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5-09(목)
 

외국인들이 한국 사람만 모르는 게 있다 해요. 서울이 얼마나 아름다운

도시인지 모르고 산다는 겁니다. 광화문에서 경복궁, 북악산, 북한산,

도봉산으로 이어지는 빼어난 경관이 그중 하나입니다.

 

남으로는 인구 천만의 거대 도시 중심에 남산이 우뚝 서고, 그 뒤로

한강, 관악산을 겹겹이 두른 서울에 찬사를 보냅니다. 광화문 빌딩

숲을 따라 흐르는 청계천은 서울의 백미라고 감탄해요.

 

국가간 경쟁은 궁극적으로 도시간 경쟁입니다. 도시마다 그들만의

문명이 투영되니까. 로마, 그리스는 물론 우리도 도시국가 형태로

발전한 셈이지요. 문명의 흥망은 사람이 주체지만, 삶을 구현해 주는

것은 도시입니다.

 

TV 사극이 화려한 부활을 알린 건 1996년 방영된 용의 눈물입니다.

조선 건국을 위해 한양 천도를 계획할 때, 3인의 실력자가 한양 풍수를

논하는 모습이 흥미로웠어요. 서울 운세가 그들 손에 달린 거니까요.

 

하륜은 주산을 연대 뒤 무악에 두고 그 앞으로 도심을 열어야 한다 했고,

무학대사는 인왕산을 주산으로 하여 북한산과 남산을 좌청용 우백호로

삼아야 한다고 했지요. 그리됐으면 지금쯤 서울은 동대문, 청량리 아니면

신촌으로 번창했겠지요.

 

결국 정도전이 관철시킵니다. 왕은 남면을 향해야 하니, 백악을 주산으로

경복궁을 두고 안산을 관악으로, 그 앞에 한강을 둔다는 겁니다. 문제는

남산이 화기가 너무 강한 데다, 산이 둘러싸여 화재나 변란이 쉽게 날 수

있다는 것이었어요.

 

이를 제어하기 위해 궁 곳곳에 도랑을 내고 다리 위에 해태(불 먹는 신)

세웠지요. 그만으로 부족해 산에서 나오는 물길을 정비해 지금의

청계천이 흐르게 됩니다.

 

청계천의 물줄기는 특유의 비범함이 있어요. 백두대간의 지형 특성 탓에

우리나라 강은 동에서 일어나 서로 빠지는 동출서류(東出西流)형인데,

청계천은 반대인 서출동류(西出東流)형이에요.

 

북악· 인왕· 도봉산 등에서 흘러내린 물이 청계천으로 모여 역(西)으로

흐르는 독특한 형국입니다. 예부터 풍수지리에서 중시한 게 역술이죠.

이조 역대 왕들이 청계천 관리에 공을 들인 것도 그런 이유입니다.

 

모두 기를 숙인 연말에도 남산 둘레길엔 사람소리가 납니다. 언제와도

살가운 소리들입니다. 그 틈으로 외국인들도 어개를 흔들며 서울 풍류를

즐깁니다. 쉼터에서 경쾌하게 웃는 장년 여성들과 만났어요.

 

자주 오시나 봐요?” “이 친구는 매일 와요. 밥은 안 먹어도 남산은 안

빼먹어요. 둘째가기 서러운 남산 예찬자랍니다.” 그러자 지목을 받은

남산 예찬자가 말을 받습니다.

 

보세요. 사방팔방으로 서울이 한 눈에 들어오잖아요. 세계 어느 도시가

이런 데가 있어요? 그래서 난 이사도 못가요. 회현동에 40년짼데 집이

낡았어도 그냥 살아요.” 오늘 따라 청명한 대기에 북한산 도봉산 자락이

거울 속처럼 선명합니다.

 

서울은 밤의 도시입니다. 낮에 침잠했다가도 해가 지면 빛으로 성장(盛裝)

한 빌딩군이 빛의 무도회를 시작하고, 12월에 그 절정을 이룹니다.

그러한 서울이 깊은 정적에 빠졌습니다. 청계천에 오색빛이 사라지면서.

 

매년 이맘 때면 떠오르는 풍경이 형형색색의 한지 조명으로 물든 청계천

빛축제입니다. 2009년 한국방문의 해에 시작된 뒤 연말을 장식하는

대표적 빛축제인데, 모처럼 찾은 발길을 무색하게 돌려놓습니다.

 

영롱하게 빛났던 빛들은 다 어디로 갔나? 그제사 올해는 청계천을 떠나

관광특구 4곳에 분산 개최되는 걸 알았습니다. 코로나가 11년 전통의

청계천 불빛을 꺼버리더니, 보신각 타종까지 멈춰세웠다는 쓸쓸한 소식도

들립니다.

날이 어두워지니 인적이 사라집니다. 불빛과 사람들 소리로 가득해야 할

청계광장, 시청앞 광장, 대학로 마로니에 공원까지 황량한 공터가 됐어요.

9시가 가까워지자 인근 상점들의 불빛도 하나 둘 꺼집니다.

 

산타클로스도 보이지 않고 캐럴도 들리지 않는 차가운 크리스마스.

하늘마저 얼어붙은, 정말 조용한 밤이에요. 그래도 마음만은

그 어느 때보다 따뜻하기를. 구세군 자선냄비는 뜨겁게 끓기를.

-글 이관순 소설가/ daumcafe/ leerett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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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색 빛들 어디로 갔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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