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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아빠가 미안하다, 널 몰랐구나
    며칠 전 전국 청소년 글짓기 심사를 끝내면서 갖는 유감입니다. 유한양행을 설립한 유일한 박사의 정신을 받들어 유한재단이 해마다 5월이 되면 전국 초?중?고생을 대상으로 백일장을 개최합니다. 올해로 28년째니 연륜이나 규모면에서 전국 규모로 열리는 대표적 청소년 백일장입니다. 올해는 천여 명의 청소년이 아카시아 향이 흩날리는 유한공고 교정에 모여 초?중?고별 글제에 따라 글 향기를 뽐냈습니다. 씁쓸한 것은 ‘내가 아버지라면’ 이란 글제를 놓고 중학생들이 보여준 아버지에 대한 의식 때문입니다. 글제를 택할 때 10대의 자녀들이 평소 아버지란 존재에 대해 어떤 생각을 할까? 글을 통해 아버지 상(像)을 유추해보자는 의도가 있었지요. 글제를 내면서 ‘혹시나’ 했는데, 적지 않은 학생에게서 아버지의 이미지가 긍정적이지 못함을 확인하고 말았습니다. 학생들은 아버지가 칭찬에 인색하다는데 불만이 컸습니다. “잘했네” “알았다” “수고했어.” 등과 같은 정감 없는 아버지의 말투에 아이들도 묻는 말에나 답하는 단답식 대화가 늘어남을 알 수 있었지요. 아버지의 칭찬이 있을 때도 그 뒤에 따라올 말에 신경을 쓴답니다. 때 아닌 칭찬이 의심스럽다는 눈초리죠. “그래 그건 잘했어. 그런데 넌...” 한숨까지 섞인 조언을 듣노라면 작은 희망조차 웅크려진다고 합니다. 아이들은 순수한 칭찬에 목말라합니다. 아버지의 특징으로 감정표현이 없다고 합니다. 무뚝뚝한 아버지, 어려운 아버지라고 쓴 학생이 많았습니다. 그러면서 아이들은 원합니다. 내 이름을 자주 불러주는 아빠, 사랑한다고 말해주는 아빠를 기다립니다. “이리와 봐” 식의 부름보다 격려의 부름이, 사랑의 부름이었으면 한답니다. “넌 왜 엄마를 통해서 말하지?” 아버지의 불만도 이해는 되지만 사실 자초한 면이 없지 않습니다. 평소 대화가 부족했다는 방증이지요. 아이들은 철부지가 아니었습니다. 속에 담아놓고 말을 안 할뿐, 아버지가 가족을 위해 희생한다는 걸 알고 있습니다. 아는데도 다가서기가 쉽지 않은 분일뿐이지요. 역지사지(易地思之)로 사고의 전환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자녀의 입장에서 생각해보는 그런 자세가 필요하다고 느꼈기 때문입니다. 어버이날, 친구들과 나눈 에피소드입니다. 어버이 날이라고 아들이 전화를 했을 때, 예전에 우리는 첫마디를 이렇게 말했지요. “그래 나다. 기다려 엄마 바꿔줄게” 아들이 그게 아니고요 하면 “벌써 돈 떨어졌냐?” 그래도 아들이 용기를 내 ‘아버지 사랑합니다’라고 말할 때의 대답은 더 걸작입니다. “미친 놈, 뚱 단지 같긴!” 옛날 자신들의 모습을 떠올리며 파안대소했습니다. 자식의 마음을 알면서도 멋대가리 없는 말을 했다고. 따지고 보면 그렇게 큰 아들이 지금의 아빠들입니다. 대를 이어 배워온 언어의 관습이 그렇다면, 누구를 탓할 입장도 아니지요. 대화도 훈련이 되지 않으면, 끊기고 단절되기 싶습니다. 대화의 부족이나 불만은 그것으로 끝나지 않고 정서적 불만으로 이어집니다. 갈수록 멀어지는 아버지, 외톨이가 되는 아버지는 어쩌면 현대사회가 만든 자화상일지 모릅니다. 피곤에 절어 밤늦게 퇴근하고 새벽처럼 나가는 아버지... 가뜩이나 어려워진 자영업자 아버지... 그 침통함이 무의식중에 그렇게 비춰진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버지의 노고에 감사하면서도 강한 이미지 때문에 접근하기가 쉽지 않은 이유입니다. 아이들은 크면서 아버지가 힘없는 존재라는 것을 압니다. 엄마가 자녀들과 대화를 독점하고 있을 때 혼자서 담배를 피우는 모습이 쓸쓸해 보였다고 합니다. “나 요즘 힘들다”고 엄마에게 말할 때는 아버지 어깨를 누르는 책임감도 느껴졌답니다. 좋은 세상이 된 줄 알았는데 예나 지금이나 아버지란 존재가 외롭기는 마찬가지인 듯합니다. 사람은 태어난 후 ‘아빠, 엄마‘ 로 부르며 성장기를 보내다가 때가 되면 ’아버지 어머니‘로 바꿔 부르기 시작합니다. 멀리 이스라엘에서도 같은 호칭을 사용한다고 해 놀랐습니다. 기독교100주년기념교회를 담임하다 정년퇴임하고 거창으로 내려간 친구 이재철 목사가 전하는 말입니다. 이스라엘을 갔을 때, 누가 아빠하고 뒤에서 부르더랍니다. 깜짝 놀라 돌아보니 이스라엘 아이가 자기의 아빠를 부르는 것이었습니다. 같은 뜻의 어휘지만 ’아빠‘와 ’아버지‘는 의미가 사뭇 다릅니다. 아빠는 아버지를 뜻하는 아람어고, 아버지는 역어인 헬라어입니다. 아빠로 불리는 아버지는 자식에게 무한책임을 지지만, 아버지로 부르는 아들은 부모를 섬기는 모습을 뜻합니다. 그런 역할과 기능이 어휘에 담긴 거지요. 지금은 자녀들에 대해 무한책임을 지는 아빠의 자리에 있습니다. 모든 헌신으로 아이들을 키우지만, 어느 날이 되면 아버지의 자리로 옮겨 앉아야 합니다. 그 과정이 아름다우려면 아버지가 자녀들과의 대화에 새로운 눈을 떴으면 합니다. “아빠가 미안하다. 네 맘을 헤아리지 못해서”라는 생각으로. 소설가 이관순의 손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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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5-07
  • 음악은 천상의 소리
    밤바람이 선득한 주말. 저녁을 먹고 장자호수공원으로 산책을 나섰습니다. 사람들이 오가는 사이로 청아한 색소폰 연주음이 들려옵니다. 발길이 절로 이끌려 간 곳엔 한 분이 ‘셀프 콘서트’를 열고 있네요. 잔디밭에 앉아 연주가 끝날 때마다 박수를 칩니다. 연주력이 준수한데다 가을밤의 정취까지 더해져 색소폰 선율에 젖는 아름다운 가을밤을 즐겼지요. 음악은 사랑을 전하는 신의 소리라고 합니다. 모든 사람을 하나로 묶어 주지요. 음악은 연주자의 기쁨도 되지만 만인의 즐거움도 됩니다. 연주가의 재능을 부럽게 바라본 영화가 있습니다. ‘어거스트 러쉬.’ ‘음악은 사랑을 낳고 사랑은 운명을 부른다.‘는 말이 잘 어울린 영화지요. 밴드 싱어이자 기타리스트인 루이스와 촉망 받는 첼리스트 라일라의 보석보다 반짝였던 단 하루 밤 이후, 남자는 그녀를 한 번도 잊은 적 없고, 여자는 얼굴도 모르는 낳은 아이에 대한 그리움을 놓은 적이 없지요. 이들의 믿음 하나는 “음악이 있는 한 우리는 다시 만날 거야”라는 것. 부모의 DNA를 받은 아이는 일찍부터 놀라운 음악적 재능을 보입니다. 시설에서 자란 11세의 소년은 부모만이 자신의 음악을 알아볼 수 있다는 믿음 하나로 뉴욕을 찾아갑니다. 모든 게 신비한 뉴욕. 도시가 만드는 수많은 소리들이 소년의 청각에 음계로 포착됩니다. 소년은 아이들을 모아 거리에서 노래를 시키는 워저드를 만나 어거스트란 이름으로 거리 연주자로 등장해 천부적인 실력을 보입니다. 하루는 소리에 끌려 교회 합창단 연습장에 들렸다가 처음 보는 오선지와 오르간 앞에서 작곡하고 연주하는 놀라운 재능을 발휘합니다. 이를 지켜본 목사님이 줄리어드에 음악천재로 추천합니다. 줄리어드에서 사모곡 라프소디를 작곡해 주위를 놀라게 한 어거스트. 마침내 뉴욕필하모니 콘서트에 특별 출연자로 초청됩니다. 줄리어드 출신의 유명 첼리스트(엄마)와 함께. 하지만, 연주회를 앞두고 위기가 오죠. 워저드가 연습장에 나타나 아버지라며 친권을 주장하고 데려갑니다. 학교는 간곡히 연주회만큼은 보내달라고 부탁을 하지만 거절당하죠. 금관악기가 아이의 영혼을 뽑는다는 그릇된 인식으로... 다시 광장 연주에 나서는 어거스트. 부근을 지나던 루이스가 소리에 홀려 찾아오고, 금세 호흡을 맞추더니 황홀한 기타 2중주를 펼칩니다. 어거스트가 오늘 밤 있을 센트럴파크 공연을 알려주지만, 루이스는 귀에 담지 않고 “용기를 잃지 말라”는 말만 주고 떠납니다. 그날 밤, 어거스트는 친구의 도움으로 탈주에 성공해 연주장으로 달려가고, 지방공연에 나서던 루이스는 뉴욕 중심가에서 아이 얼굴이 나온 배너광고를 보지요. 전율을 느낀 그도 차를 버리고 연주회장으로 내달립니다. 환호 속에 첼로 연주를 끝낸 라일라가 아이를 생각하며 공원을 빠져나올 때, 줄리어드 총장이 특별초청 지휘자를 소개합니다. 무대에 등장하는 어거스트. 환호하는 청중... 놀라운 자작곡이 그의 지휘 속에 연주를 시작합니다. 밖을 향하던 라일라가 연주음에 끌려 뒤돌아서고, 또 반대편에서는 황홀한 눈빛의 루이스가 나타납니다. 마침내 무대 앞에 이르러 12년 만에 마주 서는 남과 여... 환희의 포옹을 할 때 지휘하는 아이의 모습이 비칩니다. 세상에는 수많은 소리들로 가득 차 있지요. 귀를 기울인 만큼 들리기도 하고 지나치기도 합니다. 끊임없이 들리는 세상의 소리를 옮겨 작곡하고 연주하는 음악천재가 말하죠. “아이들이 동화를 믿듯 저는 음악을 믿어요. 부모님이 살아계신다면 제 음악을 꼭 듣게 될 거야요.” 어거스트의 간절한 믿음처럼 나는 어떤 믿음을 확신하며 살고 있나요? 글 이관순(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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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4-29
  • 내 앉아있는 자리
    스산한 바람에 비까지 흩뿌리니 단풍은 지고 낙엽만 우수수 쌓입니다. 이렇듯 나무도 꽃도 지상의 모든 생명들이 사이즈를 줄이는 시기입니다. 그것이 한 주기의 마지막 겨울을 상대하는 지혜입니다. 사람이 나이가 든다는 것 또한 사이즈를 줄이는 것으로 시작됩니다. 몸집이 줄고, 먹는 게 줄듯 이것이 절제의 근본이며 이치입니다. 세상에 나올 때 작게 나왔으니 돌아갈 때도 비우고 작게 돌아가야 합니다. 여기에는 실상과 허상이 공존하지만 스스로 말수를 줄이고, 욕심도 미움도 줄이고, 자랑, 명예 같은 덧없는 것은 날려야 합니다. 그래야 사이즈가 줄지요. 루디 세네카는 “인간은 마치 시간이 모자란다고 불평하면서, 마치 시간이 무한정인 것처럼 행동한다.”고 사람의 어리석음을 비꼬았지요. 그런데 사람은 이를 알면서도 어제의 습관을 오늘도 고집하고 삽니다. 친구가 많다고 자랑하시나요? 바쁜 것을 미덕으로 생각하셨나요? 그보다는 흉금을 터놓고 말할 한 사람의 친구가 더 소중한 때입니다. 친구도, 만남도, 분주함도 지혜롭게 줄여가는 것이 노년의 삶을 가볍게 하고 실수를 줄이는 방법입니다. 우리 몸은 수분이 80% 이상이라고 하죠. 비슷한 비율로 우리 삶을 주장하고 있는 것이 말입니다. 그만큼 물과 말은 몸을 유지하고 삶을 구성하는 중요한 요소입니다. 그래서 절제를 말할 때 가장 먼저 꼽는 게 말입니다. 내가 살면서 토해낸 말을 양으로 계측한다면 얼마나 될까. 그중 꼭 필요했던 말은 얼마쯤 일까. 이제는 할 말 못할 말, 안 해도 좋을 말, 상처 주는 말을 가려가며 했으면 합니다. 내뱉은 말은 흘러간 세월처럼 돌릴 수 없으니... 그래서 이랬으면 좋겠습니다. “이제는 많이 들어주자. 듣는 귀는 8로 열고 말하는 입은 2로 줄이자. 남이 말할 때 자르지 말자. 중간에 끼어들지 말자. 말 줄기를 돌리지 말자.” 비위 상한다고 파르르, 욱, 버럭 하는 감정도 이젠 삭혀 없애야 합니다. 행여 그런 상황이 되면 심호흡 한 번으로 날려버리세요. 대신 많이 웃어주면 좋겠습니다. 상대가 가족, 친구, 이웃, 누구든 만나면 웃는 것으로 말문을 열어요. 나이가 들면 웃는 근육도 굳는다는데, 얼굴에 웃음기마저 빠지면 노인 특유의 표정 없는 일그러진 인상만 남아요. 나이가 든다는 것은 옻칠을 더하는 것처럼 윤을 내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미움이나 시기, 질투는 다 헛된 뜬구름이지요. 뜬구름을 좇다가 낯선 곳에 서 있는 나를 발견하는 건 아픈 일입니다. 살고 있는 이날, 앉아 있는 이 자리가 내가 족해야 할 자리임을 아는 사람은 행복합니다. 이 나이에 맘대로 못할 게 뭐야. 하지만 나이가 들수록 남을 배려하며 사는 인생이 아름답습니다. 살아보니 ‘역지사지(易地思之)’ 이상의 스승은 없더군요. 사서삼경이 대단한 게 아니라, 상대편 입장을 늘 먼저 헤아리면 그것이 상선의 절제입니다. “오죽했으면... 그래 저럴 수 있겠다... 나도 그 입장이면... 저도 사람인데.” 글 이관순(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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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4-22
  • 너도 죽는다‘메멘토 모리’
    말에는 묘한 힘이 있어 곱씹을수록 향기를 내는 말이 있고, 겸손함을 가르치는 말도 있지요. 라틴어는 그런 철학적 의미를 함의한 말과 글이 꽤 많습니다. 언젠가의 기억입니다. KBS TV '도전 골든벨‘에서 최후 1인이 된 학생에게 50번 마지막 골든벨 문제가 주어집니다. “고대 로마에서 승리를 쟁취한 장군이 개선행진을 할 때 주위에서 외쳤던 라틴어는?“ “메멘토 모리" 영예의 골든벨이 울리는 짜릿한 순간을 지켜보았지요. 다소 생소한 라틴어 '메멘토 모리(memento mori)'는 '죽음을 기억하라‘는 뜻입니다. 유래는 로마 공화정의 개선식으로 거슬러 올라가요. 개선식은 전쟁에서 승리한 장군에게 주어지는 영예입니다. 개선장군은 관습에 따라 전차를 타고 퍼레이드를 벌입니다. 영웅이 탄 마차가 시민의 환호 속을 헤치고 행진하는 동안 뒤에서 노예들이 큰소리로 외쳐댑니다. 메멘토 모리! 메멘토 모리! “오늘은 개선장군이지만 너도 언젠가는 죽는다. 겸손하게 행동하라.” 승리에 도취된 장군에게 본분을 잊지 않도록 경각심을 주는 장치인 셈이죠. 로마 최고의 환대 속에서도 너는 신이 아닌, 한 인간일 뿐임을 알린 것입니다. 메멘토 모리에는 세 가지 철학적 가치가 내재되어 있습니다. ‘죽음을 기억하라. 운명을 사랑하라. 현재에 충실하라.’ 이 셋은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도 적용되는 훌륭한 교훈입니다. 스티브 잡스도 스탠퍼드대 졸업식 축하 연설에서 이를 강조했습니다. 췌장암 투병으로 힘든 시기를 보내던 그는 ‘죽음은 삶이 만든 최고의 발명품‘이라고 격찬합니다. 그러므로 제한된 인간의 시간을 다른 누군가의 인생을 살 듯 낭비하지 말고 자신을 믿고 집중하라고 졸업하는 학생들에게 말합니다. 뜻이 통하는 라틴어에 ‘카르페 디엠(carpe diem)'이 있습니다. 몬래 이 말은 신을 공경하고 오만해지지 말라는, 현재를 가치 있게 살라는 뜻인데 이후 기독교 영향을 받아 현세의 부귀나 영화의 부질없음을 알립니다. 우리에게도 ‘화무십일홍’이란 말이 있죠. 열흘 가는 붉은 꽃이 없다는 이 말엔 ‘한 번 흥한 것은 반드시 쇠한다.’ 는 속뜻을 지닙니다. 트로트 가수 김연자가 불러 유명한 노래 ‘아모르 파티’도 같은 말입니다. 사랑을 뜻하는 아모르와 운명을 뜻하는 파티가 합성된 라틴어로 이 또한 ‘운명을 사랑하라’는 말이지요. 인간이 가져야 할 삶의 태도로 철학자 니체가 처음 사용했습니다. 메멘토 모리는 미국 남서부에 거주해온 나바호족에서도 찾을 수 있어요. 그들은 “네가 세상에 울면서 태어날 때 세상은 기뻐했으니, 네가 죽을 때 세상은 울어도 너는 기뻐할 수 있도록, 그러한 삶을 살아라.”는 의미심장한 철학을 닮고 있습니다. <메멘토 모리>, <카르페 디엠>, <아모르 파티>, <화무십일홍>까지 모두 겸손한 삶을 가르칩니다. 제한된 시간을 사는 인생에게 죽음을 기억하고, 운명을 사랑하고, 오늘에 충실하라.... 이보다 더 삶을 성찰하게 하는 말이 또 있을까 싶습니다. 글/ 이관순(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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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4-15
  • 의리가 사라진 세상
    짓궂은 질문을 해봅니다. ‘사람’과 ‘인간’은 같은 거야? 사전의 설명은 비슷 하지만, 아무래도 “저 인간!” 하면 부정적 이미지가 앞서죠. “저 사람 인품이 좋아”로는 써도 “저 인간 인품이 좋다”고 말하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세상에 사람 같지 않은 인간이 많다보니 용례까지 헷갈립니다. 초등학교 국어 교과서의 ‘의좋은 형제’를 생각하면 지금도 마음이 훈훈합니다. 우애 좋은 형제가 가을 수확을 마치고 들판에 볏단으로 노적가리를 만듭니다. 형이 보니 아우네 것이 적어 보입니다. 그날 밤, 어려운 아우 형편을 안 형이 자신의 볏단을 옮겨 놓고, 다음날 밤은 식솔 많은 형을 생각한 아우가 반대로 볏단을 옮기지요. 노적가리가 줄지 않자 형제 다 고개를 갸우뚱합니다. 마침내 볏단을 옮기던 형제가 달빛 아래 마주치면서 얘기는 끝나죠. 그때의 감동으로 습자시간이면 붓글씨를 ‘노적가리 풍년일세’만 썼던 기억이 납니다. 가난해도 마음은 풍년인 사람들이 살던 시절이 있었지요. 엊그제 복권 당첨금이 살인흉기가 된 사건이 났습니다. 우애 좋은 형제가 복권 당첨으로 수억 원의 당첨금을 받아 배분까지는 성공했는데, 그 돈으로 사업을 했던 형이 망하며 사단이 납니다. 돈을 더 요구하는 형과 보증을 선 동생 간에 감정이 충돌하다 동생을 살해하는 일이 벌어진 겁니다. 황금만큼 요괴스러운 것은 없습니다. 돈 앞에 장사가 없다지요. 일본 속담에 ‘담배꽁초와 돈은 쌓일수록 냄새가 난다’고 했습니다. 돈이 사람을 부패하게 만든다는 뜻이겠지요. 사는 것은 전보다 풍족해도 인성은 강퍅해졌습니다. 돈을 둘러싼 이기적 욕망이 칼끝처럼 첨예하게 부딪치는 세상입니다. 개신교의 큰 어른이셨던 목사님이 생전에 우리교회에 오셔서 당신이 붓으로 큼직하게 쓴 ‘의리를 지키자’란 글귀를 강단에 내리고 설교를 하신 적이 있습니다. 세상이 오죽하면 의리를 부탁했을까요. 사람과 사람,관계 사이에 의리가 사라졌다고 탄식하는 소리가 높아만 집니다. 제목을 잊은 영화입니다. 세 친구가 딱 한 번 은행을 털어 깨끗하게 살자며 치밀한 준비를 합니다. 그들의 거사는 성공했고 무사히 안전지대에 도착하자 돈다발을 놓고 환호합니다. 한 친구가 축배를 들자며 나갔다가 술에 독을 타서 옵니다. 욕심이 생긴 거죠. 태연하게 돌아온 친구가 술잔을 건네고 축배를 외칠 때, 팡팡! 술 사온 친구가 고꾸라지고 남은 둘은 낄낄댑니다. 뛰는 놈 위에 나는 놈이 있거든요. 둘은 더 큰소리로 건배를 외치지만 독배를 든 이들도 쓰러집니다. ‘사람에게 의리 빼면 시체’ 라고 말하던 세상이 있었지요. 의리란 뜻은 ‘사람관계에서 마땅히 지켜야 할 도리’로, 여기엔 사람이 갖춰야 할 덕목이 다 녹아져 있죠. 가난은 견뎌내기 어려운 것임을 경험한 세대가 모이면 그래도 그때가 좋았다고 반추합니다. 의리가 사라진 곳에 먹잇감을 놓고 으르렁 대는 동물세계가 어른댑니다. 사람 사이 흐르는 체온 대신 물질을 향한 충혈 된 눈빛만 섬뜩하니 사람은 없고 인간만 남아 보입니다. 다시 사전을 봅니다. ‘인간’이란 단어의 기본설명 뒤로 ‘사람의 모습은 하고 있되 사람답지 못하다는 뜻.’을 추가하고 예문도 달았군요. “저 인간이 한 짓을 생각하면 돌아버리겠어.” 너무도 흔히 듣는 슬픈 말이 됐습니다. 글 이관순(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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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4-08
  • 의리가 사라진 세상
    짓궂은 질문을 해봅니다. ‘사람’과 ‘인간’은 같은 거야? 사전의 설명은 비슷 하지만, 아무래도 “저 인간!” 하면 부정적 이미지가 앞서죠. “저 사람 인품이 좋아”로는 써도 “저 인간 인품이 좋다”고 말하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세상에 사람 같지 않은 인간이 많다보니 용례까지 헷갈립니다. 초등학교 국어 교과서의 ‘의좋은 형제’를 생각하면 지금도 마음이 훈훈합니다. 우애 좋은 형제가 가을 수확을 마치고 들판에 볏단으로 노적가리를 만듭니다. 형이 보니 아우네 것이 적어 보입니다. 그날 밤, 어려운 아우 형편을 안 형이 자신의 볏단을 옮겨 놓고, 다음날 밤은 식솔 많은 형을 생각한 아우가 반대로 볏단을 옮기지요. 노적가리가 줄지 않자 형제 다 고개를 갸우뚱합니다. 마침내 볏단을 옮기던 형제가 달빛 아래 마주치면서 얘기는 끝나죠. 그때의 감동으로 습자시간이면 붓글씨를 ‘노적가리 풍년일세’만 썼던 기억이 납니다. 가난해도 마음은 풍년인 사람들이 살던 시절이 있었지요. 엊그제 복권 당첨금이 살인흉기가 된 사건이 났습니다. 우애 좋은 형제가 복권 당첨으로 수억 원의 당첨금을 받아 배분까지는 성공했는데, 그 돈으로 사업을 했던 형이 망하며 사단이 납니다. 돈을 더 요구하는 형과 보증을 선 동생 간에 감정이 충돌하다 동생을 살해하는 일이 벌어진 겁니다. 황금만큼 요괴스러운 것은 없습니다. 돈 앞에 장사가 없다지요. 일본 속담에 ‘담배꽁초와 돈은 쌓일수록 냄새가 난다’고 했습니다. 돈이 사람을 부패하게 만든다는 뜻이겠지요. 사는 것은 전보다 풍족해도 인성은 강퍅해졌습니다. 돈을 둘러싼 이기적 욕망이 칼끝처럼 첨예하게 부딪치는 세상입니다. 개신교의 큰 어른이셨던 목사님이 생전에 우리교회에 오셔서 당신이 붓으로 큼직하게 쓴 ‘의리를 지키자’란 글귀를 강단에 내리고 설교를 하신 적이 있습니다. 세상이 오죽하면 의리를 부탁했을까요. 사람과 사람,관계 사이에 의리가 사라졌다고 탄식하는 소리가 높아만 집니다. 제목을 잊은 영화입니다. 세 친구가 딱 한 번 은행을 털어 깨끗하게 살자며 치밀한 준비를 합니다. 그들의 거사는 성공했고 무사히 안전지대에 도착하자 돈다발을 놓고 환호합니다. 한 친구가 축배를 들자며 나갔다가 술에 독을 타서 옵니다. 욕심이 생긴 거죠. 태연하게 돌아온 친구가 술잔을 건네고 축배를 외칠 때, 팡팡! 술 사온 친구가 고꾸라지고 남은 둘은 낄낄댑니다. 뛰는 놈 위에 나는 놈이 있거든요. 둘은 더 큰소리로 건배를 외치지만 독배를 든 이들도 쓰러집니다. ‘사람에게 의리 빼면 시체’ 라고 말하던 세상이 있었지요. 의리란 뜻은 ‘사람관계에서 마땅히 지켜야 할 도리’로, 여기엔 사람이 갖춰야 할 덕목이 다 녹아져 있죠. 가난은 견뎌내기 어려운 것임을 경험한 세대가 모이면 그래도 그때가 좋았다고 반추합니다. 의리가 사라진 곳에 먹잇감을 놓고 으르렁 대는 동물세계가 어른댑니다. 사람 사이 흐르는 체온 대신 물질을 향한 충혈 된 눈빛만 섬뜩하니 사람은 없고 인간만 남아 보입니다. 다시 사전을 봅니다. ‘인간’이란 단어의 기본설명 뒤로 ‘사람의 모습은 하고 있되 사람답지 못하다는 뜻.’을 추가하고 예문도 달았군요. “저 인간이 한 짓을 생각하면 돌아버리겠어.” 너무도 흔히 듣는 슬픈 말이 됐습니다. 글 이관순(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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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4-04
  • 슬픔이여 안녕!
    죄 없는 어린 생명이 희생될 때 더없이 고통스럽습니다. 남달리 알레르기 반응을 보이는 것은 일종의 트라우마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여덟 살에 충북 영동의 한 초등학교에 입학했습니다. 여름이 되면 아이들과 몰려서 마을 앞에 흐르는 강에 나갑니다. 겨울엔 썰매를 타고 여름엔 물놀이를 하는 곳. 경부선이 지나가는 철교 아래가 또래들의 여름 아지트지요. 흰줄 하나를 내린 검정 팬티를 입고 상급생들은 수영으로 강을 건너고, 하급생들은 교각 중턱에 걸터앉아 형들을 부럽게 바라보다가 텀벙 강물에 몸을 던집니다. 이날도 철교 아래에 한 떼의 아이들이 모였습니다. 비가 와서 물이 좀 불었지만 누구도 겁내지 않았지요. 그런데 물이 불면 수심에서 물돌이가 이는 걸 모른 게 비극입니다. 형들이 수영을 가르친다고 아이들을 밀어 넣는데 그만 1학년 쌍둥이 동생이 소용돌이에 말려든 겁니다. 아이가 물속에서 허우적이자 더럭 겁이 난 아이들이 달아나기 시작합니다. 나도 겁에 질려 뛰다가 뒤를 돌아봤는데, 발을 구르며 울부짖는 쌍둥이 형의 모습이 보였습니다. 죽은 아이는 내 짝꿍이었습니다. 마을이 발칵 뒤집어지고... 나도 밤마다 경기를 일으켰습니다. 땀을 흘리며 악몽에 시달렸지요. 물에 퉁퉁 부은 친구가 나를 원망했기 때문입니다. 넋이 나간 친구 엄마, 고래고래 소리질러 아들 이름을 부르는 아빠, 나를 원망스레 쳐다보는 쌍둥이 형... 나는 누구 앞에서도 고개를 들 수 없는 죄인이었습니다. 친구를 버리고 도망쳤다는 죄책과 슬픔이 어린 가슴을 쿵쿵 뛰게 했지요. 이로 인해 부모님 걱정도 덩달아 커졌습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아버지가 발령을 받아 새 임지로 이사하면서입니다. 가족이 아버지의 전근을 반색한 것도 나 때문이었죠. 아픈 기억은 상급학교로 진학할수록 많이 옅어졌습니다. 초등학교 동창들과 연락을 끊은 것도 도움이 됐습니다. 결혼 후로는 아예 잊다시피 지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어느날, 우연히도 길에서 쌍둥이 형을 만나면서 덜컥 상처가 뜯기고 말았습니다. 어머니는 우울증을 앓다가 목을 매셨고, 알코올 중독에 빠진 아버지도 암으로 돌아가셨답니다. 한 아이의 죽음이 이렇게 가족을 황폐화 시켰구나. 아물었던 내 상처에도 피가 나는 걸 느꼈습니다. 가족 중 유일한 생존자인 형의 얼굴에 깔린 그늘을 보았습니다. “가족 몫까지 잘 살아야지. 흔들릴 때마다 그렇게 위로해.” 예민한 성격 탓일까, 이후로 이따금 꿈을 꿉니다. 시골에서 놀던 추억들이, 떠난 어린 친구의 모습도 생생하게 포착됩니다. 더 힘들게 하는 건 잊을 만하면 날아드는 이런저런 또래 아이들 희생소식입니다. 줄어드는 인구도 걱정인데 죽었다하면 아이들이냐고 격분도 합니다. 지난 봄, 헝가리에서 유람선 전복으로 6세 소녀가 숨졌다는 비보가 그랬었죠. 외할머니 손을 꼭 잡은 아이의 인양된 모습은 더 애처로웠습니다. 그 아픔이 채 가시기도 전에 또, 엄마가 일곱 살 어린 아이를 데리고 동반자살을 했다는 비보가 들렸습니다. 죽음이 낯설기만 어린 나이에 얼마나 섬뜩했을까, 얼마나 설득했을까, 아니 강요했을까. 그래야 했던 엄마의 심정은? 푸른 6월에는 전 세계인을 슬픔에 잠기게 한 사고가 또 발생했습니다. 멕시코 국경에서 리오그란데 강을 건너 미국으로 밀입국하려던 25세 아빠와 두 살짜리 딸이 익사한 것입니다. 아빠가 아이를 셔츠 안에 넣고 아이는 아빠의 목을 끌어안은 채 떠내려 온 사진을 봤습니다. 물살을 이겨내려 했던 아빠의 다리는 물위에 떠 있고, 아이의 바지는 물먹은 기저귀로 불룩했습니다. 강 건너서 울부짖는 엄마의 얼굴이 오버랩됩니다. 멕시코 영화 ‘신 놈브레’는 중남미사람들이 ‘죽음의 열차’를 올라타고 미국으로 밀입국하려는 과정을 그린 영화입니다. 열차 지붕에 올라타다 떨어져 죽고 힘겹게 탄 뒤는 살해나 강간을 당하기도 합니다. 서글픈 것은 점쟁이가 찾아온 주인공에게 일러주는 말이죠. “넌 미국에 도착할거야. 그런데 안내는 신이 아닌 악마가 하지.”라고. 그 악마는 죽음의 열차를 올라 탄 아빠와 딸을 강물 속에 빠뜨린 것입니다. 스스로를 위로합니다. 어쩌면 아이들이 찾아간 저세상이 험난한 이 세상을 사느니 보다 낫지 않겠냐고. "여긴 낙원이 아냐. 슬퍼하지 말고 편히 쉬어라..." 오래전 읽은 프랑수아 사강이 쓴 ‘슬픔이여 안녕’ 이란 소설 제목이 떠오르는 것은 우연일까요? *글/이관순(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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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4-01

실시간 기고 기사

  • 사랑은 언제까지 유효할까
    산행 멤버 중에 두 사람의 영구 결번이 생겼다. 한 사람은 죽지 못할 만큼 사랑해서 집안 어른들의 반대에도 결혼을 강행하고 잘 산다 싶었는데, 10년 전 이혼하고 미국으로 떠난 여성이다. 결혼도 성격대로 급행으로 몰아치더니 헤어질 때도 한순간 쿨하게 돌아섰다. 그리고 1년 있다가 현지에서 미국인과 재혼했다는 소리가 들렸다. 또 한 사람은 평생을 한 여자를 가슴에 담고 비혼으로 산 남성이다. 중학교 선생이었던 남자는 학부모인 여자를 만나면서 그리움의 일기를 쓰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루어질 수 없는 나 하나의 사랑인 것이, 난생처음 한눈에 반한 여자가 유부녀이기 때문이다. 남자는 여자가 가난한 집안을 살리려고 열두 살 연상의 돈 많은 남자와 결혼한 것임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더 애틋한 일기를 썼다. 이를 눈치챈 친구들이 비극을 자초하지 말라고 많은 권면을 했지만 사랑이 질서 정연한 이론으로 성립되는 건 아니지 않은가. 남자는 마음에 품은 한 여자의 안부를 평생 먼발치에서 들으며 살았다. 같은 신도시에 사는 까닭에 운이 좋으면 스치기도 하고 짧은 인사를 나누는 정도였다. 학부모들과 만나는 자리에서 딱 한 번 마주 앉아 대화를 나눈 적이 있을 뿐이다. 남자는 입을 열려고 애쓰지 않았다. 가정이 있는 사람에게 할 말이 아니라는 생각에서다. 사랑은 가슴으로나 품을 일이라 자위하면서 그날의 일기를 썼다. 그렇게 5년쯤 지났을 때 여자의 남편이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들었다. 병원 장례식장에서 그녀를 만났다. 조문을 마치고 접견실에 잠시 앉아 그녀가 타다 준 커피를 마신 후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두어 달이 지난 뒤 우연하게 길에서 두 사람이 마주쳤다. 마침 큰일을 치른 뒤라 자연스럽게 길 옆의 스타벅스에 들어가 인사를 나누었다. 장례는 잘 치렀느냐고? 문상을 해주셔서 고맙다고…. 그렇게 일상의 얘기들을 주고받다가 여자가 시계를 보았다. 오늘 병원 예약이 있다고 했다. 두 사람은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왔다. 푸른 6월의 햇살이 눈에 부셨다. “날이 참 좋네요.” “그러게요.” “잘 다녀오시고 밝게 사셨으면 좋겠습니다.” 남자의 인사에 여자는 웃으면서 목례를 하고 헤어졌다. 그러고 또 얼마를 지났을까. 가을비가 추적되는 버스정거장에서 버스에서 내리는 그녀와 만났다. 전 같지 않게 얼굴이 창백해 보였다. 날도 차가운데 따뜻한 커피나 들고 가시라고 여자의 소매를 끌었다. 잠시 망설이던 여자가 따라나섰다. 남자는 그날 스타벅스에서 여자로부터 암투병 중인 새로운 사실을 전해 들었다. 수술을 받기 위해 곧 입원해야 한다는 말도 듣게 된다. 그리고 보름이 지났을 무렵, 수술 후 회복 중인 그녀를 병실로 찾았다. 고통이 심했는지 짧은 시간이 지났는데도 많이 수척해 보였다. 간호사의 말로는 수술은 잘 됐지만 말기암이라 예후를 잘 살펴봐야 한다고 했다. 사흘돌이로 남자는 여자를 찾았다. 쓸쓸하게도 그녀에겐 병상을 지켜 줄 만한 가족이 없어서였다. 가족이라고는 유일하게 직장에 나가는 여동생 하나뿐이었다. 죽은 남편이 형제가 없는 데다 하나뿐인 아들마저 신부가 되어 아프리카 오지에 나가 있었다. 귀국할 수 없는 형편임을 알고 아예 연락조차 하지 않았단다. 남자는 지극 정성을 다해 여자를 돌보았다. 그럼에도 회복이 안 되는 것이 너무 안타까웠고 여자는 남자의 곡진한 정성에 한없는 고마움을 느꼈다. 그러면서 태어나 처음으로 이성을 느끼기 시작했다. 그러던 어느 날 여자는 남자의 품에 안겨 마지막 숨을 가누고 있었다. 남자가 더 이상 미룰 수가 없다는 생각에 가슴속 깊이 묻어둔 말을 꺼냈다. “내 마음을 아시겠어요?” “예... 알아요. 고마워요.” 두 사람은 평생 하지 못한 말을 나누었다. 말은 짧았어도 천금을 나누는 시간이었다. 그리고 며칠 후 여자는 남자의 품에서 눈을 감았다. 남자는 여자가 떠난 뒤에도 가슴속 깊이 잔물결을 일으키는 사랑의 파동을 품고 살았다. 그 뿌리에 측은지심은 없었다. 만남이 짧다고 잊히는 것도 아니고, 애틋한 추억이 없다고 사라지는 것도 아니었다. ‘사물의 아름다움은 그것을 생각하는 마음에 달려 있다’라고 한 영국의 철인 데이비드 흄의 말을 되새기지 않더라도. 사랑에 유효기간이란 있는 걸까? 젊어서는 사랑으로 살고 늙어서는 정으로 산다거나, 정주고 살다가 나중에는 측은지심으로 산다는 말은 맞는 말일까? 반은 맞고 반은 틀리는 말 같다. 우리는 사명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사랑으로 사는 존재여야 하기 때문이다. -소설가/daumcafe이관순의 손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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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10-05
  • 꽃은 왜 향기가 나는가
    보이는 건 사라지고 돌아보는 것은 보이지 않나니, 사라지는 것에 연연하지 말고 보이지 않는 것을 사모하라…. 그래서 이상향을 꿈꾸고 천국 같은 내세를 연모하지만, 사람들은 사라지는 것에 대한 미련을 못 놓고 자꾸 뒤를 돌아본다. 5년 전 친구 손에 잡혀 처음 지리산 종주를 할 때의 기억이다. 천왕봉에 오르기까지 밟는 발자국마다 설렘이고 기쁨이었다. 그중에도 나를 가장 놀라움으로 빠뜨린 것은 연하선경을 지나며 만난 들꽃 무리였다. 아무도 없는 곳에 고봉준령의 찬 밤바람을 맞으며 어쩌자고 꽃을 피웠을까. 철없이 덜컥 임신한 소녀를 보는 것 같았다. 한참을 앉아 작은 꽃들을 바라보았다. 산바람에 연신 몸을 누이면서도 여린 자태와 몸짓은 사랑의 언어로 충만했다. 들꽃이 아름답다는 것을 절절히 재우친 시간이었다. 심심산골에 핀 작은 꽃도 찬찬히 관찰하고 가슴으로 안다 보면 우주의 사랑을 듬뿍 받기에 부족함이 없는 존재임을 알게 된다. 길 가에, 들판에, 시골 밭두렁에 아무렇게 핀 이를 모를 풀꽃들과 눈을 맞추는 일은 살가운 일이다. 얼핏 하찮아 보여도 끈기 있게 사랑의 눈길을 건네다 보면 어느새 더없이 귀한 존재로 다가온다. 그때마다 풀꽃이 내 손등을 간지럽히며 실눈을 뜰 때, 가슴에 활짝 피어나는 꽃향을 느끼며 편안한 쉼을 얻는다. 좋아하는 우리말 중에 으뜸은 ‘꽃’이다. 철 따라 산과 들에 지천으로 널린 것이 꽃이고, 사람이 사는 곳이면 토담집, 산막, 폐가에도 피는 꽃이지만, 애어른 구분 없이 심신에 평안을 주고 낙심한 사람에겐 위로의 말을 건네며 토닥여준다. 마음과 마음을 잇는데 꽃만 한 선물이 또 있을까. 때마다 곳마다 시의적절하게 꽃다발, 화환, 꽃바구니, 꽃병과 같이, 각양의 이름으로 전해지는 꽃은 그대로가 사랑과 위로, 기쁨과 축복의 메신저다. 내가 꽃의 존재에 처음 눈 뜬 것은 중3 때였다. 김춘수 시인의 시 ‘꽃’을 대하면서였다. 천천히 읽고 또 읽고를 거듭하다가 나도 몰래 코끝이 찡해 옴을 느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간결하면서도 짧은 시구에는 마음에 쟁여 놓은 말들을 다 쏟아놓은 듯했다. 시인은 무엇을 꽃으로 불렀을까? 어떤 꽃을 콕 집었을까? 아니면, 사람을 부른 것일까? 물음에 물음을 잇대면서 나의 동공 속에 자라는 건 한 소녀의 얼굴이었다. 밤하늘에 떠오른 둥근 달덩이 같기도 하고, 막 쪄낸 햇감자의 우윳빛 속살 같기도 한, 뽀얀 단발머리 얼굴이었다. ‘사물의 아름다움은 그것을 생각하는 마음에 존재한다’라고 영국의 철인 데이비드 흄이 말했다. 자세히 보고, 오래 보노라면 못난 얼굴이 따로 없고, 모두가 다 아름답고 사랑스러운 것이다. 내가 소녀의 이름을 부를 때 꽃이 돼 나에게 오듯 소녀가 내 이름을 불러줘야 나도 꽃이 되겠구나. ‘꽃’은 그렇게 어린 나에게 다가왔다. 그 소녀는 고등학교 1학년 때 딱 한번 만났다. 여름방학이 돼 시골집으로 가던 대전 역에서였다. 그것이 처음이자 마지막이었지만, 만남이 한 번이라고 잊히는 건 아니다. 그 뒤로 더는 보지 못하는 상황이 되고 말았어도, 여름방학이 돼 시골집에 들어설 때면 그때처럼 장독대엔 박하꽃이 피었고, 스피아민트 향은 그때를 더 아련하게 해 주었다. 여름이 올 때마다 늘 기억을 되살려주던 박하꽃. 사물의 아름다움이 그것을 생각하는 마음에 존재한다면, 그 소녀가 지닌 아름다움 역시 소녀를 생각하는 내 마음에 있겠지. 보인 것은 사라지고 찾으려면 보이지 않아도, 나만의 이야기로 끝나는 건 아니라고 생각했다. 내가 보는 저 둥근달을 그녀도 볼 것이고, 추억은 생물이기에 공동의 추억은 더 나은 세상으로 인도해 줄 테니까. 다시 詩 하나, 나태주의 ‘내가 너를’ 떠올린다. 내가 너를/ 얼마나 좋아하는지/ 너는 모른다/ 너를 좋아하는 마음은/ 오로지 나의 것이다/ 나의 그리움은/ 나 혼자만의 것으로도 넘치니까// 나는 이제/ 너 없이도 너를/ 좋아할 수 있다. 삶은 집 짓기와 같다. 큰 극장을 지을 때는 기둥의 간격을 최대한 벌려서 세워야 기둥 사이로 울림이 오롯이 살아난다. 무너진 신전에 듬성듬성 서 있는 기둥을 보면 안다. 기억도 핵심기둥만 받쳐지면 울림과 떨림은 시공을 넘어 더 아득하게 웅숭깊게 한다는 것을 알았다. 사랑은 뭔가를 더하면 더할수록 커지는 것이 아니라, 비울수록 깊고 긴 여운을 느끼게 될 테니까. 추억이 아름다운 건 시공을 뛰어넘는 향기 때문이다. 첫 만남이 있던 날, 돌아온 우리 집 장독대에서는 박하꽃이 잔뜩 박하향을 뿜고 있었다. 박하꽃 앞에서 향에 취하다 꽃을 보고 나직이 그 이름을 불렀다. “박하 향기가 너의 기억을 찾을 때, 어디선가 박하향이 나거든 내가 왔다 갔구나 생각해 줘.” 감성이 풍요로웠던 시절, 일기장에 남긴 내 마음의 흔적이다. 참 오랜만에 맡아보는 풋풋한 날의 꽃향기다. -소설가/daumcafe 이관순의 손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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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고
    2023-09-27
  • 세상이 많이 아프데요
    아이가 피아노학원 선생님에게 전화를 했었나 봐요. ‘코로나’로 시작된 교습 중단이 길어지면서 집에 있는 시간에 나름 시달렸던 모양입니다. 전화를 끊고 난 아이 표정이 밝지 못해 엄마가 묻습니다. “뭐라시든?” “세상이 많이 아프데요. 문을 열 수가 없대요.” 뭐라, 세상이 아프다고? 선생님이 그러셨어? 어쩌면 우리가 처한 아픈 상황을 저리도 센스있게, 곱게 표현할 수 있을까. 얼굴도 마음도 다 예쁠 것 같습니다. 사방에 모두 아픈 사람뿐입니다. 전철에도 거리에도 버스에도 성한 사람은 보이지 않고 소리 없이 신음하는 모습들입니다. 얼굴을 온통 붕대로 칭칭 감은 사람들이 타고 내립니다. 오늘 전철에서 입 코 양 볼을 덮은 마스크에, 커다란 선글라스를 쓰고, 이어폰으로 귀를 막고, 모자까지 눌러 쓴 한 여성을 봤어요. 뚝 떨어진 외계인 같기도 하고 내가 이상한 나라에 온 엘리스 같기도 합니다. 앞자리 그 여성을 보다 갑자기 사람이 죽어 염할 때 모습이 떠올랐어요. 신체의 구멍이란 구멍은 죄다 틀어막는. 그러다 갑자기 저것도 패션이란 생각을 했어요. 각양각색의 마스크를 쓴 사람들을 보면서 올해는 어떤 패션이 또 등장할까? 몸이 아프면 말하는 것부터 귀찮죠. 말을 거는 것도, 아는 척하는 것도 싫습니다. 간섭은 물론이고, 누구랑 눈 맞추고 싶지도 않아요. 세상 일에 눈 감고,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 자체를 멀리하고 싶습니다. 직장을 다니는 조카는 상가에 들릴 때마다 가방에서 이어폰을 꺼내 귀를 틀어막는 일부터 한대요. 입, 귀 다 막았으니 ‘말 시키지 마세요.’ 무언의 사인입니다. 마스크가 갑갑은 해도 이런 심리적 방어벽을 치는데 요긴하게 쓰이기도 합니다. 타인과의 대화를 불편해 하는 세대가 늘어납니다. 낯선 사람이 불쑥 말을 걸어올 때, 피하고픈 충동부터 생기나 봅니다. 지인이 지하철에서 딸이 새로 사준 스마트 폰을 익히다가 옆 자리의 아가씨에게 물어보려고 ‘이것 좀’ 하는데, 벌떡 일어나 가버리더랍니다. 이 기막힌 상황에 황당해진 지인이지만, 이 또한 어쩔 수 없는 세태 탓으로 자위합니다. SNS 소통이 워낙 대세이다보니 통화 공포증 (call phobia), 대화 공포증(talk phobia)을 부르나 봅니다. 나이 들면 사람도 비슷해집니다. 예전엔 외출할 때 시계부터 챙겼는데 어쩌다 놓고 나가면 종일 손목이 허전함을 느꼈지요. 지금은 마스크, 핸드폰이 그러합니다. 여기에 이어폰이 추가됐습니다. 이어폰을 끼고 사는 손녀에게 “네게 이어폰은 어떤 존재냐?” 물었더니, “얘 없인 하루도 못 버티는 내 고막 절친”이라네요. 이어폰을 집에 두고 나온 날은 불안불안하다는 게 또래들 생각이랍니다. 귀에 꽂혀 있지 않으면 불안을 키우는 이어폰. 주변을 둘러보세요. 출퇴근길 전철과 버스, 카페, 어딜가도 귀를 틀어막고 있는 사람을 쉽게 만납니다. 전에는 예의를 차린다고 윗사람 앞에선 모자부터 벗었는데, 요즘엔 귀에서 이어폰을 뽑지요. 주변에 신경 안 쓰고 오롯이 내 생각에 집중할 수 있어, 공부나 일할 때 구분 없이 낀다해요. 한 사회학과 교수는 “젊은 세대일수록 혼밥 혼술처럼 혼자일 때가 편하다는 생각이 소리도 골라듣겠다는 청각의 개인주의”로 확장된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이러한 개인주의가 장·노년층에도 보편적 가치로 확대됐습니다. 복잡한 도시에서 나만의 공간을 만드는 일은 탓할 바 아니나 더불어 사는 사람의 가치나 영역이 허물어지는 것 같아 아파하는 사람도 많아졌습니다. 사람이 사람 만나는 일을 부담스러워하면 결혼은 더 기피할 테고, 대신 외로움을 나누려는 욕구는 엉뚱한 곳으로 분출할 수밖에요. 결국 인공지능이 인간의 외로움을 해결해주는 기괴한 현상이 나타날 가능성이 높아집니다. 애완견이 반려견이 되고, 인공지능이 발전해 로봇이 사람의 고유 영역을 넘보기 시작한지 오랩니다. 그러다 창의성, 감정, 기억까지 공유하는 날이 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사람과부대끼며 사느니 ‘반려로봇’과 살림을 차리는 그런 세상은 아닐까? -글 이관순 소설가/ daumcafe/ leeletter
    • 오피니언
    • 기고
    2023-09-25
  • 고통은 하늘이 내린 선물
    살면서 가장 많이 선택하는 단어가 희망이고, 피하고 싶은 단어가 고통입니다. 단테의 ‘신곡’엔 ‘지옥의 문’ 앞에 서는 사람들에게 희망이란 희망은 모두 박박 긁어 버리라고 하죠. 지옥에는 희망이 존재하지 않으니까요. 오래전 대상포진으로 큰 고통을 당한 적이 있습니다. 한 달 넘는 치료과정에서 겪은 통증의 기억은 10년이 다 된 지금도 ‘대상포진’이란 말에서 조차 신경이 써집니다. 중추를 칼끝으로 헤집고 침이 곳곳의 피부를 뚫어대는 통증에 한바탕 진땀을 흘리다보면 고통도 잠시 쉴 때가 있습니다. 그때 먹고, 웃고, 수다도 떨지만 다시 올 고통에 두려움을 느낍니다. 해도 고통의 강도가 센들 회복이 주는 기쁨만 할까. 여자가 겪는 산고도 마찬가지겠지요. 입덧이 나면서 열 달 동안 몸과 마음이 짊어지는 고통을 남자들은 알지 못합니다. 그러니 산실 밖에서 기다리다 조는 남자들이 생기겠지요. 하지만 산고가 심한들, 새 생명의 탄생이 주는 환희에 비할까. 그 고통을 겪고도 둘째, 셋째 아이를 낳을 수 있는 것은 가늠할 수 없는 희락과 기대가 훨씬 크기 때문일 것입니다. 낳는 것도 힘들지만 아이를 기르는 일은 더 힘들 텐데, 그 때문에 양육을 포기했다는 말은 들어보지 못했어요. 오히려 받은 고통의 수천만 배를 더 얹어 자식들을 사랑합니다. 자식의 혼사를 끝내고 속 시원하다는 말은 다 겉치레 수사입니다. 여전히 부모들은 눈시울을 붉히고 손수건을 꺼내듭니다. 천방지축이던 것이 언제 저렇게 성장해서 제 가정을 이룬다는 사실에 한 없이 파도치는 것은 감동과 감사뿐이지요. 세상이 온통 다 변했다 해도 고통의 질과 양은 옛 그대로입니다. 지금도 피하고 싶은 것이 고통입니다. 그럼에도 내가 마땅히 겪어야 할 고통임을 자각하는 순간, 우리는 태도를 바꾸고 그 속으로 뛰어들지요. ‘살아있다’는 것은 ‘고통을 겪다’와 동의어입니다. 생명으로 존재하는 한 고통은 불가피 하니까요. 꽃도 흔들리며 피고 바람에 눕는 풀도 아프긴 마찬가지입니다. 통증의 신호가 잘 전달돼야 건강을 지킬 수 있듯, 고통이 지겹다고 감각 신경을 제거해버리면 통증을 잊을지 몰라도 신체 어딘가에 마비를 부릅니다. 한 의료 선교사가 한센병 환자를 돌보는 사역을 하다가 겪은 이야기예요. 어느 날 갑자기 그의 발에서 감각이 사라졌습니다. 직감적으로 감염을 의심할 수밖에요. 발에 주삿바늘을 여기저기 찔러보지만 통증을 느끼지 못합니다. 그가 밤새 홀로 부르짖어 기도한 것은 단 한 가지뿐. “주님, 제게 고통을 돌려주세요! 통증을 느끼게 해주세요!” 그제사 비로소 통증이 생명에 없어선 안 될 하늘이 내려준 선물임을 알게 됩니다. 생명을 위해 더없이 소중한 선물이 무엇일까? 지금 내가 겪는 이 고통도, 이 역경도 하늘이 내린 선물이 아닐까? ‘젊어 고생은 사서도 한다’라는 옛 어른의 가르침은 결코 빈말이 아녔어요. ?한 송이의 국화꽃을 피우기 위하여 봄부터 소쩍새는 그렇게 울었나보다 천둥은 먹구름 속에서 또 그렇게 울었나보다…? 인생도 생명의 탄생에는 고통이 있고 성숙에는 고난이 따른다는 것을 갓 핀 국화송이가 전합니다. 시드니에 사는 교민이 고국을 다녀가는 길에 개나리 가지를 꺾어다가 자기 집 마당에 심었다고 해요. 이듬해 봄이 됐어요. 맑은 공기와 좋은 햇볕에 잎과 가지는 한국에서 보다 무성했지만, 꽃은 피지 않았습니다. 첫 해라 그런가보다 했는데 다음해도 그다음해도 꽃은 피지 않는 걸 보면서 비로소 알았답니다. 혹한이 없는 호주에서는 개나리꽃이 아예 피지 않음을. 저온을 거쳐야 꽃이 피는 것을 춘화현상이라고 하는데 진달래, 철쭉, 튤립, 백합, 라일락 등이 이에 속한답니다. 봄에 파종하는 봄보리 보다 가을에 파종해 겨울을 나는 가을보리가 수확도 많고 맛도 좋은 이치와 같아요. 추운 겨울을 거치면서 풍성하고 더욱 견실해집니다. 사람도 고난을 많이 헤쳐 나온 사람일수록 강인함과 인생의 깊이가 다릅니다. 무르익은 누군가의 인생이 부럽다면 그의 고난부터 이해할 일입니다. 지금 겪는 내 고난을 너무 원망하지 마세요. ‘통증’이 몸이 건강함을 알리는 신호듯이 그 고통이 나를 인도하는 축복의 통로일 수 있으니까. -글 이관순 소설가/ daumcafe/ leeretter
    • 오피니언
    • 기고
    2023-09-21
  • 내 삶이 내 스펙이다.
    현실에 지쳐 희망을 접었다는 학생이 연구실로 교수를 찾아왔다. 가난한 환경에서 학업과 일을 병행해 왔는데 부족한 성적 때문에 기업의 해외연수생 모집에 응시를 못한다고 눈시울을 붉혔다. 정말 잠 안 자고 안 먹고 열심히 노력하며 살았는데, 지금 나 자신이 너무 초라해 보인다고 낙심했다. 교수는 그 학생의 성실한 생활 태도를 잘 알고 있었다. 이때 스승은 학생에게 무슨 말로 위로와 격려를 전할까. 스승은 제자에게 말했다. “네가 살아온 삶이 네 스펙이다.” 일단 접수부터 하라고 권했다. “학점이 'all B' 이상여야 하는데 'C'가 하나 있어요.” 스승이 제자 등을 두드리며 “학점이 다가 아니다. 너는 너만의 스펙이 있잖니? 힘을 내라. 추천서는 내가 해주마.” 결국 학생은 스승의 정성 어린 추천서 덕에 선발되었고, 1년 연수를 성실하게 마치자 곧바로 그 회사에 스카우트됐다. 그리고 런던 주재원으로 발령을 받았다. ‘내가 살아온 것이 내 스펙’이라고 알려준 스승의 한마디가 절망의 어둠 속 인생을 부활시킨 것이다. 스승의 그 한마디에 열등을 치유하고 온전한 자유를 찾은 제자는 런던에 부임한 첫날밤, 비 오는 테임즈 강가에서 비를 맞으며 눈물을 흘렸다. 그리고 스승에게 감사의 편지를 보냈다. 어둠은 모든 것을 삼켜버린다. 어둠은 순식간에 희망, 꿈, 환상, 미래까지 다 덮어버리지만, 천년의 어둠도 한 줄기 빛에 날아간다. “어둠이 빛을 이긴 적은 없다.” 영화 ‘미션’ 첫 장면에 떠오르는 자막이다. 빛과 어둠은 동전의 양면 같이 붙어 있다. 문제는 내 시선이 어느 쪽을 향하고 있느냐이다. 인생에는 수많은 고통과 역경이 따라붙지만 그 불행을 해결할 수 있는 작은 문이 어딘가에 열려 있다. 인생이 매력적인 것은 ‘고난을 거듭할수록 지혜는 쌓이고 나를 강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사막을 여행하다 쓰러지는 사람은 대개 오아시스를 눈앞에 두고있다고 한다. 시련의 시간을 좀만 더 견뎌냈더라면 찾을 텐데. 이 고통의 법칙은 우리가 사는 지상의 언어요 약속이다. 사람이 스스로를 귀히 여기지 않으면 누가 나를 존중해 줄까? 나는 나다운 멋이 있고 재능을 지닌 세상에서 하나뿐인 존재이다. 이것이 자존감이다. 자기를 자랑하는 자존심과는 다르다. 자신을 존중할 줄 아는 이가 역경에서 이긴다. 주눅 들지 말고 어깨를 쫙 펴고 걸어가자. 때가 되면 ‘나 자신’이 바로 비장의 무기임을 알게 될 것이다. 가장 완벽한 정보는 내가 아슬아슬하게 승리하거나 패한 것에 있다. -소설가/daumcafe이관순의 손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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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9-18
  • 신발장을 정리할 시간
    시름에 찬, 여름 한(恨) 세월이 간다 폭우 속에 잠긴 집들 산사태에 쓸려간 삶의 터전들 둑은 터지고 다리는 끊어지고 지붕 위로 올라간 소의 수난까지 아버지가 물 빠진 쓰레기 속에서 사진액자를 찾아들고 수건으로 훔치고 한참을 본다 단란했던 시절 사진관에서 찍은 가족사진이다 그 속에 일곱 가족이 웃고 있다 넥타이 매고 행복해하는 아버지 오빠가 암으로 이승을 뜰 때도 아들이 힘들다며 어머니가 요양원을 자원할 때도 가족은 웃었다 웃음 속에 흐르는 애잔함이란 한 번 가면 오지 않는 시간이다 백로(白露)가 가까워진 아침 풀잎에는 영롱한 이슬이 맺히고 뜨락 위로 부는 바람은 정갈하고 계절은 이처럼 쉽게 오가는데 아직도 웃고 있는 가족들... 지금은 신발장을 정리할 시간 함지에 가득 물을 받아놓고 현관에 흩어진 신발을 닦아야지 씻고 헹구고 물기를 털어서 가지런히 줄을 세워 말려야지 신발장 위의 박스는 내려서 그 속의 신발은 꺼내놓고 여름 신발은 담아서 올려야지 신발장이 정리되는 동안 신발은 새집에 들어갈 생각에 한가슴 부풀고 산만했던 마음은 가을바람에 살포시 부풀고. 소설가/daumcafe 이관순의손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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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9-14
  • 누가 시간을 지배할까
    천고마비(天高馬肥). 말이 살찌는 계절, 말만 들어도 평화로운 초원을 떠올리게 합니다. 그러나 이 말은 몽골을 경계해온 중국에는 평화보다 긴장을 상징합니다. 원기를 회복한 몽골족이 언제든 공격할 수 있는 시기이기 때문입니다. 중국은 몽골을 늘 경계해 왔어요. ‘몽고’라는 국호로 얕잡아보면서도 그들의 전술 전략에 수없이 농락당한 아픈 경험이 있습니다. 얼마나 시달렸으면 북방 유목민족을 경계하고자 만리장성을 쌓고, 동북 부족 때문에 천리장성을 축성했을까. 알려진 대로 칭기즈칸의 몽골은 한 때 1억의 유라시아를 호령했던 막강한 제국이었죠. 헝가리 등 동유럽에서, 블라디보스토크, 러시아까지 그들의 말발굽 아래 수많은 나라가 무릎을 꿇었습니다. 그 와중에 국가의 명패를 지킨 나라는 고려뿐입니다. 형제의 맹방이라고 의리를 지켜주어서죠. 유목민족인 몽골이 고려를 맹방으로 우대한 것은 한반도가 몽골족의 후예라는 연대의식이 작용했다고 보는 시각이 큽니다. 유독 한국인 신생아의 엉덩이의 시퍼런 반점을 ‘몽골리안 마크’로 불린다는 것도 예사롭지 않습니다. 21세기 문명이 새롭게 유목 문화를 주시합니다. “집을 짓고 사는 자, 다 망한다”라고 한 몽골 장수 돈유 코코 말처럼, 누가 시간을 지배하느냐라는 인류의 초관심사가 IT 문명과 맥이 닿아서입니다. 그동안 문명의 쥬류인 정착 민족의 관심은 ‘누가 공간을 제어하며 사나?’ 였다면, 유목 문화는 ‘누가 시간을 제어하며 사느냐?’에 있습니다. 이는 수직적 위계사회가 수평적 위계사회로의 이동을 뜻합니다. 한국인의 유목성 기질을 분석한 책을 재밌게 읽었어요. 이를 보면 우리도 다분히 유목민 DNA가, 피가 흐르고 있음을 어느 정도 수긍하게 합니다. 그 하나로 <활쏘기>를 꼽았어요. 우리나라 양궁이 유달리 강한 이유를 유목민 기질에서 찾습니다. 고구려 고분 벽화를 보세요. “얼마나 말과 활을 잘 다루면, 달리는 말에서도 뒤를 향해 쏠 수 있을까?” 고구려 시조 주몽의 뜻이 ‘활을 잘 쏘는 자’란 점도 우연은 아닐 것입니다. <골프> <바둑>에서도 빛나는 유목 기질을 찾습니다. 바둑은 어떤가요? 수직적 위상으로 설정된 장기나 체스와 달리 바둑은 수평적 위상에서 출발합니다. 왕을 잡으면 끝나는 장기와 달리, 바둑은 끝까지 가봐야 승부가 납니다. <이동통신> 발달은 보다 뚜렷한 우리민족의 장점이 투시되어 있습니다. 이동통신 세계 3대 보급률 국가인 한국, 핀란드, 스웨덴의 공통점은 몽골리안 계란 점입니다. 유목민은 끊임없이 움직이고 변해야 살 수 있습니다. 우리 <민속 풍습> 중엔 끊임없이 돌아다니는 것이 많아요. 단오, 삼짇날, 천렵, 단풍놀이가 그렇습니다. 유목성에는 남의 마을, 이웃집에 대해 늘 궁금함이 있습니다. 옛날엔 발품을 팔고 귀동냥으로 알아챘지만, 지금은 애어른 구별 없이 핸드폰을 들고 궁금증을 풀잖아요. <음주문화>도 예외가 아닙니다. 서양 음주는 스스로 따르고 마시는 자작(自酌)문화지요. 우리도 농경사회 땐 비슷한 자배(自杯)를 즐겼지만, 서서히 돌려마시는 순배(巡杯)로 바뀌면서 ‘우리는 하나’를 외쳐댑니다. 몽골 음주습관은 각배(角杯)예요. 좌장이 병권을 쥐고 뿔로 만든 각배를 돌려 마십니다. 이동하는 짐을 줄이기 위해 한 사람만 술잔을 지닙니다. 그것이 이동에 효능임을 아니까요. 몽골대학의 졸업식은 참 흥미롭습니다. 우리처럼 졸업식장에 모여 끝내지 않고 계속 이동하며 행사를 이어가죠. 오전 졸업식, 점심 호텔, 오후에 학교로 이동, 다시 야외로 나가 새벽까지 돌아다니며 즐깁니다. 우리가 1·2·3차로 술집을 순례하고 폭탄주를 돌리는 것에도 유목문화의 이동성이 잠재돼 있는 걸까? 빨리 마시고 빨리 취하는 건, 빨리 끝내고 떠나야 한다는 잠재의식 때문은 아닐까? <고스톱>도 같은 관점에서 봤어요. 일반 화투는 위계질서가 분명하지만 고스톱은 ‘광’과 ‘껍질’이 동등한 반열에 서 있습니다. 왕이 죽으면 끝나는 게 아니라 승패는 끝까지 가봐야 압니다. 다 죽었다가 살아나고 다시 죽기도 하니까. <춤사위>는 어떨까요? 어깨춤, 관광버스춤, 말춤, 위아래로 흔드는 마상 춤사위 등 시간·장소에 따라 변화무쌍합니다. 한국경제의 급성장엔 <빨리 빨리>라는 주술이 작동했지요. 1년에 초장을 찾아 네 번 이동하며 사는 유목민의 최대 관심은 빨리빨리 다음 초지를 찾는 일입니다. 21세기는 시간을 제압하고 공간을 지배하는 신 유목시대입니다. 그러니 ‘싸게 싸게’ ‘빠릿빠릿하게’ 일을 해치워야 합니다. 영화 <친구>의 패러디 대사처럼 “이제 마이 머물렀다 아이가. 고마 퍼뜩 떠나재.” 이관순 소설가/daumcafe/leerett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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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9-11
  • 끝내 돌아오지 못한 아들
    거의 매일같이 파티와 사교모임을 즐기는 미국의 한 상류층 부부가 있었습니다. 그들은 침실이 여섯 개나 있는 저택에서 살고 있었어요. 그날도 저녁 파티에 참석할 준비에 들떠 있었습니다. 막 집을 나가려고 하는데 전화벨이 울렸어요. 뜻밖에도 월남전에 참전한 아들의 전화였습니다. “어머니, 방금 제대하여 본국에 돌아왔습니다.” “오, 아들! 네가 살아 돌아왔다니 정말 기쁘구나. 언제 집에 오느냐?” 어머니가 기쁨에 넘치는 소리로 물었습니다. “빨리 갈게요. 그런데 집에 내 전우 한명을 데리고 가도 되겠습니까?” “아무렴, 여부가 있냐. 내가 환영해 주마. 그 친구도 데리고 오너라.” 어머니는 망설이지 않고 승낙을 했습니다. 그러자 아들이 말했어요. “어머니, 그런데 제 친구는 두 다리가 절단되고 팔 하나를 잃었습니다. 얼굴도 심한 화상을 입었고 귀 하나와 눈 하나도 없습니다. 그래서 보기가 매우 흉한데, 딱히 갈 집이 없답니다.” “그래? 하지만 너무 걱정할 것 없다. 같이 쉬면서 갈 곳을 찾아보자.” 아들은 감사하다면서 어머니에게 다시 물어봅니다. “어머니가 다시 한 번 승낙을 해주면 좋겠어요. 나는 그가 우리 집에서 오래도록 함께 살게 하고 싶거든요.” 우아하고 교양 있는 어머니는 아들의 말에 당황한 기색입니다. 그녀는 황급히 아들의 말을 가로막았습니다. “그건 안 된다. 친구의 딱한 사정은 백 번이고 동정하지만 그렇다고 우리 집에 마냥 있게 할 수는 없지 않겠느냐? “그러실 테죠. 하지만 그렇게 하면 안 될까요?” “깊게 생각을 해보렴. 동네 사람들은 무어라고 할 것이며 네 아버지가 이를 허락하시겠니? 친구는 나라가 적절한 예우로 사는데 지장 없게 돌봐 줄 거다. 마침 연휴도 다가오니 너나 빨리 집에 돌아와서 오래간만에 가족끼리 휴가를 즐기도록 하자.” 그 말에 아들이 침묵하면서 대화가 끊겼습니다. “아들아, 내 말 안 들리니? 아들아?” “띠띠띠......” 어머니는 먹통이 된 전화통에 아들 이름을 부르다가 전화가 통화 중에 끊어진 것을 알았습니다. 다시 전화 오기를 기다렸지만 벨은 울리지 않았어요. 초조하게 시계를 보던 부부는 할 수 없이 약속 시간에 늦지 않으려고 집을 나섰습니다. 그리고 밤늦게 파티를 마치고 집에 돌아오자마자 어머니는 부재 중 전화 메시지부터 확인합니다. 그러나 기다리던 메시지는 없고 대신 캘리포니아 한 카운티 경찰서에서 온 녹음된 메시지 하나가 기다라고 있었어요. 이건 뭐지? 알지도 못하는 경찰서에서 왜? 이상한 예감이 든 어머니는 다급히 알려준 번호로 전화를 걸었습니다. 그리고 다음 날 그 마을로 먼 길을 달려서 경찰서를 찾았습니다. 경찰서장이 부부를 앉히고 침통한 표정으로 자초지종을 설명합니다. “여기 두 다리와 한쪽 팔이 없고 얼굴에 심한 화상이 있고 눈과 귀가 하나씩 없는 청년의 시체가 있어서요. 머리에 총을 쏴 자살한 듯합니다. 그런데 그의 신원증명서를 보니 당신의 아드님인 것 같습니다.” 미국 전쟁사에 기록된 가슴 아픈 사연을 재구성한 글입니다. 이야기를 들으면 우리는 그 어머니를 탓하기가 쉽겠죠. 그러나 막상 우리가 그 어머니였다면 달리 어떤 처신을 할 수 있었을까? 그 어머니는 평소에 자원 봉사도 열심히 하고 교회의 자선 사업에 앞장 서서 적극 참여한 여성이었습니다. 월남전이 끝나고 고향으로 돌아온 미국 젊은이들의 비극적인 이야기는 수없이 많습니다. 미군 5만8천 명이 사망하고 10만 명에 가까운 부상자를 낸 월남전은 당시 미국 사회에 엄청난 충격과 부작용을 불러왔지요. 히피족이 등장한 것도 실은 월남전의 영향을 크게 받았습니다. 그러나 전투에서 당한 부상보다 더 견뎌내기 힘들었던 것은 사회의 냉대였습니다. 자신의 참담한 모습과 마주하게 될 부모님의 절망하는 모습이 두렵고 무서웠던 아들은 집을 찾기 전에 조심스럽게 어머니의 의중부터 살폈습니다. 그리고 아들은 깊은 고뇌 끝에 자신이 할 수 있는 마지막 선택으로 극단적인 방법을 택했지요. 어머니의 선을 긋는 말 한마디에 그렇게 그리워한 집으로 영영 돌아가지 못하는 아들이 되고 말았습니다. 어머니의 머릿속에 저장된 자랑스러운 아들의 이미지를 지켜드리고 싶은 아들이었을 테니까요. 가정의 달엔 가족 간의 이동과 모임으로 즐겁고 행복한 사람들이 많겠지만, 양지가 환할수록 한쪽으로 그늘이 짙어집니다. 돌아오지 못하는 건 아들뿐이 아닙니다. 아버지일 수도, 엄마일 수도 있고, 이런저런 사정으로 떠도는 가족들일 수도 있습니다. 가뜩이나 사랑에 굶주려 있는 시설에 있는 아이들에겐 5월의 웃음소리가 가슴 저미는 소리일 수도 있겠지요. 금년 5월에는, 우리 가족 이름으로 그늘진 이웃을 헤아리고 살피는 작은 무엇 하나 준비하면 어떨까요? 그러면 더 가치 있고 소중한 ‘가정의 달’로 반짝반짝 빛날 것 같아서···. 한 뼘 그늘을 지우는 빛이 되기도 하겠죠. 글 이관순 소설가/daumcafe/leerett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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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9-07
  • 빈집으로 보내는 여름편지
    푸른 바다에 갈매기들이 온다 여름 한철 내내 사람들에게 바다를 내어주고 떠나갔던 갈매기 가족들이다 사람들은 갈매기를 쫓아냈다고 생각하지 않듯이 갈매기들은 잠시 바다를 사람들에게 빌려주었다고 생각한다 바다가 제 모습을 찾아가는 동안 먼바다로 나갔던 물고기들은 해안으로 돌아오고 짓무른 모래밭도 파도에 씻기며 다시 편안한 제 몸을 찾는다. 모래밭에 새긴 사랑의 발자국들 뜨겁게 일렁이던 욕망의 그림자 모두 다 지워내고 이젠 고요의 시간으로 돌아갈 때 바다가 바다로 돌아가듯 이젠 마음의 서랍을 정리할 시간 여름 내내 눅눅했던 마음은 볕에 내다 말리고 현관에 널린 신발은 씻어 올리고 때로 얼룩진 시간은 닦아내고 이슬... 풀꽃... 사랑... 감사... 그런 착한 말들로 가지런하게 마음을 정돈하고 싶다 바다에서 돌아와 신발을 벗을 그대를 위하여 함초롬히 이슬에 젖어 올 가을을 위하여 -소설가/daumcafe이관순의 손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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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9-04
  • 나뭇잎 사이로 가을이 오네
    올여름, 낭만은 없었다. 미쳐 돌아가는 염천 아래로 극한 폭염과 극강 호우, 한반도를 관통한 태풍에 급급해야 했던 올여름은 애초 낭만과 거리가 멀었다. 그래도 푹푹 찌는 날씨에 세 시간 걸리는 열차에 몸을 실은 건 여수 밤바다는 다르겠지 하는 기대 때문이었다. 어둑한 밤바다를 보며 넘실거리는 파도를 연상시키는 멜로디에, 읊조리듯 속삭이는 버스커버스커의 ‘여수 밤바다’를 상상했다. 이 노래는 이명박 정부가 그 당시 잘 나가던 장범준에게 여수엑스포를 띄워줄 노래를 만들어 달라고 해서 나온 노래다. 그런데 웬걸 수많은 ‘낭만 포차’에선 아이돌 그룹 노래가 고막을 때렸다. 늘 기대는 70~80%에 놓아야 하는데, 눈에 거슬리는 것이 많았다. 시어터진 갓김치를 우적우적 씹다가, 밖으로 나와 조명 없는 곳에 걸터앉아 이어폰을 끼고 노래를 들었다. 그러다 밤하늘에 뜬 둥근 달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문득 내 모습이 좀은 청승스러워 보이기도 했다. 아, 그렇구나. 이제 내가 살았던 세상의 낭만이 기댈 곳은 좁다랗다는 걸 깨닫는다. 그러면서 연 나흘째 동해안을 훑으며 차를 몰고 주유천하 중인 대학 동창의 얼굴이 떠올랐다. 친구는 지치지 않고 좌충우돌한 그날의 에피소드를 뚝딱뚝딱 만들어 카톡에 올렸다. 본인은 괜한 화장발을 올리지 말라고 손사래를 치지만, 내 주변에 몇 남지 않은 '서정파'이자 유일하게 남은 '낭만가객'이 아닌가 싶다. 댄스면 댄스, 노래면 노래, 운동이면 운동(테니스, 탁구, 수영), 더하여 사람까지 좋아해 새벽부터 밤까지 그가 끊임없이 찾아다니고 즐기는 것만 꼽아도 열 손가락은 펴야 한다. 그 나이에 세상을 자기만의 방식으로 즐길 줄 알고 사랑하며 힘써 살기란 어려운 일이다. 그를 보며 잘 놀고 즐기는 것도 타고난 복이라는 걸 생각한다. 세상에는 ‘기다리는 것’과 ‘기다려지는 것’이 있다는 걸 알았다. 사뮈엘 베케트의 희곡 ‘고도를 기다리며’를 읽다가 스친 것이다. 늘 생각했던 ‘고도’를 기다리는 사람의 입장에서가 아니라, 그들이 기다리는 ‘고도’의 입장으로 생각을 비틀어 보았다. 극 중에 단 한 번도 등장하지 않는 고도야 말로 오히려 그를 기다리는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의 초조함보다 불안과 긴장이 더 크지 않았을까? 무대에 오르기 전 막 뒤에서 느끼는 배우들처럼. 분명 고도는 어딘가에 오고 있다. 그 점만은 진실이다. 단지 도착하는 데 시간이 걸릴 뿐이다. 그 순간이 오기까지 기다려지는 사람의 존재를 확인할 길이 없다. 고도의 존재는 온전히 그를 기다리는 사람에 의해 그려지기 때문이다. 어쩌면 만남보다 만남 이전의 기다림의 시간이 아름다울 수 있다는 생각을 떠올려 본다. 갑자기 ‘고도를 기다리며’를 생각한 것은 순전히 가을 탓이다. 오후 들어 한바탕 소나기가 훑고 지나간 산능선 위로 뭉게구름이 해맑은 하늘에 떠 있고, 그 푸른 하늘 끝에 물린 검단산 자락이 잡힐 듯 가까이 보였다. 처서(處暑)가 지난 지도 닷새째다. 이제 모기 입은 삐뚤어지고 풀은 더 이상 웃자라지 않는다는 자연의 신호를 사람들은 알려주지 않아도 감지할 줄 안다. 여전히 한낮 더위는 쨍쨍해도 높이 뜬 나뭇잎 사이로 언뜻언뜻 가을이 스치고, 산에서 내려오는 바람에서 계절의 박동을 느낀다. 우리가 여름에 지쳤던 강도만큼 기다림을 키워온 가을이기에, 고도를 기다리는 두 사람처럼 오늘은 안 오지만 내일은 올 것이라는 믿음이 더욱 차질 수밖에… 그래서 가을을 기다리는 마음이 설레고 좋은가 보다. 처서가 지나면서 조석으로 부는 바람이 소슬하고 풀벌레 우는 밤이 가깝게 다가온다. 풀잎에 이는 바람의 숨결이 다르고, 꽃잎마다 달린 아침 이슬이 영롱하니 빛난다. 길가에 갓 피어난 코스모스가 생글생글 웃음 지며 하늘하늘 속삭이는 것도 이맘때 풍경이다. “나 많이 기다렸나 봐? 조금만 기다려. 다 왔어.” “어서 와. 팔월도 낼모레가 끝이야.” 8월의 밑동을 바라보는 사람들 얼굴이 한결 밝아진 것 같다. 떠나는 여름에 대한 원성만큼 상대적으로 커진 다가올 가을에 대한 기대 때문일 것이다. 기다리는 사이, 남은 여름의 잔해부터 마무리하자. 눅눅한 옷가지는 햇볕에 보송하게 말리고, 장독대는 독마다 뚜껑을 열어놓고, 책들은 거풍 시켜 책갈피로 스민 습기를 날려야겠다. 이제 여름은 가고 가을이 대세다. 우리가 눈치채지 못하는 사이 밤공기는 더욱 서늘해질 것이고, 텃밭에 내린 아침이슬이 바짓가랑이를 휘적실 테니까. 계절은 이처럼 쉽게 가고 오는데, 우리는 또 얼마나 어렵게 고단한 삶을 준비해야 하는지. 문득 여수 밤바다에 떠올랐던 둥근 달이 생각난다. 그때는 잘 몰랐는데, 그날 밤 돌산공원에서 바라본 두 대교의 불빛이 아련하고 아득하게 흔들린다. 기다림의 기쁨도 아쉬움의 작별도 쓰라린 아픔까지 지나고 나면 늘 그리워지는 법이다. 어느새 나뭇잎 사이로 가을이 보인다. -소설가/daumcafe 이관순의손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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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8-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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