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4-26(금)
 

인간만이 지닌 고귀한 것은 무엇일까? 누구는 지능이라 하고

혹자는 또는 이라고 합니다. 이 모두 창조주의 귀한 선물이지만

인생을 살면서 기억만큼 소중한 것도 없습니다.

 

지능이 모자란 사람도 행복할 수 있고, 말이나 글이 서툴러도 사는데

지장이 없습니다. 나름 행복감을 느끼며 살 수 있어요. 하지만 기억은

그 자체만으로 행불행을 나누는 선이 됩니다.

 

기억을 상실한다는 것은 한 인생이 사라지는 것과 같습니다. 기억한

만큼이 한 사람의 인생이 되고 존재한 삶이니까요. 기억은 부부, 가족,

친구, 사회를 연결하는 회로입니다.

 

기억의 공유가 없으면 사랑마저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그래서 죽음

다음으로 공포를 갖게 하는 것이 기억상실증입니다. 치매를 두려워하는

이유가 되겠지요.

 

언어 능력이 뛰어난 사람이 언젠가부터 익숙한 단어가 떠오르지 않고

수십 년째 사는 동네에서 길을 잃고, 그러다 어느 날 기억이 뿌리째

뽑혀 나간다고 생각해 보세요? 온몸에 소름이 돋을 일입니다.

 

치매 환자 가족이 기억을 살리려고 옛 추억을 꺼내는데, 한 노인학자는

치매 환자에게 과거 일을 자꾸 묻는 건 좋은 방법이 아니라고 합니다.

그 보다 정답이 없는 열린 질문이 효과적이라는군요.

 

엄마, 여기 온 거 기억나요?”라고 묻지 말고 엄마, 꽃이 참 예쁘죠?”

이렇게 지금의 얘기, 아무 말을 해도 답이 되는 말을 권합니다. 이런

대화가 언어를 잃은 치매환자와 관계를 지속할 수 있게 해준다고

조언합니다.

 

노인이 되면 외로움을 탑니다. 그 모습이 안타깝고 슬프지만, 뒤집으면

기억이 온전하다는 방증이기도 해요. 지난 9너무 외롭다고 광고를

낸 영국의 한 할아버지 이야기에 눈물이 핑 돌았습니다.

 

저는 사랑하는 아내이자 영혼의 동반자인 아내 조(JOE)를 잃었습니다.

친구나 가족이 없어 대화를 할 사람이 없어요. 24시간 계속되는 적막이

견딜 수 없는 고문과 같습니다. 나를 도와 줄 사람 없나요?”

 

은퇴 물리학자 윌리엄 씨(75)는 외로움에 사무친 나머지 자택 창문에

이렇게 쓴 포스터를 내걸고 도움을 호소했습니다. 슬하에 자식 없이

아내 조와 35년을 사랑하며 살았다고 합니다.

 

하지만 코로나 봉쇄령이 내려져 있던 5, 췌장암을 앓던 아내가 갑자기

떠나자 삶이 아파오기 시작했습니다. 생의 동반자를 잃은 뒤 밀려오는

외로움과 사투를 벌여야 했습니다. 적막강산인 집에서 하염없이

아내 사진만 쳐다보며 말입니다.

 

기억은 이렇게 무섭기도, 슬프기도 합니다. 누구는 기억 상실로 가족을

불행에 빠뜨리고, 누구는 온전한 기억 때문에 절절한 그리움을 떨칠 수

없다고 호소합니다.

 

문학평론가 고 김현은 기형도 유고시집 입속의 검은 잎에 붙인 해설에

사람은 두 번 죽는다. 한 번은 육체가 죽을 때, 또 한 번은 이를

기억하는 이들이 모두 사라질 때라고 썼어요.

 

그렇다면 윌리엄 씨의 기억엔 여전히 살아 있는 아내의 두 번째 죽음이

남아있으니, 얼마나 긴 세월을 외로워하면서 또 그리워해야 할까.

내게도 살아 있는 기억 하나가 있습니다. 3형제로 구성된 한국의 3인조

 

록 밴드 산울림30년 활동을 접고 해체하면서입니다. 200811

발매된 산울림 전집 박스 세트에 남긴 보컬 김창완의 글은 아직도

명료한 기억으로 빛납니다.

 

이제 바람은 멈추었다. 모든 색은 합쳐져 하나의 작고 검은 마침표가

됐으며, 모든 빛은 합쳐져 수억 겁의 미래로 가버렸다. 산울림, 그들의

노래는 화석이 되었다.”

 

겨울초입에 친구 아내가 하늘나라로 이사를 했습니다. 눈 내리는 적막한

들판을 혼자 걷는 순례자의 모습으로. 퍽이나 좋아한 슈베르트의 겨울

 

나그네선율을 사뿐히 지르밟으며 조심조심 방문을 열고 갔습니다.

 

기억은 늘 애잔하고, 슬프고, 그립습니다. 옷은 낡아지면 갈아입지만,

기억은 추억이 되고 추억은 화석이 되어 풍화를 이깁니다.

생전에 했던 말대로,

이방인처럼 찾아온 그대여!

이방인처럼 떠나간 그대여!

-글 이관순 소설가/ daumcafe leerett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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