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5-09(목)
 

우리말 중에 철이 든다는 말을 좋아합니다. 아름답고 내밀한 의미가 좋아서죠. 우리 마을에 일은 않고 술과 유희만 즐기는 아들을 둔 어머니가 저 웬수는 죽어야 철 들려나!“ 혀를 차곤 했지요.. ”철 좀 들어라.“ ”언제 철날래?.“ 자라면서 참 많이 듣던 말입니다.

 

그 때마다 철은 귀한 것이라고 생각했을 뿐,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훗날 계절이란 걸 알았지요. 철든다는 말은 계절을 따라 밭을 갈고 파종하고 거두어들이는 절기를 알아 일한다는 뜻이었습니다. 사리를 옳고 분명하게 판단하는 힘이나, 자기의 나이에 걸맞는 처신을 뜻하는 것이기도 하겠지요.

 

아버지를 보며 그런 생각을 하며 자랐습니다. 어른이 되면 모든 걸 다 알 것으로 생각했는데, 막상 어른이 되고 보니 알지 못하는 게 더 많아지고, 어른이 되면 모든 걸 다 이해할 줄 알았는데 이해할 일이 더 많다는 걸 알았습니다.

 

나이 예순을 이순(耳順)’이라지만, 나이가 들수록 인생에 대해 의문만 쌓였습니다. 죽을 때까지 모르는 게 인생이라 생각하면 그 때까지 제대로 철이 날까 하는 염려도 해보게 됩니다. 늘어나는 나이테만큼 인생을 깨치고 세상을 보는 눈이 밝지 못함을 느껴서입니다. 갈수록 세상이 한 치 앞을 못 볼 만큼 혼미해 졌기 때문이죠.

 

그런 가운데 올봄에 소중한 것을 깨쳤습니다. 모든 생명들이 살아나던 봄에, 우리의 눈을 현혹하고 입으로 감탄케 한 것은 녹색이었습니다. 죽은 줄 알았던 나무에 연록의 잎들이 나올 때, 하루가 다르게 그 무늬를 키워갈 때, 그 아름답고 신비함이 꽃과는 또 다른 찬탄을 자아내게 합니다.

 

올해도 호숫가에서 늘어진 수양버들 가지에 연록 잎새가 층을 더해나가는 걸 지켜봤습니다. 생명의 환희가, 생명의 탈환이 저렇게 눈물겹고 아름답구나 하는 생각을 하면서. 그러다가 갑자기 내 동공이 커지는 순간이 있었지요. 이 나이가 되도록 보이지 않던 것이 비로소 보이는 순간이었습니다. 싱그러운 연록의 잎새 사이에 휘어져간 검은 나뭇가지들을 본 겁니다. 몸에서 전율이 느껴왔지요. 혼신을 다해 뿌리로부터 수분과 양분을 끌어올리는 가지들의 땀과 노고를 본 것입니다.

 

겨우내 앙상했던 가지들이 언제 저렇게 그을린 피부로 근육을 키웠을까. 강하면서 유연하게 곡선을 이루며 뻗힌 가지 위로 이슬같이 싱그럽고 풋풋한 연록의 잎들을 피워놓는 겁니다. 그 위로 천둥 몇 개, 벼락 몇 개가 스러졌을까... 가지의 아픔과 상처가 생각났습니다.

 

이봄을 빛나게 한 것은 꽃과 연록의 잎들을 마른가지에 피워낸 가지의 헌신이었습니다. 꽃과 잎들이 눈을 즐겁게 한 연기자라면, 가지는 그들의 배경이 된 연출자입니다. 그래서 황금종려상은 배우가 이닌 감독에게 돌아간 게 아닐까요?

 

다시 가지를 봅니다. 저 검은 가지와 연록의 잎들이 만든 조화의 극치를 봅니다. 나무의 정령이 가지마다 꿈틀대고, 검정과 연록이 저렇게 아름답게 매칭 되다니... 뻗어나간 가지의 연결은 그 자체가 경이로운 군무(群舞)였습니다. 나뭇가지의 건강하게 탄 구리빛 피부와 탄력 있는 몸매가 어쩌면 저렇게 아름다울까. 가지마다 자르르 윤기가 흐르는 울퉁불퉁한 근육들이 활처럼 휘고 꺾이며 흘러내리면서 연록의 잎들과 절묘한 춤사위를 밟습니다.

 

6월이 되면서 어느새 가지와 잎새의 군무는 막을 내리고 있습니다. 생명은 모든 게 한 철이듯 봄꽃이 이울고 연록의 잎이 녹색으로 바뀌면서 가지는 녹색 속으로 묻힙니다. 연이어 녹음이 우거진 산야가 펼쳐지고, 그러다 나뭇잎이 단풍이 되고, 낙엽이 되고, 떨어지면...

 

다시금 우리는 윤기 잃은 거친 회색빛 가지를 만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봄을 다시 맞기까지 삭풍한설을 견뎌내는 가지의 고단한 생을 보게 되겠지요. 생명의 순환은 이렇게 어질고 아름답습니다,

 

한 철 피었다 지는 꽃은 가지의 헌신을 모릅니다. 비바람으로부터, 차가운 일기로부터 꽃을 보전하려는 가지의 애틋한 헌신을 한철 꽃이 알 리 없지요. 그저 상춘객들을 맞으려고 치장에나 분주한 윤중로에 핀 벚꽃처럼. 자식도 꽃처럼 부모의 시정을 모릅니다.

 

별이 혼자 빛나는 것이 아님에도, 배경이 되어준 검은 밤하늘을 까마득히 잊고 지냅니다. 세상의 모든 붙박이별, 모든 떠돌이별, 모든 꼬리별로 빛나기까지 꽃은 가지의 헌신을, 별은 밤하늘의 노고를, 자식은 부모의 희생을 모릅니다. 그래서 자식들을 가리켜 철이 없다고 하지만, 부모는 아직 어려서라는 말로 눈을 감아주지요. .

 

.나이가 드니 눈이 침침해지고 세상을 보는 눈도 흐려집니다. 그럼에도 꽃과 연록 잎들의 찬미 속에서 가지의 순미 지순함을 발견하듯, 때 늦은 나이에 옹이가 빠져나간 구멍으로 세상을 다시 볼 때, 그 옹이가 있던 자리는 무욕의 창, 맑은 눈이었습니다. 누구는 이를 마음의 눈(心眼))이라고 합니다.

 

길이 굽어드는 곳까지 시야가 열리거나, 올라갈 때 몰랐던 꽃들이 내려올 때 보이는 거나, 환해지는 빛에 눈 뜰 때, 나는 이를 노인에게 주는 신의 은총이라 말합니다. 이즈음에서 내게 소원이 무어냐고 묻는다면 좀은 낯설겠지만 내 생애 마지막 날까지 변치 않을 단 하나의 바람은 내 사랑하는 이들과 내 사랑하는 것들과 마지막 대면하는 내 눈빛이 맑고 깨끗한 하늘빛이었으면 하는 것입니다.

daum '이관순의 손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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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 들며 비로소 보이는 것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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