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5-01(수)
 

요즈음 시중에서는 도척의 개에 관한 이야기가 많은 사람들에게 희자되고 있다.

역사는 기록되는 법이다. 궁중의 생활상을 오늘날에서도 안방에서 생생하게 드라마로 재연되듯이 조선 실록에서 기록된 역사가 후손들에게 잘못된 역사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서 더욱 생생하게 재연되어 되씹어 심판을 받게 된다.

바이든이 날리면이 될 수 없다는 사실은 역사의 기록으로 분명이 평가를 받게 될 텐데 이를 구태여 법원의 판결로 인정을 받을 필요가 있는가? 그렇다고 역사는 절대로 바뀌지 않고 더욱 생생하게 후손들에게 의해서 재연될텐데 이를 두려워하지 않고 지금 당장만을 두려워하고 있다. 결국 우리들의 후손에 의해서 도척의 개로 기억하게 될 것이라는 분명한 사실을 왜 모르는지 아쉬게 여겨질 뿐이다.

 

지금으로부터 2500전 중국의 춘추전국시대에 도척이라는 큰 도둑이 있었다. 그에겐 9천명이나 되는 졸개들이 있어 도척의 말에 절대복종하는 생활을 하고 있었다. 이들은 옳고 그름을 판단하지 않고 밥 주는 자에게 무조건 복종하는 맹종하는 개와 같은 얼뜨기들로 살아왔다. 그래서 이들을 도척의 개라고 부른다.

이런 악마와 같은 도척의 집에서 키우는 개로 역사의 평가를 받지 않기 위해서 우리는 어떻게 살아가야 될지를 되씹어 보아야 할 것이다.

더러운 밥 찌거기 한 덩이를 얻어먹고자, 도척의 눈치를 보면서 꼬리를 친다. 사람으로 태어나 그 고마움을 알지 못하고, 사람답게 사는 길을 모르는 채, 도척의 개처럼 앞도 뒤도 가리지 맹종하면서 물어뜯으라면 물어뜯고 짖으라면 마구 짖어대면서 살아가고 있다. 그들은 인간이기를 거부했고 인간답게 사는 길을 포기하고 아무런 의미 없이 맹종하면서 약탈과 인권 유린을 손쉽게 했다. 그들은 결국 도척의 개로 기록되었고 오늘날에서 도척의 개라라고 부르고 있다.

 

어느 날 부하가 도척에게 물었다. “도둑질에도 법도(法道)가 있습니까?” 도척이 대답한다. “어디엔들 도()가 없을 수 있겠는가? 남의 집에 감추어져 있는 것을 알아내는 것이 도둑에게는 성인(聖人)이다. 남보다 먼저 들어가는 것이 용기(勇氣)이다. 남보다 뒤에 나오는 것이 의()로움이다. 도둑질해도 되는지 안 되는지 아는 것이 지혜(智慧)이다. 그리고 도둑질한 것을 고르게 나눌 줄 아는 것이 어짊()이다. 이 다섯 가지를 고루 갖추지 못하면 큰 도둑이 될 수 없다고 했다. 당시 가장 혐오스러운 도척에게도 이렇게 나름대로 도()를 지니고 있었으며 이를 지키려고 노력했다.

 

성경에 소금에 관한 이야기가 있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데없어 다만 밖에 버려져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마 태 5:13)

예수님께서 너희들은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과 같이 살아가라고 말씀하셨다. 그런데 우리들은 깨닫든 깨닫지 못하든, 오랜 동안 소금과 같이 상호 작용울 하면서 살아왔다. 그래서 소금 없이는 이 세상을 살아갈 수 없게 만들어졌다.

소금이란 세상을 더 맛있게 만들고, 또한 썩지 않게 만드는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그런데 이런 특성을 잃어버린다면 이젠 소금이 아니고 세상에 쓸모가 없는 쓰레기가 되어 인간들의 발에 짓밟히는 존재가 되는 법이다. 그래서 우리들은 항상 자신의 직분을 이해하고 그 역할을 충실하게 이행해나가려고 노력하면서 자신의 존재가치를 되돌아보면서 살아가기 마련이다.

만일 이런 존재가치를 망각하게 된다면 이미 인간이 아닌 쓰레기로서 멸시를 받게 되고 인간들의 발에 짓밟히는 일은 당연한 일이다. 다만 그 당시 일시적으로 날뛰기 때문에 주변사람들이 이들의 기억을 피하고 있을 뿐이다.

 

이범선 교수의 오발탄이라는 소설 이야기가 생각이 난다.

주인공 철호는 계리사 사무실 서기로 일하는 월남가족의 가장이다. 이북에서 큰 지수의 집안에서 태어난 그는 월남해서 궁핍하게 서울 살림을 살아가고 있다.

판잣집에 들어서면 실성한 어머니는 가자, 가자고 외치고 있고 만삭이 된 아내와 어린 딸, 가난 때문에 양공주가 된 여동생, 상이군인으로 제대를 한 남동생들이 함께 살아가고 있다. 그런데 어느 날 동생은 권총 강도가 되어 경찰서에 잡혀있고 집에서 여동생 명숙은 아내가 위독하다는 연락이 왔다. 애를 낳다고 결국에는 주검으로 변하게 된 아내.

이런 상황에서 철호는 무엇을 어떻게 살아가야 될지 모르면서 우왕좌왕하면서 양심이란 무엇인가?”를 생각하게 된다.

양심은 손가락 끝에 박힌 가시와 같은 존재이다. 이를 빼어버리면 아무렇지도 않게 세상을 살아갈 수 있다. 그렇지만 양심을 달고 살아가게 되면 그 양심이라는 손가락 끝에 박힌 가시가 나를 아프게 만들고 힘들게 해서 눈물이 나와 타령을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렇다, 이 세상에서 양심을 버리고 아무렇지도 않게 살아가는 사람들은 양심 때문에 아파하거나 슬퍼하지 않으며 눈물을 흘리면서 살아갈 필요가 없는 것이다.

 

이 세상에는 두 부류의 인간들이 살아가고 있다. 양심이라는 가시를 빼어놓고 사는 사람과 양심이라는 가시를 안고 살아가는 사람으로 구분된다. 그렇다면 우리들은 어느 편의 인간으로 이 세상을 살아가야 할 것인가?

양심을 버리고 도척의 개와 같이 맹종하면서 그냥 그렇게 그 당시만을 편하게 살아갈 것인가?

아니면 양심을 안고 살아가면서 아파하고 눈물을 흘리면서 주변 사람들게 항상 소통하면서 살아갈 것인가?

도척의 개들은 주인이 던져주는 먹이감에 만족하면서 먹고 살아가기 위해서 어쩔 수 없이 이렇게 살아가고 있다고 자신을 변명하고 있다. 그렇지만 역사는 그들을 도척의 개로 기록하고 생생하게 후손들이 기억하면서 심판을 하게 되는 법이다.

 

인간이란 잠시 잠간 이 세상에 태어나서 살다 간다고 착각을 하고 있다. 그렇지만 역사는 기록되는 것이기 때문에 분명히 역사적인 심판을 받게 되고 우리들의 후손들은 그런 역사를 다시는 반복하지 않도록 생생하게 기억하게 되는 법이다.

그렇다면 우리들은 후손들에게 조금이라고 도움이 될 수 있는 일을 하면서 편안하게 즐겁게 이 세상을 살아가기보다는 후손들이 우리보다도 더 나은 삶을 살아가기를 희망하면서 살아가야 되는 법이다.

요즈음 무서운 도척의 개들이 행진들을 지켜보면서 양심이나 가치를 안고 산다는 것이 얼마나 힘들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그렇지만 역사는 기록되는 법이기에 도척의 개로 이 세상을 살아갈 수는 없는 노릇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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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서운 도척의 개들의 행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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