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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아빠가 미안하다, 널 몰랐구나
    며칠 전 전국 청소년 글짓기 심사를 끝내면서 갖는 유감입니다. 유한양행을 설립한 유일한 박사의 정신을 받들어 유한재단이 해마다 5월이 되면 전국 초?중?고생을 대상으로 백일장을 개최합니다. 올해로 28년째니 연륜이나 규모면에서 전국 규모로 열리는 대표적 청소년 백일장입니다. 올해는 천여 명의 청소년이 아카시아 향이 흩날리는 유한공고 교정에 모여 초?중?고별 글제에 따라 글 향기를 뽐냈습니다. 씁쓸한 것은 ‘내가 아버지라면’ 이란 글제를 놓고 중학생들이 보여준 아버지에 대한 의식 때문입니다. 글제를 택할 때 10대의 자녀들이 평소 아버지란 존재에 대해 어떤 생각을 할까? 글을 통해 아버지 상(像)을 유추해보자는 의도가 있었지요. 글제를 내면서 ‘혹시나’ 했는데, 적지 않은 학생에게서 아버지의 이미지가 긍정적이지 못함을 확인하고 말았습니다. 학생들은 아버지가 칭찬에 인색하다는데 불만이 컸습니다. “잘했네” “알았다” “수고했어.” 등과 같은 정감 없는 아버지의 말투에 아이들도 묻는 말에나 답하는 단답식 대화가 늘어남을 알 수 있었지요. 아버지의 칭찬이 있을 때도 그 뒤에 따라올 말에 신경을 쓴답니다. 때 아닌 칭찬이 의심스럽다는 눈초리죠. “그래 그건 잘했어. 그런데 넌...” 한숨까지 섞인 조언을 듣노라면 작은 희망조차 웅크려진다고 합니다. 아이들은 순수한 칭찬에 목말라합니다. 아버지의 특징으로 감정표현이 없다고 합니다. 무뚝뚝한 아버지, 어려운 아버지라고 쓴 학생이 많았습니다. 그러면서 아이들은 원합니다. 내 이름을 자주 불러주는 아빠, 사랑한다고 말해주는 아빠를 기다립니다. “이리와 봐” 식의 부름보다 격려의 부름이, 사랑의 부름이었으면 한답니다. “넌 왜 엄마를 통해서 말하지?” 아버지의 불만도 이해는 되지만 사실 자초한 면이 없지 않습니다. 평소 대화가 부족했다는 방증이지요. 아이들은 철부지가 아니었습니다. 속에 담아놓고 말을 안 할뿐, 아버지가 가족을 위해 희생한다는 걸 알고 있습니다. 아는데도 다가서기가 쉽지 않은 분일뿐이지요. 역지사지(易地思之)로 사고의 전환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자녀의 입장에서 생각해보는 그런 자세가 필요하다고 느꼈기 때문입니다. 어버이날, 친구들과 나눈 에피소드입니다. 어버이 날이라고 아들이 전화를 했을 때, 예전에 우리는 첫마디를 이렇게 말했지요. “그래 나다. 기다려 엄마 바꿔줄게” 아들이 그게 아니고요 하면 “벌써 돈 떨어졌냐?” 그래도 아들이 용기를 내 ‘아버지 사랑합니다’라고 말할 때의 대답은 더 걸작입니다. “미친 놈, 뚱 단지 같긴!” 옛날 자신들의 모습을 떠올리며 파안대소했습니다. 자식의 마음을 알면서도 멋대가리 없는 말을 했다고. 따지고 보면 그렇게 큰 아들이 지금의 아빠들입니다. 대를 이어 배워온 언어의 관습이 그렇다면, 누구를 탓할 입장도 아니지요. 대화도 훈련이 되지 않으면, 끊기고 단절되기 싶습니다. 대화의 부족이나 불만은 그것으로 끝나지 않고 정서적 불만으로 이어집니다. 갈수록 멀어지는 아버지, 외톨이가 되는 아버지는 어쩌면 현대사회가 만든 자화상일지 모릅니다. 피곤에 절어 밤늦게 퇴근하고 새벽처럼 나가는 아버지... 가뜩이나 어려워진 자영업자 아버지... 그 침통함이 무의식중에 그렇게 비춰진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버지의 노고에 감사하면서도 강한 이미지 때문에 접근하기가 쉽지 않은 이유입니다. 아이들은 크면서 아버지가 힘없는 존재라는 것을 압니다. 엄마가 자녀들과 대화를 독점하고 있을 때 혼자서 담배를 피우는 모습이 쓸쓸해 보였다고 합니다. “나 요즘 힘들다”고 엄마에게 말할 때는 아버지 어깨를 누르는 책임감도 느껴졌답니다. 좋은 세상이 된 줄 알았는데 예나 지금이나 아버지란 존재가 외롭기는 마찬가지인 듯합니다. 사람은 태어난 후 ‘아빠, 엄마‘ 로 부르며 성장기를 보내다가 때가 되면 ’아버지 어머니‘로 바꿔 부르기 시작합니다. 멀리 이스라엘에서도 같은 호칭을 사용한다고 해 놀랐습니다. 기독교100주년기념교회를 담임하다 정년퇴임하고 거창으로 내려간 친구 이재철 목사가 전하는 말입니다. 이스라엘을 갔을 때, 누가 아빠하고 뒤에서 부르더랍니다. 깜짝 놀라 돌아보니 이스라엘 아이가 자기의 아빠를 부르는 것이었습니다. 같은 뜻의 어휘지만 ’아빠‘와 ’아버지‘는 의미가 사뭇 다릅니다. 아빠는 아버지를 뜻하는 아람어고, 아버지는 역어인 헬라어입니다. 아빠로 불리는 아버지는 자식에게 무한책임을 지지만, 아버지로 부르는 아들은 부모를 섬기는 모습을 뜻합니다. 그런 역할과 기능이 어휘에 담긴 거지요. 지금은 자녀들에 대해 무한책임을 지는 아빠의 자리에 있습니다. 모든 헌신으로 아이들을 키우지만, 어느 날이 되면 아버지의 자리로 옮겨 앉아야 합니다. 그 과정이 아름다우려면 아버지가 자녀들과의 대화에 새로운 눈을 떴으면 합니다. “아빠가 미안하다. 네 맘을 헤아리지 못해서”라는 생각으로. 소설가 이관순의 손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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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5-07
  • 음악은 천상의 소리
    밤바람이 선득한 주말. 저녁을 먹고 장자호수공원으로 산책을 나섰습니다. 사람들이 오가는 사이로 청아한 색소폰 연주음이 들려옵니다. 발길이 절로 이끌려 간 곳엔 한 분이 ‘셀프 콘서트’를 열고 있네요. 잔디밭에 앉아 연주가 끝날 때마다 박수를 칩니다. 연주력이 준수한데다 가을밤의 정취까지 더해져 색소폰 선율에 젖는 아름다운 가을밤을 즐겼지요. 음악은 사랑을 전하는 신의 소리라고 합니다. 모든 사람을 하나로 묶어 주지요. 음악은 연주자의 기쁨도 되지만 만인의 즐거움도 됩니다. 연주가의 재능을 부럽게 바라본 영화가 있습니다. ‘어거스트 러쉬.’ ‘음악은 사랑을 낳고 사랑은 운명을 부른다.‘는 말이 잘 어울린 영화지요. 밴드 싱어이자 기타리스트인 루이스와 촉망 받는 첼리스트 라일라의 보석보다 반짝였던 단 하루 밤 이후, 남자는 그녀를 한 번도 잊은 적 없고, 여자는 얼굴도 모르는 낳은 아이에 대한 그리움을 놓은 적이 없지요. 이들의 믿음 하나는 “음악이 있는 한 우리는 다시 만날 거야”라는 것. 부모의 DNA를 받은 아이는 일찍부터 놀라운 음악적 재능을 보입니다. 시설에서 자란 11세의 소년은 부모만이 자신의 음악을 알아볼 수 있다는 믿음 하나로 뉴욕을 찾아갑니다. 모든 게 신비한 뉴욕. 도시가 만드는 수많은 소리들이 소년의 청각에 음계로 포착됩니다. 소년은 아이들을 모아 거리에서 노래를 시키는 워저드를 만나 어거스트란 이름으로 거리 연주자로 등장해 천부적인 실력을 보입니다. 하루는 소리에 끌려 교회 합창단 연습장에 들렸다가 처음 보는 오선지와 오르간 앞에서 작곡하고 연주하는 놀라운 재능을 발휘합니다. 이를 지켜본 목사님이 줄리어드에 음악천재로 추천합니다. 줄리어드에서 사모곡 라프소디를 작곡해 주위를 놀라게 한 어거스트. 마침내 뉴욕필하모니 콘서트에 특별 출연자로 초청됩니다. 줄리어드 출신의 유명 첼리스트(엄마)와 함께. 하지만, 연주회를 앞두고 위기가 오죠. 워저드가 연습장에 나타나 아버지라며 친권을 주장하고 데려갑니다. 학교는 간곡히 연주회만큼은 보내달라고 부탁을 하지만 거절당하죠. 금관악기가 아이의 영혼을 뽑는다는 그릇된 인식으로... 다시 광장 연주에 나서는 어거스트. 부근을 지나던 루이스가 소리에 홀려 찾아오고, 금세 호흡을 맞추더니 황홀한 기타 2중주를 펼칩니다. 어거스트가 오늘 밤 있을 센트럴파크 공연을 알려주지만, 루이스는 귀에 담지 않고 “용기를 잃지 말라”는 말만 주고 떠납니다. 그날 밤, 어거스트는 친구의 도움으로 탈주에 성공해 연주장으로 달려가고, 지방공연에 나서던 루이스는 뉴욕 중심가에서 아이 얼굴이 나온 배너광고를 보지요. 전율을 느낀 그도 차를 버리고 연주회장으로 내달립니다. 환호 속에 첼로 연주를 끝낸 라일라가 아이를 생각하며 공원을 빠져나올 때, 줄리어드 총장이 특별초청 지휘자를 소개합니다. 무대에 등장하는 어거스트. 환호하는 청중... 놀라운 자작곡이 그의 지휘 속에 연주를 시작합니다. 밖을 향하던 라일라가 연주음에 끌려 뒤돌아서고, 또 반대편에서는 황홀한 눈빛의 루이스가 나타납니다. 마침내 무대 앞에 이르러 12년 만에 마주 서는 남과 여... 환희의 포옹을 할 때 지휘하는 아이의 모습이 비칩니다. 세상에는 수많은 소리들로 가득 차 있지요. 귀를 기울인 만큼 들리기도 하고 지나치기도 합니다. 끊임없이 들리는 세상의 소리를 옮겨 작곡하고 연주하는 음악천재가 말하죠. “아이들이 동화를 믿듯 저는 음악을 믿어요. 부모님이 살아계신다면 제 음악을 꼭 듣게 될 거야요.” 어거스트의 간절한 믿음처럼 나는 어떤 믿음을 확신하며 살고 있나요? 글 이관순(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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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4-29
  • 내 앉아있는 자리
    스산한 바람에 비까지 흩뿌리니 단풍은 지고 낙엽만 우수수 쌓입니다. 이렇듯 나무도 꽃도 지상의 모든 생명들이 사이즈를 줄이는 시기입니다. 그것이 한 주기의 마지막 겨울을 상대하는 지혜입니다. 사람이 나이가 든다는 것 또한 사이즈를 줄이는 것으로 시작됩니다. 몸집이 줄고, 먹는 게 줄듯 이것이 절제의 근본이며 이치입니다. 세상에 나올 때 작게 나왔으니 돌아갈 때도 비우고 작게 돌아가야 합니다. 여기에는 실상과 허상이 공존하지만 스스로 말수를 줄이고, 욕심도 미움도 줄이고, 자랑, 명예 같은 덧없는 것은 날려야 합니다. 그래야 사이즈가 줄지요. 루디 세네카는 “인간은 마치 시간이 모자란다고 불평하면서, 마치 시간이 무한정인 것처럼 행동한다.”고 사람의 어리석음을 비꼬았지요. 그런데 사람은 이를 알면서도 어제의 습관을 오늘도 고집하고 삽니다. 친구가 많다고 자랑하시나요? 바쁜 것을 미덕으로 생각하셨나요? 그보다는 흉금을 터놓고 말할 한 사람의 친구가 더 소중한 때입니다. 친구도, 만남도, 분주함도 지혜롭게 줄여가는 것이 노년의 삶을 가볍게 하고 실수를 줄이는 방법입니다. 우리 몸은 수분이 80% 이상이라고 하죠. 비슷한 비율로 우리 삶을 주장하고 있는 것이 말입니다. 그만큼 물과 말은 몸을 유지하고 삶을 구성하는 중요한 요소입니다. 그래서 절제를 말할 때 가장 먼저 꼽는 게 말입니다. 내가 살면서 토해낸 말을 양으로 계측한다면 얼마나 될까. 그중 꼭 필요했던 말은 얼마쯤 일까. 이제는 할 말 못할 말, 안 해도 좋을 말, 상처 주는 말을 가려가며 했으면 합니다. 내뱉은 말은 흘러간 세월처럼 돌릴 수 없으니... 그래서 이랬으면 좋겠습니다. “이제는 많이 들어주자. 듣는 귀는 8로 열고 말하는 입은 2로 줄이자. 남이 말할 때 자르지 말자. 중간에 끼어들지 말자. 말 줄기를 돌리지 말자.” 비위 상한다고 파르르, 욱, 버럭 하는 감정도 이젠 삭혀 없애야 합니다. 행여 그런 상황이 되면 심호흡 한 번으로 날려버리세요. 대신 많이 웃어주면 좋겠습니다. 상대가 가족, 친구, 이웃, 누구든 만나면 웃는 것으로 말문을 열어요. 나이가 들면 웃는 근육도 굳는다는데, 얼굴에 웃음기마저 빠지면 노인 특유의 표정 없는 일그러진 인상만 남아요. 나이가 든다는 것은 옻칠을 더하는 것처럼 윤을 내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미움이나 시기, 질투는 다 헛된 뜬구름이지요. 뜬구름을 좇다가 낯선 곳에 서 있는 나를 발견하는 건 아픈 일입니다. 살고 있는 이날, 앉아 있는 이 자리가 내가 족해야 할 자리임을 아는 사람은 행복합니다. 이 나이에 맘대로 못할 게 뭐야. 하지만 나이가 들수록 남을 배려하며 사는 인생이 아름답습니다. 살아보니 ‘역지사지(易地思之)’ 이상의 스승은 없더군요. 사서삼경이 대단한 게 아니라, 상대편 입장을 늘 먼저 헤아리면 그것이 상선의 절제입니다. “오죽했으면... 그래 저럴 수 있겠다... 나도 그 입장이면... 저도 사람인데.” 글 이관순(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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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4-22
  • 너도 죽는다‘메멘토 모리’
    말에는 묘한 힘이 있어 곱씹을수록 향기를 내는 말이 있고, 겸손함을 가르치는 말도 있지요. 라틴어는 그런 철학적 의미를 함의한 말과 글이 꽤 많습니다. 언젠가의 기억입니다. KBS TV '도전 골든벨‘에서 최후 1인이 된 학생에게 50번 마지막 골든벨 문제가 주어집니다. “고대 로마에서 승리를 쟁취한 장군이 개선행진을 할 때 주위에서 외쳤던 라틴어는?“ “메멘토 모리" 영예의 골든벨이 울리는 짜릿한 순간을 지켜보았지요. 다소 생소한 라틴어 '메멘토 모리(memento mori)'는 '죽음을 기억하라‘는 뜻입니다. 유래는 로마 공화정의 개선식으로 거슬러 올라가요. 개선식은 전쟁에서 승리한 장군에게 주어지는 영예입니다. 개선장군은 관습에 따라 전차를 타고 퍼레이드를 벌입니다. 영웅이 탄 마차가 시민의 환호 속을 헤치고 행진하는 동안 뒤에서 노예들이 큰소리로 외쳐댑니다. 메멘토 모리! 메멘토 모리! “오늘은 개선장군이지만 너도 언젠가는 죽는다. 겸손하게 행동하라.” 승리에 도취된 장군에게 본분을 잊지 않도록 경각심을 주는 장치인 셈이죠. 로마 최고의 환대 속에서도 너는 신이 아닌, 한 인간일 뿐임을 알린 것입니다. 메멘토 모리에는 세 가지 철학적 가치가 내재되어 있습니다. ‘죽음을 기억하라. 운명을 사랑하라. 현재에 충실하라.’ 이 셋은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도 적용되는 훌륭한 교훈입니다. 스티브 잡스도 스탠퍼드대 졸업식 축하 연설에서 이를 강조했습니다. 췌장암 투병으로 힘든 시기를 보내던 그는 ‘죽음은 삶이 만든 최고의 발명품‘이라고 격찬합니다. 그러므로 제한된 인간의 시간을 다른 누군가의 인생을 살 듯 낭비하지 말고 자신을 믿고 집중하라고 졸업하는 학생들에게 말합니다. 뜻이 통하는 라틴어에 ‘카르페 디엠(carpe diem)'이 있습니다. 몬래 이 말은 신을 공경하고 오만해지지 말라는, 현재를 가치 있게 살라는 뜻인데 이후 기독교 영향을 받아 현세의 부귀나 영화의 부질없음을 알립니다. 우리에게도 ‘화무십일홍’이란 말이 있죠. 열흘 가는 붉은 꽃이 없다는 이 말엔 ‘한 번 흥한 것은 반드시 쇠한다.’ 는 속뜻을 지닙니다. 트로트 가수 김연자가 불러 유명한 노래 ‘아모르 파티’도 같은 말입니다. 사랑을 뜻하는 아모르와 운명을 뜻하는 파티가 합성된 라틴어로 이 또한 ‘운명을 사랑하라’는 말이지요. 인간이 가져야 할 삶의 태도로 철학자 니체가 처음 사용했습니다. 메멘토 모리는 미국 남서부에 거주해온 나바호족에서도 찾을 수 있어요. 그들은 “네가 세상에 울면서 태어날 때 세상은 기뻐했으니, 네가 죽을 때 세상은 울어도 너는 기뻐할 수 있도록, 그러한 삶을 살아라.”는 의미심장한 철학을 닮고 있습니다. <메멘토 모리>, <카르페 디엠>, <아모르 파티>, <화무십일홍>까지 모두 겸손한 삶을 가르칩니다. 제한된 시간을 사는 인생에게 죽음을 기억하고, 운명을 사랑하고, 오늘에 충실하라.... 이보다 더 삶을 성찰하게 하는 말이 또 있을까 싶습니다. 글/ 이관순(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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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4-15
  • 의리가 사라진 세상
    짓궂은 질문을 해봅니다. ‘사람’과 ‘인간’은 같은 거야? 사전의 설명은 비슷 하지만, 아무래도 “저 인간!” 하면 부정적 이미지가 앞서죠. “저 사람 인품이 좋아”로는 써도 “저 인간 인품이 좋다”고 말하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세상에 사람 같지 않은 인간이 많다보니 용례까지 헷갈립니다. 초등학교 국어 교과서의 ‘의좋은 형제’를 생각하면 지금도 마음이 훈훈합니다. 우애 좋은 형제가 가을 수확을 마치고 들판에 볏단으로 노적가리를 만듭니다. 형이 보니 아우네 것이 적어 보입니다. 그날 밤, 어려운 아우 형편을 안 형이 자신의 볏단을 옮겨 놓고, 다음날 밤은 식솔 많은 형을 생각한 아우가 반대로 볏단을 옮기지요. 노적가리가 줄지 않자 형제 다 고개를 갸우뚱합니다. 마침내 볏단을 옮기던 형제가 달빛 아래 마주치면서 얘기는 끝나죠. 그때의 감동으로 습자시간이면 붓글씨를 ‘노적가리 풍년일세’만 썼던 기억이 납니다. 가난해도 마음은 풍년인 사람들이 살던 시절이 있었지요. 엊그제 복권 당첨금이 살인흉기가 된 사건이 났습니다. 우애 좋은 형제가 복권 당첨으로 수억 원의 당첨금을 받아 배분까지는 성공했는데, 그 돈으로 사업을 했던 형이 망하며 사단이 납니다. 돈을 더 요구하는 형과 보증을 선 동생 간에 감정이 충돌하다 동생을 살해하는 일이 벌어진 겁니다. 황금만큼 요괴스러운 것은 없습니다. 돈 앞에 장사가 없다지요. 일본 속담에 ‘담배꽁초와 돈은 쌓일수록 냄새가 난다’고 했습니다. 돈이 사람을 부패하게 만든다는 뜻이겠지요. 사는 것은 전보다 풍족해도 인성은 강퍅해졌습니다. 돈을 둘러싼 이기적 욕망이 칼끝처럼 첨예하게 부딪치는 세상입니다. 개신교의 큰 어른이셨던 목사님이 생전에 우리교회에 오셔서 당신이 붓으로 큼직하게 쓴 ‘의리를 지키자’란 글귀를 강단에 내리고 설교를 하신 적이 있습니다. 세상이 오죽하면 의리를 부탁했을까요. 사람과 사람,관계 사이에 의리가 사라졌다고 탄식하는 소리가 높아만 집니다. 제목을 잊은 영화입니다. 세 친구가 딱 한 번 은행을 털어 깨끗하게 살자며 치밀한 준비를 합니다. 그들의 거사는 성공했고 무사히 안전지대에 도착하자 돈다발을 놓고 환호합니다. 한 친구가 축배를 들자며 나갔다가 술에 독을 타서 옵니다. 욕심이 생긴 거죠. 태연하게 돌아온 친구가 술잔을 건네고 축배를 외칠 때, 팡팡! 술 사온 친구가 고꾸라지고 남은 둘은 낄낄댑니다. 뛰는 놈 위에 나는 놈이 있거든요. 둘은 더 큰소리로 건배를 외치지만 독배를 든 이들도 쓰러집니다. ‘사람에게 의리 빼면 시체’ 라고 말하던 세상이 있었지요. 의리란 뜻은 ‘사람관계에서 마땅히 지켜야 할 도리’로, 여기엔 사람이 갖춰야 할 덕목이 다 녹아져 있죠. 가난은 견뎌내기 어려운 것임을 경험한 세대가 모이면 그래도 그때가 좋았다고 반추합니다. 의리가 사라진 곳에 먹잇감을 놓고 으르렁 대는 동물세계가 어른댑니다. 사람 사이 흐르는 체온 대신 물질을 향한 충혈 된 눈빛만 섬뜩하니 사람은 없고 인간만 남아 보입니다. 다시 사전을 봅니다. ‘인간’이란 단어의 기본설명 뒤로 ‘사람의 모습은 하고 있되 사람답지 못하다는 뜻.’을 추가하고 예문도 달았군요. “저 인간이 한 짓을 생각하면 돌아버리겠어.” 너무도 흔히 듣는 슬픈 말이 됐습니다. 글 이관순(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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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4-08
  • 의리가 사라진 세상
    짓궂은 질문을 해봅니다. ‘사람’과 ‘인간’은 같은 거야? 사전의 설명은 비슷 하지만, 아무래도 “저 인간!” 하면 부정적 이미지가 앞서죠. “저 사람 인품이 좋아”로는 써도 “저 인간 인품이 좋다”고 말하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세상에 사람 같지 않은 인간이 많다보니 용례까지 헷갈립니다. 초등학교 국어 교과서의 ‘의좋은 형제’를 생각하면 지금도 마음이 훈훈합니다. 우애 좋은 형제가 가을 수확을 마치고 들판에 볏단으로 노적가리를 만듭니다. 형이 보니 아우네 것이 적어 보입니다. 그날 밤, 어려운 아우 형편을 안 형이 자신의 볏단을 옮겨 놓고, 다음날 밤은 식솔 많은 형을 생각한 아우가 반대로 볏단을 옮기지요. 노적가리가 줄지 않자 형제 다 고개를 갸우뚱합니다. 마침내 볏단을 옮기던 형제가 달빛 아래 마주치면서 얘기는 끝나죠. 그때의 감동으로 습자시간이면 붓글씨를 ‘노적가리 풍년일세’만 썼던 기억이 납니다. 가난해도 마음은 풍년인 사람들이 살던 시절이 있었지요. 엊그제 복권 당첨금이 살인흉기가 된 사건이 났습니다. 우애 좋은 형제가 복권 당첨으로 수억 원의 당첨금을 받아 배분까지는 성공했는데, 그 돈으로 사업을 했던 형이 망하며 사단이 납니다. 돈을 더 요구하는 형과 보증을 선 동생 간에 감정이 충돌하다 동생을 살해하는 일이 벌어진 겁니다. 황금만큼 요괴스러운 것은 없습니다. 돈 앞에 장사가 없다지요. 일본 속담에 ‘담배꽁초와 돈은 쌓일수록 냄새가 난다’고 했습니다. 돈이 사람을 부패하게 만든다는 뜻이겠지요. 사는 것은 전보다 풍족해도 인성은 강퍅해졌습니다. 돈을 둘러싼 이기적 욕망이 칼끝처럼 첨예하게 부딪치는 세상입니다. 개신교의 큰 어른이셨던 목사님이 생전에 우리교회에 오셔서 당신이 붓으로 큼직하게 쓴 ‘의리를 지키자’란 글귀를 강단에 내리고 설교를 하신 적이 있습니다. 세상이 오죽하면 의리를 부탁했을까요. 사람과 사람,관계 사이에 의리가 사라졌다고 탄식하는 소리가 높아만 집니다. 제목을 잊은 영화입니다. 세 친구가 딱 한 번 은행을 털어 깨끗하게 살자며 치밀한 준비를 합니다. 그들의 거사는 성공했고 무사히 안전지대에 도착하자 돈다발을 놓고 환호합니다. 한 친구가 축배를 들자며 나갔다가 술에 독을 타서 옵니다. 욕심이 생긴 거죠. 태연하게 돌아온 친구가 술잔을 건네고 축배를 외칠 때, 팡팡! 술 사온 친구가 고꾸라지고 남은 둘은 낄낄댑니다. 뛰는 놈 위에 나는 놈이 있거든요. 둘은 더 큰소리로 건배를 외치지만 독배를 든 이들도 쓰러집니다. ‘사람에게 의리 빼면 시체’ 라고 말하던 세상이 있었지요. 의리란 뜻은 ‘사람관계에서 마땅히 지켜야 할 도리’로, 여기엔 사람이 갖춰야 할 덕목이 다 녹아져 있죠. 가난은 견뎌내기 어려운 것임을 경험한 세대가 모이면 그래도 그때가 좋았다고 반추합니다. 의리가 사라진 곳에 먹잇감을 놓고 으르렁 대는 동물세계가 어른댑니다. 사람 사이 흐르는 체온 대신 물질을 향한 충혈 된 눈빛만 섬뜩하니 사람은 없고 인간만 남아 보입니다. 다시 사전을 봅니다. ‘인간’이란 단어의 기본설명 뒤로 ‘사람의 모습은 하고 있되 사람답지 못하다는 뜻.’을 추가하고 예문도 달았군요. “저 인간이 한 짓을 생각하면 돌아버리겠어.” 너무도 흔히 듣는 슬픈 말이 됐습니다. 글 이관순(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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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4-04
  • 슬픔이여 안녕!
    죄 없는 어린 생명이 희생될 때 더없이 고통스럽습니다. 남달리 알레르기 반응을 보이는 것은 일종의 트라우마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여덟 살에 충북 영동의 한 초등학교에 입학했습니다. 여름이 되면 아이들과 몰려서 마을 앞에 흐르는 강에 나갑니다. 겨울엔 썰매를 타고 여름엔 물놀이를 하는 곳. 경부선이 지나가는 철교 아래가 또래들의 여름 아지트지요. 흰줄 하나를 내린 검정 팬티를 입고 상급생들은 수영으로 강을 건너고, 하급생들은 교각 중턱에 걸터앉아 형들을 부럽게 바라보다가 텀벙 강물에 몸을 던집니다. 이날도 철교 아래에 한 떼의 아이들이 모였습니다. 비가 와서 물이 좀 불었지만 누구도 겁내지 않았지요. 그런데 물이 불면 수심에서 물돌이가 이는 걸 모른 게 비극입니다. 형들이 수영을 가르친다고 아이들을 밀어 넣는데 그만 1학년 쌍둥이 동생이 소용돌이에 말려든 겁니다. 아이가 물속에서 허우적이자 더럭 겁이 난 아이들이 달아나기 시작합니다. 나도 겁에 질려 뛰다가 뒤를 돌아봤는데, 발을 구르며 울부짖는 쌍둥이 형의 모습이 보였습니다. 죽은 아이는 내 짝꿍이었습니다. 마을이 발칵 뒤집어지고... 나도 밤마다 경기를 일으켰습니다. 땀을 흘리며 악몽에 시달렸지요. 물에 퉁퉁 부은 친구가 나를 원망했기 때문입니다. 넋이 나간 친구 엄마, 고래고래 소리질러 아들 이름을 부르는 아빠, 나를 원망스레 쳐다보는 쌍둥이 형... 나는 누구 앞에서도 고개를 들 수 없는 죄인이었습니다. 친구를 버리고 도망쳤다는 죄책과 슬픔이 어린 가슴을 쿵쿵 뛰게 했지요. 이로 인해 부모님 걱정도 덩달아 커졌습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아버지가 발령을 받아 새 임지로 이사하면서입니다. 가족이 아버지의 전근을 반색한 것도 나 때문이었죠. 아픈 기억은 상급학교로 진학할수록 많이 옅어졌습니다. 초등학교 동창들과 연락을 끊은 것도 도움이 됐습니다. 결혼 후로는 아예 잊다시피 지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어느날, 우연히도 길에서 쌍둥이 형을 만나면서 덜컥 상처가 뜯기고 말았습니다. 어머니는 우울증을 앓다가 목을 매셨고, 알코올 중독에 빠진 아버지도 암으로 돌아가셨답니다. 한 아이의 죽음이 이렇게 가족을 황폐화 시켰구나. 아물었던 내 상처에도 피가 나는 걸 느꼈습니다. 가족 중 유일한 생존자인 형의 얼굴에 깔린 그늘을 보았습니다. “가족 몫까지 잘 살아야지. 흔들릴 때마다 그렇게 위로해.” 예민한 성격 탓일까, 이후로 이따금 꿈을 꿉니다. 시골에서 놀던 추억들이, 떠난 어린 친구의 모습도 생생하게 포착됩니다. 더 힘들게 하는 건 잊을 만하면 날아드는 이런저런 또래 아이들 희생소식입니다. 줄어드는 인구도 걱정인데 죽었다하면 아이들이냐고 격분도 합니다. 지난 봄, 헝가리에서 유람선 전복으로 6세 소녀가 숨졌다는 비보가 그랬었죠. 외할머니 손을 꼭 잡은 아이의 인양된 모습은 더 애처로웠습니다. 그 아픔이 채 가시기도 전에 또, 엄마가 일곱 살 어린 아이를 데리고 동반자살을 했다는 비보가 들렸습니다. 죽음이 낯설기만 어린 나이에 얼마나 섬뜩했을까, 얼마나 설득했을까, 아니 강요했을까. 그래야 했던 엄마의 심정은? 푸른 6월에는 전 세계인을 슬픔에 잠기게 한 사고가 또 발생했습니다. 멕시코 국경에서 리오그란데 강을 건너 미국으로 밀입국하려던 25세 아빠와 두 살짜리 딸이 익사한 것입니다. 아빠가 아이를 셔츠 안에 넣고 아이는 아빠의 목을 끌어안은 채 떠내려 온 사진을 봤습니다. 물살을 이겨내려 했던 아빠의 다리는 물위에 떠 있고, 아이의 바지는 물먹은 기저귀로 불룩했습니다. 강 건너서 울부짖는 엄마의 얼굴이 오버랩됩니다. 멕시코 영화 ‘신 놈브레’는 중남미사람들이 ‘죽음의 열차’를 올라타고 미국으로 밀입국하려는 과정을 그린 영화입니다. 열차 지붕에 올라타다 떨어져 죽고 힘겹게 탄 뒤는 살해나 강간을 당하기도 합니다. 서글픈 것은 점쟁이가 찾아온 주인공에게 일러주는 말이죠. “넌 미국에 도착할거야. 그런데 안내는 신이 아닌 악마가 하지.”라고. 그 악마는 죽음의 열차를 올라 탄 아빠와 딸을 강물 속에 빠뜨린 것입니다. 스스로를 위로합니다. 어쩌면 아이들이 찾아간 저세상이 험난한 이 세상을 사느니 보다 낫지 않겠냐고. "여긴 낙원이 아냐. 슬퍼하지 말고 편히 쉬어라..." 오래전 읽은 프랑수아 사강이 쓴 ‘슬픔이여 안녕’ 이란 소설 제목이 떠오르는 것은 우연일까요? *글/이관순(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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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4-01

실시간 기고 기사

  • 아직 '고도'를 기다리는 중
    연극에 재미를 붙인 건 ‘추송웅’이란 배우 때문입니다. 1977년 삼일로 극장에서 초연된 ‘빨간 피터의 고백’이란 연극을 보면서죠. 추송웅 혼자 제작, 기획, 연출, 연기, 분장까지 수행한 모노극입니다. 극은 밀림에서 포획된 후 서커스 스타로 거듭난 원숭이 ‘빨간 피터’가 자신이 인간화된 과정을 보고하는 형식으로 짜였어요. 카프카의 소설 중 ‘어느 학술원에 보고된 자료’가 연극의 원작입니다. 포획 때 입은 상처가 붉게 남은 ‘빨간 피터’와 배우 추송웅의 캐릭터가 절묘하게 맞아떨어졌어요. 개막 4개월 만에 6만 관객을 동원하면서, 흔치 않은 흥행에 성공한 연극으로 화제가 됐었지요. 인간은 동물을 포획할 권리가 있는가? 생명의 자유와 평등, 인간의 야만을 원숭이의 감정으로 희로애락을 실감 나게 연기한 배우의 인상이 강렬해 ‘추송웅’은 피터요, ‘피터’는 추송웅이란 등가가 성립되었지요. 빨간 피터가 연극의 재미를 준 작품이라면 ‘고도를 기다리며’는 아직도 답을 찾아 헤매는 중입니다. 이 연극이 초연될 때 나는 ‘고도’가 킬리만자로 고봉에서 사라진 사람쯤으로 알았어요. 그런데... 그런 고도가 아니란 것을 대학에서 사뮈엘 베케트의 작품을 대하면서 알게 됐죠. 이처럼 낯 뜨거운 기억을 안고 공연장을 찾았는데 이 번엔 연극 내용이 나를 황당하게 만들었습니다. 이렇다 할 줄거리도 없이 두 사내는 하염없이 누군가를 기다립니다. 무대에 등장도 않는 ‘고도’를 기다리는 정체모를 두 인물. 불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의 대화가 연극의 주류를 이룹니다. 이젤까 저젤까 기다림은 지쳐가는 데 극은 벌써 끝날 시점에 섰습니다. “결국 고도씨는 오늘 밤에 못 오지만 내일은 올 예정”이란 황당한 결말로 관객들에게 새로운(헛김 빠지는) 충격(뭐야!)을 주며 막이 내립니다. 세계 연극사의 이정표를 놓은 ‘고도를 기다리며’의 작가 베케트는 시와 소설을 쓰다 47세 늦깎이로 처음 희곡을 발표합니다. 이것이 대성공을 거두어 세계 50여 개국 무대에 오르며 유명해졌습니다. 많은 사람이 고도가 어떤 사람인지 궁금해합니다. 대부분의 사람은 두 사람이 그토록 기다린 고도를 종교적 구원자로 연결하기도 해요. 언제 끝날지 모를 전쟁과 피신생활을 겪는 베케트에게 고도는 무엇일까. 흔히 이 작품을 대표적인 부조리 연극으로 칭합니다. 2차 대전이 끝난 이후 시작된 서유럽의 부조리한 사회상을 풍미한 부조리극은 새로운 연극 운동의 방향을 제시했어요. 작가의 엄격한 이미지와 작품의 난해함에도 최고의 작품으로 꼽는 건 고통스러운 인생의 비애 속에서 잃지 않은 유머 때문이 아닐까 해요. 찰리 채플린을 좋아한 작가는 웃음의 효능을 알고 있었어요. 열광적인 독자가 그에게 말을 건네었어요. “전 선생의 열렬한 팬이죠. 40년 동안 선생님 책을 읽었거든요.” 그러자 베케트가 “참 피곤하시 겠소.” 난해한 글을 읽느라 고생 좀 했겠다는 뜻입니다. 독자가 또 물어요. 나도 주인공처럼 뭔가를 계속 기다리는데 그것이 무언지 알지 못하겠다는 겁니다. 행복? 장수? 부자? 사랑? 딱히 손에 잡히질 않는다고 하자 작가의 답은 “피곤하시겠소.’ 똑같습니다. 언젠가 ‘르몽드‘지에 이런 연극 평이 실렸어요. “이 저녁에도 어딘가의 무대에서는 두 명의 사내가 오지 않은 ‘고도’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라고. 이 밤에도 세계 어딘가에서는 이 연극이 공연될 것이라는 뜻입니다. 인간의 의지가 무기력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인간은 고도를 기다립니다. 그 기다림 자체가 부조리한 것임에도 기다림을 포기할 수 없는 존재가 인간이란 것입니다. 그것이 나, 아니 우리 인생일 수 있겠죠. 무엇 때문에 사는지, 무엇을 기다리는지 모르고 홀로 외롭게 분투하다 황망하게 떠나는 인생을 생각하면, ‘고도…’의 무정함을 깨닫게 되죠. 인생에 크나 큰 목표가 있어야 의미가 있나를 생각하게 합니다. 짧은 인생을 살아보면 딱 부러지게 한 것이 없어 보여섭니다. 누구는 거창하게 살고, 또 누구는 실없이 사는 것처럼 보여도 각기 주어진 삶을 자기 방식으로 살뿐입니다. 인생은 성패로 좌우되는 프로젝트가 아니라, 그저 펼쳐지는 이야기란 생각도 들어요. 하지만 이 물음은 우리에게 철학을 요구합니다.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삶이 무엇이라 생각해요? 거창한 삶? 비천한 삶? 남에게 손가락질받지 않고 사는 ‘보통 사람의 삶’입니다. 그럼에도 이 말이 비범하게 들림은 세상엔 보통 사람의 삶마저 어렵게 만드는 요소들로 가득 차 있다는 것이죠. 하지만 ‘고도’는 기다려야 해요. 오늘 안 오면 다시 또 내일…. -소설가/daumcafe 이관순의손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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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4-10
  • 빛나던 노을빛 식탁의 축제
    사람들이 그렇게도 갈구하는 행복은 어디에 있는 걸까? 골드러시를 따라 미 서부로 향했던 그 많은 사람들은 무엇을 찾았을까. 공자는 행복을 궁금해하는 제자에게 ‘행복은 없다’고 명료하게 이르고, ‘인생에는 행복을 찾아가는 여정이 있을 뿐’이라고 덧붙였습니다. 공자가 말하는 행복은 눈이 혹할 보석 같은 게 아니었습니다. 바위 밑 은밀한 곳이나 화려한 샹들리에 속에 숨겨진 것도 아니고, 우리가 사는 일상생활 속의 그 사소한 것들, 그 속에 흐르고 있음을 말하려 한 것으로 보입니다. 행복은 더 이상 파랑새도 아니고 신기루도 아닌, 바로 우리의 바쁜 일상 속에 스쳐갑니다. 매일 우물에 나가 물을 길어 올리듯 행복도 기쁨도 일상이란 우물에서 길어 올려야 내 것이 됩니다. 나이가 들면 외롭다고 합니다. 돌아보니 그 많고 아름답던 내 일상들, 우주의 어느 시간보다도 값진 것들이 허공에 흩어졌기 때문입니다. 이를 되돌릴 수 없고 함께 할 수 없으니 쓸쓸한 것이겠지요. 자식들로 들썩이던 식탁은 소산 하다 못해 적막감마저 흐릅니다. 전화도 오고 주말이면 찾아주니 반갑기도 했는데 그마저 지난 일. 가깝게 살던 막내마저 지난해 본사가 이전한 진주로 내려갔습니다. 고개가 절로 끄덕여지는 옛말이 떠오릅니다. “마음이 지척이면 천리도 지척이고, 마음이 천리면 지척도 천리”라는 말. 예나 지금이나 세상사 이치가 한 획도 틀리는 게 없을까. 형제간의 소통도 예전 같지 않습니다. 통화를 해도 쉬 대화거리가 궁해 집니다. 전 같으면 이런저런 얘기들로 풍성하겠지만 빈 둥지끼리 나눌 것은 그저 건강 걱정이나 해주면 끝입니다. 흉허물이 없는 후배와 만났습니다. 슬하에 두 딸이 있는데 공부를 잘해 다 해외에 살고 있습니다. 큰 딸은 사위와 함께 독일에서 학위를 따고 눌러앉은 지 11년째랍니다. 대학 정교수가 되는 게 꿈인데 아직도 넘을 고개가 많다고 했습니다. 미국에서 학위를 받은 둘째는 스위스에 있는 유엔 기구에서 일합니다. 직장은 나무랄 데 없어 보이는데 사는 게 생각만큼 삼빡하지는 못한 모양입니다. 코로나가 휩쓸면서 한국으로 돌아올 궁리를 한답니다. 처지가 비슷한 사람끼리 만나면 자식들 얘기가 격의 없이 오갑니다. 집으로 돌아오니 오늘 따라 미국과 일본에 둥지를 튼 자식 생각으로 가득합니다. 오늘도 아들 걱정하다 맺는말은 “알아서 잘하겠지.” 내일은 손자 녀석이 화상통화라도 줄려나? 그러다가 “그래, 이번 주는 시험이라고 했지. 할아비가 깜박했다. 그래 공부 열심히 해야지.” 하며 생각을 접습니다. 다시 생각은 딸네를 향합니다. 일본에 있는 둘째는 지난 통화에서 아이 교육이 힘들다고 넋두리하던데…. 일본은 우리 대학 입시만큼 중학교 입시가 지옥문이라는데. “얘야, 어쩌겠니. 각오하고 살아야지.” 힘든 모습이 한눈에 보여도 이젠 도와줄 힘이 없구나. 그저 잘 되길 기도할 뿐입니다. 하루 삼시 세끼, 잠 잘 때도 간절한 마음으로 눈을 감습니다. 제 둥지로 날아간 자녀들과 만든 옛 추억을 더듬을 뿐이지만, 그렇다고 부모가 돼 넋두리만 할 수도 없는 일입니다. 그것이 인생이 거쳐야 할 여정이라 생각하고 마음의 평안을 위해 명상에 잠깁니다. 늘 아쉽고, 부족하고, 늘 그리움이 많은 게 우리네 인생입니다. 그래도 남은 인생이 있고 걸어야 할 길이 있고, 일상이 이어지는 한 희망이란 새 한 마리 날아와 내 어깨에 앉아 주기를 바랍니다. 그럴 때마다 간절해지는 것은 하늘의 은총입니다. 그 분만이 내 남은 여생에 삶의 무늬를 함께 짜 주실 분입니다. 식탁의 빈자리를 채워주고 내가 입술을 열어 기도하면 반겨 주시지요. 성경을 펴면 말씀이 두런두런 대화를 걸어옵니다. 예전에 몰랐던 행복감을 느끼는 건 이때입니다. 아이들과 함께 한 식탁의 축제는 흩어진 지 오래여도, 식탁의 감사는 오늘도 노을만큼 아름답습니다. 저녁 하늘이 노을에 젖는 것은 내일 아침이 있다는 예시입니다. 특별한 것은 없더라도 내일이란 것에 기대를 겁니다. 혹시 모를 일. 생각지 않은 귀한 손님이라도, 전화라도 올지 모를 테니까. 오늘도 붉게 핀 창밖 노을이 식탁으로 날 찾아옵니다. 사랑과 그리움이 절은 빈 의자들, 아내마저 저세상으로 떠난 뒤로는 가족들의 기억이 숨 쉬는 공간이 되었습니다. 커피 한 잔 탁자 위에 놓고 고 장영희 교수가 남긴 ‘영미시 산책’을 폈습니다. 타고난 장애와 세 번의 암 투병에도 삶의 희망을 노래하던 그녀의 영미시 해설은, 언제 읽어도 기분을 맑게 해 줍니다. 그녀가 자신의 장애를 딛고 살았듯이 우리는 모두 저만의 장애를 갖고 살아갑니다. 몸만 아니라고 마음의 장애도 있으니까요. 그녀가 좋아한 월트 휘트먼의 시 ‘나의 노래’가 이젠 나의 노래가 되었죠. 고뇌는 내가 갈아입는 옷 중 하나이니, 나는 상처받은 사람에게 기분이 어떤지 묻지 않는다. 나 스스로 그 상처받은 사람이 된다.? -소설가 daumcafe 이관순의 손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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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고
    2022-04-06
  • 빛나던 노을빛 식탁의 축제
    사람들이 그렇게도 갈구하는 행복은 어디에 있는 걸까? 골드러시를 따라 미 서부로 향했던 그 많은 사람들은 무엇을 찾았을까. 공자는 행복을 궁금해하는 제자에게 ‘행복은 없다’고 명료하게 이르고, ‘인생에는 행복을 찾아가는 여정이 있을 뿐’이라고 덧붙였습니다. 공자가 말하는 행복은 눈이 혹할 보석 같은 게 아니었습니다. 바위 밑 은밀한 곳이나 화려한 샹들리에 속에 숨겨진 것도 아니고, 우리가 사는 일상생활 속의 그 사소한 것들, 그 속에 흐르고 있음을 말하려 한 것으로 보입니다. 행복은 더 이상 파랑새도 아니고 신기루도 아닌, 바로 우리의 바쁜 일상 속에 스쳐갑니다. 매일 우물에 나가 물을 길어 올리듯 행복도 기쁨도 일상이란 우물에서 길어 올려야 내 것이 됩니다. 나이가 들면 외롭다고 합니다. 돌아보니 그 많고 아름답던 내 일상들, 우주의 어느 시간보다도 값진 것들이 허공에 흩어졌기 때문입니다. 이를 되돌릴 수 없고 함께 할 수 없으니 쓸쓸한 것이겠지요. 자식들로 들썩이던 식탁은 소산 하다 못해 적막감마저 흐릅니다. 전화도 오고 주말이면 찾아주니 반갑기도 했는데 그마저 지난 일. 가깝게 살던 막내마저 지난해 본사가 이전한 진주로 내려갔습니다. 고개가 절로 끄덕여지는 옛말이 떠오릅니다. “마음이 지척이면 천리도 지척이고, 마음이 천리면 지척도 천리”라는 말. 예나 지금이나 세상사 이치가 한 획도 틀리는 게 없을까. 형제간의 소통도 예전 같지 않습니다. 통화를 해도 쉬 대화거리가 궁해 집니다. 전 같으면 이런저런 얘기들로 풍성하겠지만 빈 둥지끼리 나눌 것은 그저 건강 걱정이나 해주면 끝입니다. 흉허물이 없는 후배와 만났습니다. 슬하에 두 딸이 있는데 공부를 잘해 다 해외에 살고 있습니다. 큰 딸은 사위와 함께 독일에서 학위를 따고 눌러앉은 지 11년째랍니다. 대학 정교수가 되는 게 꿈인데 아직도 넘을 고개가 많다고 했습니다. 미국에서 학위를 받은 둘째는 스위스에 있는 유엔 기구에서 일합니다. 직장은 나무랄 데 없어 보이는데 사는 게 생각만큼 삼빡하지는 못한 모양입니다. 코로나가 휩쓸면서 한국으로 돌아올 궁리를 한답니다. 처지가 비슷한 사람끼리 만나면 자식들 얘기가 격의 없이 오갑니다. 집으로 돌아오니 오늘 따라 미국과 일본에 둥지를 튼 자식 생각으로 가득합니다. 오늘도 아들 걱정하다 맺는말은 “알아서 잘하겠지.” 내일은 손자 녀석이 화상통화라도 줄려나? 그러다가 “그래, 이번 주는 시험이라고 했지. 할아비가 깜박했다. 그래 공부 열심히 해야지.” 하며 생각을 접습니다. 다시 생각은 딸네를 향합니다. 일본에 있는 둘째는 지난 통화에서 아이 교육이 힘들다고 넋두리하던데…. 일본은 우리 대학 입시만큼 중학교 입시가 지옥문이라는데. “얘야, 어쩌겠니. 각오하고 살아야지.” 힘든 모습이 한눈에 보여도 이젠 도와줄 힘이 없구나. 그저 잘 되길 기도할 뿐입니다. 하루 삼시 세끼, 잠 잘 때도 간절한 마음으로 눈을 감습니다. 제 둥지로 날아간 자녀들과 만든 옛 추억을 더듬을 뿐이지만, 그렇다고 부모가 돼 넋두리만 할 수도 없는 일입니다. 그것이 인생이 거쳐야 할 여정이라 생각하고 마음의 평안을 위해 명상에 잠깁니다. 늘 아쉽고, 부족하고, 늘 그리움이 많은 게 우리네 인생입니다. 그래도 남은 인생이 있고 걸어야 할 길이 있고, 일상이 이어지는 한 희망이란 새 한 마리 날아와 내 어깨에 앉아 주기를 바랍니다. 그럴 때마다 간절해지는 것은 하늘의 은총입니다. 그 분만이 내 남은 여생에 삶의 무늬를 함께 짜 주실 분입니다. 식탁의 빈자리를 채워주고 내가 입술을 열어 기도하면 반겨 주시지요. 성경을 펴면 말씀이 두런두런 대화를 걸어옵니다. 예전에 몰랐던 행복감을 느끼는 건 이때입니다. 아이들과 함께 한 식탁의 축제는 흩어진 지 오래여도, 식탁의 감사는 오늘도 노을만큼 아름답습니다. 저녁 하늘이 노을에 젖는 것은 내일 아침이 있다는 예시입니다. 특별한 것은 없더라도 내일이란 것에 기대를 겁니다. 혹시 모를 일. 생각지 않은 귀한 손님이라도, 전화라도 올지 모를 테니까. 오늘도 붉게 핀 창밖 노을이 식탁으로 날 찾아옵니다. 사랑과 그리움이 절은 빈 의자들, 아내마저 저세상으로 떠난 뒤로는 가족들의 기억이 숨 쉬는 공간이 되었습니다. 커피 한 잔 탁자 위에 놓고 고 장영희 교수가 남긴 ‘영미시 산책’을 폈습니다. 타고난 장애와 세 번의 암 투병에도 삶의 희망을 노래하던 그녀의 영미시 해설은, 언제 읽어도 기분을 맑게 해 줍니다. 그녀가 자신의 장애를 딛고 살았듯이 우리는 모두 저만의 장애를 갖고 살아갑니다. 몸만 아니라고 마음의 장애도 있으니까요. 그녀가 좋아한 월트 휘트먼의 시 ‘나의 노래’가 이젠 나의 노래가 되었죠. 고뇌는 내가 갈아입는 옷 중 하나이니, 나는 상처받은 사람에게 기분이 어떤지 묻지 않는다. 나 스스로 그 상처받은 사람이 된다.? -소설가 daumcafe 이관순의 손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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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4-03
  • 받은 은혜는 기억하라
    세상엔 아직 그의 감동적인 발표를 기억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2000년 ‘전 재산 사회환원’이란 뜻을 밝히고 이듬해 맨손으로 일군 반도체 기업 마저 전문 경영인에게 넘긴 정문술 미래산업 창업주 말입니다. 나이 62세. 경영자로는 경륜이 한창 무르익을 때죠. 이를 두고 언론은 아름다운 퇴진이라고 반겼지만 정작 그는 “얼른 줘버리고 남은 여생을 편히 살겠다”라며 인터뷰 요청조차 손사래를 쳤지요. “물러난 사람이 나서는 건 노추”라 했고 여기저기 얼굴 내미는 일은 노욕이라고 했어요. 그는 젊은 벤처 기업가들의 롤모델이었고 ‘대부’로 불리기도 했습니다. 그가 1983년 세운 미래산업은 반도체 검사장비 업체로 출발했습니다. 때마침 전 세계 반도체 수요가 급증하면서 한국 반도체 설비업체 중 독보적인 존재로 성장할 때입니다. 국내기업 최초로 미국 나스닥에 상장될 만큼 성장세를 타던 시기에 은퇴를 결행한 것도 주위를 놀라게 한 점입니다. 경영권을 물려주면서 직원들에게 ‘착한 기업을 만들어 달라’는 당부를 잊지 않았어요. 세상을 놀라게 한 건 재산 기부입니다. 2001년 300억원이란 거금을 KAIST에 기부해 큰 화제를 부르더니 3년 후 다시 215억원의 재산을 같은 곳에 내놓아 정문술의 이미지를 굳혔지요. 개인이 한 기부로는 역대 최고액이었지만 그가 내건 조건은 딱 하나. “기부용도 외에는 쓰지 말 것.” 단 얼마라도 용도를 바꿔 사용하면 즉각 회수하겠다는 조건을 달았다고 해요. KAIST는 뜻에 따라 정보기술(IT)과 생명공학(BT)의 융합학문과 미래학 연구기관을 설립합니다. 정문술빌딩과 부인 이름의 양분순빌딩을 짓고 국내 처음으로 미래전략대학원을 만들어 연구 요람으로 삼았지요. 그는 또 거액의 기부금 집행을 KAIST 이광형 교수가 주도해 줄 것을 학교에 요청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 큰돈을 한 사람에게 맡긴다는 것이 납득하기 어려웠어요. 그러자 이렇게 설명합니다. “내게 베푼 은혜가 있습니다. 연구개발이 뜻대로 안 돼 사업 부진으로 경영에 큰 고통을 겪고 있을 때였어요. 특별한 인연도 없는 이 교수가 날 찾아와 우리 회사에 첨단기술을 전수해 주었습니다. 말로 할 수 없는 은혜를 입었으니 내가 일생 동안 잊을 수 없었다고 했습니다. 때가 되면 어떻게 하든 이 은혜를 갚겠다고 늘 마음에 새겨 왔다고 배경을 설명했습니다. 사람들이 궁금증을 풀자 또 다른 궁금함이 들었어요. 이번에는 이광형 교수를 찾아가 물었습니다. “무슨 연유로 그 회사를 찾아가 그 수준 높은 기술을 조건 없이 전수해 주었는가?” 그러자 이 교수가 이런 답을 내놓았어요. “전 국가 장학금으로 선진국 유학을 했습니다. 국가가 저를 과학기술인으로 만들어 준 셈이죠. 제가 은혜를 입었으니 국가 발전에 보답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정문술 회장, 카이스트, 이광형 교수가 삼각 고리가 되어 설립한 정문술 빌딩은 첨단의 IT+BT 융합기술 개발을 통해 차세대 먹거리를 찾는 연구 메카로 자리를 잡습니다. 정문술은 오랜 공직생활 중 쫓겨나 43세에 퇴직금으로 시작한 사업이 실패하고 와신상담 끝에 다시 도전하여 미래산업을 창업했습니다. 무수한 난관과 시련이 잇따랐지만 굴하지 않았습니다. 끝까지 신념을 잃지 않고 밀고 나가 자신과의 약속을 실천했습니다. 사업가로서 후회 없는 삶을 살았으니, 이제 내가 설 자리가 어딘지를 살핀 겁니다. 하차할 타이밍과 서야 할 자리를 찾은 것입니다. 많은 사람이 기부를 하지만, 정문술의 기부가 눈길을 끄는 건 ‘기부는 기부로 끝’이라는 소신 때문입니다. 학교 행사 초청은 물론 정문술빌딩 준공식에 조차 얼굴을 내밀지 않았으니까요. “국민을 먹여 살릴만한 연구 성과가 나올 때까지 부르지 말라”고 버티던 그가 빌딩 준공 6년 만에 학교로 연구 현장을 처음 찾습니다. 연구팀의 괄목할 연구 성과 소식을 듣고서야…. 말은 쉬워도 사실 받은 만큼 베푼다는 건 쉽지 않은 일입니다. 아무리 성실하게 이타적인 삶을 사는 사람이라도 쌓은 부의 절반만 내놓으면 훌륭한 사회 환원일 것입니다. 그런데 백 가지 은혜를 입고 그 이상 몇십 몇백 배로 세상에 갚는 사람이 있습니다. 바로 이런 사람들에 의해 세상은 빛나고 살맛 나는 사회가 만들어지는 게 아닐까요? 이 글에 딱 어울리는 촌철살인의 명문장을 영국의 낭만파 시인 바이런이 남겼습니다. 남에게 베푼 것은 잊고, 받은 은혜는 기억하라. -소설가 daumcafe 이관순의 손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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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3-30
  • 알렉산더도 실수를 했다
    외국에서는 발행도 되기 전 주문이 쌓이고 거금의 선 계약금이 지불될 정도로 관심을 끌지만 우리나라에선 주목을 받지 못하는 것이 있지요. 자서전, 회고록, 평전 같은 이름의 책들입니다. 모두 한 개인의 살아온 지난 삶에 대한 서술 뭉치들입니다. 자서전이 개인사에 치중한 글이라면, 회고록이나 평전은 이에 더해 필자가 살아온 시대 및 사회적 현실에 무게를 둡니다. 역사 기록도 좁혀 보면 수많은 유·무명의 사람들이 살아온 세상살이를 보여주는 거울입니다. 어린이가 읽을 필수도서로 굳어진 ‘위인전’처럼, 그래야 평전·회고록도 읽는 맛이 각별합니다. 엄정하게 쓰인 자서전만큼 귀한 역사기록도 없습니다. 개인적인 삶이 곧 정치적이고, 가장 개인적인 삶이 가장 역사적인 것이 되기도 해요. 이순신의 ‘난중일기’나 유성룡의 ‘징비록’ 같은 책이 그렇습니다. 최근 읽은 책으로 영국의 ‘디스커버리 시리즈’를 번역한 《알렉산드로스 대왕》과 토머스 딜로렌조 교수가 쓴 《링컨의 진실》이 있어요. 알렉산드로스 대왕은 우리에게 친숙한 알렉산더의 본명입니다. 스물다섯 살 젊은 나이로 왕위에 오른 후 단 한 번의 패배도 없이 격렬한 군사 정복을 지속하여 남유럽과 북아프리카, 서아시아에 이르는, 고대 세계에서 가장 큰 제국을 건설했어요. 이로부터 동양과 서양을 융합하는 헬레니즘 문명이 잉태돼 인류 문명사를 빛나게 했고, 그의 발자취는 시대를 넘어 수많은 이야기로 만들어져 후대에 전해졌습니다. 이 책은 정교한 일러스트와 사진으로 생활상과 전투 장면을 생생하게 드러냅니다. 페르시아 대군을 격파한 티레 해전은 바닷가 요새의 탑과 투석기, 함선 접근을 막는 물속 바위까지 세밀하게 보여주지요. 책의 매력은 알렉산더의 위대함과 잔인함을 함께 묘사해 기존 위인전의 틀을 벗어났다는 것이죠. 페르시아를 정복한 그는 술독에 빠져 원로 지휘관을 창으로 찔러 무참히 살해하는 실수도 가감 없이 드러냅니다. “우리는 알렉산드로스를 잃었다. 우리를 경멸하는 신을 위해 우리가 피를 흘렸단 말인가?”라는 부하들의 절규는, 인간이란 선악 어느 한쪽으로 구분 지을 수 없는 양면의 존재임을 설파합니다. 본성이 같은 인간에게 완벽한 인격과 우월적 존재가 따로 있을까? 온누리를 고루 밝히는 햇볕도 그늘을 만드는데 하물며 사람에게 그림자 없는 삶을 기대하는 것 자체가 난망한 일입니다. 역사가 칭송하는 인물도 흠결은 다 있습니다. 미국 역대 대통령 가운데 위대한 인물로 추앙 받는 에이브라함 링컨, 철강왕 앤드류 카네기, 영국인이 존경하는 윈스턴 처칠도 예외이지 않습니다. 링컨이 보인 변호사 시절의 처신, 남북전쟁에서의 문제는 지금도 논쟁이 이어집니다. ‘재산을 가지고 죽는 것은 부끄러운 짓이다’ 라며 소유의 90%를 사회에 내놓은 카네기도 자랑스럽지 못한 과오가 있어요. 기업을 일으키며 많은 경쟁기업과 사람에게 아픔과 상처를 남겼으니까요. 하지만 미국 사람들은 링컨과 카네기를 깎아내리지 않아요. 오히려 미국인의 긍지를 심은 인물로 높이 평가합니다. 미국이 위대한 인물로 정치인보다 훌륭한 기업인, 예술인을 앞세우는 것도 같은 이유입니다. 큰 업적 앞에 과는 사람이면 피할 수 없는 허물로 덮어줍니다. 윈스턴 처칠도 마찬가지죠. 인도가 영국 식민지 시절, 벵골 지방 가뭄으로 4백만 명이 아사할 때 보인 그의 비인도적 모습은 우리가 아는 처칠과 또 다른 얼굴입니다. 그럼에도 2차 대전을 승리로 이끈 영국의 위대한 인물로 꼽아요. 동시대를 살아보지 않고 사람을 판단하는 건 참 어려운 난제입니다. 우리는 한없이 부족한 인간들이니까요. 잘 쓰인 평전이나 회고록은 객관적인 나를 바라보는 안목을 키워줍니다. 그럼에도 안타까운 것은 우리 서점에 나온 많은 전기 책들엔 자신의 잘못과 실수에 대한 진솔한 고백이 없다는 점입니다. 한결같이 살아온 길을 미화하는 것에 그치고 있다는 아쉬움을 남깁니다. 모두가 험난한 파도를 타고 넘은 서퍼 이야기뿐입니다. 고통과 시련을 불굴의 의지로 이겨내고, 열정과 도전으로 태산준령을 넘었다는 인간 승리의 이야기로 가득 찹니다. 나무가 하늘 높이 솟기까지 얼마나 그늘을 만들었는지, 이로 인해 어린 나무들의 성장을 해쳤는지는 생각지 않아요. 치열한 경쟁에서 승리한 사람도 자랑뿐이죠. 그래서 패자를 보듬는 승자 모습이 아름답습니다. 높이 오른 사람일수록 누리는 것이 많은 사람일수록 나를 내세우기 전에 자신이 만든 그늘부터 생각해 볼 일입니다. 남을 탓하기 전에 자신의 성찰을 앞세워야 하고 나의 성공을 말하기 전에 내가 남에게 준 상처와 그늘을 생각 해야 합니다. 임종을 맞는 분의 말만큼 솔직한 인생 고백은 없어요. 이 자리에선 세상의 명예나 훈장은 빛을 잃고 영광은 쇠락해 그림자마저 없습니다. 고맙고... 미안하고... 사랑한다... 그뿐입니다. 오래전 한국 기업 1세대 대기업 창업주의 일대기를 쓰기 위해 고인의 아내를 인터뷰한 적이 있어요. “회장님이 병상에서 마지막으로 하신 말씀이 있느냐?”라고 물었습니다. 그날 뜻밖의 말을 들었습니다. 회사를 염려하지도, 자식을 걱정하지도 않았어요. “내가 사람들에게 몹쓸 일 많이 했지?” 날이 저물어 어둠이 깔릴 때 스스로를 돌아본 것입니다. “그런 소리 마세요. 회장님은 다 회사를 위해 필요한 일을 한 거예요.” 부인은 뜻밖의 남편 말에 당황했지만 그는 세상을 등질 때 60년 기업 인생의 성공보다 업을 생각했던 모양입니다. 인생은 다 한 편의 영화요 책일 만큼 굽이친 역정을 밟고 살아갑니다. 우리의 일생이 그만큼 희로애사의 언덕을 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 여러 사람에게 좋은 영향도 주었겠지만 해를 주기도 했겠죠. 사람의 일생에는 공과가 함께 존재합니다. 이리 살고 저리 살아도 남는 건 후회뿐입니다. 나이 60이 넘어 석양이 기우는 걸 보면 시선을 안으로 돌려 내 안의 허물과 부끄러움을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소설가 daumcafe 이관순의 손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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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3-27
  • 으뜸 중에 으뜸인 행복
    중국어에 ‘심경(心景)’이란 말이 있습니다. 직역하면 마음의 경치를 이르는 말이지만, 마음의 경치를 보는 눈을 두고 언제가 좋고 언제는 나쁘다, 이렇게 말할 수는 없다는 뜻입니다. 10년 전 굉장히 중요했던 일이 지금은 아무것도 아닐 수 있습니다. 그 시절 추구했던 가치와 생각이 언젠가부터 무의미해지고, 철 지난 옷처럼 잊기도 합니다. 삶은 늘 현실에 기초해 있으니까요. 어려서부터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 이라며 자존감을 북돋는 육아방식이 꼭 100점짜리일 수는 없습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과 괴리가 있다면, 교육은 보다 현재에 서야 하니까요. 많은 사람이 ‘행복은 불행의 가능성을 하나씩 제거해 나가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 방향성에 대해선 숙고할 필요가 있어요. 불행의 요소들을 싹둑싹둑 잘라냈다고 진정한 행복을 차지할까요? 어릴 때 잘못된 교육이 반(反) 사회적 성격장애를 만들기도 합니다. 타인에 공감하지 못하고 적의를 품는 사이코패스나, 자기도취형 인간, 나르시시스트 같은 성격장애자가 현실과 부조화 속에 만들어집니다. 이들의 대표적 공통점은 수치심입니다. 남에게 무안당하거나 잘못을 인정하지 않으려 하고 참지 못하는 특징이 있어요. 이를 피하기 위해 방어막을 치거나 주변 사람을 괴롭히며 잘못을 뒤집어 씌웁니다. “내가 감기에 걸린 건 너 때문이야.” 옷을 얇게 입은 것은 나인데 함께 놀러 간 친구를 탓하는 것과 같아요. 우리 삶이 급격히 가상공간으로 빨려 들면서 ‘특별한 나’를 믿는 사람이 많아졌습니다. 작은 불편도 참지 못하고 자신의 행복과 타인의 불행이 겹칠 때, 자기 행복만을 변호합니다. 생명계에서 인간이라고 특별한 지위가 있는 것은 아니듯 사람도 특별한 사람은 없습니다. 모두가 ‘고유’할 뿐입니다. ‘너 자신을 알라’는 글을 놓고 생각이 분분함도 마찬가지 현상입니다. 누구는 ‘존귀한 자’ ‘세상에 하나뿐인 너’라며 자존감을 일러주고, 또 누구는 ‘너의 분수를 알라’라며 비루한 모습부터 깨치라고 해요. 비행기를 발명한 라이트 형제보다 천 년 앞서 하늘을 나는 실험을 한 사람이 있어요. 스페인 학자 아바스 이븐 피르나스. 그는 나뭇가지와 천으로 날개를 만들어 달고 모스크 종탑에서 뛰어내렸습니다. 이렇게 인류 최초의 비행은 완전 실패로 끝났습니다. 그는 하늘을 나는 일에만 집중했지 착륙하는 방법에는 소홀했기 때문입니다. 이로 인해 몸은 심하게 다칠 수밖에 없었어요. 하지만 그의 가상한 용기는 항공사(史)에 남았습니다. 지금도 바그다드 공항엔 그의 이름을 딴 광장이 있고 동상도 있다고 전합니다. 세상은 불가능한 것을 향한 괴짜들의 도전으로 열광하고 발전하니까요. 인류는 언제부터 하늘을 향해 고개를 치켜드는 걸 자랑으로 삼았어요. 그러나 먹을 것을 얻으려면 땅을 향해 숙일 줄도 알아야 합니다. 아무리 이상과 꿈이 좋아도 현실을 외면하면 실패할 뿐입니다. 오늘도 곳곳에서 “너는 사랑받기 위해 태어났으며, 세상의 중심이며, 세상은 너로 인해 변화될 것”이라고 축복송을 불러주지만, 실전 무대인 세상에서 그대로 통할지는 미지수입니다. 나는 불행과 싸워 이기기 위해 태어났으며, 열정과 도전정신으로 세상을 향해 나아가며, 모든 과정 하나하나를 감사하고 기뻐하자? 책을 읽다가 눈에 들어와 메모해 둔 어느 분의 좌우명입니다. 행복은 인생이란 과정에서 일어나는 희로애락과 오욕칠정의 변화무쌍한 오색 띠 속에 존재합니다. 때로는 부드럽게, 거칠게, 뜨겁게 채색하면서 오신채를 씹으면서 느끼는 희열이 참 행복이고 가치입니다. 행복은 마냥 좇는다고 잡히지 않아요. 그럴수록 더 멀리 도망을 갑니다. 누구나 겪게 되는 불행, 불운, 결핍이란 것에 용기와 인내, 도전이라는 재료가 섞일 때 행복의 토양이 일궈집니다. 소설가 마크 트웨인은 ‘천국에는 유머가 없다’고 책에 썼어요. 유머와 웃음, 진정한 행복은 잔잔한 호수면처럼 편안함만으로 삶이 이어질 때 생기는 것이 아님을 그는 알아챘기 때문입니다. 슬픔과 고난, 역경을 겪으며 하나씩 이겨내는 과정에서 얻어지는 기쁨이 우리 가슴을 벅차게 합니다. 우리는 대개 마지막이 좋으면 다 좋은 것 같지만, 마지막이 좋으면 좀 더 좋은 것일 뿐입니다. 인생은 과정 하나하나가 소중해서입니다. 행복은 어느 순간 떠오르는 하늘의 쌍무지개가 아닙니다. 삶의 순간순간 소소한 일상 속에서 만들어지고 향기롭게 피어납니다. 으뜸 중 으뜸인 행복은 무엇일까? 힘들어도 하고 싶은 일을 즐겁게 하는 것이며, 그 일을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하는 것 우리 인생에서 그 이상의 간절함이 또 있나 싶습니다.(*) -소설가 daumcafe 이관순의 손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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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3-23
  • 습관으로 만드는 좋은 나
    산책을 나왔던 닭과 나귀가 사자를 발견하고 사색이 되어 동굴에 몸을 숨겼습니다. 사자의 발자국 소리에 가슴이 쿵쿵 뜁니다. 터질 듯한 심장을 가누지 못한 닭이 죽기 살기로 울어댔습니다. 닭의 울음에 신경질이 난 사자가 스트레스받는다며 발길을 돌려 그냥 나가버립니다. 그러자 나귀가 생각합니다. “괜히 쫄았잖아. 닭이 운다고 놀라 도망을 가다니! 그런 게 사자였어?” 졸아들었던 가슴을 편 당나귀가 우쭐해 건방을 떱니다. “너 여기 있어. 내가 나가서 사자를 혼내주고 올 테니까.” 말리는 닭을 뿌리치고 으스대며 나간 당나귀는 그 길로 불귀의 객이 되었습니다. 진정 행복하기를 원한다면 내 삶의 구석구석에서 부족함을 인정하는 것으로 시작해야 해요. 1986년 미국의 우주왕복선 챌린저호가 발사 후 75초 만에 ‘펑~’ 폭발하면서 승무원 모두 사망했습니다. 챌린저호 발사가 전 세계에 TV로 생중계되던 터라, 폭발 장면은 온 세계 사람들로 비명을 지르게 했습니다. 수 억 개의 뇌세포 가운데 하나만 잘못돼도 바보가 되는 게 우리 인간입니다. 우리 동네 열 살짜리 어린이가 비교적 손쉽다는 뇌수술을 받았습니다. 수술은 잘 끝났다고 했는데 말을 못 합니다. 1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불행은 순간순간 삶의 현장 곳곳에 덫을 놓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내게는 ‘그런 일이 없을 거야.’ 망각하며 사는 것이 우리네 삶입니다. 말은 청산유수고 모든 걸 다 아는 척 떠들지만 실제 행동은 동떨어진 이중적인 모습을 보이곤 합니다. 연약한 인간이 지닌 삶의 가장 큰 덕목은 ‘겸손’입니다. 섣부른 위로보다 밥 먹듯 성실하게 사는 인생이 제일입니다. 마음까지 온유한 사람은 내 연약함을 살피며 배려하는 최고의 삶을 살아갑니다. 어느 선현이 말했어요. “너무 착한 사람, 너무 공부 잘하는 사람 말고 관찰하는 사람이 돼라. 겨울 베란다 창가에 놓인 양파는 어떻게 뿌리를 내리며, 여자는 언제 울고 노인은 언제 웃는가”를 살피라고 합니다. 관찰하는 사람은 내 안에 갇혀 살지 않고 시선을 밖으로 돌려 살아요. 세상은 밖으로 열려 있지, 안으로는 이기적인 자아가 있을 뿐이죠. 열린 사람이 돼라는 것은 세상을 긍정적으로 넉넉히 품으라는 말입니다. 우리는 오늘도 일어날지 모른다는 강박에 시달리며 얼마나 근심 속에 삽니까? 마음에 이는 불은 전국 소방차가 다 달려와도 끄지 못합니다. 미움과 시기, 내 아집이 마음에 불씨를 만듭니다. 온유한 마음, 겸손한 태도는 모난 사람을 품어 둥글게 다듬어 줍니다. 여기서 나오는 친절한 마음은 모순과 다툼을 풀어주며, 어려운 일을 수월하게 하고, 어두운 마음에 불을 밝혀 줍니다. 누가 열불 나게 만들거든 말을 하기 전에 열부터 세어 보세요. 그래도 안 풀리면 ‘참을 인(忍)’자를 열 번 써 보세요. 교만은 소리부터 내지만 온유한 사람은 마음으로 삭이고 받아들입니다. 명철한 사람은 사람을 얕보지 않고 사람 관계에서 악을 멀리 합니다. 남의 행위와 말은 언제나 선의로 해석하는 습관을 들여요. 좋은 글과 책을 읽는 것도 선한 마음을 닦는 일입니다. 괴테는 좋은 글이란 “어린이에게 노래가 되고, 청년에겐 철학이 되고, 노인에겐 시가 되는 글”이라고 했어요. 계층과 연대를 초월한 감동을 줍니다. 책 속의 세상이 이해가 된다면 꽤 좋은 책입니다. 긴 시간 책을 읽고, 강연을 듣고, 설교를 들었는데, 기억에 남는 것이 없을 때가 참 많습니다. 짧은 만남, 짧은 글을 읽고도 떠오르는 말이나 문장이 있다면 꽤 괜찮은 만남, 좋은 글을 읽은 것입니다. 남은 세월이 얼마나 된다고 안달하며 탐심에 갇혀 살까. 나누고 비우면 채워지는 것도 있으니, 감사한 마음 행복한 마음입니다. 죽을 때 남기는 것은 닦은 마음과 지은 사랑뿐인 것을. 누군가 사랑하며 감사하며 살아도 부족한 날들. 남은 세월이 얼마나 된다고 마음 아파하고 화를 내면서 살까. 참지 못하고 성부터 내는 사람이 손해라면서, 나는 오늘 몇 번 화를 내고 아픈 말을 했을까. 되는대로 말하고 목청을 높이는 일은 스스로 동굴에 가두는 일예요. 대화의 첫 번째 규칙은 듣는 것입니다. 말하는 동안은 아무것도 배울 수 없으니까요. 귀는 열고, 조근조근 말하는 루틴을 만드세요. 많이 웃으세요. 웃음은 전염됩니다. 슬픔과 아픔에 위로가 되고 사람들 사이를 잇는 딱풀입니다. 웃는 건 썩 좋은 습관이예요. 감사하며 나누고 배려하는 삶은 마음속 미소로 시작됩니다. 노력이 습관을 만들고, 습관이 모이면 관행을 만들고, 관행이 모여서 전통을 만듭니다. 우리 집 가풍도, 사회적 관습도, 나라의 전통도 내가 놓는 벽돌 한 장으로 시작됩니다. -소설가 daumcafe 이관순의손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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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3-20
  • 습관으로 만드는 좋은 나
    산책을 나왔던 닭과 나귀가 사자를 발견하고 사색이 되어 동굴에 몸을 숨겼습니다. 사자의 발자국 소리에 가슴이 쿵쿵 뜁니다. 터질 듯한 심장을 가누지 못한 닭이 죽기 살기로 울어댔습니다. 닭의 울음에 신경질이 난 사자가 스트레스받는다며 발길을 돌려 그냥 나가버립니다. 그러자 나귀가 생각합니다. “괜히 쫄았잖아. 닭이 운다고 놀라 도망을 가다니! 그런 게 사자였어?” 졸아들었던 가슴을 편 당나귀가 우쭐해 건방을 떱니다. “너 여기 있어. 내가 나가서 사자를 혼내주고 올 테니까.” 말리는 닭을 뿌리치고 으스대며 나간 당나귀는 그 길로 불귀의 객이 되었습니다. 진정 행복하기를 원한다면 내 삶의 구석구석에서 부족함을 인정하는 것으로 시작해야 해요. 1986년 미국의 우주왕복선 챌린저호가 발사 후 75초 만에 ‘펑~’ 폭발하면서 승무원 모두 사망했습니다. 챌린저호 발사가 전 세계에 TV로 생중계되던 터라, 폭발 장면은 온 세계 사람들로 비명을 지르게 했습니다. 수 억 개의 뇌세포 가운데 하나만 잘못돼도 바보가 되는 게 우리 인간입니다. 우리 동네 열 살짜리 어린이가 비교적 손쉽다는 뇌수술을 받았습니다. 수술은 잘 끝났다고 했는데 말을 못 합니다. 1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불행은 순간순간 삶의 현장 곳곳에 덫을 놓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내게는 ‘그런 일이 없을 거야.’ 망각하며 사는 것이 우리네 삶입니다. 말은 청산유수고 모든 걸 다 아는 척 떠들지만 실제 행동은 동떨어진 이중적인 모습을 보이곤 합니다. 연약한 인간이 지닌 삶의 가장 큰 덕목은 ‘겸손’입니다. 섣부른 위로보다 밥 먹듯 성실하게 사는 인생이 제일입니다. 마음까지 온유한 사람은 내 연약함을 살피며 배려하는 최고의 삶을 살아갑니다. 어느 선현이 말했어요. “너무 착한 사람, 너무 공부 잘하는 사람 말고 관찰하는 사람이 돼라. 겨울 베란다 창가에 놓인 양파는 어떻게 뿌리를 내리며, 여자는 언제 울고 노인은 언제 웃는가”를 살피라고 합니다. 관찰하는 사람은 내 안에 갇혀 살지 않고 시선을 밖으로 돌려 살아요. 세상은 밖으로 열려 있지, 안으로는 이기적인 자아가 있을 뿐이죠. 열린 사람이 돼라는 것은 세상을 긍정적으로 넉넉히 품으라는 말입니다. 우리는 오늘도 일어날지 모른다는 강박에 시달리며 얼마나 근심 속에 삽니까? 마음에 이는 불은 전국 소방차가 다 달려와도 끄지 못합니다. 미움과 시기, 내 아집이 마음에 불씨를 만듭니다. 온유한 마음, 겸손한 태도는 모난 사람을 품어 둥글게 다듬어 줍니다. 여기서 나오는 친절한 마음은 모순과 다툼을 풀어주며, 어려운 일을 수월하게 하고, 어두운 마음에 불을 밝혀 줍니다. 누가 열불 나게 만들거든 말을 하기 전에 열부터 세어 보세요. 그래도 안 풀리면 ‘참을 인(忍)’자를 열 번 써 보세요. 교만은 소리부터 내지만 온유한 사람은 마음으로 삭이고 받아들입니다. 명철한 사람은 사람을 얕보지 않고 사람 관계에서 악을 멀리 합니다. 남의 행위와 말은 언제나 선의로 해석하는 습관을 들여요. 좋은 글과 책을 읽는 것도 선한 마음을 닦는 일입니다. 괴테는 좋은 글이란 “어린이에게 노래가 되고, 청년에겐 철학이 되고, 노인에겐 시가 되는 글”이라고 했어요. 계층과 연대를 초월한 감동을 줍니다. 책 속의 세상이 이해가 된다면 꽤 좋은 책입니다. 긴 시간 책을 읽고, 강연을 듣고, 설교를 들었는데, 기억에 남는 것이 없을 때가 참 많습니다. 짧은 만남, 짧은 글을 읽고도 떠오르는 말이나 문장이 있다면 꽤 괜찮은 만남, 좋은 글을 읽은 것입니다. 남은 세월이 얼마나 된다고 안달하며 탐심에 갇혀 살까. 나누고 비우면 채워지는 것도 있으니, 감사한 마음 행복한 마음입니다. 죽을 때 남기는 것은 닦은 마음과 지은 사랑뿐인 것을. 누군가 사랑하며 감사하며 살아도 부족한 날들. 남은 세월이 얼마나 된다고 마음 아파하고 화를 내면서 살까. 참지 못하고 성부터 내는 사람이 손해라면서, 나는 오늘 몇 번 화를 내고 아픈 말을 했을까. 되는대로 말하고 목청을 높이는 일은 스스로 동굴에 가두는 일예요. 대화의 첫 번째 규칙은 듣는 것입니다. 말하는 동안은 아무것도 배울 수 없으니까요. 귀는 열고, 조근조근 말하는 루틴을 만드세요. 많이 웃으세요. 웃음은 전염됩니다. 슬픔과 아픔에 위로가 되고 사람들 사이를 잇는 딱풀입니다. 웃는 건 썩 좋은 습관이예요. 감사하며 나누고 배려하는 삶은 마음속 미소로 시작됩니다. 노력이 습관을 만들고, 습관이 모이면 관행을 만들고, 관행이 모여서 전통을 만듭니다. 우리 집 가풍도, 사회적 관습도, 나라의 전통도 내가 놓는 벽돌 한 장으로 시작됩니다. -소설가 daumcafe 이관순의손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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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3-16
  • 자연도 인생도 곡선입니다
    사람 사는 게 꼭 등산 같다고 해 인생여등산(人生如登山)이란 말이 나왔어요. 때론 난관에 부딪히고 때론 길을 잘못 들어 헤매긴 해도 그렇게 한 걸음씩 내디디면서 자신만의 길을 만들어 갑니다. 인생이 그렇고 역사가 그래요. 7080 세대만큼 인생을 치열하게 산 사람도 없습니다. 까라면 까고, 박으라면 박고, 막힌 건 뚫어냈지요. 무슨 일이든 맡기면 군말 없이 척척 해냈던 세대입니다. 대한민국이 여기까지 오는 데는 그들의 ‘빨리빨리’란 과도한 집념이 큰 역할을 했습니다. 제 몸 상하는 줄도 모르고서… 빨리빨리는 그 세대가 숭앙했던 미덕이었으니까요. 그러나 압축성장으로 경제대국이란 등반엔 성공하지만, 뒤란에 들인 그늘도 많습니다. 성장에 가려 배분이 공평하지 못했고 잘못 든 길도 있었어요. 우리 삶에 자리 잡은 직선이란 가치가 그렇습니다. 당시 직선은 선택이 아닌 필수였어요. 돈도 기술도 없이 앞선 자를 따라잡자니 힘에 부치고 자연 빠른 직선을 선호하게 되면서 집념이 신념으로 바뀌었습니다. 이념보다 무서운 게 신념이니까요. 현대인의 큰 오류는 직선에서 시작됐습니다. 시발점에 증기 기관차 발명이 가져온 철도가 있어요. 산에 막히면 터널을 뚫고, 물길에 막히면 다리를 놓았지요. 직선의 효능이 확인될수록 수난을 당하는 건 자연의 곡선들입니다. 철도, 고속도로, 길이란 길은 모두 직선으로 뻗어갔습니다. 이젠 마을 길까지 외곽으로 직선화하는 조급증을 앓고 있지요. 직선의 효능은 다시금 주거공간으로 파고들었어요. 한강변에 즐비한 성냥갑 아파트는 압축성장을 상징한 한국건축의 표상입니다. 수백 년의 서구 문화를 우린 수십 년 만에 뚝딱 해치웠으니까요. ‘굽은 건 죄다 펴라.’ 이젠 구불구불한 섬까지 직선의 유혹에 휘말렸어요. 육지와 연결한 연육교란 말이 고전으로 밀려난 지 오래고 십수 km 밖 섬과 육지를 연결하는 ‘ㅇㅇ대교’ 같은 이름의 대로가 깔렸지요. 그 많은 섬들이 쭉쭉 뻗은 다리와 길로 연결되면서 섬의 고유한 맛을 잃었습니다. 육지와 이어진 섬들은 급속히 육지 문화에 물들고 특유의 낭만과 쉼을 주던 바닷가 풍경은 기억 속으로 숨었어요. 자연을 이기적으로 다룬 ‘직선’은 언젠가 재앙으로 돌아옵니다. 인류가 안고 있는 환경문제의 바탕엔 ‘직선의 유혹’이 깔려 있어요. 편리함이란 달콤함에 고귀한 가치를 버린 겁니다. 계층, 세대 간 갈등 역시 직선을 앞세운 압축성장이 남긴 이름에 다름 아닙니다. 내 직선의 행위가 칼날이 돼 상처를 주고, 그것이 내 상처로 돌아옴을 알 때는 시간이 흐른 후가 되겠죠 자연은 직선이 아니라 ’곡선‘입니다. 자연의 한쪽인 인간의 삶도 곡선입니다. 평균수명이 환갑도 안 될 때는 짧은 해에 서둘러야 했지만, 100세 시대에는 호흡을 길게 가져가야 해요. 성공신퇴(成功身退)란 말처럼 어느 나이에 이르면 내려올 준비를 잘 해야 합니다. 산을 아는 사람은 정상에 오르는 것을 등산이라 말하지 않아요. 중요한 것은 무사히 하산하는 것입니다. 인생을 잘 살고도 마지막 길이 헝클어지면, 허망하기 짝이 없습니다. 몇몇 톱스타들의 말년 소식을 접하면서 마음 아픈 것도 그 때문이죠. 석양을 등 진 사람일수록 조심스러운 게 내려오는 길입니다. 자연 속에서 마음이 편안해 짐은 자연의 착한 곡선 때문입니다. 나무와 숲, 바위, 작은 돌멩이, 풀포기까지 곡선 아닌 것이 없어요. 곡선의 회복은 자연의 순응이고 재활입니다. 그동안 빨리 걷느라 다리도 아프고 지쳤으니, 이젠 천천히 생각하며 걸어요. 주변을 살피고 나도 성찰하면서 구불구불한 숲길을 밟듯이 도란도란 얘기 나누며 걸어야 노년 인생이 여유롭습니다. 곡선에는 틈이 생깁니다. 그 틈으로 햇살이 파고들어요. 틈이 보이지 않는 사람은 잘 나고 똑똑해도 정 주기가 쉽지 않아요. 화려하지만 온기라곤 없는 대리석과 같으니까요. 틈이 있어야 물이 스며들고 땅을 촉촉이 적십니다. 사람도 틈이 있어야 합니다. 좀은 허술한 구석이 있고 틈을 보여야 그 틈으로 바람이 불고 꽃향기가 들어오고 사람들이 찾아옵니다. 틈과 곡선이 삶을 따뜻하게 만듭니다. 틈과 곡선은 현대인의 허점이 아니라 넉넉함과 여유로움입니다. 100세 시대가 행복하려면 꼬부랑 인생길을 돌 때, 더불어 함께 걸을 사람이 있어야 합니다. 그것은 서로가 틈을 열어 살을 비비고 체온을 전하면서 희로애락을 나누는 일입니다. 내가 먼저 그의 틈으로 찾아드는 물이 되고 햇빛이 된다면 보다 행복해질 거예요. 나의 행복, 나의 낙원은 스치며 도는 지금 이 자리, 이 틈에 있어요. ‘Here & Now.’ -소설가/ daumcafe 이관순의 손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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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3-13
  • 흔들리며 오는 봄
    “산 너머 남촌에는 누가 살길래 해마다 봄바람이 남에서 오네...” 오늘아침 FM방송에서 박재란의 봄노래를 들으며 달력을 보았습니다. ‘국경의 밤’을 쓴 김동환의 시에 곡을 붙인 그녀의 명곡입니다. “꽃피는 4월이면 진달래 향기, 밀 익는 5월이면 보리 내음새, 어느 것 한 가지인들 실어 안 오리 남에서 남풍 불 때 나는 좋데나...” 아직은 조석에 이는 바람이 매워도 더는 봄을 막지 못합니다. 그럼에도 봄을 노래하지 못하는 건 녹록지 않은 안팎의 환경 탓이겠죠. 무지막지한 러시아의 침공으로 백척간두에서 바람 앞의 등불처럼 흔들리는 우크라이나의 아픔이 그렇고... 방역 성공을 자랑하던 나라가 하루 코로나 확진자 수 세계 1위라는 순위도 가시처럼 목에 걸려요. 모진 겨울을 털어내지 못하는 이유입니다. 일상의 봄으로 가는 고비가 이렇게 힘겹습니다. 옛날, 작은 왕국이 있었어요. 인자한 왕과 착한 백성이 평화를 사랑하는 행복한 소왕국입니다. 여기에도 남이 잘 되는 꼴을 보지 못하는 마법사가 있었어요. 하루는 왕을 찾아가 백성 흉을 늘어놨어요. 백성을 믿다가 발등 찍힌다고 이간질을 했습니다. 그러나 왕은 사악한 마법사를 쫓아냅니다. 그러자 이번엔 백성 대표를 찾아가 왕의 간악함을 알렸어요. 왕이 머잖아 백성을 내치고 재산을 몰수할 것이라고. 대표들도 마법사 말에 현혹되지 않고 그를 내쫓았습니다. 왕과 백성 모두 에게 박대를 당한 마법사는 약이 머리끝까지 올랐어요. 왕국에 어떻게 복수할까를 생각하다 엄청난 일을 꾸몄어요. 자신이 지닌 바이러스를 퍼뜨리기로 한 겁니다. 마법사는 모두가 잠든 새벽, 백성들이 사용하는 우물에 바이러스를 풀었어요. 효과는 곧바로 나타났지요. 우물물을 마신 사람들이 미쳐 날뛰기 시작했습니다. 우물을 따로 쓰는 왕의 가족만 빼고요. 흥분한 백성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옵니다. 평화의 왕국이 한순간 미친 왕국이 돼버린 거예요. 왕은 혼란을 통제하기 위해 긴급조치를 발동했습니다. 그러나 이를 시행할 관청이나 치안을 맡은 경찰이 이미 바이러스에 중독된 상태여서 왕명에 복종을 거부합니다. “이런 말도 안 되는 왕명은 받들 필요가 없다”라며 오히려 왕을 비난했습니다. 백성들은 왕이 미쳐버렸다고 탄식의 소리를 높였어요. 시위대로 돌변한 백성들이 궁궐 앞으로 몰려들더니 왕의 하야를 외치기 시작합니다. 상황은 갈수록 악화될 조짐을 보였어요. 절망에 빠진 왕이 하야를 고민합니다. 그때 지혜로운 왕비가 묘안을 냈어요. “우리도 저들과 똑같은 우물물을 마셔보자고요. 그러면 백성과 같아질 게 아니겠어요?” 정신이 온전하든 돌아버리든 백성과 같아지면 더 이상 왕을 비난하진 못할 것이라고 말입니다. 왕은 시녀에게 우물물을 길어 오게 하고 왕비와 함께 그 물을 마셨습니다. 그러자 왕이 희한한 헛소리를 시작합니다. 그것을 본 백성들이 환호합니다. “와! 우리 왕이 제정신을 찾으셨다”라며. 백성들은 왕을 악령으로부터 보호해야 한다면서 고을마다 ‘왕빠’들이 앞장서 결사옹위를 다짐합니다. 왕국에는 잃었던 평화가 찾아왔어요. 왕과 백성이 생각과 마음이 같아 지면서 모든 사물이 정상으로 보였습니다. 마을이 평온을 찾자 심기가 상한 마법사가 이번에는 우물에다 바이러스 해독제를 풀었어요. 이물을 마신 신하들이 또 왕이 이상해졌다며 숙덕입니다. 삽시에 왕이 다시 미쳤다는 소문이 돌았어요. 백성들의 원성은 높아지고, 신하들은 망령이 도졌다며 왕은 말도 안 되는 명을 거두라고 반발합니다. “미친 왕은 하야하라.” 금세 시위대가 들끓어 올랐고, 왕은 할 수 없이 하야를 결심하는데 왕비가 새로 길어온 우물물을 들고 나타납니다. 물을 마신 왕은 다시 정상이 됐고 나라도 마침내 평온을 찾았지요. 우리가 사는 것이 새날 같지만 실은 데자뷔 같은 세상을 사는 거예요. 정상과 비정상이 주기적으로 바뀌고 진심과 사심(邪心)이 모호해져 분별력을 잃게도 하죠. 그제 전철을 타고 양수리를 찾았습니다. 운길산역에서 철길을 건너 강변을 따라 걸으면 발 끝에 ‘두물경’이라 쓰인 돌비석과 만납니다. 결빙과 해빙이 공존한 곳…. 밀려나는 겨울과 밀려오는 봄이 합수하는 때가 지금입니다. 두 강줄기가 합수해 만든 호수와 팔 벌린 운길산과 검단산이 사방으로 열어놓은 아름다운 경관과 조우합니다. 암록빛 강물과 강가 버드나무에 스치는 연록 빛과 억새 위로 소복이 내려 앉는 봄볕들…. 봄은 강을 타고 오른다는 말이 맞아요. 두 시간 남짓, 친구와 둘이서 겨우내 눅눅했던 마음을 훈풍에 말리고, 따뜻한 자연의 성정과 위로를 청하기도 하면서…. 자연이 주는 위로는 늘 어질고 진실됩니다. 엄혹했던 겨울을 이기고 찾아오는 봄소식을 듣습니다. 강화도 친구가 담장 아래 잔설을 헤집고 꽃대를 올린 복수초 사진을 보내오고, 횡성에 사는 친지는 변산바람꽃 소식을 담아보냈습니다. 봄의 특징은 바람입니다. 봄은 흔들리며 옵니다. 꽃도 흔들리며 피고, 가지들도 흔들리며 잎을 냅니다. 바람이 생명을 깨우고 봄길을 열어요. 봄을 이기는 겨울은 없다더니, 어둑한 동네 골목에도 춘광이 쌓입니다. 코로나 후유증으로 고생하는 친구, 자식을 잃고도, 공장을 불태우고도, 숯덩이 된 가슴으로 이 봄을 맞는 사랑하는 내 이웃들…. 꿋꿋하게 겨울을 이겨낸 이들이 고맙습니다. 이 봄에 전하고 싶은 안부는 살아 있음에 감사하는 농밀한 마음입니다. “잘 했어, 잘 하고 있어, 잘 할 거야.” -소설가/ daumcafe 이관순의 손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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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3-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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