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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아빠가 미안하다, 널 몰랐구나
    며칠 전 전국 청소년 글짓기 심사를 끝내면서 갖는 유감입니다. 유한양행을 설립한 유일한 박사의 정신을 받들어 유한재단이 해마다 5월이 되면 전국 초?중?고생을 대상으로 백일장을 개최합니다. 올해로 28년째니 연륜이나 규모면에서 전국 규모로 열리는 대표적 청소년 백일장입니다. 올해는 천여 명의 청소년이 아카시아 향이 흩날리는 유한공고 교정에 모여 초?중?고별 글제에 따라 글 향기를 뽐냈습니다. 씁쓸한 것은 ‘내가 아버지라면’ 이란 글제를 놓고 중학생들이 보여준 아버지에 대한 의식 때문입니다. 글제를 택할 때 10대의 자녀들이 평소 아버지란 존재에 대해 어떤 생각을 할까? 글을 통해 아버지 상(像)을 유추해보자는 의도가 있었지요. 글제를 내면서 ‘혹시나’ 했는데, 적지 않은 학생에게서 아버지의 이미지가 긍정적이지 못함을 확인하고 말았습니다. 학생들은 아버지가 칭찬에 인색하다는데 불만이 컸습니다. “잘했네” “알았다” “수고했어.” 등과 같은 정감 없는 아버지의 말투에 아이들도 묻는 말에나 답하는 단답식 대화가 늘어남을 알 수 있었지요. 아버지의 칭찬이 있을 때도 그 뒤에 따라올 말에 신경을 쓴답니다. 때 아닌 칭찬이 의심스럽다는 눈초리죠. “그래 그건 잘했어. 그런데 넌...” 한숨까지 섞인 조언을 듣노라면 작은 희망조차 웅크려진다고 합니다. 아이들은 순수한 칭찬에 목말라합니다. 아버지의 특징으로 감정표현이 없다고 합니다. 무뚝뚝한 아버지, 어려운 아버지라고 쓴 학생이 많았습니다. 그러면서 아이들은 원합니다. 내 이름을 자주 불러주는 아빠, 사랑한다고 말해주는 아빠를 기다립니다. “이리와 봐” 식의 부름보다 격려의 부름이, 사랑의 부름이었으면 한답니다. “넌 왜 엄마를 통해서 말하지?” 아버지의 불만도 이해는 되지만 사실 자초한 면이 없지 않습니다. 평소 대화가 부족했다는 방증이지요. 아이들은 철부지가 아니었습니다. 속에 담아놓고 말을 안 할뿐, 아버지가 가족을 위해 희생한다는 걸 알고 있습니다. 아는데도 다가서기가 쉽지 않은 분일뿐이지요. 역지사지(易地思之)로 사고의 전환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자녀의 입장에서 생각해보는 그런 자세가 필요하다고 느꼈기 때문입니다. 어버이날, 친구들과 나눈 에피소드입니다. 어버이 날이라고 아들이 전화를 했을 때, 예전에 우리는 첫마디를 이렇게 말했지요. “그래 나다. 기다려 엄마 바꿔줄게” 아들이 그게 아니고요 하면 “벌써 돈 떨어졌냐?” 그래도 아들이 용기를 내 ‘아버지 사랑합니다’라고 말할 때의 대답은 더 걸작입니다. “미친 놈, 뚱 단지 같긴!” 옛날 자신들의 모습을 떠올리며 파안대소했습니다. 자식의 마음을 알면서도 멋대가리 없는 말을 했다고. 따지고 보면 그렇게 큰 아들이 지금의 아빠들입니다. 대를 이어 배워온 언어의 관습이 그렇다면, 누구를 탓할 입장도 아니지요. 대화도 훈련이 되지 않으면, 끊기고 단절되기 싶습니다. 대화의 부족이나 불만은 그것으로 끝나지 않고 정서적 불만으로 이어집니다. 갈수록 멀어지는 아버지, 외톨이가 되는 아버지는 어쩌면 현대사회가 만든 자화상일지 모릅니다. 피곤에 절어 밤늦게 퇴근하고 새벽처럼 나가는 아버지... 가뜩이나 어려워진 자영업자 아버지... 그 침통함이 무의식중에 그렇게 비춰진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버지의 노고에 감사하면서도 강한 이미지 때문에 접근하기가 쉽지 않은 이유입니다. 아이들은 크면서 아버지가 힘없는 존재라는 것을 압니다. 엄마가 자녀들과 대화를 독점하고 있을 때 혼자서 담배를 피우는 모습이 쓸쓸해 보였다고 합니다. “나 요즘 힘들다”고 엄마에게 말할 때는 아버지 어깨를 누르는 책임감도 느껴졌답니다. 좋은 세상이 된 줄 알았는데 예나 지금이나 아버지란 존재가 외롭기는 마찬가지인 듯합니다. 사람은 태어난 후 ‘아빠, 엄마‘ 로 부르며 성장기를 보내다가 때가 되면 ’아버지 어머니‘로 바꿔 부르기 시작합니다. 멀리 이스라엘에서도 같은 호칭을 사용한다고 해 놀랐습니다. 기독교100주년기념교회를 담임하다 정년퇴임하고 거창으로 내려간 친구 이재철 목사가 전하는 말입니다. 이스라엘을 갔을 때, 누가 아빠하고 뒤에서 부르더랍니다. 깜짝 놀라 돌아보니 이스라엘 아이가 자기의 아빠를 부르는 것이었습니다. 같은 뜻의 어휘지만 ’아빠‘와 ’아버지‘는 의미가 사뭇 다릅니다. 아빠는 아버지를 뜻하는 아람어고, 아버지는 역어인 헬라어입니다. 아빠로 불리는 아버지는 자식에게 무한책임을 지지만, 아버지로 부르는 아들은 부모를 섬기는 모습을 뜻합니다. 그런 역할과 기능이 어휘에 담긴 거지요. 지금은 자녀들에 대해 무한책임을 지는 아빠의 자리에 있습니다. 모든 헌신으로 아이들을 키우지만, 어느 날이 되면 아버지의 자리로 옮겨 앉아야 합니다. 그 과정이 아름다우려면 아버지가 자녀들과의 대화에 새로운 눈을 떴으면 합니다. “아빠가 미안하다. 네 맘을 헤아리지 못해서”라는 생각으로. 소설가 이관순의 손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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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5-07
  • 음악은 천상의 소리
    밤바람이 선득한 주말. 저녁을 먹고 장자호수공원으로 산책을 나섰습니다. 사람들이 오가는 사이로 청아한 색소폰 연주음이 들려옵니다. 발길이 절로 이끌려 간 곳엔 한 분이 ‘셀프 콘서트’를 열고 있네요. 잔디밭에 앉아 연주가 끝날 때마다 박수를 칩니다. 연주력이 준수한데다 가을밤의 정취까지 더해져 색소폰 선율에 젖는 아름다운 가을밤을 즐겼지요. 음악은 사랑을 전하는 신의 소리라고 합니다. 모든 사람을 하나로 묶어 주지요. 음악은 연주자의 기쁨도 되지만 만인의 즐거움도 됩니다. 연주가의 재능을 부럽게 바라본 영화가 있습니다. ‘어거스트 러쉬.’ ‘음악은 사랑을 낳고 사랑은 운명을 부른다.‘는 말이 잘 어울린 영화지요. 밴드 싱어이자 기타리스트인 루이스와 촉망 받는 첼리스트 라일라의 보석보다 반짝였던 단 하루 밤 이후, 남자는 그녀를 한 번도 잊은 적 없고, 여자는 얼굴도 모르는 낳은 아이에 대한 그리움을 놓은 적이 없지요. 이들의 믿음 하나는 “음악이 있는 한 우리는 다시 만날 거야”라는 것. 부모의 DNA를 받은 아이는 일찍부터 놀라운 음악적 재능을 보입니다. 시설에서 자란 11세의 소년은 부모만이 자신의 음악을 알아볼 수 있다는 믿음 하나로 뉴욕을 찾아갑니다. 모든 게 신비한 뉴욕. 도시가 만드는 수많은 소리들이 소년의 청각에 음계로 포착됩니다. 소년은 아이들을 모아 거리에서 노래를 시키는 워저드를 만나 어거스트란 이름으로 거리 연주자로 등장해 천부적인 실력을 보입니다. 하루는 소리에 끌려 교회 합창단 연습장에 들렸다가 처음 보는 오선지와 오르간 앞에서 작곡하고 연주하는 놀라운 재능을 발휘합니다. 이를 지켜본 목사님이 줄리어드에 음악천재로 추천합니다. 줄리어드에서 사모곡 라프소디를 작곡해 주위를 놀라게 한 어거스트. 마침내 뉴욕필하모니 콘서트에 특별 출연자로 초청됩니다. 줄리어드 출신의 유명 첼리스트(엄마)와 함께. 하지만, 연주회를 앞두고 위기가 오죠. 워저드가 연습장에 나타나 아버지라며 친권을 주장하고 데려갑니다. 학교는 간곡히 연주회만큼은 보내달라고 부탁을 하지만 거절당하죠. 금관악기가 아이의 영혼을 뽑는다는 그릇된 인식으로... 다시 광장 연주에 나서는 어거스트. 부근을 지나던 루이스가 소리에 홀려 찾아오고, 금세 호흡을 맞추더니 황홀한 기타 2중주를 펼칩니다. 어거스트가 오늘 밤 있을 센트럴파크 공연을 알려주지만, 루이스는 귀에 담지 않고 “용기를 잃지 말라”는 말만 주고 떠납니다. 그날 밤, 어거스트는 친구의 도움으로 탈주에 성공해 연주장으로 달려가고, 지방공연에 나서던 루이스는 뉴욕 중심가에서 아이 얼굴이 나온 배너광고를 보지요. 전율을 느낀 그도 차를 버리고 연주회장으로 내달립니다. 환호 속에 첼로 연주를 끝낸 라일라가 아이를 생각하며 공원을 빠져나올 때, 줄리어드 총장이 특별초청 지휘자를 소개합니다. 무대에 등장하는 어거스트. 환호하는 청중... 놀라운 자작곡이 그의 지휘 속에 연주를 시작합니다. 밖을 향하던 라일라가 연주음에 끌려 뒤돌아서고, 또 반대편에서는 황홀한 눈빛의 루이스가 나타납니다. 마침내 무대 앞에 이르러 12년 만에 마주 서는 남과 여... 환희의 포옹을 할 때 지휘하는 아이의 모습이 비칩니다. 세상에는 수많은 소리들로 가득 차 있지요. 귀를 기울인 만큼 들리기도 하고 지나치기도 합니다. 끊임없이 들리는 세상의 소리를 옮겨 작곡하고 연주하는 음악천재가 말하죠. “아이들이 동화를 믿듯 저는 음악을 믿어요. 부모님이 살아계신다면 제 음악을 꼭 듣게 될 거야요.” 어거스트의 간절한 믿음처럼 나는 어떤 믿음을 확신하며 살고 있나요? 글 이관순(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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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4-29
  • 내 앉아있는 자리
    스산한 바람에 비까지 흩뿌리니 단풍은 지고 낙엽만 우수수 쌓입니다. 이렇듯 나무도 꽃도 지상의 모든 생명들이 사이즈를 줄이는 시기입니다. 그것이 한 주기의 마지막 겨울을 상대하는 지혜입니다. 사람이 나이가 든다는 것 또한 사이즈를 줄이는 것으로 시작됩니다. 몸집이 줄고, 먹는 게 줄듯 이것이 절제의 근본이며 이치입니다. 세상에 나올 때 작게 나왔으니 돌아갈 때도 비우고 작게 돌아가야 합니다. 여기에는 실상과 허상이 공존하지만 스스로 말수를 줄이고, 욕심도 미움도 줄이고, 자랑, 명예 같은 덧없는 것은 날려야 합니다. 그래야 사이즈가 줄지요. 루디 세네카는 “인간은 마치 시간이 모자란다고 불평하면서, 마치 시간이 무한정인 것처럼 행동한다.”고 사람의 어리석음을 비꼬았지요. 그런데 사람은 이를 알면서도 어제의 습관을 오늘도 고집하고 삽니다. 친구가 많다고 자랑하시나요? 바쁜 것을 미덕으로 생각하셨나요? 그보다는 흉금을 터놓고 말할 한 사람의 친구가 더 소중한 때입니다. 친구도, 만남도, 분주함도 지혜롭게 줄여가는 것이 노년의 삶을 가볍게 하고 실수를 줄이는 방법입니다. 우리 몸은 수분이 80% 이상이라고 하죠. 비슷한 비율로 우리 삶을 주장하고 있는 것이 말입니다. 그만큼 물과 말은 몸을 유지하고 삶을 구성하는 중요한 요소입니다. 그래서 절제를 말할 때 가장 먼저 꼽는 게 말입니다. 내가 살면서 토해낸 말을 양으로 계측한다면 얼마나 될까. 그중 꼭 필요했던 말은 얼마쯤 일까. 이제는 할 말 못할 말, 안 해도 좋을 말, 상처 주는 말을 가려가며 했으면 합니다. 내뱉은 말은 흘러간 세월처럼 돌릴 수 없으니... 그래서 이랬으면 좋겠습니다. “이제는 많이 들어주자. 듣는 귀는 8로 열고 말하는 입은 2로 줄이자. 남이 말할 때 자르지 말자. 중간에 끼어들지 말자. 말 줄기를 돌리지 말자.” 비위 상한다고 파르르, 욱, 버럭 하는 감정도 이젠 삭혀 없애야 합니다. 행여 그런 상황이 되면 심호흡 한 번으로 날려버리세요. 대신 많이 웃어주면 좋겠습니다. 상대가 가족, 친구, 이웃, 누구든 만나면 웃는 것으로 말문을 열어요. 나이가 들면 웃는 근육도 굳는다는데, 얼굴에 웃음기마저 빠지면 노인 특유의 표정 없는 일그러진 인상만 남아요. 나이가 든다는 것은 옻칠을 더하는 것처럼 윤을 내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미움이나 시기, 질투는 다 헛된 뜬구름이지요. 뜬구름을 좇다가 낯선 곳에 서 있는 나를 발견하는 건 아픈 일입니다. 살고 있는 이날, 앉아 있는 이 자리가 내가 족해야 할 자리임을 아는 사람은 행복합니다. 이 나이에 맘대로 못할 게 뭐야. 하지만 나이가 들수록 남을 배려하며 사는 인생이 아름답습니다. 살아보니 ‘역지사지(易地思之)’ 이상의 스승은 없더군요. 사서삼경이 대단한 게 아니라, 상대편 입장을 늘 먼저 헤아리면 그것이 상선의 절제입니다. “오죽했으면... 그래 저럴 수 있겠다... 나도 그 입장이면... 저도 사람인데.” 글 이관순(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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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4-22
  • 너도 죽는다‘메멘토 모리’
    말에는 묘한 힘이 있어 곱씹을수록 향기를 내는 말이 있고, 겸손함을 가르치는 말도 있지요. 라틴어는 그런 철학적 의미를 함의한 말과 글이 꽤 많습니다. 언젠가의 기억입니다. KBS TV '도전 골든벨‘에서 최후 1인이 된 학생에게 50번 마지막 골든벨 문제가 주어집니다. “고대 로마에서 승리를 쟁취한 장군이 개선행진을 할 때 주위에서 외쳤던 라틴어는?“ “메멘토 모리" 영예의 골든벨이 울리는 짜릿한 순간을 지켜보았지요. 다소 생소한 라틴어 '메멘토 모리(memento mori)'는 '죽음을 기억하라‘는 뜻입니다. 유래는 로마 공화정의 개선식으로 거슬러 올라가요. 개선식은 전쟁에서 승리한 장군에게 주어지는 영예입니다. 개선장군은 관습에 따라 전차를 타고 퍼레이드를 벌입니다. 영웅이 탄 마차가 시민의 환호 속을 헤치고 행진하는 동안 뒤에서 노예들이 큰소리로 외쳐댑니다. 메멘토 모리! 메멘토 모리! “오늘은 개선장군이지만 너도 언젠가는 죽는다. 겸손하게 행동하라.” 승리에 도취된 장군에게 본분을 잊지 않도록 경각심을 주는 장치인 셈이죠. 로마 최고의 환대 속에서도 너는 신이 아닌, 한 인간일 뿐임을 알린 것입니다. 메멘토 모리에는 세 가지 철학적 가치가 내재되어 있습니다. ‘죽음을 기억하라. 운명을 사랑하라. 현재에 충실하라.’ 이 셋은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도 적용되는 훌륭한 교훈입니다. 스티브 잡스도 스탠퍼드대 졸업식 축하 연설에서 이를 강조했습니다. 췌장암 투병으로 힘든 시기를 보내던 그는 ‘죽음은 삶이 만든 최고의 발명품‘이라고 격찬합니다. 그러므로 제한된 인간의 시간을 다른 누군가의 인생을 살 듯 낭비하지 말고 자신을 믿고 집중하라고 졸업하는 학생들에게 말합니다. 뜻이 통하는 라틴어에 ‘카르페 디엠(carpe diem)'이 있습니다. 몬래 이 말은 신을 공경하고 오만해지지 말라는, 현재를 가치 있게 살라는 뜻인데 이후 기독교 영향을 받아 현세의 부귀나 영화의 부질없음을 알립니다. 우리에게도 ‘화무십일홍’이란 말이 있죠. 열흘 가는 붉은 꽃이 없다는 이 말엔 ‘한 번 흥한 것은 반드시 쇠한다.’ 는 속뜻을 지닙니다. 트로트 가수 김연자가 불러 유명한 노래 ‘아모르 파티’도 같은 말입니다. 사랑을 뜻하는 아모르와 운명을 뜻하는 파티가 합성된 라틴어로 이 또한 ‘운명을 사랑하라’는 말이지요. 인간이 가져야 할 삶의 태도로 철학자 니체가 처음 사용했습니다. 메멘토 모리는 미국 남서부에 거주해온 나바호족에서도 찾을 수 있어요. 그들은 “네가 세상에 울면서 태어날 때 세상은 기뻐했으니, 네가 죽을 때 세상은 울어도 너는 기뻐할 수 있도록, 그러한 삶을 살아라.”는 의미심장한 철학을 닮고 있습니다. <메멘토 모리>, <카르페 디엠>, <아모르 파티>, <화무십일홍>까지 모두 겸손한 삶을 가르칩니다. 제한된 시간을 사는 인생에게 죽음을 기억하고, 운명을 사랑하고, 오늘에 충실하라.... 이보다 더 삶을 성찰하게 하는 말이 또 있을까 싶습니다. 글/ 이관순(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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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4-15
  • 의리가 사라진 세상
    짓궂은 질문을 해봅니다. ‘사람’과 ‘인간’은 같은 거야? 사전의 설명은 비슷 하지만, 아무래도 “저 인간!” 하면 부정적 이미지가 앞서죠. “저 사람 인품이 좋아”로는 써도 “저 인간 인품이 좋다”고 말하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세상에 사람 같지 않은 인간이 많다보니 용례까지 헷갈립니다. 초등학교 국어 교과서의 ‘의좋은 형제’를 생각하면 지금도 마음이 훈훈합니다. 우애 좋은 형제가 가을 수확을 마치고 들판에 볏단으로 노적가리를 만듭니다. 형이 보니 아우네 것이 적어 보입니다. 그날 밤, 어려운 아우 형편을 안 형이 자신의 볏단을 옮겨 놓고, 다음날 밤은 식솔 많은 형을 생각한 아우가 반대로 볏단을 옮기지요. 노적가리가 줄지 않자 형제 다 고개를 갸우뚱합니다. 마침내 볏단을 옮기던 형제가 달빛 아래 마주치면서 얘기는 끝나죠. 그때의 감동으로 습자시간이면 붓글씨를 ‘노적가리 풍년일세’만 썼던 기억이 납니다. 가난해도 마음은 풍년인 사람들이 살던 시절이 있었지요. 엊그제 복권 당첨금이 살인흉기가 된 사건이 났습니다. 우애 좋은 형제가 복권 당첨으로 수억 원의 당첨금을 받아 배분까지는 성공했는데, 그 돈으로 사업을 했던 형이 망하며 사단이 납니다. 돈을 더 요구하는 형과 보증을 선 동생 간에 감정이 충돌하다 동생을 살해하는 일이 벌어진 겁니다. 황금만큼 요괴스러운 것은 없습니다. 돈 앞에 장사가 없다지요. 일본 속담에 ‘담배꽁초와 돈은 쌓일수록 냄새가 난다’고 했습니다. 돈이 사람을 부패하게 만든다는 뜻이겠지요. 사는 것은 전보다 풍족해도 인성은 강퍅해졌습니다. 돈을 둘러싼 이기적 욕망이 칼끝처럼 첨예하게 부딪치는 세상입니다. 개신교의 큰 어른이셨던 목사님이 생전에 우리교회에 오셔서 당신이 붓으로 큼직하게 쓴 ‘의리를 지키자’란 글귀를 강단에 내리고 설교를 하신 적이 있습니다. 세상이 오죽하면 의리를 부탁했을까요. 사람과 사람,관계 사이에 의리가 사라졌다고 탄식하는 소리가 높아만 집니다. 제목을 잊은 영화입니다. 세 친구가 딱 한 번 은행을 털어 깨끗하게 살자며 치밀한 준비를 합니다. 그들의 거사는 성공했고 무사히 안전지대에 도착하자 돈다발을 놓고 환호합니다. 한 친구가 축배를 들자며 나갔다가 술에 독을 타서 옵니다. 욕심이 생긴 거죠. 태연하게 돌아온 친구가 술잔을 건네고 축배를 외칠 때, 팡팡! 술 사온 친구가 고꾸라지고 남은 둘은 낄낄댑니다. 뛰는 놈 위에 나는 놈이 있거든요. 둘은 더 큰소리로 건배를 외치지만 독배를 든 이들도 쓰러집니다. ‘사람에게 의리 빼면 시체’ 라고 말하던 세상이 있었지요. 의리란 뜻은 ‘사람관계에서 마땅히 지켜야 할 도리’로, 여기엔 사람이 갖춰야 할 덕목이 다 녹아져 있죠. 가난은 견뎌내기 어려운 것임을 경험한 세대가 모이면 그래도 그때가 좋았다고 반추합니다. 의리가 사라진 곳에 먹잇감을 놓고 으르렁 대는 동물세계가 어른댑니다. 사람 사이 흐르는 체온 대신 물질을 향한 충혈 된 눈빛만 섬뜩하니 사람은 없고 인간만 남아 보입니다. 다시 사전을 봅니다. ‘인간’이란 단어의 기본설명 뒤로 ‘사람의 모습은 하고 있되 사람답지 못하다는 뜻.’을 추가하고 예문도 달았군요. “저 인간이 한 짓을 생각하면 돌아버리겠어.” 너무도 흔히 듣는 슬픈 말이 됐습니다. 글 이관순(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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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4-08
  • 의리가 사라진 세상
    짓궂은 질문을 해봅니다. ‘사람’과 ‘인간’은 같은 거야? 사전의 설명은 비슷 하지만, 아무래도 “저 인간!” 하면 부정적 이미지가 앞서죠. “저 사람 인품이 좋아”로는 써도 “저 인간 인품이 좋다”고 말하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세상에 사람 같지 않은 인간이 많다보니 용례까지 헷갈립니다. 초등학교 국어 교과서의 ‘의좋은 형제’를 생각하면 지금도 마음이 훈훈합니다. 우애 좋은 형제가 가을 수확을 마치고 들판에 볏단으로 노적가리를 만듭니다. 형이 보니 아우네 것이 적어 보입니다. 그날 밤, 어려운 아우 형편을 안 형이 자신의 볏단을 옮겨 놓고, 다음날 밤은 식솔 많은 형을 생각한 아우가 반대로 볏단을 옮기지요. 노적가리가 줄지 않자 형제 다 고개를 갸우뚱합니다. 마침내 볏단을 옮기던 형제가 달빛 아래 마주치면서 얘기는 끝나죠. 그때의 감동으로 습자시간이면 붓글씨를 ‘노적가리 풍년일세’만 썼던 기억이 납니다. 가난해도 마음은 풍년인 사람들이 살던 시절이 있었지요. 엊그제 복권 당첨금이 살인흉기가 된 사건이 났습니다. 우애 좋은 형제가 복권 당첨으로 수억 원의 당첨금을 받아 배분까지는 성공했는데, 그 돈으로 사업을 했던 형이 망하며 사단이 납니다. 돈을 더 요구하는 형과 보증을 선 동생 간에 감정이 충돌하다 동생을 살해하는 일이 벌어진 겁니다. 황금만큼 요괴스러운 것은 없습니다. 돈 앞에 장사가 없다지요. 일본 속담에 ‘담배꽁초와 돈은 쌓일수록 냄새가 난다’고 했습니다. 돈이 사람을 부패하게 만든다는 뜻이겠지요. 사는 것은 전보다 풍족해도 인성은 강퍅해졌습니다. 돈을 둘러싼 이기적 욕망이 칼끝처럼 첨예하게 부딪치는 세상입니다. 개신교의 큰 어른이셨던 목사님이 생전에 우리교회에 오셔서 당신이 붓으로 큼직하게 쓴 ‘의리를 지키자’란 글귀를 강단에 내리고 설교를 하신 적이 있습니다. 세상이 오죽하면 의리를 부탁했을까요. 사람과 사람,관계 사이에 의리가 사라졌다고 탄식하는 소리가 높아만 집니다. 제목을 잊은 영화입니다. 세 친구가 딱 한 번 은행을 털어 깨끗하게 살자며 치밀한 준비를 합니다. 그들의 거사는 성공했고 무사히 안전지대에 도착하자 돈다발을 놓고 환호합니다. 한 친구가 축배를 들자며 나갔다가 술에 독을 타서 옵니다. 욕심이 생긴 거죠. 태연하게 돌아온 친구가 술잔을 건네고 축배를 외칠 때, 팡팡! 술 사온 친구가 고꾸라지고 남은 둘은 낄낄댑니다. 뛰는 놈 위에 나는 놈이 있거든요. 둘은 더 큰소리로 건배를 외치지만 독배를 든 이들도 쓰러집니다. ‘사람에게 의리 빼면 시체’ 라고 말하던 세상이 있었지요. 의리란 뜻은 ‘사람관계에서 마땅히 지켜야 할 도리’로, 여기엔 사람이 갖춰야 할 덕목이 다 녹아져 있죠. 가난은 견뎌내기 어려운 것임을 경험한 세대가 모이면 그래도 그때가 좋았다고 반추합니다. 의리가 사라진 곳에 먹잇감을 놓고 으르렁 대는 동물세계가 어른댑니다. 사람 사이 흐르는 체온 대신 물질을 향한 충혈 된 눈빛만 섬뜩하니 사람은 없고 인간만 남아 보입니다. 다시 사전을 봅니다. ‘인간’이란 단어의 기본설명 뒤로 ‘사람의 모습은 하고 있되 사람답지 못하다는 뜻.’을 추가하고 예문도 달았군요. “저 인간이 한 짓을 생각하면 돌아버리겠어.” 너무도 흔히 듣는 슬픈 말이 됐습니다. 글 이관순(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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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4-04
  • 슬픔이여 안녕!
    죄 없는 어린 생명이 희생될 때 더없이 고통스럽습니다. 남달리 알레르기 반응을 보이는 것은 일종의 트라우마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여덟 살에 충북 영동의 한 초등학교에 입학했습니다. 여름이 되면 아이들과 몰려서 마을 앞에 흐르는 강에 나갑니다. 겨울엔 썰매를 타고 여름엔 물놀이를 하는 곳. 경부선이 지나가는 철교 아래가 또래들의 여름 아지트지요. 흰줄 하나를 내린 검정 팬티를 입고 상급생들은 수영으로 강을 건너고, 하급생들은 교각 중턱에 걸터앉아 형들을 부럽게 바라보다가 텀벙 강물에 몸을 던집니다. 이날도 철교 아래에 한 떼의 아이들이 모였습니다. 비가 와서 물이 좀 불었지만 누구도 겁내지 않았지요. 그런데 물이 불면 수심에서 물돌이가 이는 걸 모른 게 비극입니다. 형들이 수영을 가르친다고 아이들을 밀어 넣는데 그만 1학년 쌍둥이 동생이 소용돌이에 말려든 겁니다. 아이가 물속에서 허우적이자 더럭 겁이 난 아이들이 달아나기 시작합니다. 나도 겁에 질려 뛰다가 뒤를 돌아봤는데, 발을 구르며 울부짖는 쌍둥이 형의 모습이 보였습니다. 죽은 아이는 내 짝꿍이었습니다. 마을이 발칵 뒤집어지고... 나도 밤마다 경기를 일으켰습니다. 땀을 흘리며 악몽에 시달렸지요. 물에 퉁퉁 부은 친구가 나를 원망했기 때문입니다. 넋이 나간 친구 엄마, 고래고래 소리질러 아들 이름을 부르는 아빠, 나를 원망스레 쳐다보는 쌍둥이 형... 나는 누구 앞에서도 고개를 들 수 없는 죄인이었습니다. 친구를 버리고 도망쳤다는 죄책과 슬픔이 어린 가슴을 쿵쿵 뛰게 했지요. 이로 인해 부모님 걱정도 덩달아 커졌습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아버지가 발령을 받아 새 임지로 이사하면서입니다. 가족이 아버지의 전근을 반색한 것도 나 때문이었죠. 아픈 기억은 상급학교로 진학할수록 많이 옅어졌습니다. 초등학교 동창들과 연락을 끊은 것도 도움이 됐습니다. 결혼 후로는 아예 잊다시피 지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어느날, 우연히도 길에서 쌍둥이 형을 만나면서 덜컥 상처가 뜯기고 말았습니다. 어머니는 우울증을 앓다가 목을 매셨고, 알코올 중독에 빠진 아버지도 암으로 돌아가셨답니다. 한 아이의 죽음이 이렇게 가족을 황폐화 시켰구나. 아물었던 내 상처에도 피가 나는 걸 느꼈습니다. 가족 중 유일한 생존자인 형의 얼굴에 깔린 그늘을 보았습니다. “가족 몫까지 잘 살아야지. 흔들릴 때마다 그렇게 위로해.” 예민한 성격 탓일까, 이후로 이따금 꿈을 꿉니다. 시골에서 놀던 추억들이, 떠난 어린 친구의 모습도 생생하게 포착됩니다. 더 힘들게 하는 건 잊을 만하면 날아드는 이런저런 또래 아이들 희생소식입니다. 줄어드는 인구도 걱정인데 죽었다하면 아이들이냐고 격분도 합니다. 지난 봄, 헝가리에서 유람선 전복으로 6세 소녀가 숨졌다는 비보가 그랬었죠. 외할머니 손을 꼭 잡은 아이의 인양된 모습은 더 애처로웠습니다. 그 아픔이 채 가시기도 전에 또, 엄마가 일곱 살 어린 아이를 데리고 동반자살을 했다는 비보가 들렸습니다. 죽음이 낯설기만 어린 나이에 얼마나 섬뜩했을까, 얼마나 설득했을까, 아니 강요했을까. 그래야 했던 엄마의 심정은? 푸른 6월에는 전 세계인을 슬픔에 잠기게 한 사고가 또 발생했습니다. 멕시코 국경에서 리오그란데 강을 건너 미국으로 밀입국하려던 25세 아빠와 두 살짜리 딸이 익사한 것입니다. 아빠가 아이를 셔츠 안에 넣고 아이는 아빠의 목을 끌어안은 채 떠내려 온 사진을 봤습니다. 물살을 이겨내려 했던 아빠의 다리는 물위에 떠 있고, 아이의 바지는 물먹은 기저귀로 불룩했습니다. 강 건너서 울부짖는 엄마의 얼굴이 오버랩됩니다. 멕시코 영화 ‘신 놈브레’는 중남미사람들이 ‘죽음의 열차’를 올라타고 미국으로 밀입국하려는 과정을 그린 영화입니다. 열차 지붕에 올라타다 떨어져 죽고 힘겹게 탄 뒤는 살해나 강간을 당하기도 합니다. 서글픈 것은 점쟁이가 찾아온 주인공에게 일러주는 말이죠. “넌 미국에 도착할거야. 그런데 안내는 신이 아닌 악마가 하지.”라고. 그 악마는 죽음의 열차를 올라 탄 아빠와 딸을 강물 속에 빠뜨린 것입니다. 스스로를 위로합니다. 어쩌면 아이들이 찾아간 저세상이 험난한 이 세상을 사느니 보다 낫지 않겠냐고. "여긴 낙원이 아냐. 슬퍼하지 말고 편히 쉬어라..." 오래전 읽은 프랑수아 사강이 쓴 ‘슬픔이여 안녕’ 이란 소설 제목이 떠오르는 것은 우연일까요? *글/이관순(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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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4-01

실시간 기고 기사

  • 기억은 추억이 되고 추억은 화석이 되고
    인간만이 지닌 고귀한 것은 무엇일까? 누구는 ‘지능’이라 하고 혹자는 ‘말’ 또는 ‘글’ 이라고 합니다. 이 모두 창조주의 귀한 선물이지만 인생을 살면서 ‘기억’ 만큼 소중한 것도 없습니다. 지능이 모자란 사람도 행복할 수 있고, 말이나 글이 서툴러도 사는데 지장이 없습니다. 나름 행복감을 느끼며 살 수 있어요. 하지만 기억은 그 자체만으로 행불행을 나누는 선이 됩니다. 기억을 상실한다는 것은 한 인생이 사라지는 것과 같습니다. 기억한 만큼이 한 사람의 인생이 되고 존재한 삶이니까요. 기억은 부부, 가족, 친구, 사회를 연결하는 회로입니다. 기억의 공유가 없으면 사랑마저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그래서 죽음 다음으로 공포를 갖게 하는 것이 기억상실증입니다. 치매를 두려워하는 이유가 되겠지요. 언어 능력이 뛰어난 사람이 언젠가부터 익숙한 단어가 떠오르지 않고 수십 년째 사는 동네에서 길을 잃고, 그러다 어느 날 기억이 뿌리째 뽑혀 나간다고 생각해 보세요? 온몸에 소름이 돋을 일입니다. 치매 환자 가족이 기억을 살리려고 옛 추억을 꺼내는데, 한 노인학자는 치매 환자에게 과거 일을 자꾸 묻는 건 좋은 방법이 아니라고 합니다. 그 보다 정답이 없는 열린 질문이 효과적이라는군요. “엄마, 여기 온 거 기억나요?”라고 묻지 말고 “엄마, 꽃이 참 예쁘죠?” 이렇게 지금의 얘기, 아무 말을 해도 답이 되는 말을 권합니다. 이런 대화가 언어를 잃은 치매환자와 관계를 지속할 수 있게 해준다고 조언합니다. 노인이 되면 외로움을 탑니다. 그 모습이 안타깝고 슬프지만, 뒤집으면 기억이 온전하다는 방증이기도 해요. 지난 9월 ‘너무 외롭다’고 광고를 낸 영국의 한 할아버지 이야기에 눈물이 핑 돌았습니다. “저는 사랑하는 아내이자 영혼의 동반자인 아내 조(JOE)를 잃었습니다. 친구나 가족이 없어 대화를 할 사람이 없어요. 24시간 계속되는 적막이 견딜 수 없는 고문과 같습니다. 나를 도와 줄 사람 없나요?” 은퇴 물리학자 윌리엄 씨(75)는 외로움에 사무친 나머지 자택 창문에 이렇게 쓴 포스터를 내걸고 도움을 호소했습니다. 슬하에 자식 없이 아내 조와 35년을 사랑하며 살았다고 합니다. 하지만 코로나 봉쇄령이 내려져 있던 5월, 췌장암을 앓던 아내가 갑자기 떠나자 삶이 아파오기 시작했습니다. 생의 동반자를 잃은 뒤 밀려오는 외로움과 사투를 벌여야 했습니다. 적막강산인 집에서 하염없이 아내 사진만 쳐다보며 말입니다. ‘기억’ 은 이렇게 무섭기도, 슬프기도 합니다. 누구는 기억 상실로 가족을 불행에 빠뜨리고, 누구는 온전한 기억 때문에 절절한 그리움을 떨칠 수 없다고 호소합니다. 문학평론가 고 김현은 기형도 유고시집 ‘입속의 검은 잎’에 붙인 해설에 “사람은 두 번 죽는다. 한 번은 육체가 죽을 때, 또 한 번은 이를 기억하는 이들이 모두 사라질 때”라고 썼어요. 그렇다면 윌리엄 씨의 기억엔 여전히 살아 있는 아내의 두 번째 죽음이 남아있으니, 얼마나 긴 세월을 외로워하면서 또 그리워해야 할까. 내게도 살아 있는 기억 하나가 있습니다. 3형제로 구성된 한국의 3인조 록 밴드 ‘산울림’이 30년 활동을 접고 해체하면서입니다. 2008년 11월 발매된 ‘산울림 전집 박스 세트’ 에 남긴 보컬 김창완의 글은 아직도 명료한 기억으로 빛납니다. “이제 바람은 멈추었다. 모든 색은 합쳐져 하나의 작고 검은 마침표가 됐으며, 모든 빛은 합쳐져 수억 겁의 미래로 가버렸다. 산울림, 그들의 노래는 화석이 되었다.” 겨울초입에 친구 아내가 하늘나라로 이사를 했습니다. 눈 내리는 적막한 들판을 혼자 걷는 순례자의 모습으로. 퍽이나 좋아한 슈베르트의 ‘겨울 나그네’ 선율을 사뿐히 지르밟으며 조심조심 방문을 열고 갔습니다. 기억은 늘 애잔하고, 슬프고, 그립습니다. 옷은 낡아지면 갈아입지만, 기억은 추억이 되고 추억은 화석이 되어 풍화를 이깁니다. 생전에 했던 말대로, 이방인처럼 찾아온 그대여! 이방인처럼 떠나간 그대여! -글 이관순 소설가/ daumcafe leerett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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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고
    2024-02-05
  • 키리에 엘레이손 Kyrie Eleison
    8월은 잔인했습니다. 광복절 날 미국이 아프가니스탄 철수를 발표하자 마자 탈레반이 전광석화처럼 진격하더니, 베트남 사이공(호치민)처럼 눈 깜짝할 사이 수도 카불의 함락 소식이 들렸습니다. 국경을 향한 육로마다 수백만의 난민 행렬이 늘어섰습니다. 주변국은 철조망을 두르고 장벽을 치고 국경을 봉쇄했는데도 꾸역꾸역 밀려드는 아프간인들. 막힌 건 땅길에, 하늘 길도 마찬가지입니다. 카블 공항엔 수천 명의 아프가니스탄인 으로 장사진을 쳤습니다. 미군 수송기에 매미 떼처럼 붙어 몸뚱이 하나를 쑤셔 넣으려는 사람들의 비장함이 삽시에 비행장을 아수라장으로 만들었지요. 움직이는 수송기에 매달리다 떨어지고 깔리고, 구명대 하나를 놓고 죽기 살기 매달리는 모습에서 1950년 12월 흥남 부두에서 사투를 벌이던 피난민들이 오버랩 됩니다. 그때나 이때나 똑 같은 아우성···. 그 시각. 한쪽에선 참혹한 인간 도륙이 시작됐습니다. 탈레반이 동족을 줄 세워 꿇어앉히는 순간, 총구마다 불을 뿜습니다. 볏단처럼 쓰러지는 사람들에 다가가 2탄 3탄을 쏴대는 광란의 춤판이 펼쳐졌지요. 그 눈 뜨고 볼 수 없는 잔혹한 동영상이 인터넷 SNS 공간을 유령처럼 떠돌았습니다. 평화롭던 일상이 깨지며 정신까지 너덜너덜해진 사람들. 아프간은 사람이 살 수 없는 저주의 땅으로 변해 버렸지요. 그런 가운데 또 한쪽에서는 숭고한 생명이 꽃핍니다. 콩나물시루 같은 수송기 안에서 여인의 출산 소식이 들렸습니다. ‘오, 아가야 어쩌자고 이 시각에 태어나니?’ 탄식이 명치 끝을 가시가 돼 찌릅니다. 그래도 찾아온 생명이니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 축복 송은 불러주어야 하겠지요. 무구한 생명 앞에 불행 운운하는 것은 온당하지 않으니까요. 벌써 비행 중인 수송기가 고향이 된 아기가 셋입니다. 최고의 행복 속에 불행은 잉태되고 최악의 상황에도 행복이 배태된다. 아, 이것이 우리네 삶의 현장임을 여실히 짚어줍니다. 기내의 생명 탄생은 까마득한 옛 기억까지 소환합니다. 무너진 집터를 지나다 마주친 경이로운 순간의 기억. 깨진 기왓장을 들추자 짓눌린 풀포기의 가녀린 얼굴에서, 생명의 경건함에 소름이 돋았어요. 베트남 패망 때의 모습도 떠오릅니다. 1974년 4월 30일. 사이공 함락 직전의 긴박했던 곳은 미국 대사관입니다. 밖은 대사관으로 들어가려는 사람들로 아수라장이고, 대사관 옥상엔 흙빛 얼굴들이 하늘을 봅니다. 얼마나 급박했으면 헬리콥터가 앉지도 못하고 상공을 맴돌다 밧줄만 내렸을까. 한 사람이 밧줄에 매달리기 무섭게 헬기는 상공으로 치솟고, 대사관의 성조기가 내려졌습니다. 미군 철수의 마지막 종언이었죠. 미국 대사관에 들어왔으니 살았다고 안도한 그 많던 사람들은 어떻게 되었을까. 그 안에는 현지의 건설 현장 철수를 지휘하다가 미처 나오지 못한 두 분의 우리 회사 직원들도 있었습니다. 해안선이 긴 베트남은 바다로 뛰어든 난민 100만 명을 받아냈습니다. 세계 언론을 뜨겁게 달군 ‘보트 피플’의 슬픈 탄생입니다. 그중 운 좋은 사람은 수장을 면했지만, 아프간에는 뛰어 들 바다도 없습니다. 베트남 패망을 연민의 눈으로 지켜본 사람은 월남에서 사선을 넘어 온 32만 참전 용사들입니다. 그렇게 비원을 안긴 베트남은 그 후 기적처럼 살아났습니다. 깨진 기왓장 사이로 생명이 꽃을 피웠습니다. 광기의 칼춤이 난무하는 아프가니스탄은 언제라야 나라다운 모습을 되찾을 수 있을까? 한국처럼, 베트남처럼, 세월이가면 아프간 사람들도 희망을 노래할 날이 오면 좋으련만. 이념보다 무서운 건 신념입니다. 71년 전 한국, 47년 전 베트남이 이를 경험했습니다. 다음은 아프가니스칸 차례입니다. 허망한 이념과 신념의 너울을 벗고 기적의 날이 오기를 기원합니다. 두려움을 키우는 건 지금의 어려움이 언제 끝날지 모르는 막연함입니다. 그래도 한강의 기적이 있었고, 메콩 강의 축복이 있었으니 그날을 꿈꾸며 피투성이가 돼 있더라도 살아만 있으라. 살아만 있으라···. ‘키리에 엘레이손(kyrie Eleison)’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소설가 / daumcafe leeretter 이관순의 손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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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1-25
  • 나는 무엇을 지키는 자인가?
    사람들이 쓰는 언어에서 그들이 사는 세상이 보입니다. 예나 지금이나 ‘가정’ ‘가족’ 이상의 소중한 가치를 지닌 것이 있을까 싶지만, 사회가개인 중심의 늪에 빠지면서 이기적 생각이 일상을 지배합니다. 고통을 주려고 상대 가족을 범죄 대상으로 삼는 건 영화 속 얘기만이 아닙니다. 자녀를 납치하고 아내를 폭행하고 가족을 볼모로 한 범죄가 계속 느는 것은 사람에게 가장 아픈 곳이 가족이어서죠. 우리 생활에 가족이란 용어가 일상화된 것은 그리 오래되지 않아요. 전엔 투박하지만 정감 있는 ‘식구(食口)’란 말을 많이 썼는데, 언젠가부터 가족이란 말로 대체된 모양새가 됐습니다. 가족은 사전적 의미로 ‘부모, 자식, 부부 관계로 맺어져 한집에서 함께 생활하는 공동체’라는 뜻이지만, 식구는 ‘같은 집에서 같이 살며 끼니를 함께 하는 사람’을 이릅니다. “여섯 식구가 코딱지만 한 방 두 칸에 기거하면서 아버지는 식솔의 입들을 책임지느라 평생을 힘겹게 사셨다….” 필자 소설 중 가난과 싸우던 시절, 먹는 일만큼 중한 것은 없었죠. 그래서 아버지는 딸린 식구의 입을 책임지는 막중한 짐을 지셨어요. 식솔, 가솔 등의 말은 다 가장의 무게를 느끼게 하는 아버지 용어입니다. 가족이 먹는 입을 따지는 식구보다 격이 있어 보이기도 하지만, 끈끈한 정분과 생명력은 ‘식구’가 더 우직하면서도 살갑습니다. 먹고사는 생존 운명체로서의 질긴 연(緣)입니다. 식구와는 또 다른 의미의 ‘생구(生口)’란 말이 있습니다. 식구뿐 아니라, 노비나 식객, 집에서 기르는 소, 닭, 개 같은 짐승들을 통틀어 ‘생구’라 불렀어요. 함께 기식한다는 뜻입니다. 조선일보 인기 칼럼을 연재한 이규태 선생의 ‘한국인의 의식구조’에서 찾은 말입니다. 선생은 “이 세상에서 짐승을 사람과 동격으로 표현하는 말을 가진 나라는 아마 우리 외엔 없을 것”이라고 통찰했지요. 소설 <대지>로 노벨문학상을 탄 펄벅 여사가 오래전 한국에 왔을 때, 소 달구지를 모는 지게꾼에게 큰 감동을 받았다고 했죠. 다큐 영화 <워낭소리>에 전율했던 그 짠함이 펄벅의 감성을 흔든 겁니다. 소는 40년을 동고동락한 할아버지의 식구요 생구입니다. 할아버지는 소가 무거워할까봐 얼마 안 되는 짐도 나눠지고, 소가 늙어 죽으면 묘도 써 줍니다. 그 공생의 삶이 눈물겹도록 아름다웠어요. 지구의 육지 면적에서 매년 남한 면적의 60%만 한 사막이 늘어나고, 아마존 밀림은 매년 여의도 면적의 6배가 사라진답니다. 이 모두 공생의 삶을 저 버린 인간의 탐욕이 빚는 참사입니다. 사람이 지켜야 할 기본은 무엇일까? 이에 오바마 대통령이 답합니다. 2004년 민주당 전당대회에서 청중을 감동시킨 연설에서죠. 정치적 수사 가득한 연설문 대신, 가슴의 언어로 국민 마음을 흔들었습니다. 텍스트는 인류 최초의 살인사건을 다룬 성서입니다. 신이 아벨의 제사를 즐겨 받는데 화가 난 형 카인이 동생을 죽이자 카인에게 묻습니다. “네 동생 아벨은 어디 있느냐?” 그 대답을 21세기의 오바마가 대신한 것입니다. “만일 시카고 남부에 글을 읽지 못하는 소년이 있다면, 그 아이가 제 아이가 아니어도 그 사실은 제게 중요합니다. 만일 어딘가에 약값을 지불하지 못하는 노인이 의료비와 월세 중 하나를 택해야 한다면, 그녀가 제 할머니가 아니라도 제 삶마저 가난해집니다. 만일 어떤 아랍계 미국인이 정당한 법적 절차 없이 체포당했다면, 그것은 제 시민권에 대한 침해입니다...” 전 미국인이 숨을 죽입니다. 그들 마음 깊은 곳에 숨어 있는 자비와 희망에 불씨를 살려주었기 때문이죠. 강퍅한 세상에 찌든 사람들의 눈물샘을 자극하면서 오바마의 연설은 절정을 향합니다. “저는 다음 같은 근본적인 믿음이 있습니다. 저는 제 동생을 지키는 자입니다. 저는 제 여동생을 지키는 자입니다. 이것이 바로 이 나라를 작동하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의 미국이란 가족으로 모이게 하는 것입니다.” ‘저는 동생을 지키는 자’란 말은 구약성서 창세기 4장에 나옵니다. 오바마는 카인처럼 “내가 동생을 지키는 자입니까?” 항변하지 않고 성서를 깊이 묵상한 지혜로 가족애와 이타적 사랑을 말했어요. 결국은 가족입니다. 내가 우선할 일은 먼저 나를 보호하고 가족을 지키는 일입니다. 세상의 많은 문제는 가족을 지키지 못하면서, 이타적 사랑을 저버리는 이기적 행위에서 생성됩니다. 동시에 우리가 지켜야 할 가치는 ‘생구’입니다. 통섭을 주창하는 최재천 교수의 ‘호모 심비우스(공생인)’와도 통하는 말입니다. 그것이 내 가족과 인류와 자연을 지키는 진정한 공생인이 되는 길이 아닐까? -소설가/ daumcafe 이관순의 손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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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1-22
  • 달빛 그네 타기
    정월 대보름 밤에 달빛 열차를 타고 옛적 그 시골 길에 내렸습니다. 코앞에 떠오른 휘영청 밝은 달과 별빛이 교교히 흐르는 곳. 온 천지가 몽환적인 고향에 말입니다. 대보름이 되면 화롯불로 피어나는 따스한 얼굴들이 있습니다. 달빛을 밟으며 이집 저집 밥을 얻으러 다닌 머리 큰 ‘짱구’, 눈이 작은 ‘졸려’,몸을 배배 꼬던 ‘지렁이’ 친구, 학교 운동장에서 달빛그네를 타던 여자 동창들... 다들 어디서 살까? “워얼∼얼얼얼” 들판 위로 솟은 보름달을 보고 우리 집 황구 워리가 길에 나와 짖기 시작합니다. 이를 받아 건너 마을 개들이 따라 짓고 동서사방 개 짖는 소리로 가득할 때, 밤의 서정은 말갛게 핀 숯불같이 따스합니다. 어른들은 그 소리가 청승맞다고 작대기를 휘두르지만 내겐 교회의 새벽 종소리처럼 아름답기만 했지요. 청량한 들판으로 개 짖는 소리가 퍼지고 반향 돼 돌아올 때 그 아득함과 아련함이 달빛에 실려 떠다닙니다. 보름달만 보면 짖던 워리. 쩌렁쩌렁한 목소리가 달빛그네를 타고 이 밤에 출렁입니다. 워리에게 달은 두려움이었을까? 행여 그리움에 운 워리의 곡성은 아니었을까? 문득 워리가 그리워집니다. 달빛이 길어 올린 열의 아홉은 그리움입니다. 슬픔, 사랑, 이별 같은. 그리움은 운명처럼 차지게 따라붙어요. 인생 항로에서 잃은 것들에 대한 연민과 찾지 못한 것들의 갈망이 달빛 속에 숨고르기를 합니다. 떠나간 부모님이, 배우자가, 잃은 자식이 그렇고, 토라져 가버린 사랑이, 가슴 설레는 만남을 꿈꾸는 저마다 사연이 이 한밤 달빛에 충만합니다. 지구 반대편 에콰도르엔 ‘세상 끝 그네’가 있습니다. 이곳에서 사람들은 가는 줄에 생명을 걸고 벼랑을 오고가는 아찔한 그네를 탑니다. 삶과 죽음을 건너뛰는 희열을 느끼면서 나만의 고통도 함께 털어내고픈 야릇한 충동을 받겠지요. 나도 이 밤에 달빛이 풀어놓은 그네를 탑니다. 창공으로 내 몸이 솟구쳐 오를 때마다 속진을 씻는 개운함과 현기를 느낍니다. 뜰 위로 쌓이는 달빛 별빛을 더듬다 화롯불에 넣어둔 고구마를 잊은 그 밤의 기억이 아물거립니다. 뒤란의 댓잎 스치는 소리에 떠난 임이 오는 기척인가 싶어, 허망한 짓인 줄 알면서도 은근히 문을 열어보고, 뜨락에 내린 노란 달빛을 두 손으로 담아보기도 하고, 댓잎 스치는 곳으로 귀를 열어도 보지만 월광을 흔드는 바람소리뿐입니다. 오스스 온몸에 한기를 느낄 때, 은혜로운 달빛이 몰려와 한 자락 이불로 몸을 감싸줍니다. 사람은 가진 것을 잃은 후 새로운 것을 얻기도 해요. 시력을 잃었더니 청력이 기적을 만들어내고, 청력을 잃은 뒤 불후의 작품을 남긴 예술혼도 있습니다. 달은 소멸과 생성을 거듭하죠. 보름에서 그믐으로 이지러졌다가 다시 둥근달로 되살아나는 모습은 언제 봐도 경이 그 자체입니다. 비탄 속에 희망이 움트고, 절망의 벼랑에 선 이가 다시 마음을 고쳐먹는 것도 보이지 않는 마음속 달 때문입니다. 인공지능이 바둑 대결에서 인간을 이기는 세상일지라도, 여전히 달의 영역은 존재합니다. 사리와 조금이 갯벌을 만들고, 사람들에겐 끝 모를 동경과 사유를 주는 가치를 계수나무와 토끼로 덮기엔 한없이 부족하죠. 설령 달이 지구의 한 부분이 떨어져 나가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해도 달과 지구는 한 몸입니다. 지구와 달은 서로에게 특별한 존재인 것이, 오늘도 지구가 흔들리지 않고 자전할 수 있게 잡아주는 힘은 오롯이 달의 몫이요 달의 능력입니다. 우리에게도 달 같은 존재가 있습니다. 앞길이 막혀 방황할 때, 마음 둘 곳을 잃고 비틀거릴 때, 무엇이 나를 잡아줄까? 남편과 아내가,부모와 자식이, 아니면 친구나 또 다른 무엇이 있겠지요. 분명함은 어딘가에 나를 지탱시키는 존재가 있다는 사실입니다. 누군가 나를 위해 기도해 주는 사람이 있습니다. 동시에 나 또한 누군가를 위해 기도하고 힘이 될 소중한 존재입니다. 서로 기대어 사는 존재. 서로 기원하며 사는 존재. 대보름 밤, 달빛그네를 타고 이렇게 외쳐 봐요. 내 달은 누구인가? 나는 누구의 달인가? 달빛 서정이 이에 답할 것입니다. -글 이관순 소설가/ daum cafe/ leerett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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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1-18
  • 설날 떡국 한 그릇
    어김없이 올해도 설날은 찾아왔고, 3대가 둘러 앉은 가족들 앞에 떡국 한 그릇씩이 놓였습니다. 떡국을 먹음으로 나도, 아들도, 손자들 모두 미뤄져 온 나이를 한 살씩 온전히 먹게 되었지요. 아이들은 손가락을 꼽으며 한 살 더 먹은 기쁨을 자축하기에 흥났고 아들 내외는 제 나이가 실감이 나지 않는다는 표정이고, 아내는 올해로 끝날 60대를 반추합니다. 떡국을 먹을 때면 돌아가신 부모님 생각이 납니다. 아버지는 젊음이 한창인 아들에게 떡국을 드시면서 늘 말씀하셨습니다. “한 살 더 먹으면 한 살 더 어른스러워야 한다”고. 그때는 도덕 책에나 있을 공자님 말씀쯤으로 건너 들은 글귀입니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부모님 얼굴을 떠올리고, 먹은 나이를 생각하다 불현듯 자각이 듭니다. 부모님 생전엔 아들과 나이 차가 늘 똑같아서 두 분은 늘 어른이셨고 난 여린 아들였는데, 떠나신 뒤로는 매년 한 살씩 부모님 나이를 따라잡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던 어느 해 설, 갑자기 어머니 나이에 근접하고 있음을 깨닫습니다. 그리고 몇년 후 어머니와 동갑이 되던 설날 아침에, 목이 잠겨 떡국 한 그릇을 먹는데 시간이 걸렸습니다. 지금 내 나이보다 15년 아래셨던 어머니는 아들 사업이 힘든 것을 알고 파트타임으로 식당 주방 일을 나가셨습니다. 가족들은 그 사실을 눈치 채지 못했습니다. 이듬해 설날 어머니가 대학에 합격한 손자 세배를 기뻐 받으시고 1년치 등록금을 담은 봉투를 쥐어줄 때서야 그간 사정을 알게 되었지요. 아들 합격 소식에 기쁨도 잠시, 등록금 마련에 한숨이 나던 힘든 때였죠. 덕분에 아들은 대학에 들어갔으나, 그때 얻은 허리병과 낙상 사고가 겹치면서 어머니는 마지막 2년을 누워 고생만 하다 눈을 감으셨지요. 이후로 설이 오면 어머니 얼굴이 떠올랐고, 손자도 할머니 사랑을 잊지 못했지요. 그런데, 그때 어머니보다 내 나이가 더 들었는데도 손자를 위해 그 헌신을 해낼 수 있을까? 여전히 물음이 생깁니다. 나는 여전히 여린 어머니의 아들일 뿐입니다. 올 설날 아침, 떡국 한 그릇을 비우면서 눈이 욱신 거려옴을 느꼈습니다. 태산 준령만큼이나 높아보이던 아버지의 그 나이가 된 자신을 알아 보았기 때문입니다. 지금도 아버지를 온전히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러니까 내가 아버지보다 8년 아래였을 때, 고열로 쓰러진 아들을 살리려고 고희를 훌쩍 넘기신 분이 눈 쌓인 산길을 걸어 외삼촌 댁 약방을 찾아 떠나셨습니다. 아내만 어쩔 줄을 몰라했지요. 집에는 체온이 39도를 넘나드는 남편이 벌겋게 익어 있고, 눈구덩이에 약을 구하러 떠나신 시아버지는 자정이 되는데도 연락이 없으셨습니다. 가슴 조이던 새벽 두시, 눈을 뒤집어 쓰고 아버지가 약을 구해 가슴에 품고 오셨습니다. 폭설로 응급차마저 출동을 못할 때 쉰살이 넘은 아들을 구하려는 일심으로 늙으신 아버지가 눈이 덮인 20리 산길을 걸어 갔다가 오신 것입니다. 그 담력은 어디서 나온것이며, 그 용기는 어디서 나온 것일까? 어느새 아들이 아버지의 그 나이가 되었는데도 스스로 그러한 헌신을 할 수 있을까? 되물으면 여전히 의문이 남습니다. 떡국을 먹고 나이를 먹는다는 것. 한 살 나이를 먹으면 한 살 더 어른스러워져야 한다는 것. 아버지의 당부가 무엇을 뜻한 것인지 딱히 짚을 수는 없음에도 아들은 어느새 아버지의 자리에 앉아 있는 자신을 봅니다. 올 설날 아침에도, 떡국을 나누며 아이들에게 말했습니다. ‘한 살 더 나이를 먹으면 한 살 더 어른스러워져야 한다’고. 그저 나이 먹으면 헛똑똑이가 된다고, 손자 손녀에게 당부했습니다. 아버지가 생시에 하시던 그 말법 그대로 써서. -이관순 소설가/ daumcafe/ leerett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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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1-15
  • 설 인사 어떻게 생각하세요?
    해가 바뀐 지 달포나 됐는데 인사가 다시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로 돌아갑니다. 스스럼없이 나눌 덕담인데, 정작 새해 인사로는 적절치 않다는 지적이 있어요. 살아서 장례식을 한 전 고구려연구회장인 서길수 교수가 대표적입니다. 복을 짓지도 않고 들어오기만을 바랄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복이란 삶에서 누리는 행운입니다. 스스로 노력 없이 행운이 굴러들어 오라는 것은 입에 착 달라붙지 않는 새해 인사라는 것이지요. 그 대신 ‘새해 복을 많이 심으세요.' 라는 새 인사말을 제시합니다. 복 받으란 말에는 요행의 의미까지 담기지만, 심는다는 말엔 복을 저축하라는 뜻이 있습니다. 행운은 개인의 노력이나 책임과 무관하지 않아서입니다. 인생은 복권이 아니잖아요. 봄에 씨앗을 뿌리고 여름에 잘 가꾸어야 가을에 상응한 열매를 거둡니다. 그런데 우리가 나누는 새해 인사엔 뿌리기보다 거두는데 방점을 찍는 듯한 어색함이 보입니다. 그래 생각하면 정치판엔 ‘새해 표 많이 받으세요’ 요식업체는 ‘복 많이 드세요’가 어울리지 않을까? 연초부터 부자 되라고, 복을 많이 받아야한다는 은근한 강요 같기도 하고 명령형 인사로도 들립니다. 오늘의 물신 사회에서 행복은 신의 자리를 대체한 만능의 세속 종교가 되었습니다. 돈 관련 서적이 불티나게 팔리고 로또, 주식에 목을 매나하면 오매불망 잭팟이 터지길 꿈꾸죠. 과잉된 행복 욕망 또는 불행 인식에 끌려서 우울증을 호소하는 사람이 늘어나니, ‘행복’이 21세기를 지배하는 이데올로기란 말이 나옵니다. 행복은 마트에서 살 수 있는 ‘1+1’ 상품도 아닌데 ‘열려라 참깨’처럼 행운이 뚝딱 굴러 오라고 주문을 외웁니다. 그래서 서길수 교수는 ‘행복하세요’라는 인사보다 ‘행복을 심으세요’가 품위와 진정성이 있는 인사로 보인다고 합니다. 올 설엔 복을 받은려하지 말고 복을 지으시라는 인사를 해보면 어떨까요? 김형석 교수도 연초 신문 연재 ‘100세 일기’에서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인사보다 더 따뜻한 ‘행복해지십시오’라는 인사를 건넸습니다. “건강해지기 바라며, 사업에 성공하길 축원하며, 훌륭한 업적을 남기길 바라는 마음“을 담았지요. “이렇게 살았더니 행복해졌다는 사람은 있어도 행복을 위해 이렇게 살았다는 사람은 없어요. 값있는 삶의 결과로 주어지는 게 행복입니다.“행복은 그 자체가 삶의 목적일 수 없지만, 내 인격 수준보다 무거운 행운은 복이 되지 못합니다. 로또에 당첨돼 불행해졌다는 이야기나, 탐욕으로 재력, 권력을 쥐더니 많은 사람에게 고통을 주더라는 말도 같은 맥락입니다. 사람마다 주어진 ‘운’이란 게 있다면, 어느 쪽으로 기울게 할지는 내가 살아가는 행동에 달려 있어요. 선한 생각으로 행동을 하면 운이 내게로 열리고, 악한 행동을 하면 운이 점점 떠나가는 이치입니다. 성경에 나오는 ‘八福’도 복을 받을 수 있는 자격을 가르칩니다. 조건을 갖춘 사람에게 복은 자연스럽게 찾아온다고 했어요. 정신적 가치를 모르는 사람은 물질적 행복을 누릴 수 없고, 이기적인 사람은 행복해지기 어렵다는 교훈이 깔려있지요. 남에게 불행과 고통을 주면서 나만 행복해지려는 사고는 받아들이기 힘든 죄악스러움입니다. 하지만 남에게 선한 뜻을 베풀며 사랑을 나누는 사람은 더 큰 축복을 차지합니다. 그렇게 살아 본 사람만이 아는 진실입니다. 성실하고 정직한 삶은 버림받지 않아요. 많은 이웃의 행복을 위해 힘쓴 사람일수록 덤으로 존경이 따라옵니다. 그래서 인격이 최고의 행복을 얻는 그릇이지요. 어떻게 사는 사람이 행복한가. 수많은 인문서와 앞서 살다 간 현인들 얘기는 ‘감사’하는 마음으로 사는 것이 행복해지는 첫 번째 요건으로 꼽습니다. 감사를 모르면 행복도 모른다는 뜻이죠. 행복은 ‘더불어 삶’의 고백입니다. 설날 인사로 이렇게 해보세요. ‘행복을 많이 지으세요.’ ‘행복을 많이심으세요.’ 나누다 보면 입에 감기는 인사가 되지 않을까? -글 이관순 소설가/ daumcafe/ leerett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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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1-11
  • 새 노래로 이봄을 맞으리
    겨울은 늘 용맹함으로 시작했다가 패잔병처럼 사라집니다. 아직 정월(음력)인 데도 여기저기서 봄의 옷자락 끌리는 소리가 들립니다. 바위 밑에 남은 잔설을 헤치니 봄의 전령인 복수초가 어느새 꽃눈을 틔웠습니다. 소리 없이 바빠지고 있는 것은 나무도 마찬가지입니다. 얼었던 땅이 녹으면서 싱그러운 수액이 오르고, 메말랐던 나뭇가지는 물기를 머금었습니다. 뿌리 깊은 나무는 바람에 흔들리지 않는다고 하지만 차디 찬 땅 속에 내린 뿌리들이 겨울 한철을 어떻게 견뎠을까. 뿌리의 고단한 헌신에서 모성애를 느끼는 것은 혹독한 겨울에도 잠들지 못하고 생명을 품고 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사막식물은 우리가 상상하는 그 이상으로 많은 뿌리를 깊이 내립니다. 이에 비해 수생식물은 뿌리라고 할 것도 없을 만큼 빈약합니다. 콩나물을 키워보면 알 수 있습니다. 물이 넉넉하면 곁뿌리가 적고, 부족하면 잔뿌리만 키웁니다. ‘뿌리가 깊어야 가뭄을 타지 않는다’ 는 말도 있습니다. 여기에는 근원이 깊고 튼실해야 어떤 시련도 견뎌낼 수 있다는 뜻이 함축돼 있습니다. 모든 것에는 근본이란 게 있습니다. 개인과 집안, 국가와 민족, 전통과 문화에도 근원이 있는 법이니까요. 오죽하면 ‘물 한 모금을 마실 때도 시원을 생각하라(飮水思源)’고 했을까. 식물학자의 말을 빌리면 땅 위에 드러난 식물의 잎줄기와 땅 속에 내린 뿌리의 생체량은 엇비슷하다고 합니다. 지상의 풀 한포기, 잘라낸 나무 한 그루의 무게가 지하에 뻗친 원뿌리와 잔뿌리를 합친 것과 균형을 이루고 있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식물뿌리를 ‘숨겨놓은 반쪽’ 이라고도 한답니다. 잔잔한 호숫가 벤치에 앉아서 물 위로 드리운 나무 그림자를 보노라면 수면 저 아래 광맥처럼 뻗혀 있을 뿌리가 궁금해질 때가 있습니다. 이목지신(移木之信)이란 말이 있습니다. 군주는 나무 한 그루를 옮기는 데도 백성을 생각해야 한다는 뜻이지만 나무를 옮겨 심을 때는 믿음을 줘야 한다는 의미도 담겨 있어요. 생명은 그만큼 연약한 것입니다. 옮겨 심는 나무가 클수록 새 땅에 적응하는 기간이 길어져 3년까지는 안심할 수 없다고 합니다. 옛적에, 고향의 어른들이 큰 나무를 이식한 후 막걸리를 둘레에 흠뻑 뿌리는 걸 본 적이 있습니다. 그 때는 몰랐는데, 커서야 뿌리를 돌보는 토양세균들의 왕성한 번식을 돕기 위한 배려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또, 원래 자랐던 곳의 흙을 떠와 섞어주기도 합니다. 익숙한 토양세균과 더불어 새 땅에 잘 적응하게 하려는 정성을 담은 것입니다. 봄기운이 산야의 곳곳을 오르고 있습니다. 주자십회훈(朱子十悔訓)에 “봄에 씨를 뿌리지 않으면 가을에 후회한다(春不耕種秋後悔)”고 했어요. 그럼에도 진실과 사실은 달리하는 게 우리네 삶인 것이, 마음은 이미 봄인데 몸은 아직 겨울옷을 두르고 있으니까요. 좌표를 짚어보니 서 있어야 할 자리에서 멀리 쳐져 있는 나를 봅니다. 하지만 깨달음이 있고 갈 길이 남았다는 것은 축복이기도 합니다. 그 마음으로 겨우내 움츠렸던 몸에 기운을 모으고 다시금 신발 끈을 동여매렵니다. 올 봄도 텃밭을 작은 수도장으로 삼아 땀을 내는 것으로 시작하렵니다. 언 땅을 뒤집고 드러난 검은 살에 봄볕을 쬐는 일부터 하려고요. 흙살의 감촉과 흙냄새도 맡으면서. 어떤 향수가 언 땅 속살에서 나오는 흙냄새만 한 것이 있을까. 마른 마음밭(心田)에도 생기를 불어넣고 정성껏 씨를 뿌려야겠습니다. 뱀이 허물을 벗는 것은 매우 고통스러운 일이지만, 성장하려면 피부를 찢어내야만 합니다. 매번 같은 패턴으로 피부를 벗지만 새로워지는 뱀처럼, 나도 낡은 옷을 벗고 새 노래로 봄을 맞으리라. 텃밭에다, 심전에다, 씨앗을 뿌리면서없이 봄 길을 걸어보리라. 글 이관순 소설가/ks8120@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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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1-08
  • 섣달그믐의 발자국
    설을 앞두고 부모님 산소를 찾아 고향에 갔었다. 고향에는 긴 세월이 지났는데도 시장 한켠에 여전히 문을 열고 있는 목욕탕이 있었다. 예전엔 마을에서 가장 눈에 띤 건물이었는데 지금은 낡고 옹색하기가 그지없었다. 나는 목욕탕 길 건너의 음식점 창가에 앉아 한동안 스치는 상념에 잠겼었다. 슬프게도 나는 아버지의 손을 잡고 목욕탕에 가보질 못했다. 아버지는 외아들인 나를 데리고 저 목욕탕에 가지 않으셨다 단 한 번도. 나는 어쩔 수 없이 일곱 살이 넘도록 어머니 손을 잡고 여탕에 들어가곤 했다. 나는 어머니가 미리 알려준 대로 누가 물으면 손을 펴보며 다섯 살이라고 말했다. 그것이 거짓말이라는 걸 알면서도 눙치곤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욕탕에서 만난 할머니 한 분 앞에서 그만 실수를 하고 말았다. "으쩜 애가 이리 크노, 몇 쌀? 여덜?" 내 눈을 빤히 보며 묻는 할머니에게 당황한 나는 입속에 준비된 다섯 살을 깜빡하고 일곱 살이란 말을 툭 내뱉고 말았다. 그 바람에 어머니가 대신 곤욕을 치러야 했다. 한 번은 짓궂은 아주머니가 내 앞에 쭈그려 앉으며 말했다. "요놈 고추보레 실하게도 여물었네 아이고 야" 하곤 내 고추를 툭 건드릴 때는 가뜩이나 더운 목욕탕 열기까지 더해 얼굴이 발개졌다. 골이 잔뜩 난 얼굴로 식식거리며 텀벙 탕 속으로 뛰어들었다. 그 목욕탕..... 나이가 더 들자 어머니는 더 이상 나를 데리고 가지 않았다. 설날을 며칠 앞두고, 어머니는 처음 나를 혼자 남탕에 들여보냈다. 그때 나는 남자가 되었다는 기분에 우쭐 했고, 비로소 제자리를 찾은 것 같아 여간 홀가분한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때부터 나는 혼자 등을 밀어야했다. 등을 밀어줄 사람이 없어서였다. 부자가 함께 와서 서로 등을 밀어주는 아버지와 아들을 부러운 눈으로 쳐다보았다. 이렇게 명절이 가까워지면 아버지가 아들을 데리고 오는 사람들이 더 많이 눈에 띠었다. 때로는 아버지가 원망스러웠다. 나이가 좀 더 들어서는 목욕비를 아끼려고 목욕탕에 가시지 않는다고 내 멋대로 아버지를 비난했다. 그러다 등짝에 살이 숯덩이처럼 검게 죽은 지게 자국을 본 것은 아버지가 쓰러져 병원 응급실로 실려 온 후의 일이었다. . 아들이 밀어드리고 싶었던 아버지의 등, 들어내기 싫어서 부끄러워서 차마 자식에게 보이고 싶지 않았던 당신의 등이 그곳에 있었다. 해가 지면 달을 지고, 달이 지면 해를 등에 지고, 한없이 걸어갔을 길. 그래서 봄날은 간다는 노래를 구성지게 부르신 걸까 그 길의 끄트머리는 적막강산 같은 등짝에 화인처럼 찍혀 있는 지게자국.... 그것을 나는 모르고 있었을 뿐이었다. 입원실 욕탕에서 내 등에 업혀 욕수에 몸을 누일 때까지. 내가 아버지의 몸을 씻길 때, 마침내 아버지는 아들의 소원 하나를 들어주셨다. 호랑이의 발자국처럼 선명하게 남은 아버지의 흔적.... 눈발도 흩날리지 않았던 밤, 윙윙대는 바람소리만 길에 가득 차오르던 밤, 섣달그믐 날의 일이었다. 해마다 이맘때면 저벅저벅 눈길을 밟고 오는 발자국소리.... 올해도 창가에 귀를 대며 읊조린다. 오소서 아버지... (이관순 / 소설가ㆍ전기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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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1-02
  • 고통의 순간 神은 어디있는가
    ?... 실존의 문제를 무겁게 안긴 <침묵(沈?)> 이 고통의 순간에 신은 어디에 있는가? 누구나 한 번쯤은 ‘신(神)의 존재‘에 대해 물음을 던져봤을 것이다. 사회윤리가 뒤틀리고 불의가 갈수록 창궐하는 지금, 그 물음은 여전히 진행형이다. 그동안 인문과목으로 만나온 분들에게 “한 번은 신과 인간에 대해, 삶과 죽음에 대해, 죽음 이후의 세계에 대해 본질적인 질문을 던지고 치열하게 사색해 보자.”고 권했다. 그리고 텍스트로 책 한 권을 소개하기도 했다. 막부시대의 가톨릭 박해사건을 소재로 다룬 일본 작가 엔도 슈사쿠(遠藤周作)의 소설 ‘침묵(沈?)’(1982. 홍성사)이다. 내게는 어떤 신학 서적보다도 더 절실하게 실존의 무게를 안겨준 책이다. 작가 엔도 슈사쿠(1923-1996)는 이 소설로 노벨문학상 후보로도 올랐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침묵’ 때문에 역작용을 부르기도 했다. ?... 일본 선교의 참화가 시작되었다 기독교의 일본 선교는 16세기에 시작될 만큼 우리나라보다 크게 앞섰다. 1614년 도쿠가와 막부(幕府)가 금교령을 실시하자 일본 땅은 삽시에 얼어붙었다. 나가사키에서 26명의 사제와 신도가 화형으로 처형됨을 시작으로, 곳곳에서 수많은 신도들이 고문 받고 학살을 당했다. ‘침묵’은 이 광란의 시기에 나가사키 북쪽의 바닷가 마을 소토메(外海)를 배경으로 삼고 있다. 일본 관헌들은 숨은 신도들을 가려내기 위해 혈안이 되었다. 마침내는 예수와 성모마리아가 그려진 성화(예수와 마리아 상)를 땅바닥에 던져놓고, 마을 사람들로 하여금 한 사람씩 밟고 지나갈 것을 강압한다. 잔인한 감별법이었다. 성화를 밟고 지나가면 배교(背敎)로 생명을 건지고, 밟기를 거부하면 기독교도로 잔혹하게 처형한다. 사람들은 극도의 공포 속에서 생사의 선택을 해야 했다. ?... “예수를 밟고 배교(背敎)하라.” 갈림길에 선 신부 ‘침묵’은 포르투갈의 예수회에서 일본에 파견됐다가 붙잡힌 젊은 신부 로드리고의 고뇌를 좇고 있다. 이미 적지 않은 사람이 성화를 밟은 상태에서 일본 관리는 신부에게 제안을 한다. “예수의 얼굴을 밟아라. 밟고 배교하면 저 사람들을 살려 줄 것이다.” 이로부터 포교를 위해 이역만리를 건너온 신부의 눈물겨운 고뇌의 과정이 그려진다. 위기의 상황에서 끊임없이 기도하고 응답을 구하지만 신의 침묵은 계속될 뿐, 바다조차 어두운 침묵을 깔고 잠잠했다. 신부의 배교를 강요하면서 신도들을 무자비하게 고문하는 관리들... 배교와 순교의 갈림길에 선 그는 인간의 진실과 신앙의 진리, 그 어느 것도 쉽게 저버릴 수가 없었다. “하나님 왜 당신은 계속 침묵하시는 겁니까?“ 이 작품은 로드리고 신부의 처절한 물음 속에 신앙의 본질을 탐구하는데 초점을 맞추고 있다. 믿음을 지키고자 끝까지 성화 밟기를 거부하고 죽음을 당할 것인가. 비굴해지더라도 성화를 밟고 생명들을 건질 것인가. 과연 어느 것이 참된 사랑의 행위인가. 순교라는 미명아래 보고만 있을 것인가. 그는 떨고 있는 사람들을 보며 통렬한 고통 속으로 빠져든다. (이관순 / 소설가ㆍ전기작가) ?... 내가 고통 받을 때 신은 어디에 계십니까? 어린 시절, 우리 가족은 아버지의 작장을 따라 새 임지로 이주했다가 예배처가 없다고 교회를 개척한 어머니의 훈교를 받으며 반듯한 기독 학생으로 자라야 했다. 어머니는 내게 굳건한 믿음을 지니길 바라셨지만 제대로 부응하지 못했다. 신과 나 자신의 관계에 대한 확신이 부족해서였다. 1980년대 온 나라가 격동의 쓰나미에 휩싸일 때 책방에서 우연히 ‘침묵’을 발견했다. ‘침묵’은 부닥친 현실과 교회가 요구하는 신앙인상(像)의 간극으로 갈등하던 나를 순식간에 빨아들였다. 기독교 선교사(史)에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순교로 신앙의 절개를 지킨 영웅들의 이야기가 절절하다. 이에 비해 ‘침묵’은 한 신부를 통해 변절과 실패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는 것이 이채로웠다. “내가 고통 받을 때 신은 어디에 계십니까?” 신부의 물음은 당시 내가 겪고 있는 신앙의 딜레마와도 상응했다. 소설은 성직자로서 따라야 할 교리와 인간의 도리 사이에서 고뇌하던 신부가 마침내 성화를 밟기 위해 발을 들며 절정을 향한다. 그리고 발을 내리려는 순간, 침묵하던 신의 음성이 들려왔다. 그 장면을 읽었을 때의 충격은 지금도 또렷한 기억으로 살아 있다. ?... 나를 밟아라. 나는 밟히기 위해 태어났다.... 로드리고 신부의 귀에 바람처럼 흔들려온 그리스도의 음성... “밟아도 좋다. 네 발의 아픔을 내가 알고 있다. 밟아라. 나는 너희에게 밟히기 위해 이 세상에 태어났고, 너희의 아픔을 나누기위해 십자가를 짊어졌다.....” 신부가 성화에 발을 올려놓았을 때 아침이 오고, 멀리서 닭이 울었다. 책장을 덮자 그 장면이 환영처럼 펼쳐졌다. 사방에서 헨델의 ‘메시아’가 울려 퍼지는 듯했고, 그 중앙에 내가 선 기분이었다. 엊그제, 서재의 한곳에 묻혀 있던 ‘침묵’을 꺼내 다시금 읽기 시작했다. “로마 교황청에 하나의 보고가 들어왔다. 포르투갈의 예수회가 일본에 파견한 한 신부가 나가사키에서 고문을 받고 배교를 맹세했다는 것이다...” ‘침묵’의 첫 문장은 이렇게 시작된다. 다시금 ‘침묵’을 읽으며 가슴에 여울지는 물소리를 듣는다. 나를 밟아라. 밟는 네 발의 아픔도 나는 안다.... 최후의 순간에 깨닫는 하나님의 사랑과 존재에 대한 경이로움... 굳이 기독교 신자가 아니더라도 감명을 받을 수 있는 작품이다. 주제는 신과 인간의 관계에 대한 질문이지만, 우주와의 관계로까지 질문은 확장성을 지닌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살면서 한 번쯤 던지는 질문일 테니까. ‘침묵’을 통해 믿음이란 단순한 맹종이 아니라, 넓게 포용하고 받아들이는 따뜻한 인종(忍從)과 순응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예수님의 고뇌와 사랑을 생각하게 하는 사순절이 지나고 있다. 과연 어느 것이 참된 사랑의 행위인가. 순교라는 미명아래 보고만 있을 것인가. 그는 떨고 있는 사람들을 보며 통렬한 고통 속으로 빠져든다. (이관순 / 소설가ㆍ전기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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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12-21
  • 밀란 쿤데라의 ‘느림’의 미학
    5G시대가 열렸다고 환호한다. 초고속, 초대용량 통신이 가능해져 영화 한 편 내려 받는데 걸리는 시간이 고작 0.8초. 그 속도감이 어느 정도인지 감이오지 않는다. 인간의 초능력이 과학이란 날개를 달고 끝 모를 하늘로 날아오르는 걸 보면서, 신과 인간의 영역이 모호해 진다는 생각에 덜컥 불안해 지기도 한다. 나이가 드니 세월이 빠름빠름 이상으로 지나간다. 여기에 세상까지 ‘빠릿빠릿(빠르게)’을 재촉하니 생각이나 발걸음은 더욱 느려터지게 느껴진다. 그러면서 생각한다. 시대의 아이콘인 ‘빠름’과 ‘편리성’이 우리네 삶을 마냥 행복하게 해줄까? 인생을 살고나면 대단한 것들이 아니라 사소한 순간들이 그리워지는 법이다. 사소한 순간은 일상의 미세한 진동에서 생기는데, 인생을 광속으로 달리기 하다가 세밀한 즐거움을 다 놓치는 것은 아닌지.... 좀은 천천히 돌아보고 좀은 불편하게 살더라도 놓치고 싶지 않은 것과 기억하고 싶은 것들을 만들고 사는 게 보다 인간을 관조할 수 있는 삶이 아닐까.... ???? 느림의 즐거움은 사라졌는가 고즈넉한 저녁, 파리 근교의 고성을 향해 아내와 함께 한적한 길을 차 몰고 달린다. 순간 뒤에서 빵빵~, 경적을 울리며 젊은 남녀가 차를 몰아 쏜살같이 추월해 달려간다. 그걸 보며 화자(話者)는 생각한다. 저 연인들은 이 아름다운 저녁을 감상하며 사랑의 밀어를 나눌 생각은 않고 어째 저렇게 달리는 충동에만 사로잡혀 있는가.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으로 우리에게 친숙한 작가인 밀란 쿤테라는 그의 소설 <느림(La Lenteur)>을 이렇게 시작한다. 그는 아쉬워한다. “어찌하여 느림의 즐거움은 사라져 버렸는가. 아, 어디에 있는가 그 옛날의 그 한량들은- ” 그의 작품은 늘 비극적이면서도 희극적인 인간 존재의 모호함과 불확실성에 대해 깊은 성찰을 던져주고 있다. 이 소설과는 IMF 늪에 빠진 한국호의 뱃머리에서 처음 만난 후, 세상이 성난 사자처럼 달려가는 21세기 한 구석에서 두 번째 만남을 가졌다. 그때나 지금이나 쿤데라가 던지는 화두에 절로 고개를 끄덕이게 되는 것은 ž告? 작중 화자인 ‘나’(쿤데라일 것이다)가 아내 베라와 함께 호텔로 개조한 프랑스의 한 성에서 하룻밤을 묵으며 소설을 구상한다는 것이 내용의 전부인 이 작품에서 쿤데라는 희화의 날을 세우고 있다. 그는 작품을 통해 느리고 한가로운 관조와 여유가 사라져버린 오늘날의 현실을 특유의 가벼움과 철학적 유머로 느릿느릿 끌질을 쉬지 않는다. 그는 느림의 한가로움은 게으른 빈둥거림과 다르며, 그것은 마치 신의 창(窓) 들을 관조하는 행복이라고 동의를 요구하기도 한다. ???? 느림은 기억이고 빠름은 망각이다 다시금 관조하게 되는 말... 그렇다. ‘느림이란 기억이고, 빠름이란 망각’이다. 과거를 회상하고 미래를 구상할 때 발걸음은 느려지고, 모든 것을 잊고 싶어 할 때 발걸음은 빨라지는 법이다. 우리의 발걸음은 슬프게도 계속 빨라지고 있다. 냄새나는 퇴적물을 쏟아내는 것도 마찬가지다. 그러면서 모락모락 이는 자괴감은 툭하면 뛰자고 했던 우리의 자화상이다. ‘빨리빨리’를 최고의 가치로 숭앙한 우리... 다시금 쿤데라의 ‘느림의 철학’을 생각한다. 속도를 늦추고 달려온 자리를 뒤돌아보며 무엇이 잘못됐는지, 고칠 것은 고치고 다시 나갈 길을 곰곰 따져볼 때가 아닌지. 작품을 통해 “느림의 정도는 기억의 강도에 정비례하고, 빠름의 정도는 망각의 강도에 정비례한다” 는 말은 너남 없이 속도에만 몰입하고 있는 살맛 없는 이 세상에 대한 탄식과 비판을 담고 있다. 작품 속의 춤꾼의 비유도, 오직 대중적인 인기에만 연연하는 광대 인생들에 대한 신랄한 비꼼이며, 욕망에 대한 인간들의 집착이 얼마나 허망한 것인지를 일깨워 준다. 희극과 비극이 뒤엉킨 인간의 운명을 특유의 유머가 밴 철학적 사유를 보여주는 쿤데라의 매력은 <느림>에 이어 국내에 소개된 소설 <정체성>에서도 예외 없이 나타나고 있다. 그는 외친다. “어느 날 그 여인이 변했다. 그렇다면 그 여자가 달라진 것인가 아니면 나의 시선이 변한 것인가? ”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느림>에 이어 <정체성>, <농담>에서 그가 던지는 또 하나의 번뜩이는 비수.... 그는 도대체 삶의 비밀을 어느 정도 인식하고 있는 것일까. 이제, 순금으로 부서지는 햇살이 천지에 피를 돌게 하고, 아침마다 낯을 씻는 연한 풀잎들은 더욱 옷깃을 여밀 터인 데, 그리하여 나무들은 그 잎새들을 키워 바람마다 노래를 잉태케 할 터인데..... <느림>의 체온으로 이 봄의 순결을 찾아 떠나고 싶다. 열차가 발정 난 멧돼지처럼 삽시에 지나간 간이역에는 지금 무슨 꽃이 피어 있을까(*). (이관순 / 소설가ㆍ전기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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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1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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