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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삶은 고향을 찾아가는 여정
    70대에 읽는 호메로스의 ‘오디세이아’는 젊어서 읽던 때와는 또 다른 잔잔한 공명을 주었다. 고대 그리스 문학의 대표적 작품인 ‘오디세이아’의 테마는 ‘귀향’. 그리스가 트로이 전쟁에서 승리한 후 고향을 찾아가는 영웅 오디세우스의 험난한 귀향 과정을 이야기한 대서사이다. 그 과정에서 바다와 섬, 그 밖의 여러 곳에서 고난을 겪으며 고향을 찾기까지의 분투와 아픔을 그렸다. 그의 귀향 여정은 세월이란 고난의 길을 걸어가는 인간의 삶과 맞닿아 있다. 그러나 형극의 여정 끝에 고향을 찾는 것으로 시련이 끝난다면 얼마나 좋을까. 오디세우스가 살인적인 재앙을 헤치고 귀향에 성공하더라도 긴장의 끈을 놓아서는 안 될 것이, 그동안 집안이 망해 버렸거나 아내가 정절을 버렸다면, 그의 귀향은 비극적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미케네 왕 아가멤논이 집에 무사히 돌아온 줄 알고 안심하다가 아내와 간부에 의해 살해를 당한 것처럼, 한 순간도 안도할 수 없는 게 인생이고 삶이기에. 오디세우스는 전쟁 영웅답게 신4중했다. 20년 만에 고향 이타카에 도착한 그는 일단 거지로 변장하고 가족들에게 접근을 시도한다. 남편 부재의 20년 세월을 아내 페넬로페는 어떤 심정으로 살았는지, 은밀하게 살펴보기로 한 것이다. 여기서 ‘페넬로페의 베 짜는 이야기’가 전개된다. 쉴 새 없이 일을 해도 끝나지 않는다는... 가장이 집을 비운 사이 오디세우스의 아내 페넬로페는 어떤 삶을 살았을까? 그녀는 남편 없는 긴 세월을 숱한 유혹과 위협에 시달려야 했다. 그녀의 미모에 반해 구혼을 청하는 남자들로 편할 날이 없었으니까. 오디세우스는 출정에 나서면서 아내에게 10년을 약속했다. “만일 10년 안에 돌아오지 못하면 당신은 재혼을 하시오”라고. 오디세이아에는 페넬로페 이야기처럼 흥미로운 소설적 장치가 여럿 있다. 그녀는 정숙한 여인이었다. 구혼자들이 몰려와 반협박조의 청혼을 할 때마다 이를 지혜롭게 물릴 줄 아는 여자였다. “지금 시아버지에게 바칠 옷을 짜고 있으니, 완성할 때까지 기다려 달라”며, 에둘러 남자들을 진정시킨 것이다. 베틀에 실을 올리면서 생각할 시간을 달라니, 욕망에 달뜬 남자인들 어쩌겠나. 낮에는 옷을 짜고 밤에는 풀고, 하루하루 같은 수고를 반복하면서 페넬로페는 오매불망 남편의 귀향을 기다렸다. 남편이 약조한 10년이 훌쩍 지났는데도 말이다. 그녀는 실타래와 베틀에 자신을 동여매고 자신의 정절을 지킨 셈이다. 오디세우스가 전편에 관통하는 메시지는 하나. 귀향은 정체성을 찾아가는 여정이며, 그 과정이 삶이라는 것. 집에 돌아오려면 먼저 집을 떠나야 하듯 귀향은 출향이 전제돼야 한다. 오디세우스가 집을 떠난 것은 밖에서 끌어낸 힘도 있지만, 밖으로 나가려는 내면의 원심력도 작용했다. 오디세우스의 투혼은 유혹의 노래를 부르는 세이레네의 섬들을 통과할 때 잘 드러났다. 부하들은 유혹의 노랫소리를 듣지 않으려고 귀를 밀랍으로 막았으나, 오디세우스는 노래는 들으면서 그 유혹에는 빠지지 않으려고 자신의 몸을 돛대에 묶어놓았다. 인간을 바깥세상으로 끌어내려는 호기심은 위험한 것이지만, 그것을 철저하게 억누르면 자폐증이 되고, 그렇다고 생각 없이 호기심을 좇다가는 ‘파멸’을 부를 수도 있다. 오디세우스는 호기심을 충족시키면서도 파멸에 이르지 않는 절묘한 선택을 배합한 셈이다. 인생은 늘 원심력과 구심력의 작용과 반작용이 상충하는 삶이다. ‘귀향’ 하지 않고 맹목적으로 돌진하는 원심력만 작용하면 인간은 결국 자아 상실의 상태로 빠지게 됨을 경고하는 것일까? 인간이 당면한 환경 문제와 물질문명에 대한 근본적인 비판으로 볼 수 있는 대목이다. “인간이 아무리 신적 앎에 다가선다 해도 우리 자신은 신과는 다른 인간임을 재확인하는 지혜를 잃지 말라”는 경고로도 읽힌다. 오디세이아는 신화적 요소에 이야기를 버무려 고전 특유의 매력을 담아냈다. 특이한 문체, 상상력을 자극하는 표현들이 곳곳에 매력 포인트를 숨기고 있다. 페넬로페에게 몰려오는 구혼자들 행태, 20년 정절을 지키는 페넬로페의 눈물, 오디세우스의 귀향과 상봉담(談), 그리고 아내를 넘본 자들을 응징하는 복수담까지…. 춘향전의 백미인 이도령과 춘향의 상봉 같은 극적인 장치도 멋스럽다. 숱한 남자로부터 유혹에 시달려온 페넬로페는 남편도 선뜻 받아들이지 못하고 슬쩍 떠본다. “그 침대를 이쪽으로 옮겨놔 주시겠어요?”라고…. 그러자 오디세우스가 답했다. “그 침대는 옮길 수 없다는 걸 당신도 알지 않소?” 오디세우스가 직접 산 나무의 밑동을 잘라 만들었으므로, 땅 속에 뿌리가 박혀 있기 때문이었다. 그제야 진짜 남편 오디세우슥가 돌아왔음을 확증하고 감격적인 부부 상봉이 이루어진다. “드라마처럼 재밌거나 그렇지는 않지만 한 번 읽어봐. 남는 게 있을 거야.” 학창 시절, 나의 손에 오디세이아를 건네주며 일독을 권하던 선배. 그는 지금 이 세상을 떠나 본향집을 찾아가고 있다. 그길 만은 험난하지 않기를... 선배의 따뜻한 미소가 눈가에 맴돈다. -소설가 daumcafe 이관순의 손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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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5-20
  • 어머니의 강(江)
    해마다 봄이 되면 어린 시절 어머님 말씀이 떠오릅니다. 항상 봄처럼 부지런해라, 항상 봄처럼 꿈을 가져라, 항상 봄처럼 새로워져라.... 그때는 그 말의 속내가 무엇인지 가슴에 와 닿지 않았습니다. 불혹이 넘어서 비로소 그 말에 눈을 떴습니다. 땅 속에서, 땅 위에서, 공중에서 혼신을 다해 생명을 탈환하는 노력을 보고, 어린 자녀들에게 ‘부지런해라‘고 말했습니다. 보이지 않는 곳곳에서 생명을 생명답게 키우는 꿈을 깨달으며, 항상 봄처럼 꿈을 가져라고 당부했습니다. 화단의 나무에서, 연못과 들에서 움트는 대지의 새눈들이 경이로워 딸아 너도 저렇게 새로워져라고 일렀습니다. 그때가 엊그제 같은데 세월이 많이 흘렀습니다. 나는 움직이지 않고 여기 서 있는데 왔다간 건 그들입니다. 이젠 아들이 손자에게 같은 말을 전합니다. 부지런해라, 새로워져라, 꿈을 가지라고. 어머니 말씀은 그렇게 대를 이어가며 전해지겠지요 흐르는 강물처럼... 인생을 잠깐 살다가는 여름밤의 꿈이라지만, 유독 그리움만 겁을 넘습니다. 마치 태양이 헐었다는 소리를 못 들은 것처럼. 이 세상에서 생명력이 가장 길고 영원한 향기를 내는 것, 그리움이 아닐까요?. 사람은 그리움을 먹고 사는 영물입니다. 5월은 많은 생각을 부릅니다. 생각은 그리움을 키웁니다. 어머니는 내게 유독 많은 그리움을 남기셨습니다. 오늘도 연기처럼 피어오르는 그리움이 바람을 타고 산과 강을 건너 퍼집니다. 언젠가는 내가 좋아했던 공단 치마저고리를 차려입은 어머니가 저 하늘에서 내려올 것만 같습니다. 부모가 죽으면 불효한 자식이 가장 서럽게 운다지요. 내가 그렇습니다. “서방님은 어머니한테 할 만큼 하셨어요. 우리가 못했지.” 형수님은 늘 그런 말을 해도 나는 잘못한 것만 생각납니다. 그런 일들이 새록새록 살아납니다. “왜 그걸 못해드렸을까.” 아쉬움이 커지면 가슴이 시려옵니다. 떠나신 지 30년인데 지금도 어머니 소리만 들으면 가슴이 짠합니다. TV에서 어머니 얘기를 듣다 눈시울이 붉어진 적도 많습니다. 지난해 아버지 부시 대통령의 아내 바바라 여사(94)가 세상을 떠났을 때 슬픔이 이렇게 아름다운 것일 수도 있구나 생각했습니다. 유난히 숱이 많은 순백의 백발은 그녀만의 캐릭터였습니다. 다음날 뉴욕타임스에 만평 한 컷이 실렸습니다. 그림판 하나가 세계의 많은 사람들의 심금을 울린 건 흔치 않은 일입니다. 그녀의 백발은 결코 화사하지 않은 슬픔이었기 때문이죠. 병을 앓던 어린 딸이 일찍 세상을 뜨자 백발로 변한 것입니다. 얼마나 슬픔이 컸으면, 딸이 그리웠으면, 그녀의 금발을 하루아침에 백발로 만들어버렸을까?.... 그림판은 백발의 여사가 흰 날개를 달고 천성 문을 향해 나르고 있고, 반대편에서는 어린 천사가 흰 날개를 퍼덕이며 그리운 어머니를 영접하러 나오는 장면입니다. 한 컷의 그림판이 이렇게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고 감동시키는구나... 그리움이 슬픔이고 슬픔이 그리움이란 것을, 작가가 잘 포착해 낸 것입니다. 어머니가 그리운 날엔 한강에 나갑니다. 오늘같이 안개까지 내린 날이면, 강뚝에 앉아 딱히 정한 곳도 없이 강자락에 싸여 흘러온 세월을 돌아봅니다. 푸른 물 겹겹으로 가슴 휘두르며 나홀로 걸어가셨던 당신의 세상을 생각합니다. 강은 흐르다 돌에 부딪치고 바위에 깨져도 이내 한 물로 흘러갑니다. 그곳에 얼마나 많은 상처가, 아픔이, 슬픔이 있었을까요. 당신은 이 모든 것을 넉넉한 품으로 안고 가셨습니다. 눈물을 삼키시면서... 그래서 물색이 저리도 검푸른가봅니다. 오늘도 새벽처럼 찾아오시는 어머니, 담장너머 아득한 안개 속으로 문풍지 같은 나의 떨림을 들으시나요? 당신의 자리는 억겁을 두고도 돌아오지 못할 흘러간 강물이신가요?. 소설가 이관순의 손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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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5-13
  • 아빠가 미안하다, 널 몰랐구나
    며칠 전 전국 청소년 글짓기 심사를 끝내면서 갖는 유감입니다. 유한양행을 설립한 유일한 박사의 정신을 받들어 유한재단이 해마다 5월이 되면 전국 초?중?고생을 대상으로 백일장을 개최합니다. 올해로 28년째니 연륜이나 규모면에서 전국 규모로 열리는 대표적 청소년 백일장입니다. 올해는 천여 명의 청소년이 아카시아 향이 흩날리는 유한공고 교정에 모여 초?중?고별 글제에 따라 글 향기를 뽐냈습니다. 씁쓸한 것은 ‘내가 아버지라면’ 이란 글제를 놓고 중학생들이 보여준 아버지에 대한 의식 때문입니다. 글제를 택할 때 10대의 자녀들이 평소 아버지란 존재에 대해 어떤 생각을 할까? 글을 통해 아버지 상(像)을 유추해보자는 의도가 있었지요. 글제를 내면서 ‘혹시나’ 했는데, 적지 않은 학생에게서 아버지의 이미지가 긍정적이지 못함을 확인하고 말았습니다. 학생들은 아버지가 칭찬에 인색하다는데 불만이 컸습니다. “잘했네” “알았다” “수고했어.” 등과 같은 정감 없는 아버지의 말투에 아이들도 묻는 말에나 답하는 단답식 대화가 늘어남을 알 수 있었지요. 아버지의 칭찬이 있을 때도 그 뒤에 따라올 말에 신경을 쓴답니다. 때 아닌 칭찬이 의심스럽다는 눈초리죠. “그래 그건 잘했어. 그런데 넌...” 한숨까지 섞인 조언을 듣노라면 작은 희망조차 웅크려진다고 합니다. 아이들은 순수한 칭찬에 목말라합니다. 아버지의 특징으로 감정표현이 없다고 합니다. 무뚝뚝한 아버지, 어려운 아버지라고 쓴 학생이 많았습니다. 그러면서 아이들은 원합니다. 내 이름을 자주 불러주는 아빠, 사랑한다고 말해주는 아빠를 기다립니다. “이리와 봐” 식의 부름보다 격려의 부름이, 사랑의 부름이었으면 한답니다. “넌 왜 엄마를 통해서 말하지?” 아버지의 불만도 이해는 되지만 사실 자초한 면이 없지 않습니다. 평소 대화가 부족했다는 방증이지요. 아이들은 철부지가 아니었습니다. 속에 담아놓고 말을 안 할뿐, 아버지가 가족을 위해 희생한다는 걸 알고 있습니다. 아는데도 다가서기가 쉽지 않은 분일뿐이지요. 역지사지(易地思之)로 사고의 전환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자녀의 입장에서 생각해보는 그런 자세가 필요하다고 느꼈기 때문입니다. 어버이날, 친구들과 나눈 에피소드입니다. 어버이 날이라고 아들이 전화를 했을 때, 예전에 우리는 첫마디를 이렇게 말했지요. “그래 나다. 기다려 엄마 바꿔줄게” 아들이 그게 아니고요 하면 “벌써 돈 떨어졌냐?” 그래도 아들이 용기를 내 ‘아버지 사랑합니다’라고 말할 때의 대답은 더 걸작입니다. “미친 놈, 뚱 단지 같긴!” 옛날 자신들의 모습을 떠올리며 파안대소했습니다. 자식의 마음을 알면서도 멋대가리 없는 말을 했다고. 따지고 보면 그렇게 큰 아들이 지금의 아빠들입니다. 대를 이어 배워온 언어의 관습이 그렇다면, 누구를 탓할 입장도 아니지요. 대화도 훈련이 되지 않으면, 끊기고 단절되기 싶습니다. 대화의 부족이나 불만은 그것으로 끝나지 않고 정서적 불만으로 이어집니다. 갈수록 멀어지는 아버지, 외톨이가 되는 아버지는 어쩌면 현대사회가 만든 자화상일지 모릅니다. 피곤에 절어 밤늦게 퇴근하고 새벽처럼 나가는 아버지... 가뜩이나 어려워진 자영업자 아버지... 그 침통함이 무의식중에 그렇게 비춰진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버지의 노고에 감사하면서도 강한 이미지 때문에 접근하기가 쉽지 않은 이유입니다. 아이들은 크면서 아버지가 힘없는 존재라는 것을 압니다. 엄마가 자녀들과 대화를 독점하고 있을 때 혼자서 담배를 피우는 모습이 쓸쓸해 보였다고 합니다. “나 요즘 힘들다”고 엄마에게 말할 때는 아버지 어깨를 누르는 책임감도 느껴졌답니다. 좋은 세상이 된 줄 알았는데 예나 지금이나 아버지란 존재가 외롭기는 마찬가지인 듯합니다. 사람은 태어난 후 ‘아빠, 엄마‘ 로 부르며 성장기를 보내다가 때가 되면 ’아버지 어머니‘로 바꿔 부르기 시작합니다. 멀리 이스라엘에서도 같은 호칭을 사용한다고 해 놀랐습니다. 기독교100주년기념교회를 담임하다 정년퇴임하고 거창으로 내려간 친구 이재철 목사가 전하는 말입니다. 이스라엘을 갔을 때, 누가 아빠하고 뒤에서 부르더랍니다. 깜짝 놀라 돌아보니 이스라엘 아이가 자기의 아빠를 부르는 것이었습니다. 같은 뜻의 어휘지만 ’아빠‘와 ’아버지‘는 의미가 사뭇 다릅니다. 아빠는 아버지를 뜻하는 아람어고, 아버지는 역어인 헬라어입니다. 아빠로 불리는 아버지는 자식에게 무한책임을 지지만, 아버지로 부르는 아들은 부모를 섬기는 모습을 뜻합니다. 그런 역할과 기능이 어휘에 담긴 거지요. 지금은 자녀들에 대해 무한책임을 지는 아빠의 자리에 있습니다. 모든 헌신으로 아이들을 키우지만, 어느 날이 되면 아버지의 자리로 옮겨 앉아야 합니다. 그 과정이 아름다우려면 아버지가 자녀들과의 대화에 새로운 눈을 떴으면 합니다. “아빠가 미안하다. 네 맘을 헤아리지 못해서”라는 생각으로. 소설가 이관순의 손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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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5-07
  • 음악은 천상의 소리
    밤바람이 선득한 주말. 저녁을 먹고 장자호수공원으로 산책을 나섰습니다. 사람들이 오가는 사이로 청아한 색소폰 연주음이 들려옵니다. 발길이 절로 이끌려 간 곳엔 한 분이 ‘셀프 콘서트’를 열고 있네요. 잔디밭에 앉아 연주가 끝날 때마다 박수를 칩니다. 연주력이 준수한데다 가을밤의 정취까지 더해져 색소폰 선율에 젖는 아름다운 가을밤을 즐겼지요. 음악은 사랑을 전하는 신의 소리라고 합니다. 모든 사람을 하나로 묶어 주지요. 음악은 연주자의 기쁨도 되지만 만인의 즐거움도 됩니다. 연주가의 재능을 부럽게 바라본 영화가 있습니다. ‘어거스트 러쉬.’ ‘음악은 사랑을 낳고 사랑은 운명을 부른다.‘는 말이 잘 어울린 영화지요. 밴드 싱어이자 기타리스트인 루이스와 촉망 받는 첼리스트 라일라의 보석보다 반짝였던 단 하루 밤 이후, 남자는 그녀를 한 번도 잊은 적 없고, 여자는 얼굴도 모르는 낳은 아이에 대한 그리움을 놓은 적이 없지요. 이들의 믿음 하나는 “음악이 있는 한 우리는 다시 만날 거야”라는 것. 부모의 DNA를 받은 아이는 일찍부터 놀라운 음악적 재능을 보입니다. 시설에서 자란 11세의 소년은 부모만이 자신의 음악을 알아볼 수 있다는 믿음 하나로 뉴욕을 찾아갑니다. 모든 게 신비한 뉴욕. 도시가 만드는 수많은 소리들이 소년의 청각에 음계로 포착됩니다. 소년은 아이들을 모아 거리에서 노래를 시키는 워저드를 만나 어거스트란 이름으로 거리 연주자로 등장해 천부적인 실력을 보입니다. 하루는 소리에 끌려 교회 합창단 연습장에 들렸다가 처음 보는 오선지와 오르간 앞에서 작곡하고 연주하는 놀라운 재능을 발휘합니다. 이를 지켜본 목사님이 줄리어드에 음악천재로 추천합니다. 줄리어드에서 사모곡 라프소디를 작곡해 주위를 놀라게 한 어거스트. 마침내 뉴욕필하모니 콘서트에 특별 출연자로 초청됩니다. 줄리어드 출신의 유명 첼리스트(엄마)와 함께. 하지만, 연주회를 앞두고 위기가 오죠. 워저드가 연습장에 나타나 아버지라며 친권을 주장하고 데려갑니다. 학교는 간곡히 연주회만큼은 보내달라고 부탁을 하지만 거절당하죠. 금관악기가 아이의 영혼을 뽑는다는 그릇된 인식으로... 다시 광장 연주에 나서는 어거스트. 부근을 지나던 루이스가 소리에 홀려 찾아오고, 금세 호흡을 맞추더니 황홀한 기타 2중주를 펼칩니다. 어거스트가 오늘 밤 있을 센트럴파크 공연을 알려주지만, 루이스는 귀에 담지 않고 “용기를 잃지 말라”는 말만 주고 떠납니다. 그날 밤, 어거스트는 친구의 도움으로 탈주에 성공해 연주장으로 달려가고, 지방공연에 나서던 루이스는 뉴욕 중심가에서 아이 얼굴이 나온 배너광고를 보지요. 전율을 느낀 그도 차를 버리고 연주회장으로 내달립니다. 환호 속에 첼로 연주를 끝낸 라일라가 아이를 생각하며 공원을 빠져나올 때, 줄리어드 총장이 특별초청 지휘자를 소개합니다. 무대에 등장하는 어거스트. 환호하는 청중... 놀라운 자작곡이 그의 지휘 속에 연주를 시작합니다. 밖을 향하던 라일라가 연주음에 끌려 뒤돌아서고, 또 반대편에서는 황홀한 눈빛의 루이스가 나타납니다. 마침내 무대 앞에 이르러 12년 만에 마주 서는 남과 여... 환희의 포옹을 할 때 지휘하는 아이의 모습이 비칩니다. 세상에는 수많은 소리들로 가득 차 있지요. 귀를 기울인 만큼 들리기도 하고 지나치기도 합니다. 끊임없이 들리는 세상의 소리를 옮겨 작곡하고 연주하는 음악천재가 말하죠. “아이들이 동화를 믿듯 저는 음악을 믿어요. 부모님이 살아계신다면 제 음악을 꼭 듣게 될 거야요.” 어거스트의 간절한 믿음처럼 나는 어떤 믿음을 확신하며 살고 있나요? 글 이관순(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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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4-29
  • 내 앉아있는 자리
    스산한 바람에 비까지 흩뿌리니 단풍은 지고 낙엽만 우수수 쌓입니다. 이렇듯 나무도 꽃도 지상의 모든 생명들이 사이즈를 줄이는 시기입니다. 그것이 한 주기의 마지막 겨울을 상대하는 지혜입니다. 사람이 나이가 든다는 것 또한 사이즈를 줄이는 것으로 시작됩니다. 몸집이 줄고, 먹는 게 줄듯 이것이 절제의 근본이며 이치입니다. 세상에 나올 때 작게 나왔으니 돌아갈 때도 비우고 작게 돌아가야 합니다. 여기에는 실상과 허상이 공존하지만 스스로 말수를 줄이고, 욕심도 미움도 줄이고, 자랑, 명예 같은 덧없는 것은 날려야 합니다. 그래야 사이즈가 줄지요. 루디 세네카는 “인간은 마치 시간이 모자란다고 불평하면서, 마치 시간이 무한정인 것처럼 행동한다.”고 사람의 어리석음을 비꼬았지요. 그런데 사람은 이를 알면서도 어제의 습관을 오늘도 고집하고 삽니다. 친구가 많다고 자랑하시나요? 바쁜 것을 미덕으로 생각하셨나요? 그보다는 흉금을 터놓고 말할 한 사람의 친구가 더 소중한 때입니다. 친구도, 만남도, 분주함도 지혜롭게 줄여가는 것이 노년의 삶을 가볍게 하고 실수를 줄이는 방법입니다. 우리 몸은 수분이 80% 이상이라고 하죠. 비슷한 비율로 우리 삶을 주장하고 있는 것이 말입니다. 그만큼 물과 말은 몸을 유지하고 삶을 구성하는 중요한 요소입니다. 그래서 절제를 말할 때 가장 먼저 꼽는 게 말입니다. 내가 살면서 토해낸 말을 양으로 계측한다면 얼마나 될까. 그중 꼭 필요했던 말은 얼마쯤 일까. 이제는 할 말 못할 말, 안 해도 좋을 말, 상처 주는 말을 가려가며 했으면 합니다. 내뱉은 말은 흘러간 세월처럼 돌릴 수 없으니... 그래서 이랬으면 좋겠습니다. “이제는 많이 들어주자. 듣는 귀는 8로 열고 말하는 입은 2로 줄이자. 남이 말할 때 자르지 말자. 중간에 끼어들지 말자. 말 줄기를 돌리지 말자.” 비위 상한다고 파르르, 욱, 버럭 하는 감정도 이젠 삭혀 없애야 합니다. 행여 그런 상황이 되면 심호흡 한 번으로 날려버리세요. 대신 많이 웃어주면 좋겠습니다. 상대가 가족, 친구, 이웃, 누구든 만나면 웃는 것으로 말문을 열어요. 나이가 들면 웃는 근육도 굳는다는데, 얼굴에 웃음기마저 빠지면 노인 특유의 표정 없는 일그러진 인상만 남아요. 나이가 든다는 것은 옻칠을 더하는 것처럼 윤을 내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미움이나 시기, 질투는 다 헛된 뜬구름이지요. 뜬구름을 좇다가 낯선 곳에 서 있는 나를 발견하는 건 아픈 일입니다. 살고 있는 이날, 앉아 있는 이 자리가 내가 족해야 할 자리임을 아는 사람은 행복합니다. 이 나이에 맘대로 못할 게 뭐야. 하지만 나이가 들수록 남을 배려하며 사는 인생이 아름답습니다. 살아보니 ‘역지사지(易地思之)’ 이상의 스승은 없더군요. 사서삼경이 대단한 게 아니라, 상대편 입장을 늘 먼저 헤아리면 그것이 상선의 절제입니다. “오죽했으면... 그래 저럴 수 있겠다... 나도 그 입장이면... 저도 사람인데.” 글 이관순(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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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4-22
  • 너도 죽는다‘메멘토 모리’
    말에는 묘한 힘이 있어 곱씹을수록 향기를 내는 말이 있고, 겸손함을 가르치는 말도 있지요. 라틴어는 그런 철학적 의미를 함의한 말과 글이 꽤 많습니다. 언젠가의 기억입니다. KBS TV '도전 골든벨‘에서 최후 1인이 된 학생에게 50번 마지막 골든벨 문제가 주어집니다. “고대 로마에서 승리를 쟁취한 장군이 개선행진을 할 때 주위에서 외쳤던 라틴어는?“ “메멘토 모리" 영예의 골든벨이 울리는 짜릿한 순간을 지켜보았지요. 다소 생소한 라틴어 '메멘토 모리(memento mori)'는 '죽음을 기억하라‘는 뜻입니다. 유래는 로마 공화정의 개선식으로 거슬러 올라가요. 개선식은 전쟁에서 승리한 장군에게 주어지는 영예입니다. 개선장군은 관습에 따라 전차를 타고 퍼레이드를 벌입니다. 영웅이 탄 마차가 시민의 환호 속을 헤치고 행진하는 동안 뒤에서 노예들이 큰소리로 외쳐댑니다. 메멘토 모리! 메멘토 모리! “오늘은 개선장군이지만 너도 언젠가는 죽는다. 겸손하게 행동하라.” 승리에 도취된 장군에게 본분을 잊지 않도록 경각심을 주는 장치인 셈이죠. 로마 최고의 환대 속에서도 너는 신이 아닌, 한 인간일 뿐임을 알린 것입니다. 메멘토 모리에는 세 가지 철학적 가치가 내재되어 있습니다. ‘죽음을 기억하라. 운명을 사랑하라. 현재에 충실하라.’ 이 셋은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도 적용되는 훌륭한 교훈입니다. 스티브 잡스도 스탠퍼드대 졸업식 축하 연설에서 이를 강조했습니다. 췌장암 투병으로 힘든 시기를 보내던 그는 ‘죽음은 삶이 만든 최고의 발명품‘이라고 격찬합니다. 그러므로 제한된 인간의 시간을 다른 누군가의 인생을 살 듯 낭비하지 말고 자신을 믿고 집중하라고 졸업하는 학생들에게 말합니다. 뜻이 통하는 라틴어에 ‘카르페 디엠(carpe diem)'이 있습니다. 몬래 이 말은 신을 공경하고 오만해지지 말라는, 현재를 가치 있게 살라는 뜻인데 이후 기독교 영향을 받아 현세의 부귀나 영화의 부질없음을 알립니다. 우리에게도 ‘화무십일홍’이란 말이 있죠. 열흘 가는 붉은 꽃이 없다는 이 말엔 ‘한 번 흥한 것은 반드시 쇠한다.’ 는 속뜻을 지닙니다. 트로트 가수 김연자가 불러 유명한 노래 ‘아모르 파티’도 같은 말입니다. 사랑을 뜻하는 아모르와 운명을 뜻하는 파티가 합성된 라틴어로 이 또한 ‘운명을 사랑하라’는 말이지요. 인간이 가져야 할 삶의 태도로 철학자 니체가 처음 사용했습니다. 메멘토 모리는 미국 남서부에 거주해온 나바호족에서도 찾을 수 있어요. 그들은 “네가 세상에 울면서 태어날 때 세상은 기뻐했으니, 네가 죽을 때 세상은 울어도 너는 기뻐할 수 있도록, 그러한 삶을 살아라.”는 의미심장한 철학을 닮고 있습니다. <메멘토 모리>, <카르페 디엠>, <아모르 파티>, <화무십일홍>까지 모두 겸손한 삶을 가르칩니다. 제한된 시간을 사는 인생에게 죽음을 기억하고, 운명을 사랑하고, 오늘에 충실하라.... 이보다 더 삶을 성찰하게 하는 말이 또 있을까 싶습니다. 글/ 이관순(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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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4-15
  • 의리가 사라진 세상
    짓궂은 질문을 해봅니다. ‘사람’과 ‘인간’은 같은 거야? 사전의 설명은 비슷 하지만, 아무래도 “저 인간!” 하면 부정적 이미지가 앞서죠. “저 사람 인품이 좋아”로는 써도 “저 인간 인품이 좋다”고 말하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세상에 사람 같지 않은 인간이 많다보니 용례까지 헷갈립니다. 초등학교 국어 교과서의 ‘의좋은 형제’를 생각하면 지금도 마음이 훈훈합니다. 우애 좋은 형제가 가을 수확을 마치고 들판에 볏단으로 노적가리를 만듭니다. 형이 보니 아우네 것이 적어 보입니다. 그날 밤, 어려운 아우 형편을 안 형이 자신의 볏단을 옮겨 놓고, 다음날 밤은 식솔 많은 형을 생각한 아우가 반대로 볏단을 옮기지요. 노적가리가 줄지 않자 형제 다 고개를 갸우뚱합니다. 마침내 볏단을 옮기던 형제가 달빛 아래 마주치면서 얘기는 끝나죠. 그때의 감동으로 습자시간이면 붓글씨를 ‘노적가리 풍년일세’만 썼던 기억이 납니다. 가난해도 마음은 풍년인 사람들이 살던 시절이 있었지요. 엊그제 복권 당첨금이 살인흉기가 된 사건이 났습니다. 우애 좋은 형제가 복권 당첨으로 수억 원의 당첨금을 받아 배분까지는 성공했는데, 그 돈으로 사업을 했던 형이 망하며 사단이 납니다. 돈을 더 요구하는 형과 보증을 선 동생 간에 감정이 충돌하다 동생을 살해하는 일이 벌어진 겁니다. 황금만큼 요괴스러운 것은 없습니다. 돈 앞에 장사가 없다지요. 일본 속담에 ‘담배꽁초와 돈은 쌓일수록 냄새가 난다’고 했습니다. 돈이 사람을 부패하게 만든다는 뜻이겠지요. 사는 것은 전보다 풍족해도 인성은 강퍅해졌습니다. 돈을 둘러싼 이기적 욕망이 칼끝처럼 첨예하게 부딪치는 세상입니다. 개신교의 큰 어른이셨던 목사님이 생전에 우리교회에 오셔서 당신이 붓으로 큼직하게 쓴 ‘의리를 지키자’란 글귀를 강단에 내리고 설교를 하신 적이 있습니다. 세상이 오죽하면 의리를 부탁했을까요. 사람과 사람,관계 사이에 의리가 사라졌다고 탄식하는 소리가 높아만 집니다. 제목을 잊은 영화입니다. 세 친구가 딱 한 번 은행을 털어 깨끗하게 살자며 치밀한 준비를 합니다. 그들의 거사는 성공했고 무사히 안전지대에 도착하자 돈다발을 놓고 환호합니다. 한 친구가 축배를 들자며 나갔다가 술에 독을 타서 옵니다. 욕심이 생긴 거죠. 태연하게 돌아온 친구가 술잔을 건네고 축배를 외칠 때, 팡팡! 술 사온 친구가 고꾸라지고 남은 둘은 낄낄댑니다. 뛰는 놈 위에 나는 놈이 있거든요. 둘은 더 큰소리로 건배를 외치지만 독배를 든 이들도 쓰러집니다. ‘사람에게 의리 빼면 시체’ 라고 말하던 세상이 있었지요. 의리란 뜻은 ‘사람관계에서 마땅히 지켜야 할 도리’로, 여기엔 사람이 갖춰야 할 덕목이 다 녹아져 있죠. 가난은 견뎌내기 어려운 것임을 경험한 세대가 모이면 그래도 그때가 좋았다고 반추합니다. 의리가 사라진 곳에 먹잇감을 놓고 으르렁 대는 동물세계가 어른댑니다. 사람 사이 흐르는 체온 대신 물질을 향한 충혈 된 눈빛만 섬뜩하니 사람은 없고 인간만 남아 보입니다. 다시 사전을 봅니다. ‘인간’이란 단어의 기본설명 뒤로 ‘사람의 모습은 하고 있되 사람답지 못하다는 뜻.’을 추가하고 예문도 달았군요. “저 인간이 한 짓을 생각하면 돌아버리겠어.” 너무도 흔히 듣는 슬픈 말이 됐습니다. 글 이관순(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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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4-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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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연도 인생도 곡선입니다
    사람 사는 게 꼭 등산 같다고 해 인생여등산(人生如登山)이란 말이 나왔어요. 때론 난관에 부딪히고 때론 길을 잘못 들어 헤매긴 해도 그렇게 한 걸음씩 내디디면서 자신만의 길을 만들어 갑니다. 인생이 그렇고 역사가 그래요. 7080 세대만큼 인생을 치열하게 산 사람도 없습니다. 까라면 까고, 박으라면 박고, 막힌 건 뚫어냈지요. 무슨 일이든 맡기면 군말 없이 척척 해냈던 세대입니다. 대한민국이 여기까지 오는 데는 그들의 ‘빨리빨리’란 과도한 집념이 큰 역할을 했습니다. 제 몸 상하는 줄도 모르고서… 빨리빨리는 그 세대가 숭앙했던 미덕이었으니까요. 그러나 압축성장으로 경제대국이란 등반엔 성공하지만, 뒤란에 들인 그늘도 많습니다. 성장에 가려 배분이 공평하지 못했고 잘못 든 길도 있었어요. 우리 삶에 자리 잡은 직선이란 가치가 그렇습니다. 당시 직선은 선택이 아닌 필수였어요. 돈도 기술도 없이 앞선 자를 따라잡자니 힘에 부치고 자연 빠른 직선을 선호하게 되면서 집념이 신념으로 바뀌었습니다. 이념보다 무서운 게 신념이니까요. 현대인의 큰 오류는 직선에서 시작됐습니다. 시발점에 증기 기관차 발명이 가져온 철도가 있어요. 산에 막히면 터널을 뚫고, 물길에 막히면 다리를 놓았지요. 직선의 효능이 확인될수록 수난을 당하는 건 자연의 곡선들입니다. 철도, 고속도로, 길이란 길은 모두 직선으로 뻗어갔습니다. 이젠 마을 길까지 외곽으로 직선화하는 조급증을 앓고 있지요. 직선의 효능은 다시금 주거공간으로 파고들었어요. 한강변에 즐비한 성냥갑 아파트는 압축성장을 상징한 한국건축의 표상입니다. 수백 년의 서구 문화를 우린 수십 년 만에 뚝딱 해치웠으니까요. ‘굽은 건 죄다 펴라.’ 이젠 구불구불한 섬까지 직선의 유혹에 휘말렸어요. 육지와 연결한 연육교란 말이 고전으로 밀려난 지 오래고 십수 km 밖 섬과 육지를 연결하는 ‘ㅇㅇ대교’ 같은 이름의 대로가 깔렸지요. 그 많은 섬들이 쭉쭉 뻗은 다리와 길로 연결되면서 섬의 고유한 맛을 잃었습니다. 육지와 이어진 섬들은 급속히 육지 문화에 물들고 특유의 낭만과 쉼을 주던 바닷가 풍경은 기억 속으로 숨었어요. 자연을 이기적으로 다룬 ‘직선’은 언젠가 재앙으로 돌아옵니다. 인류가 안고 있는 환경문제의 바탕엔 ‘직선의 유혹’이 깔려 있어요. 편리함이란 달콤함에 고귀한 가치를 버린 겁니다. 계층, 세대 간 갈등 역시 직선을 앞세운 압축성장이 남긴 이름에 다름 아닙니다. 내 직선의 행위가 칼날이 돼 상처를 주고, 그것이 내 상처로 돌아옴을 알 때는 시간이 흐른 후가 되겠죠 자연은 직선이 아니라 ’곡선‘입니다. 자연의 한쪽인 인간의 삶도 곡선입니다. 평균수명이 환갑도 안 될 때는 짧은 해에 서둘러야 했지만, 100세 시대에는 호흡을 길게 가져가야 해요. 성공신퇴(成功身退)란 말처럼 어느 나이에 이르면 내려올 준비를 잘 해야 합니다. 산을 아는 사람은 정상에 오르는 것을 등산이라 말하지 않아요. 중요한 것은 무사히 하산하는 것입니다. 인생을 잘 살고도 마지막 길이 헝클어지면, 허망하기 짝이 없습니다. 몇몇 톱스타들의 말년 소식을 접하면서 마음 아픈 것도 그 때문이죠. 석양을 등 진 사람일수록 조심스러운 게 내려오는 길입니다. 자연 속에서 마음이 편안해 짐은 자연의 착한 곡선 때문입니다. 나무와 숲, 바위, 작은 돌멩이, 풀포기까지 곡선 아닌 것이 없어요. 곡선의 회복은 자연의 순응이고 재활입니다. 그동안 빨리 걷느라 다리도 아프고 지쳤으니, 이젠 천천히 생각하며 걸어요. 주변을 살피고 나도 성찰하면서 구불구불한 숲길을 밟듯이 도란도란 얘기 나누며 걸어야 노년 인생이 여유롭습니다. 곡선에는 틈이 생깁니다. 그 틈으로 햇살이 파고들어요. 틈이 보이지 않는 사람은 잘 나고 똑똑해도 정 주기가 쉽지 않아요. 화려하지만 온기라곤 없는 대리석과 같으니까요. 틈이 있어야 물이 스며들고 땅을 촉촉이 적십니다. 사람도 틈이 있어야 합니다. 좀은 허술한 구석이 있고 틈을 보여야 그 틈으로 바람이 불고 꽃향기가 들어오고 사람들이 찾아옵니다. 틈과 곡선이 삶을 따뜻하게 만듭니다. 틈과 곡선은 현대인의 허점이 아니라 넉넉함과 여유로움입니다. 100세 시대가 행복하려면 꼬부랑 인생길을 돌 때, 더불어 함께 걸을 사람이 있어야 합니다. 그것은 서로가 틈을 열어 살을 비비고 체온을 전하면서 희로애락을 나누는 일입니다. 내가 먼저 그의 틈으로 찾아드는 물이 되고 햇빛이 된다면 보다 행복해질 거예요. 나의 행복, 나의 낙원은 스치며 도는 지금 이 자리, 이 틈에 있어요. ‘Here & Now.’ -소설가/ daumcafe 이관순의 손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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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3-13
  • 흔들리며 오는 봄
    “산 너머 남촌에는 누가 살길래 해마다 봄바람이 남에서 오네...” 오늘아침 FM방송에서 박재란의 봄노래를 들으며 달력을 보았습니다. ‘국경의 밤’을 쓴 김동환의 시에 곡을 붙인 그녀의 명곡입니다. “꽃피는 4월이면 진달래 향기, 밀 익는 5월이면 보리 내음새, 어느 것 한 가지인들 실어 안 오리 남에서 남풍 불 때 나는 좋데나...” 아직은 조석에 이는 바람이 매워도 더는 봄을 막지 못합니다. 그럼에도 봄을 노래하지 못하는 건 녹록지 않은 안팎의 환경 탓이겠죠. 무지막지한 러시아의 침공으로 백척간두에서 바람 앞의 등불처럼 흔들리는 우크라이나의 아픔이 그렇고... 방역 성공을 자랑하던 나라가 하루 코로나 확진자 수 세계 1위라는 순위도 가시처럼 목에 걸려요. 모진 겨울을 털어내지 못하는 이유입니다. 일상의 봄으로 가는 고비가 이렇게 힘겹습니다. 옛날, 작은 왕국이 있었어요. 인자한 왕과 착한 백성이 평화를 사랑하는 행복한 소왕국입니다. 여기에도 남이 잘 되는 꼴을 보지 못하는 마법사가 있었어요. 하루는 왕을 찾아가 백성 흉을 늘어놨어요. 백성을 믿다가 발등 찍힌다고 이간질을 했습니다. 그러나 왕은 사악한 마법사를 쫓아냅니다. 그러자 이번엔 백성 대표를 찾아가 왕의 간악함을 알렸어요. 왕이 머잖아 백성을 내치고 재산을 몰수할 것이라고. 대표들도 마법사 말에 현혹되지 않고 그를 내쫓았습니다. 왕과 백성 모두 에게 박대를 당한 마법사는 약이 머리끝까지 올랐어요. 왕국에 어떻게 복수할까를 생각하다 엄청난 일을 꾸몄어요. 자신이 지닌 바이러스를 퍼뜨리기로 한 겁니다. 마법사는 모두가 잠든 새벽, 백성들이 사용하는 우물에 바이러스를 풀었어요. 효과는 곧바로 나타났지요. 우물물을 마신 사람들이 미쳐 날뛰기 시작했습니다. 우물을 따로 쓰는 왕의 가족만 빼고요. 흥분한 백성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옵니다. 평화의 왕국이 한순간 미친 왕국이 돼버린 거예요. 왕은 혼란을 통제하기 위해 긴급조치를 발동했습니다. 그러나 이를 시행할 관청이나 치안을 맡은 경찰이 이미 바이러스에 중독된 상태여서 왕명에 복종을 거부합니다. “이런 말도 안 되는 왕명은 받들 필요가 없다”라며 오히려 왕을 비난했습니다. 백성들은 왕이 미쳐버렸다고 탄식의 소리를 높였어요. 시위대로 돌변한 백성들이 궁궐 앞으로 몰려들더니 왕의 하야를 외치기 시작합니다. 상황은 갈수록 악화될 조짐을 보였어요. 절망에 빠진 왕이 하야를 고민합니다. 그때 지혜로운 왕비가 묘안을 냈어요. “우리도 저들과 똑같은 우물물을 마셔보자고요. 그러면 백성과 같아질 게 아니겠어요?” 정신이 온전하든 돌아버리든 백성과 같아지면 더 이상 왕을 비난하진 못할 것이라고 말입니다. 왕은 시녀에게 우물물을 길어 오게 하고 왕비와 함께 그 물을 마셨습니다. 그러자 왕이 희한한 헛소리를 시작합니다. 그것을 본 백성들이 환호합니다. “와! 우리 왕이 제정신을 찾으셨다”라며. 백성들은 왕을 악령으로부터 보호해야 한다면서 고을마다 ‘왕빠’들이 앞장서 결사옹위를 다짐합니다. 왕국에는 잃었던 평화가 찾아왔어요. 왕과 백성이 생각과 마음이 같아 지면서 모든 사물이 정상으로 보였습니다. 마을이 평온을 찾자 심기가 상한 마법사가 이번에는 우물에다 바이러스 해독제를 풀었어요. 이물을 마신 신하들이 또 왕이 이상해졌다며 숙덕입니다. 삽시에 왕이 다시 미쳤다는 소문이 돌았어요. 백성들의 원성은 높아지고, 신하들은 망령이 도졌다며 왕은 말도 안 되는 명을 거두라고 반발합니다. “미친 왕은 하야하라.” 금세 시위대가 들끓어 올랐고, 왕은 할 수 없이 하야를 결심하는데 왕비가 새로 길어온 우물물을 들고 나타납니다. 물을 마신 왕은 다시 정상이 됐고 나라도 마침내 평온을 찾았지요. 우리가 사는 것이 새날 같지만 실은 데자뷔 같은 세상을 사는 거예요. 정상과 비정상이 주기적으로 바뀌고 진심과 사심(邪心)이 모호해져 분별력을 잃게도 하죠. 그제 전철을 타고 양수리를 찾았습니다. 운길산역에서 철길을 건너 강변을 따라 걸으면 발 끝에 ‘두물경’이라 쓰인 돌비석과 만납니다. 결빙과 해빙이 공존한 곳…. 밀려나는 겨울과 밀려오는 봄이 합수하는 때가 지금입니다. 두 강줄기가 합수해 만든 호수와 팔 벌린 운길산과 검단산이 사방으로 열어놓은 아름다운 경관과 조우합니다. 암록빛 강물과 강가 버드나무에 스치는 연록 빛과 억새 위로 소복이 내려 앉는 봄볕들…. 봄은 강을 타고 오른다는 말이 맞아요. 두 시간 남짓, 친구와 둘이서 겨우내 눅눅했던 마음을 훈풍에 말리고, 따뜻한 자연의 성정과 위로를 청하기도 하면서…. 자연이 주는 위로는 늘 어질고 진실됩니다. 엄혹했던 겨울을 이기고 찾아오는 봄소식을 듣습니다. 강화도 친구가 담장 아래 잔설을 헤집고 꽃대를 올린 복수초 사진을 보내오고, 횡성에 사는 친지는 변산바람꽃 소식을 담아보냈습니다. 봄의 특징은 바람입니다. 봄은 흔들리며 옵니다. 꽃도 흔들리며 피고, 가지들도 흔들리며 잎을 냅니다. 바람이 생명을 깨우고 봄길을 열어요. 봄을 이기는 겨울은 없다더니, 어둑한 동네 골목에도 춘광이 쌓입니다. 코로나 후유증으로 고생하는 친구, 자식을 잃고도, 공장을 불태우고도, 숯덩이 된 가슴으로 이 봄을 맞는 사랑하는 내 이웃들…. 꿋꿋하게 겨울을 이겨낸 이들이 고맙습니다. 이 봄에 전하고 싶은 안부는 살아 있음에 감사하는 농밀한 마음입니다. “잘 했어, 잘 하고 있어, 잘 할 거야.” -소설가/ daumcafe 이관순의 손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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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3-09
  • 세계 민주주의는 왜 후퇴하고 있는가?
    지난해 12월 9일, 바이든 미국 대통령은 백악관에서 전세계 110개국 정상들이 참가한 '민주주의 정상회의'를 개최하였다. 여기에서 바이든 대통령은 "우리가 민주주의의 후퇴를 방치할 것인가?, 아니면 인류의 진보와 자유를 위해 비전과 용기를 함께 가질 것인가?"를 결정해야 될 중대한 서점에 직면해 있다고 민주주의의 위기를 지적하였다. 이어서 "외부의 독재자들은 전 세계에 영향력을 확대하며 그들의 힘을 키우고 억압적 정책을 정당화하려 하고 한다"며 중국과 러시아 등을 겨냥하는 강력한 의지를 펴가겠다는 결의를 밝혔다. 이번 회의에는 중국과 러시아를 비롯, 헝가리· 터키 등은 독재체제 국가들은 초청되지 않았다. 힌퍈 스웨덴 스톡홀름에 기반을 둔 비영리단체 국제민주주의·선거지원기구(IDEA)는 ‘2021년 세계 민주주의 현황 보고서’를 발표하였다. 165개국의 민주주의 지수를 평가한 결과 코로나19 팬데믹 기간인 지난해부터 올해까지 2년간 권위주의 정권 방향으로 이동한 국가는 미얀마, 아프가니스탄, 코트디부아르, 세르비아, 말리, 콩고민주공화국 등 6개 국가이다. 이에 반해 민주주의 정권 방향으로 이동한 나라는 볼리비아, 잠비아 등 2곳뿐이다. 이와 같이 권위주의 쪽으로 이동한 나라가 민주주의 쪽으로 이동한 나라보다 많은 경향은 2016년 이후 5년 연속 이어지고 있다고 밝히고 있다. 최근 들어 세계 곳곳에서 민주주의 후퇴의 조짐이 나타나고 있다. 헝가리, 터키, 태국, 필리핀, 러시아 등 신생 민주주의 국가들에서뿐만 아니라, 미국의 트럼프 현상, 영국의 브렉시트 국민투표, 그리고 유럽 각국에서 극우 정당, 포퓰리즘 정당의 부상을 들고 있다. 이는 민주주의는 언제나 완성된 상태가 아니라 언제라도 도전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입증하고 있어 민주주의를 지켜 나가야 한다는 원칙을 세계 각국에게 되새기게 하고 있다. 오랫동안 민주주의는 인간이 만든 정치제도 가운데 가장 합리적이고 타당하다고 여겨졌다. 20세기 들어 폭력과 압제에 대항한 전세계의 진취적 운동엔 예외 없이 ‘민주주의’ 또는 ‘민주주의적’이라는 수식어가 붙었다. 1930~40년대 파시즘에 대항한 서구 민주주의 블록의 승리와 1970년대 초부터 아시아 남미 아프리카를 휩쓸었던 제3의 민주화운동, 1989년 베를린장벽 붕괴와 동유럽 민주화, 그리고 가장 최근에는 ‘아랍의 봄’까지, 민주주의는 현대시대의 패러다임이고 역사의 진보에 부합하는것이 현재의 추세라고 할 것이다. 하지만 요즈음 전세계, 특히 선진국이라 불리는 미국과 유럽에서 민주주의가 항상 앞으로 전진하고 공고하게 뿌리를 내리는 건 아니란 사실을 우리들에게 알려주고 있다. 즉 민주주의가 지속가능한 제도와 위기의 신호라는 두 방향에서 왔다 갔다는 방황하는 현상을 우리들은 목격할 수 있다. 자칫 민주주의가 권위주의로의 복귀되는 모습을 보이고 있어 세계 여러 나라에서 권위주의적 정치인이 국민 지지를 받아 권좌에 올라 민주주의 가치를 침해하는 사례가 크게 늘어 나고 있다. 민주주의 교본 같던 미국에서 2016년 도널드 트럼프 공화당 후보가 대통령에 당선된 이후 민주주의가 크게 후퇴하는 모습을 지켜 보아야 했다. 트럼프는 당시 선거 결과에 승복하지 않을 수 있다면서 공공연하게 폭력을 부추겼다. 또 힐러리 클린턴이 국민 총투표에선 300만표가량 이겼는데도 “수백만명의 불법투표를 빼면 (선거인단뿐 아니라 총투표에서도) 내가 이겼다”고 명백한 거짓말을 했다. 4년 뒤인 2020년 11월 대선에서 트럼프가 재선에 실패한 뒤 그의 지지자들이 워싱턴 의사당 건물을 점거하는 초유의 폭력사태를 일으킨 건 민주주의 위기가 현실화하고 있음을 잘 보여줬다. 또 하나는 민주주의가 지향했던 ‘소수와 약자 권리의 확대’ 대신에 ‘다수 이익의 옹호’에 복귀하는 포퓰리즘의 확산이다. 2016년 영국의 유럽연합 탈퇴(브렉시트) 결정에는 이슬람 난민을 받아들이라는 유럽연합 할당제에 대한 영국민들의 정서적 반발이 한 이유로 작용했다. 2019년 5월 유럽의회 선거에서 극우 교섭단체들이 약진한 건 그런 연장선상에 있다. 이 선거에서 유럽 통합에 반대하는 교섭단체 ‘자유와 직접민주주의의 유럽’(EFDD)은 41석에서 54석으로, 극우 민족주의 성향의 ‘국가와 자유의 유럽’(ENF)은 37석에서 58석으로 의석을 크게 늘렸다. 프랑스에선 마린 르펜이 이끄는 ‘국민연합’이 74석의 프랑스 몫 유럽의회 의석 중 22석을 차지해 제1당에 올랐고, 이탈리아와 폴란드에서도 극우 성향 정당이 제1당에 올라 유럽연합 앞날을 어둡게 했다고 ‘이코노미스트’지는 분석했다. 이들 정당의 공통점은 이민자에게 적대적이라는 점이다.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이 재임 시절 무슬림의 입국규제 정책을 추진하고, 미국-멕시코 국경에 장벽을 세운 것은 유럽의 반이민 흐름과 맥을 같이하는 것이라고 여겨진다. 우리나라는 2016년 촛불혁명으로 민주주의 후퇴라는 거대한 흐름을 차단시키고 수백만 시민의 자발적 참여로 절차적 민주주의를 회복시켰다. 결국 ‘모든 권력은 국민에게 있고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는 주권재민(主權在民)의 원칙을 확립시키는데 크게 기여하였다. 이런 촛불혁명은 홍콩 민주화 시위를 거쳐 최근 미얀마에서 군부 쿠데타에 반대하는 시민들의 결연한 저항운동으로 이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한국정치학회장인 김남국 고려대 교수는 “신자유주의 확산으로 세계적 양극화가 심화하면서, 경제적 형편만 나아지면 절차적 민주주의는 유보해도 좋다는 인식이 확산됐고 민주주의 제도에 대한 신뢰도 약해졌다. 그런데 한국의 촛불집회는 경제적 이해 또는 종교적·인종적 이해가 아니라 절차적 민주주의를 회복하자는 운동에서 시작해 ‘국민주권’을 분명하게 확인하는 단계까지 나갔다. 민주주의 가치를 위해 이렇게 대규모 인원이 평화적으로 집회시위에 참여한 건 세계적으로 드문 일이었다. 이것이 2016년 촛불의 세계사적, 역사적 의미라고 본다”고 설명했다. 박근혜 정부의 민주주의 역행에 분노해 주말마다 광화문에 모여 성토하고 단체 카톡방이나 동호회가 활성화되면서 86세대의 재결집과 정치적 관심을 다시 높이는 계기로 작용했던 촛불혁명은 민주주의 수호에 대한 국민들의 의지는 뚜렷하게 살아있다고 할 것이다. 2012년 대통령 선거 과정에서 국가정보원의 댓글 사건이 드러났고, 2017년 대통령 선거 과정에서 드루킹 사건이 일어났다. 더욱이 2020년 국회의원 선거 이후에서는 사회 일각에서 선거 개표 부정을 주장하는 등 선거 공정성과 관련된 시비가 이어지고 있어 건강한 민주주의의 기반을 해친다는 세력도 여전히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지난해 12월 4일, 프란치스코 교황이 서구 민주주의의 발상지인 그리스에서 “포퓰리즘(대중영합주의)과 권위주의 정치의 전 세계적 부상을 경계해야 한다”고 경고하였다. 이어서 “이곳에서 탄생한 민주주의는 지난 수천년간 (인류 문명에) 뿌리를 내려 오늘날 유럽연합(EU)의 탄생으로 연결됐다”면서 “하지만 우리는 지금 전 세계에서 민주주의가 후퇴하는 현실을 보고 있으며, 이를 우려하지 않을 수 없다”고 말했다. 그리고 “참여와 노력, 인내를 필요로 하는 민주주의보다 권위주의의 독단과 포퓰리즘이 더 유혹적일 수 있지만 사회적 안전에 대한 우려와 정체성 상실에 대한 두려움이 있어 우린 민주주의를 회복시켜 나가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역사적으로 민주주의는 세계 인류가 다함께 행복해 질 수 있는 가장 발달된 제도이며 이는 권위주의를 도모하는 세력에 의해서 언제든지 농락될 수 있기 때문에 국민이 지켜 나가야 하는 것이다.
    • 오피니언
    • 기고
    2022-02-20
  • 중소기업을 살립시다
    조선 후기 실학자 박제가는 『북학의』에서 소비의 중요성을 우물에 비유한 점이 돋보인다. 그에 의하면 재물은 우물과 같다. 우물은 퍼 쓸수록 자꾸 새 물로 채워지고 이용하지 않으면 우물은 말라버리고 메워진다. 이어서 그는 비단옷을 입지 않으면 비단 짜는 사람이 없어지고 즉 비단 짜는 여공이 없어지고 결국에는 비단 짜는 기술마저 없어지고 만다는 것이다. 전 세계가 코로나19의 재앙으로 나라마다 국민의 고통이 이루 말할 수 없이 크다. 소비가 줄어들어 자영업자들이 길거리로 나와 연일 경제적 고통을 하소연하고 있다. 소비의 절벽으로 생산이 멈추고 이로 인하여 생산에 종사하던 가장들이 삶의 터전을 잃고 실의에 빠져있다. 국가는 국고를 열어 재난지원금으로 임시 처방하여 성난 민심을 잠재우려 하지만 어느 때까지 이것이 가능할까? 경제활동이란 사람이 생활에 필요한 재화와 서비스를 생산하고 분배하며 소비하는 활동을 총칭한다. 이러한 경제활동은 시계의 톱니처럼 맞물려 돌아가고 있다. 즉 가계는 기업에 생산 요소를 제공하고 그 댓가로 소득을 얻어 소비한다. 기업은 가계가 제공한 생산요소를 이용하여 재화와 서비스를 생산하여 이윤을 추구하고, 정부는 가계와 기업이 낸 세금으로 공공재를 생산하고 기업이 생산한 재화와 서비스를 소비한다. 우리의 지체 중 어느 한 부분이 아프면 그 고통은 몸 전체가 느끼게 된다. 경제도 마찬가지이다. 소비의 단절은 생산을 멈추게 하고, 생산의 단절은 기업의 파산과 개인의 실업으로 이어진다. 이러한 파산과 실업의 고통은 경험해보지 않고는 그 고통을 이해할 수 없다. 이러한 고통이 결국 국가의 위기를 초래한다. 여기 국민 모두 함께 잘 살 수 있는 상생의 길이 있다. 조선 후기 실학자 박제가의 ‘우물론’에서 그 해답을 구할 수 있다. 우물을 자꾸 퍼내어야 새 물이 솟아난다. 새 물이 솟아날 때 목마른 시민들은 우물가에 몰려든다. 우물가에 몰려든 많은 사람들은 우물의 부족을 느끼게 되어 또 하나의 우물을 파게 된다. 경제활동에서 소비가 미덕이 될 수 있다. 여기서 과소비를 찬양하는 것은 아니다. 분수에 맞지 않는 소비를 유도함은 더욱 아니다. 그러나 어느 정도 여유가 있는 개인은 소비를 늘려 주어야 한다. 이것이 경기 침체로 실의에 빠진 이웃을 사랑하는 길이고 국가 경제를 살리는 방안이기도 하다. 소비가 생산을 부르고, 생산이 기술의 혁신을 부르고, 기술의 혁신이 국가 경제의 신화를 창조한다. 신화 창조의 과정에서 흄페터가 말하는 창조적 파괴가 일어나게 되고 국가의 경제가 발전하게 된다. 경제활동에서 상생과 번영의 길은 늘 우리 곁에 가까이 있다. 경제 침체로 신음하는 중소기업을 돌아보고 소비의 미덕을 발휘하여 중소기업에 경제적 신화 창조가 있게 하자. 당진시 경제연구원장 이성주 (전, 숭실대학교 경제학과 겸임교수) <주요 경력> - 면천중학교, 예산고등학교 졸업 - 고려대학교 경제학과, 고려대학교 대학원 졸업(경제학 박사) - LG전자 기획관리실(전) - 공무원 시험 출제위원 역임 - 한국경제교육학회 부회장(현) - 숭실대학교 경제학과 겸임교수(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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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1-23
  • 후회 없는 삶을 사는 사람들
    물도 돈도 생각도 고여 있으면 부패합니다. ‘재떨이 꽁초처럼 비우면 비울수록 깨끗한 게 돈’이라는 일본 속담도 있어요. 돈을 쓸 줄 아는 사람으로 관정 이종환 삼영화학 창업주를 꼽는 사람이 많습니다. 부자는 늘 마음을 씻어내야 한다는 것이 그분의 지론입니다. 돈의 때를 밀어야 하고, 마음을 씻어야 교만이 씻긴다고 했지요. 2년 전 의령을 지나는 길에 그의 생가에 들린 적이 있습니다. 그가 세운 관정 이종환교육재단은 2000년 1억원 출연으로 출발했지만 그의 꿈은 원대했습니다. 재단을 설립하며 이렇게 포부를 밝혔어요. “적지 않은 돈을 어디에 써야 할지 장기간 고민한 끝에 돈이 아니라 사람을 남겨야 한다는 결론에 달했다”라며 매년 재단 규모를 키워 이젠 아시아 최대 장학재단의 면모를 갖추게 되었습니다. 올해로 백수(白壽. 99세)를 맞은 관정은 지난해 5월 성균관대에서 명예 경영학 박사 학위를 받았습니다. 지금까지 전 재산의 97%에 해당하는 1조 5000억 원을 기부해 세계적인 장학재단으로 발전자요. 학위 수여식에서 관정은 “63년 동안 ‘기업은 전쟁’이란 철학으로 사업을 했고, 오직 기업 외길을 걸었다”며 “사는 동안 세계 1등 인재를 키우는 일에 한 푼 남김없이 사회에 다 바치겠다”라고 밝혔습니다. 관정재단은 매년 100억 원의 장학금을 국내외 학생들에게 지급합니다. 지금까지 지원한 장학금이 1800억 원대에 이르고 1만 1000여 명의 학생이 장학금 수혜를 받았습니다. 미국 코넬대, 듀퍼대, 서울대 등에 교수로 나간 장학생 출신이 164명, 박사 학위를 받은 사람이 700명에 이르는 결실을 거두었지요. “사람이 열쇠”라는 관정의 신념이 빛을 발한 것입니다. 그는 經世濟民(경제)의 뜻을 알고 실천한 사람입니다. 범부나 재벌이나 死後客散去라, 아무도 따를 사람이 없으니 정승도 죽어야 진가를 알 수 있죠. 얼마나 베풀고 후덕했느냐가 남을 뿐입니다. 그래서 정주영은 “장사꾼이 되지 말고 기업가가 돼라.” “나는 부유한 노동자”라는 말로 자신의 자리를 지켰습니다. 이병철도 “죽어서 입는 수의엔 주머니가 없다”라며 자신의 생각과 삶을 다독였지요. 작년엔 평생을 남의 명품을 수선하며 산 80대 노인이 평생 쓰지 않고 모은 재산 12억 원을 몽땅 장학금으로 내놔 화제를 뿌린 적이 있었죠. 68년간 구두수선을 해온 명품 수선공 김병양 씨입니다. 그가 조선일보 기자에게 말한 첫말은 인생과 수선은 닮았다는 것입니다. “수선은 순전히 사람이 하는 일이라 정직해요. 큰돈은 못 벌어도 정성을 들인 만큼은 나옵니다. 인생도 매사 찬찬히 둘러봐야죠.” ‘명동스타사’. 명품에 관심 있는 중장년층 사람들에겐 잘 알려진 평품 수선가게입니다. 6.25 전쟁이 끝나던 1953년, 먹고살기 위해 명동입구 한 모퉁이에서 시작한 일이 천직이 되었다는 그렇게 시작한 수선업은 성심을 다함으로 신용을 얻어 70년 전통의 명품 수선집이 됐습니다. 손님 대부분이 알고 찾아오는 분들이죠. 알음알음 소문으로 지방에서도 이곳을 찾아옵니다. 오랜 고객인 제일모직 제품 수선은 지금도 도맡아 하고, 서울의 유명 명품 매장도 AS센터에 접수된 물건을 대부분 이곳에 맡깁니다. 유럽 본사에 보내면 몇 달 걸릴 일을 며칠 만에 뚝딱 해내니까요. 루이뷔통, 샤넬, 구찌, 악어백 등 그의 손을 거쳐간 명품을 한 줄로 세우면 어디에 이를까. 박정희 대통령 구두도 이곳을 거쳤고, 그의 낡은 수첩엔 각계 주요 인사들 이름이 올라있습니다. 그는 나이가 들면서 평생 모은 돈을 어디에 쓸까 궁리하다 장학금을 생각했다고 해요. 자식들과 상의 없이 혼자 결정했답니다. 처음에는 섭섭도 했겠지만 모두 아버지 뜻에 쾌히 따라주었다고 해요. 한평생 고생 고생하며 모든 돈을 좋은 곳에 쓸 수 있게 돼 기쁘다고 주름진 얼굴에 활짝 핀 미소가 아름답습니다. 그는 타고난 마음이부자요 재벌인 사람입니다. 짧은 인생을 살면서 성심을 다해 덕을 쌓고 가진 모든 것을 사랑으로 남기겠다는 그는 행복한 사람이고 부러운 사람입니다. 소크라테스가 말했던가요? “만족은 천부적인 부요, 사치는 인위적인 빈곤이다.” -소설가 daumcafe 이관순의 손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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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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