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5-09(목)
 

사람에게 가장 오래된 친구는 누굴까. 동물로는 개와 소, 식물로는

나무일 것입니다. 가난한 농가에도 집집이 나무 한두 그루씩은 자랍니다.

감나무, 대추나무, 소나무, 단풍나무...

 

할아버지는 자손이 하나 생기면 나무를 심으셨습니다. 한 그루 한 그루

심을 때마다 정성을 다하셨고 당신만의 기원을 함께 묻으셨죠. 8남매를

두셨으니 여기서 자손이 늘 때마다 할아버지는 덩달아 바쁘셨습니다.

 

출산 소식이 오면 할아버지는 흡족한 표정으로 나무시장에 나가 수종을

고르셨고, 선택된 나무는 당신의 뜻에 따라 울안 어딘가에 심어져 우리집

새 가족이 됩니다. 북을 주고 때로는 둘레에 막걸리를 붓기도 하셨어요.

토양 세균들의 증식을 도우려는 뜻이지요.

 

제법 큰 나무를 이식할 때는 자랐던 곳의 흙을 떠와 섞어주기도 하십니다.

낯선 땅에 적응을 잘하라는 정성일 것입니다. 노년의 할아버지는 그것이

낙이셨고 나무 돌보는 일을 보람으로 아셨습니다.

 

그러자 과실수와 꽃나무들이 마당과 뒤란으로 자리를 넓혀가면서

해마다 가지치기 하는 것도 일이 되었지요.

 

손이 귀한 집 외아들로 태어나신 할아버지는 사랑이야 한껏 받고 자라

셨겠지만 일면 외롭기도 했을 거예요. 그러면서 나무를 벗삼아 취미 삼아

재미를 붙이신 모양입니다. 할아버지 무릎에서 자라며 가장 많이 들은 것도

나무 이야기였으니까요.

 

막내 삼촌이 사고로 세상을 떠났을 때, 할아버지는 조석으로 삼촌 나무인

단풍나무를 찾아서 상심을 달래던 모습이 아련합니다. 그 때 할아버지가

나무를 통해 자손을 보고 계신다는 걸 느꼈어요.

 

아픈 자손이 생기거나 집안의 이런저런 대소사와 만날 때면 나무와 끊임

없이 교감하십니다. 혼기를 놓친 고모를 위해서는 매일 같이 뒤란의

오동나무를 찾아 생시처럼 당부하셨죠. ‘금년 넘기지 마라.

 

사람이 머문 자리는 늘 이야기를 남깁니다.

북한강과 남한강이 만나는 양평 양수리에는 전설 같은 이야기를 품은

나무 한 그루가 있어요. 400년 된 보호수 은행나무가 주인공입니다.

치유 나무라는 신령함까지 더해 이야기 들어주는 나무

 

제법 유명세를 탑니다.

그 옆으로, 바람과 물과 나무가 어울리는 북한강 풍광을 배경으로 자리

잡은 카페 수수가 있고요. 이곳 테라스엔 250년 된 또 다른 느티나무가

서 있어 은행나무와 짝을 이뤄 옛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아낌 없이 주는 나무를 연상시키는 이야기 들어주는 나무에는 어떤

빛깔의 이야기가 있을까. 오랜 세월, 풍우 한설을 견뎌온 늙은 은행나무는

찬 강바람에 속살을 드러낸채 강을 타고 오를 춘심을 기다립니다.

 

원래 이 자리는 6.25 전쟁 때 미군 야전병원이 있던 곳이래요. 전선에서

전상자를 실은 후송 차량이 이곳 야전병원에 도착할 땐 사람만 오는 게

아니랍니다. 가슴 아픈 이야기도 함께 실려오죠.

 

이역만리 낯선 땅에 와서 부상을 입었으니 그 마음이 오죽했을까.

가슴에 쌓이는 건 그리움이고 보고 싶은 얼굴들입니다. 병동 앞으로는

무심한 강물이 흐르고 뒤로는 허허로운 들판뿐, 마음을 위로 받을 무엇

하나 보이지 않습니다.

 

고통보다 더 힘든 것은 가슴에 쌓이는 말입니다. 부상병 막사엔 불면의

밤이 늘고, 우울증을 호소하는 병사도 따라 늡니다. 산은 사람에게 안정을

주지만, 물은 충동을 일으킨다는 걸 북한강 암록빛 물결에서 깨닫죠.

 

고립무원의 부상 병사들을 맞아준 것이 북한강변 은행나무였어요. 70

전이면 나무는 더 젊고 무성했겠죠? 풍성한 잎으로 그늘을 만들어 주고

병사들의 애환을 들어줍니다. 우는 병사의 눈물도 씻어주고,

 

언젠가부터 후송온 병사가 맨 먼저 신고하는 곳이 나무가 되었답니다.

이심전심, 은행나무 이름이 이야기 들어주는 나무로 불리게 되면서죠.

이곳을 거쳐간 수많은 병사들에겐 아름답고 슬픈 추억속 이름입니다.

 

5년 전 한국인 얼굴의 미국 청년이 이 나무를 찾았습니다. 시카고에서

서울로 출장가는 아들에게 늙은 아비가 미션을 주었다고 했어요. 양부는

자신을 입양시킬만큼 한국에 각별한 애정을 지녔다고 합니다.

 

꾀벗은 은행나무를 돌아보는 아들 얼굴이 감개에 젖습니다. 둘레 7m

나무는 세월에 깎여 나무 중심부가 텅비어 시멘트로 메꿔져 있습니다.

아버지는 이 나무를 그리워 하셨어요. 사진을 보시면 무척 행복해

하시겠죠.”

 

찰칵찰칵, 연방 셔터음이 터지고, 촬영을 마친 아들이 나무 앞에 서서 거수

경례를 올립니다. “아버지께 잘 계시다고 안부 올릴게요. 오래 사십시오.

땡큐!”

-글 이관순 소설가/ daum cafe/ leerett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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