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4-26(금)
 

어이” “이봐” “여기

결혼을 앞둔 여자가 남자에게 한 가지 꼭 지켜줄 것이 있다고 했습니다.

아내를 이런 식으로 부르지 않겠다고 약속해 달라는 것입니다. 어떤

경우도 입에 올려서는 안 될 막말이라면서.

 

그동안 남자가 아내를 부르는 수많은 입을 보았는데 가장 혐오스럽고

비인격적인 호칭이라고 했습니다. ‘부부관계를 지키는 마지노 선이라며

처음부터 금을 딱 긋고, 대신 이름을 불러달라고 했어요.

 

가장 가까운 남편으로부터 한 사람의 인격체로 존중받고 싶다는 것이

여자의 생각이었습니다. 그렇지 않고 어떻게 부부관계를 말할 수 있고

존중할 수 있겠느냐며 자존감 지닌 삶을 이야기했습니다.

 

약속대로 남자는 결혼 30년이 지날 때까지 그 약속을 잘 지켰습니다.

살다 보면 화가 치솟고 감정이 욱할 때도 있었겠지만, 그래도 남자는

말로 여자의 마음을 상하게 하지 않았습니다.

 

시댁 어른들 앞에서도 매번 이름 뒤에 를 붙였고 존댓말을 썼어요.

당시로는 흔치 않은 말법입니다. 그러던 남자가 딱 한 번 실수를 범하고

만 건, IMF 환란 때 사업이 부도에 몰리는 긴박한 상황에서였죠.

 

이 고비만 넘기면 회생이 가능할 텐데, 처가가 끝까지 외면하고 보증을

피하자 한 순간 감정이 폭발하며 나온 소리입니다. 거친 막말이

나오더니 아내를 밀쳐 넘어지게 했습니다.

 

한 순간 넋이 나간 남자가 정신을 차리고 주어 담으려 했지만 이미 쏟은

물이었지요. 그날이 하필 아내 생일과 겹쳤습니다. 잊었다가도 해마다

그날이 오면 생각나는 아픈 기억. 남자 마음이 편할 리 없습니다.

 

계절이 찾아오듯 때만 되면 회한으로 떠오르는 토막말. 딱지가 앉기도

전에 다시 생채기를 내는 일이 반복됩니다. 사업한다는 남자한테 딸을

주고 싶지 않다던 장인어른의 말도 떠오릅니다.

 

말이 좋아 사업가지 호강은커녕 늘 넉넉하지 않은 살림으로 마음고생을

시켰고, 급전이 필요할 때면 처가로, 친구로, 돈 심부름도 다녔습니다.

생각은 심연에 가라앉은 부끄러움까지 휘저어 올리죠.

 

남편으로, 아버지로, 살뜰히 살펴 준 것도 없는데, 내색 없이 살림에

충실해준 아내가 고맙고, 알아서 잘 커서 스스로 짝을 만나 제 앞길을

찾아간 두 아들 딸이 대견스럽고 감사했습니다.

 

결혼 45주년이 되던 그해 봄. 부부는 딸이 결혼기념일이라고 마련해준

호텔에서 저녁 식사를 마치고 여느 날처럼 집에 돌아와 잠을 잤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마지막 날이 돼버렸습니다.

 

새벽녘, 잠을 자던 남자가 흉통을 호소하며 온몸이 땀에 젖을 때,

멀리서 구급차 소리가 들렸습니다. 협심증을 앓아온 남자는 곧바로

응급실로 실려 갔지만, 남자의 명줄은 거기까지였습니다.

 

창졸간에 삼일장이 치러졌습니다. 삼우제를 마친 아내가 남편의 유품을

정리하다가 책상 서랍 안쪽 밑에 깔려 있는 흰 봉투 하나를 찾았어요.

죽음을 예견한 걸까. 꼼꼼한 남편이 미리 써둔 유서였어요.

 

남자의 체온이 실린 육필은 첫 문장을 참회로 시작했습니다. “효은 씨.

약속을 못 지켜 미안합니다. 그것도 당신 생일에, 홧김에 쏟은 해서는

안 될 나의 막말에 용서를 구합니다. 평생 후회로 안고 살았습니다...”

 

두 번째 단락에는 어려서 죽은 큰 아들의 회한을 담았습니다. 네 살배기

아들 준이를 폐렴으로 잃고 한강에 나가 가루를 뿌리던 날, 그 밤의 아픈

기억을 말했습니다.

 

그 후로 한강 근처를 나가지 못하고 시린 가슴으로 몇 년을 방황할 때,

나를 보고 모두가 잊으라고 했었지요, 자식은 가슴에 묻고 그만 잊으라

했을 때... 당신만은 내게 그러지 않았습니다.

 

잊으려고 애쓰지 말아요. 그건 너무 가혹해요. 그다음 생기는 빈

공간은 어쩌려고요. 그 무엇도 대신해 채울 수 없어요.” 그러니 우리

죽을 때까지 옹이처럼 가슴에 박고 잊지 말자고 했습니다.

 

상처는 보듬고 싸매야지 뜯어내면 덧나게 마련이고, 시련은 견디고

이겨내는 것이라고 나를 다독일 때, 캄캄한 밤바다에서 한 점 빛으로

흔들리는 등대를 보는 심정이었습니다.

 

당신의 말이 맞았습니다. 시련은 운명이고, 운명은 떨치고 이겨낼 때

소망이 생긴다는 사실을. 의사가 말했지만 차마 당신에겐 전하지 못하고

당신 옆에서 눈을 감고 싶었습니다.

 

당신이 이 글을 읽게 된다면, 이젠 내가 당신께 당부할 차례입니다.

효은 씨, 끝이 정해진 책처럼 내 생의 길이는 여기까지입니다. 이별의

아픔이 크겠지만 마지막 책장을 넘길 때까지 삶의 시선을 꼿꼿하게

지켜주길 원해요. 앞서 가서 자리 잡고 그날의 당신을 기다리렵니다

용서해줘 감사하고, 사랑해줘 고맙고, 먼저 떠나 미안해요...

-소설가/ daumcafe/leelett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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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가 남긴 토막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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