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5-13(월)
 

사람 사는 게 꼭 등산 같다고 해 인생여등산(人生如登山)이란 말이

나왔어요. 때론 난관에 부딪히고 때론 길을 잘못 들어 헤매긴 해도

그렇게 한 걸음씩 내디디면서 자신만의 길을 만들어 갑니다.

 

인생이 그렇고 역사가 그래요. 7080 세대만큼 인생을 치열하게 산

사람도 없습니다. 까라면 까고, 박으라면 박고, 막힌 건 뚫어냈지요.

무슨 일이든 맡기면 군말 없이 척척 해냈던 세대입니다.

 

대한민국이 여기까지 오는 데는 그들의 ‘빨리빨리’란 과도한 집념이

큰 역할을 했습니다. 제 몸 상하는 줄도 모르고서… 빨리빨리는 그

세대가 숭앙했던 미덕이었으니까요.

 

그러나 압축성장으로 경제대국이란 등반엔 성공하지만, 뒤란에 들인

그늘도 많습니다. 성장에 가려 배분이 공평하지 못했고 잘못 든 길도

있었어요. 우리 삶에 자리 잡은 직선이란 가치가 그렇습니다.

 

당시 직선은 선택이 아닌 필수였어요. 돈도 기술도 없이 앞선 자를

따라잡자니 힘에 부치고 자연 빠른 직선을 선호하게 되면서 집념이

신념으로 바뀌었습니다. 이념보다 무서운 게 신념이니까요.

 

현대인의 큰 오류는 직선에서 시작됐습니다. 시발점에 증기 기관차

발명이 가져온 철도가 있어요. 산에 막히면 터널을 뚫고, 물길에

막히면 다리를 놓았지요.

 

직선의 효능이 확인될수록 수난을 당하는 건 자연의 곡선들입니다.

철도, 고속도로, 길이란 길은 모두 직선으로 뻗어갔습니다. 이젠

마을 길까지 외곽으로 직선화하는 조급증을 앓고 있지요.

 

직선의 효능은 다시금 주거공간으로 파고들었어요. 한강변에 즐비한

성냥갑 아파트는 압축성장을 상징한 한국건축의 표상입니다. 수백

년의 서구 문화를 우린 수십 년 만에 뚝딱 해치웠으니까요.

 

‘굽은 건 죄다 펴라.’

이젠 구불구불한 섬까지 직선의 유혹에 휘말렸어요. 육지와 연결한

연육교란 말이 고전으로 밀려난 지 오래고 십수 km 밖 섬과 육지를

연결하는 ‘ㅇㅇ대교’ 같은 이름의 대로가 깔렸지요.

 

그 많은 섬들이 쭉쭉 뻗은 다리와 길로 연결되면서 섬의 고유한

맛을 잃었습니다. 육지와 이어진 섬들은 급속히 육지 문화에 물들고

특유의 낭만과 쉼을 주던 바닷가 풍경은 기억 속으로 숨었어요.

 

자연을 이기적으로 다룬 ‘직선’은 언젠가 재앙으로 돌아옵니다.

인류가 안고 있는 환경문제의 바탕엔 ‘직선의 유혹’이 깔려 있어요.

편리함이란 달콤함에 고귀한 가치를 버린 겁니다.

계층, 세대 간 갈등 역시 직선을 앞세운 압축성장이 남긴 이름에

다름 아닙니다. 내 직선의 행위가 칼날이 돼 상처를 주고, 그것이

내 상처로 돌아옴을 알 때는 시간이 흐른 후가 되겠죠

 

자연은 직선이 아니라 ’곡선‘입니다. 자연의 한쪽인 인간의 삶도

곡선입니다. 평균수명이 환갑도 안 될 때는 짧은 해에 서둘러야

했지만, 100세 시대에는 호흡을 길게 가져가야 해요.

 

성공신퇴(成功身退)란 말처럼 어느 나이에 이르면 내려올 준비를 잘

해야 합니다. 산을 아는 사람은 정상에 오르는 것을 등산이라 말하지

않아요. 중요한 것은 무사히 하산하는 것입니다.

 

인생을 잘 살고도 마지막 길이 헝클어지면, 허망하기 짝이 없습니다.

몇몇 톱스타들의 말년 소식을 접하면서 마음 아픈 것도 그 때문이죠.

석양을 등 진 사람일수록 조심스러운 게 내려오는 길입니다.

 

자연 속에서 마음이 편안해 짐은 자연의 착한 곡선 때문입니다.

나무와 숲, 바위, 작은 돌멩이, 풀포기까지 곡선 아닌 것이 없어요.

곡선의 회복은 자연의 순응이고 재활입니다.

 

그동안 빨리 걷느라 다리도 아프고 지쳤으니, 이젠 천천히 생각하며

걸어요. 주변을 살피고 나도 성찰하면서 구불구불한 숲길을 밟듯이

도란도란 얘기 나누며 걸어야 노년 인생이 여유롭습니다.

 

곡선에는 틈이 생깁니다. 그 틈으로 햇살이 파고들어요. 틈이 보이지

않는 사람은 잘 나고 똑똑해도 정 주기가 쉽지 않아요. 화려하지만

온기라곤 없는 대리석과 같으니까요.

 

틈이 있어야 물이 스며들고 땅을 촉촉이 적십니다. 사람도 틈이 있어야

합니다. 좀은 허술한 구석이 있고 틈을 보여야 그 틈으로 바람이 불고

꽃향기가 들어오고 사람들이 찾아옵니다.

 

틈과 곡선이 삶을 따뜻하게 만듭니다. 틈과 곡선은 현대인의 허점이

아니라 넉넉함과 여유로움입니다. 100세 시대가 행복하려면 꼬부랑

인생길을 돌 때, 더불어 함께 걸을 사람이 있어야 합니다.

 

그것은 서로가 틈을 열어 살을 비비고 체온을 전하면서 희로애락을

나누는 일입니다. 내가 먼저 그의 틈으로 찾아드는 물이 되고 햇빛이

된다면 보다 행복해질 거예요.

나의 행복, 나의 낙원은 스치며 도는 지금 이 자리, 이 틈에 있어요.

‘Here & Now.’

-소설가/ daumcafe 이관순의 손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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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도 인생도 곡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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