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5-09(목)
 

보이는 건 사라지고 돌아보는 것은 보이지 않나니, 사라지는 것에 연연하지 말고 보이지 않는 것을 사모하라. 그래서 이상향을 꿈꾸고 천국 같은 내세를 연모하지만, 사람들은 사라지는 것에 대한 미련을 못 놓고 자꾸 뒤를 돌아본다. 5년 전 친구 손에 잡혀 처음 지리산 종주를 할 때의 기억이다. 천왕봉에 오르기까지 밟는 발자국마다 설렘이고 기쁨이었다.

 

그중에도 나를 가장 놀라움으로 빠뜨린 것은 연하선경을 지나며 만난 들꽃 무리였다. 아무도 없는 곳에 고봉준령의 찬 밤바람을 맞으며 어쩌자고 꽃을 피웠을까. 철없이 덜컥 임신한 소녀를 보는 것 같았다. 한참을 앉아 작은 꽃들을 바라보았다. 산바람에 연신 몸을 누이면서도 여린 자태와 몸짓은 사랑의 언어로 충만했다. 들꽃이 아름답다는 것을 절절히 재우친 시간이었다.

 

심심산골에 핀 작은 꽃도 찬찬히 관찰하고 가슴으로 안다 보면 우주의 사랑을 듬뿍 받기에 부족함이 없는 존재임을 알게 된다. 길 가에, 들판에, 시골 밭두렁에 아무렇게 핀 이를 모를 풀꽃들과 눈을 맞추는 일은 살가운 일이다. 얼핏 하찮아 보여도 끈기 있게 사랑의 눈길을 건네다 보면 어느새 더없이 귀한 존재로 다가온다. 그때마다 풀꽃이 내 손등을 간지럽히며 실눈을 뜰 때, 가슴에 활짝 피어나는 꽃향을 느끼며 편안한 쉼을 얻는다.

 

좋아하는 우리말 중에 으뜸은 이다. 철 따라 산과 들에 지천으로 널린 것이 꽃이고, 사람이 사는 곳이면 토담집, 산막, 폐가에도 피는 꽃이지만, 애어른 구분 없이 심신에 평안을 주고 낙심한 사람에겐 위로의 말을 건네며 토닥여준다. 마음과 마음을 잇는데 꽃만 한 선물이 또 있을까. 때마다 곳마다 시의적절하게 꽃다발, 화환, 꽃바구니, 꽃병과 같이, 각양의 이름으로 전해지는 꽃은 그대로가 사랑과 위로, 기쁨과 축복의 메신저다.

 

내가 꽃의 존재에 처음 눈 뜬 것은 중3 때였다. 김춘수 시인의 시 을 대하면서였다. 천천히 읽고 또 읽고를 거듭하다가 나도 몰래 코끝이 찡해 옴을 느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간결하면서도 짧은 시구에는 마음에 쟁여 놓은 말들을 다 쏟아놓은 듯했다. 시인은 무엇을 꽃으로 불렀을까? 어떤 꽃을 콕 집었을까? 아니면, 사람을 부른 것일까? 물음에 물음을 잇대면서 나의 동공 속에 자라는 건 한 소녀의 얼굴이었다. 밤하늘에 떠오른 둥근 달덩이 같기도 하고, 막 쪄낸 햇감자의 우윳빛 속살 같기도 한, 뽀얀 단발머리 얼굴이었다.

 

사물의 아름다움은 그것을 생각하는 마음에 존재한다라고 영국의 철인 데이비드 흄이 말했다. 자세히 보고, 오래 보노라면 못난 얼굴이 따로 없고, 모두가 다 아름답고 사랑스러운 것이다. 내가 소녀의 이름을 부를 때 꽃이 돼 나에게 오듯 소녀가 내 이름을 불러줘야 나도 꽃이 되겠구나. ‘은 그렇게 어린 나에게 다가왔다.

 

그 소녀는 고등학교 1학년 때 딱 한번 만났다. 여름방학이 돼 시골집으로 가던 대전 역에서였다. 그것이 처음이자 마지막이었지만, 만남이 한 번이라고 잊히는 건 아니다. 그 뒤로 더는 보지 못하는 상황이 되고 말았어도, 여름방학이 돼 시골집에 들어설 때면 그때처럼 장독대엔 박하꽃이 피었고, 스피아민트 향은 그때를 더 아련하게 해 주었다.

 

여름이 올 때마다 늘 기억을 되살려주던 박하꽃. 사물의 아름다움이 그것을 생각하는 마음에 존재한다면, 그 소녀가 지닌 아름다움 역시 소녀를 생각하는 내 마음에 있겠지. 보인 것은 사라지고 찾으려면 보이지 않아도, 나만의 이야기로 끝나는 건 아니라고 생각했다. 내가 보는 저 둥근달을 그녀도 볼 것이고, 추억은 생물이기에 공동의 추억은 더 나은 세상으로 인도해 줄 테니까. 다시 하나, 나태주의 내가 너를떠올린다.

 

내가 너를/ 얼마나 좋아하는지/ 너는 모른다/ 너를 좋아하는 마음은/ 오로지 나의 것이다/ 나의 그리움은/ 나 혼자만의 것으로도 넘치니까// 나는 이제/ 너 없이도 너를/ 좋아할 수 있다.

 

삶은 집 짓기와 같다. 큰 극장을 지을 때는 기둥의 간격을 최대한 벌려서 세워야 기둥 사이로 울림이 오롯이 살아난다. 무너진 신전에 듬성듬성 서 있는 기둥을 보면 안다. 기억도 핵심기둥만 받쳐지면 울림과 떨림은 시공을 넘어 더 아득하게 웅숭깊게 한다는 것을 알았다. 사랑은 뭔가를 더하면 더할수록 커지는 것이 아니라, 비울수록 깊고 긴 여운을 느끼게 될 테니까.

 

추억이 아름다운 건 시공을 뛰어넘는 향기 때문이다. 첫 만남이 있던 날, 돌아온 우리 집 장독대에서는 박하꽃이 잔뜩 박하향을 뿜고 있었다. 박하꽃 앞에서 향에 취하다 꽃을 보고 나직이 그 이름을 불렀다. “박하 향기가 너의 기억을 찾을 때, 어디선가 박하향이 나거든 내가 왔다 갔구나 생각해 줘.” 감성이 풍요로웠던 시절, 일기장에 남긴 내 마음의 흔적이다. 참 오랜만에 맡아보는 풋풋한 날의 꽃향기다.

-소설가/daumcafe 이관순의 손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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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은 왜 향기가 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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