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5-09(목)
 

개떡같이 말해도 찰떡같이 알아듣는다라고 한 옛 어른들의 말이 생각난다. 원래 말이란 대충 해도 통하게 돼 있다. 언어 장애가 있는 사람이나 말을 배우는 아기들이 한두 단어만 오물거려도 가족들과 소통이 이뤄진다. 주어와 술어가 상응하지 않은 비문이거나 표현이 정확하지 않아도 의사 전달이 가능한 게 언어다. 말이 안 되는 말을 알아듣는다는 것이다.

 

언어의 잉여성 또는 융통성 때문이다. 언어는 원래 품이 넉넉해서 표현이 조금 모자라도 소통에 크게 지장을 주지 않는다. 언어에 융통성이 없다면 인생이 얼마나 피곤할까. 하지만 이러한 언어의 융통성이 가져오는 해악도 만만치 않다. 요즘 세태를 보면 이를 악용해 별 이상한 신조어들이 양산돼 언어시장을 장악하고 있다. 정말 개떡같이 말해도 찰떡같이 알아듣는 세상에 놀랄 따름이다.

 

말은 문법이 아니라 마음으로 주고받도록 설계돼 있다. “말에서 사람의 인격을 본다라는 말이 그래서 나왔다. 같은 말을 해도 사람에 따라 말이 되고, 말씀이 되고, 말투가 된다. 말에서 가장 고약한 것이 말투. 사람의 마음에 상처를 주기 때문이다. 상처가 되는 말은 가장 친근해야 할 부부간에, 친구 간에 가장 많다는 연구도 있다. 일반인과의 관계에서 생기는 상처는 쉽게 아물어도, 가까운 사람일수록 상처가 깊다.

 

개에 물리면 병원에 가면 되지만 말에 잘못 베이면 반영구적 상처가 될 수 있다. 말도 흉기처럼 마음을 해친다. 어릴 적 살던 동네에 자식들에게 험한 말을 쓴다 해서 욕쟁이 엄마로 불리던 분이 계셨다. 아들 쌍둥이에, 연년생 아들을 둔, 7남매의 엄마였다. 어디 그 엄마뿐일까. 척박한 경제 환경에서 여러 자식을 키운 엄마들에게 거친 말은 흔히 보는 일이었다.

 

내가 어른이 돼서야 그 시절 엄마들의 말투가 이해되었다. 그때를 생각하면 연민부터 앞선다. 얼마나 사는 게 고단하고 힘들었으면 해서는 안 될 말이 자식들을 향했을까. 6.25 전쟁의 상흔이 남아 있던 시절, 집집이 겪는 경제적 궁핍과 찌든 생활로 모두가 고통스럽기 짝이 없을 때의 일들이다. 자식들도 생기는 대로 낳다 보니 한집에 예닐곱은 보통이고 10남매도 흔했다.

자식들 배곯지 않게 먹이고 입히고 대가족의 수발을 다 들다 보니 그 삶이 얼마나 고달프고 힘들었을까. 쌓이는 빨래 더미에 눌리고 손목이 아프도록 비벼 빨아 입혀 보냈더니 한나절도 안 돼 흙장난으로 휘질러 돌아오질 않나... 썰매 타러 나간 형제가 얼음이 깨쳐 젖은 바지를 불에 말리다 태우고 오질 않나... 자식은 자식 대로 엄마의 애간장을 태우는데, 가장이란 분은 술주정이라는 이름 아래 아내에게 스트레스를 풀었다.

 

어쩌면 자식을 향한 모진 말투는 엄마의 화를 푸는 통로였는지 모른다. 일에 치여서 머리는 터질 듯한 데, 도와주는 사람은 없고, 자식들은 일만 저질러 엄마를 울리니. 쏟아 낼 입마저 없었으면 쌓이는 스트레스로 정신인들 온전했을까.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면 고달팠던 그 시대 여인들의 삶에 가슴이 짠해진다.

 

친구와 노천카페에 앉았는데, 중학생 또래들이 시끌벅적 지나간다. 놀라운 것은 이들의 대화가 하나같이 상스러운 비속어로 이어진다는 것이다. SNS상에 오르는 언어는 더 심각하다. 애도 어른도 욕지거리로 도배를 하고, 댓글 창에는 인격이란 아예 없는 쓰레기들로 난무한다. 낯 뜨거운 말은 방송에도 버젓이 나오고 있다. 예전엔 방송심의실이라는 곳에서 방송에 부적합한 말을 엄격히 걸렀는데 지금은 그러한 제방이 무너졌다.

 

말의 유희를 따르는 외래어의 범람, 술자리에서나 주고받을 비속어, 천박한 말들이 출연자의 입에서 거침없이 쏟아지고, 여기에 자막까지 달아 흥행을 돋운다. ‘말이 타락하면 나라가 타락한다라는 말이 떠오를 만큼 우리 사회의 언어 타락이 심각한 수준에 와 있다. 말은 어려서부터 부모가 가장 신경 써야 할 부분이다. 예부터 선비의 덕목으로 꼽는 것이 신언서판(身言書判)’이다. 몸가짐을 잘하고(), 덕스러운 말()을 공부보다 앞세우라는 뜻이다. 어려서부터 덕스러운 언어의 습관을 들여야 함은 말이 곧 사람이고 말이 그 사람의 인격이기 때문이다.

 

친구들끼리 존댓말을 쓰게 하는 초등학교가 늘고 있다는 기사를 보았다. 어려서부터 말만 곱게 쓰도록 가르쳐도 갈수록 빨라지고 있는 언어폭력을 예방할 수 있는 좋은 처방이 될 것 같다. 친구 사이에 존댓말을 쓰고 아무개님으로 부르는 초등학교도 있단다. 100년 전 소파 방정환 선생이 어린이날을 맞아 어린이끼리라도 존댓말을 쓰자고 제안했다. 지금도 학창 시절 교단에서 또박또박 존댓말을 쓰신 선생님을 존경했던 기억이 난다. 언어 예절이 살아야 교육도 사회도 정화된다.

 

언어는 우리의 일상을 휘감고 있는 산의 숲과 같다. 나무 한 그루 한 그루가 모여 숲을 이루듯, 한 나무가 해충으로 병들면 온 숲이 망가지기 쉽다. 겸손하고 선한 말, 배려하고 정제된 말이 향기 나는 언어의 숲이다. 처세의 으뜸은 사람의 말에서 시작된다. 처음에는 내가 습관을 만들려고 애쓰지만, 그 뒤로는 습관이 나를 부린다. 좋은 언어 습관이 자연스럽게 몸에 밸 때, 비로소 웅변은 은()이고 침묵은 금()이 된다.

 

사람 사이에 궁합이 있다면 말에도 궁합이 있다. 내가 아무리 언변이 뛰어나고 모두가 내 말에 귀를 쫑긋하는 것 같지만, 저들 중엔 나와 궁합이 틀린 사람이 있다. 말을 할 때마다 이를 깨닫는다면 말이 길어지지 않고, 말수를 줄이게 된다. 언어는 정신의 지문(指紋)이다. 생각과 정신, 내 영혼까지 담아내니까. 말에는 정령(精靈)이 있다고 한다. 그래서 말이 씨가 되는 법이다. 험한 세상을 사는 데는 위로와 격려, 보듬는 말이 최고의 표현이자 선물이다. 나는 오늘 누구에게 덕스러운 말을 건네었을까. 나의 말버릇은 어떠한가? 한 번쯤 되돌아보면 어떨까. (*)

-소설가/ daumcafe 이관순의 손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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