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5-09(목)
 

요즘처럼 군이 나약해 보인 적은 없습니다. 우리가 군에 갈 때는 형들이 어깨를 두드리며 철들어 와라하는 당부가 있고 그런 다짐이 있었습니다. 건강한 성인 남자가 되기 위한 필수코스로 알았지요. 휴가를 나와도 야 듬직해 졌구나, 부모님이 좋아하시겠다는 덕담은 들었지, 지금처럼 고생 많지? 조금만 참아.” 그것도 복무기간이 우리처럼 36개월도 아니고 그 절반 남짓한 군생활을 하는 청년에게 위로랍시고 하는 그런 나약한 소리는 없었지요.

 

얼마 전 후배들과 어울린 자리. 메시지를 확인하던 한 친구가 아니, 이게 뭐야!”하고 낮게 소리쳤습니다. 청해부대 함정이 입항하다가 사고로 사망한 해군 병사가 자기 친구의 조카라는 전언입니다. 전화로 사정을 전해 듣던 그의 눈에 눈물이 그렁거립니다.

 

입항식 도중 밧줄사고로 숨진 최중근 해군하사의 부음에 참 마음이 아팠습니다. 전역을 한 달 앞두고 당한 변이라 가슴이 더 먹먹했습니다. 청해부대 소속으로 소말리아 아덴만에서 6개월간 임무를 마치고 돌아오던 날, 선임 수병으로 마지막까지 홋줄(정박용 밧줄)을 조정하다가 당한 변입니다.

 

입항식 당일 부두에는 자식을 보기 위해 부모님과 여동생이 나와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엄마가 꽃을 사자고 했지만 꽃은 직업군인들이 받는 것이라며 아버지가 말렸다고 합니다. 입항한 배를 올려보며 아들을 찾는데 갑자기 쿵! 하는 소리가 났고 잠시 후 손을 다친 병사가 부축을 받으며 내려오는 걸 봤을 때 큰일은 아니구나.” 하며 가슴을 쓸어내렸습니다.

 

그런데 어쩔거나! 그 때 아들이 실려 나온 겁니다. “입대 할 때만 해도 물가에 애를 보낸 것 같은 마음이었는데.... 최근에 아들과 몇 차례 통화를 하면서 성숙함이 묻어나 이젠 내가 힘들 때 아들한테 위로를 받겠구나생각했는데...” 아버지는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하고 빈 하늘을 바라봤습니다.

 

전역이라는 희망에 부풀었던 꽃다운 젊은이가 떠났다는 슬픔도 슬픔이지만 더 마음을 아리게 한 것은 사고를 비하하는 우리 사회의 비뚤어진 모습이었습니다. 남성 성향의 인터넷혐오사이트 워마드에 최 하사를 상스럽게 조롱하는 글이 연이어 올라왔기 때문입니다. 고인의 사진, 사고 사진 등을 올리고 웃기게 생겼다.” “개구리처럼 생겼다.” 는 등 사람으로는 행할 수는 없는 저주의 짓거리를 한 것은 믿기지 않는 한국사회의 일그러진 모습입니다.

 

이를 알게 된 가족들의 충격은 얼마나 참담했을까? 아버지의 언론 인터뷰는 그래서 가슴을 더 후벼 팝니다. “모든 일엔 찬반이 있겠지만 나라를 위해 희생하고 봉사하는 군인에 관한 문제라면 여야도, 남녀도 없지 않습니까? 유족 입장에선 국군 통수권자인 대통령이 와서 위로해 주셨으면 좋았을 텐데그 마지막 말마디가 두고두고 밟힙니다.

 

 

 

최 하사가 순직한 다음날 미국에서는 이런 일이 일어났습니다. 말년을 요양원에서 쓸쓸하게 보내다 숨진 한 한국전 참전용사의 장례식 이야기입니다. 유족이라고 하나 뿐인 딸마저 건강상 참석이 어렵게 되면서 초라한 장례를 치를 수밖에 없었는데 기적이 일어난 겁니다.

 

신시내티의 한 묘지에서 열린 그의 장례식엔 생전에 그가 몰랐던 수천 명이 그의 마지막 순간을 함께 해준 겁니다. 이날은 그의 장례식에 참석하려는 차량들로 교통체증이 발생할 정도였답니다. 이러한 성대한 장례식은 불과 24시간 전만 해도 상상할 수 없던 일이었지요.

 

사랑하는 딸마저 지켜보지 못하는 참전용사의 쓸쓸한 장례 소식이 페이스 북에 올려 지면서 상황이 달라진 겁니다. 지역 방송에서도 이 소식을 전하며 그는 한국전에 참전했으며 생전에 나라를 위해 해외에서 싸웠다는 걸 자랑스러워했다고 알렸습니다.

 

마침 그날은 미국의 현충일인 '메모리얼데이' 연휴가 시작되는 날입니다. 날이 밝기 시작하자 베트남전에서 이라크전까지 전쟁에 참전한 군인들이 동서남북에서 장지로 몰려왔습니다. 요양원에서 고인을 돌보았던 봉사자는 지금껏 그를 찾는 사람이 없었는데 정말 놀랍다!”며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습니다. 지역방송이 장례식중계에 나섰습니다.

 

자원한 바이올리니스트와 백파이프 연주자들이 어메이징 그레이스를 연주했고, 오토바이 수십 대가 운구행렬을 호위했습니다. 캔터키 주 육군부대는 의장병을 보내 노병의 관을 덮었던 성조기를 접었습니다.

 

한 베트남 참전용사는 방송 인터뷰에서 나라를 위해 참전한 사람은 모두가 형제죠. 전혀 낯설지 않습니다.”라고 했습니다. 고인은 그가 혼자가 아니란 걸 알고 얼마나 평화롭게 잠들 수 있었을까요. 참으로 부럽고 또 부끄러웠습니다.

 

그 다음 날 엄수된 우리나라 최 하사 영결식에는 국군통수권자인 대통령도 국무총리도 오지 않았다는군요. 조화만 그들의 이름으로 덩그마니 놓였을 뿐.... 같은 죽음을 놓고 달라도 너무 다른 두 나라의 모습을 보고 말았습니다.

 

사람들은 말하겠죠. 사랑하는 사람을 잃어도 살아 있는 사람은 또 살아간다고. 때가 되면 배고프고 잠이 오고, 가시에만 찔려도 내 상처가 더 아프다면서, 여전히 햇빛은 눈부시고 강물은 흘러간다면서. 정작 강물에 버릴 것은 생각지 않고... (소설가)

daum '이관순의 손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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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르는 저 강물에 무엇을 버려야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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