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4-2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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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음악은 천상의 소리
    밤바람이 선득한 주말. 저녁을 먹고 장자호수공원으로 산책을 나섰습니다. 사람들이 오가는 사이로 청아한 색소폰 연주음이 들려옵니다. 발길이 절로 이끌려 간 곳엔 한 분이 ‘셀프 콘서트’를 열고 있네요. 잔디밭에 앉아 연주가 끝날 때마다 박수를 칩니다. 연주력이 준수한데다 가을밤의 정취까지 더해져 색소폰 선율에 젖는 아름다운 가을밤을 즐겼지요. 음악은 사랑을 전하는 신의 소리라고 합니다. 모든 사람을 하나로 묶어 주지요. 음악은 연주자의 기쁨도 되지만 만인의 즐거움도 됩니다. 연주가의 재능을 부럽게 바라본 영화가 있습니다. ‘어거스트 러쉬.’ ‘음악은 사랑을 낳고 사랑은 운명을 부른다.‘는 말이 잘 어울린 영화지요. 밴드 싱어이자 기타리스트인 루이스와 촉망 받는 첼리스트 라일라의 보석보다 반짝였던 단 하루 밤 이후, 남자는 그녀를 한 번도 잊은 적 없고, 여자는 얼굴도 모르는 낳은 아이에 대한 그리움을 놓은 적이 없지요. 이들의 믿음 하나는 “음악이 있는 한 우리는 다시 만날 거야”라는 것. 부모의 DNA를 받은 아이는 일찍부터 놀라운 음악적 재능을 보입니다. 시설에서 자란 11세의 소년은 부모만이 자신의 음악을 알아볼 수 있다는 믿음 하나로 뉴욕을 찾아갑니다. 모든 게 신비한 뉴욕. 도시가 만드는 수많은 소리들이 소년의 청각에 음계로 포착됩니다. 소년은 아이들을 모아 거리에서 노래를 시키는 워저드를 만나 어거스트란 이름으로 거리 연주자로 등장해 천부적인 실력을 보입니다. 하루는 소리에 끌려 교회 합창단 연습장에 들렸다가 처음 보는 오선지와 오르간 앞에서 작곡하고 연주하는 놀라운 재능을 발휘합니다. 이를 지켜본 목사님이 줄리어드에 음악천재로 추천합니다. 줄리어드에서 사모곡 라프소디를 작곡해 주위를 놀라게 한 어거스트. 마침내 뉴욕필하모니 콘서트에 특별 출연자로 초청됩니다. 줄리어드 출신의 유명 첼리스트(엄마)와 함께. 하지만, 연주회를 앞두고 위기가 오죠. 워저드가 연습장에 나타나 아버지라며 친권을 주장하고 데려갑니다. 학교는 간곡히 연주회만큼은 보내달라고 부탁을 하지만 거절당하죠. 금관악기가 아이의 영혼을 뽑는다는 그릇된 인식으로... 다시 광장 연주에 나서는 어거스트. 부근을 지나던 루이스가 소리에 홀려 찾아오고, 금세 호흡을 맞추더니 황홀한 기타 2중주를 펼칩니다. 어거스트가 오늘 밤 있을 센트럴파크 공연을 알려주지만, 루이스는 귀에 담지 않고 “용기를 잃지 말라”는 말만 주고 떠납니다. 그날 밤, 어거스트는 친구의 도움으로 탈주에 성공해 연주장으로 달려가고, 지방공연에 나서던 루이스는 뉴욕 중심가에서 아이 얼굴이 나온 배너광고를 보지요. 전율을 느낀 그도 차를 버리고 연주회장으로 내달립니다. 환호 속에 첼로 연주를 끝낸 라일라가 아이를 생각하며 공원을 빠져나올 때, 줄리어드 총장이 특별초청 지휘자를 소개합니다. 무대에 등장하는 어거스트. 환호하는 청중... 놀라운 자작곡이 그의 지휘 속에 연주를 시작합니다. 밖을 향하던 라일라가 연주음에 끌려 뒤돌아서고, 또 반대편에서는 황홀한 눈빛의 루이스가 나타납니다. 마침내 무대 앞에 이르러 12년 만에 마주 서는 남과 여... 환희의 포옹을 할 때 지휘하는 아이의 모습이 비칩니다. 세상에는 수많은 소리들로 가득 차 있지요. 귀를 기울인 만큼 들리기도 하고 지나치기도 합니다. 끊임없이 들리는 세상의 소리를 옮겨 작곡하고 연주하는 음악천재가 말하죠. “아이들이 동화를 믿듯 저는 음악을 믿어요. 부모님이 살아계신다면 제 음악을 꼭 듣게 될 거야요.” 어거스트의 간절한 믿음처럼 나는 어떤 믿음을 확신하며 살고 있나요? 글 이관순(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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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4-29
  • 내 앉아있는 자리
    스산한 바람에 비까지 흩뿌리니 단풍은 지고 낙엽만 우수수 쌓입니다. 이렇듯 나무도 꽃도 지상의 모든 생명들이 사이즈를 줄이는 시기입니다. 그것이 한 주기의 마지막 겨울을 상대하는 지혜입니다. 사람이 나이가 든다는 것 또한 사이즈를 줄이는 것으로 시작됩니다. 몸집이 줄고, 먹는 게 줄듯 이것이 절제의 근본이며 이치입니다. 세상에 나올 때 작게 나왔으니 돌아갈 때도 비우고 작게 돌아가야 합니다. 여기에는 실상과 허상이 공존하지만 스스로 말수를 줄이고, 욕심도 미움도 줄이고, 자랑, 명예 같은 덧없는 것은 날려야 합니다. 그래야 사이즈가 줄지요. 루디 세네카는 “인간은 마치 시간이 모자란다고 불평하면서, 마치 시간이 무한정인 것처럼 행동한다.”고 사람의 어리석음을 비꼬았지요. 그런데 사람은 이를 알면서도 어제의 습관을 오늘도 고집하고 삽니다. 친구가 많다고 자랑하시나요? 바쁜 것을 미덕으로 생각하셨나요? 그보다는 흉금을 터놓고 말할 한 사람의 친구가 더 소중한 때입니다. 친구도, 만남도, 분주함도 지혜롭게 줄여가는 것이 노년의 삶을 가볍게 하고 실수를 줄이는 방법입니다. 우리 몸은 수분이 80% 이상이라고 하죠. 비슷한 비율로 우리 삶을 주장하고 있는 것이 말입니다. 그만큼 물과 말은 몸을 유지하고 삶을 구성하는 중요한 요소입니다. 그래서 절제를 말할 때 가장 먼저 꼽는 게 말입니다. 내가 살면서 토해낸 말을 양으로 계측한다면 얼마나 될까. 그중 꼭 필요했던 말은 얼마쯤 일까. 이제는 할 말 못할 말, 안 해도 좋을 말, 상처 주는 말을 가려가며 했으면 합니다. 내뱉은 말은 흘러간 세월처럼 돌릴 수 없으니... 그래서 이랬으면 좋겠습니다. “이제는 많이 들어주자. 듣는 귀는 8로 열고 말하는 입은 2로 줄이자. 남이 말할 때 자르지 말자. 중간에 끼어들지 말자. 말 줄기를 돌리지 말자.” 비위 상한다고 파르르, 욱, 버럭 하는 감정도 이젠 삭혀 없애야 합니다. 행여 그런 상황이 되면 심호흡 한 번으로 날려버리세요. 대신 많이 웃어주면 좋겠습니다. 상대가 가족, 친구, 이웃, 누구든 만나면 웃는 것으로 말문을 열어요. 나이가 들면 웃는 근육도 굳는다는데, 얼굴에 웃음기마저 빠지면 노인 특유의 표정 없는 일그러진 인상만 남아요. 나이가 든다는 것은 옻칠을 더하는 것처럼 윤을 내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미움이나 시기, 질투는 다 헛된 뜬구름이지요. 뜬구름을 좇다가 낯선 곳에 서 있는 나를 발견하는 건 아픈 일입니다. 살고 있는 이날, 앉아 있는 이 자리가 내가 족해야 할 자리임을 아는 사람은 행복합니다. 이 나이에 맘대로 못할 게 뭐야. 하지만 나이가 들수록 남을 배려하며 사는 인생이 아름답습니다. 살아보니 ‘역지사지(易地思之)’ 이상의 스승은 없더군요. 사서삼경이 대단한 게 아니라, 상대편 입장을 늘 먼저 헤아리면 그것이 상선의 절제입니다. “오죽했으면... 그래 저럴 수 있겠다... 나도 그 입장이면... 저도 사람인데.” 글 이관순(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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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4-22
  • 너도 죽는다‘메멘토 모리’
    말에는 묘한 힘이 있어 곱씹을수록 향기를 내는 말이 있고, 겸손함을 가르치는 말도 있지요. 라틴어는 그런 철학적 의미를 함의한 말과 글이 꽤 많습니다. 언젠가의 기억입니다. KBS TV '도전 골든벨‘에서 최후 1인이 된 학생에게 50번 마지막 골든벨 문제가 주어집니다. “고대 로마에서 승리를 쟁취한 장군이 개선행진을 할 때 주위에서 외쳤던 라틴어는?“ “메멘토 모리" 영예의 골든벨이 울리는 짜릿한 순간을 지켜보았지요. 다소 생소한 라틴어 '메멘토 모리(memento mori)'는 '죽음을 기억하라‘는 뜻입니다. 유래는 로마 공화정의 개선식으로 거슬러 올라가요. 개선식은 전쟁에서 승리한 장군에게 주어지는 영예입니다. 개선장군은 관습에 따라 전차를 타고 퍼레이드를 벌입니다. 영웅이 탄 마차가 시민의 환호 속을 헤치고 행진하는 동안 뒤에서 노예들이 큰소리로 외쳐댑니다. 메멘토 모리! 메멘토 모리! “오늘은 개선장군이지만 너도 언젠가는 죽는다. 겸손하게 행동하라.” 승리에 도취된 장군에게 본분을 잊지 않도록 경각심을 주는 장치인 셈이죠. 로마 최고의 환대 속에서도 너는 신이 아닌, 한 인간일 뿐임을 알린 것입니다. 메멘토 모리에는 세 가지 철학적 가치가 내재되어 있습니다. ‘죽음을 기억하라. 운명을 사랑하라. 현재에 충실하라.’ 이 셋은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도 적용되는 훌륭한 교훈입니다. 스티브 잡스도 스탠퍼드대 졸업식 축하 연설에서 이를 강조했습니다. 췌장암 투병으로 힘든 시기를 보내던 그는 ‘죽음은 삶이 만든 최고의 발명품‘이라고 격찬합니다. 그러므로 제한된 인간의 시간을 다른 누군가의 인생을 살 듯 낭비하지 말고 자신을 믿고 집중하라고 졸업하는 학생들에게 말합니다. 뜻이 통하는 라틴어에 ‘카르페 디엠(carpe diem)'이 있습니다. 몬래 이 말은 신을 공경하고 오만해지지 말라는, 현재를 가치 있게 살라는 뜻인데 이후 기독교 영향을 받아 현세의 부귀나 영화의 부질없음을 알립니다. 우리에게도 ‘화무십일홍’이란 말이 있죠. 열흘 가는 붉은 꽃이 없다는 이 말엔 ‘한 번 흥한 것은 반드시 쇠한다.’ 는 속뜻을 지닙니다. 트로트 가수 김연자가 불러 유명한 노래 ‘아모르 파티’도 같은 말입니다. 사랑을 뜻하는 아모르와 운명을 뜻하는 파티가 합성된 라틴어로 이 또한 ‘운명을 사랑하라’는 말이지요. 인간이 가져야 할 삶의 태도로 철학자 니체가 처음 사용했습니다. 메멘토 모리는 미국 남서부에 거주해온 나바호족에서도 찾을 수 있어요. 그들은 “네가 세상에 울면서 태어날 때 세상은 기뻐했으니, 네가 죽을 때 세상은 울어도 너는 기뻐할 수 있도록, 그러한 삶을 살아라.”는 의미심장한 철학을 닮고 있습니다. <메멘토 모리>, <카르페 디엠>, <아모르 파티>, <화무십일홍>까지 모두 겸손한 삶을 가르칩니다. 제한된 시간을 사는 인생에게 죽음을 기억하고, 운명을 사랑하고, 오늘에 충실하라.... 이보다 더 삶을 성찰하게 하는 말이 또 있을까 싶습니다. 글/ 이관순(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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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4-15
  • 의리가 사라진 세상
    짓궂은 질문을 해봅니다. ‘사람’과 ‘인간’은 같은 거야? 사전의 설명은 비슷 하지만, 아무래도 “저 인간!” 하면 부정적 이미지가 앞서죠. “저 사람 인품이 좋아”로는 써도 “저 인간 인품이 좋다”고 말하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세상에 사람 같지 않은 인간이 많다보니 용례까지 헷갈립니다. 초등학교 국어 교과서의 ‘의좋은 형제’를 생각하면 지금도 마음이 훈훈합니다. 우애 좋은 형제가 가을 수확을 마치고 들판에 볏단으로 노적가리를 만듭니다. 형이 보니 아우네 것이 적어 보입니다. 그날 밤, 어려운 아우 형편을 안 형이 자신의 볏단을 옮겨 놓고, 다음날 밤은 식솔 많은 형을 생각한 아우가 반대로 볏단을 옮기지요. 노적가리가 줄지 않자 형제 다 고개를 갸우뚱합니다. 마침내 볏단을 옮기던 형제가 달빛 아래 마주치면서 얘기는 끝나죠. 그때의 감동으로 습자시간이면 붓글씨를 ‘노적가리 풍년일세’만 썼던 기억이 납니다. 가난해도 마음은 풍년인 사람들이 살던 시절이 있었지요. 엊그제 복권 당첨금이 살인흉기가 된 사건이 났습니다. 우애 좋은 형제가 복권 당첨으로 수억 원의 당첨금을 받아 배분까지는 성공했는데, 그 돈으로 사업을 했던 형이 망하며 사단이 납니다. 돈을 더 요구하는 형과 보증을 선 동생 간에 감정이 충돌하다 동생을 살해하는 일이 벌어진 겁니다. 황금만큼 요괴스러운 것은 없습니다. 돈 앞에 장사가 없다지요. 일본 속담에 ‘담배꽁초와 돈은 쌓일수록 냄새가 난다’고 했습니다. 돈이 사람을 부패하게 만든다는 뜻이겠지요. 사는 것은 전보다 풍족해도 인성은 강퍅해졌습니다. 돈을 둘러싼 이기적 욕망이 칼끝처럼 첨예하게 부딪치는 세상입니다. 개신교의 큰 어른이셨던 목사님이 생전에 우리교회에 오셔서 당신이 붓으로 큼직하게 쓴 ‘의리를 지키자’란 글귀를 강단에 내리고 설교를 하신 적이 있습니다. 세상이 오죽하면 의리를 부탁했을까요. 사람과 사람,관계 사이에 의리가 사라졌다고 탄식하는 소리가 높아만 집니다. 제목을 잊은 영화입니다. 세 친구가 딱 한 번 은행을 털어 깨끗하게 살자며 치밀한 준비를 합니다. 그들의 거사는 성공했고 무사히 안전지대에 도착하자 돈다발을 놓고 환호합니다. 한 친구가 축배를 들자며 나갔다가 술에 독을 타서 옵니다. 욕심이 생긴 거죠. 태연하게 돌아온 친구가 술잔을 건네고 축배를 외칠 때, 팡팡! 술 사온 친구가 고꾸라지고 남은 둘은 낄낄댑니다. 뛰는 놈 위에 나는 놈이 있거든요. 둘은 더 큰소리로 건배를 외치지만 독배를 든 이들도 쓰러집니다. ‘사람에게 의리 빼면 시체’ 라고 말하던 세상이 있었지요. 의리란 뜻은 ‘사람관계에서 마땅히 지켜야 할 도리’로, 여기엔 사람이 갖춰야 할 덕목이 다 녹아져 있죠. 가난은 견뎌내기 어려운 것임을 경험한 세대가 모이면 그래도 그때가 좋았다고 반추합니다. 의리가 사라진 곳에 먹잇감을 놓고 으르렁 대는 동물세계가 어른댑니다. 사람 사이 흐르는 체온 대신 물질을 향한 충혈 된 눈빛만 섬뜩하니 사람은 없고 인간만 남아 보입니다. 다시 사전을 봅니다. ‘인간’이란 단어의 기본설명 뒤로 ‘사람의 모습은 하고 있되 사람답지 못하다는 뜻.’을 추가하고 예문도 달았군요. “저 인간이 한 짓을 생각하면 돌아버리겠어.” 너무도 흔히 듣는 슬픈 말이 됐습니다. 글 이관순(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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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4-08
  • 의리가 사라진 세상
    짓궂은 질문을 해봅니다. ‘사람’과 ‘인간’은 같은 거야? 사전의 설명은 비슷 하지만, 아무래도 “저 인간!” 하면 부정적 이미지가 앞서죠. “저 사람 인품이 좋아”로는 써도 “저 인간 인품이 좋다”고 말하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세상에 사람 같지 않은 인간이 많다보니 용례까지 헷갈립니다. 초등학교 국어 교과서의 ‘의좋은 형제’를 생각하면 지금도 마음이 훈훈합니다. 우애 좋은 형제가 가을 수확을 마치고 들판에 볏단으로 노적가리를 만듭니다. 형이 보니 아우네 것이 적어 보입니다. 그날 밤, 어려운 아우 형편을 안 형이 자신의 볏단을 옮겨 놓고, 다음날 밤은 식솔 많은 형을 생각한 아우가 반대로 볏단을 옮기지요. 노적가리가 줄지 않자 형제 다 고개를 갸우뚱합니다. 마침내 볏단을 옮기던 형제가 달빛 아래 마주치면서 얘기는 끝나죠. 그때의 감동으로 습자시간이면 붓글씨를 ‘노적가리 풍년일세’만 썼던 기억이 납니다. 가난해도 마음은 풍년인 사람들이 살던 시절이 있었지요. 엊그제 복권 당첨금이 살인흉기가 된 사건이 났습니다. 우애 좋은 형제가 복권 당첨으로 수억 원의 당첨금을 받아 배분까지는 성공했는데, 그 돈으로 사업을 했던 형이 망하며 사단이 납니다. 돈을 더 요구하는 형과 보증을 선 동생 간에 감정이 충돌하다 동생을 살해하는 일이 벌어진 겁니다. 황금만큼 요괴스러운 것은 없습니다. 돈 앞에 장사가 없다지요. 일본 속담에 ‘담배꽁초와 돈은 쌓일수록 냄새가 난다’고 했습니다. 돈이 사람을 부패하게 만든다는 뜻이겠지요. 사는 것은 전보다 풍족해도 인성은 강퍅해졌습니다. 돈을 둘러싼 이기적 욕망이 칼끝처럼 첨예하게 부딪치는 세상입니다. 개신교의 큰 어른이셨던 목사님이 생전에 우리교회에 오셔서 당신이 붓으로 큼직하게 쓴 ‘의리를 지키자’란 글귀를 강단에 내리고 설교를 하신 적이 있습니다. 세상이 오죽하면 의리를 부탁했을까요. 사람과 사람,관계 사이에 의리가 사라졌다고 탄식하는 소리가 높아만 집니다. 제목을 잊은 영화입니다. 세 친구가 딱 한 번 은행을 털어 깨끗하게 살자며 치밀한 준비를 합니다. 그들의 거사는 성공했고 무사히 안전지대에 도착하자 돈다발을 놓고 환호합니다. 한 친구가 축배를 들자며 나갔다가 술에 독을 타서 옵니다. 욕심이 생긴 거죠. 태연하게 돌아온 친구가 술잔을 건네고 축배를 외칠 때, 팡팡! 술 사온 친구가 고꾸라지고 남은 둘은 낄낄댑니다. 뛰는 놈 위에 나는 놈이 있거든요. 둘은 더 큰소리로 건배를 외치지만 독배를 든 이들도 쓰러집니다. ‘사람에게 의리 빼면 시체’ 라고 말하던 세상이 있었지요. 의리란 뜻은 ‘사람관계에서 마땅히 지켜야 할 도리’로, 여기엔 사람이 갖춰야 할 덕목이 다 녹아져 있죠. 가난은 견뎌내기 어려운 것임을 경험한 세대가 모이면 그래도 그때가 좋았다고 반추합니다. 의리가 사라진 곳에 먹잇감을 놓고 으르렁 대는 동물세계가 어른댑니다. 사람 사이 흐르는 체온 대신 물질을 향한 충혈 된 눈빛만 섬뜩하니 사람은 없고 인간만 남아 보입니다. 다시 사전을 봅니다. ‘인간’이란 단어의 기본설명 뒤로 ‘사람의 모습은 하고 있되 사람답지 못하다는 뜻.’을 추가하고 예문도 달았군요. “저 인간이 한 짓을 생각하면 돌아버리겠어.” 너무도 흔히 듣는 슬픈 말이 됐습니다. 글 이관순(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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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4-04
  • 슬픔이여 안녕!
    죄 없는 어린 생명이 희생될 때 더없이 고통스럽습니다. 남달리 알레르기 반응을 보이는 것은 일종의 트라우마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여덟 살에 충북 영동의 한 초등학교에 입학했습니다. 여름이 되면 아이들과 몰려서 마을 앞에 흐르는 강에 나갑니다. 겨울엔 썰매를 타고 여름엔 물놀이를 하는 곳. 경부선이 지나가는 철교 아래가 또래들의 여름 아지트지요. 흰줄 하나를 내린 검정 팬티를 입고 상급생들은 수영으로 강을 건너고, 하급생들은 교각 중턱에 걸터앉아 형들을 부럽게 바라보다가 텀벙 강물에 몸을 던집니다. 이날도 철교 아래에 한 떼의 아이들이 모였습니다. 비가 와서 물이 좀 불었지만 누구도 겁내지 않았지요. 그런데 물이 불면 수심에서 물돌이가 이는 걸 모른 게 비극입니다. 형들이 수영을 가르친다고 아이들을 밀어 넣는데 그만 1학년 쌍둥이 동생이 소용돌이에 말려든 겁니다. 아이가 물속에서 허우적이자 더럭 겁이 난 아이들이 달아나기 시작합니다. 나도 겁에 질려 뛰다가 뒤를 돌아봤는데, 발을 구르며 울부짖는 쌍둥이 형의 모습이 보였습니다. 죽은 아이는 내 짝꿍이었습니다. 마을이 발칵 뒤집어지고... 나도 밤마다 경기를 일으켰습니다. 땀을 흘리며 악몽에 시달렸지요. 물에 퉁퉁 부은 친구가 나를 원망했기 때문입니다. 넋이 나간 친구 엄마, 고래고래 소리질러 아들 이름을 부르는 아빠, 나를 원망스레 쳐다보는 쌍둥이 형... 나는 누구 앞에서도 고개를 들 수 없는 죄인이었습니다. 친구를 버리고 도망쳤다는 죄책과 슬픔이 어린 가슴을 쿵쿵 뛰게 했지요. 이로 인해 부모님 걱정도 덩달아 커졌습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아버지가 발령을 받아 새 임지로 이사하면서입니다. 가족이 아버지의 전근을 반색한 것도 나 때문이었죠. 아픈 기억은 상급학교로 진학할수록 많이 옅어졌습니다. 초등학교 동창들과 연락을 끊은 것도 도움이 됐습니다. 결혼 후로는 아예 잊다시피 지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어느날, 우연히도 길에서 쌍둥이 형을 만나면서 덜컥 상처가 뜯기고 말았습니다. 어머니는 우울증을 앓다가 목을 매셨고, 알코올 중독에 빠진 아버지도 암으로 돌아가셨답니다. 한 아이의 죽음이 이렇게 가족을 황폐화 시켰구나. 아물었던 내 상처에도 피가 나는 걸 느꼈습니다. 가족 중 유일한 생존자인 형의 얼굴에 깔린 그늘을 보았습니다. “가족 몫까지 잘 살아야지. 흔들릴 때마다 그렇게 위로해.” 예민한 성격 탓일까, 이후로 이따금 꿈을 꿉니다. 시골에서 놀던 추억들이, 떠난 어린 친구의 모습도 생생하게 포착됩니다. 더 힘들게 하는 건 잊을 만하면 날아드는 이런저런 또래 아이들 희생소식입니다. 줄어드는 인구도 걱정인데 죽었다하면 아이들이냐고 격분도 합니다. 지난 봄, 헝가리에서 유람선 전복으로 6세 소녀가 숨졌다는 비보가 그랬었죠. 외할머니 손을 꼭 잡은 아이의 인양된 모습은 더 애처로웠습니다. 그 아픔이 채 가시기도 전에 또, 엄마가 일곱 살 어린 아이를 데리고 동반자살을 했다는 비보가 들렸습니다. 죽음이 낯설기만 어린 나이에 얼마나 섬뜩했을까, 얼마나 설득했을까, 아니 강요했을까. 그래야 했던 엄마의 심정은? 푸른 6월에는 전 세계인을 슬픔에 잠기게 한 사고가 또 발생했습니다. 멕시코 국경에서 리오그란데 강을 건너 미국으로 밀입국하려던 25세 아빠와 두 살짜리 딸이 익사한 것입니다. 아빠가 아이를 셔츠 안에 넣고 아이는 아빠의 목을 끌어안은 채 떠내려 온 사진을 봤습니다. 물살을 이겨내려 했던 아빠의 다리는 물위에 떠 있고, 아이의 바지는 물먹은 기저귀로 불룩했습니다. 강 건너서 울부짖는 엄마의 얼굴이 오버랩됩니다. 멕시코 영화 ‘신 놈브레’는 중남미사람들이 ‘죽음의 열차’를 올라타고 미국으로 밀입국하려는 과정을 그린 영화입니다. 열차 지붕에 올라타다 떨어져 죽고 힘겹게 탄 뒤는 살해나 강간을 당하기도 합니다. 서글픈 것은 점쟁이가 찾아온 주인공에게 일러주는 말이죠. “넌 미국에 도착할거야. 그런데 안내는 신이 아닌 악마가 하지.”라고. 그 악마는 죽음의 열차를 올라 탄 아빠와 딸을 강물 속에 빠뜨린 것입니다. 스스로를 위로합니다. 어쩌면 아이들이 찾아간 저세상이 험난한 이 세상을 사느니 보다 낫지 않겠냐고. "여긴 낙원이 아냐. 슬퍼하지 말고 편히 쉬어라..." 오래전 읽은 프랑수아 사강이 쓴 ‘슬픔이여 안녕’ 이란 소설 제목이 떠오르는 것은 우연일까요? *글/이관순(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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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4-01
  • 노을처럼 아름답던 식탁의 축제
    사람들이 그렇게도 갈구하는 행복은 어디에 있는 걸까? 골드러시를 따라 미 서부로 향했던 그 많은 사람들은 무엇을 찾았을까. 공자는 제자의 질문에 ‘행복은 없다’고 간단명료하게 답합니다. 공자는 이에다 ‘인생에는 행복을 찾아가는 여정이 있을 뿐’이라고 덧붙였습니다. 공자가 말하고자 한 것은 행복이란 눈이 혹할 보석 같은 게 아니라고 내 나름 유추 해석합니다. 거대한 바위 밑 은밀한 곳이나 화려한 샹들리에 속에 숨겨진 것이 아니고, 우리가 사는 일상의 그 사소한 것들, 그 자체에 있음을 말하려 한 것으로 주석을 답니다. 행복은 더 이상 파랑새도 아니고 신기루도 아닌, 바로 우리의 일상에 흘러갑니다. 매일 우물에서 물을 길어오듯 행복도 일상이란 우물에서 길어 올려야 합니다. 돌아보니 그 많던 내 일상들이 다 허공에 흩어졌습니다. 우주의 어느 시간보다도 값진 것들입니다. 나이가 들면 외롭다고 합니다. 수많았던 그 일상들을 되돌릴 수 없고 함께 할 수도 없다는 것 때문이겠지요. 자식들로 들썩이던 공간은 소산하다 못해 적막감마저 흐릅니다. 전화도 오고 주말이면 찾아주니 반갑기도 하지만 잠시 머물다 떠나고 나면... 이젠 막내마저 직장 따라 지방으로 갔으니 그마저도 용이하지 않습니다. 옛말에 고개가 끄덕여 집니다. “마음이 지척이면 천리가 지척이고, 마음이 멀어지면 지척도 천리”라는 말... 형제간의 소통도 예전 같지 않습니다. 통화를 해도 쉽게 대화거리가 궁해지죠. 전 같으면 자식걱정에, 자랑에, 줄줄이 엮을 테지만 빈 둥지끼리 나눌 것은 그저 서로의 건강 걱정이나 해주면 끝입니다. 존경하는 선배와 만났습니다. 큰 아들은 미국에서 학위를 따고 현지에 눌러 앉은 지 11년째랍니다. 오늘은 손자가 화상통화를 할려나? “아참, 이번 주는 바쁘다 했지? 그래 바빠야지.” 일본에 있는 둘째 딸은 엊그제 통화에서 아이 교육이 힘들다고 넋두리하던데. “타지도 아닌 타국 생활이니 그렇겠지.” 제 둥지를 찾아간 자녀들한테 옛 일상을 더듬자고 할 일은 더욱 아닙니다. 그렇다고 넋두리만 하고 있을 수도 없습니다. 그것이 우리 인생이 거쳐야 할 여정으로 받아들여야 할 테니까요. 늘 아쉽고, 부족하고, 늘 그리움이 많은 게 우리네 인생인 듯합니다. 그래도 아직 남은 인생이 있고 걸어야 할 여정이 있고, 맞이할 일상이 남았으니 희망이란 새 한 마리 날아와 내 어깨에 앉아 주길 기대합니다. 그러다보니 더욱 간절해지는 것이 하늘의 은총입니다. 그분만이 내 남은 여정에 행복의 무늬를 함께 짜 주실 분이 시니까요. 식탁의 빈자리를 채워주시고 내가 입술을 열어 기도하면 응답해 주십니다. 성경을 펴면 말씀이 두런두런 대화를 나누자고 합니다. 예전에 느끼지 못한 행복감이 차오릅니다. 아이들과 즐기던 저녁 식탁의 축제는 흩어져갔지만, 그 분과 함께 하는 식탁의 축제는 노을빛처럼 아름답습니다. 오늘도 사랑과 그리움이 묻은 집에서, 가족의 기억들이 숨 쉬는 공간에서, ‘고뇌는 내가 갈아입는 옷 중 하나이니 나는 상처받은 사람에게 기분이 어떤지 묻지 않는다 나 스스로 그 상처받은 사람이 된다' (월트 휘트먼의 '나의 노래' 중에서 글 이관순(소설가/이관순의손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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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3-28

실시간 기고 기사

  • 아름다운 삶과 죽음
    행복한 삶을 꿈꾸고 아름다운 생의 마무리를 생각하지 않는 사람은 없다. 성공한 사람이나 부와 영예를 안은 사람이라 해서 생의 마무리가 같은 등식으로 보장되지 않는 게 우리 인생이다. ‘누구처럼 살겠다.’ 많은 사람이 모범 답안을 만들어 복기를 하고 계획을 세우지만, 결국은 백이면 백이 다 다른 무늬의 삶을 살고, 각기 다른 죽음을 향해 파동을 일으키며 달려간다. 삶의 아름다운 마무리를 생각하고 이를 실천한 사람 중에 스콧 니어링과 헬렌 니어링을 떠올려 보았다. 부와 명예를 등지고 평생 자연과 더불어 살았던 이들 부부는 노년에 이르러 매일 밤 이런 글귀를 함께 읽었다. 삶은 죽음을 향한 순례다. 탄생의 순간부터 죽음은 당신을 향한 출발을 시작했다. 삶은 죽음을 향한 순례이므로 죽음은 삶보다 더 신비로운 것이다.? 유명한 와튼학파의 경제학 교수였던 스콧 니어링은 반전운동으로 인해 교수직을 파직하고 미국 버몬트 시골에 들어가 농촌생활을 통한 새 인생을 시작했다. 이들 부부는 문명의 발전으로부터 두어 발짝 떨어져 살아가는 삶의 방식을 터득했다. 직접 육체노동을 통해 농사를 짓고 자급자족하는 방법으로 자신들만의 삶을 살은 것이다. 그러면서 현재의 삶을 자족했으며, 죽음을 맞을 때는 스스로 음식을 줄여가며 죽음마저도 초연히 살아낼 수 있는가를 수행자처럼 깊이 관찰하며 살았다. 이들 부부는 56년을 부부로 생활하면서 때로는 동료로, 연인으로, 친구로 사랑했고, 그러면서 삶까지 서로를 닮아갔다. 100세가 되자 남편 스콧이 스스로 곡기를 끊었다. 그는 ‘마음속의 모든 번뇌, 망상을 잠재우며 깨달음을 터득해서 어디에도 얽매이지 않는 자유인으로 살아가는 모습을 수행했다. 그러므로 모든 의혹과 번민을 떨쳐내고 편안한 마음으로 하늘에 모든 걸 맡긴다는 안심입명(安心立命)의 경지에서 죽음을 맞았다. 그는 ‘경제적 은둔생활’에 들어가서 100세까지 ‘나물 먹고 물 마시는 생활’이 아닌 ‘나물과 물’로서 어떻게 자본주의에 대항할 것인가를 몸소 보여주었고, 그러면서 죽음의 순례를 이어갔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최소한의 소비로 최대한의 자유’를 누리는 삶을 실천한 것이다. 아내는 남편이 죽은 후에도 10년간 농장을 지키며 홀로 죽음을 향한 순례의 발걸음을 또박또박 걸어갔다. 단풍나무 시럽을 조금씩 삼키고 주스와 물, 약간의 곡기를 씹으며 충만한 마음으로 남편 스콧처럼 죽음을 마중하려고 했다. 죽음을 부재로 받아들이는 방법은 저마다 다를 것이다. 니어링 부부처럼 부재를 충만한 또 하나의 존재로 받아들임은 순례자로서 그들 부부가 선택한 방법인 셈이다. 한 생애를 살다 갔다는 것은 어떤 식으로든 세상에 존재를 새겼다는 것을 의미한다. 거창하지 않아도 누군가의 마음속에 새겨진 자취는 ‘0’이라는 숫자처럼 부재의 존재감을 남기니까. ‘0’이란 부재는 진짜 없는 게 아니라, 존재가 지나간 흔적이 아닌가. 인간은 무수한 흔적을 새기다가 끝내는 ‘0’으로 돌아가는 존재이다. 죽음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를 이해한다면, 이 세상을 어떻게 살아야 할지 답이 보인다. 무수한 흔적을 새기다가 ‘0’으로 돌아가는 또 하나의 존재로 인식할 수 있다면, 시작과 끝이 존재에서 존재로 이어지는 것임을 알게 될 것이다. 헬렌 니어링이 자전으로 쓴<아름다운 삶, 사랑, 그리고 마무리>를 읽었다. 그녀는 자신의 체험을 바탕으로 인생의 삶과 존재, 죽음이란 또 다른 존재를 이야기했다. 삶의 방식이 똑같을 수 없듯이 이러한 존재 인식은 한 시대를 같이 한 사람으로서 부정도 긍정도 아닌 묘한 갈림길에 생각을 머물게 한다. -소설가 daumcafm 이관순의손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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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5-11
  • 푸른 5월의 시작
    ‘그리움이 많은 사람은 치매에 안 걸리고, 그리움이 없는 사람이 치매에 걸린다’ 는 말은 허투로 나온 것이 아닙니다. 그리움은 때때로 우리 인생에 양약으로 작용하지만, 반대로 독이 되기도 하니까요. 그리움은 기억이고 에너지입니다. 가슴에서 일어나는 오만가지 생각들, 오감 칠정이 빚는 일곱 빛 무지개가 우리를 행복하게 하지만, 아픈 상처를 덧나게 해 슬픔의 극단을 달리게도 합니다. 5월은 풋풋하고 녹슬지 않는 수많은 그리움이 깃든 공간입니다. 부모와 자식이, 형제자매가 사랑과 그리움으로 얽히고설켜 있는 집. 그래서 유독 가정의 달로 존재하는 게 아닐까? 푸른 숨결과 바람결을 타고 그리움이 구시렁대며 댓바람을 일으키는 5월. 떠나간 사람이 보고 싶어서, 그 얼굴 그 미소가 그리워서, 함께 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파아란 하늘 아래 눈을 감습니다 아, 5월 내내 그리움만 먹어도 배고프지 않을 것 같은, 5월 내내 그리움의 갈증만 켜도 외롭지 않을, 그런 시간으로 가득 채워 보세요. 세상의 자식은 저 세상의 부모를 생각하고, 세상의 부모는 저 세상의 자식을 가슴에서 꺼냅니다. 그래서 ‘종천 지모(終天之慕)’라는 말이 나왔을까? ‘세상 끝날 때까지 사모한다’는 말... 내가 사랑하는 사람을 구별하기란 때마다 상황에 따라 변합니다. 그래도 분명한 것은 내가 좋아하고 존경하는 사람들의 공통분모는 찾을 수 없어도,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의 공통된 특징은 쉽게 찾아낼 수 있습니다. 공통점은 딱 하나! 그들은 나를 웃게 만든다는 것. 때로는 마음 아프게 하면서도, 나를 서럽게 만들면서도, 때때로 나를 눈물짓게 하면서도, 결국에는 나로 하여금 웃음 짓게 만드는 사람입니다. 5월은 그런 사람과의 만남과 모임으로 들썩이는 달이면 좋겠다... 신록의 숨결과 바람결로 가득했으면 좋겠다...5월엔 이 땅의 모든 가족이 제집을 찾고 옹기종기 모여 앉아 그리움의 화로에 불을 피워 함께 쬐면 좋겠다... 집집이 함박웃음 팡팡 터지는 날들이면 좋겠다... 코로나 악령은 동구밖 멀리로 내쫓고 푸른 숲으로 일렁이게 하자. -소설가/ daumcafe 이관순의손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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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5-08
  • 사는 것이 다 공부다
    조선 17대 숙종은 어느 왕보다 풍성한 일화를 남겼다. 이날도 암행에 나선 숙종이 어느 오두막집을 지나다 걸음을 멈추었다. 집안에서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고 문밖으로 흘러나왔다. “가세가 어려워 보이는 허름한 집에 웬 웃음이 저리도 많을꼬?" 주인장을 불러서 지나는 나그네라며 물 한 그릇을 청했다. 잠시 열린 문틈으로 방안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할아버지가 새끼를 꼬고 있는데 옆에서 손자들이 짚을 골라 할아버지를 돕고 있었다. 한쪽에선 할머니가 빨래를 밟고 있고 며느리는 옷을 깁는 등, 한눈에 보아도 정겨운 모습이었다. 물그릇을 비운 뒤 노인에게 물었다. “살림도 어려워 보이는데 무슨 좋은 일이 있나 보오. 웃음이 그치질 않는 이유라도 있소?” 물음에 주인이 겸손하게 말했다. “어렵게 살긴 해도 조금씩 빚도 갚아가고 저축도 할 수 있으니 마음이 편해서 절로 웃음이 나온답니다.” 고개를 끄덕이고 궐로 돌아온 임금은 좀처럼 그 말이 이해가 되질 않는 것이었다. 며칠 뒤 숙종은 다시 그 집을 찾아갔다. “빚은 어떤 수단으로 갚고 저축은 어떻게 한단 말이오?” 그러자 주인이 웃음 띤 얼굴로 말해주었다. “부모님을 공양하는 일이 빚을 갚은 것이고, 제가 늙어 의지할 아이들을 키우고 있으니 이게 저축이 아니겠습니까?” 그 말에 임금은 지그시 눈을 감았다. 뜬구름 같은 부귀영화가 행복이 아님을 생각한 것이다. 천국 같은 곳에서 지옥같이 사는 사람이 있고, 여건은 지옥 같아도 천국처럼 살 수 있다는 것을. 삶은 생각하기 나름이다. 그래서 이러한 말과 글들이 나오나 보다. 웃음소리가 나는 집엔 행복이 와서 들여다보고, 고함소리가 나는 집엔 불행이 와서 들여다본다고. 받는 기쁨은 짧아도 주는 기쁨은 긴 여운을 남긴다. 항상 기쁘게 사는 사람은 주는 기쁨을 아는 사람일 것이다. 어떤 이는 가난과 싸우고 어떤 이는 재물과 싸운다 하지만, 가난과 싸워 이긴 사람은 들었아도 재물과 싸워 이겼다는 소리는 들어본 지 오래 되었다. 사람들은 달리는 사람에겐 박수를 치지 않다가도, 넘어졌다 일어나 다시 달리는 사람에겐 박수를 보낸다. 이것이 인생이다. 느낌 없는 책은 읽으나 마나 하고, 깨달음이 없는 종교는 믿으나 마나 하다. 누구든 성인군자가 될 수 있다. 그럼에도 성인군자에 이르지 못하는 건 욕심을 버리지 못했기 때문이다. 진심 없는 사람과는 사귐을 기대하지 말자. 내 희생이 없는 사랑은 마른땅의 풀처럼 허허롭다. 비뚤어진 마음을 바로 잡는 이는 똑똑할지라도, 비뚤어진 마음을 버리지 못하면 두고두고 어리석은 사람으로 남을 수밖에 없다. 먹이가 있는 곳에는 빠짐없이 적이 도사리고 있다. 영광을 찾는 곳에는 반드시 상처가 나는 법이다. 남편이 사랑이 크면 아내의 소망은 안으로 커지게 마련이고, 아내의 사랑이 클수록 남편의 번뇌는 줄어듦이 인생사의 이치이다. 누가 말하길 부부는 두 발을 같이 묶고 달리는 ‘삼각 경주자’라고 비유했다. 그러므로 발을 잘 맞추지 못하면 도중에 넘어지거나 사고가 날 수밖에…. 그래서 삼 주를 관찰하고, 세 달을 사랑하고, 삼 년을 싸운다음, 30년을 서로 참고 이해하며 살아가는 것이 인생사의 또 다른 이치이다. 그런즉 미인은 눈을 즐겁게 해도 아내는 마음을 즐겁게 해주는 사람이고, 남편은 아내의 마음을 지켜주는 사람이다. 이 모든 것이 살면서 배우는 공부가 아닐까. -소설가/ daumcafe 이관순의손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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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5-04
  • 꽃은 가지의 헌신을 알까
    우리말 중에 ‘철이 든다’는 말을 좋아한다. 아름답고 내밀한 속뜻이 깊어서다. 어릴 적 살았던 마을에 일은 않고 술과 유희만 즐기는 아들을 둔 어머니가 늘 하는 말이 있었다. “저 웬수는 죽어서나 철들까!” 혀를 차곤 했었다. “제발 철 좀 나거라.” “도대체 너는 몇 살 먹어야 철날래?” “쟤 말하는 것 봐 철들었네.” 자라면서 참 많이 들었던 말이다. 그때마다 ‘철’이란 귀하고 소중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훗날 ‘철’이 ‘계절’이란 걸 알게 되었다. 철든다는 말은 계절을 따라 밭을 갈고 파종하고 거두어들이는 절기를 알아 일한다는 뜻이란 것을…. 동시에 사리를 옳고 분명하게 판단하는 힘이나, 자기의 나이에 걸맞는 처신을 뜻하는 것임도 알게 되었다. 아버지를 보며 그런 생각을 하며 자랐다. 그런데 어른이 되면 모든 걸 다 알 것으로 생각했는데, 막상 어른이 되고 보니 알지 못하는 게 더 많아지고, 어른이 되면 모든 걸 다 이해할 줄 알았는데 이해할 일이 더 많다는 걸 알게 되었다. 나이 예순을 ‘이순(耳順)’이라고 하지만, 나이가 들수록 인생에 대해 의문만 쌓였다. 죽을 때까지 모르는 게 인생이라 생각하면 언제라야 온전한 철이 들까 엉뚱한 염려를 하기도 한다. 늘어나는 나이테만큼 인생을 깨치고 세상을 보는 눈이 밝지 못함을 느껴서이고, 갈수록 세상이 한 치 앞을 가리지 못할 만큼 혼미하게 느껴지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다 올봄에 소중한 하나를 깨쳤다. 모든 생명들이 살아나던 봄에, 우리의 눈을 현혹하고 입으로 감탄케 한 것은 갓 나온 녹색들이었다. 죽은 줄 알았던 마른 가지에 연녹색 잎들이 나올 때, 하루가 다르게 그 무늬를 키워갈 때, 그 아름답고 신비함이 꽃과는 또 다른 찬탄을 자아내게 했다. 오랜 가뭄 끝에 푸근하게 비가 내린 다음 날, 올해도 우리 동네 장자공원 호숫가에서 늘어진 수양버들 가지에 싱그러운 연녹색 잎들이 층을 더해나는 걸 지켜보았다. 생명의 환희가, 생명의 탈환이 저렇게 눈물겹고 아름답구나 하는 생각으로. 그러다가 갑자기 내 동공이 커지는 것을 느꼈다. 이 나이가 되도록 보이지 않던 것이 비로소 보이는 순간이었다. 싱그러운 연녹색 잎새 사이에 휘어져간 검은 나뭇가지들을 본 것이다. 몸에 전율이 일었다. 혼신을 다해 뿌리로부터 수분과 양분을 끌어올리는 가지들의 땀과 노고에 대해 눈을 뜬 것이다. 겨우내 앙상했던 가지들이 언제 저렇게 튼튼한 피부로 근육을 키웠을까. 강하면서 유연하게 곡선을 이루며 뻗힌 가지 위로 이슬같이 싱그럽고 풋풋한 연녹색 잎들을 피워놓은 것이 너무도 찬란해 보였다. 그 위로 천둥 몇 개, 벼락 몇 개가 스러졌을까... 가지의 아픔과 상처가 생각났다. 진실로 이봄을 빛나게 한 것은 찬란한 꽃들과 연녹색 잎들을 마른가지에 피워낸 가지의 헌신임을 알게 되었다. 꽃과 잎들이 눈을 즐겁게 한 무대 위 연기자라면, 가지는 그들을 빛나게 한 숨은 연출자인 셈이다. 그래서 ‘황금종려상’은 배우가 아닌 감독에게 돌아가는 게 아닐까? 다시 가지들을 바라보았다. 저 검은 가지와 연녹색 잎들이 만든 조화의 극치를 보았다. 나무의 정령이 가지마다 꿈틀대고, 검정과 연녹이 저렇게 아름답게 조화를 이룬 모습을 넋을 놓고 지켜보았다. 나무의 혈관처럼 구석구석으로 뻗어나간 가지의 모습은 그 자체가 경이로운 군무(群舞)였다. 나뭇가지의 검게 그을린 피부와 쭉 쭉 뻗어나간 탄력 있는 몸매가 어쩌면 저렇게 힘차고 아름다울까. 가지마다 자르르 윤기가 흐르는 울퉁불퉁한 근육들이 활처럼 휘고 꺾이며 흘러내리면서 바람결에 흔들리며 연녹색 잎들과 절묘한 춤사위를 밟고 있는 것이다. 산수유, 매화, 벚꽃 같이 한 철 짧게 피었다 지는 꽃들은 가지의 헌신을 모른다. 비바람으로부터, 차가운 세한의 한기로부터 꽃을 보전하려는 가지의 애틋한 헌신을 한철 꽃이 알 리가 없다. 특히 올봄처럼 우르르 떼 지어 몰려왔다 황망하게 떠난 꽃들은 더더욱 그렇다. 입고 나갈 옷이나 탐하는 철부지 자식들 같이 그저 상춘객들과 눈이나 맞추려고 몸치장에나 분주할 뿐이다. 마치 윤중로에 흐드러지게 폈다 진 벚꽃의 화사함처럼. 자식도 꽃처럼 부모의 시정을 모르긴 마찬가지다. 별이 저 혼자 빛나는 것이 아님에도, 광대무변한 배경을 펼쳐준 밤하늘의 고마움을 까마득히 잊고 지낸다. 세상의 모든 붙박이별, 모든 떠돌이별, 모든 꼬리별로 빛나기까지 꽃은 가지의 헌신에 눈감고, 별은 밤하늘의 노고를 모르고, 자식은 부모의 희생을 까마득히 잊은 채 산다. 그래서 자식들을 가리켜 철이 없다고 한다. 하지만 부모는 한사코 “아직 어려서”라는 말로 눈을 감아준다. -소설가 daumcafe 이관순의 손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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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5-01
  • 이 봄의 스승은 나무
    “나무는 희망이 있나니 찍힐지라도 다시 움이 나서 연한 가지가 끊이지 아니하며, 그 뿌리가 땅에서 늙고 줄기가 흙에서 죽을지라도 물 기운에 움이 돋고 가지가 뻗어서...” (욥기 14장) 구약성서의 욥기는 인문학의 보고로도 꼽힌다. ‘고난을 인내하고, 견디어, 소망에 이른다’라는 주제가 우리 인생을 향하고 있기 때문이다. 지난여름 아차산을 오르다가 베어진 고목 밑동에서 새순이 돋은 것을 경이롭게 바라보았다. 나무의 윗동이 잘려나간 그루터기가 새 움을 틔운 것이다. 죽은 나무라 일컫는 몸통으로 새 순을 내고 잎을 키우다니. 나무는 꺾이고 잘려도 죽지 않는다는 것을 공부했다. 대부분의 사람은 70을 넘기면 세상을 다 산 것처럼 행동한다. 마땅히 할 일이 없으니 어떻게 하면 하루를 보낼까 궁리를 하는데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게 된다. 곳곳에서 삶이 시들해 보이는 것도 이때다. 시듦에는 정적이 있을 뿐 생기가 없다. 생각도 대화도 앞으로 못 나가고 뒤를 맴도는 일상이 되다 보면 그곳에 생기가 갈해진다. 사람이 살아가는 힘은 관성의 법칙에서 나온다. 반관성은 노년의 삶에 생기를 빼앗고 생각을 무미건조하게 한다. 생각이 앞으로 나가지 못하고, 지난 기억이나 되돌리는 생활로 이어가다 보면, 삶은 소모적일 수밖에 없게 된다. 나이가 들수록 어떻게 하면 관성의 법칙으로 돌아갈까를 생각하는 것이 건강에 좋고 삶에 활력을 찾아준다. 작은 일도 만들면 앞으로 나갈 수 있고, 어제가 아닌 내일을 말할 수 있다. 끝날 때까지 끝난 것이 아닌 것처럼, 움직일 수 있는 힘이 남아 있는 한 관성의 법칙으로 돌아가야 한다. 그날 나무가 스승이란 것을 깨달았다. 나무를 자른 둥근 면에 보이는 둥근 무늬의 나이테를 보면서…. 1년에 하나씩 생기는 나무의 나이가 나이테이다. 여름과 겨울이 분명한 지방에서 뚜렷하고, 열대우림의 나무엔 나이테가 생기지 않는다. 여름의 폭양과 세한의 겨울을 견딘 인고의 나무일수록 보다 뚜렷해지는 둥근 나이테를 생성할 수 있다. 우리는 이를 연륜(年輪)이라 쓰고 읽는다. 혹한의 겨울을 보낸 나무에게 주어지는 상급인 셈이다. 우리가 누군가를 가리켜 ‘연륜이 묻어난다’고 말할 때가 있다. 한 우물을 깊이 판 장인들, 예술가들, 전문인들에게 붙이는 말이다. 적어도 한 분야에 10년 이상을 몰입한 사람들의 어깨에 붙여주는 견장이다. 연륜이란 그들이 겪어온 성장과 고난의 세월이 나이테처럼 둥글어져 모나지 않은 상태를 뜻한다. 수천 년의 비바람과 물결에 깎이어 둥글어진 강가의 몽돌처럼…. 한글이 아름답다고 하는 데는 영어처럼 ‘주어+동사+목적어’의 어순이 아니라 ‘주어+목적어+동사’로 쓰여 표현이 더 풍성해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이를 말할 때 여러 동사가 동원된다. 나이라는 명사 뒤에 오는 동사를 ‘들다’ ‘먹다’로 쓰는데, 둘 다 밖에서 안으로 향한 생명의 말법이다. 누구도 삶에서 피할 수 없는 것이 나이와 죽음이다. 뒤집어 생각하면 삶은 점자책을 읽듯 결국 ‘죽어가는’ 문제를 짚어가는 것이다. 나이가 들수록 바람이 있다면 잘 늙고, 잘 시드는 일이다. 그렇게 늙고 싶은 바람을 키워주는 문장들이 있다. “나무는 나이를 겉으로 내색하지 않고도 어른이며, 아직 어려도 그대로 푸른 희망이며, 나이에 관한 한 나무에게 배우기로 했다”라고 표현한 문정희 시인의 ‘나무학교’가 마음에 문신을 그려준다. 나이만 먹는다고 다 어른이 되는 건 아니다. 끊임없이 성찰하는 사람만이 진정한 어른이 될 수 있다. 나무가 밖으로 드러내지 않고도 어른인 것처럼 우리 또한 내색하지 않아도 어른이어야 하고, 어른스러워야 한다. 흰머리와 얼굴의 주름이 나이 듦의 지혜를 보여주는 것처럼 겉으로만 먹은 나이는 나이테를 만들지 못한다. 내 경험이 너무 강한 사람은 누구의 좋은 말도 잘 안 들리는 법이다. 나이가 들더라도 푸른 희망을 놓아서는 안 된다. 죽을 때까지 죽은 것이 아닌 아차산 고목처럼, 봄날에 살아나는 나무처럼, 새눈을 틔워야 한다. 생명은 생을 지켜내는 것이고 '간절함'을 지켜내는 것이다. 사람에게 간절함이 빠져나가면 그 순간부터 늙기 시작한다. 이봄에 나무는 나이에 관한 한 스승이다. -소설가 daum cafe 이관순의 손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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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4-27
  • 틈과 틈사이의 온기
    사람이 복잡해 보이는 것 같아도 단순한 동물입니다. 그래서 반려동물처럼 어려서 길들이기 나름입니다. 한 번 길들여지면 평생에 걸쳐작용하니까요. 그것을 우리는 길들였다 말하지 않고 습관이라고 부를뿐입니다. 흔히 인생을 모순 투성이라고 말하는데, 습관도 그중 하나입니다.생일을 기해서 금연을 작심한 사람이 있다고 해봐요. 가족과 자신의 건강을 위해 독하게 마음을 다잡지만, 한 달이 못가 손이 갑니다. ‘작심삼일’이란 이럴 때 쓰는, 두루 경험한 사실입니다. 운동하기, 부모님 찾아뵙기, 외국어 공부 등 좋은 습관을 들이려면 고비가 많아요. 쉽게 꾀가 나고 변명도 많지만, 나쁜 것은 한두 번으로도 족합니다. 도박, 마약, 사행성 오락 같은 것은 한 번 발을 담그면 빠져나오기가 무척 힘들다고 합니다. ‘바늘 도둑이 소도둑 된다’ 는 말이 이러한 원리를 꿰뚫어 보는 것 같아요. 잘 훈련되지 않은 사람은 시시비비보다 주먹이 앞서고, 이성보다 순간감정에 매몰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내가 보는 것, 느끼는 것, 알고 있는 그것이 절대 진리고 진실이 아님에도 말입니다. 같은 사안을 두고 생각하며 느끼고 보는 관점이 다름이 늘 문제입니다. 그래서 항상 내 얘기가 맞는다고 주장하는 사람, 큰소리치고 장담하는 사람일수록 대부분 사람 관계에서 후회를 남깁니다. 말하기도 게임이고 전략입니다. 상대가 큰 소리로 해대도 나긋나긋하게 말하는 사람, 다소곳 듣기부터 하는 사람에게 패하기 십상입니다. 한 마디를 해도 정곡을 찌르고 나오니까요. 그래서 말하기도 습관이라는 전략적 사고가 필요합니다. 습관 중에 가장 고급스런 것이 ‘역지사지(易地思之)’입니다. 내 주장에 앞서 문제를 뒤집어 생각해 보는 사람이죠. 내 중심이 아닌, 상대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면 내가 행할 언행이 보이기 때문입니다. 세상에는 비슷해 보여도 서로 다른 것이 많습니다. ‘출가(出家)’와 ‘가출(家出)’은 한자로 보면 글자 순서만 바뀌었을 뿐, 똑 같이 집을 나간다는 점에서 같습니다. 하지만 글 뜻은 전혀 다르듯, 말이란 생각 없이 쓰면 오해를 부릅니다. 왜 출가는 의미있어 보이고 가출은 어리석게 보일까. 이는 목적이 있고 없다의 차이뿐예요. 뚜렷한 목적을 가지고 집을 떠나면 출가가 되고, 뜻도 없이 현실도피를 위해 집을 나서면 가출이 됩니다. 다이아몬드와 큐빅은 비슷하게 생겨 얼른 보기엔 식별이 쉽지 않으나 가격은 하늘과 땅 차이죠. 멧돼지만 해도 그렇습니다. 야행성 동물로 알고 있지만 원래는 낮에 활동하고 밤에 자는 동물입니다. 그런데 주거지역이 확대되면서 낮에는 사람을 피해 잠자고 밤에 먹이를 찾아 나선답니다. 멧돼지를 만나면 지그재그로 뛰라고 알려주는 사람이 있는데 큰일 날 소립니다. 멧돼지가 위협적인 것은 속도니까요. 장단거리에 다 능하여 100m를 10초에 주파하고, 지구력도 강해 1시간에 45km를 달립니다. 마라톤 기록을 절반으로 줄일 수 있는 속도지요. 속도가 붙으면 높이 1m의 장애물도 거뜬히 넘고, 위험이 생기면 재빨리 방향 전환하는 능력까지 우수합니다. 다른 포유류처럼 후각도 뛰어납니다. 먹이를 찾거나 포식자를 피하기 위함이죠. 하지만 후각은 같은 냄새를 오래 맡으면 둔해지는 약점이 있습니다. 그래서 숨을 짧게 끊어 쉬면서 최적의 후각상태를 유지하려고 하죠. 개나 돼지가 코를 씰룩이며 킁킁대는 건 다 이런 이유 때문입니다. 세상에는 모르는 것이 훨씬 많습니다. 오지랖 넓게 나서는 것보다 먼저 상대편 얘기를 잘 듣는 것이 지혜입니다. 남의 말을 경청하는 은자(隱者)형 인간으로, 늘 사안을 뒤집어 생각하는 사고로, 말하는 습관을 들이세요. 말이 사람의 품격을 높입니다. -소설가/ daum cafe 이관순의 손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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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4-24
  • 남자가 남긴 토막말
    “어이” “이봐” “여기” 결혼을 앞둔 여자가 남자에게 한 가지 꼭 지켜줄 것이 있다고 했습니다. 아내를 이런 식으로 부르지 않겠다고 약속해 달라는 것입니다. 어떤 경우도 입에 올려서는 안 될 막말이라면서. 그동안 남자가 아내를 부르는 수많은 입을 보았는데 가장 혐오스럽고 비인격적인 호칭이라고 했습니다. ‘부부관계를 지키는 마지노 선’이라며 처음부터 금을 딱 긋고, 대신 이름을 불러달라고 했어요. 가장 가까운 남편으로부터 한 사람의 인격체로 존중받고 싶다는 것이 여자의 생각이었습니다. 그렇지 않고 어떻게 부부관계를 말할 수 있고 존중할 수 있겠느냐며 자존감 지닌 삶을 이야기했습니다. 약속대로 남자는 결혼 30년이 지날 때까지 그 약속을 잘 지켰습니다. 살다 보면 화가 치솟고 감정이 욱할 때도 있었겠지만, 그래도 남자는 말로 여자의 마음을 상하게 하지 않았습니다. 시댁 어른들 앞에서도 매번 이름 뒤에 ‘씨’를 붙였고 존댓말을 썼어요. 당시로는 흔치 않은 말법입니다. 그러던 남자가 딱 한 번 실수를 범하고 만 건, IMF 환란 때 사업이 부도에 몰리는 긴박한 상황에서였죠. 이 고비만 넘기면 회생이 가능할 텐데, 처가가 끝까지 외면하고 보증을 피하자 한 순간 감정이 폭발하며 나온 소리입니다. 거친 막말이 나오더니 아내를 밀쳐 넘어지게 했습니다. 한 순간 넋이 나간 남자가 정신을 차리고 주어 담으려 했지만 이미 쏟은 물이었지요. 그날이 하필 아내 생일과 겹쳤습니다. 잊었다가도 해마다 그날이 오면 생각나는 아픈 기억…. 남자 마음이 편할 리 없습니다. 계절이 찾아오듯 때만 되면 회한으로 떠오르는 토막말. 딱지가 앉기도 전에 다시 생채기를 내는 일이 반복됩니다. 사업한다는 남자한테 딸을 주고 싶지 않다던 장인어른의 말도 떠오릅니다. 말이 좋아 사업가지 호강은커녕 늘 넉넉하지 않은 살림으로 마음고생을 시켰고, 급전이 필요할 때면 처가로, 친구로, 돈 심부름도 다녔습니다. 생각은 심연에 가라앉은 부끄러움까지 휘저어 올리죠. 남편으로, 아버지로, 살뜰히 살펴 준 것도 없는데, 내색 없이 살림에 충실해준 아내가 고맙고, 알아서 잘 커서 스스로 짝을 만나 제 앞길을 찾아간 두 아들 딸이 대견스럽고 감사했습니다. 결혼 45주년이 되던 그해 봄. 부부는 딸이 결혼기념일이라고 마련해준 호텔에서 저녁 식사를 마치고 여느 날처럼 집에 돌아와 잠을 잤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마지막 날이 돼버렸습니다. 새벽녘, 잠을 자던 남자가 흉통을 호소하며 온몸이 땀에 젖을 때, 멀리서 구급차 소리가 들렸습니다. 협심증을 앓아온 남자는 곧바로 응급실로 실려 갔지만, 남자의 명줄은 거기까지였습니다. 창졸간에 삼일장이 치러졌습니다. 삼우제를 마친 아내가 남편의 유품을 정리하다가 책상 서랍 안쪽 밑에 깔려 있는 흰 봉투 하나를 찾았어요. 죽음을 예견한 걸까. 꼼꼼한 남편이 미리 써둔 유서였어요. 남자의 체온이 실린 육필은 첫 문장을 참회로 시작했습니다. “효은 씨. 약속을 못 지켜 미안합니다. 그것도 당신 생일에, 홧김에 쏟은 해서는 안 될 나의 막말에 용서를 구합니다. 평생 후회로 안고 살았습니다...” 두 번째 단락에는 어려서 죽은 큰 아들의 회한을 담았습니다. 네 살배기 아들 준이를 폐렴으로 잃고 한강에 나가 가루를 뿌리던 날, 그 밤의 아픈 기억을 말했습니다. 그 후로 한강 근처를 나가지 못하고 시린 가슴으로 몇 년을 방황할 때, 나를 보고 모두가 잊으라고 했었지요, 자식은 가슴에 묻고 그만 잊으라 했을 때... 당신만은 내게 그러지 않았습니다. “잊으려고 애쓰지 말아요. 그건 너무 가혹해요. 그다음 생기는 빈공간은 어쩌려고요. 그 무엇도 대신해 채울 수 없어요.” 그러니 우리 죽을 때까지 옹이처럼 가슴에 박고 잊지 말자고 했습니다. 상처는 보듬고 싸매야지 뜯어내면 덧나게 마련이고, 시련은 견디고 이겨내는 것이라고 나를 다독일 때, 캄캄한 밤바다에서 한 점 빛으로 흔들리는 등대를 보는 심정이었습니다. 당신의 말이 맞았습니다. 시련은 운명이고, 운명은 떨치고 이겨낼 때 소망이 생긴다는 사실을. 의사가 말했지만 차마 당신에겐 전하지 못하고 당신 옆에서 눈을 감고 싶었습니다. 당신이 이 글을 읽게 된다면, 이젠 내가 당신께 당부할 차례입니다. 효은 씨, 끝이 정해진 책처럼 내 생의 길이는 여기까지입니다. 이별의 아픔이 크겠지만 마지막 책장을 넘길 때까지 삶의 시선을 꼿꼿하게 지켜주길 원해요. 앞서 가서 자리 잡고 그날의 당신을 기다리렵니다 용서해줘 감사하고, 사랑해줘 고맙고, 먼저 떠나 미안해요... -소설가/ daum cafe 이관순의 손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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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4-20
  • 로마로 가는 길
    한 때 그런 시대가 있었다.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 찬란했던 로마제국의 영광을 한마디로 응축한 문장이다. 달리 표현하면 영토의 야욕이 일으킨 크고 작은 전쟁으로 닦은 ‘피의 길’이기도 했다. 로마제국은 잘 닦인 도로를 통해 군대를 전쟁터나 분쟁지로 신속하게 파병할 수 있었다. 그러면서 분출하는 내분과 갈등을 다스리고, 다른 한쪽으로는 확장을 지속하여 자리를 만들어 권력을 나누는 암투와 분쟁의 세월을 이어갔다. 로마군은 제국을 상징한 휘장과 문장을 그린 군기(旗), 그 자체로 위엄이었다. 특히 로마 시민의 환호와 존경을 한몸에 받으며 금마차를 타고 로마로 입성하는 개선장군의 행렬은 로마의 상징처럼 장쾌했다. 로마의 이야기 중에는 장군이나 지휘관의 무용담 같은 하드한 것도 있지만, 피바람 속에 깔리는 인간적인 고뇌, 우정, 사랑과 같은 소프트한 스토리도 곳곳에 자리잡고 있다. 이야기는 한 마을에서 시작되었다. 로마제국의 고위급 지휘관이 길을 가다가 날이 저물어 선술집이 딸린 여관에서 하룻밤을 묵게 되었다. 부관이 주인에게 귀한 분이시니 마을에서 가장 예쁜 여자를 불러달라고 주문했다. 당시에는 흔히 있는 일이었다. 사람 보는 눈이 있었던 주인은 지휘관의 기골을 보고 생각이 동했다. 자신의 외동딸을 생각한 것이다. 딸을 불러 시중을 잘 들라고 당부했다. 다음날, 지휘관이 떠나면서 여주인에게 기념으로 자신의 망토를 선물로 주었다. 하룻밤 인연으로 딸은 임신을 했고 열달이 지나 아들을 낳았다. 그로부터 세월이 흐르는 동안 아이는 아버지의 얼굴도 모른 채 자라고 있었다. 길목에 위치하고 있는 여관에는 심심찮게 군인들이 들려 요기를 하거나 잠을 자고 갔다. 하루는 로마군 장교가 이곳에 들러 식사를 했다. 식사가 끝날 무렵 밖에서 요란한 말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장교가 식사를 멈추고 뛰어 나가보니 자신의 말을 여관집 아들 녀석이 약을 올리며 깔깔대고 있는 것이었다. 순간적으로 화가 머리끝까지 뻗힌 장교가 소리를 지르며 칼을 빼들었다. 금방 아이를 내려칠 것 같은 기세였다. 이를 보고 달려나온 아이 엄마가 이것을 드릴테니 살려달라고 애원했다. 그녀의 손에는 오래 전 하룻밤을 지내고 가면서 선물로 준 지휘관의 망토가 들려 있었다. “제게는 이 아이만큼 귀한 것이 없습니다. 자비를 베풀어 주세요.” 그런데 어이된 일인가. 살기가 등등했던 장교의 낯빛이 그녀가 내민 망토에 갑자기 놀라움으로 바뀐 것이다. 아이 엄마가 내민 망토가 자신이 속한 군단의 사령관 것이기 때문이었다. 이 이야기는 곧바로 사령관에게 전해졌고, 얼마 지나지 않아 아버지의 부름을 받은 아들은 어머니와 함께 꿈에도 생각지 못한 로마로 가게 되었다. 사회적 약자였던 선술집 딸 모자는 일약 로마군령을 지휘하는 사령관 아내가 되고, 사령관의 총애를 받는 아들 신분을 누리게 되었다. 그러나 꿈 같은 세월은 길지 않았다. 사령관은 서방(서로마)의 부황제(副帝)로 임명이 되어 영국으로 떠나게 되었다. 운명은 이들 가족을 갈라놓았다. 새 임지를 받아 로마를 떠날 때는 아들을 볼모로 맡겨야 하고, 황제의 딸과 결혼해 보내는 관례가 있었기 때문이다. 배신을 막는 일종의 안전 장치인 셈이었다. 한순간 아내는 버려지고, 아들은 볼모로 집히는 신세가 되었다. 모자의 삶은 행불행의 롤러코스터를 또 한 번 타게 된 것이다. 하지만 모자는 지혜로웠다. 현실에 좌절하지 않고 재회의 기회가 올 것이라는 생각을 버리지 않았다. 당시 로마제국은 권력의 암투가 계속되었다. 급기야 동·서방의 두 황제가 동시 퇴진하는 상황을 맞으면서 아버지가 서방의 황제 자리에 오르게 되었다. 기회를 엿보던 아들은 새로 등극한 동방 황제에게 아버지 곁으로 가게 해줄 것을 청하였고, 황제는 이를 승인해주었다. 이 때의 선택이 얼마나 탁월한 것이 될지는 누구도 예측하지 못했다. 탈출에 성공한 아들 모자는 영국으로 아버지를 찾아가 다시 행복을 되찾게 되었다. 영특했던 아들은 아버지를 도와 크고 작은 전투에 참가하면서 공을 쌓았다. 아버지와 함께한 지 1년여가 되었을 때, 돌연 황제인 아버지가 병사하면서 서방은 대혼란에 빠졌다. 왕위를 놓고 내란이 일어났다. 그때까지 1년여 동안 아버지 밑에서 전투에 참가하면서 장병들의 마음을 사로잡은 아들은 황제 휘하의 군대가 그를 지지하면서 서로마의 새 황제로 추대되었다. “콘스탄티누스를 아우구스투스(로마 최초의 황제)로!” 정변은 계속일어났고 마침내 하나의 로마를 향한 동방과 서방의 전쟁이 벌어졌다. 동·서로마 가 일전을 벌여 승리한 황제가 전 로마의 패권을 쥐는 역사적 순간을 맞게 된 것이다. 이기면 모든 것을 독식하고 지면 다 죽는 최후의 일전을 앞두고, 서방 황제가 간절한 마음으로 하늘을 바라보았다. 역사는 이를 환시(幻視)라고 적고 있지만, 황제의 명징한 눈은 하늘에 떠오른 문장 ‘XP’(희랍어로 ‘키로’)를 놓치지 않았다. 동시에 하늘의 소리를 들었다. “이 표시를 새기고 승리하라.” 황제는 눈에 보인 문장대로 전군에 깃발을 만들게 하고 이를 들고 전쟁을 벌여 마침내 승리를 거두었다 . 로마의 1인 통치자, 새 황제가 탄생하는 순간을 맞은 것이다. 역사의 주인공은 기독교를 공인한 콘스탄티누스 황제였다. 망토를 선물했던 아버지는 콘스탄티우스, 어머니는 선술집 딸인 헬레나였다. 신분의 격차가 큰 이들이 여관에서 만나고, 하룻밤을 보내고, 선물로 주고 간 망토를 간직했다가 남편과 아버지를 만나는 과정이 너무도 운명적이고 드라마틱했다. 공자의 논어에 ‘오도일이관지(吾道一以貫之)’라는 말이 있다. 사람이 일생을 살고 돌아 볼 때, ‘걸어온 길이 하나로 꿰어져 있다’라고 정리돼야 한다는 뜻이다. ‘로마인 이야기’를 쓴 시오노 나나미는 본책 13권에 콘스탄티누스의 업적을 이렇게 적고 있다. “...콘스탄티누스가 존재하지 않았다면 기독교는 교리 해석을 둘러싸고 거듭되는 논쟁과 그 결과 분열로 다른 수많은 고대 종교와 마찬가지로 사라져 버렸을 것이다.”라고. -소설가/ daumcafe 이관순의 손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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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4-17
  • 파타고니아의 처음처럼
    ‘사악해지지 말자(do'nt be evill)’. 구글이 창업되면서 내걸었던 모토이다. 스탠퍼드대 대학원생이던 세르게이 브린과 래리 페이지 두 사람은 1998년 구글을 창업하면서 사악해 지지 않기로 두 손을 모았다. 세 단어로 구성된 이 명징한 문장에 많은 사람들이 감명을 받았다. ‘정직하자.’ ‘신의를 지키자.’ ‘고객이 왕이다.’ 그동안 귀 아프게 들어온 기업들의 구호와 달리, ‘사악하다’라는 낯선 단어가 주는 느낌은 신선함과 진정성이었다. 하지만 회사가 성장하면서 구글이 보여준 행보는 참신한 다짐과는 동떨어진 모습을 보였다. 버진아일랜드 같은 조세 피난처에 페이퍼컴퍼니를 세우고 이익을 몰아주는 세금 회피 수법을 쓰는가 하면, 안드로이드 운영체제(OS)를 무기로 스마트폰 제조사나 앱 개발자에게 갑질을 일삼아 비난을 받았다. 맞춤형 광고를 위해 인터넷 사용자들의 검색 또는 개인정보를 수집하는 행태도 많은 사람들의 원성을 샀다. 달콤한 약속이나 거창한 대의명분을 내세우는 기업이 어디 구글뿐일까. 많은 기업이 인류 번영, 공동체 발전, 사회 공헌, 환경 보호 등의 수호자를 자처하지만, 알고 보니 이익을 위한 하나의 위장 전술 사례로 나타나 얼굴을 찡그리게 했다. 이런 일을 자주 접하다 보면 처음엔 기업의 선의를 믿었던 사람들조차 착한 척하는 기업들에 대해 의심부터 품게 만든다. 우리 사회에 퍼져 있는 반기업 정서의 바탕에는 ‘척’하는 기업의 이중적 행태가 깔려 있다. 이러한 자본주의 시장 풍토에 가끔은 천둥소리를 내는 기업 기업인이 있어 위안을 준다. 2022년 9월 미국에서 세상을 깜짝 놀라게 한 소식 하나가 날아왔다. 아웃도어의 구찌 브랜드로 알려진 ‘파타고니아’의 창업주 이본 쉬나드 회장이 회사를 통째로 환경단체와 관련 비영리 단체에 기증했다고 발표한 것이다. 자신과 가족이 보유한 파타고니아 지분(비상장) 100%, 시장가치 30억 달러(약 4조 2000억 원)를 몽땅 지구 환경을 위해 헌납한 것이다. 더하여 연평균 1억 달러 규모의 회사 수익도 전액 환경보호에 쓰겠다고 밝혔다. 그동안 자산가나 재벌들이 재산의 일부를 기부하거나 공공 재단을 설립해 사회 환원에 나선 예는 있어도, 회사를 통째로 헌납한 사례는 찾기 힘들다. 파타고니아는 1973년 설립 후 50년간 일반의 상식에 반하는 일들을 숱하게 실천했다. 환경에 해가 된다고 판단되면 회사의 주력 제품이라도 생산을 포기했고, 유기농 재활용 원료를 고집하느라 단가가 높아지는 것도 개의치 않았다. 납품가를 후려쳐 낮추거나, 기업 및 제품 홍보에 막대한 예산을 쏟아붓는 여느 기업들과는 다른 모습을 보였다. 놀라운 건 이런 반(反) 상식적 경영을 하고도 큰 위기 없이 성장세를 50년째 이어가고 있다는 점이다. 전 세계 아웃도어 시장이 정체된 가운데도 파타고니아는 연평균 10% 이상 넘게 성장했다. 세계 금융위기 전후의 매출액 추이를 보면 확연하다. 2005년 2억 4200만 달러이던 매출이 7년 만에 5억 4000만 달러로 증가했다. 이윤에 집착하지 않아 보이는 이 회사가 어떻게 돈을 벌고 성장할 수 있었을까? 중심에 ‘원칙’이 돈보다 앞선다는 경영철학이 있었다. “우리는 지구를 살리려고 사업한다”라는 쉬나드의 창업이념을 따른 것이다. 그는 기업가이기 전에 자연주의자였다. 요즘 불고 있는 ESG(환경. 사회. 지배구조) 열풍에 기업들이 친환경 경영을 앞세워 ‘착한 기업’ 행세를 하지만, 파타고니아는 이런 기업들과는 다른 길을 걸었다. 쉬나드는 자신의 이름을 딴 등산 장비 업체로 사업을 시작했다. 그는 10대부터 암벽 등반을 시작한 소문난 암벽 등반가로 알려져 있다. 그는 ‘자연과 함께 한다’라는 창립 원칙을 뚝심 있게 지켜냈다. 환경과 비즈니스 가치가 충돌할 때는 항상 환경을 먼저 생각하며, 친환경 아웃도어의 ‘50년 착한 경영’을 실천했다. 그러면서 소비자에게 ‘지구 수호’라는 기업의 진심을 전했다. 이러한 진심은 비싸도 소비자의 지갑을 열게 했다. 회사는 지구 수호의 진심과 가성비로 보답했다. 선한 기업은 많지만, 모두 파타고니아처럼 강력한 브랜드 파워로 높은 성장세를 유지하며 글로벌 기업과 경쟁하는 기업은 흔치 않을 것이다. 이쯤은 돼야 ‘착한 기업’이라는 명패를 달아줄 수 있지 않을까? 4조 원짜리 회사를 미련 없이 ‘환경’에 기부한 파타고니아 사례는 기업이 선한 의도와 행동으로 세상을 바꾸는 것이 가능하다는 희망을 던져 주었다. 쉬나드 회장은 뉴욕 타임스와의 인터뷰에서 “내 삶이 올바르게 정리할 수 있게 되어 안도감이 든다”라는 말로 진심을 전했다. 그에게 회사는 목표가 아니라 가치를 실현하는 수단이었다. 자본주의 사회에 신선한 충격을 준 쉬나드 회장의 기부 소식에 ‘참 멋진 인생을 산다’는 생각을 넘어 “참 아름다운 인생을 산다”라는 존귀한 마음이 들었다. 한명회의 말처럼 그는 시작과 끝이 변하지 않는 종신여시(終愼如始)의 본을 삶으로 보여준 사람이다. 시작을 게을리하는 사람도 드물지만 끝을 잘 마무리하는 사람도 드물다. 우리 속담에 ‘시작이 반이다’란 말이 있다. 어리석은 자일수록 결단을 많이 한다. 결단을 많이 한다는 말은 시작을 그만큼 많이 한다는 뜻... 일등과 꼴찌의 차이는 시작에 있는 것이 아니라 끝에 있다. 사람들은 시작을 매우 중시하는 경향이 있다. 물론 그만큼 어렵고 힘든 결단이 필요하기에, 어찌 보면 맞는 말이나 시작보다는 더 끝이 중요하다. 쉬나드의 처음처럼…. 한 친구는 쉬나드 회장이 기업 하는 사람들에게 “장사는 이렇게 하는 거야”라고 말하는 것 같다고 했지만, 나에겐 “인생은 이렇게 사는 거야”로 들렸다. -소설가/ daum cafe 이관순의 손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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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4-13
  • 벚꽃 엔딩과 이등병 편지
    봄이 성급한 매스컴의 기상나팔로 잠을 깨더니 어느새 절기는 청명을 돌아 곡우로 향합니다. 이정표가 바뀌는 이맘 때면 생명의 외경함이 생살처럼 차오르는 섬진강 꽃길이 떠오릅니다. 강가엔 우렁이가 알을 까고 마른 갈대 위로 개개 개~ 우는 개개비가 청아한 울음을 높일 때입니다. 강을 찾아와 주인이 되고 둥지를 틀어 사랑을 나누는, 곳곳이 생명 에너지로 넘쳐납니다. 물고기와 새들하며 곤충들까지, 섬진강 갈대숲은 무수한 생명체에게 번식처가 되고 은신처가 되는 곳. 봄은 생명의 태반입니다. 한 해를 살아도 혼신을 다하는 생명의 탈환 모습은 늘 경이롭습니다. 암록빛 섬진강을 품은 산과 들엔 꽃보라를 날리는 봄의 지령(地靈)으로 충만하고, 나무마다 움이 돋고, 순이 나고, 연녹색 잎들로 우중충했던 회색 산들이 살아납니다, 봄꽃들도 찬란한 빛을 찾았습니다. 하동의 벚꽃. 화개장터에서 쌍계사까지 십리는 모두가 꽃길입니다. 입안 가득 피어나는 웃음꽃들. 낯선 객은 친구가 되고, 우연은 필연이 되는, 누구와 만나도 어질고 반가운 봄날이 흐릅니다. 벚꽃이 눈송이처럼 피어오르던 날…. 산길을 재촉하는 동자 스님에게 길을 묻다가 짧은 동행의 연이 시작됩니다. 가깝게 절이 있으니 스님과의 조우가 낯설 일은 아닙니다. “지금은 어딜 가도 도량(道場)이지요. 걷는 것도 수양입니다.” 정다운 인사를 남기고 잠잠히 걸어간 그 단아한 눈빛의 동자 스님은 올해도 쌍계사 꽃길을 밟을까. 윤중로에도 벚꽃 계절이 한창입니다. 화사하게 폈다 바람처럼 흩어지는 자연의 순환은 늘 같은 이름이어도 가슴에 닿는 느낌은 매 해 다른 것이 언제는 아픔으로, 기쁨으로, 그리움일 때도 있습니다. 요즘 거리에 흩날리는 노래는 단연 ‘벚꽃 엔딩’입니다. “그대여 그대여~ 오늘은 우리 같이 걸어요~ 몰랐던 그대와 손잡고 둘이서 걸어요~” 어쩜 저렇게 장범준의 목소리가 벚꽃 잎에 살랑이는 바람일까. 버스커버스커 그룹으로 오디션을 통해 데뷔한 장범준이 ‘벚꽃 엔딩’을 발표한 때가 2012년인데, 봄의 생글생글한 분위기는 올해도 여전하고, 벚꽃 좀비들로 이 계절을 에워쌌습니다. 100억 이란 저작권료를 벌어들이며 ‘벚꽃 연금’이란 신조어까지 만든 ‘벚꽃 엔딩’은 가히 국대급입니다. “봄바람 휘날리며 흩날리는 벚꽃잎들~ 울려 퍼질 이 거리를 둘이 걸어요~” 하지만 내겐 같은 해 나온 김광석의 ‘이등병의 편지’가 더 달달합니다. 벚꽃이 빗속에 흩날리는 청풍 호반 버스 안에서 듣던 ‘이등병의 편지’가 저리도 붉은 날의 추억으로 흔들리는가. 그것은 옛 신작로, 길 끝에서 흙먼지 일으키며 들려오는 말발굽 소리고, 아련함이고, 아득함입니다. “집 떠나와 열차 타고 훈련소로 가는 날~ 부모님께 큰절하고 대문 밖을 나설 때~ 풀 한 포기 친구 얼굴 모든 것이 새롭다~ 기적소리 멀어지면 작아지는 모습들~ 이제 다시 시작이다 젊은 날의 꿈이여~” 전국 산하마다 발길 닿는 곳에 봄꽃들이 꼬리를 물며 지천으로 필 때, 꿀벌들의 역사도 꽃보라 속에 흩날립니다. 개천에서 몸을 푸는 은어떼와 춘광 아래 꽃들을 꺾는 해맑은 아이들 웃음까지…. 돌담 넘어 보리밭 이랑 위로 피어오르는 아지랑이 하며, 그 위로 수직 비행하는 종달이의 울음까지, 모두가 주연급인 봄의 향연은 늘 어질고 아름답고 경이롭습니다. 겨우내 움츠렸던 마음을 펴주는 한 움큼 하늘의 은총이고요... -소설가/ daum cafe 이관순의 손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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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4-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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