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4-26(금)
 

8월은 잔인했습니다. 광복절 날 미국이 아프가니스탄 철수를 발표하자

마자 탈레반이 전광석화처럼 진격하더니, 베트남 사이공(호치민)처럼

눈 깜짝할 사이 수도 카불의 함락 소식이 들렸습니다.

 

국경을 향한 육로마다 수백만의 난민 행렬이 늘어섰습니다. 주변국은

철조망을 두르고 장벽을 치고 국경을 봉쇄했는데도 꾸역꾸역 밀려드는

아프간인들. 막힌 건 땅길에, 하늘 길도 마찬가지입니다.

 

카블 공항엔 수천 명의 아프가니스탄인 으로 장사진을 쳤습니다. 미군

수송기에 매미 떼처럼 붙어 몸뚱이 하나를 쑤셔 넣으려는 사람들의

비장함이 삽시에 비행장을 아수라장으로 만들었지요.

 

움직이는 수송기에 매달리다 떨어지고 깔리고, 구명대 하나를 놓고

죽기 살기 매달리는 모습에서 195012월 흥남 부두에서 사투를

벌이던 피난민들이 오버랩 됩니다. 그때나 이때나 똑 같은 아우성···.

 

그 시각. 한쪽에선 참혹한 인간 도륙이 시작됐습니다. 탈레반이 동족을

줄 세워 꿇어앉히는 순간, 총구마다 불을 뿜습니다. 볏단처럼 쓰러지는

사람들에 다가가 23탄을 쏴대는 광란의 춤판이 펼쳐졌지요.

 

그 눈 뜨고 볼 수 없는 잔혹한 동영상이 인터넷 SNS 공간을 유령처럼

떠돌았습니다. 평화롭던 일상이 깨지며 정신까지 너덜너덜해진 사람들.

아프간은 사람이 살 수 없는 저주의 땅으로 변해 버렸지요.

 

그런 가운데 또 한쪽에서는 숭고한 생명이 꽃핍니다. 콩나물시루 같은

수송기 안에서 여인의 출산 소식이 들렸습니다. ‘, 아가야 어쩌자고

이 시각에 태어나니?’ 탄식이 명치 끝을 가시가 돼 찌릅니다.

 

그래도 찾아온 생명이니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축복 송은

불러주어야 하겠지요. 무구한 생명 앞에 불행 운운하는 것은 온당하지

않으니까요. 벌써 비행 중인 수송기가 고향이 된 아기가 셋입니다.

 

최고의 행복 속에 불행은 잉태되고

최악의 상황에도 행복이 배태된다.

, 이것이 우리네 삶의 현장임을 여실히 짚어줍니다.

 

기내의 생명 탄생은 까마득한 옛 기억까지 소환합니다. 무너진 집터를

지나다 마주친 경이로운 순간의 기억. 깨진 기왓장을 들추자 짓눌린

풀포기의 가녀린 얼굴에서, 생명의 경건함에 소름이 돋았어요.

 

베트남 패망 때의 모습도 떠오릅니다. 1974430. 사이공 함락

직전의 긴박했던 곳은 미국 대사관입니다. 밖은 대사관으로 들어가려는

사람들로 아수라장이고, 대사관 옥상엔 흙빛 얼굴들이 하늘을 봅니다.

 

얼마나 급박했으면 헬리콥터가 앉지도 못하고 상공을 맴돌다 밧줄만

내렸을까. 한 사람이 밧줄에 매달리기 무섭게 헬기는 상공으로 치솟고,

대사관의 성조기가 내려졌습니다. 미군 철수의 마지막 종언이었죠.

 

미국 대사관에 들어왔으니 살았다고 안도한 그 많던 사람들은 어떻게

되었을까. 그 안에는 현지의 건설 현장 철수를 지휘하다가 미처 나오지

못한 두 분의 우리 회사 직원들도 있었습니다.

 

해안선이 긴 베트남은 바다로 뛰어든 난민 100만 명을 받아냈습니다.

세계 언론을 뜨겁게 달군 보트 피플의 슬픈 탄생입니다. 그중 운 좋은

사람은 수장을 면했지만, 아프간에는 뛰어 들 바다도 없습니다.

 

베트남 패망을 연민의 눈으로 지켜본 사람은 월남에서 사선을 넘어 온

32만 참전 용사들입니다. 그렇게 비원을 안긴 베트남은 그 후 기적처럼

살아났습니다. 깨진 기왓장 사이로 생명이 꽃을 피웠습니다.

 

광기의 칼춤이 난무하는 아프가니스탄은 언제라야 나라다운 모습을

되찾을 수 있을까? 한국처럼, 베트남처럼, 세월이가면 아프간 사람들도

희망을 노래할 날이 오면 좋으련만.

 

이념보다 무서운 건 신념입니다. 71년 전 한국, 47년 전 베트남이 이를

경험했습니다. 다음은 아프가니스칸 차례입니다. 허망한 이념과 신념의

너울을 벗고 기적의 날이 오기를 기원합니다.

 

두려움을 키우는 건 지금의 어려움이 언제 끝날지 모르는 막연함입니다.

그래도 한강의 기적이 있었고, 메콩 강의 축복이 있었으니 그날을 꿈꾸며

피투성이가 돼 있더라도 살아만 있으라. 살아만 있으라···.

키리에 엘레이손(kyrie Eleison)’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소설가 / daumcafe leeretter 이관순의 손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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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리에 엘레이손 Kyrie Eleis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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