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5-09(목)
 

나는 말이 많은 편일까? 적은 편일까? 과하면 모자람만 못하다는 경구가 적용되는 곳이 말이다. 수많은 처세술, 인생수험서가 공통으로 지적하는 것이 말을 앞세우지 말고, 품위 있는 말을 하고, 말수를 주리고, 절제하라는 것이다. 언어훈련센터를 운영하는 지인 말에 따르면 사회에서 가장 환영받는 사람으로 남의 말을 잘 들어주는 사람을 꼽았다. 눈을 맞추고 상대 말에 고개를 끄덕이면서 그랬구나.’ ‘상처 됐겠다.’ ‘그래서, 어쨌는데?’ 내 말에 공감하면서 관심을 표하는 사람만큼 마음을 끄는 사람이 또 있을까 싶다.

 

말을 잘하는 것보다 잘 말하는 것이 중요하고, ‘상대가 원하는 것을 말하기보다 상대가 싫어하는 말을 안 하는 것이 상수라고 한다. 백 번 좋은 말을 하고도 한마디 말실수로 그간 따놓은 점수를 홀랑 날리기 십상이다. 둑이 터진 제방에 물을 담을 수 없듯이, 쏟으면 돌이킬 수 없는 게 말실수다. 사과를 하고 또 사과를 해도 상대의 마음에 가라앉은 앙금까지 거두기는 힘들다. 오죽하면 말한 입은 3일 가고, 듣는 귀는 천 년 간다라고 했을까. 나는 말하고 까마득하게 잊고 있는데 들은 사람은 천 년을 기억한다니 섬뜩하다.

 

시카고 공항에서 경험한 일이다. 터미널을 나와 차를 기다리는데 함께 출장 간 친구가 담배를 태우고 있었다. 바작바작 담배는 타드는데 버릴 데가 마당치 않다. 모자를 쓴 거구의 흑인이 빤히 지켜보고 있는 상황에서 적당히 버릴 수도 없었다. 게다가 우리를 바라보며 헤죽헤죽 웃기까지 하는 것이다. 열이 난 친구의 입에서 볼멘소리가 터져 나왔다.

 

저 연탄! 왜 꺼지지 않고 실실 웃는 거야!” 그런데 어쩌나, 흑인이 더듬더듬 말을 하는데 우리말을 하는 것이다. “나 연탄 아녀요 사람여요. 빠리빠리 버려요. 나 청소해야 해요.” 그날 이 친구는 연탄이란 말 때문에 세 번씩 아임 쏘리를 외쳐야 했다.

 

1976년 리메이크 영화 킹콩오디션 현장에 한 젊은 여배우가 오디션을 보러 왔다. 경력은 연극 무대뿐, 영화 출연은 전무한 여자였다. 한눈에 봐도 각진 광대뼈에 매부리코, 얼굴 조합이 미인과는 거리가 멀어 보였다. 성격이 불 같은 영화 제작자가 이탈리아어로 불평을 했다. “저런 얼굴 가지고 여긴 왜 온 거야. 누가 저런 여잘 불렀어?” 명문대학 출신인 이 미국 여배우는 공교롭게도 이탈리아어에 밝았다.

 

기대만큼 예쁘지 않아 죄송한데요. 그래서 어쩐답니까? 보다시피 이게 전부인데.” 그녀는 이탈리아어로 또박또박 내 갈긴 후 문을 쾅 닫고 나가버렸다. 훗날 크레이머&크레이머’ ‘철의 여인으로 아카데미 여우조연?주연상을 받고 메디슨 카운티 다리에서 매력을 발산한 메릴 스트립이다. 그녀는 오스카상 후보 최다 선정기록까지 지녔다. 제작자가 사과는 했겠지만 두고두고 후회되지 않았을까?

 

말을 생각대로 쏟아내면 실수할 확률이 커지는 법이다. 이런 경우도 있었다. 부장 승진을 앞둔 대기업의 김 차장 얘기이다. 회사엔 인품이 훌륭하기로 소문난 창업주가 계신데, 은퇴 후도 소일 삼아 출근을 하고 있었다. 그러다 보면 사적인 일을 직원에게 부탁하는 경우가 종종 생겼다. 그날도 노() 회장이 자신의 비서였던 홍보실 김 차장에게 전화를 했다.

 

김 차장 나 좀 도와줘야겠네.”

당시 김 차장은 골치 아픈 일로 신경이 곤두서 있을 때였다. 짜증이 난 그가 수화기를 내려놓으며 무심코 한 말이 , 돌겠네. 할아버지까지 오늘 왜 이러시나!” 그 소리가 노 회장께 그대로 전달되었다. 한쪽은 끊은 줄 알고, 한쪽은 수화기를 들고 있었으니까.

 

이후 상황은 어떻게 전개될까. 일단은 찍혔을 것이다. 승진도 물 건너갔을 것이다. 그런데 노 회장님 인품이 대단한 게 이를 알고도 모른 척해주었다. 게다가 부장 승진에 아무런 영향을 주지도 않았다. 승진 후, 인사차 들렸더니 노 회장이 악수를 하며 일렀다. “김 부장, 전화는 상대방이 끊었는지 확인하고 말을 해야지.” 하며 웃더란다. 말귀를 알아듣지 못한 김 부장의 마음이 편할 리 없었다. 하루종일 노 회장의 말이 뇌리를 맴돌았다. 사정의 전말을 알게 된 것은 며칠 뒤 비서를 통해서였다.

 

삶의 지혜는 종종 듣는 데서 비롯되고, 후회는 대개 말함에서 시작된다. 말 잘하려고 애쓰지 말고 적절할 때 거두는 것이 말의 품격을 높인다. 말 잘하는 사람보다 말실수가 없는 사람을 잘 관찰해 보는 것도 말을 훈련하는 좋은 방법이다. 말의 고수는 말을 잘하는 사람이 아니라, 말을 절제하며 남의 말을 경청하는 사람. 말하기 고수는 그런 사람이다.

 

개에게 물리면 통원 치료로 끝나지만, 사람 말에 물린 사람은 지금도 입원 중이라는 말이 있다.

-소설가/daumcafe 이관순의 손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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