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5-09(목)
 

산천에 꽃 피던 봄, 장맛비에 젖던 여름, 타는 노을단풍도 한 때였어요.

소멸과의 지루한 싸움을 끝낸 2020년이 노을처럼 붉게 눈시울을 적시며

해넘이를 시작합니다. 아직도 무정인지, 유정인지 모를 세월과 함께.

 

그 짧은 삶에도 운명의 세 고리는 달고 다녀요. ‘출생해서 평생을 불완전

하게 살다가 죽는다는 것. 단 한 차례의 연습도 없이 태어나 한 평생을

불안 불안하게 살다가 마지막 훈련도 없이 떠나는 인생 말입니다.

 

해 밑에 이르면 저마다 가슴에 생각나는 글귀 하나쯤 매달릴 법해요.

경주마가 한 바퀴를 돌 때마다 넘기는 경마장 숫자판은 보는 사람을

훙분시키지만, 12월 달력을 넘기는 가슴엔 휑한 바람이 스칩니다.

 

인생무상이라지만, 그래도 12월 정서엔 노벨문학상을 탄 폴란드 시인

비스와바 심보르스카의 시 두 번은 없다가 어울립니다.

두 번은 없다 지금도 그렇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아무런 연습 없이 태어나서/ 아무런 훈련 없이 죽는다//

우리가, 세상이라는 이름의 학교에서/ 가장 바보 같은 학생일지라도/

여름에도 겨울에도/ 낙제란 없는 법// 두 번의 똑 같은 밤도 없고/

두 번의 한결 같은 입맞춤도 없고/ 두 번의 동일한 눈빛도 없다.//

 

어제, 누군가 내 곁에서/ 네 이름을 큰 소리로 불렀을 때/

내겐 마치 열린 창문으로/ 한 송이 장미꽃이 떨어져 내리는 것 같았다....

 

무슨 생각을 전할 때, 말로 하는 것과 글로 쓰는 것은 우리의 생각과

태도를 달리 만듭니다. 과장과 허풍을 즐겼던 문호 헤밍웨이가 이런

말을 했어요. “한 마디 하면, 내가 이야기 할 때는 그냥 이야기예요.

하지만 글로 쓰면 그건 영원한 진심이오.”

 

지금이 그런 때입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좋아하는 노래 중 아름다운

노랫말 1위로 뽑힌 가사가 봄날은 간다였어요. 수년 전 문인수 시인이

등단 30주년 기념시집을 내면서 봄날은 간다’ 4절을 썼습니다. 누구나

지난 세월을 돌아보면 한 절쯤 쓸 법한 정서가 녹아있는 노래지요

 

밤 깊은 시간엔 창을 열고, 하염없더라. 오늘도 저 혼자 기운 달아,

기러기 앞서가는 만 리 꿈길에, 너를 만나 기뻐 웃고 너를 만나 슬피 울던,

등 굽은 그 적막에 봄날은 간다.”

 

청명한 하늘을 이고 꽃길을 걷는 사람은 자신이 얼마나 환한 세상에

사는지를 알지 못합니다. 숲속 그늘에 갇혀야 그 밝음에 눈 뜨지요.

햇빛도 어둠이 있어 밝고 눈부시다는 걸 압니다. 문명(文明)이 어둠에서

시작되는 것도 같은 이치입니다.

 

화려해 보이는 인생도 속을 들여다보면 그늘이 보여요. 방금 무대에서

관객을 열광시킨 가수도 서늘한 그늘이 있고, 아무리 고운 꽃도 그림자는

검은 법입니다. 눈물 없는 사람, 그늘 없는 사람에게 사랑을 주기란

쉽지 않아요.

 

세상은 사는 게 아니라 견디어 내는 것임을 모르는 사람, 왜 나이가 드는

것이 아니라, 옻칠을 더하는 것이라고 하는지 그 뜻을 모르는 사람에게

사랑이란 과분한 것입니다.

 

올 한해, 웃기도 했지만 실은 어느 해보다 힘들고 아팠습니다. 경험하지

못한 세상을 만나 저마다 그늘을 만들고 눈물을 훔치며 산 시간들입니다.

우린 늘 웃고 괜찮은 척 하다가 서로를 잊고 살았습니다.

 

매일 웃고 살기에 슬픔이 없는 줄 알았지요. 항상 밝게 인사하기에 아픔이

없는 줄 알았거든요. 늘 강하게 보여서 눈물이 없는 줄 알았습니다.

언제 봐도 괜찮은 척, 아무렇지 않은 척, 내가 그랬듯 당신도 그리 사시는

줄 몰랐습니다.

 

미안합니다. 당신에게 아픈 그늘이 깊다는 것을 몰랐습니다. 저리고 시린

이별의 슬픈 가슴을 보듬고 있는 당신임을. 그럼에도 우리 다 쓰러지지 않고

살았으니 용해요. 지금 살아 있으면 잘 살은 겁니다. 그것이 기적예요.

내년에는 그늘도 나누고 서로 응원하며 살아요.

 

승강장에 전역을 출발했다는 불이 들어왔습니다. 여기서 난 전철을 바꿔

타야 합니다. 올 한해 자랑할 것은 없어도, 이 한 가지는 잊지 않았습니다.

힘들긴 했어도 하루에 한 발짝을 내딛으며 여기까지 왔다는 것....

 

그것이 우리 모두에게 감사의 제목이 되었으면 해요. 환승역에서 송년

인사를 띄웁니다.

-글 이관순 소설가/ daumcafe/ leelett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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