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4-26(금)
 

은혜를 모르는 사람은 없어요. 갚아야 할 때를 애써 몰라 할 뿐. 원래

인간은 배은망덕한 존재입니다. 동시에 남의 배은엔 혀를 차는 존재죠.

망덕으로 덮어씌우는데도 능하답니다. 그러니 애초 은공으로 엮일

자리엔 비켜서는 게 상책입니다.

 

하지만 인간사를 그 같은 단순 셈법으로 풀기엔 역부족입니다. 사노라면

알면서도 역사의 덫에 말려드는 아픈 경우가 있어요. 올가을 단종의

혼이 어린 영월 청령포를 바라보며 떠올린 단상입니다.

 

사약을 내리라 충동한 사람, 모양새를 만들어 사약을 내린 사람, 사약을

들고 찾아간 사람, 시신을 수습해 무덤을 만든 사람, 이들 모두 은공의

그물 짜기에 가담한 사람들입니다.

 

세조 3년에, 금성대군이 모반을 기획했다는 고변이 들어온 후 넉 달간

조정은 피로 물듭니다. 주군인 단종을 사사하여 모반의 뿌리를 뽑으라는

정인지, 신숙주의 주청을 받아 세조는 사약을 내립니다.

 

조정은 사약을 받고 승하한 어린 단종의 육신을 강물에 던진 뒤 시신을

거두는 자 3대를 멸한다는 어명을 내렸지요. 물위에 뜬 옥체가 물길 따라

빙빙 돌다 되돌아오고 그때마다 곱고 여린 열손가락이 수면에 떴습니다.

 

이를 통곡한 영월 호장 엄홍도가 한밤에 시신을 수습해 노모를 위해

준비해둔 관에 옥체를 염하여 장사를 지냈습니다. 역사는 그의 충절을

높이 사 충의공이란 시호를 내렸지요.

 

하지만 한 사람이, 역사의 기록에서 빠졌어요. 영월로 귀양 가는 단종을

호송했고, 유배지로 사약을 들고 갔던 의금부도사 장방연입니다. 주군을

배은하고 은공의 가시밭길을 걸은 사람의 고뇌는 무엇일까?

 

천만리 머나먼 길에 고운 님 여의옵고/ 내 마음 둘 데 없어 냇가에 앉았으니/

저 물도 내 안 같아야 울어 밤길 예놋다.” 그가 남긴 시조에는 단종을 향한

애끓는 충심이 절절하지만, 역사는 그의 행적을 지웠습니다. 240년 후

 

쓰인 숙종실록에 한 차례 이름이 오를 뿐이죠.

때마침, 서울에서 118일까지 국립창극단이 무대에 올린 팩션 창극

아비, 방연과 만났습니다. 계유정란을 배경으로 군권을 노린 수양대군의

 

책사 한명회에 간계로 역사의 덫에 빠지는 왕방연을 그렸습니다.

극은 강직한 충신이 주군을 저버릴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부성애

풀면서 굽이치는 감동과 굵은 서사를 전합니다. 난세의 영웅이 될 건가.

 

딸을 지키는 평범한 아비가 될 건가.

신하된 신념과 현실의 삶 사이에서 고뇌한 아버지 왕방연을 부부예술가

서재형(연출), 한아름()이 그의 숨은 삶을 복원시켜 역사의 결을

다듬었습니다.

 

한 밤 북한산 기슭에서 수양대군이 어린 사슴의 목에 칼을 꽂으며

말합니다. “김종서를 비롯한 불충한 자들을 베고 어지러운 종사를 바로

세우려 한다. 그대들 뜻은 무엇인가?”

 

한 무리 사내들이 소리 높여 !”을 외칩니다. 이제 수양은 조카를

폐위하고 스스로 왕이 되는 운명의 길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단종이

총애한 무인 방연의 운명도 마찬가지입니다. 혼례를 앞둔 어린 딸을

지키기 위해 명을 받드는 아비니까요.

 

혼례 날 밤에, 단종 복위를 모의한 혐의로 사위가 체포되면서 또 다시

광풍이 붑니다. 딸이 공신노비로 보내지는 것만은 막아야 하는 아비의

고뇌는 깊어지고, 간특한 한명회가 사약을 전하는 사명을 주지요.

 

방연은 딸을 구하려고 한양에서 영월까지 달려갑니다. 땅이 일어나고

강물이 출렁이도록 사흘 밤낮 말을 달리는 아버지 방연의 모습에서

오늘도 가족을 위해 치달리는 현대의 아버지들이 떠오릅니다.

이 시간도 어디선가 말 달리는

슬픈 아비가 있겠지요.

 

덫에 걸린 무대 위 남자가 고통을 창으로 쏟아냅니다. 창극은 극도의

정한을 표현하지 못할 때 판소리로 풀었습니다. 오로지 소리의 힘으로,

포효하는 한 인간의 통한을 해일처럼 밀어내자 객석 여기저기 흐느끼는

소리가 높아집니다.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라 했지요. 세조실록(세조31021)은 단종의

사인을 자살로 변조했습니다. “임금께서 명하시길 송헌수는 교형에 처하고

나머지는 논하지 말도록 했다. 노산군(단종)이 이를 알고 스스로 목메어 졸하니

예로써 장사를 지냈다.”

 

세자로 태어나지 않았으면 좋았을 것을. 565년 전 단종이 승하한

10월 그날처럼, 올가을도 청령포를 둘러싸고 흐르는 서강(西江),

어진 햇볕아래 남빛 물결을 반짝이며 무심히 흐를 뿐입니다.

(글 이관순 소설가/ daumcafe/ leerett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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