 하는 것이 품격까지는 아니더라도, 외부의 충동이나 유혹에 휘둘리지 않고 내 나름의 고요한 삶을 즐길 수 있는 수단입니다. ‘남김없이 다 쓰고 간다. 재물, 재능, 열정, 사랑도 몽땅!’ 지인이 마음 벽에 쓴 비문이랍니다. 젊어선 쉬지 않고 일에 매달렸는데,이젠 꿀벌처럼 나를 위해 부지런히 살겠답니다. 그분 결기가 부럽기도 한 건 ž告楮? 그러지 못하는 내 마음을 대신해서가 아닐까 해요. 흔하게 받는 카톡 내용이 대부분 병 걸리지 말고, 잘 늙고, 장수하자는 것들입니다. 온라인 커뮤니티까지 세상의 좋은 말로 차고 넘칩니다. 그럼에도 도움이 안 되는 건 아직 생각과 행동이 겉돌기 때문입니다. 미나미 가즈코가 쓴 ‘늙지 마라 나의 일상’도 어떻게 하면 노년을 품위를 지키면서 살까로 가득 찼어요. 혼자 사는 70대 여성 눈으로 많은 관찰과 체험, 생각을 채집해 정리한 노년용 실용서로 일독을 할만합니다. *.. 오늘 아무렇지도 않게 했던 일을 내일에는 못하게 될지 모른다. 그런 상황도 받아들일 준비가 돼 있다. 일종의 각오다. 각오가 돼 있기에 난 매일 반복되는 사소한 일상을 감사하게 받아들일 수 있다. *.. 하루에도 옷을 여러 번 갈아입는다. 내 힘으로 옷을 벗고 입을 수 있는 날이 오래오래 지속되길 기도하며. 옷을 갈아입는 행동이 단순한 행동이라 해도 내겐 육체적 정신적 리허빌리테이션이다. *.. 자세를 바르게 하는 것이야 말로 내게 줄 수 있는 가장 큰 선물이다. *.. 청소하기, 집안일 찾아 하기는 내가 할 수 있는 중요한 운동이다. *.. 심신이 약해진 고령자에게 잠깐의 통화는 쓸쓸함을 달랠 좋은 친구다. *매일 일기를 쓴다. 일기를 쓰면 노화 예방에 효과가 있을 것 같아서다. *약속은 삶의 이벤트라고 생각한다. 친구든 친지든 사람을 만날 때 만큼은 설렘으로 준비하고 즐거운 시간을 보내려고 노력한다. *.. 삶의 마지막은 나 혼자다. 젊든 늙든 반려자를 상실한 슬픔을 쉽게 극복되리라 생각하는 건 잘못이다. 수십 년이 지나도 그 애틋한 마음은 달리 설명할 길이 없다. 그저 심각하게 생각지 않으려고 할 뿐…. 노년에게 건강이란 무엇일까. 스스로 행복하다고 느끼는 생활을 지속해 나가는 것이겠죠. 건강이 나빠지면 따라 마음도 약해집니다. 우울해질 땐 마음이 따뜻해질 수 있는 상황을 적극 만들어야 합니다. ‘감사합니다.’ 나이를 먹은 후 빼먹지 말아야 할 인사예요. 나를 기억하는 사람이나 나와 마주치는 모든 사람에게 감사의 말을 건네는 것이 최소한의 품위를 지키는 일이랍니다. 말할 때는 꼭 웃으면서, 고마워요. 감사해요….미소는 마음의 자물쇠를 여는 열쇠와 같습니다. -소설가/daumcafe 이관순의손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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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7-03
  • 비로서 깨닫게 되는 ‘시든다’는 말
    늦가을의 기억입니다. 막내아들 집을 찾은 어머니와 공원을 산책하는데 뜬금없이 “세상이 참 헐거워졌다”라고 말씀하십니다. “뭐가요?” 젊은 아들이 묻지만 어머니는 밍근한 웃음만 지어 보이셨지요. 그땐 무엇을 말씀하는지 잘 몰랐습니다. 이 나이가 돼서야 그 미소의 뜻을 알게 됩니다. 가을 끝을 돌다 절로 깨친 겁니다. 연이틀 추적되던 가을비가 그치자 문득 세상이 헐거워 보인다는 생각이 들어서죠. 낙엽진 거리가 성글어 보이고 공원도 휑합니다. 빈 가지 사이로 하늘이 보이고, 사람들 사이를 스치는 바람도 스산합니다. 산 계곡 물소리는 수척해졌고, 젖은 돌계단을 밟는 사람들 표정도 쓸쓸합니다. 들에도 산자락에도 이별하는 것뿐입니다. 그 길을 걷다 문득 때 지난 어머니의 대답을 찾았습니다. ‘너도 살아보면 안다’는 것을. 시든다는 것은 돌아가기 위한 생명체의 마지막 경건한 행위란 것을. 한 생을 휘돌았던 뜨거운 피가 빠지며 전하는 마지막 언어가 ‘시든다’ ‘시듦’이라는 말이겠지요. 다음은 ‘사위다.’ 불타듯 소리 없이 사라지는 것만 남습니다. 아쉬울 것도 서운할 것도 없는…. 사람들은 1년이 훅 바람처럼 지나간다고 속절없어 하지만, 누구에겐 그 짧은 시간이 성심을 다해 살았던 생애입니다. 어느 시인은 낙엽을 보고 ‘땅에다 맨몸을 뉘고 상처를 묻는다’고 했습니다. 어쩌면 이 말은 온 곳으로 돌아가려는 마지막 지움의 흔적일 수도 있겠지요. 시듦이란 소임을 다한 생명이 자신의 삶을 거두는 일이니까. 그래서 ‘잘 시들면 잘 거두는 것’이란 말이 생겼나 봅니다. 세월의 속도감은 12월 들어 유난히 빠르게 느껴집니다. 엊그제 꽃이 피었다 했는데 여름이 오고, 선선한 바람이 분다 했는데 어느새 단풍이 들더니 그도 잠시, 비바람이 낙엽을 털어냅니다. 그리고 앙상한 뼈마디로 남기까지 나무의 1년은 쉼 없이 가쁘게 돌아온 시간의 매듭뿐입니다. 지난 주말, 도봉산에 올랐다가 나를 돌아보게 한 것이 또 있습니다. 마른 낙엽을 밟다가 돌연 미안한 마음이 든 겁니다. 오롯이 순종으로 잇대 온 나뭇잎의 굽은 등을 밟다가 말입니다.생애를 끝내고 갖는 마지막 쉼에 모질게 가하는 내 밟는 행위를 보고…. 잊고 지내온 이기적인 내 모습이 어른거립니다. 낙엽을 빗겨 밟으려고 하면 할수록 발에 밟히는 낙엽의 마른 신음소리를 듣습니다.어찌 성한 몸으로 피멍 든 등을 밟으려 하나. 산행 때마다 나무뿌리 밟지 말라고 당부하던 친구가 떠오릅니다. 사람들이 등산길에 드러난 나무뿌리를 밟는 모습에, 생명에 가하는 야만행위라고 펄쩍 뜁니다. 나뭇잎이 돋아날 때의 향긋함, 우거진 수풀을 제초할 때 나는 알싸한 풀 향기, 쌓인 시든 잎에서 풍기는 농익은 낙엽의 향은 얼마나 코끝을 홀리고 벌렁거리게 하던가. 푸른 잎 단풍으로, 낙엽으로, 이어지면서 사람들 가슴에 위안을 주던 잎새의 생은 그래서 경건하기조차 합니다. 김동길 박사가 이런 말을 했지요. 나이가 들면 아는 게 많아지고 모든 것이 이해될 줄 알았는데, 실은 모르는 게 더 많아지고 이해하려고 애써야 할 것들이 더 많아지더라고... 나이가 들면서 그런 걸 느낍니다. 넓은 길보다는 호젓한 오솔길이 좋고, 또렷함보다는 아련함이 좋습니다. 살가움보다 무던함에 마음이 가고, 질러가는 것보다 에둘러 돌아가는 굽잇길이 즐거움을 줍니다. 시든다는 것은, 힘줄만 앙상하게 남는다는 것은 한 생을 휘돌아 나가는 생명들의 마지막 미사입니다. 시들어 마른 맨몸을 땅에 뉘이고 상처를 묻는, 숙연한 의례입니다. 길을 나서면 만나는 모두가 스승이라는 말이 맞습니다. 오늘은 하찮은 마른 낙엽이 내게 죽비를 들이댈 줄은 몰랐습니다. 나도 저들처럼 지난 1년 삶을 털어서 슬픔은 슬픔대로, 아픔은 아픔대로 사위어 땅에 묻어야겠습니다. 미움도, 아픔도, 미련도 모두. 그리고 다시 울고 웃는 일상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세월이 이렇게 소리 없이 휘감고 돌아가면서 절대 변할 것 같지 않던 나도 이런 변화를 맞습니다. 얼굴도, 생각도, 마음도, 모두가 다…. 시인 친구가 일러주더군요. 편지를 부치러 나갔다가 집에 돌아왔는데 주머니에 편지가 그냥 있으면, 가을이 맞다고…. 가을 건망증은 다람쥐가 더합니다. 애써 도토리를 땅에 묻고는 잊으니까요. 세상뿐 아니라, 세월도 헐거워 보이는 12월의 시작입니다. -소설가 daumcafe 이관순의 손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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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6-29
  • 말의 고수
    나는 말이 많은 편일까? 적은 편일까? 과하면 모자람만 못하다는 경구가 적용되는 곳이 말이다. 수많은 처세술, 인생수험서가 공통으로 지적하는 것이 말을 앞세우지 말고, 품위 있는 말을 하고, 말수를 주리고, 절제하라는 것이다. 언어훈련센터를 운영하는 지인 말에 따르면 사회에서 가장 환영받는 사람으로 남의 말을 잘 들어주는 사람을 꼽았다. 눈을 맞추고 상대 말에 고개를 끄덕이면서 ‘그랬구나.’ ‘상처 됐겠다.’ ‘그래서, 어쨌는데?’ 내 말에 공감하면서 관심을 표하는 사람만큼 마음을 끄는 사람이 또 있을까 싶다. 또 ‘말을 잘하는 것’ 보다 ‘잘 말하는 것’이 중요하고, ‘상대가 원하는 것’을 말하기보다 ‘상대가 싫어하는 말’을 안 하는 것이 상수라고 한다. 백 번 좋은 말을 하고도 한마디 말실수로 그간 따놓은 점수를 홀랑 날리기 십상이다. 둑이 터진 제방에 물을 담을 수 없듯이, 쏟으면 돌이킬 수 없는 게 말실수다. 사과를 하고 또 사과를 해도 상대의 마음에 가라앉은 앙금까지 거두기는 힘들다. 오죽하면 “말한 입은 3일 가고, 듣는 귀는 천 년 간다”라고 했을까. 나는 말하고 까마득하게 잊고 있는데 들은 사람은 천 년을 기억한다니 섬뜩하다. 시카고 공항에서 경험한 일이다. 터미널을 나와 차를 기다리는데 함께 출장 간 친구가 담배를 태우고 있었다. 바작바작 담배는 타드는데 버릴 데가 마당치 않다. 모자를 쓴 거구의 흑인이 빤히 지켜보고 있는 상황에서 적당히 버릴 수도 없었다. 게다가 우리를 바라보며 헤죽헤죽 웃기까지 하는 것이다. 열이 난 친구의 입에서 볼멘소리가 터져 나왔다. “저 연탄! 왜 꺼지지 않고 실실 웃는 거야!” 그런데 어쩌나, 흑인이 더듬더듬 말을 하는데 우리말을 하는 것이다. “나 연탄 아녀요 사람여요. 빠리빠리 버려요. 나 청소해야 해요.” 그날 이 친구는 ‘연탄’이란 말 때문에 세 번씩 ‘아임 쏘리’를 외쳐야 했다. 1976년 리메이크 영화 ‘킹콩’ 오디션 현장에 한 젊은 여배우가 오디션을 보러 왔다. 경력은 연극 무대뿐, 영화 출연은 전무한 여자였다. 한눈에 봐도 각진 광대뼈에 매부리코, 얼굴 조합이 미인과는 거리가 멀어 보였다. 성격이 불 같은 영화 제작자가 이탈리아어로 불평을 했다. “저런 얼굴 가지고 여긴 왜 온 거야. 누가 저런 여잘 불렀어?” 명문대학 출신인 이 미국 여배우는 공교롭게도 이탈리아어에 밝았다. “기대만큼 예쁘지 않아 죄송한데요. 그래서 어쩐답니까? 보다시피 이게 전부인데.” 그녀는 이탈리아어로 또박또박 내 갈긴 후 문을 쾅 닫고 나가버렸다. 훗날 ‘크레이머&크레이머’ ‘철의 여인’으로 아카데미 여우조연?주연상을 받고 ‘메디슨 카운티 다리’에서 매력을 발산한 메릴 스트립이다. 그녀는 오스카상 후보 최다 선정기록까지 지녔다. 제작자가 사과는 했겠지만 두고두고 후회되지 않았을까? 말을 생각대로 쏟아내면 실수할 확률이 커지는 법이다. 이런 경우도 있었다. 부장 승진을 앞둔 대기업의 김 차장 얘기이다. 회사엔 인품이 훌륭하기로 소문난 창업주가 계신데, 은퇴 후도 소일 삼아 출근을 하고 있었다. 그러다 보면 사적인 일을 직원에게 부탁하는 경우가 종종 생겼다. 그날도 노(老) 회장이 자신의 비서였던 홍보실 김 차장에게 전화를 했다. “김 차장 나 좀 도와줘야겠네.” 당시 김 차장은 골치 아픈 일로 신경이 곤두서 있을 때였다. 짜증이 난 그가 수화기를 내려놓으며 무심코 한 말이 “아, 돌겠네. 할아버지까지 오늘 왜 이러시나!” 그 소리가 노 회장께 그대로 전달되었다. 한쪽은 끊은 줄 알고, 한쪽은 수화기를 들고 있었으니까. 이후 상황은 어떻게 전개될까. 일단은 찍혔을 것이다. 승진도 물 건너갔을 것이다. 그런데 노 회장님 인품이 대단한 게 이를 알고도 모른 척해주었다. 게다가 부장 승진에 아무런 영향을 주지도 않았다. 승진 후, 인사차 들렸더니 노 회장이 악수를 하며 일렀다. “김 부장, 전화는 상대방이 끊었는지 확인하고 말을 해야지.” 하며 웃더란다. 말귀를 알아듣지 못한 김 부장의 마음이 편할 리 없었다. 하루종일 노 회장의 말이 뇌리를 맴돌았다. 사정의 전말을 알게 된 것은 며칠 뒤 비서를 통해서였다. 삶의 지혜는 종종 듣는 데서 비롯되고, 후회는 대개 말함에서 시작된다. 말 잘하려고 애쓰지 말고 적절할 때 거두는 것이 말의 품격을 높인다. 말 잘하는 사람보다 말실수가 없는 사람을 잘 관찰해 보는 것도 말을 훈련하는 좋은 방법이다. 말의 고수는 말을 잘하는 사람이 아니라, 말을 절제하며 남의 말을 경청하는 사람. 말하기 고수는 그런 사람이다. “개에게 물리면 통원 치료로 끝나지만, 사람 말에 물린 사람은 지금도 입원 중”이라는 말이 있다. -소설가/daumcafe 이관순의 손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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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6-26
  • 내 마음의 ‘빨강약’
    나도 어릴 때는 팔다리가 성할 날이 없었다. 팔꿈치와 무릎, 정강이, 이마에 콧등까지 곳곳이 깨지고 멍이 들어 다녔다. 지금 같이 밴드나 연고가 없던 시절, 상처엔 그저 ‘빨강약(머큐로크롬)’이 최고였다. 집집이 만병통치약처럼 비치한 구급약이었다. 피가 철철 나도 빨강약만 바르면 안심이 되었으니까. 저녁 무렵, 버스 정거장 앞을 지나다 한 광경을 보고 피식 웃음이 새어 나왔다. 아이가 퇴근하는 아빠를 부르면서 뛰어가다 넘어져 울음을 터뜨렸다. 재미있는 건 아이를 일으켜 세운 아빠의 말법이 엄마들과는 사뭇 다르다는 점이다. “괜찮아. 남자가 이런 걸로 우냐. 조심해. 알았지?” 아빠는 연방 ‘알았지’를 강조하는데 위로가 안 된 아이는 더 섧게 울었다. 같은 상황에서 엄마라면 어떻게 할까? 우선 아이부터 꼭 품에 안고 ?? 얼러줄 것이다. “놀랬지? 많이 아프겠다. 엄마가 봤어 피 안나.” 엄마는 계속 위로의 말을 건네며 등을 토닥여 준다. 아이는 점차 안정을 찾고 울음을 그치지 않을까? 초등학교 1학년 때 기억인 듯하다. 겨울방학이 돼 부모님과 기차를 타고 외가로 가는데 무척이나 추운 날이었다. 그때는 객차가 화물차 개조 수준이라 난방은커녕 숭숭 찬바람이 들어왔다. 어린 내가 추워서 몸을 배배 꼬니까 아버지가 그런 말을 하셨다. “사내가 이 정도 추위를 못 이기면 어쩌려고. 이렇게 제자리에서 뛰어봐. 열이 나게.” 그리고 시범을 보이셨다. 이 모습을 말없이 보던 어머니가 다가와 당신의 버선을 벗어 내 발에 씌워 주시는 것이었다. 이처럼 아이는 같은 것 같으면서 조금은 다른, 부모의 사랑을 받으며 자란다. 아이에게 엄마는 모든 공포로부터 자신을 지켜주는 수호신과 같은 존재다. 엄마만 옆에 있으면 세상 어디를 가도 두려울 게 없던 아이도 어느 나이가 되면 엄마가 야단을 쳐도 들은 척도 않는다. 말을 안 들어도 그런 마이동풍이 없다. 그래서 미운 몇 살이 생겼겠지만, 아이들은 아무리 말해도 같은 실수를 계속한다. “위험하다”라고 소리쳐도 귓전으로 흘리니, 그때마다 엄마는 가슴이 철렁하다가 꼭 하는 말이 있다. “너 얼마나 다쳐야 정신 차릴래?” 아이들에게 그 말은 백 번 맞는다. 골백 번의 말보다 스스로 다쳐보면 바로 깨치기 때문이다. 몸으로 겪는 것만큼 효과가 확실한 것은 없다. 그래서 아동심리학자들은 큰 위험이 아니면 아이를 보호하려고 과잉 방어를 하지 말라고 이른다. 독일에서는 어린이 놀이터를 만들 때 안전만을 고집하지 않고 감당할 정도의 위험 요소를 고려한다고 한다. 떨어질 위험이 있는 놀이기구에 안전망 같은 장치를 느슨하게 해 두거나, 나무로 된 놀이기구도 매끄럽고 보기 좋게 하는데 치중하지 않는단다. 가끔은 가시에 찔려야 가시를 조심하게 되고, 한 번쯤 떨어져 봐야 본능적으로 안 떨어지는 법을 터득하기 때문이다. 어릴 때에 다쳐본 사람이 어른이 돼서 더 큰 위험을 피하게 된다고 한다. 흥미로운 건 아이를 보호한다고 어른이 함께 있으면 되레 더 다칠 수 있다는 연구 보고도 있단다. 누군가 나를 보호하고 있다는 의식이 잠재되면 방심하는 심리가 생긴다는 것이다. 이 심리는 성인들의 사회생활에서도 통용되고 있다. 우리네 삶도 마찬가지다. 상처 없이 배움이란 없다. 열 권의 책 보다 한 번의 경험이 최고의 산교육이다. 그러니 아이가 말을 듣지 않는다고 상심까지 할 건 없는 것이, 우리들도 그렇게 자랐듯이 아이들도 아픔을 통해 깨달을 테니까. 음악가 정경화 씨가 같은 이야기를 했다. 손가락 부상으로 쉬면서 배운 것이 “인생은 원래 헤맨다”라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헤맬 때는 그냥 헤매도록 했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했다고 후회를 했다. 곰곰이 생각해 보니 후회가 되는 일은 모조리 망설이다가 하지 않은 것들임을 알게 되었다. 실수할까 봐 주저했던 것들 말이다. 그녀에게 헤맨다는 건 무언가를 찾아 헤매는 거였지만 그러다 길을 잘못 들어 정신없이 헤맬 때도 있었다. 특히 악기를 다루면서 그랬단다. 내 머리가 원하는 것과 내 몸이 따라가는 속도가 너무 다르기 때문에 스스로 지나치게 저자세로 살지는 않았는가 이따금 회의가 들더라고 했다. 그러다 손을 다쳐 못 움직이면서 이런 답을 얻었다. “완벽하게 하려고 망설이며 안 하는 것보다 헤매더라도 계속하는 게 낫다”라는 결론에 이른 것이다. 모든 상처에 통했던 ‘빨강약’처럼 최고의 스승은 경험이다. 굶어봐야 목구멍이 포도청이고 목이 타 봐야 물이 생명수임을 아는 것처럼. 죽음이 눈앞에 어른대고 나서야 비로소 내가 이 세상에 객이 아니고 주인이었다는 사실을 깨친다. 주인처럼 살지 못하고 세상에 얹혀살았으니 말이다. 그래서 ‘죽을 때라야 철이 든다’는 말이 생겨난 걸까? 사람 사는 게 이처럼 어둑하고 엉성한 구석이 많다. 그럼에도 위안이 되는 건 오류 없는 깨달음은 없다는 것이다. 인간이란 본성이 헤매는 존재이니까. -소설가/ daumcafe 이관순의 손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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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6-22
  • 천하의 근본은 무엇일까?
    불과 백 년 전만 해도 ‘농자천하지대본(農者天下之大本)’ 은 이 나라의 근본이었습니다. 농사철이 돼 들판에 나가면 커다란 천에 이 글을 쓰고 지네발을 달은 깃발이 나부끼는 모습은, 익숙한 풍경이었지요. 예로부터 천하의 사람들은 농업을 살아가는 큰 본으로 삼아 이를 귀히 여기고 장려했습니다. 이 불변의 진리를 신봉했던 사람들이 요즘 환생한다면 어떤 말을 할 수 있을까? 이러한 생각을 한 것은 을지로를 지나다가 한 빌딩 앞 직사각형의 돌에 새겨진 문구 하나를 보면서입니다. 을지로입구역 부근의 중소기업은행 빌딩 앞에 세워진 돌비석이 그것입니다. ‘기업인천하지대본’( 企業人天下之大本) 농업을 우대하고 상인을 천시하던 조선시대 사농공상(士農工商)의 신분 서열을 완전히 뒤집어놓은 문구입니다. 장사꾼의 높인 말인 상인도 아니고 ‘기업인’으로 쓰인 점도 이채롭습니다. 국호가 대한민국으로 바뀐 지 불과 한 세대 만에 일어난 가치 전도인 셈이죠. 이제 우린 기업이 주도하고 세계가 주목하는, 기업 천하 대본이 된 세상에서 숨 쉬고 있습니다. 기업인·기업가로 불리는 명칭에는 장사꾼, 상인과 다른 품격을 지니고 있습니다. 사익에 집착하는 이가 상인이라면, 기업가는 사익과 함께 공익을 생각하는 사람이어야 하기 때문이죠. 말은 고상해도 사익과 공익은 쉽게 충돌할 수 있는 구조라, 양면을 만족시키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겉만 번지르하게 기업가로 행세하고, 내면은 사익을 좇는 이가 많아 지탄을 받기도 해요. 우리의 짧은 산업사에도 내게 이익이 되고 남에게도 이로움을 주는 가치를 추구한 기업가가 적지 않습니다. 이들은 짧은 생애를 살고도 참 기업인의 흔적을 남기고 영향을 끼쳤습니다. 이병철, 이건희, 정주영, 김우중 같은 글로벌 기업가 말고도 유한양행 설립자 유일한 박사, 교보생명 창업자 신용호 회장도 그런 분입니다. 광화문 중심에 위치한 교보문고에 들리면, 교보 창업주 고 신용호 회장을 떠올릴 때가 종종 있습니다. “이 금싸라기 땅에 웬 책방? 돈벌이도 시원찮을 텐데!“ 고개가 갸우뚱 해져요. 그 이유는 딱 하나입니다. 누구나 쉽게 찾을 수 있는 곳에 책방을 열어서 누구나 편하게 책을 보고, 사람을 만나고, 쉼을 갖고, 생각을 키울 수 있도록 배려한 것입니다. 교보문고의 쾌적한 시설은 세계 어느 책방에 비교해도 꿀리지 않는 자랑스러운 공간입니다. 서울 한복판에 이처럼 훌륭한 책방이 있어서 서울이란 도시의 품격을 높인다는 평가를 받습니다. 광화문의 또 하나의 명물인 ‘교보 글판’도 예사로운 일이 아니죠 기업 홍보에 쓰면 딱 좋을 공간에, 지친 사람의 마음에 온기를 불어 넣고 따뜻한 위로와 격려를 건네는 글판을 운영한 것입니다. ‘사람은 책을 만들고, 책은 사람을 만든다.’ 교보문고에 가면 신용호의 유명한 어록을 볼 수 있어요. 가방끈이 짧아 늘 책에 대한 갈증을 풀고자 애썼던 그는 자신의 원과 한을 이타의 마음으로 실현했습니다. 결과물이 교보문고인 셈이죠. 그는 초등학교 입학 무렵, 어려운 가정 형편에 폐병이 걸려 졸업도 못했어요. 그래서 자신의 약점을 극복하려고 ‘3년 1000일 독서’라는 계획을 세워 지식과 사유의 세계를 열어갔습니다. 장애를 극복한 헬렌 켈러에 감동하고, 카네기 자서전을 읽으면서 사업을 생각했고, ‘죄와 벌’ 같은 세계명작을 읽고 문학도의 꿈을 키웠다고 합니다. 보험, 교육, 도서, 문화사업으로 이어지는 삶의 궤적은 이러한 꿈에서 태동되었습니다. 그는 환갑이 된 나이에 심중에 품어온 꿈을 이룹니다. 1981년 서울 광화문에 교보빌딩을 완공하면서 가장 편리하게 출입할 수 있는 공간에 교보문고를 들였지요. 광화문 글판도 그의 아이디어 산물입니다. 신용호 회장이 이 땅을 떠난 지 18년. 오늘도 교보문고에서는 이 땅의 많은 젊은이들의 꿈이 익어가고, 서울 시민의 문화 갈증과 지적 욕구를 풀어줍니다. 참 기업인은 이런 사람이 아닐까? -소설가/ daumcafe 이관순의 손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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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6-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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