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5-09(목)
 

이미 숱한 연말이 거듭했건만, 인적도 불빛도 낯선 길목에서 나를 만날

줄은 몰랐습니다. 불빛은 시들고 쓸쓸함만 더합니다. 가슴에 눈물이 마른

사람들은 눈도 오지 않는 마른 하늘을 향해 허연 입김을 내뿜습니다.

 

이럴 때는 밖이 아니라 내 안을 살펴볼 기회입니다. 혼자서 조용히 나를

돌아보는 시간도 의미 있는 일이지요. 곧 전설 같은 풍경으로 돌아 앉을

2020년 서녘에 나를 세우고 롱펠로우 시 화살과 노래를 떠올립니다.

 

나는 공중을 향해 화살을 쏘았으나 / 화살은 땅에 떨어져 갈 곳이 없었다/

재빨리 날아가는 화살의 그 자취/ 누가 그 빠름을 뒤따를 수 있으랴.//

나는 공중을 향해 노래를 불렀으나/ 노래는 땅에 떨어져 갈 곳이 없었다/

그 누가 날카롭고 강한 무엇이 있어/ 날아가는 그 노래를 따를 것이냐

 

세월이 흐른 뒤 참나무 밑둥에/ 그 화살은 성한채 꽃혀 있었고/

그 노래는 처음에서 끝구절까지/ 친구의 가슴 속에 숨어 있었다.?

-화살과 노래/ 롱펠로

 

심리학자 윌리엄 제임스에 의하면 우리가 하루에 내리는 많은 결정과

선택이 신중하게 이루어진 것처럼 보이지만, 결국은 내 몸에 굳어있는

습관의 연속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네 일상은 습관 덩어리입니다. 지금 들여다보고 있는 내 통장의

잔고는 나의 경제적 습관이 만든 살아 있는 증거이고, 줄지 않은 나의

몸무게는 해묵은 논쟁거리인 나의 섭생 탓입니다.

 

하루하루 되풀이되는 일상의 습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여전히 행동하고

생각하는 것이 그 틀에 갇혀 있어요. 그래서 생각입니다. 2021년에는

내 몸에 슬어 있는 습관 한두 가지 콕집어서 확실히 손 보겠다는 결심을

하면 어떨까.

 

습관의 폐해은 세상과 사물을 주관적으로 본다는데 있어요. 세상 일을

주관해 볼 필요도 있겠지만, 때로는 객관화할 줄도 알아야 합니다. 높은

산에 올라 만상을 내려다보고, 바닷가에 나가 수평선을 바라보며

세상과 나를 떼어놓고 관찰해 보자는 것이지요.

 

눈이 내렸던 날, 설악으로 백담사를 다녀왔습니다. 설악은 더 없는 안식과

명상을 안기는 곳입니다. 끝없이 가라앉은 내설악의 풍경이 좋고, 고승

허응당 보우와 한용운, 김시습의 체취가 서려 있어 좋습니다.

 

자연은 말이 없어도 늘 가슴에 잔잔한 파동을 전합니다. 계곡 물소리가,

나뭇가지를 흔드는 바람소리가 그렇습니다. 옛 선사는 자연이 곧 부처요,

계절의 변화를 경전으로 칭했으니, 백담계곡도 한 권의 경전이겠지요.

 

백담은 오래 동안 절을 떠났던 중광이 다시 머리를 깎은 곳입니다.

시서화(詩書畵)로 한 세상을 농락한 후 속세의 머리를 깎고 다시금 백담

품에 안기는 그 날의 장면이 물결처럼 흔들립니다.

 

설악은 내게 나무처럼 살라고 이릅니다. 심산산곡이든 뒷동산이든 나무는

나무와 더불어 삽니다. 뿌리와 뿌리가 얽히고 잎과 잎이 보듬으며 살아요.

빈가지끼리 손을 잡고 이겨내는 저 겨울나무가 그렇습니다.

 

나무는 백 년 노송이나 갓 자란 솔이나 늘 위를 보며 자랍니다. 광풍이

불 때도, 살을 에는 추위에도 무릎을 꿇지 않고 푸른 하늘을 우러러요.

눈을 뒤집어 쓰고도 고개만은 꼿꼿하게 들고 있는 나무입니다.

 

눈의 무게에 가지가 꺾여도 시선은 영하의 하늘을 향해요. 나무가 하늘을

우러르고 스스로 철을 분별하며 살듯이 우리도 새해는 좀더 분별하며

세상을 살고, 사람들과 어울리며 살았으면 합니다.

 

올 한 해, 너남 없이 참 힘들고 아팠습니다. 그래도 이렇게 살아있다는

것이 기적이고 은총입니다. 사람이 귀하고 만남의 소중함이 어떤 것인지

절절하게 느낄 수 있었음도 감사할 일입니다.

 

다시금 마음속에 새깁니다. 세월은 흘러가는 게 아니라 우리들 마음에

쌓이는 것임을. 그래서 마음에 이는 바람소리, 물소리, 풍경소리를

손편지에 담습니다.

-글 이관순 소설가/daumcafe/leelett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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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설악 백담 계곡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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