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5-1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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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어머니의 강(江)
    해마다 봄이 되면 어린 시절 어머님 말씀이 떠오릅니다. 항상 봄처럼 부지런해라, 항상 봄처럼 꿈을 가져라, 항상 봄처럼 새로워져라.... 그때는 그 말의 속내가 무엇인지 가슴에 와 닿지 않았습니다. 불혹이 넘어서 비로소 그 말에 눈을 떴습니다. 땅 속에서, 땅 위에서, 공중에서 혼신을 다해 생명을 탈환하는 노력을 보고, 어린 자녀들에게 ‘부지런해라‘고 말했습니다. 보이지 않는 곳곳에서 생명을 생명답게 키우는 꿈을 깨달으며, 항상 봄처럼 꿈을 가져라고 당부했습니다. 화단의 나무에서, 연못과 들에서 움트는 대지의 새눈들이 경이로워 딸아 너도 저렇게 새로워져라고 일렀습니다. 그때가 엊그제 같은데 세월이 많이 흘렀습니다. 나는 움직이지 않고 여기 서 있는데 왔다간 건 그들입니다. 이젠 아들이 손자에게 같은 말을 전합니다. 부지런해라, 새로워져라, 꿈을 가지라고. 어머니 말씀은 그렇게 대를 이어가며 전해지겠지요 흐르는 강물처럼... 인생을 잠깐 살다가는 여름밤의 꿈이라지만, 유독 그리움만 겁을 넘습니다. 마치 태양이 헐었다는 소리를 못 들은 것처럼. 이 세상에서 생명력이 가장 길고 영원한 향기를 내는 것, 그리움이 아닐까요?. 사람은 그리움을 먹고 사는 영물입니다. 5월은 많은 생각을 부릅니다. 생각은 그리움을 키웁니다. 어머니는 내게 유독 많은 그리움을 남기셨습니다. 오늘도 연기처럼 피어오르는 그리움이 바람을 타고 산과 강을 건너 퍼집니다. 언젠가는 내가 좋아했던 공단 치마저고리를 차려입은 어머니가 저 하늘에서 내려올 것만 같습니다. 부모가 죽으면 불효한 자식이 가장 서럽게 운다지요. 내가 그렇습니다. “서방님은 어머니한테 할 만큼 하셨어요. 우리가 못했지.” 형수님은 늘 그런 말을 해도 나는 잘못한 것만 생각납니다. 그런 일들이 새록새록 살아납니다. “왜 그걸 못해드렸을까.” 아쉬움이 커지면 가슴이 시려옵니다. 떠나신 지 30년인데 지금도 어머니 소리만 들으면 가슴이 짠합니다. TV에서 어머니 얘기를 듣다 눈시울이 붉어진 적도 많습니다. 지난해 아버지 부시 대통령의 아내 바바라 여사(94)가 세상을 떠났을 때 슬픔이 이렇게 아름다운 것일 수도 있구나 생각했습니다. 유난히 숱이 많은 순백의 백발은 그녀만의 캐릭터였습니다. 다음날 뉴욕타임스에 만평 한 컷이 실렸습니다. 그림판 하나가 세계의 많은 사람들의 심금을 울린 건 흔치 않은 일입니다. 그녀의 백발은 결코 화사하지 않은 슬픔이었기 때문이죠. 병을 앓던 어린 딸이 일찍 세상을 뜨자 백발로 변한 것입니다. 얼마나 슬픔이 컸으면, 딸이 그리웠으면, 그녀의 금발을 하루아침에 백발로 만들어버렸을까?.... 그림판은 백발의 여사가 흰 날개를 달고 천성 문을 향해 나르고 있고, 반대편에서는 어린 천사가 흰 날개를 퍼덕이며 그리운 어머니를 영접하러 나오는 장면입니다. 한 컷의 그림판이 이렇게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고 감동시키는구나... 그리움이 슬픔이고 슬픔이 그리움이란 것을, 작가가 잘 포착해 낸 것입니다. 어머니가 그리운 날엔 한강에 나갑니다. 오늘같이 안개까지 내린 날이면, 강뚝에 앉아 딱히 정한 곳도 없이 강자락에 싸여 흘러온 세월을 돌아봅니다. 푸른 물 겹겹으로 가슴 휘두르며 나홀로 걸어가셨던 당신의 세상을 생각합니다. 강은 흐르다 돌에 부딪치고 바위에 깨져도 이내 한 물로 흘러갑니다. 그곳에 얼마나 많은 상처가, 아픔이, 슬픔이 있었을까요. 당신은 이 모든 것을 넉넉한 품으로 안고 가셨습니다. 눈물을 삼키시면서... 그래서 물색이 저리도 검푸른가봅니다. 오늘도 새벽처럼 찾아오시는 어머니, 담장너머 아득한 안개 속으로 문풍지 같은 나의 떨림을 들으시나요? 당신의 자리는 억겁을 두고도 돌아오지 못할 흘러간 강물이신가요?. 소설가 이관순의 손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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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5-13
  • 아빠가 미안하다, 널 몰랐구나
    며칠 전 전국 청소년 글짓기 심사를 끝내면서 갖는 유감입니다. 유한양행을 설립한 유일한 박사의 정신을 받들어 유한재단이 해마다 5월이 되면 전국 초?중?고생을 대상으로 백일장을 개최합니다. 올해로 28년째니 연륜이나 규모면에서 전국 규모로 열리는 대표적 청소년 백일장입니다. 올해는 천여 명의 청소년이 아카시아 향이 흩날리는 유한공고 교정에 모여 초?중?고별 글제에 따라 글 향기를 뽐냈습니다. 씁쓸한 것은 ‘내가 아버지라면’ 이란 글제를 놓고 중학생들이 보여준 아버지에 대한 의식 때문입니다. 글제를 택할 때 10대의 자녀들이 평소 아버지란 존재에 대해 어떤 생각을 할까? 글을 통해 아버지 상(像)을 유추해보자는 의도가 있었지요. 글제를 내면서 ‘혹시나’ 했는데, 적지 않은 학생에게서 아버지의 이미지가 긍정적이지 못함을 확인하고 말았습니다. 학생들은 아버지가 칭찬에 인색하다는데 불만이 컸습니다. “잘했네” “알았다” “수고했어.” 등과 같은 정감 없는 아버지의 말투에 아이들도 묻는 말에나 답하는 단답식 대화가 늘어남을 알 수 있었지요. 아버지의 칭찬이 있을 때도 그 뒤에 따라올 말에 신경을 쓴답니다. 때 아닌 칭찬이 의심스럽다는 눈초리죠. “그래 그건 잘했어. 그런데 넌...” 한숨까지 섞인 조언을 듣노라면 작은 희망조차 웅크려진다고 합니다. 아이들은 순수한 칭찬에 목말라합니다. 아버지의 특징으로 감정표현이 없다고 합니다. 무뚝뚝한 아버지, 어려운 아버지라고 쓴 학생이 많았습니다. 그러면서 아이들은 원합니다. 내 이름을 자주 불러주는 아빠, 사랑한다고 말해주는 아빠를 기다립니다. “이리와 봐” 식의 부름보다 격려의 부름이, 사랑의 부름이었으면 한답니다. “넌 왜 엄마를 통해서 말하지?” 아버지의 불만도 이해는 되지만 사실 자초한 면이 없지 않습니다. 평소 대화가 부족했다는 방증이지요. 아이들은 철부지가 아니었습니다. 속에 담아놓고 말을 안 할뿐, 아버지가 가족을 위해 희생한다는 걸 알고 있습니다. 아는데도 다가서기가 쉽지 않은 분일뿐이지요. 역지사지(易地思之)로 사고의 전환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자녀의 입장에서 생각해보는 그런 자세가 필요하다고 느꼈기 때문입니다. 어버이날, 친구들과 나눈 에피소드입니다. 어버이 날이라고 아들이 전화를 했을 때, 예전에 우리는 첫마디를 이렇게 말했지요. “그래 나다. 기다려 엄마 바꿔줄게” 아들이 그게 아니고요 하면 “벌써 돈 떨어졌냐?” 그래도 아들이 용기를 내 ‘아버지 사랑합니다’라고 말할 때의 대답은 더 걸작입니다. “미친 놈, 뚱 단지 같긴!” 옛날 자신들의 모습을 떠올리며 파안대소했습니다. 자식의 마음을 알면서도 멋대가리 없는 말을 했다고. 따지고 보면 그렇게 큰 아들이 지금의 아빠들입니다. 대를 이어 배워온 언어의 관습이 그렇다면, 누구를 탓할 입장도 아니지요. 대화도 훈련이 되지 않으면, 끊기고 단절되기 싶습니다. 대화의 부족이나 불만은 그것으로 끝나지 않고 정서적 불만으로 이어집니다. 갈수록 멀어지는 아버지, 외톨이가 되는 아버지는 어쩌면 현대사회가 만든 자화상일지 모릅니다. 피곤에 절어 밤늦게 퇴근하고 새벽처럼 나가는 아버지... 가뜩이나 어려워진 자영업자 아버지... 그 침통함이 무의식중에 그렇게 비춰진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버지의 노고에 감사하면서도 강한 이미지 때문에 접근하기가 쉽지 않은 이유입니다. 아이들은 크면서 아버지가 힘없는 존재라는 것을 압니다. 엄마가 자녀들과 대화를 독점하고 있을 때 혼자서 담배를 피우는 모습이 쓸쓸해 보였다고 합니다. “나 요즘 힘들다”고 엄마에게 말할 때는 아버지 어깨를 누르는 책임감도 느껴졌답니다. 좋은 세상이 된 줄 알았는데 예나 지금이나 아버지란 존재가 외롭기는 마찬가지인 듯합니다. 사람은 태어난 후 ‘아빠, 엄마‘ 로 부르며 성장기를 보내다가 때가 되면 ’아버지 어머니‘로 바꿔 부르기 시작합니다. 멀리 이스라엘에서도 같은 호칭을 사용한다고 해 놀랐습니다. 기독교100주년기념교회를 담임하다 정년퇴임하고 거창으로 내려간 친구 이재철 목사가 전하는 말입니다. 이스라엘을 갔을 때, 누가 아빠하고 뒤에서 부르더랍니다. 깜짝 놀라 돌아보니 이스라엘 아이가 자기의 아빠를 부르는 것이었습니다. 같은 뜻의 어휘지만 ’아빠‘와 ’아버지‘는 의미가 사뭇 다릅니다. 아빠는 아버지를 뜻하는 아람어고, 아버지는 역어인 헬라어입니다. 아빠로 불리는 아버지는 자식에게 무한책임을 지지만, 아버지로 부르는 아들은 부모를 섬기는 모습을 뜻합니다. 그런 역할과 기능이 어휘에 담긴 거지요. 지금은 자녀들에 대해 무한책임을 지는 아빠의 자리에 있습니다. 모든 헌신으로 아이들을 키우지만, 어느 날이 되면 아버지의 자리로 옮겨 앉아야 합니다. 그 과정이 아름다우려면 아버지가 자녀들과의 대화에 새로운 눈을 떴으면 합니다. “아빠가 미안하다. 네 맘을 헤아리지 못해서”라는 생각으로. 소설가 이관순의 손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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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5-07
  • 음악은 천상의 소리
    밤바람이 선득한 주말. 저녁을 먹고 장자호수공원으로 산책을 나섰습니다. 사람들이 오가는 사이로 청아한 색소폰 연주음이 들려옵니다. 발길이 절로 이끌려 간 곳엔 한 분이 ‘셀프 콘서트’를 열고 있네요. 잔디밭에 앉아 연주가 끝날 때마다 박수를 칩니다. 연주력이 준수한데다 가을밤의 정취까지 더해져 색소폰 선율에 젖는 아름다운 가을밤을 즐겼지요. 음악은 사랑을 전하는 신의 소리라고 합니다. 모든 사람을 하나로 묶어 주지요. 음악은 연주자의 기쁨도 되지만 만인의 즐거움도 됩니다. 연주가의 재능을 부럽게 바라본 영화가 있습니다. ‘어거스트 러쉬.’ ‘음악은 사랑을 낳고 사랑은 운명을 부른다.‘는 말이 잘 어울린 영화지요. 밴드 싱어이자 기타리스트인 루이스와 촉망 받는 첼리스트 라일라의 보석보다 반짝였던 단 하루 밤 이후, 남자는 그녀를 한 번도 잊은 적 없고, 여자는 얼굴도 모르는 낳은 아이에 대한 그리움을 놓은 적이 없지요. 이들의 믿음 하나는 “음악이 있는 한 우리는 다시 만날 거야”라는 것. 부모의 DNA를 받은 아이는 일찍부터 놀라운 음악적 재능을 보입니다. 시설에서 자란 11세의 소년은 부모만이 자신의 음악을 알아볼 수 있다는 믿음 하나로 뉴욕을 찾아갑니다. 모든 게 신비한 뉴욕. 도시가 만드는 수많은 소리들이 소년의 청각에 음계로 포착됩니다. 소년은 아이들을 모아 거리에서 노래를 시키는 워저드를 만나 어거스트란 이름으로 거리 연주자로 등장해 천부적인 실력을 보입니다. 하루는 소리에 끌려 교회 합창단 연습장에 들렸다가 처음 보는 오선지와 오르간 앞에서 작곡하고 연주하는 놀라운 재능을 발휘합니다. 이를 지켜본 목사님이 줄리어드에 음악천재로 추천합니다. 줄리어드에서 사모곡 라프소디를 작곡해 주위를 놀라게 한 어거스트. 마침내 뉴욕필하모니 콘서트에 특별 출연자로 초청됩니다. 줄리어드 출신의 유명 첼리스트(엄마)와 함께. 하지만, 연주회를 앞두고 위기가 오죠. 워저드가 연습장에 나타나 아버지라며 친권을 주장하고 데려갑니다. 학교는 간곡히 연주회만큼은 보내달라고 부탁을 하지만 거절당하죠. 금관악기가 아이의 영혼을 뽑는다는 그릇된 인식으로... 다시 광장 연주에 나서는 어거스트. 부근을 지나던 루이스가 소리에 홀려 찾아오고, 금세 호흡을 맞추더니 황홀한 기타 2중주를 펼칩니다. 어거스트가 오늘 밤 있을 센트럴파크 공연을 알려주지만, 루이스는 귀에 담지 않고 “용기를 잃지 말라”는 말만 주고 떠납니다. 그날 밤, 어거스트는 친구의 도움으로 탈주에 성공해 연주장으로 달려가고, 지방공연에 나서던 루이스는 뉴욕 중심가에서 아이 얼굴이 나온 배너광고를 보지요. 전율을 느낀 그도 차를 버리고 연주회장으로 내달립니다. 환호 속에 첼로 연주를 끝낸 라일라가 아이를 생각하며 공원을 빠져나올 때, 줄리어드 총장이 특별초청 지휘자를 소개합니다. 무대에 등장하는 어거스트. 환호하는 청중... 놀라운 자작곡이 그의 지휘 속에 연주를 시작합니다. 밖을 향하던 라일라가 연주음에 끌려 뒤돌아서고, 또 반대편에서는 황홀한 눈빛의 루이스가 나타납니다. 마침내 무대 앞에 이르러 12년 만에 마주 서는 남과 여... 환희의 포옹을 할 때 지휘하는 아이의 모습이 비칩니다. 세상에는 수많은 소리들로 가득 차 있지요. 귀를 기울인 만큼 들리기도 하고 지나치기도 합니다. 끊임없이 들리는 세상의 소리를 옮겨 작곡하고 연주하는 음악천재가 말하죠. “아이들이 동화를 믿듯 저는 음악을 믿어요. 부모님이 살아계신다면 제 음악을 꼭 듣게 될 거야요.” 어거스트의 간절한 믿음처럼 나는 어떤 믿음을 확신하며 살고 있나요? 글 이관순(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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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4-29
  • 내 앉아있는 자리
    스산한 바람에 비까지 흩뿌리니 단풍은 지고 낙엽만 우수수 쌓입니다. 이렇듯 나무도 꽃도 지상의 모든 생명들이 사이즈를 줄이는 시기입니다. 그것이 한 주기의 마지막 겨울을 상대하는 지혜입니다. 사람이 나이가 든다는 것 또한 사이즈를 줄이는 것으로 시작됩니다. 몸집이 줄고, 먹는 게 줄듯 이것이 절제의 근본이며 이치입니다. 세상에 나올 때 작게 나왔으니 돌아갈 때도 비우고 작게 돌아가야 합니다. 여기에는 실상과 허상이 공존하지만 스스로 말수를 줄이고, 욕심도 미움도 줄이고, 자랑, 명예 같은 덧없는 것은 날려야 합니다. 그래야 사이즈가 줄지요. 루디 세네카는 “인간은 마치 시간이 모자란다고 불평하면서, 마치 시간이 무한정인 것처럼 행동한다.”고 사람의 어리석음을 비꼬았지요. 그런데 사람은 이를 알면서도 어제의 습관을 오늘도 고집하고 삽니다. 친구가 많다고 자랑하시나요? 바쁜 것을 미덕으로 생각하셨나요? 그보다는 흉금을 터놓고 말할 한 사람의 친구가 더 소중한 때입니다. 친구도, 만남도, 분주함도 지혜롭게 줄여가는 것이 노년의 삶을 가볍게 하고 실수를 줄이는 방법입니다. 우리 몸은 수분이 80% 이상이라고 하죠. 비슷한 비율로 우리 삶을 주장하고 있는 것이 말입니다. 그만큼 물과 말은 몸을 유지하고 삶을 구성하는 중요한 요소입니다. 그래서 절제를 말할 때 가장 먼저 꼽는 게 말입니다. 내가 살면서 토해낸 말을 양으로 계측한다면 얼마나 될까. 그중 꼭 필요했던 말은 얼마쯤 일까. 이제는 할 말 못할 말, 안 해도 좋을 말, 상처 주는 말을 가려가며 했으면 합니다. 내뱉은 말은 흘러간 세월처럼 돌릴 수 없으니... 그래서 이랬으면 좋겠습니다. “이제는 많이 들어주자. 듣는 귀는 8로 열고 말하는 입은 2로 줄이자. 남이 말할 때 자르지 말자. 중간에 끼어들지 말자. 말 줄기를 돌리지 말자.” 비위 상한다고 파르르, 욱, 버럭 하는 감정도 이젠 삭혀 없애야 합니다. 행여 그런 상황이 되면 심호흡 한 번으로 날려버리세요. 대신 많이 웃어주면 좋겠습니다. 상대가 가족, 친구, 이웃, 누구든 만나면 웃는 것으로 말문을 열어요. 나이가 들면 웃는 근육도 굳는다는데, 얼굴에 웃음기마저 빠지면 노인 특유의 표정 없는 일그러진 인상만 남아요. 나이가 든다는 것은 옻칠을 더하는 것처럼 윤을 내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미움이나 시기, 질투는 다 헛된 뜬구름이지요. 뜬구름을 좇다가 낯선 곳에 서 있는 나를 발견하는 건 아픈 일입니다. 살고 있는 이날, 앉아 있는 이 자리가 내가 족해야 할 자리임을 아는 사람은 행복합니다. 이 나이에 맘대로 못할 게 뭐야. 하지만 나이가 들수록 남을 배려하며 사는 인생이 아름답습니다. 살아보니 ‘역지사지(易地思之)’ 이상의 스승은 없더군요. 사서삼경이 대단한 게 아니라, 상대편 입장을 늘 먼저 헤아리면 그것이 상선의 절제입니다. “오죽했으면... 그래 저럴 수 있겠다... 나도 그 입장이면... 저도 사람인데.” 글 이관순(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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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4-22
  • 너도 죽는다‘메멘토 모리’
    말에는 묘한 힘이 있어 곱씹을수록 향기를 내는 말이 있고, 겸손함을 가르치는 말도 있지요. 라틴어는 그런 철학적 의미를 함의한 말과 글이 꽤 많습니다. 언젠가의 기억입니다. KBS TV '도전 골든벨‘에서 최후 1인이 된 학생에게 50번 마지막 골든벨 문제가 주어집니다. “고대 로마에서 승리를 쟁취한 장군이 개선행진을 할 때 주위에서 외쳤던 라틴어는?“ “메멘토 모리" 영예의 골든벨이 울리는 짜릿한 순간을 지켜보았지요. 다소 생소한 라틴어 '메멘토 모리(memento mori)'는 '죽음을 기억하라‘는 뜻입니다. 유래는 로마 공화정의 개선식으로 거슬러 올라가요. 개선식은 전쟁에서 승리한 장군에게 주어지는 영예입니다. 개선장군은 관습에 따라 전차를 타고 퍼레이드를 벌입니다. 영웅이 탄 마차가 시민의 환호 속을 헤치고 행진하는 동안 뒤에서 노예들이 큰소리로 외쳐댑니다. 메멘토 모리! 메멘토 모리! “오늘은 개선장군이지만 너도 언젠가는 죽는다. 겸손하게 행동하라.” 승리에 도취된 장군에게 본분을 잊지 않도록 경각심을 주는 장치인 셈이죠. 로마 최고의 환대 속에서도 너는 신이 아닌, 한 인간일 뿐임을 알린 것입니다. 메멘토 모리에는 세 가지 철학적 가치가 내재되어 있습니다. ‘죽음을 기억하라. 운명을 사랑하라. 현재에 충실하라.’ 이 셋은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도 적용되는 훌륭한 교훈입니다. 스티브 잡스도 스탠퍼드대 졸업식 축하 연설에서 이를 강조했습니다. 췌장암 투병으로 힘든 시기를 보내던 그는 ‘죽음은 삶이 만든 최고의 발명품‘이라고 격찬합니다. 그러므로 제한된 인간의 시간을 다른 누군가의 인생을 살 듯 낭비하지 말고 자신을 믿고 집중하라고 졸업하는 학생들에게 말합니다. 뜻이 통하는 라틴어에 ‘카르페 디엠(carpe diem)'이 있습니다. 몬래 이 말은 신을 공경하고 오만해지지 말라는, 현재를 가치 있게 살라는 뜻인데 이후 기독교 영향을 받아 현세의 부귀나 영화의 부질없음을 알립니다. 우리에게도 ‘화무십일홍’이란 말이 있죠. 열흘 가는 붉은 꽃이 없다는 이 말엔 ‘한 번 흥한 것은 반드시 쇠한다.’ 는 속뜻을 지닙니다. 트로트 가수 김연자가 불러 유명한 노래 ‘아모르 파티’도 같은 말입니다. 사랑을 뜻하는 아모르와 운명을 뜻하는 파티가 합성된 라틴어로 이 또한 ‘운명을 사랑하라’는 말이지요. 인간이 가져야 할 삶의 태도로 철학자 니체가 처음 사용했습니다. 메멘토 모리는 미국 남서부에 거주해온 나바호족에서도 찾을 수 있어요. 그들은 “네가 세상에 울면서 태어날 때 세상은 기뻐했으니, 네가 죽을 때 세상은 울어도 너는 기뻐할 수 있도록, 그러한 삶을 살아라.”는 의미심장한 철학을 닮고 있습니다. <메멘토 모리>, <카르페 디엠>, <아모르 파티>, <화무십일홍>까지 모두 겸손한 삶을 가르칩니다. 제한된 시간을 사는 인생에게 죽음을 기억하고, 운명을 사랑하고, 오늘에 충실하라.... 이보다 더 삶을 성찰하게 하는 말이 또 있을까 싶습니다. 글/ 이관순(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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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4-15
  • 의리가 사라진 세상
    짓궂은 질문을 해봅니다. ‘사람’과 ‘인간’은 같은 거야? 사전의 설명은 비슷 하지만, 아무래도 “저 인간!” 하면 부정적 이미지가 앞서죠. “저 사람 인품이 좋아”로는 써도 “저 인간 인품이 좋다”고 말하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세상에 사람 같지 않은 인간이 많다보니 용례까지 헷갈립니다. 초등학교 국어 교과서의 ‘의좋은 형제’를 생각하면 지금도 마음이 훈훈합니다. 우애 좋은 형제가 가을 수확을 마치고 들판에 볏단으로 노적가리를 만듭니다. 형이 보니 아우네 것이 적어 보입니다. 그날 밤, 어려운 아우 형편을 안 형이 자신의 볏단을 옮겨 놓고, 다음날 밤은 식솔 많은 형을 생각한 아우가 반대로 볏단을 옮기지요. 노적가리가 줄지 않자 형제 다 고개를 갸우뚱합니다. 마침내 볏단을 옮기던 형제가 달빛 아래 마주치면서 얘기는 끝나죠. 그때의 감동으로 습자시간이면 붓글씨를 ‘노적가리 풍년일세’만 썼던 기억이 납니다. 가난해도 마음은 풍년인 사람들이 살던 시절이 있었지요. 엊그제 복권 당첨금이 살인흉기가 된 사건이 났습니다. 우애 좋은 형제가 복권 당첨으로 수억 원의 당첨금을 받아 배분까지는 성공했는데, 그 돈으로 사업을 했던 형이 망하며 사단이 납니다. 돈을 더 요구하는 형과 보증을 선 동생 간에 감정이 충돌하다 동생을 살해하는 일이 벌어진 겁니다. 황금만큼 요괴스러운 것은 없습니다. 돈 앞에 장사가 없다지요. 일본 속담에 ‘담배꽁초와 돈은 쌓일수록 냄새가 난다’고 했습니다. 돈이 사람을 부패하게 만든다는 뜻이겠지요. 사는 것은 전보다 풍족해도 인성은 강퍅해졌습니다. 돈을 둘러싼 이기적 욕망이 칼끝처럼 첨예하게 부딪치는 세상입니다. 개신교의 큰 어른이셨던 목사님이 생전에 우리교회에 오셔서 당신이 붓으로 큼직하게 쓴 ‘의리를 지키자’란 글귀를 강단에 내리고 설교를 하신 적이 있습니다. 세상이 오죽하면 의리를 부탁했을까요. 사람과 사람,관계 사이에 의리가 사라졌다고 탄식하는 소리가 높아만 집니다. 제목을 잊은 영화입니다. 세 친구가 딱 한 번 은행을 털어 깨끗하게 살자며 치밀한 준비를 합니다. 그들의 거사는 성공했고 무사히 안전지대에 도착하자 돈다발을 놓고 환호합니다. 한 친구가 축배를 들자며 나갔다가 술에 독을 타서 옵니다. 욕심이 생긴 거죠. 태연하게 돌아온 친구가 술잔을 건네고 축배를 외칠 때, 팡팡! 술 사온 친구가 고꾸라지고 남은 둘은 낄낄댑니다. 뛰는 놈 위에 나는 놈이 있거든요. 둘은 더 큰소리로 건배를 외치지만 독배를 든 이들도 쓰러집니다. ‘사람에게 의리 빼면 시체’ 라고 말하던 세상이 있었지요. 의리란 뜻은 ‘사람관계에서 마땅히 지켜야 할 도리’로, 여기엔 사람이 갖춰야 할 덕목이 다 녹아져 있죠. 가난은 견뎌내기 어려운 것임을 경험한 세대가 모이면 그래도 그때가 좋았다고 반추합니다. 의리가 사라진 곳에 먹잇감을 놓고 으르렁 대는 동물세계가 어른댑니다. 사람 사이 흐르는 체온 대신 물질을 향한 충혈 된 눈빛만 섬뜩하니 사람은 없고 인간만 남아 보입니다. 다시 사전을 봅니다. ‘인간’이란 단어의 기본설명 뒤로 ‘사람의 모습은 하고 있되 사람답지 못하다는 뜻.’을 추가하고 예문도 달았군요. “저 인간이 한 짓을 생각하면 돌아버리겠어.” 너무도 흔히 듣는 슬픈 말이 됐습니다. 글 이관순(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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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4-08
  • 의리가 사라진 세상
    짓궂은 질문을 해봅니다. ‘사람’과 ‘인간’은 같은 거야? 사전의 설명은 비슷 하지만, 아무래도 “저 인간!” 하면 부정적 이미지가 앞서죠. “저 사람 인품이 좋아”로는 써도 “저 인간 인품이 좋다”고 말하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세상에 사람 같지 않은 인간이 많다보니 용례까지 헷갈립니다. 초등학교 국어 교과서의 ‘의좋은 형제’를 생각하면 지금도 마음이 훈훈합니다. 우애 좋은 형제가 가을 수확을 마치고 들판에 볏단으로 노적가리를 만듭니다. 형이 보니 아우네 것이 적어 보입니다. 그날 밤, 어려운 아우 형편을 안 형이 자신의 볏단을 옮겨 놓고, 다음날 밤은 식솔 많은 형을 생각한 아우가 반대로 볏단을 옮기지요. 노적가리가 줄지 않자 형제 다 고개를 갸우뚱합니다. 마침내 볏단을 옮기던 형제가 달빛 아래 마주치면서 얘기는 끝나죠. 그때의 감동으로 습자시간이면 붓글씨를 ‘노적가리 풍년일세’만 썼던 기억이 납니다. 가난해도 마음은 풍년인 사람들이 살던 시절이 있었지요. 엊그제 복권 당첨금이 살인흉기가 된 사건이 났습니다. 우애 좋은 형제가 복권 당첨으로 수억 원의 당첨금을 받아 배분까지는 성공했는데, 그 돈으로 사업을 했던 형이 망하며 사단이 납니다. 돈을 더 요구하는 형과 보증을 선 동생 간에 감정이 충돌하다 동생을 살해하는 일이 벌어진 겁니다. 황금만큼 요괴스러운 것은 없습니다. 돈 앞에 장사가 없다지요. 일본 속담에 ‘담배꽁초와 돈은 쌓일수록 냄새가 난다’고 했습니다. 돈이 사람을 부패하게 만든다는 뜻이겠지요. 사는 것은 전보다 풍족해도 인성은 강퍅해졌습니다. 돈을 둘러싼 이기적 욕망이 칼끝처럼 첨예하게 부딪치는 세상입니다. 개신교의 큰 어른이셨던 목사님이 생전에 우리교회에 오셔서 당신이 붓으로 큼직하게 쓴 ‘의리를 지키자’란 글귀를 강단에 내리고 설교를 하신 적이 있습니다. 세상이 오죽하면 의리를 부탁했을까요. 사람과 사람,관계 사이에 의리가 사라졌다고 탄식하는 소리가 높아만 집니다. 제목을 잊은 영화입니다. 세 친구가 딱 한 번 은행을 털어 깨끗하게 살자며 치밀한 준비를 합니다. 그들의 거사는 성공했고 무사히 안전지대에 도착하자 돈다발을 놓고 환호합니다. 한 친구가 축배를 들자며 나갔다가 술에 독을 타서 옵니다. 욕심이 생긴 거죠. 태연하게 돌아온 친구가 술잔을 건네고 축배를 외칠 때, 팡팡! 술 사온 친구가 고꾸라지고 남은 둘은 낄낄댑니다. 뛰는 놈 위에 나는 놈이 있거든요. 둘은 더 큰소리로 건배를 외치지만 독배를 든 이들도 쓰러집니다. ‘사람에게 의리 빼면 시체’ 라고 말하던 세상이 있었지요. 의리란 뜻은 ‘사람관계에서 마땅히 지켜야 할 도리’로, 여기엔 사람이 갖춰야 할 덕목이 다 녹아져 있죠. 가난은 견뎌내기 어려운 것임을 경험한 세대가 모이면 그래도 그때가 좋았다고 반추합니다. 의리가 사라진 곳에 먹잇감을 놓고 으르렁 대는 동물세계가 어른댑니다. 사람 사이 흐르는 체온 대신 물질을 향한 충혈 된 눈빛만 섬뜩하니 사람은 없고 인간만 남아 보입니다. 다시 사전을 봅니다. ‘인간’이란 단어의 기본설명 뒤로 ‘사람의 모습은 하고 있되 사람답지 못하다는 뜻.’을 추가하고 예문도 달았군요. “저 인간이 한 짓을 생각하면 돌아버리겠어.” 너무도 흔히 듣는 슬픈 말이 됐습니다. 글 이관순(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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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4-04

실시간 기고 기사

  • 그때 왜 그랬어요
    코로나로 격리를 당할 때처럼 맹랑하고 황당한 적이 없었다. 2년 전 2주간의 자가 격리를 강제당하면서 느낀 감정이 그랬다. 크게 아프지도 않은 몸을 생으로 묶이면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란 살아온 날들을 돌아보는 것이었다. 지난날 나도 꽤나 헤매고 살았다. 본래 인간은 헤매는 것이라지만, 헤매도 방향을 잡아 제대로 헤맸으면 좋았을 텐데, 그러지 못한 게 많았다. 후회되는 일들은 모조리 하지 못한 것에 있었다. 실수를 할까 봐 포기하고, 실패할까 봐 망설였고, 그러다 때를 놓치기도 했다. 가족 부양이란 책임 때문에 여건이 받혀주지 못한 것도 있었다. 인생을 한 걸음씩 확실히 딛고 나갔어야 했는데, 어느 날 언제 여기까지 왔나 싶어 돌아보니 여러 풍경이 엇갈려 보였다. 내가 몰랐던 것, 간과했던 것, 알고도 못한 것들이 어쩌면 그렇게 생살처럼 차오를까? 후회감이 고요한 마음을 휘저었다. “그땐 그랬었지.”, “그래, 그런 적도 있고.” “그땐 천둥벌거숭이일 때였으니까….” 까맣게 잊힌 일들이 영화 필름처럼 풀려 돌아갔다. 나 홀로 집에 있던 그날, 심심파적으로 떠오르는 후회스러운 일들을 적어보았다. 두어 시간 동안 떠올린 것이 서른 개가 넘었다. 미래와 연관된 일이 열넷으로 가장 많았고, 주택문제가 일곱으로 뒤를 따랐다. 나머지도 대부분 사람 관계에서 벌어진 일들이 주를 이루었다. 나름 명분이야 다 있지만 그래도 안 한 것보다는, 길을 잘못 들더라도 시도했었으면 좋았을 것이라는 아쉬움이 남았다. 완벽하게 하려다가 포기하는 것보다 헤매더라도 하는 것이 낫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코로나로 2년 반을 맹하게 소진하고 지난여름, 부산에서 옛 친구를 만났다. 해운대와 자갈치 시장을 들려 저녁을 먹으면서 긴 시간을 친구와 함께 했다. 그리고 친구와 헤어져 호텔로 향하다 밤바다에 흐르는 네온 불빛을 보았다. 바다 건너 영도 쪽에서 나오는 불빛이었다. 불빛에 이끌려 시장 앞 광장에서 빛이 흐르는 밤바다를 바라보았다. 밤물결 위로 찰랑이는 저 불빛…. 영도 앞바다에 떠있는 것은 일곱 자로 된 한 문장이었다. ‘그때 왜 그랬어요.’ 영롱하고 명징한 문장이 나를 향하고 있었다. 자력에 끌리듯 마음이 도리질을 했다. 수면 아래 깊은 곳에 묻고 봉인해 둔 것들이 들썩였다. 섣불리 물에 손을 뻗었다가 파도를 일으킬까 봐 후회는 후회대로 아픔은 아픔대로 묻어두었는데, 문장이 내뿜는 파장에 회한의 그림자가 영도의 불빛을 타고 흘렀다. “당신을 잘 모르겠어요.” “그때 왜 그러셨어요?” “그전엔 안 그랬잖아?” 아내가 묻고, 아들이 묻고, 지금은 저 세상 사람이 된 친구가 물어왔다. 해운대를 다녀간 사람마다 저 물음 앞에 섰으리라. 떠난 사람에 대해, 실패한 일에 대해, 깨진 우정에 대해, 누구는 부모님을 떠올리고 자식을 떠올리고, 먼저 떠난 아내를 생각하면서 무수한 상념으로 갈래를 쳤겠지. 어느 시인은 인생에서 가장 슬픈 세 가지를 ‘할 수 있었는데’, ‘해야 했는데’, ‘하지 말았어야 했는데’로 표현했다. 그날 밤 나는 이 세 가지 슬픈 대답을 번갈아 할 수밖에 없었다. 후회스러운 것들이 이 셋과 연결돼 있어서였다. 인생을 잘 살아도 못 살아도 회한은 남는다. 굳이 성공한 삶을 따진다면, ‘때를 지켜 잘 사는 사람이 성공한 삶’이라고 생각한다. 잘 산다는 것은 그런 것 아닐까. 내가 어느 때를 지나는 지를 알고 그때를 자기 다움으로 잘 살아내는 것. 꽃이 때를 찾아 피듯이, 때를 지켜 산다는 것만큼 중요한 일이 어디 있을까. 모든 후회나 회한은 때를 잊거나 지키지 못한 데서 시작된다. 성경 말씀처럼 심을 때와 거둘 때, 세울 때와 허물 때, 만날 때와 헤어질 때가 있다 했듯이. 이 시대의 아픔은 모든 세대가 자기 때를 지켜 자기다움으로 살지 못하는 데 있다. 젊은이가 꿈을 상실하고 세상 눈치나 슬슬 본다거나, 장년은 장년다움을 깨치지 못하고 박약하거나 맹종으로 자존감을 잃어가고 있다. 그러면서 한 번뿐인 때와 기회를 훅 날리면 인생의 ‘화양연화(花樣年華)’는 깃들 곳이 없게 된다. 나이가 든다는 것은 잘 익어간다는 것이고, 잘 익는다는 것은 성숙해진다는 의미이다. 누구는 나이가 든다는 것을 옻칠을 더하는 것이라고 은유했다. 옻칠은 더할수록 내면의 빛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노년이 되면 종종 허무감에 젖을 때가 있다. 이룬 것이 없으면 허망한 생각이 더 빈번해지고, 마땅히 할 일까지 없으면 삶이 쓸쓸하고 우울하다. 이렇게 마음에 그늘이 들기 시작하면 절망에 이르는 병도 찾아든다. 노년의 생은 이런 것으로 이어져야 하는가? 그렇지는 않다. 생각을 바꾸면 보이지 않던 것이 보이고 잊혔던 것들이 살아나면서 출구를 찾을 수 있다. 나이가 들면 든 대로 때가 있고 삶이 있다. 나이가 들어서 내가 주인이라는 행세를 하려고 하면 할수록 몸은 더 지치고 고달파진다. 세상의 주인 된 삶은 후대에 내주고 나는 그들을 돕는 수단이기를 자원하거나, 누군가의 기쁨이 되는 존재로 나서는 것이 지혜로운 삶이다. 나이가 들수록 생의 보람을 나에게서 찾지 말고, 누군가의 필요한 존재가 되어 줄 때, 삶의 기쁨과 자존감을 끌어올릴 수 있다. 부산 밤바다에서 일렁이던 그 문장. 진짜 내가 그때는 왜 그랬을까? 채워지지 않는 일상의 공허를 가진 사람이라면 이곳에서 흔들려 보시라. 비린내와 소금기를 머금은 바닷바람과 늙은 거리악사가 연주하는 ‘돌아와요 부산항에’ ‘굳세어라 금순아’ 같은 애절한 선율을 들으면서…. 어둠이 깔리는 남포동 밤바다에서 자신을 돌아보는 시간을 갖는 것도 부산이 주는 낭만이다. 누군가에게 아픈 상처를 남겼을 이들에게는 반성의 시간이 되고, 원망과 미움을 키운 사람들에게는 용서와 화해의 시간이 될 수 있겠다. 영국의 철인 데이비드 흄의 말처럼 ‘사물의 가치는 생각하는 사람의 마음에 있다’라는 것을 깨닫는다면, 바다를 떠날 때쯤 긍정적이고 희망찬 문장 하나쯤 건질 수도 있으리. -소설가/ daum cafe 이관순의 손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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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10-10
  • 놀고 있는 햇볕이 아깝다
    놀고 있는 햇볕이 아깝다는 말씀을 아는가 이것은 나락도 다 거두어 갈무리하고 고추도 말려서 장에 내고 참깨도 털고 겨우 한가해지기 시작하던 늦가을 어느 날 농사군 아우가 무심코 한 말이다 어디 버릴 것이 있겠는가 열매 살려내는 햇볕, 그걸 버린다는 말씀이 당치나 한가 햇볕이 아깝다는 말씀은 끊임없이 무언가 자꾸 살려내고 싶다는 말이다 모든 게 쓸모가 있다 버릴 것이 없다 아 그러나 나는 버린다는 말씀을 비워낸다는 말씀을 겁도 없이 지껄이면서 여기까지 왔다. 욕심을 버려야 보이지 않던 것이 비로소 보인다고 안개 걷힌다고 지껄이면서 여기까지 왔다 아니다 욕심도 쓸모가 있다 햇볕이 아깝다는 마음으로 보면 쓸모가 있다 세상엔 지금 햇볕이 지천으로 놀고 있다 햇볕이 아깝다는 뜻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사람아 사람아 젖어 있는 사람들아 그대들을 햇볕에 내어 말려라 햇볕에 말려 쓰거라 끊임없이 살려 내거라 햇볕이 스스로 제가 아깝다 아깝다 한다 산문시의 일가를 이룬 정진규 시인의 ‘놀고 있는 햇볕이 아깝다’를 읽고 또 읽습니다. 입 안에 쌉쌀한 맛이 돕니다. 그리고 내다본 베란다 창밖으로 긴 장마에 짓무른 하늘이 파랗게 열리고 쏟아지는 투명한 햇살이 눈부십니다. 공기만큼 흔한 햇볕을 두고 ‘아깝다’는 표현을 거푸한 저 시어(詩語)는? 인간의 게으름을 탓하는 것일까. 어리석음을 나무라는 것일까. 코로나 팬데믹을 놓고, 광복절 기념사를 놓고, 법무장관을 둘러싼 싸움에 여념없는 여의도 사람들, 그들은 햇볕에 관심조차 없어요. 물에 잠겼던 논밭을 건수하랴, 무너진 집을 복구하랴, 가재도구 씻고 젖은 옷가지를 말리랴... 한줌의 햇볕과 한 뺨의 시간이 아까운 때입니다. 장독도 열어놓고 이불도 널고 눅눅한 책들도 꺼내 포쇄하는 데, 사람만 젖은 몸을 말릴 줄 몰라 해요. 열매 살려내는 햇볕, 곰팡이를 말리는 햇볕, 그 귀한 것을 버리고 있다니 당치도 않다는 얘기입니다. 지천에 놀고 있는 것이 햇볕인데 아깝다고 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그러면서 욕심을 버려야 한다고, 마음을 비워야 한다고, 시부렁대면서 살진 않느냐고 묻습니다. 경험한 사람만이 생명을 살리는 햇볕이 귀한 줄을 압니다. 시의 마지막 구절은 놀랍게도 죽비처럼 어깨를 때립니다. “사람아사람아 젖어 있는 사람들아 그대들을 햇볕에 내어 말려라 햇볕에 말려 쓰거라 끊임없이 살려 내거라 햇볕이 스스로 제가 아깝다아깝다 한다” 정진규 시인은 ‘몸시’ ‘알시’ 같은 특유의 시 세계를 열었습니다. 시인과는 3년간 같은 직장 같은 부서에서 일한 인연이 있어요. ‘마른 수수깡의 평화’ ‘들판의 빈집이로소이다’ 같은 초기 시집을 내던 때입니다. 이후로 ‘현대시학’의 주간을 25년간 맡아 시단 발전과 신인 육성에 많은 힘을 쏟았습니다. 여기서 그의 시 하나 더 ‘서서 자는 말’을 봅니다. 내 아들은 유도를 배우고 있다 이태 동안 넘어지는 것만 배웠다고 했다 낙법만 배웠다고 했다 넘어지는 것을 배우다니! 네가 넘어지는 것을 배우는 이태 동안 나는 넘어지지 않으려고 기를 쓰고 살았다 한 번 넘어지면 그뿐 일어설 수 없다고 세상이 가르쳐 주었기 때문이다 잠들어도 눕지 못했다 나는 서서 자는 말 아들아 아들아 부끄럽구나 흐르는 물은 벼랑에서도 뛰어내린다 밤마다 꿈을 꾸지만 애비는 서서 자는 말 2년 동안 아들은 넘어지는 연습만 하고, 아버지는 서 있는 연습만 했다는 대칭이 마음에 끌질을 합니다. 넘어지지 않으려고 기를 쓰고 살아온 아버지는 이 세상 모든 아버지의 초상이겠지요. 잠들어도 눕지 못하고 서서 자는 말의 일생이 아버지의 회한과 닮았습니다. 그래도 잘 넘어지는 것이 잘 일어나는 이치를 터득한 아들을 두었으니 위안입니다. 사람은 떠나야 그리움이 커지나 봐요, 시인의 3주기(9.28)가 눈앞입니다. (글 이관순 소설가/daumcafe/ leeletter) 1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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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10-06
  • 몽골평원에서 휴식을 취하는 낙타떼
    내 지인은 몽골의 별밤을 회상할 때, 그 어느 때보다 향수에 젖습니다. "난 혼자서 몽골 어디든 찾아다닐 수 있다. 몽골의 자연은 참으로 아름답다. 진정으로 몽골을 알려면 초원이 부르는 바람소리를 들어야 한다.” 그는 유하의 시 ‘어느 날 내가 사는 사막으로’ 를 이렇게 변주했어요. ?나 어느 날 내가 사는 초원으로 빗방울처럼 그대가 오리라. 그러면 전갈들은 꿀을 모으고, 낙타의 등은 풀잎 가득한 언덕이 되고, 햇빛아래 모래알들은 빵으로 부풀고 독수리의 부리는 썩은 고기 대신 꽃가루를 탐하리 ...어느 날 나의 초원으로 그대가 오면, 지평선과 하늘이 입맞춤하는 곳에서 나 그대를 맞으리라.? 승마여행 중에 만난 초원의 무지개와 신비의 구름과 바람들. 광야에 핀 꽃들. 나그네의 발길을 멈추게 하는 노을, 이 모두가 소리 내어 나를 찾는 곳. 그곳으로 속히 돌아가고 싶다는 그 소망이 찬란한 슬픔의 봄 같았어요. “줄이고 또 줄여본다. 견디고 또 견뎌본다. 그러나 답은 없다. 접어야 할지 말지. 이 현실이 어지럽다. 성을 쌓는 자 망하고, 길을 내는 자 흥한다. 이동이 곧 우리의 미래인데. 어느 날 그 이동이 막혀버렸다. 하늘길, 땅길, 물길도 모두. 텅 빈 인천국제공항에서 인간의 역사가 멈춤을 보았다.” 오늘은 17년간 몽골 초원을 함께 달린 낡은 모자 사진도 올렸습니다. 그의 글을 보다 ‘징기스칸’을 읽으며 밑줄을 쳤던 글이 떠오르네요. “빵을 먹는 자 길을 내고, 밥을 먹는 자 마을을 만든다.” 이 말에서 이동하지 못하는 자의 아픔을 느낍니다. 우리가 인생길을 계속 걷는 것은 희망이 보여서가 아닙니다. 계속 걸어야 희망이 보여서 입니다. 인내는 소극적으로 참는 것이나, 적극적으로는 이기는 것입니다. 코로나를 물리친 어느 훗날에, 참고 이겨낸 오늘을 회상하며 행복감에 젖을 그날을 생각하고, 부디 오늘을 잘 견디시게. 당신은 길을 내는 사람이지 마을을 지키는 사람은 아니지 않은가. (글 이관순 소설가 daumcafe/leelett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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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10-03
  • 100년 짓는 천진암 성지
    전 세계 여행자들이 한 번은 가보고 싶어 하는 곳. 매년 2천만 명이 찾는 바로셀로나의 ‘사그라다 파밀리아 대성당(가우디성당)’ 앞에 서면 그 웅장함, 화려함에 놀라지만 지금도 짓고 있다는 사실에 입이 벌어져요. 천재 건축가 안토니 가우디의 설계로 1882년 착공해 ‘가우디사망 백주년’에 맞추어 2027년 완공 예정이랍니다. 바티칸이 모든 성당은 베드로성당보다 낮게 짓도록 했지만 가우디성당의 예술성을 인정해 예외로 했다는군요. 수많은 첨탑 중에는 예수의 사도를 상징한 높이 100m 탑 12개와 예수를 상징하는 높이 172m의 중앙 탑이 있어, 유럽에서는 가장 높은 종교 건축물이 될 전망입니다. 그렇다고 너무 위축되지 마세요. 우리도 100년 짓는 건축물이 있으니까요. 한국 천주교 발상지 성역화 사업으로 경기도 광주시 퇴촌면 우산리 앵자봉 기슭에 세워지는 ‘천진암 성지’가 벌써 착공 40년을 바라봅니다. 1995년 7월 24일 일기에는 18만평 대지에 지하1층 지상2층 연 만평짜리 천진암 성지사업이 적혀 있어요. 1983년 착수해 설계와 터닦기로 30년, 골조공사 20년, 내부공사 50년, 해서 ‘100년 프로젝트’가 진행됩니다. 본성당 대지 전경 초대 추진위원장 변기영 신부는 유럽의 로테르담성당, 성 베드로성당을 예로 “우리는 너무 당대주의에 사로잡혀 매사를 단시일에 해내려고 무리한다”고 무모한 집착을 꼬집었어요. 내 임기에, 내 생전에, 완공하려다가 졸속으로 끝난 일이 적지 않으니까요. 독립기념관은 5년 만에 완공하고, 예술의 전당은 3년 만에 뚝딱 짓는 그런 졸속공사는 이제 시정돼야 겠지요. “건물을 짓는 데는 건축기술 외에 반드시 세월이란 원료가 가미돼야 한다” 는 변 신부의 말은 울림 그대로입니다. 이후 건립위원회 총재를 맡은 김남수 신부도 이렇게 말했어요. “사람은 바뀌어도 사업은 계속 되는 풍토, 세대는 바뀌어도 역사는 전승되는 문화가 아쉽다”는 안타까움은 우리사회가 성찰해야 대목입니다. 한국기독교사에는 많은 순교의 피가 흐릅니다. 서울 마포 한강변의 절두산 성지, 양화진 외국인선교사 묘역에 가면 얼마나 많은 순교자가 묻혀있는지 알 수 있어요. 어떻게 살 것인가? 그 물음에 역설적으로 어떻게 죽어야 할 것인가로 답을 찾은 분들입니다. 한국 가톨릭이 자부심을 갖는 데는 외국 선교사에 의한 복음 전파가 아닌, 가톨릭사에 유래가 없는 자생적 발상이라는 점이지요. 천주교회의 100년 성역사업 현장 안내판에 이러한 자부와 긍지가 흐르고 있습니다. “선교사의 파견과 복음 전파 없이 순수한 학문 탐구의 호기심으로 시작된 강학회를 신앙으로 발전시켜 한국천주교회의 초석을 놓은 자랑스러운 한국 천주교회의 발상지다.” 우리나라 공식적인 천주교의 시작은 이승훈이 북경에서 세례를 받고 온 1784년이나, 이보다 7년 전 권철신이 이끄는 학자들이 천진암과 주어사를 오가며 강학모임을 열어 조선 천주교의 신앙공동체를 탄생시켰어요. 이벽, 권철신, 권일신, 정약전, 이승훈 등 5인이 창립 선조입니다. 규모는 성지안내도가 짐작케 해줘요. 광암성당, 대성당건립터, 천진암강학터, 200주년기념비, 한국천주교창립 성현5위 묘역, 조선교구설립자묘역, 성모경당, 세계평화의 성모상, 박물관 등 순례에만 두 시간은 족히 걸립니다. 핵심인 천진암 대성당은 1987년 터 닦기공사를 시작으로 1992년 대성당 터를 축성해 2079년 완공할 계획입니다. 내려오는 길에 천국열쇠를 든 베드로 동상과 마주칩니다. 석양을 받아 신비감을 더하네요. 천진암 성지는 세 번째 방문입니다. 1996년, 2007년, 2020년, 하지만 크게 변한 것이 없으니 아직도 세월이란 원료가 부족한 모양입니다. 세월의 흐름이 멈추어 선 곳, 영화 ‘미드나잇 인 파리’의 주인공이 종이 울리면 1920년대의 파리로 돌아가는 타임슬립이 떠오릅니다. 100세를 살아도 준공된 모습은 볼 수 없으니, 이번에도 조감도로 완공 후의 현장을 상상하며 돌아갑니다. 옛날에, 자신이 묻힐 곳을 미리 보고 뒤돌아서시던 아버지가 뜬금없이 떠오르네요. 유한한 인생을 생각했나 봅니다. (이관순 소설가/daum cafe/ leeletter) 13.2 몽골평원에서 휴식을 취하는 낙타떼 코로나를 물리친 어느 훗날에, 참고 이겨낸 오늘을 회상하며 행복감에 젖을 그날을 생각하고, 부디 오늘을 잘 견디시게. 당신은 길을 내는 사람이지 마을을 지키는 사람은 아니지 않은가. 내 지인은 몽골의 별밤을 회상할 때, 그 어느 때보다 향수에 젖습니다. "난 혼자서 몽골 어디든 찾아다닐 수 있다. 몽골의 자연은 참으로 아름답다. 진정으로 몽골을 알려면 초원이 부르는 바람소리를 들어야 한다.” 그는 유하의 시 ‘어느 날 내가 사는 사막으로’ 를 이렇게 변주했어요. ?나 어느 날 내가 사는 초원으로 빗방울처럼 그대가 오리라. 그러면 전갈들은 꿀을 모으고, 낙타의 등은 풀잎 가득한 언덕이 되고, 햇빛아래 모래알들은 빵으로 부풀고 독수리의 부리는 썩은 고기 대신 꽃가루를 탐하리 ...어느 날 나의 초원으로 그대가 오면, 지평선과 하늘이 입맞춤하는 곳에서 나 그대를 맞으리라.? 승마여행 중에 만난 초원의 무지개와 신비의 구름과 바람들. 광야에 핀 꽃들. 나그네의 발길을 멈추게 하는 노을, 이 모두가 소리 내어 나를 찾는 곳. 그곳으로 속히 돌아가고 싶다는 그 소망이 찬란한 슬픔의 봄 같았어요. “줄이고 또 줄여본다. 견디고 또 견뎌본다. 그러나 답은 없다. 접어야 할지 말지. 이 현실이 어지럽다. 성을 쌓는 자 망하고, 길을 내는 자 흥한다. 이동이 곧 우리의 미래인데. 어느 날 그 이동이 막혀버렸다. 하늘길, 땅길, 물길도 모두. 텅 빈 인천국제공항에서 인간의 역사가 멈춤을 보았다.” 오늘은 17년간 몽골 초원을 함께 달린 낡은 모자 사진도 올렸습니다. 그의 글을 보다 ‘징기스칸’을 읽으며 밑줄을 쳤던 글이 떠오르네요. “빵을 먹는 자 길을 내고, 밥을 먹는 자 마을을 만든다.” 이 말에서 이동하지 못하는 자의 아픔을 느낍니다. 우리가 인생길을 계속 걷는 것은 희망이 보여서가 아닙니다. 계속 걸어야 희망이 보여서 입니다. 인내는 소극적으로 참는 것이나, 적극적으로는 이기는 것입니다. 코로나를 물리친 어느 훗날에, 참고 이겨낸 오늘을 회상하며 행복감에 젖을 그날을 생각하고, 부디 오늘을 잘 견디시게. 당신은 길을 내는 사람이지 마을을 지키는 사람은 아니지 않은가. (글 이관순 소설가 daumcafe/leeletter)1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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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9-29
  • 갈 적 마음과 올 적 마음
    사람 마음에 베인 상처처럼 아프고 오래가는 것도 없다. 어느 날 믿고 아꼈던 사람이 배반을 하고 떠났을 때, 가슴에 깊은 상처를 남기고 마음이 무너지는 참담함을 느끼게 된다. 사람이 사람을 지배하는 일보다 힘든 일은 없다. 힘으로 나라를 정복했다고 다가 아닌 것이, 땅은 점령해도 사람의 마음을 정복하지 못하면 언제 반란이 일어날지 모르기 때문이다. 역사 속의 그 많은 전쟁들, 인종 간의 분쟁, 권력을 에워싸고 벌이는 암투, 이해관계로 발생하는 갈등이 다 그래서 생겨났다. 배반, 배신이란 이름 아래 행해지는 세상 일들이 다 사람의 문제로 시작되었다. 출신, 인종, 문화가 다양한 사람들을 모아 기업을 운영하는 일 또한 핵심은 결국 사람을 다루는 일로 귀결된다. ‘열길 물속은 알아도 한길 사람 속은 모른다’라는 속담이 생긴 것도 같은 이치라 하겠다. 사람들은 자신이 한 일에 대해 기대치를 높이는 경향이 있다. 내가 회사를 위해 얼마나 많은 공헌을 했는데... 이런저런 일을 들먹이며 자신을 높이고 은근히 유세를 부린다. 세상을 살면서 사람에 대한 기대가 무너질 때만큼 허망한 때도 없다. 평생 한 직장에 같이 몸 담아온 사람이 명예롭지 않게 떠나는 모습을 볼 때가 있다. 회사가 어려울 때 같이 입사해 정이 들만큼 든 사람들일 때는 더욱 마음이 아파온다. “저 사람은 회사가 잘해 주었으니까 딴마음을 품을 리 없지”라고 생각했던 믿음이 깨질 때 그것이 얼마나 순진한 것인가를 알게 된다. 회사의 은덕을 많이 입고도 작은 일에 서운해하고 등을 돌리고 칼을 꼽는 게 사람의 본성인지도 모르겠다. 사람은 참 이기적이면서 상대적이다. 회사는 줄 만큼 주었다는 것이고 직원은 일한 만큼 보상받지 못했다는 생각으로 부딪친다. 그래서 작은 이해에도 민감하게 반응한다. 기업을 운영하는 지인이 그랬다. 오갈 데 없는 사람을 거두어 가르치고 키워서 충복으로 삼았는데 그 사람이 발등을 찍을 줄이야 누가 생각이나 했을까. 은혜를 입은 사람이 비밀리에 회사의 기술을 베껴 새 공장을 짓고 하루아침에 경쟁업체 사장으로 나타났을 때 받는 당혹감이나 배신감은 어떠할까. 사람의 얼굴을 하고 해선 안 될 일이 믿음을 저버리는 짓이다. 그럼에도 역사의 많은 반역자들은 모두 총애를 받았던 최측근의 사람들이었다. 누구보다 많이 누리고 혜택을 받은 사람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절대적인 신임으로 옥쇄까지 맡겼는데 어느 날 칼끝이 주인을 향하기도 한다. 처음에는 감지덕지하며 일하다가 세월이 가면서 욕심이 생겨 배신의 유혹을 떨치지 못했다. 진실로 믿음의 관계는 사람과 신(神)과의 관계에서만 존재한다. 인간의 본성 가운데 선하면서도 취약한 것이 ‘초심(初心)’으로 사는 일이다. 그만큼 초심을 끝까지 지켜내기가 어렵다는 뜻이리라. ‘의리’ ‘신의’ ‘배신’ ‘배반’이란 말이 모두 초심의 문제가 아닌가. 어제 한 말과 오늘 한 말이 다르고, 가난할 때와 부유해진 뒤가 다르고, 고생할 때와 성공한 후가 다른 것이 간교한 인간의 마음이다. 그래서 사람이 숭앙해야 할 덕목으로 ‘시종일관’ ‘한결같이’ ‘처음처럼’ 사는 것을 꼽는 게 아닐까. 아마존 창업자 제프 베이조스도 몇 해전 출범시킨 자선단체 이름을 ‘베이조스 데이원(DAY-1)’(처음처럼)으로 명명했다. 사는 곳은 달라도 인류를 관통하는 가치는 같은 맥락에 있다. 옛날, 길을 가던 한 나그네가 측간(화장실)에 가야 할 긴급한 상황이어서 아무 집이나 들어가 양해를 구했다. 그런데 하필이면 남편이 출타 중인 부인 혼자 있는 집이었다. 부인이 머뭇거릴 수밖에. 그러자 나그네가 부인에게 엽전 한냥을 주면서 사정을 했다. 그래도 부인이 “아무리 사정이 그렇더라도 아녀자 혼자인 집에...” 머뭇거리자 다급해진 나그네는 탈탈 털어 엽전 닷냥을 주고야 측간을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볼일을 마친 나그네가 쭈그려 앉아 생각하니 생돈을 빼앗긴 것 같아 속이 쓰려왔다. 일어날 생각은 않고 계속 앉아 잃은 돈 생각에 잠겼다. 그러자 급해진 사람은 이 집 마님이었다. 외출한 남편이 돌아올 시간이 얼추 돼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여자 혼자인 집에 외간 남자를 들이다니, 남편이 이를 안다면 생각만 해도 끔찍한 일이 아닌가. 여자가 조심스레 작은 소리로 물었다. "아직 볼일이 끝나지 않았습니까?" "예 아직. 제가 좀 측간 일을 길게 보는 습관이 있습니다." 그 말에 어쩔 수가 없었다. 입을 다물고 좀 더 기다릴 수밖에는. 시간이 흐르자 다급해진 부인이 협상을 걸었다. “한 냥을 드릴 테니 그만 나오시지요.” “서두르면 더 힘들어집니다.” 남자의 능청스러운 대답에 발을 동동 구르던 부인이 애끓는 심정으로 말했다. “그럼 닷 냥 다 돌려드리면 되겠어요? 제발 좀 부탁합니다.” “모르시는 말씀이십니다. 제 조부께서는 설사가 나온다고 재촉하는 조모님 때문에 측간 일을 다 못 보고 나가셨다가 그만 변고를 당하셨다고요." 나그네 대답은 갈수록 태산이었다. 남편이 돌아올 시간이 가까워지자 애가 탄 부인이 마지막 패를 던졌다. “그러면 닷냥을 더 얹어 드릴 테니 그만 좀 나오세요. 이렇게 빕니다.” 그제야 나그네는 ‘콜~’하며 측간에서 나왔다. 그리고 엽전 열 냥을 받아 들고 유유히 사라졌다. 이를 ‘여측이심(如厠異心)’이라고 한다. ‘똥 누러 갈 때 마음 다르고 나올 때 다르다’라는 뜻이다. 사람이 의롭게 신실하게 사는 일은 초심을 지켜 사느냐에 달려 있다. ‘처음처럼’ ‘한결같은 마음’이 아름답고, 처음과 나중이 같은 사람이 존귀하다. -소설가/ daum cafe 이관순의 손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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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9-26
  • 왜 하필이면 조선 땅인가
    이 넓은 세상에서 조선에 태어났나? 왜 여성으로 태어났나? 하필이면 김성립의 아내가 되었나? 조선의 천재 여류문인 허난설헌(이름 초희)의 한(恨)입니다. 27세 꽃다운 나이로 요절한 여인이 무슨 정한이 그리 많아 셋씩이나 한을 품었을까? 긴 장마 뒤 해가 쨍쨍한 날, 광주시 초월읍 지월리의 안동김씨 선영으로 허난설헌 묘를 찾았습니다. 당대최고의 문벌가답게 묘역은 크고 잘 정비돼 있었어요. 하단에 그녀의 묘가 있고 옆에 어린 남매가 잠들어 있더군요. 아버지 초당 허엽은 동서 분당 때 동인의 영수였고, 오빠 허성은 이조판서를, 소설 ‘홍길동’을 쓴 남동생 허균은 유·불·천주교를 섭렵하며 관직에 오르는 등 말 그대로 한 시대의 문벌 가문입니다. 강릉엔 난설헌의 생가 초당고택이 있어요. “글을 읽는 것과 가르치는 것은 남자가 할 일이다. 여자가 이에 힘쓰면 그 해로움이 끝없을 것.” 실학의 대가 이익의 말처럼 당시 여성은 문사의 길이 꽉 막힌 시대였어요. 그럼에도 천부적 재질을 보인 난설헌은 8세 때 시를 지어 후일 정조를 감탄시킵니다. 그녀가 풍부한 감성으로 시를 쏟아 내면, 허균이 암송해 훗날 ‘난설헌집’을 만드는 기반이 됩니다. 하지만 15세 때 김성립과의 결혼은 그녀의 삶을 험한 가시밭길로 내몰았어요. 남편은 5대 연속 문과에 급제한 안동김씨 문벌가 자손이었지만, 가부장적인 가풍으로 시집살이가 고통스러웠습니다. 시 쓰는 며느리가 달갑지 않은 시모 사이에 깊은 갈등의 골이 패이고, 아내를 상대하기가 버거웠던 남편과도 화락하지 못했어요. 아내에 대한 열등감으로 기생방에서 밤을 새우는 날이 태반이었습니다. 지아비에게 버림받고 눈물로 지새는 규방의 날이 길어지면서 자신의 처지를 달래는 것은 시 뿐이었어요. 그 하나가 규방의 슬픔을 담은 ‘규원’입니다. “비단 띠 깁 저고리 적신 눈물자국/ 여린 방초 임 그리운 한이외다/ 거문고 뜯어 한 가락 풀고 나니/ 배꽃도 비 맞아 문에 떨어지네/ 달빛 비친 다락에 가을 깊은데 울안은 비고/ 서리 쌓인 갈밭에 기러기 내려앉네. 엄마 옆에 나란히 누운 어린 남매 그래도 삶을 지탱시켜주는 건 어린 남매입니다. 자식 자라는 모습에 보람을 찾던 그녀 인생에 잇단 불행이 찾아듭니다. 봉오리도 맺기 전 남매가 다 돌림병으로 죽어요. 오죽하면 지식을 앞서 보낸 어미의 슬픔을 참척(慘慽)이라했을까. 이때 쓴 시가 ‘곡자(哭子)’. “지난해엔 귀여운 딸을 잃더니/ 이번 해엔 사랑하는 아들마저 잃었네/ 가슴 메어지도다 광릉의 흙이여/ 작은 무덤을 나란히 마주 세웠네//.../ 응당 언니 아우의 혼들이 알아/ 밤마다 서로 손잡고 놀아라...” 남편은 가정과 더욱 멀어지고 그러는 사이 친정집도 몰락의 길을 갑니다. 경상감사였던 아버지가 상주에서 객사하고, 귀양을 간 큰 오빠도 객사하니 수족이 하나씩 잘리는 아픔을 느낄 수밖에요 여성의 재능을 부정한 시모의 학대, 무능한 남편, 친정의 몰락, 여성에 대한 사회의 억압, 두 아이를 잃은 슬픔으로 몸이 쇠약해져요. 그럼에도 그녀가 지은 시와 문장은 방 한 칸에 가득 찰 정도입니다. 그녀는 자신의 죽음을 암시한 시를 쓰더니 “아름다운 연꽃 39송이 붉게 떨어진다.” 처럼 27세에 요절합니다. 여기서 ‘39’는 엄마와 남매의 나이를 합한 수, 또는 3·9의 승수라고도 해요. 그녀는 모든 작품을 불태우라는 유언을 남겼으나, 허균이 누님의 시편들을 수습해 중국에서 ‘난설헌집’을 내 격찬을 받지만 정작 조선에서 간행될 때는 찬사보다 비판이 컸어요. 규방여인이 점잖지 못하게 연애시나 썼다고. 연암 박지원까지 “조선의 한 여자 이름이 중국에까지 퍼졌으니 유명하다고 할 수 있으나, 조선의 부인들은 일직이 이름이나 자를 찾아 볼 수 없으니, 난설헌은 호 하나만으로도 과분하다”고 했어요. 여성이 호와 자를 다 갖기란 극히 이례적이었으니까요. 정한으로 점철된 비극적인 삶에 종지부를 찍은 27년 생애. 시비(詩碑)앞에 서니 그녀의 일생이 너울거립니다. 왔다간 인생의 흔적이 고작 이것인가. 한없이 작아진 나를 만납니다. -소설가/daumcafe/leelett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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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9-22
  • 가을의 고요와 만날 무렵
    무섭게 기승을 부리던 무더위가 한풀 꺾였다. 더위와 집중호우라는 이중고를 안겼던 여름도 조석으로 부는 선선한 바람에 서서히 뒷모습을 보이기 시작했다. ‘광복절만 지나면 여름은 끝’이라는 생각이 올해도 얼추 맞게 돌아갔다. 여름의 끝을 8월 15일로 인식한 데는, 무주 구천동에서 형제들과 보낸 어느 해 여름휴가 때문이었다. 원래 계획은 3일이었는데 하루를 연장해 8월 16일까지 머물기로 하고 주인을 만났더니, 15일 숙박료를 절반으로 깎아 주는 것이었다. 8월 15일을 기준으로 숙박요금이 성수기에서 비수기로 바뀐다는 사실을 그렇게 알았다. 젊은 날에는 확 트인 바다가 좋았는데 나이가 들면서 산이 좋아졌다. 염분이 밴 끈적거림 보다 청량한 공기를 맘껏 들이켜고 보송보송한 산들바람에 몸을 말릴 수 있는 청량한 산이 좋다. 9월을 시작하는 첫날, 운길산에 올랐다가 수종사를 찾았다. 수종사를 찾은 지가 기억 속에 가물대지만 그때나 지금이나 모습은 여전하고, 고즈넉함까지 옛 그대로였다. 활짝 트인 시야로 북한강의 끝자락인 양수리 풍광이 한눈에 들어왔다. 숨을 깊이 들이쉬자 가슴이 절로 열렸다. 어제의 8월과 오늘의 9월은 전혀 다른 세상이다. 작열하던 햇살이 기를 숙이고 떠들썩했던 여름의 소음도 멀어지고 있다. 청정한 바람이 여름의 잔해를 쓸어내면, 가을의 고요가 성큼 우리 곁을 찾아올 것이다. 수종사를 배경으로 팔짱을 끼고 북한강에서 오르는 강바람과 운길산에서 내려오는 산바람을 타고 가을의 치맛자락 끌리는 소리를 들었다. 계절을 떠나보내는 마음은 나이가 들수록 아쉽고, 작별은 사람을 어질게 만든다. 견고하게 초록의 성을 쌓았던 무성한 잎새들과도 곧 작별이겠구나. 초록은 흩날리는 굴뚝 연기처럼 사라질 것이다. 지난 세월, 백사장을 어지럽게 밟아놓은 젊은 날의 발자국들이 양수강 위로 아련하게 흔들렸다. 늘 시끌벅적했고, 뜨거운 아우성으로 소란스러웠던 그 많은 시간들…. 뒤돌아보는 그날의 발자국들은 태반이 상처 나고 부끄러운 것들이었다. 무수히 다짐하고 맹세했던 것들이 결국은 나를 바꾸어 놓지 못한 채 긴 세월을 흘러 보낸 것만 같다. 세상에서 가장 힘든 도전은 나를 바꾸는 일이다. 그 중심에 천박하게 입만 열면 떠들었던 입이 있다. 아직도 그 입 하나를 감당하지 못하고 삐뚤어지고 굽은 언어로 나 자신을 기만하며 살아온 것은 아닐까. 오죽했으면 성철 스님까지 ‘불기자심(不欺自心·자기 마음을 속이지 마라.)’을 화두로 삼고, 해인사 백련암에 직접 쓴 휘호를 걸었겠는가. 성경에도 “자신을 속이지 마라 하느님은 조롱받지 않으시니 사람이 무엇을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 (갈 6:7)”라고 쓰여 있다. 호젓한 수종사에 계절의 전령처럼 혼자 바쁘게 움직이는 것이 있다. 추녀 끝에 달린 풍경(風磬)이다. 바람에 흔들리며 내는 찰랑찰랑한 소리는 언제 들어도 마음에 잔물결을 일으킨다. 인생의 거친 호흡을 가라앉히고 바람 든 스산한 생각들을 정결하게 빗질해 주는 것도 저 풍경소리이다. 청아한 가을바람소리를 듣기 때문일까. 유난히 풍경소리가 높고 맑게 들렸다. 휘저은 마음속 앙금들이 풍경소리에 가라앉으면서 잊고 지내온 일들이 살아났다. 한참을 그렇게 상념에 잠겼다. 사찰마다 풍경 끝에 물고기가 매달려있다. 왜 추녀 밑 풍경에는 단 한 마리의 물고기만 매달려 있지? 등산길에 목을 축이려고 절에 들릴 때마다 풍경에 달린 물고기를 신기하게 바라보았던 시절이 있었다. 도대체 풍경과 매달린 물고기 사이엔 어떤 궁합이 있는 걸까? 그러한 의문은 군 입대를 앞두고 들렸던 선암사에서 풀렸다. 친절하게도 스님 한 분이 나의 물음에 답해주었다. “물고기를 피사체로 삼을 때 뒤로 배경이 되어 보이는 것이 무엇입니까?” “하늘? 구름?” “광활하게 펼쳐진 푸른 하늘이 보이지요. 저 푸른 하늘은 바다를 뜻합니다. 어떤 상상이 떠오릅니까?” 그러고 생각하니 광대한 바다에 물고기 한 마리가 노니는 모습이 떠올랐다. 푸른 하늘을 배경으로 물고기 한 마리를 매달아 물의 원천인 바다를 만들었구나. 물이 풍부하면 어떤 큰 불에도 빠르게 대응할 수 있다. 대부분 목조 건물인 사찰은 어느 곳보다 화재에 취약한 곳이므로, 화재 진압에 쓰일 풍부한 수자원을 기원했으리라. 파아란 하늘을 바다로, 넉넉한 수량을 확보해 오래된 목조건물을 화재로부터 보호하려는 지혜가 보석처럼 빛나 보였다. 풍경이 상징하는 것으로 또 하나가 더 있었다. 물고기는 깨어 있을 때나 잠을 잘 때에도 눈을 감지 않는 특성이 있다. 뿐만 아니라 죽어서도 눈을 감지 않는 것이 물고기다. 평생을 눈을 뜨고 사는 물고기를 무엇에 은유했을까? 수행자를 지도하거나 경책 할 때 손바닥에 치는 죽비가 떠올랐다. “눈을 떠라! 물고기처럼 항상 눈을 뜨고 있어라. 깨어 있으라. 언제나 혼돈과 번뇌에서 깨어나 일심으로 살아라. 그러면서 너도 깨닫고 남도 깨달을 지니….” 수종사에서 듣는 바람소리, 풍경 소리에 습하게 구겨진 마음을 펴 말리면서 시인 공광규(1960~ )의 시 ‘수종사 풍경’을 바람 타고 고요한 하늘로 퍼지는 풍경소리에 실어보냈다. “... 강에서 올라온 물고기가 처마 끝에 매달려 참선을 시작했다 햇볕에 날아간 살과 뼈 눈과 비에 얇아진 몸 바람이 와서 마른 몸을 때릴 때 몸이 부서지는 맑은 목소리...” 딱 떨어지는 지금의 수종사 풍경(風景)이다. -소설가/daumcafe 이관순의 손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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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고
    2022-09-19
  • 가을의 고요와 만날 무렵
    무섭게 기승을 부리던 무더위가 한풀 꺾였다. 더위와 집중호우라는 이중고를 안겼던 여름도 조석으로 부는 선선한 바람에 서서히 뒷모습을 보이기 시작했다. ‘광복절만 지나면 여름은 끝’이라는 생각이 올해도 얼추 맞게 돌아갔다. 여름의 끝을 8월 15일로 인식한 데는, 무주 구천동에서 형제들과 보낸 어느 해 여름휴가 때문이었다. 원래 계획은 3일이었는데 하루를 연장해 8월 16일까지 머물기로 하고 주인을 만났더니, 15일 숙박료를 절반으로 깎아 주는 것이었다. 8월 15일을 기준으로 숙박요금이 성수기에서 비수기로 바뀐다는 사실을 그렇게 알았다. 젊은 날에는 확 트인 바다가 좋았는데 나이가 들면서 산이 좋아졌다. 염분이 밴 끈적거림 보다 청량한 공기를 맘껏 들이켜고 보송보송한 산들바람에 몸을 말릴 수 있는 청량한 산이 좋다. 9월을 시작하는 첫날, 운길산에 올랐다가 수종사를 찾았다. 수종사를 찾은 지가 기억 속에 가물대지만 그때나 지금이나 모습은 여전하고, 고즈넉함까지 옛 그대로였다. 활짝 트인 시야로 북한강의 끝자락인 양수리 풍광이 한눈에 들어왔다. 숨을 깊이 들이쉬자 가슴이 절로 열렸다. 어제의 8월과 오늘의 9월은 전혀 다른 세상이다. 작열하던 햇살이 기를 숙이고 떠들썩했던 여름의 소음도 멀어지고 있다. 청정한 바람이 여름의 잔해를 쓸어내면, 가을의 고요가 성큼 우리 곁을 찾아올 것이다. 수종사를 배경으로 팔짱을 끼고 북한강에서 오르는 강바람과 운길산에서 내려오는 산바람을 타고 가을의 치맛자락 끌리는 소리를 들었다. 계절을 떠나보내는 마음은 나이가 들수록 아쉽고, 작별은 사람을 어질게 만든다. 견고하게 초록의 성을 쌓았던 무성한 잎새들과도 곧 작별이겠구나. 초록은 흩날리는 굴뚝 연기처럼 사라질 것이다. 지난 세월, 백사장을 어지럽게 밟아놓은 젊은 날의 발자국들이 양수강 위로 아련하게 흔들렸다. 늘 시끌벅적했고, 뜨거운 아우성으로 소란스러웠던 그 많은 시간들…. 뒤돌아보는 그날의 발자국들은 태반이 상처 나고 부끄러운 것들이었다. 무수히 다짐하고 맹세했던 것들이 결국은 나를 바꾸어 놓지 못한 채 긴 세월을 흘러 보낸 것만 같다. 세상에서 가장 힘든 도전은 나를 바꾸는 일이다. 그 중심에 천박하게 입만 열면 떠들었던 입이 있다. 아직도 그 입 하나를 감당하지 못하고 삐뚤어지고 굽은 언어로 나 자신을 기만하며 살아온 것은 아닐까. 오죽했으면 성철 스님까지 ‘불기자심(不欺自心·자기 마음을 속이지 마라.)’을 화두로 삼고, 해인사 백련암에 직접 쓴 휘호를 걸었겠는가. 성경에도 “자신을 속이지 마라 하느님은 조롱받지 않으시니 사람이 무엇을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 (갈 6:7)”라고 쓰여 있다. 호젓한 수종사에 계절의 전령처럼 혼자 바쁘게 움직이는 것이 있다. 추녀 끝에 달린 풍경(風磬)이다. 바람에 흔들리며 내는 찰랑찰랑한 소리는 언제 들어도 마음에 잔물결을 일으킨다. 인생의 거친 호흡을 가라앉히고 바람 든 스산한 생각들을 정결하게 빗질해 주는 것도 저 풍경소리이다. 청아한 가을바람소리를 듣기 때문일까. 유난히 풍경소리가 높고 맑게 들렸다. 휘저은 마음속 앙금들이 풍경소리에 가라앉으면서 잊고 지내온 일들이 살아났다. 한참을 그렇게 상념에 잠겼다. 사찰마다 풍경 끝에 물고기가 매달려있다. 왜 추녀 밑 풍경에는 단 한 마리의 물고기만 매달려 있지? 등산길에 목을 축이려고 절에 들릴 때마다 풍경에 달린 물고기를 신기하게 바라보았던 시절이 있었다. 도대체 풍경과 매달린 물고기 사이엔 어떤 궁합이 있는 걸까? 그러한 의문은 군 입대를 앞두고 들렸던 선암사에서 풀렸다. 친절하게도 스님 한 분이 나의 물음에 답해주었다. “물고기를 피사체로 삼을 때 뒤로 배경이 되어 보이는 것이 무엇입니까?” “하늘? 구름?” “광활하게 펼쳐진 푸른 하늘이 보이지요. 저 푸른 하늘은 바다를 뜻합니다. 어떤 상상이 떠오릅니까?” 그러고 생각하니 광대한 바다에 물고기 한 마리가 노니는 모습이 떠올랐다. 푸른 하늘을 배경으로 물고기 한 마리를 매달아 물의 원천인 바다를 만들었구나. 물이 풍부하면 어떤 큰 불에도 빠르게 대응할 수 있다. 대부분 목조 건물인 사찰은 어느 곳보다 화재에 취약한 곳이므로, 화재 진압에 쓰일 풍부한 수자원을 기원했으리라. 파아란 하늘을 바다로, 넉넉한 수량을 확보해 오래된 목조건물을 화재로부터 보호하려는 지혜가 보석처럼 빛나 보였다. 풍경이 상징하는 것으로 또 하나가 더 있었다. 물고기는 깨어 있을 때나 잠을 잘 때에도 눈을 감지 않는 특성이 있다. 뿐만 아니라 죽어서도 눈을 감지 않는 것이 물고기다. 평생을 눈을 뜨고 사는 물고기를 무엇에 은유했을까? 수행자를 지도하거나 경책 할 때 손바닥에 치는 죽비가 떠올랐다. “눈을 떠라! 물고기처럼 항상 눈을 뜨고 있어라. 깨어 있으라. 언제나 혼돈과 번뇌에서 깨어나 일심으로 살아라. 그러면서 너도 깨닫고 남도 깨달을 지니….” 수종사에서 듣는 바람소리, 풍경 소리에 습하게 구겨진 마음을 펴 말리면서 시인 공광규(1960~ )의 시 ‘수종사 풍경’을 바람 타고 고요한 하늘로 퍼지는 풍경소리에 실어보냈다. “... 강에서 올라온 물고기가 처마 끝에 매달려 참선을 시작했다 햇볕에 날아간 살과 뼈 눈과 비에 얇아진 몸 바람이 와서 마른 몸을 때릴 때 몸이 부서지는 맑은 목소리...” 딱 떨어지는 지금의 수종사 풍경(風景)이다. -소설가/daumcafe 이관순의 손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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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9-15
  • 침착하고 강하고 담대하게
    20대 때는 세상을 바꾸겠노라. 30대는 아내를 바꾸어 놓겠노라, 40대에는 자식을 바꿔놓겠노라고 다짐했는데, 50대 이르러 보니 나는 아무것도 바꾸어놓은 것이 없었다. 그때 깨달았다. 내가 변하지 않는 한 아무것도 바꿀 수 없다는 것을. 내가 변화되면 이 모든 것을 내려 놓을 수 있다는 것을... ? 미국 특파원 생활을 끝으로 잘 나가던 기자 생활을 청산하고 50대에 목사님이 되면서 그가 남긴 글이다. 그 나이에 인생을 그토록 비틀 수 있는 과단성 있는 용기와 결행은 어떤 신념에서 나온 것일까? 이를 두고 열이면 열 사람 모두 기대 반, 걱정 반으로 반응을 보였다. 그는 그렇게 목회자의 길에 들어섰고, 점차 세상 사람들과 소통을 끊으면서 간간이 먼발치로 그의 소식을 들었다. 뒤늦게 신학을 공부해서 목사가 되고, 교회 개척에 나서 힘들어한다는 말까지…. 무엇 하나 녹록하지 않은 세상에서, 때 늦은 나이에 목사가 된 그를 걱정했던 마음에 언젠가부터 존경스러움이 찾아들었다. 소명감을 가지고 하고 싶은 일을 한다는 것은, 얼마나 결연한 자유 의지인가. 우리가 안정된 중장년의 시기를 보낼 때, 눈물 젖은 빵을 먹으면서 광야의 길을 열어간 그의 모습에서 그것이 짧은 인생의 소망이겠다 싶었고, 행복일 수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십 년이 지나 친구들이 은퇴 세대가 될 즈음, 다시 신문에 오른 그의 사진과 칼럼을 보았다. 청년이 많은 교회의 담임목사가 된 그는 사진에 검은 올이 하나 없는 순백의 머리를 하고 있었다. 그의 글은 원정을 떠나는 장수의 출사표처럼 다가왔다. 정년을 앞당겨 젊은 목사를 청빙해 자리를 넘기고, 그는 더 먼 길로 아프리카 사역을 떠난다는 것이었다. 63세라는 가볍지 않은 나이에. 글에서 전해지는 글향을 느꼈다. 좋은 말과 글은 에너지가 되고, 선한 마음에서 나온 글은 사람에게 생기를 불어넣는다는 말을 다시 생각하게 했다. ‘차분하고 강인하라.’ 헤밍웨이가 ‘노인과 바다’에서 사용한 말을 글의 제목으로 차용하고 있었다. 젊은 세대를 향한 메시지는 뜨겁고 힘이 넘쳤다. 어쩌면 자신에게 향한 다짐으로도 보였다. 먼바다에서 자신의 몸보다 큰 청새치와 사투를 벌이던 노인이 자신을 향했던 주문 ‘be calm & strong!'처럼. 어떤 극한 상황에 몰릴 때일수록 ‘침착하게, 강하게’ 밀고 나가라는 의지가 느껴졌다. 노인은 84일간 새벽에 나가 땅거미가 지도록 고통의 바다에서 사투를 벌이다 매일매일 빈손으로 돌아오곤 했다. 그럴수록 더 먼바다로 나가 열공을 드렸고, 마침내 청새치를 잡아올리는 데 성공했다. ‘노인과 바다’가 명작으로 읽히는 것은 삶이 내재하고 있는 ‘결정론’과 ‘자유 의지’ 간의 다툼을 집요하게 파고들었다는 데 있지 않을까? 그 다툼을 그린 소설의 주인공은 자유 의지의 상징이었다. 결정론은 인간이 상황이란 힘 아래 움직이는 허약한 존재이다. 외부 압력에 순종할 수밖에 없는 운명론자이지만, 자유 의지는 ‘예’라고 답 해야 할 때 ‘아니오’에 방점을 찍을 수 있는 의지에 있다. 청년들에게 고난과 질곡 앞에 비굴해지지 말고, 상황에 복종하지 않는 자유 의지의 젊음으로 살라는 것이 그의 글에서 역동했다. 그 역시 분명한 자유 의지의 사람이었다. 그는 때 늦은 나이에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겠다고 광야에 홀로 뛰어 나가 계속되는 난관 앞에 굴하지 않고 ‘침착하고, 담대하게’ 자신을 지키고 혹한 시련을 견뎌냈다. 만 10년 사투 끝에 성공한 목회자란 평가를 받기 무섭게 다시금 새로운 도전을 시작했다. 친구들은 다들 은퇴를 했거나 앞둔 시점에서 쓸쓸한 노년생활을 준비할 때, 그는 더 먼바다로 나가 제 몸집보다 큰 청새치를 끌어올리려고 얼마나 진땀을 흘려야 할까. 그가 떠나기 전 한 언론과 인터뷰에서 남긴 말을 두고두고 기억한다. ?일은 나이의 문제가 아니라 사명과 열정의 문제다. 무언가 시작할 수 있다면 그때가 적기이다. 일을 내가 다 마치겠다는 것은 욕심이다. 우리가 못 이룬 건 다음 세대가 잇고, 내가 못하면 후임자가 이어감이 생명의 순환 질서일 테니까.? 우리는 너나없이 바람이 불면 지는 낙엽에 다름 아니다. 낙엽이 떨어져 잘 썩으면 땅이 비옥해져 좋은 열매가 맺힌다. 사람도 세월이 가면 모두 낙엽처럼 떨어질 수밖에 없지만, 세상을 사는 동안 많은 사람에게 선한 영향을 끼치고 가는 사람이 있고, 자기 몸 하나 보듬다가 떠나는 사람이 있다. 한 사람에게라도 선한 영향을 줄 수 있다면, 빈손으로 왔다 가는 인생은 아닐 것이다. 더더욱 나의 만족을 목표로 삼지 않고 사람들이 필요로 하는 수단으로 제공할 수 있다면 종교적으로도 성공한 삶이 아닐까? 나의 인생에는 그림자처럼 따라붙는 애석함이 있다. 찾아온 생의 전환 기회를 담대하게 붙잡지 못했다. 그럴 때마다 현실에 나를 가두고 시선을 거두었다. 선택을 해야 할 순간, 상황론자의 멍에를 떼려야 떼지 못하고, 꽃다운 시절을 이상과 현실이 뒤엉켜 혼돈 속에 살았다. 이젠 좋고 싫을 것도 없는, 그것도 내 인생의 일부라고 생각한다. 가끔은 가슴 한 구석에 봉인해 둔 웅크린 나를 풀어주면서 다시 글을 쓰기 시작했다. 망설일 때가 곧 시작할 시간이고, 결정하는 순간이 빠른 출발이 된다. 그러므로 선택은 오롯이 나의 몫으로 남는다. ‘노인과 바다’의 주인공처럼 상황론에 휘둘리지 말고, 침착하고 담대하고 강하게! 매일매일 자유 의지로 나에게 주어진 시간을 쉬지 않고 걸어야겠다. -소설가/ daumcafe 이관순의 손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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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9-13
  • 나는 생각하는 갈대인가
    갈대와 억새는 생김새가 비슷해 혼동하기가 쉬워요. 이를 쉽게 구분하는 방법은 늪지대 같은 물가에서 자라는 것이 갈대이고, 산과 들에서 만나는 것이 억새랍니다. 또 갈대는 색깔이 갈색이고 키가 크지만 억새는 은빛에 키가 갈대보다 작습니다. ‘인간은 생각하는 갈대다.’ 누구나 한 번쯤 들어본 말입니다. 프랑스의 과학자이자 사상가, 수학자인 블레즈 파스칼이 그의 명상집 ‘팡세’에 남긴 유명한 경구죠. ?인간은 자연 가운데서 가장 약한 하나의 갈대에 불과 하다. 그러나 그것은 생각하는 갈대다.? 파스칼은 인간에게 내재한 연약함, 위대함을 ‘생각하는 갈대’에 비유했어요. 나무가 자신의 비참함을 아는 것은 슬픔 그 자체로 끝이지만, 인간이 비참하다는 것을 아는 것은 위대함이라는 깨침을 담고 있지요. 앞줄에 나오는 약한 갈대는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가는 등불을 끄지 않는다”는 성경구절과 통합니다. 이 말씀은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가 노예가 된 이스라엘 백성을 향한 구세주의 구원 언약입니다. 소망 없이 노예로 살아가는 불쌍한 이스라엘 백성을 상한 갈대와 꺼져가는 등불에 비유한 것이죠. 파스칼이 말하는 갈대는 비참한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깨달음이란 새로운 매시지를 전달함에 있었어요. 다음 구절이 파스칼이 인간을 향해 던지는 핵심 구절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생각하는 갈대다.? 상하고 나약한 태생적인 한계를 지적하면서도 인간의 존재가치가 어디에 있는지, 위대함은 무엇인지를 전합니다. 파스칼이 성서의 가르침에 기초한 것은 기독교 사상가로, 구도적인 삶의 상징을 갈대에 둔 것으로 보여요. ‘팡세’는 프랑스어로 사색집이란 뜻입니다. ‘팡세’는 파스칼 사후에 가족이 그의 지혜와 사색이 담긴 메모 첩을 발견하고 한 권으로 묶어 낸 책입니다. ‘팡세’ 에는 모두 924편의 짧은 글이 실렸어요. 르네상스 이후 기독교의 위상이 추락할 때, 사람들에게 인간의 존재가치를 설명하고 신앙으로 돌아올 것을 권합니다. 흥미로운 건 파스칼이 인간의 자아와 이성을 내내 강조한다는 점입니다. ‘인간은 생각하는 갈대’라는 말에서도 볼 수 있듯, 파스칼이 보기에 인간이 인간다울 수 있는 이유를 ‘생각’과 ‘사유’에서 찾았습니다. 우리의 존엄인 내 인간의 자아와 이성을 강조한 것은 이를 근간으로 발달한 계몽사상과도 부합했어요. 팡세는 후대로 갈수록 인간의 이성과 자아가 얼마나 가치 있는 것인지를 밝혀낸 교과서로도 자리를 굳힙니다. 인간의 이성은 물론 보편적 심리까지 적확하게 파악하고 있어서죠. 10월이 되면 포천의 명성산, 정선의 민둥산, 하늘공원 같은 억새 명소에서 억새축제가 열립니다. 가을에 하얗게 무리지어 흔들리는 억새풀의 향연은 가을의 정점임을 알립니다. 황혼녘에 물드는 산허리에 형성된 억새 군락을 향해 쏴아하며 바람몰이 에 휩쌓일 때, 우윳빛 물결로 출렁이는 풍경은, 화려한 꽃이 아니더라도 은빛 하나만으로 이렇게 눈부시고 아름답다는, 경탄을 부릅니다. 한없이 허약하면서 위대함을 상징하는 존재가 갈대이든 억새이든 그것이 중요하지 않아요. 새 깃털처럼 가벼운 은꽃이 되어 산바람 들바람에 몸을 부대끼면서 소리내는 갈대와 억새. 흔들리고 흩날리는 건 그들만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갈대에 억새에 시선을 모으는 우리도 마찬가집니다. 순백의 순결 속에 나는 누구인가. 생각 없이 흔들리는 나약한 갈대인가, 흔들리면서도 끊임없이 이성과 사유와 자아의 실천을 꿈꾸는 갈대인가. 한해가 소문없이 저무는 시간, 창을 두드리는 바람소리가 들린다면, 나를 향해 이렇게 말해보세요 진심을 담아. ?나는 나약한 갈대에 불과 하다. 하지만 생각하는 갈대이고 싶다.? 글 이관순 소설가/ daumcaf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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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9-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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