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5-13(월)

오피니언
Home >  오피니언  >  기고

실시간뉴스
  • 어머니의 강(江)
    해마다 봄이 되면 어린 시절 어머님 말씀이 떠오릅니다. 항상 봄처럼 부지런해라, 항상 봄처럼 꿈을 가져라, 항상 봄처럼 새로워져라.... 그때는 그 말의 속내가 무엇인지 가슴에 와 닿지 않았습니다. 불혹이 넘어서 비로소 그 말에 눈을 떴습니다. 땅 속에서, 땅 위에서, 공중에서 혼신을 다해 생명을 탈환하는 노력을 보고, 어린 자녀들에게 ‘부지런해라‘고 말했습니다. 보이지 않는 곳곳에서 생명을 생명답게 키우는 꿈을 깨달으며, 항상 봄처럼 꿈을 가져라고 당부했습니다. 화단의 나무에서, 연못과 들에서 움트는 대지의 새눈들이 경이로워 딸아 너도 저렇게 새로워져라고 일렀습니다. 그때가 엊그제 같은데 세월이 많이 흘렀습니다. 나는 움직이지 않고 여기 서 있는데 왔다간 건 그들입니다. 이젠 아들이 손자에게 같은 말을 전합니다. 부지런해라, 새로워져라, 꿈을 가지라고. 어머니 말씀은 그렇게 대를 이어가며 전해지겠지요 흐르는 강물처럼... 인생을 잠깐 살다가는 여름밤의 꿈이라지만, 유독 그리움만 겁을 넘습니다. 마치 태양이 헐었다는 소리를 못 들은 것처럼. 이 세상에서 생명력이 가장 길고 영원한 향기를 내는 것, 그리움이 아닐까요?. 사람은 그리움을 먹고 사는 영물입니다. 5월은 많은 생각을 부릅니다. 생각은 그리움을 키웁니다. 어머니는 내게 유독 많은 그리움을 남기셨습니다. 오늘도 연기처럼 피어오르는 그리움이 바람을 타고 산과 강을 건너 퍼집니다. 언젠가는 내가 좋아했던 공단 치마저고리를 차려입은 어머니가 저 하늘에서 내려올 것만 같습니다. 부모가 죽으면 불효한 자식이 가장 서럽게 운다지요. 내가 그렇습니다. “서방님은 어머니한테 할 만큼 하셨어요. 우리가 못했지.” 형수님은 늘 그런 말을 해도 나는 잘못한 것만 생각납니다. 그런 일들이 새록새록 살아납니다. “왜 그걸 못해드렸을까.” 아쉬움이 커지면 가슴이 시려옵니다. 떠나신 지 30년인데 지금도 어머니 소리만 들으면 가슴이 짠합니다. TV에서 어머니 얘기를 듣다 눈시울이 붉어진 적도 많습니다. 지난해 아버지 부시 대통령의 아내 바바라 여사(94)가 세상을 떠났을 때 슬픔이 이렇게 아름다운 것일 수도 있구나 생각했습니다. 유난히 숱이 많은 순백의 백발은 그녀만의 캐릭터였습니다. 다음날 뉴욕타임스에 만평 한 컷이 실렸습니다. 그림판 하나가 세계의 많은 사람들의 심금을 울린 건 흔치 않은 일입니다. 그녀의 백발은 결코 화사하지 않은 슬픔이었기 때문이죠. 병을 앓던 어린 딸이 일찍 세상을 뜨자 백발로 변한 것입니다. 얼마나 슬픔이 컸으면, 딸이 그리웠으면, 그녀의 금발을 하루아침에 백발로 만들어버렸을까?.... 그림판은 백발의 여사가 흰 날개를 달고 천성 문을 향해 나르고 있고, 반대편에서는 어린 천사가 흰 날개를 퍼덕이며 그리운 어머니를 영접하러 나오는 장면입니다. 한 컷의 그림판이 이렇게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고 감동시키는구나... 그리움이 슬픔이고 슬픔이 그리움이란 것을, 작가가 잘 포착해 낸 것입니다. 어머니가 그리운 날엔 한강에 나갑니다. 오늘같이 안개까지 내린 날이면, 강뚝에 앉아 딱히 정한 곳도 없이 강자락에 싸여 흘러온 세월을 돌아봅니다. 푸른 물 겹겹으로 가슴 휘두르며 나홀로 걸어가셨던 당신의 세상을 생각합니다. 강은 흐르다 돌에 부딪치고 바위에 깨져도 이내 한 물로 흘러갑니다. 그곳에 얼마나 많은 상처가, 아픔이, 슬픔이 있었을까요. 당신은 이 모든 것을 넉넉한 품으로 안고 가셨습니다. 눈물을 삼키시면서... 그래서 물색이 저리도 검푸른가봅니다. 오늘도 새벽처럼 찾아오시는 어머니, 담장너머 아득한 안개 속으로 문풍지 같은 나의 떨림을 들으시나요? 당신의 자리는 억겁을 두고도 돌아오지 못할 흘러간 강물이신가요?. 소설가 이관순의 손편지
    • 오피니언
    • 기고
    2024-05-13
  • 아빠가 미안하다, 널 몰랐구나
    며칠 전 전국 청소년 글짓기 심사를 끝내면서 갖는 유감입니다. 유한양행을 설립한 유일한 박사의 정신을 받들어 유한재단이 해마다 5월이 되면 전국 초?중?고생을 대상으로 백일장을 개최합니다. 올해로 28년째니 연륜이나 규모면에서 전국 규모로 열리는 대표적 청소년 백일장입니다. 올해는 천여 명의 청소년이 아카시아 향이 흩날리는 유한공고 교정에 모여 초?중?고별 글제에 따라 글 향기를 뽐냈습니다. 씁쓸한 것은 ‘내가 아버지라면’ 이란 글제를 놓고 중학생들이 보여준 아버지에 대한 의식 때문입니다. 글제를 택할 때 10대의 자녀들이 평소 아버지란 존재에 대해 어떤 생각을 할까? 글을 통해 아버지 상(像)을 유추해보자는 의도가 있었지요. 글제를 내면서 ‘혹시나’ 했는데, 적지 않은 학생에게서 아버지의 이미지가 긍정적이지 못함을 확인하고 말았습니다. 학생들은 아버지가 칭찬에 인색하다는데 불만이 컸습니다. “잘했네” “알았다” “수고했어.” 등과 같은 정감 없는 아버지의 말투에 아이들도 묻는 말에나 답하는 단답식 대화가 늘어남을 알 수 있었지요. 아버지의 칭찬이 있을 때도 그 뒤에 따라올 말에 신경을 쓴답니다. 때 아닌 칭찬이 의심스럽다는 눈초리죠. “그래 그건 잘했어. 그런데 넌...” 한숨까지 섞인 조언을 듣노라면 작은 희망조차 웅크려진다고 합니다. 아이들은 순수한 칭찬에 목말라합니다. 아버지의 특징으로 감정표현이 없다고 합니다. 무뚝뚝한 아버지, 어려운 아버지라고 쓴 학생이 많았습니다. 그러면서 아이들은 원합니다. 내 이름을 자주 불러주는 아빠, 사랑한다고 말해주는 아빠를 기다립니다. “이리와 봐” 식의 부름보다 격려의 부름이, 사랑의 부름이었으면 한답니다. “넌 왜 엄마를 통해서 말하지?” 아버지의 불만도 이해는 되지만 사실 자초한 면이 없지 않습니다. 평소 대화가 부족했다는 방증이지요. 아이들은 철부지가 아니었습니다. 속에 담아놓고 말을 안 할뿐, 아버지가 가족을 위해 희생한다는 걸 알고 있습니다. 아는데도 다가서기가 쉽지 않은 분일뿐이지요. 역지사지(易地思之)로 사고의 전환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자녀의 입장에서 생각해보는 그런 자세가 필요하다고 느꼈기 때문입니다. 어버이날, 친구들과 나눈 에피소드입니다. 어버이 날이라고 아들이 전화를 했을 때, 예전에 우리는 첫마디를 이렇게 말했지요. “그래 나다. 기다려 엄마 바꿔줄게” 아들이 그게 아니고요 하면 “벌써 돈 떨어졌냐?” 그래도 아들이 용기를 내 ‘아버지 사랑합니다’라고 말할 때의 대답은 더 걸작입니다. “미친 놈, 뚱 단지 같긴!” 옛날 자신들의 모습을 떠올리며 파안대소했습니다. 자식의 마음을 알면서도 멋대가리 없는 말을 했다고. 따지고 보면 그렇게 큰 아들이 지금의 아빠들입니다. 대를 이어 배워온 언어의 관습이 그렇다면, 누구를 탓할 입장도 아니지요. 대화도 훈련이 되지 않으면, 끊기고 단절되기 싶습니다. 대화의 부족이나 불만은 그것으로 끝나지 않고 정서적 불만으로 이어집니다. 갈수록 멀어지는 아버지, 외톨이가 되는 아버지는 어쩌면 현대사회가 만든 자화상일지 모릅니다. 피곤에 절어 밤늦게 퇴근하고 새벽처럼 나가는 아버지... 가뜩이나 어려워진 자영업자 아버지... 그 침통함이 무의식중에 그렇게 비춰진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버지의 노고에 감사하면서도 강한 이미지 때문에 접근하기가 쉽지 않은 이유입니다. 아이들은 크면서 아버지가 힘없는 존재라는 것을 압니다. 엄마가 자녀들과 대화를 독점하고 있을 때 혼자서 담배를 피우는 모습이 쓸쓸해 보였다고 합니다. “나 요즘 힘들다”고 엄마에게 말할 때는 아버지 어깨를 누르는 책임감도 느껴졌답니다. 좋은 세상이 된 줄 알았는데 예나 지금이나 아버지란 존재가 외롭기는 마찬가지인 듯합니다. 사람은 태어난 후 ‘아빠, 엄마‘ 로 부르며 성장기를 보내다가 때가 되면 ’아버지 어머니‘로 바꿔 부르기 시작합니다. 멀리 이스라엘에서도 같은 호칭을 사용한다고 해 놀랐습니다. 기독교100주년기념교회를 담임하다 정년퇴임하고 거창으로 내려간 친구 이재철 목사가 전하는 말입니다. 이스라엘을 갔을 때, 누가 아빠하고 뒤에서 부르더랍니다. 깜짝 놀라 돌아보니 이스라엘 아이가 자기의 아빠를 부르는 것이었습니다. 같은 뜻의 어휘지만 ’아빠‘와 ’아버지‘는 의미가 사뭇 다릅니다. 아빠는 아버지를 뜻하는 아람어고, 아버지는 역어인 헬라어입니다. 아빠로 불리는 아버지는 자식에게 무한책임을 지지만, 아버지로 부르는 아들은 부모를 섬기는 모습을 뜻합니다. 그런 역할과 기능이 어휘에 담긴 거지요. 지금은 자녀들에 대해 무한책임을 지는 아빠의 자리에 있습니다. 모든 헌신으로 아이들을 키우지만, 어느 날이 되면 아버지의 자리로 옮겨 앉아야 합니다. 그 과정이 아름다우려면 아버지가 자녀들과의 대화에 새로운 눈을 떴으면 합니다. “아빠가 미안하다. 네 맘을 헤아리지 못해서”라는 생각으로. 소설가 이관순의 손편지’
    • 오피니언
    • 기고
    2024-05-07
  • 음악은 천상의 소리
    밤바람이 선득한 주말. 저녁을 먹고 장자호수공원으로 산책을 나섰습니다. 사람들이 오가는 사이로 청아한 색소폰 연주음이 들려옵니다. 발길이 절로 이끌려 간 곳엔 한 분이 ‘셀프 콘서트’를 열고 있네요. 잔디밭에 앉아 연주가 끝날 때마다 박수를 칩니다. 연주력이 준수한데다 가을밤의 정취까지 더해져 색소폰 선율에 젖는 아름다운 가을밤을 즐겼지요. 음악은 사랑을 전하는 신의 소리라고 합니다. 모든 사람을 하나로 묶어 주지요. 음악은 연주자의 기쁨도 되지만 만인의 즐거움도 됩니다. 연주가의 재능을 부럽게 바라본 영화가 있습니다. ‘어거스트 러쉬.’ ‘음악은 사랑을 낳고 사랑은 운명을 부른다.‘는 말이 잘 어울린 영화지요. 밴드 싱어이자 기타리스트인 루이스와 촉망 받는 첼리스트 라일라의 보석보다 반짝였던 단 하루 밤 이후, 남자는 그녀를 한 번도 잊은 적 없고, 여자는 얼굴도 모르는 낳은 아이에 대한 그리움을 놓은 적이 없지요. 이들의 믿음 하나는 “음악이 있는 한 우리는 다시 만날 거야”라는 것. 부모의 DNA를 받은 아이는 일찍부터 놀라운 음악적 재능을 보입니다. 시설에서 자란 11세의 소년은 부모만이 자신의 음악을 알아볼 수 있다는 믿음 하나로 뉴욕을 찾아갑니다. 모든 게 신비한 뉴욕. 도시가 만드는 수많은 소리들이 소년의 청각에 음계로 포착됩니다. 소년은 아이들을 모아 거리에서 노래를 시키는 워저드를 만나 어거스트란 이름으로 거리 연주자로 등장해 천부적인 실력을 보입니다. 하루는 소리에 끌려 교회 합창단 연습장에 들렸다가 처음 보는 오선지와 오르간 앞에서 작곡하고 연주하는 놀라운 재능을 발휘합니다. 이를 지켜본 목사님이 줄리어드에 음악천재로 추천합니다. 줄리어드에서 사모곡 라프소디를 작곡해 주위를 놀라게 한 어거스트. 마침내 뉴욕필하모니 콘서트에 특별 출연자로 초청됩니다. 줄리어드 출신의 유명 첼리스트(엄마)와 함께. 하지만, 연주회를 앞두고 위기가 오죠. 워저드가 연습장에 나타나 아버지라며 친권을 주장하고 데려갑니다. 학교는 간곡히 연주회만큼은 보내달라고 부탁을 하지만 거절당하죠. 금관악기가 아이의 영혼을 뽑는다는 그릇된 인식으로... 다시 광장 연주에 나서는 어거스트. 부근을 지나던 루이스가 소리에 홀려 찾아오고, 금세 호흡을 맞추더니 황홀한 기타 2중주를 펼칩니다. 어거스트가 오늘 밤 있을 센트럴파크 공연을 알려주지만, 루이스는 귀에 담지 않고 “용기를 잃지 말라”는 말만 주고 떠납니다. 그날 밤, 어거스트는 친구의 도움으로 탈주에 성공해 연주장으로 달려가고, 지방공연에 나서던 루이스는 뉴욕 중심가에서 아이 얼굴이 나온 배너광고를 보지요. 전율을 느낀 그도 차를 버리고 연주회장으로 내달립니다. 환호 속에 첼로 연주를 끝낸 라일라가 아이를 생각하며 공원을 빠져나올 때, 줄리어드 총장이 특별초청 지휘자를 소개합니다. 무대에 등장하는 어거스트. 환호하는 청중... 놀라운 자작곡이 그의 지휘 속에 연주를 시작합니다. 밖을 향하던 라일라가 연주음에 끌려 뒤돌아서고, 또 반대편에서는 황홀한 눈빛의 루이스가 나타납니다. 마침내 무대 앞에 이르러 12년 만에 마주 서는 남과 여... 환희의 포옹을 할 때 지휘하는 아이의 모습이 비칩니다. 세상에는 수많은 소리들로 가득 차 있지요. 귀를 기울인 만큼 들리기도 하고 지나치기도 합니다. 끊임없이 들리는 세상의 소리를 옮겨 작곡하고 연주하는 음악천재가 말하죠. “아이들이 동화를 믿듯 저는 음악을 믿어요. 부모님이 살아계신다면 제 음악을 꼭 듣게 될 거야요.” 어거스트의 간절한 믿음처럼 나는 어떤 믿음을 확신하며 살고 있나요? 글 이관순(소설가)
    • 오피니언
    • 기고
    2024-04-29
  • 내 앉아있는 자리
    스산한 바람에 비까지 흩뿌리니 단풍은 지고 낙엽만 우수수 쌓입니다. 이렇듯 나무도 꽃도 지상의 모든 생명들이 사이즈를 줄이는 시기입니다. 그것이 한 주기의 마지막 겨울을 상대하는 지혜입니다. 사람이 나이가 든다는 것 또한 사이즈를 줄이는 것으로 시작됩니다. 몸집이 줄고, 먹는 게 줄듯 이것이 절제의 근본이며 이치입니다. 세상에 나올 때 작게 나왔으니 돌아갈 때도 비우고 작게 돌아가야 합니다. 여기에는 실상과 허상이 공존하지만 스스로 말수를 줄이고, 욕심도 미움도 줄이고, 자랑, 명예 같은 덧없는 것은 날려야 합니다. 그래야 사이즈가 줄지요. 루디 세네카는 “인간은 마치 시간이 모자란다고 불평하면서, 마치 시간이 무한정인 것처럼 행동한다.”고 사람의 어리석음을 비꼬았지요. 그런데 사람은 이를 알면서도 어제의 습관을 오늘도 고집하고 삽니다. 친구가 많다고 자랑하시나요? 바쁜 것을 미덕으로 생각하셨나요? 그보다는 흉금을 터놓고 말할 한 사람의 친구가 더 소중한 때입니다. 친구도, 만남도, 분주함도 지혜롭게 줄여가는 것이 노년의 삶을 가볍게 하고 실수를 줄이는 방법입니다. 우리 몸은 수분이 80% 이상이라고 하죠. 비슷한 비율로 우리 삶을 주장하고 있는 것이 말입니다. 그만큼 물과 말은 몸을 유지하고 삶을 구성하는 중요한 요소입니다. 그래서 절제를 말할 때 가장 먼저 꼽는 게 말입니다. 내가 살면서 토해낸 말을 양으로 계측한다면 얼마나 될까. 그중 꼭 필요했던 말은 얼마쯤 일까. 이제는 할 말 못할 말, 안 해도 좋을 말, 상처 주는 말을 가려가며 했으면 합니다. 내뱉은 말은 흘러간 세월처럼 돌릴 수 없으니... 그래서 이랬으면 좋겠습니다. “이제는 많이 들어주자. 듣는 귀는 8로 열고 말하는 입은 2로 줄이자. 남이 말할 때 자르지 말자. 중간에 끼어들지 말자. 말 줄기를 돌리지 말자.” 비위 상한다고 파르르, 욱, 버럭 하는 감정도 이젠 삭혀 없애야 합니다. 행여 그런 상황이 되면 심호흡 한 번으로 날려버리세요. 대신 많이 웃어주면 좋겠습니다. 상대가 가족, 친구, 이웃, 누구든 만나면 웃는 것으로 말문을 열어요. 나이가 들면 웃는 근육도 굳는다는데, 얼굴에 웃음기마저 빠지면 노인 특유의 표정 없는 일그러진 인상만 남아요. 나이가 든다는 것은 옻칠을 더하는 것처럼 윤을 내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미움이나 시기, 질투는 다 헛된 뜬구름이지요. 뜬구름을 좇다가 낯선 곳에 서 있는 나를 발견하는 건 아픈 일입니다. 살고 있는 이날, 앉아 있는 이 자리가 내가 족해야 할 자리임을 아는 사람은 행복합니다. 이 나이에 맘대로 못할 게 뭐야. 하지만 나이가 들수록 남을 배려하며 사는 인생이 아름답습니다. 살아보니 ‘역지사지(易地思之)’ 이상의 스승은 없더군요. 사서삼경이 대단한 게 아니라, 상대편 입장을 늘 먼저 헤아리면 그것이 상선의 절제입니다. “오죽했으면... 그래 저럴 수 있겠다... 나도 그 입장이면... 저도 사람인데.” 글 이관순(소설가)
    • 오피니언
    • 기고
    2024-04-22
  • 너도 죽는다‘메멘토 모리’
    말에는 묘한 힘이 있어 곱씹을수록 향기를 내는 말이 있고, 겸손함을 가르치는 말도 있지요. 라틴어는 그런 철학적 의미를 함의한 말과 글이 꽤 많습니다. 언젠가의 기억입니다. KBS TV '도전 골든벨‘에서 최후 1인이 된 학생에게 50번 마지막 골든벨 문제가 주어집니다. “고대 로마에서 승리를 쟁취한 장군이 개선행진을 할 때 주위에서 외쳤던 라틴어는?“ “메멘토 모리" 영예의 골든벨이 울리는 짜릿한 순간을 지켜보았지요. 다소 생소한 라틴어 '메멘토 모리(memento mori)'는 '죽음을 기억하라‘는 뜻입니다. 유래는 로마 공화정의 개선식으로 거슬러 올라가요. 개선식은 전쟁에서 승리한 장군에게 주어지는 영예입니다. 개선장군은 관습에 따라 전차를 타고 퍼레이드를 벌입니다. 영웅이 탄 마차가 시민의 환호 속을 헤치고 행진하는 동안 뒤에서 노예들이 큰소리로 외쳐댑니다. 메멘토 모리! 메멘토 모리! “오늘은 개선장군이지만 너도 언젠가는 죽는다. 겸손하게 행동하라.” 승리에 도취된 장군에게 본분을 잊지 않도록 경각심을 주는 장치인 셈이죠. 로마 최고의 환대 속에서도 너는 신이 아닌, 한 인간일 뿐임을 알린 것입니다. 메멘토 모리에는 세 가지 철학적 가치가 내재되어 있습니다. ‘죽음을 기억하라. 운명을 사랑하라. 현재에 충실하라.’ 이 셋은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도 적용되는 훌륭한 교훈입니다. 스티브 잡스도 스탠퍼드대 졸업식 축하 연설에서 이를 강조했습니다. 췌장암 투병으로 힘든 시기를 보내던 그는 ‘죽음은 삶이 만든 최고의 발명품‘이라고 격찬합니다. 그러므로 제한된 인간의 시간을 다른 누군가의 인생을 살 듯 낭비하지 말고 자신을 믿고 집중하라고 졸업하는 학생들에게 말합니다. 뜻이 통하는 라틴어에 ‘카르페 디엠(carpe diem)'이 있습니다. 몬래 이 말은 신을 공경하고 오만해지지 말라는, 현재를 가치 있게 살라는 뜻인데 이후 기독교 영향을 받아 현세의 부귀나 영화의 부질없음을 알립니다. 우리에게도 ‘화무십일홍’이란 말이 있죠. 열흘 가는 붉은 꽃이 없다는 이 말엔 ‘한 번 흥한 것은 반드시 쇠한다.’ 는 속뜻을 지닙니다. 트로트 가수 김연자가 불러 유명한 노래 ‘아모르 파티’도 같은 말입니다. 사랑을 뜻하는 아모르와 운명을 뜻하는 파티가 합성된 라틴어로 이 또한 ‘운명을 사랑하라’는 말이지요. 인간이 가져야 할 삶의 태도로 철학자 니체가 처음 사용했습니다. 메멘토 모리는 미국 남서부에 거주해온 나바호족에서도 찾을 수 있어요. 그들은 “네가 세상에 울면서 태어날 때 세상은 기뻐했으니, 네가 죽을 때 세상은 울어도 너는 기뻐할 수 있도록, 그러한 삶을 살아라.”는 의미심장한 철학을 닮고 있습니다. <메멘토 모리>, <카르페 디엠>, <아모르 파티>, <화무십일홍>까지 모두 겸손한 삶을 가르칩니다. 제한된 시간을 사는 인생에게 죽음을 기억하고, 운명을 사랑하고, 오늘에 충실하라.... 이보다 더 삶을 성찰하게 하는 말이 또 있을까 싶습니다. 글/ 이관순(소설가)
    • 오피니언
    • 기고
    2024-04-15
  • 의리가 사라진 세상
    짓궂은 질문을 해봅니다. ‘사람’과 ‘인간’은 같은 거야? 사전의 설명은 비슷 하지만, 아무래도 “저 인간!” 하면 부정적 이미지가 앞서죠. “저 사람 인품이 좋아”로는 써도 “저 인간 인품이 좋다”고 말하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세상에 사람 같지 않은 인간이 많다보니 용례까지 헷갈립니다. 초등학교 국어 교과서의 ‘의좋은 형제’를 생각하면 지금도 마음이 훈훈합니다. 우애 좋은 형제가 가을 수확을 마치고 들판에 볏단으로 노적가리를 만듭니다. 형이 보니 아우네 것이 적어 보입니다. 그날 밤, 어려운 아우 형편을 안 형이 자신의 볏단을 옮겨 놓고, 다음날 밤은 식솔 많은 형을 생각한 아우가 반대로 볏단을 옮기지요. 노적가리가 줄지 않자 형제 다 고개를 갸우뚱합니다. 마침내 볏단을 옮기던 형제가 달빛 아래 마주치면서 얘기는 끝나죠. 그때의 감동으로 습자시간이면 붓글씨를 ‘노적가리 풍년일세’만 썼던 기억이 납니다. 가난해도 마음은 풍년인 사람들이 살던 시절이 있었지요. 엊그제 복권 당첨금이 살인흉기가 된 사건이 났습니다. 우애 좋은 형제가 복권 당첨으로 수억 원의 당첨금을 받아 배분까지는 성공했는데, 그 돈으로 사업을 했던 형이 망하며 사단이 납니다. 돈을 더 요구하는 형과 보증을 선 동생 간에 감정이 충돌하다 동생을 살해하는 일이 벌어진 겁니다. 황금만큼 요괴스러운 것은 없습니다. 돈 앞에 장사가 없다지요. 일본 속담에 ‘담배꽁초와 돈은 쌓일수록 냄새가 난다’고 했습니다. 돈이 사람을 부패하게 만든다는 뜻이겠지요. 사는 것은 전보다 풍족해도 인성은 강퍅해졌습니다. 돈을 둘러싼 이기적 욕망이 칼끝처럼 첨예하게 부딪치는 세상입니다. 개신교의 큰 어른이셨던 목사님이 생전에 우리교회에 오셔서 당신이 붓으로 큼직하게 쓴 ‘의리를 지키자’란 글귀를 강단에 내리고 설교를 하신 적이 있습니다. 세상이 오죽하면 의리를 부탁했을까요. 사람과 사람,관계 사이에 의리가 사라졌다고 탄식하는 소리가 높아만 집니다. 제목을 잊은 영화입니다. 세 친구가 딱 한 번 은행을 털어 깨끗하게 살자며 치밀한 준비를 합니다. 그들의 거사는 성공했고 무사히 안전지대에 도착하자 돈다발을 놓고 환호합니다. 한 친구가 축배를 들자며 나갔다가 술에 독을 타서 옵니다. 욕심이 생긴 거죠. 태연하게 돌아온 친구가 술잔을 건네고 축배를 외칠 때, 팡팡! 술 사온 친구가 고꾸라지고 남은 둘은 낄낄댑니다. 뛰는 놈 위에 나는 놈이 있거든요. 둘은 더 큰소리로 건배를 외치지만 독배를 든 이들도 쓰러집니다. ‘사람에게 의리 빼면 시체’ 라고 말하던 세상이 있었지요. 의리란 뜻은 ‘사람관계에서 마땅히 지켜야 할 도리’로, 여기엔 사람이 갖춰야 할 덕목이 다 녹아져 있죠. 가난은 견뎌내기 어려운 것임을 경험한 세대가 모이면 그래도 그때가 좋았다고 반추합니다. 의리가 사라진 곳에 먹잇감을 놓고 으르렁 대는 동물세계가 어른댑니다. 사람 사이 흐르는 체온 대신 물질을 향한 충혈 된 눈빛만 섬뜩하니 사람은 없고 인간만 남아 보입니다. 다시 사전을 봅니다. ‘인간’이란 단어의 기본설명 뒤로 ‘사람의 모습은 하고 있되 사람답지 못하다는 뜻.’을 추가하고 예문도 달았군요. “저 인간이 한 짓을 생각하면 돌아버리겠어.” 너무도 흔히 듣는 슬픈 말이 됐습니다. 글 이관순(소설가)
    • 오피니언
    • 기고
    2024-04-08
  • 의리가 사라진 세상
    짓궂은 질문을 해봅니다. ‘사람’과 ‘인간’은 같은 거야? 사전의 설명은 비슷 하지만, 아무래도 “저 인간!” 하면 부정적 이미지가 앞서죠. “저 사람 인품이 좋아”로는 써도 “저 인간 인품이 좋다”고 말하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세상에 사람 같지 않은 인간이 많다보니 용례까지 헷갈립니다. 초등학교 국어 교과서의 ‘의좋은 형제’를 생각하면 지금도 마음이 훈훈합니다. 우애 좋은 형제가 가을 수확을 마치고 들판에 볏단으로 노적가리를 만듭니다. 형이 보니 아우네 것이 적어 보입니다. 그날 밤, 어려운 아우 형편을 안 형이 자신의 볏단을 옮겨 놓고, 다음날 밤은 식솔 많은 형을 생각한 아우가 반대로 볏단을 옮기지요. 노적가리가 줄지 않자 형제 다 고개를 갸우뚱합니다. 마침내 볏단을 옮기던 형제가 달빛 아래 마주치면서 얘기는 끝나죠. 그때의 감동으로 습자시간이면 붓글씨를 ‘노적가리 풍년일세’만 썼던 기억이 납니다. 가난해도 마음은 풍년인 사람들이 살던 시절이 있었지요. 엊그제 복권 당첨금이 살인흉기가 된 사건이 났습니다. 우애 좋은 형제가 복권 당첨으로 수억 원의 당첨금을 받아 배분까지는 성공했는데, 그 돈으로 사업을 했던 형이 망하며 사단이 납니다. 돈을 더 요구하는 형과 보증을 선 동생 간에 감정이 충돌하다 동생을 살해하는 일이 벌어진 겁니다. 황금만큼 요괴스러운 것은 없습니다. 돈 앞에 장사가 없다지요. 일본 속담에 ‘담배꽁초와 돈은 쌓일수록 냄새가 난다’고 했습니다. 돈이 사람을 부패하게 만든다는 뜻이겠지요. 사는 것은 전보다 풍족해도 인성은 강퍅해졌습니다. 돈을 둘러싼 이기적 욕망이 칼끝처럼 첨예하게 부딪치는 세상입니다. 개신교의 큰 어른이셨던 목사님이 생전에 우리교회에 오셔서 당신이 붓으로 큼직하게 쓴 ‘의리를 지키자’란 글귀를 강단에 내리고 설교를 하신 적이 있습니다. 세상이 오죽하면 의리를 부탁했을까요. 사람과 사람,관계 사이에 의리가 사라졌다고 탄식하는 소리가 높아만 집니다. 제목을 잊은 영화입니다. 세 친구가 딱 한 번 은행을 털어 깨끗하게 살자며 치밀한 준비를 합니다. 그들의 거사는 성공했고 무사히 안전지대에 도착하자 돈다발을 놓고 환호합니다. 한 친구가 축배를 들자며 나갔다가 술에 독을 타서 옵니다. 욕심이 생긴 거죠. 태연하게 돌아온 친구가 술잔을 건네고 축배를 외칠 때, 팡팡! 술 사온 친구가 고꾸라지고 남은 둘은 낄낄댑니다. 뛰는 놈 위에 나는 놈이 있거든요. 둘은 더 큰소리로 건배를 외치지만 독배를 든 이들도 쓰러집니다. ‘사람에게 의리 빼면 시체’ 라고 말하던 세상이 있었지요. 의리란 뜻은 ‘사람관계에서 마땅히 지켜야 할 도리’로, 여기엔 사람이 갖춰야 할 덕목이 다 녹아져 있죠. 가난은 견뎌내기 어려운 것임을 경험한 세대가 모이면 그래도 그때가 좋았다고 반추합니다. 의리가 사라진 곳에 먹잇감을 놓고 으르렁 대는 동물세계가 어른댑니다. 사람 사이 흐르는 체온 대신 물질을 향한 충혈 된 눈빛만 섬뜩하니 사람은 없고 인간만 남아 보입니다. 다시 사전을 봅니다. ‘인간’이란 단어의 기본설명 뒤로 ‘사람의 모습은 하고 있되 사람답지 못하다는 뜻.’을 추가하고 예문도 달았군요. “저 인간이 한 짓을 생각하면 돌아버리겠어.” 너무도 흔히 듣는 슬픈 말이 됐습니다. 글 이관순(소설가)
    • 오피니언
    • 기고
    2024-04-04

실시간 기고 기사

  • 망각하면 안 될 세 문장
    성서에도 사람은 겸손하기가 참 어려운 동물이라고 여러 곳에 기록했다. 한여름의 잡초처럼 매일 같이 발로 꾹꾹 밟아주지 않으면 순식간에 웃자라 버리는, 그것이 잡초의 성질이고 사람의 교만이다. 평생을 머리 조아리다 말도 제대로 못 하던 사람이 돈 좀 벌었다고 거덜대고, 작은 감투 하나에 큰 벼슬이라도 한양 목에 빳빳하게 풀을 먹이고 우쭐되는 걸 보면, 교만만큼 인간의 본성이 뚜렷한 것도 없어 보인다. 교만이 ‘일만 악의 뿌리’이고 ‘패망의 앞잡이’란 가르침이 끊이질 않지만, 인류의 역사는 달라지지 않았다. 인류의 흥망성쇠가 교만의 악순환에서 비롯됨이니, 사람이 언제라야 창조주의 뜻에 맞추어 겸손해 질까? 사람의 겸손과 교만은 말하는 것에서 어느 정도 알 수 있다. 자기 말만 앞세우고 남의 말을 무시하거나, 박수를 치는 것보다 박수 받기를 좋아하는 사람을 겸손하다 말하지 않는다. 그보다 교만과 겸손을 구분하는 방법은 죽음에 대한 인식에서 좀 더 다가설 수 있다. 짧은 생을 살다가는 인생임을 아는 사람은 마치 천년을 살 것처럼 나대지 않으니까. 말에는 묘한 힘이 있고 향이 나는 말이 있다. 라틴어에는 그러한 철학적 의미를 함의한 문장이 많이 있다. 예나 지금이나 사람이 사는 곳엔 때리고 때려도 솟아오르는 두더지처럼 뿌리가 뽑히지 않는 것이 교만이다. 20년은 족히 지났을 기억 하나가 있다. KBS-TV1 <도전 골든벨>에서 최후의 1인이 된 학생에게 마지막 50번 문제가 주어지는 장면을 지켜보았다. “고대 로마에서 승리를 쟁취한 장군이 개선행진을 할 때 장군 뒤에서 계속 외쳐대는 라틴어는?” “메멘토 모리!” 우와~! 학생들의 함성과 함께 영예의 골든 벨이 울리는 짜릿한 순간을 아들과 함께 지켜보았다. 라틴어 ‘메멘토 모리(memento mori)’는 '죽음을 기억하라’는 오묘한 뜻을 지니고 있다. 유래는 2000년 전 로마 공화정의 개선식에서 비롯되었다. 개선식은 전쟁에서 승리한 장군에게 주어지는 최고의 영예였다. 백마 네 마리가 끄는 전차를 타고 개선 퍼레이드를 벌이는 것이다. 영웅이 탄 마차가 연도를 메운 로마 시민의 환호 속을 헤치고 행진하는 장면은 장쾌했다.' 그러나 화려한 금빛 마차에는 열광 속에 가린 ‘숨은 그림’ 하나가 있다. 개선장군이 손을 들어 시민들에게 화답하는 동안, 장군 뒤에 탑승한 사람이 큰소리로 계속 외쳐대는 장면이다. 대중의 환호소리가 커지면 커진 만큼 그의 목청도 따라 커지는 외침이 있었다. “메멘토 모리! 메멘토 모리!...” “오늘은 개선장군이지만 너도 언젠가는 죽는다. 겸손하게 행동하라.” 승리에 도취된 장군을 향해 준엄한 하늘의 소리를 들려주는 것이다. 승전한 영웅 그대여! 영광의 이 순간에도 유한한 인간의 본분을 잊지 말지니! 교만한 인간의 관성에 경각심을 일깨우는 장치 하나를 둔 것이다. 로마 최고의 환대 물결 속을 가르면서 행진하는 시간에도, 모두가 너를 향해 열광하는 순간에도, 그림자처럼 죽음이 뒤따르는 인간이라는 것을 자각하게 하는 것이다. ‘메멘토 모리’에는 세 가지 철학적 가치를 담았다. ‘죽음을 기억하라! 운명을 사랑하라! 현재에 충실하라!’라는 것이다. 이 세 경구는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도 획 하나 가감 없이 들어맞는 처세훈이자 삶의 태도다. 생전에 스티브 잡스도 스탠퍼드대 졸업식 축하 연설에서 이를 강조했다. 췌장암 투병으로 힘든 시기를 보내던 잡스가 연단에 올라 ‘죽음은 삶이 만든 최고의 발명품’이라고 격찬했다. 죽음이 없었으면 나는 실패한 인생을 살았을 것이라는 의미였다. 그러므로 “제한된 나에 주어진 시간을 다른 사람의 인생을 살 듯이 낭비하지 말라”라며 “오로지 자신을 믿고, 열정으로, 집중하십시오.” 사회로 첫 발을 내딛는 스탠퍼드 학생들에게 혼신의 힘을 실어 일렀다. 메멘토 모리와 함께 자주 인용되는 또 하나의 문장이 있다. ‘카르페 디엠(carpe diem)'. 본래 이 말은 오만하지 말고 ‘현재를 가치 있게 살라’라는 뜻으로, 오늘을 즐기며 살라는 것으로도 읽힌다. 메멘토 모리와 카르페 디엠은 언뜻 보면 다른 뜻 같아 보이나, 늘 함께 짝을 이루어 역사의 물결을 타고 사람들에게 속살거린다. 우리에게도 ‘花無十日紅’이라는 같은 맥락의 문장이 있다. 열흘 가는 꽃이 없듯이 ‘한 번 흥한 것은 반드시 쇠한다’는 이치를 꿰뚫고 있다. 트롯 가수 김연자가 불러 유명한 ‘아모르파티’도 일맥상통한다. 사랑을 뜻하는 ‘아모르’와 운명을 뜻한 ‘파티’를 합성한 라틴어로 ‘운명을 사랑하라’는 뜻을 지녔다. 인간이 가져야 할 기본이 되는 삶의 태도로, 니체가 처음 사용했다. 메멘토 모리의 처세훈은 미국 남서부에 거주한 나바호족에서도 찾을 수 있다. “네가 세상에 울면서 태어날 때 세상은 기뻐했으니, 네가 죽을 때는 세상은 울어도 너는 기뻐할 수 있도록, 그러한 삶을 살라.” 마음을 휘어잡는 짧은 문장들…. <메멘토 모리>, <카르페 디엠>, <아모르파티>, <화무십일홍>까지 모든 문장은 한결같이 겸손한 삶을 이르고 있다. 그것이 인간이 상기해야 할 본분임을 깨친다. 생명이 너의 코에 달려 있다. 날숨 한 번 뱉었다가 들이키지 못하면 죽고, 하늘에서 떨어지는 새똥 하나를 피하지 못하는 게 연약한 사람이다. 그러니 교만하지 말고 매 순간 삶을 성찰하며 살라고 이른다. 죽음을 기억하고 운명을 사랑하고 오늘에 충실하라고... -소설가/ daumcafe 이관순의 손편지
    • 오피니언
    • 기고
    2022-08-01
  • 네 개의 종소리
    무성한 잎들로 가득했던 나의 인생 나무가 어느 날부터 휑하다는 느낌을 받기 시작했다. 빛이 새지 않을 만큼 나뭇가지 사이를 빼곡히 채웠던 잎사귀가 하나 둘 떨어진다 했는데, 어느 날 가지 사이로 틈이 생기면서 그 공간으로 파란 하늘이 보였다. 그때만 해도 잎이 진다는 사실을 별 감흥 없이 바라보았다. 그러던 지난 6월 한 달을 보내면서 비로소 떨어진 잎새보다 가지에 남은 잎이 적다는 사실을 알아챘다. 나무에 달린 한 잎 한 잎은 친소의 경중은 달라도, 나의 시선을 잡았던 사람들이다. 가족, 친척, 친구, 선후배, 친지뿐 아니라, 사회에서 만난 지인들, 내가 멘토로 삼은 분들, 만나본 적은 없어도 나에게 유무형의 영향이나 생각을 나눠준 사람들의 이름들이 나뭇잎마다에 달려있었다. 변한 것은 나뭇잎을 바라보는 내 시선뿐이 아니었다. 전에는 신문을 펴면 인사동정 난부터 살폈는데 언젠가부터 부음 난에 먼저 눈길이 갔다. 마치 중세 유럽에서 종소리가 울려 퍼지면 하인들이 누가 죽었는지를 알았다 주인에게 알리는 관습처럼. 단순한 부음이 아니라, 세상을 떠나는 사람들이 내게 남기는 크고 작은 종소리로 들려오는 것임을 깨닫게 되었다. 6월은 유난히 내 귀에 종소리가 크게 들린 달이었다. 현역 최고령 최장수 MC로 활약한 송해 선생이 8일 아흔 다섯 나이로 세상을 뜨더니, 19일에는 ‘믿음과 삶’이, ‘앎과 행동’이 일치한 삶으로 평소 존경했던 주선애 전 장신대 교수가 부음을 알렸다. 23일에는 한국 경제학의 거목이자 관료로 강직한 행보를 보여 ‘서울 포청천’이란 별호를 얻은 조순 전 서울대 교수가, 그리고 26일에는 민족사관학교 설립자 최명재 회장이 유명을 달리했다. 최명재 선생은 사업차 들린 영국에서 명문 이튼스쿨을 방문하는 기회가 있었다. 때마침 열리고 있는 이 학교 출신 넬슨 제독의 전승기념일 행사를 지켜보면서 마음에 감동이 일기 시작했다. 이튼 학교 졸업생들이 1.2차 세계대전에 얼마나 많이 참전하고 전사했는지를 알게 되었다. 특히 나치에게 제공권을 빼앗긴 후 나치군을 물리치기 위해 자폭 결사대를 결성할 때, 지원자의 75%가 이튼스쿨 출신으로 채워졌다는 이야기는 최명재의 가슴을 뜨겁게 달구었다. 우리나라에도 세계 3대 해전으로 꼽히는 명량대첩이 있고, 넬슨 제독보다 더 유명한 이순신 제독이 있지 않은가? 귀국하는 비행기 안에서 그는 이튼스쿨 같은 인재 양성학교를 만들겠다는 필생의 꿈을 품었다. 그렇게 하여 탄생한 학교가 1993년 강원도 횡성 38만 5천 평 부지에 세워진 민족사관학교였다. 네 분 다 이 땅에 선한 영향력을 남기신 훌륭한 분들이다. 그래도 개인적으로 내 가슴에 가장 크고도 아름다운 종소리를 울린 분은 주선애 교수였다. 사람들이 열망하는 ‘천수를 다한 죽음’은 어떤 모습일까? 그의 죽음에서 그 모습을 상상했다. 촛불이 자기 몸을 태우듯이, 눈물 한 방울까지 남김없이 오롯이 불태우고 한순간 깜박 꺼지는, 바로 주선애 선생 같은 생이 아닐까? 그는 일생을 가르치고 가르친 대로 살았다. 떠나시기 두 달 전까지, 강사로 초청되어 90분간 열강을 하셨다. 그것이 대중 앞에서 행한 마지막 강의가 되었고, 그날 전한 메시지는 유언처럼 남게 되었다. 그는 생전에 이미 전재산을 낮은 곳을 향해 환원했다. “학자나 목사나 가르침과 행함이 나뉘어서는 안 되고, 늘 나의 행동으로 상대를 가르치기를 힘써야 한다”라며 “인생을 주님과 동행하려면 예수님이 내 안에, 내가 예수님 안에 가지인지, 늘 돌아보고 살피라”라고 당부했다. 주선애 교수를 한 문장으로 정의하면 “믿음이 아는 것이고, 아는 것이 삶”으로 요약할 수 있잖을까? 그의 사랑을 많이 받은 김동호 목사의 말을 빌리면 “머리에서 가슴으로, 가슴에서 손으로 이어지는 길이가 가장 짧은 분”이며, “믿으면 알게 되고, 알게 되면 가슴으로 오고, 가슴으로 오면 밖으로 나가 행동하는 분”이셨다. 가슴을 짠하게 한 것은 장례식의 조사를 부탁받은 제자 김동호 목사의 슬프면서 아름다운 축사 이야기이다. 아무리 책상에 앉아 애를 써도 조사가 써지지 않았다. 그러면서 엉뚱한 생각을 한 것이 선생님 앞에서 진짜 하고 싶은 것은 조사가 아니라 축사여야 한다는 것…. 이렇게 쓰인 장례식 축사가 오히려 장례를 더욱 아름답게 따뜻하게 밝혀 주었다. 저 동호입니다…. 사랑하고 존경하는 선생님이 떠나셨는데 불경스럽게도 슬프지가 않습니다. 오히려 말도 못 하게 기쁩니다. 이렇게 기쁨을 느낀 것은 70 평생 처음이 아닌가 싶습니다. 부름 받으시기 3일 전 동호 선교사무실에 가보고 싶다고 하셔서 기다렸는데, 갑자기 넘어지셨다는 소식을 듣고 그날 오후 선생님 병문안을 갔었지요. 그런데 너무 멀쩡하셔서 얼마나 감사했는데요. 잡아주시는 손에 힘이 느껴져 제가 속으로 ‘우리 할머니 돌아가시려면 아직도 멀었네’ 했습니다. 그리고 이틀 후 선생님이 하늘나라로 가셨다는 부음을 들었습니다. 저는 선생님의 죽음이 기쁩니다. 얼마나 감사한지 모릅니다. 저도 늘 죽음을 꿈꾸며 삽니다. 제가 꿈꾸고 욕심내는 죽음은 ‘beautiful landing’입니다. 그런데 선생님의 죽음은 그것을 뛰어넘은 ‘fantastic landing’입니다. 선생님의 죽음은 하나님의 훈장입니다. 훈장 중에 최고 훈장이십니다. 98년을 한결같은 삶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충성을 다하신 선생님에 대한 하나님의 축복이고 상급이십니다. 그러니 제가 선생님의 죽음 앞에서 조사를 할 수 있겠습니까? 선생님 축하합니다! 선생님의 그 복되고 아름답고 황홀한 죽음을 축하합니다! 선생님이 우리 선생님이셔서 참 많이 행복했습니다….? 오늘도 종소리가 울린다. 들리는 종소리는 같아도 가슴을 때리는 울림은 매 번 다르다. 어떻게 사는 것이 복된 죽음을 맞을까? 입으로는 인생이 정말 짧다고 잘 살아야 한다고 외치면서, 머리로는 백 년도 더 살 것처럼 행동하지는 않는지…. 진정 삶이 복되려면 죽음을 얼마나 가까이 두고 사느냐에 달려 있다. 진실로 죽음을 이해하고 산다면, 더 좁혀 시한부 인생을 살고 있다고 생각하면 보다 선연해 질 것이다. 어디에 방점을 찍고 살아야 하는가를 일러주기 때문이다. 자기에게 주어진 에너지 또는 달란트를 성심껏 키워서 나를 필요로 하는 곳에 남김 없이 선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떠나는 삶이 영예로운 삶이다. ‘매 순간을 생의 마지막인 것처럼 살라’는 말이 나의 고백이 될 때, 이 짧은 생을 허투루 낭비할 수 없을 것이다. 이것이 오늘 하루를 가치있게 살아야 하는 이유이고, 감사하게 살아야 하는 이유가 아닐까? -소설가 daumcafe 이관순의 손편지
    • 오피니언
    • 기고
    2022-07-28
  • 네 개의 종소리
    무성한 잎들로 가득했던 나의 인생 나무가 어느 날부터 휑하다는 느낌을 받기 시작했다. 빛이 새지 않을 만큼 나뭇가지 사이를 빼곡히 채웠던 잎사귀가 하나 둘 떨어진다 했는데, 어느 날 가지 사이로 틈이 생기면서 그 공간으로 파란 하늘이 보였다. 그때만 해도 잎이 진다는 사실을 별 감흥 없이 바라보았다. 그러던 지난 6월 한 달을 보내면서 비로소 떨어진 잎새보다 가지에 남은 잎이 적다는 사실을 알아챘다. 나무에 달린 한 잎 한 잎은 친소의 경중은 달라도, 나의 시선을 잡았던 사람들이다. 가족, 친척, 친구, 선후배, 친지뿐 아니라, 사회에서 만난 지인들, 내가 멘토로 삼은 분들, 만나본 적은 없어도 나에게 유무형의 영향이나 생각을 나눠준 사람들의 이름들이 나뭇잎마다에 달려있었다. 변한 것은 나뭇잎을 바라보는 내 시선뿐이 아니었다. 전에는 신문을 펴면 인사동정 난부터 살폈는데 언젠가부터 부음 난에 먼저 눈길이 갔다. 마치 중세 유럽에서 종소리가 울려 퍼지면 하인들이 누가 죽었는지를 알아다 주인에게 알리는 관습처럼. 단순한 부음이 아니라, 세상을 떠나는 사람들이 내게 남기는 크고 작은 종소리로 들려오는 것임을 깨닫게 되었다. 6월은 유난히 내 귀에 종소리가 크게 들린 달이었다. 현역 최고령 최장수 MC로 활약한 송해 선생이 8일 아흔 다섯 나이로 세상을 뜨더니, 19일에는 ‘믿음과 삶’이, ‘앎과 행동’이 일치한 삶으로 평소 존경했던 주선애 전 장신대 교수가 부음을 알렸다. 23일에는 한국 경제학의 거목이자 관료로 강직한 행보를 보여 ‘서울 포청천’이란 별호를 얻은 조순 전 서울대 교수가, 그리고 26일에는 민족사관학교 설립자 최명재 회장이 유명을 달리했다. 최명재 선생은 사업차 들린 영국에서 명문 이튼스쿨을 방문하는 기회가 있었다. 때마침 열리고 있는 이 학교 출신 넬슨 제독의 전승기념일 행사를 지켜보면서 마음에 감동이 일기 시작했다. 이튼 학교 졸업생들이 1.2차 세계대전에 얼마나 많이 참전하고 전사했는지를 알게 되었다. 특히 나치에게 제공권을 빼앗긴 후 나치군을 물리치기 위해 자폭 결사대를 결성할 때, 지원자의 75%가 이튼스쿨 출신으로 채워졌다는 이야기는 최명재의 가슴을 뜨겁게 달구었다. 우리나라에도 세계 3대 해전으로 꼽히는 명량대첩이 있고, 넬슨 제독보다 더 유명한 이순신 제독이 있지 않은가? 귀국하는 비행기 안에서 그는 이튼스쿨 같은 인재 양성학교를 만들겠다는 필생의 꿈을 품었다. 그렇게 하여 탄생한 학교가 1993년 강원도 횡성 38만 5천 평 부지에 세워진 민족사관학교였다. 네 분 다 이 땅에 선한 영향력을 남기신 훌륭한 분들이다. 그래도 개인적으로 내 가슴에 가장 크고도 아름다운 종소리를 울린 분은 주선애 교수였다. 사람들이 열망하는 ‘천수를 다한 죽음’은 어떤 모습일까? 그의 죽음에서 그 모습을 상상했다. 촛불이 자기 몸을 태우듯이, 눈물 한 방울까지 남김없이 오롯이 불태우고 한 순간 깜박 꺼지는, 바로 주선애 선생 같은 생이 아닐까? 그는 일생을 가르치고 가르친 대로 살았다. 떠나시기 두 달 전까지, 강사로 초청되어 90분간 열강을 하셨다. 그것이 대중 앞에서 행한 마지막 강의가 되었고, 그날 전한 메시지는 유언처럼 남게 되었다. 그는 생전에 이미 전재산을 낮은 곳을 향해 환원했다. “학자나 목사나 가르침과 행함이 나뉘어서는 안 되고, 늘 나의 행동으로 상대를 가르치기를 힘써야 한다”라며 “인생을 주님과 동행하려면 예수님이 내 안에, 내가 예수님 안에 가지인지, 늘 돌아보고 살피라”라고 당부했다. 주선애 교수를 한 문장으로 정의하면 “믿음이 아는 것이고, 아는 것이 삶”으로 요약할 수 있잖을까? 그의 사랑을 많이 받은 김동호 목사의 말을 빌리면 “머리에서 가슴으로, 가슴에서 손으로 이어지는 길이가 가장 짧은 분”이며, “믿으면 알게 되고, 알게 되면 가슴으로 오고, 가슴으로 오면 밖으로 나가 행동하는 분”이셨다. 가슴을 짠하게 한 것은 장례식의 조사를 부탁받은 제자 김동호 목사의 슬프면서 아름다운 축사 이야기이다. 아무리 책상에 앉아 애를 써도 조사가 써지지 않았다. 그러면서 엉뚱한 생각을 한 것이 선생님 앞에서 진짜 하고 싶은 것은 조사가 아니라 축사여야 한다는 것…. 이렇게 쓰인 장례식 축사가 오히려 장례를 더욱 아름답게 따뜻하게 밝혀 주었다. 저 동호입니다…. 사랑하고 존경하는 선생님이 떠나셨는데 불경스럽게도 슬프지가 않습니다. 오히려 말도 못 하게 기쁩니다. 이렇게 기쁨을 느낀 것은 70 평생 처음이 아닌가 싶습니다. 부름 받으시기 3일 전 동호 선교사무실에 가보고 싶다고 하셔서 기다렸는데, 갑자기 넘어지셨다는 소식을 듣고 그날 오후 선생님 병문안을 갔었지요. 그런데 너무 멀쩡하셔서 얼마나 감사했는데요. 잡아주시는 손에 힘이 느껴져 제가 속으로 ‘우리 할머니 돌아가시려면 아직도 멀었네’ 했습니다. 그리고 이틀 후 선생님이 하늘나라로 가셨다는 부음을 들었습니다. 저는 선생님의 죽음이 기쁩니다. 얼마나 감사한지 모릅니다. 저도 늘 죽음을 꿈꾸며 삽니다. 제가 꿈꾸고 욕심내는 죽음은 ‘beautiful landing’입니다. 그런데 선생님의 죽음은 그것을 뛰어넘은 ‘fantastic landing’입니다. 선생님의 죽음은 하나님의 훈장입니다. 훈장 중에 최고 훈장이십니다. 98년을 한결같은 삶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충성을 다하신 선생님에 대한 하나님의 축복이고 상급이십니다. 그러니 제가 선생님의 죽음 앞에서 조사를 할 수 있겠습니까? 선생님 축하합니다! 선생님의 그 복되고 아름답고 황홀한 죽음을 축하합니다! 선생님이 우리 선생님이셔서 참 많이 행복했습니다….? 오늘도 종소리가 울린다. 들리는 종소리는 같아도 가슴을 때리는 울림은 매 번 다르다. 어떻게 사는 것이 복된 죽음을 맞을까? 입으로는 인생이 정말 짧다고 잘 살아야 한다고 외치면서, 머리로는 백 년도 더 살 것처럼 행동하지는 않는지…. 진정 삶이 복되려면 죽음을 얼마나 가까이 두고 사느냐에 달려 있다. 진실로 죽음을 이해하고 산다면, 더 좁혀 시한부 인생을 살고 있다고 생각하면 보다 선연해 질 것이다. 어디에 방점을 찍고 살아야 하는가를 일러주기 때문이다. 자기에게 주어진 에너지 또는 달란트를 성심껏 키워서 나를 필요로 하는 곳에 남김 없이 선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떠나는 삶이 영예로운 삶이다. ‘매 순간을 생의 마지막인 것처럼 살라’는 말이 나의 고백이 될 때, 이 짧은 생을 허투루 낭비할 수 없을 것이다. 이것이 오늘 하루를 가치있게 살아야 하는 이유이고, 감사하게 살아야 하는 이유가 아닐까? -소설가 daumcafe 이관순의 손편지
    • 오피니언
    • 기고
    2022-07-24
  • 환승역에서
    산천에 꽃 피던 봄, 장맛비에 젖던 여름, 타는 노을단풍도 한 때였어요. 소멸과의 지루한 싸움을 끝낸 2020년이 노을처럼 붉게 눈시울을 적시며 해넘이를 시작합니다. 아직도 무정인지, 유정인지 모를 세월과 함께. 그 짧은 삶에도 운명의 세 고리는 달고 다녀요. ‘출생’해서 평생을 ‘불완전’ 하게 살다가 ‘죽는다’는 것. 단 한 차례의 연습도 없이 태어나 한 평생을 불안 불안하게 살다가 마지막 훈련도 없이 떠나는 인생 말입니다. 해 밑에 이르면 저마다 가슴에 생각나는 글귀 하나쯤 매달릴 법해요. 경주마가 한 바퀴를 돌 때마다 넘기는 경마장 숫자판은 보는 사람을 훙분시키지만, 12월 달력을 넘기는 가슴엔 휑한 바람이 스칩니다. 인생무상이라지만, 그래도 12월 정서엔 노벨문학상을 탄 폴란드 시인 비스와바 심보르스카의 시 ‘두 번은 없다’가 어울립니다. 두 번은 없다 지금도 그렇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아무런 연습 없이 태어나서/ 아무런 훈련 없이 죽는다// 우리가, 세상이라는 이름의 학교에서/ 가장 바보 같은 학생일지라도/ 여름에도 겨울에도/ 낙제란 없는 법// 두 번의 똑 같은 밤도 없고/ 두 번의 한결 같은 입맞춤도 없고/ 두 번의 동일한 눈빛도 없다.// 어제, 누군가 내 곁에서/ 네 이름을 큰 소리로 불렀을 때/ 내겐 마치 열린 창문으로/ 한 송이 장미꽃이 떨어져 내리는 것 같았다.... 무슨 생각을 전할 때, 말로 하는 것과 글로 쓰는 것은 우리의 생각과 태도를 달리 만듭니다. 과장과 허풍을 즐겼던 문호 헤밍웨이가 이런 말을 했어요. “한 마디 하면, 내가 이야기 할 때는 그냥 이야기예요. 하지만 글로 쓰면 그건 영원한 진심이오.” 지금이 그런 때입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좋아하는 노래 중 아름다운 노랫말 1위로 뽑힌 가사가 ‘봄날은 간다’ 였어요. 수년 전 문인수 시인이 등단 30주년 기념시집을 내면서 ‘봄날은 간다’ 4절을 썼습니다. 누구나 지난 세월을 돌아보면 한 절쯤 쓸 법한 정서가 녹아있는 노래지요 “밤 깊은 시간엔 창을 열고, 하염없더라. 오늘도 저 혼자 기운 달아, 기러기 앞서가는 만 리 꿈길에, 너를 만나 기뻐 웃고 너를 만나 슬피 울던, 등 굽은 그 적막에 봄날은 간다.” 청명한 하늘을 이고 꽃길을 걷는 사람은 자신이 얼마나 환한 세상에 사는지를 알지 못합니다. 숲속 그늘에 갇혀야 그 밝음에 눈 뜨지요. 햇빛도 어둠이 있어 밝고 눈부시다는 걸 압니다. 문명(文明)이 어둠에서 시작되는 것도 같은 이치입니다. 화려해 보이는 인생도 속을 들여다보면 그늘이 보여요. 방금 무대에서 관객을 열광시킨 가수도 서늘한 그늘이 있고, 아무리 고운 꽃도 그림자는 검은 법입니다. 눈물 없는 사람, 그늘 없는 사람에게 사랑을 주기란 쉽지 않아요. 세상은 사는 게 아니라 견디어 내는 것임을 모르는 사람, 왜 나이가 드는 것이 아니라, 옻칠을 더하는 것이라고 하는지 그 뜻을 모르는 사람에게 사랑이란 과분한 것입니다. 올 한해, 웃기도 했지만 실은 어느 해보다 힘들고 아팠습니다. 경험하지 못한 세상을 만나 저마다 그늘을 만들고 눈물을 훔치며 산 시간들입니다. 우린 늘 웃고 괜찮은 척 하다가 서로를 잊고 살았습니다. 매일 웃고 살기에 슬픔이 없는 줄 알았지요. 항상 밝게 인사하기에 아픔이 없는 줄 알았거든요. 늘 강하게 보여서 눈물이 없는 줄 알았습니다. 언제 봐도 괜찮은 척, 아무렇지 않은 척, 내가 그랬듯 당신도 그리 사시는 줄 몰랐습니다. 미안합니다. 당신에게 아픈 그늘이 깊다는 것을 몰랐습니다. 저리고 시린 이별의 슬픈 가슴을 보듬고 있는 당신임을. 그럼에도 우리 다 쓰러지지 않고 살았으니 용해요. 지금 살아 있으면 잘 살은 겁니다. 그것이 기적예요. 내년에는 그늘도 나누고 서로 응원하며 살아요. 승강장에 전역을 출발했다는 불이 들어왔습니다. 여기서 난 전철을 바꿔 타야 합니다. 올 한해 자랑할 것은 없어도, 이 한 가지는 잊지 않았습니다. 힘들긴 했어도 하루에 한 발짝을 내딛으며 여기까지 왔다는 것.... 그것이 우리 모두에게 감사의 제목이 되었으면 해요. 환승역에서 송년 인사를 띄웁니다. -글 이관순 소설가/ daumcafe/ leeletter
    • 오피니언
    • 기고
    2022-07-20
  • 오색 빛들 어디로 갔나
    외국인들이 한국 사람만 모르는 게 있다 해요. 서울이 얼마나 아름다운 도시인지 모르고 산다는 겁니다. 광화문에서 경복궁, 북악산, 북한산, 도봉산으로 이어지는 빼어난 경관이 그중 하나입니다. 남으로는 인구 천만의 거대 도시 중심에 남산이 우뚝 서고, 그 뒤로 한강, 관악산을 겹겹이 두른 서울에 찬사를 보냅니다. 광화문 빌딩 숲을 따라 흐르는 청계천은 서울의 백미라고 감탄해요. 국가간 경쟁은 궁극적으로 ‘도시간 경쟁’입니다. 도시마다 그들만의 문명이 투영되니까. 로마, 그리스는 물론 우리도 도시국가 형태로 발전한 셈이지요. 문명의 흥망은 사람이 주체지만, 삶을 구현해 주는 것은 도시입니다. TV 사극이 화려한 부활을 알린 건 1996년 방영된 ‘용의 눈물’ 입니다. 조선 건국을 위해 한양 천도를 계획할 때, 3인의 실력자가 한양 풍수를 논하는 모습이 흥미로웠어요. 서울 운세가 그들 손에 달린 거니까요. 하륜은 주산을 연대 뒤 무악에 두고 그 앞으로 도심을 열어야 한다 했고, 무학대사는 인왕산을 주산으로 하여 북한산과 남산을 좌청용 우백호로 삼아야 한다고 했지요. 그리됐으면 지금쯤 서울은 동대문, 청량리 아니면 신촌으로 번창했겠지요. 결국 정도전이 관철시킵니다. 왕은 남면을 향해야 하니, 백악을 주산으로 경복궁을 두고 안산을 관악으로, 그 앞에 한강을 둔다는 겁니다. 문제는 남산이 화기가 너무 강한 데다, 산이 둘러싸여 화재나 변란이 쉽게 날 수 있다는 것이었어요. 이를 제어하기 위해 궁 곳곳에 도랑을 내고 다리 위에 해태(불 먹는 신)를 세웠지요. 그만으로 부족해 산에서 나오는 물길을 정비해 지금의 청계천이 흐르게 됩니다. 청계천의 물줄기는 특유의 비범함이 있어요. 백두대간의 지형 특성 탓에 우리나라 강은 동에서 일어나 서로 빠지는 동출서류(東出西流)형인데, 청계천은 반대인 서출동류(西出東流)형이에요. 북악· 인왕· 도봉산 등에서 흘러내린 물이 청계천으로 모여 역(西)으로 흐르는 독특한 형국입니다. 예부터 풍수지리에서 중시한 게 역술이죠. 이조 역대 왕들이 청계천 관리에 공을 들인 것도 그런 이유입니다. 모두 기를 숙인 연말에도 남산 둘레길엔 사람소리가 납니다. 언제와도 살가운 소리들입니다. 그 틈으로 외국인들도 어개를 흔들며 서울 풍류를 즐깁니다. 쉼터에서 경쾌하게 웃는 장년 여성들과 만났어요. “자주 오시나 봐요?” “이 친구는 매일 와요. 밥은 안 먹어도 남산은 안 빼먹어요. 둘째가기 서러운 남산 예찬자랍니다.” 그러자 지목을 받은 남산 예찬자가 말을 받습니다. “보세요. 사방팔방으로 서울이 한 눈에 들어오잖아요. 세계 어느 도시가 이런 데가 있어요? 그래서 난 이사도 못가요. 회현동에 40년짼데 집이 낡았어도 그냥 살아요.” 오늘 따라 청명한 대기에 북한산 도봉산 자락이 거울 속처럼 선명합니다. 서울은 밤의 도시입니다. 낮에 침잠했다가도 해가 지면 빛으로 성장(盛裝) 한 빌딩군이 빛의 무도회를 시작하고, 12월에 그 절정을 이룹니다. 그러한 서울이 깊은 정적에 빠졌습니다. 청계천에 오색빛이 사라지면서. 매년 이맘 때면 떠오르는 풍경이 형형색색의 한지 조명으로 물든 청계천 빛축제입니다. 2009년 한국방문의 해에 시작된 뒤 연말을 장식하는 대표적 빛축제인데, 모처럼 찾은 발길을 무색하게 돌려놓습니다. 영롱하게 빛났던 빛들은 다 어디로 갔나? 그제사 올해는 청계천을 떠나 관광특구 4곳에 분산 개최되는 걸 알았습니다. 코로나가 11년 전통의 청계천 불빛을 꺼버리더니, 보신각 타종까지 멈춰세웠다는 쓸쓸한 소식도 들립니다. 날이 어두워지니 인적이 사라집니다. 불빛과 사람들 소리로 가득해야 할 청계광장, 시청앞 광장, 대학로 마로니에 공원까지 황량한 공터가 됐어요. 밤 9시가 가까워지자 인근 상점들의 불빛도 하나 둘 꺼집니다. 산타클로스도 보이지 않고 캐럴도 들리지 않는 차가운 크리스마스. 하늘마저 얼어붙은, 정말 조용한 밤이에요. 그래도 마음만은 그 어느 때보다 따뜻하기를. 구세군 자선냄비는 뜨겁게 끓기를. -글 이관순 소설가/ daumcafe/ leeretter
    • 오피니언
    • 기고
    2022-07-17
  • 내설악 백담 계곡에서
    이미 숱한 연말이 거듭했건만, 인적도 불빛도 낯선 길목에서 나를 만날 줄은 몰랐습니다. 불빛은 시들고 쓸쓸함만 더합니다. 가슴에 눈물이 마른 사람들은 눈도 오지 않는 마른 하늘을 향해 허연 입김을 내뿜습니다. 이럴 때는 밖이 아니라 내 안을 살펴볼 기회입니다. 혼자서 조용히 나를 돌아보는 시간도 의미 있는 일이지요. 곧 전설 같은 풍경으로 돌아 앉을 2020년 서녘에 나를 세우고 롱펠로우 시 ‘화살과 노래’를 떠올립니다. 나는 공중을 향해 화살을 쏘았으나 / 화살은 땅에 떨어져 갈 곳이 없었다/ 재빨리 날아가는 화살의 그 자취/ 누가 그 빠름을 뒤따를 수 있으랴.// 나는 공중을 향해 노래를 불렀으나/ 노래는 땅에 떨어져 갈 곳이 없었다/ 그 누가 날카롭고 강한 무엇이 있어/ 날아가는 그 노래를 따를 것이냐 세월이 흐른 뒤 참나무 밑둥에/ 그 화살은 성한채 꽃혀 있었고/ 그 노래는 처음에서 끝구절까지/ 친구의 가슴 속에 숨어 있었다.? -화살과 노래/ 롱펠로 심리학자 윌리엄 제임스에 의하면 우리가 하루에 내리는 많은 결정과 선택이 신중하게 이루어진 것처럼 보이지만, 결국은 내 몸에 굳어있는 습관의 연속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네 일상은 습관 덩어리입니다. 지금 들여다보고 있는 내 통장의 잔고는 나의 경제적 습관이 만든 살아 있는 증거이고, 줄지 않은 나의 몸무게는 해묵은 논쟁거리인 나의 섭생 탓입니다. 하루하루 되풀이되는 일상의 습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여전히 행동하고 생각하는 것이 그 틀에 갇혀 있어요. 그래서 생각입니다. 2021년에는 내 몸에 슬어 있는 습관 한두 가지 콕집어서 확실히 손 보겠다는 결심을 하면 어떨까. 습관의 폐해은 세상과 사물을 주관적으로 본다는데 있어요. 세상 일을 주관해 볼 필요도 있겠지만, 때로는 객관화할 줄도 알아야 합니다. 높은 산에 올라 만상을 내려다보고, 바닷가에 나가 수평선을 바라보며 세상과 나를 떼어놓고 관찰해 보자는 것이지요. 눈이 내렸던 날, 설악으로 백담사를 다녀왔습니다. 설악은 더 없는 안식과 명상을 안기는 곳입니다. 끝없이 가라앉은 내설악의 풍경이 좋고, 고승 허응당 보우와 한용운, 김시습의 체취가 서려 있어 좋습니다. 자연은 말이 없어도 늘 가슴에 잔잔한 파동을 전합니다. 계곡 물소리가, 나뭇가지를 흔드는 바람소리가 그렇습니다. 옛 선사는 자연이 곧 부처요, 계절의 변화를 경전으로 칭했으니, 백담계곡도 한 권의 경전이겠지요. 백담은 오래 동안 절을 떠났던 중광이 다시 머리를 깎은 곳입니다. 시서화(詩書畵)로 한 세상을 농락한 후 속세의 머리를 깎고 다시금 백담 품에 안기는 그 날의 장면이 물결처럼 흔들립니다. 설악은 내게 나무처럼 살라고 이릅니다. 심산산곡이든 뒷동산이든 나무는 나무와 더불어 삽니다. 뿌리와 뿌리가 얽히고 잎과 잎이 보듬으며 살아요. 빈가지끼리 손을 잡고 이겨내는 저 겨울나무가 그렇습니다. 나무는 백 년 노송이나 갓 자란 솔이나 늘 위를 보며 자랍니다. 광풍이 불 때도, 살을 에는 추위에도 무릎을 꿇지 않고 푸른 하늘을 우러러요. 눈을 뒤집어 쓰고도 고개만은 꼿꼿하게 들고 있는 나무입니다. 눈의 무게에 가지가 꺾여도 시선은 영하의 하늘을 향해요. 나무가 하늘을 우러르고 스스로 철을 분별하며 살듯이 우리도 새해는 좀더 분별하며 세상을 살고, 사람들과 어울리며 살았으면 합니다. 올 한 해, 너남 없이 참 힘들고 아팠습니다. 그래도 이렇게 살아있다는 것이 기적이고 은총입니다. 사람이 귀하고 만남의 소중함이 어떤 것인지 절절하게 느낄 수 있었음도 감사할 일입니다. 다시금 마음속에 새깁니다. 세월은 흘러가는 게 아니라 우리들 마음에 쌓이는 것임을. 그래서 마음에 이는 바람소리, 물소리, 풍경소리를 손편지에 담습니다. -글 이관순 소설가/daumcafe/leeletter
    • 오피니언
    • 기고
    2022-07-14
  • 최고의 효(孝)는 소통
    자녀의 얼굴이나 목소리를 보고 듣는 것만으로 기쁨이 되는 게 부모 마음입니다. 전편(300·301회)에 등장하는 참새와 주식은 수단일 뿐, 목적은 자녀의 목소리를 듣는 것입니다. 부모는 자식에게 “바랄 게 없다. 잘 자라주면 그게 효”라고 하지만, 이를 곧이곧대로 해석할 사람은 없지요. 결혼을 시켜도 자녀가 그립고 걱정부터 앞서는 것이 부모의 심정입니다. 팔 순 노인이 대문을 열고 나가는 환갑 된 아들에게 ‘차조심하라’라고 이르는 것이, 부모가 지닌 상정(常情)입니다. 자녀와의 연결고리가 약해지면 섭섭하고, 심해지면 인생이 허무하게 느껴집니다. 많은 것을 원해서가 아닙니다. “엄마, 나 엄마 덕에 잘 살아요.” “엄마 나 훌륭한 아들! 편하시죠?” 그 예쁘고 씩씩한 말 한마디가 부모의 기쁨인 것을. 나이가 들수록 부모들 마음은 동굴처럼 휑하게 뚫리고 그 공간에 이는 바람이 외로움이고 섭섭함입니다. 아쉽게도 늦었지만, 표현력이 부족한 아버지의 속마음을 헤아릴 수 있는 아들이 된 것은 다행한 일입니다. 주식시장이 불안정해도 이왕 시작한 것이니 작게라도 이어가라고 한 딸. 일희일비하지 말고 끈기 있게 기다려도 보시고, 그렇게 응원하는 것이 엄마의 행복임을 그 딸은 눈치챘습니다. 깨닫는 시차가 있을 뿐, 부모와 자식 사이는 그렇습니다. 그 간극에 ‘소통’이 필요할 뿐이죠. 자식을 낳아봐야 부모의 희생을 알고, 부모 나이가 돼 봐야 부모 마음을 느낀다고 했습니다. 바쁘다는 핑계로 무관심하게 시간만 보내다가 말이 없는 영정 앞에서 “감사해요.” “죄송해요.” “사랑해요.” 흐느껴본 들 다 부질없는 일입니다. 효도 살아생전이고, 소통도 살아생전입니다. 살아 계실 때 한 번 더 살갑게 전화드리고, 말 한마디라도 따뜻하게 전하는 것이 ‘효’인 것을…. 옛 인사법에 ‘나갈 때 아뢰고 돌아오면 뵈라(出必告 反必面)’라는 말이 있습니다. 21세기 스마트 시대에 어울리지 않을 나른한 고전 같지만, 내재된 소통의 가치를 몰라서 하는 말입니다. 늘 아쉬움이 끓어오를 때면, 기차는 떠나고 난 다음의 일입니다. 집집이 부모 자식 간 일어나는 애증이야 다를 수 있겠지만, 끝까지 붙잡아야 할 것이 소통의 끈입니다. 사람 사이에 파랑새가 깃들 수 있는 곳은 소통이란 자리뿐입니다. 부모에게는 자식과 소통이 줄어드는 것만큼 섭섭 병이 없습니다. 자잘한 관심에 위로가 되고, 짜증을 부리더라도 목소리를 들려주는 것이 효이고1, 말벗 이 돼 드리는 것이 최고의 효입니다. “엄마니까 저러겠지 어디 가서 투정 부리겠나.” 엄마는 이래도 이해, 저래도 이해입니다. 우리 훌륭한 아들이, 우리 예쁜 딸이 이런 것도 해주고, 이런 것도 챙겨준다고 자랑할 수 있는 기회를 자주 드려야 합니다. 날은 금세 저물고 땅거미가 앉는 것이 인생입니다. 언젠가 납골당에 갔다가 분골을 담은 수많은 도자기에 쓰인 글을 유심히 본 적이 있습니다. 그중 가슴을 찡하게 한 단어가 ‘사랑합니다’ 보다 ‘그립습니다’였습니다. ‘사랑한다’ ‘감사한다’ 보다 ‘그립다’가 더 명료한 감정이기 때문입니다. ‘사랑’이란 감정도 그립다로 발화해서 그리움으로 끝나는 것이기에…. 그 명료한 발화가 ‘산자와 망자’ 사이를 잇는 소통의 다리를 놓습니다. 가수 이연실이 부른 ‘찔레꽃’ 시가(詩歌)에는, 하늘로 떠난 엄마에 대한 절절한 그리움을 절제된 언어로 가슴에 품은 것이, 그리움의 서정을 더욱 선연하게 합니다. 하얀 찔레꽃으로 다리를 놓고 엄마 오기를 기다리는 질박한 그리움…. 찔레꽃 가시에 찔린 순간처럼 짜릿한 아픔이 온신경에 뻗칩니다. 소통의 단어로 가득 채운 찔레꽃 멜로디가 여름밤 빗소리를 타고 올라갑니다. 엄마 일 가는 길에 하얀 찔레꽃 찔레꽃 하얀 잎은 맛도 좋지 배고픈 날 가만히 따먹었다오 엄마 엄마 부르며 따먹었다오 밤은 깊어 까만데 엄마 혼자서 하얀 발목 바쁘게 내게 오시네 밤마다 보는 꿈은 하얀 엄마 꿈 산등성이 너머로 흔들리는 꿈 울 밑에 귀뚜라미 우는 달밤에 기럭기럭 기러기 날아갑니다 가도 가도 끝없는 넓은 하늘을 엄마엄마 찾으러 날아갑니다 가을밤 외로운 밤, 벌레 우는 밤 시골집 뒷산 길이 어두워질 때 엄마 품이 그리워 눈물 나오면 마루 끝에 나와 앉아 별만 셉니다 ‘효(孝)’의 비결은 소통에 있습니다. 살면서 최고의 베풂은 소통입니다. 훗날, ‘내 마음이 나의 생애를 비웃지 않게 하는’ 길이기도 하고요. -소설가/ daumcafe 이관순의 손편지
    • 오피니언
    • 기고
    2022-07-09
  • 아버지의 말법
    늙은 아버지와 늦둥이 아들이 따뜻한 봄날, 햇발이 잘 드는 대청마루에 나란히 걸터앉았다. 아버지는 우두커니 청명한 하늘을 바라보았고, 10대 아들은 아버지가 새로 사준 게임기에 정신이 팔려 있었다. 마침 앞집 감나무 가지에 참새떼가 앉는 것을 보고 아버지가 물으셨다. “얘야, 저게 무어지?” “참새잖아요.” 아들 입에서 시큰둥한 대답이 나왔다. 말없이 고개를 주억대던 아버지는 새떼가 요란하게 우짖으며 날고 앉기를 거듭하자 재차 물으셨다. "얘야, 저게 다 무어냐?" “참새라고 했잖아요.” 아들 대답이 처음보다 퉁명스러웠다. 그런데도 아버지는 웃기만 하셨다. 아버지는 5분 있다 또 물었고, 10분 있다가 똑같은 질문을 재차 하셨다. “얘야, 저 것이 무어냐?” “벌써 네 번째예요! 참새라고요!” 거듭된 질문에 언짢아하던 아들이 갑자기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아버지를 살폈다. 머릿속에 휘익 별통별 하나가 스쳐갔다. 노인의 불치병이라는 ‘치매’라는 단어가 떠오른 것이다. 아버지가 혹시? “아빠, 괜찮으신 거죠?” “뭐가, 나?” “기억이 없고 그런 건 아니죠?” 아버지는 웃으며 아들을 바라보았다. 걱정이 역력한 아들의 낯빛을 읽은 아버지의 눈빛이 봄 햇살만큼 따스하고 포근히 아들의 얼굴 구석 구석을 어루만졌다. 그날 아들은 아버지의 거듭된 질문에 짜증을 내고 말았다. “아무래도 병원에 가보셔야겠다”라는 토까지 달면서… 그럼에도 아버지는 그러는 아들이밉지가않다는 표정으로 웃기만 하셨다. 짜증이 머리까지 뻗힌 아들은 역정을 내며 벌떡 일어나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부자간 대화는 여기서 토막이 났다. 그런데도 아버지는 아들이 떠난 빈자리를 향해 빙그레 웃고 계셨다. 이후 세월이 꽤나 흘렀다. 아들이 성장하여 대학을 졸업하고 결혼을 했다. 그리고 2년이 지났을 때, 아버지가 갑자기 심장마비로 돌아가셨다. 장례 의례를 다 마치고 차분히 유품을 정리하는 데, 나온 것이 아버지의 일기장이었다. 일기장에는 오래전 그날에 아버지와 주고받은 대화가 아들 눈앞에서 날 생선처럼 펄떡이며 살아나고 있는 것이다. 막내가 참새를 모른다고 면박을 주었지만 싫지 않았다. 숨기지 않고 속마음을 드러내는 아들이 사랑스러웠다. 막내의 어릴 때 생각이 난다. 마침 우물가 느티나무에서 깍 깍 까치가 울고 있었다. 그때 막둥이가 네댓 살쯤 되었을 것이다. 어린 눈에 계속 우짖는 까치가 신기하기도 하고 걱정도 되었나 보다. 고사리 새순처럼 고운 손가락으로 나무를 가리키며 내게 물었다. “아빠, 저 새는 이름이 뭐야?” “어, 저 새는 까치란 새다. 아침에 까치가 울면 집에 귀한 손님이 온단다. 우리 막둥이한테 오늘 무슨 좋은 일이 있으려나?” 아들은 까치가 한 번 울 때마다 계속해서 물었다. “아빠 까치는 왜 울어?” “엄마가 없는 거야?” “친구들은 어디 갔어?” 나는 막둥이가 물을 때마다 꼬박꼬박 설명을 곁들여 일러주었다. 그럴수록 호기심 덩어리로 반짝거리는 어린 녀석의 눈망울과 천진한 얼굴이 어찌나 예쁘고 사랑스러운지, 두 팔을 펴 꼭 안아주었다. 그날 나는 아이의 같은 질문에 열댓 번은 족히 대답한 것 같다. 그것이 내겐 즐거움이었다. 그런데 오늘은 컸다고 아비 치매 걱정을 다 하네. 내가 늙긴 늙었나 보다. 어린것이 걱정하는 걸 보면.? 끝내 아들은 아버지 일기장에 닭똥 같은 눈물을 한 방울 툭 떨구었다. 일기장에 쓰인 아버지 마음을 읽으면서였다. 아들도 그날을 기억하고 있었다. 욱하는 마음에 역정을 냈지만, 두고두고 걸렸던 모양이다. 단지 쑥스러워 아버지에게 입을 열지 못했을 뿐. 잊은 것은 아니었다. 아들은 마지막 문장 앞에서 오열하기 시작했다. 너무나 아버지에게 죄송스러웠다. “아비가 말이 어눌해서 사랑을 표현한다는 것이 늘 그런 식이 구나. 그것이 늘 아들한테 미안했다….” ☞.. 부자간 대화에는 무심한 아들에 대한 표현력이 없는 아버지의 사랑이 깔려 있다. 자식과의 소통에 갈증을 느끼는 아버지…. 화술은 부족한데 대화는 해야겠고, 그러다 나온 것이 이런 질문이리라. “얘야, 저게 뭐지?” -소설가/ daumcafe 이관순의 손편지
    • 오피니언
    • 기고
    2022-07-04
  • ‘효(孝)’가 되는 말법
    그녀는 ‘효사친(효를 사랑하는 친구들)’의 방장이다. 일본에 ‘충(忠)’이 있다면, 한국에는 ‘효(孝)’가 있다고 거품을 문다. 풍화가 됐다곤 해도 ‘효의 가치는 여전히 한국인 심성을 관통하는 원류라면서. 그녀가 오랜만에 엄마에게 전화를 했다. 엄마의 반가움이 까치발을 든 아이처럼 들떠 있었다. 엄마는 먼저 전화하는 법이 없다. 딸이 하는 일에 조금이라도 방해가 될까 봐 금기시하는 딸 바보다. 그러한 엄마가 이날은 의외의 말을 꺼냈다. “네 의견을 듣고 싶었어. 엄마도 주식투자란 걸 할 수 있을까?” “주식? 엄마가 주식하려고?” “왜? 나는 하면 안 돼?” 주식이란 말에 딸이 깜짝 놀라자, 엄마의 대답이 바람 새는 풍선처럼 움츠러드는 걸 느꼈다. 그제사 아빠가 세상을 떠난 뒤로, 엄마가 생각 이상으로 외로움을 타시는구나. 정신이 번쩍 들었다. 지난번 엄마를 모시고 식당에서 점심을 하던 날이 떠올랐다. 유난히 꽃무늬 블라우스가 화려해 보였다. 히라마쓰 루이의 책 ‘노년 부모를 이해하는 16가지 방법’을 읽고난 후여서일까. 예전에 없던 것에 관심을 키우는 것은 당연했던 것들과의 이별을 뜻하는 것만 같았다. 꽃무늬 옷에 관심을 갖는다는 건 엄마의 꽃의 시간이 졌다는 뜻이고, 건강에 관심을 높이는 것은 건강이 엄마 곁을 떠나고 있다는 시그널로 느껴졌다. 식사하면서, 차를 마시면서, 늙어가는 엄마에 대한 쓸쓸한 상념이 떠나지 않았다. 저도 몰래 눈물 한 방울이 툭 떨어졌다. 미안함에 켕긴 딸이 생각을 바꾸어 먹었다. 외할머니는 돌아가시기 전 까지 화투를 끼고 사셨다는데. 노년에 취미 하나 갖는 것도 좋아보였다. “그래, 울 엄마라고 못할 것 없지. 작게 작게 시작해봐.” “고마워. 우리 딸이 그럴 줄 알았다. 찬성해 줄 것이라 생각은 했지.” 딸이 응원하자 녹음을 하겠다며 주식투자 방법을 차근차근 알려 달라는 것이다. 어떻게 그 얘길 전화로 다 하냐고, 나중에 집에 가서 차근차근 설명을 드리겠다는 데도 엄마는 막무가내 서두르는 것이었다. 투자 재원은 칠순에 들어온 축하금으로 하겠단다. 몇 달째 알토란 같은 돈을 은행에 묵혀두고 있다는 생각에 조바심이 일었던 모양이다. 딸은 엄마의 따분한 일상이 이해되면서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자책한 딸이 그날 한 시간 넘게 엄마와 통화를 하면서 주식 거래에 필요한 기초지식을 전수했다. 앱을 까는 것부터 계좌 만들기, 매입 매도 방법, 그리고 몇 가지 추천 종목도 알려주었다. 자주 전화할 테니 궁금한 것은 그때그때 물으시라고 했다. 그 말이 좋았나 보다. 엄마의 목소리가 하이톤으로 바뀌었다. 그날 이후 주식을 매개로 한 모녀간 통화가 부쩍 늘었다. 안부 묻는 것이 고작이던 전 보다, 확실한 대화 주제가 생긴 후로는 엄마가 재미를 느끼는 모양이다. 하루가 금세 지나간다는 것이다. 딸은 마음이 뿌듯했고, 엄마는 딸과의 통화가 즐거웠다. 그러다 딸이 두 달간 유럽 본사로 장기 출장을 떠나면서 한 동안 통화가 어렵게 되었다. 엄마는 딸이 출국한 지 한 달도 안 돼 달력에 'X표'를 긋기 시작했다. 남편이 군 제대를 앞두고 했다는 그 'X표'를. 두 달이 지나 귀국한 딸이 엄마에게 전화를 드렸다. 그런데 엄마의 목소리가 착 가라앉아 있었다. 얘기인 즉 매도 시점을 놓친 것이 분하다는 것이다. 밥맛까지 잃었다고 한다. “왜, 가격 좋을 때 한 번 팔아보지 그랬어?” “네 말 듣고 하려고 그냥 묻어뒀지 뭐. 지금 팔면 원금도 못 건져.” 실제 손해를 본 것도 아닌데, 매도 시기를 놓친 것이 그렇게 서운한 모양이다. ‘이러다 울 엄마 주식 때문에 병나겠다’라고 농담을 던졌지만, 혼자 끌탕을 했을 엄마를 생각하니 죄송했다. 골치 아파하면서도 엄마는 여전히 주식에 매력을 느끼시는 것 같았다. 장기적으로 어떻게 하는 것이 엄마 인생에 도움이 될까? 생각을 굴린 딸이 용기를 냈다. 엄마의 노년에 활력이 된다면 적극 도와야겠다고. “엄마, 걱정하지 마. 다 그렇게 배우는 거야. 내가 옆에서 도와줄게. 힘내. 알았지 엄마?” “정말, 그래 줄래? 고맙다 우리 딸! 최고야!” 엄마는 기다렸다는 듯이 처음 주식을 시작할 때의 달뜬 목소리로 금세 돌아왔다. 이후 딸과 통화가 늘면서 엄마의 주식 수다도 따라 늘었다. 작전주가 어쩌고 전문 주식 용어까지 섞으면서 딸과의 대화를 즐기는 것이었다. 단골 유튜브 채널도 생겼단다. “엄마 50만 원 손해 봤다며? 속 많이 쓰린 것 아냐?” “그 정도에 속 쓰리면 그만둬야지. 잃을 때가 있으면 딸 때도 있겠지.” “울 엄마 이제 맷집도 생겼네. 엄마 통장에 100만원 넣었어. 엄마한테 투자하는 거야.” “나한테 투자? 정말?” “응. 소질이 있어 보여서. 장기투자야 원금 보장 없는 조건으로. 열심히 공부하고 단타로 조금씩, 재밌게, 알았지? 울 엄마 파이팅! 호호” “고마워 우리 딸! 호호” 그녀는 오늘도 카페에 글을 올렸다. “한국문화는 ‘기(氣)·흥(興)·정(情)’의 세계다. 세계 사람들이 왜 K 문화에 열광하는 줄 아는가? 한국인의 효에서 발효되고 숙성된 맛과 멋이 녹아 있기 때문이다. 그것이 사람들의 원초적 본능을 자극한 것이다. 갈수록 ‘K 콘텐츠’는 다양화되고 진화할 것이다. 세계로 수출하는 수많은 한국 제품이나 서비스는 또 어떤가? 그곳에도 기본적으로 ‘효’의 기품이 녹아져 있다”라고. -소설가/ daumcafe 이관순의 손편지
    • 오피니언
    • 기고
    2022-06-29
  • 저 숲에는 몇개의 길이 있을까
    여동창이 카톡에 올린 글입니다. 얼마 전 직장맘인 엄마를 붙잡고 어린손녀가 펑펑 울더랍니다. “코로나 언제 끝나?”냐고 물으며. 그 어린 것이 얼마나 답답하고 힘들었으면 꾹꾹 눌러왔던 울음을 터뜨렸을까. 어디 그 아이 뿐인가요. 말은 없어도 우리 마음은 모두 이심전심입니다. 밤 9시에 인적이 끊기는 서울이란 도시를 보면, 사이렌 소리와 함께 등화 관제로 불을 끄던 2차 대전 때, 유럽의 도시가 망령처럼 살아납니다. 하루는 컴퓨터에서 멀어져보자고 문밖을 나섰는데, 아차산에 갈까 했던 발길이 춥다는 핑개로 돌고돌아 도서관 앞에 서 있는 나와 만났어요. 서가 사이를 어슬렁이다 정석주·반칠환 시인의 시집과 조우했습니다. 언제 읽어도 품은 뜻이 명쾌하고 잠든 마음을 깨워 잔잔한 물결 파동을 안겨주는 시들입니다. 연말이란 절기 탓 때문일까. 두 편의 시가 바알갛게 피어오른 숯불같이 내 시선을 잡습니다. 장석주 시인의 ‘대추 한 알’과 반칠환 시인의 ‘새해 첫 기적’ 입니다. 두 편의 시가 ‘손편지’의 글제로 떠올랐습니다. 절과 멀어져 보자고 길을 나섰던 승려가 엉뚱한 데서 시주 받는 느낌이 들더군요. 벼룩이 뛰어봤자 손바닥 안인 것을. 결국엔 컴퓨터 반경을 맴돌았구나. 덕분에 ‘대추 한 알’은 12월에 인용하고, 반칠환의 시 ‘새해 첫 기적’을 2021 신년맞이 첫 글로 내놓게 되었지요. 황새는 날아서 말은 뛰어서 거북이는 걸어서 달팽이는 기어서 굼벵이는 굴렀는데 새해 첫날에 도착했다 바위는 앉은채로 도착해 있었다? 이렇게 우리 모두는 새해 새날의 기적을 맞았습니다. 역대 어느 해보다 고달프고 아팠던 사연 많은 2020년을 떠나 보내고, 새출발을 시작한 것만으로도 기적입니다. 희망의 새 씨앗을 품은 푸른 여명과의 만남이니까요. 이룬 것이 있어 즐거운 사람이나, 고되고 우울했던 기억뿐인 사람이나, 같은 출발선에서 다시 신발끈을 동여맨다는 것은 기회입니다. 삶에 우열이 있고 행불행이 따로 있어 보여도, 실은 똑 같은 생사봉도(生死逢道) 위의 인생입니다. “황새는 날아서, 말은 뛰어서, 달팽이는 기어서 새해 첫날에 도착했다”는 이 시는 2012년 이맘 때, 교보생명 광화문 글판에도 걸렸던 구절이어요. 새 희망을 염원하는 메시지가 앙증맞은 복조리처럼 보였습니다. 걷든, 뛰든, 기든 방법은 각기 달라도, 결국 한날 한시에 도착해 새날을 바라볼 수 있다니! 놀라운 일! 아닌가요? 다시금 최선을 다해 한 발씩만 앞으로 나가면 올해도 기적을 예약할 수 있으니, ‘설렘’입니다. 2021년은 가보지 않은 푸른 숲입니다. 낯설기도 하지만 호기심도 불러요. 저숲엔 얼마나 많은 길이 있을까? 남산을 오르는 길이 하나가 아니듯, 굳이 남이 낸 길을 고집할 필요는 없겠지요. 낯설고 힘들어도 내가 밟으면 나의 길이 됩니다. 때로는 길을 잃어야 길이 보입니다. 조선시대 김정호가 그런 사람입니다. 그는 낯선 숲을 두려워하지 않았어요. 내가 밟으면 다 길이라는 신념으로 낯설고 물설은 곳을 한없이 헤매고 돌고돌아 대동여지도를 만들고 역사에 이름을 올렸습니다. 불행을 질투할 권리를 네게 준 적 없으니/ 불행의 터럭 하나 건드리지 마라/ 불행 앞에서 비굴하지 말것./ 허리를 곧추 세울 것./ 헤프게 울지 말 것./ 울음으로 타인의 동정을 구하지 말 것./ 꼭 울어야 한다면 흩날리는 진눈깨비 앞에서 울 것./ ... /울어라 울음이 견딤의 한 형식인 것을/ 달의 뒷편에서 명자나무가 자란다는 것을 잊지 마라. -장석주 시 ‘명자나무’중 내겐 불행을 질투할 권리마저 없으니 고통 앞에 비굴하지 말라고 해요. 헤프게 울지 말고 허리를 고추 세워 고통과 맞서서 참고 견뎌내면 고통 너머의 열매가 보인다는 것입니다. 혼자서 외로움을 견디고 걸어도 쓸쓸하지 않은 습관을 지닌 사람은 기억 합니다. 달 뒷편에 붉은 꽃대를 올리는 명자나무가 자라고 있다는 사실을. 날든, 뛰든, 걷든, 기든, 구르든 다 좋으니 부디 올 한 해 멈추지 않기. -이관순 소설가/ daum cafe/ leeretter
    • 오피니언
    • 기고
    2022-06-27
비밀번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