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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아빠가 미안하다, 널 몰랐구나
    며칠 전 전국 청소년 글짓기 심사를 끝내면서 갖는 유감입니다. 유한양행을 설립한 유일한 박사의 정신을 받들어 유한재단이 해마다 5월이 되면 전국 초?중?고생을 대상으로 백일장을 개최합니다. 올해로 28년째니 연륜이나 규모면에서 전국 규모로 열리는 대표적 청소년 백일장입니다. 올해는 천여 명의 청소년이 아카시아 향이 흩날리는 유한공고 교정에 모여 초?중?고별 글제에 따라 글 향기를 뽐냈습니다. 씁쓸한 것은 ‘내가 아버지라면’ 이란 글제를 놓고 중학생들이 보여준 아버지에 대한 의식 때문입니다. 글제를 택할 때 10대의 자녀들이 평소 아버지란 존재에 대해 어떤 생각을 할까? 글을 통해 아버지 상(像)을 유추해보자는 의도가 있었지요. 글제를 내면서 ‘혹시나’ 했는데, 적지 않은 학생에게서 아버지의 이미지가 긍정적이지 못함을 확인하고 말았습니다. 학생들은 아버지가 칭찬에 인색하다는데 불만이 컸습니다. “잘했네” “알았다” “수고했어.” 등과 같은 정감 없는 아버지의 말투에 아이들도 묻는 말에나 답하는 단답식 대화가 늘어남을 알 수 있었지요. 아버지의 칭찬이 있을 때도 그 뒤에 따라올 말에 신경을 쓴답니다. 때 아닌 칭찬이 의심스럽다는 눈초리죠. “그래 그건 잘했어. 그런데 넌...” 한숨까지 섞인 조언을 듣노라면 작은 희망조차 웅크려진다고 합니다. 아이들은 순수한 칭찬에 목말라합니다. 아버지의 특징으로 감정표현이 없다고 합니다. 무뚝뚝한 아버지, 어려운 아버지라고 쓴 학생이 많았습니다. 그러면서 아이들은 원합니다. 내 이름을 자주 불러주는 아빠, 사랑한다고 말해주는 아빠를 기다립니다. “이리와 봐” 식의 부름보다 격려의 부름이, 사랑의 부름이었으면 한답니다. “넌 왜 엄마를 통해서 말하지?” 아버지의 불만도 이해는 되지만 사실 자초한 면이 없지 않습니다. 평소 대화가 부족했다는 방증이지요. 아이들은 철부지가 아니었습니다. 속에 담아놓고 말을 안 할뿐, 아버지가 가족을 위해 희생한다는 걸 알고 있습니다. 아는데도 다가서기가 쉽지 않은 분일뿐이지요. 역지사지(易地思之)로 사고의 전환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자녀의 입장에서 생각해보는 그런 자세가 필요하다고 느꼈기 때문입니다. 어버이날, 친구들과 나눈 에피소드입니다. 어버이 날이라고 아들이 전화를 했을 때, 예전에 우리는 첫마디를 이렇게 말했지요. “그래 나다. 기다려 엄마 바꿔줄게” 아들이 그게 아니고요 하면 “벌써 돈 떨어졌냐?” 그래도 아들이 용기를 내 ‘아버지 사랑합니다’라고 말할 때의 대답은 더 걸작입니다. “미친 놈, 뚱 단지 같긴!” 옛날 자신들의 모습을 떠올리며 파안대소했습니다. 자식의 마음을 알면서도 멋대가리 없는 말을 했다고. 따지고 보면 그렇게 큰 아들이 지금의 아빠들입니다. 대를 이어 배워온 언어의 관습이 그렇다면, 누구를 탓할 입장도 아니지요. 대화도 훈련이 되지 않으면, 끊기고 단절되기 싶습니다. 대화의 부족이나 불만은 그것으로 끝나지 않고 정서적 불만으로 이어집니다. 갈수록 멀어지는 아버지, 외톨이가 되는 아버지는 어쩌면 현대사회가 만든 자화상일지 모릅니다. 피곤에 절어 밤늦게 퇴근하고 새벽처럼 나가는 아버지... 가뜩이나 어려워진 자영업자 아버지... 그 침통함이 무의식중에 그렇게 비춰진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버지의 노고에 감사하면서도 강한 이미지 때문에 접근하기가 쉽지 않은 이유입니다. 아이들은 크면서 아버지가 힘없는 존재라는 것을 압니다. 엄마가 자녀들과 대화를 독점하고 있을 때 혼자서 담배를 피우는 모습이 쓸쓸해 보였다고 합니다. “나 요즘 힘들다”고 엄마에게 말할 때는 아버지 어깨를 누르는 책임감도 느껴졌답니다. 좋은 세상이 된 줄 알았는데 예나 지금이나 아버지란 존재가 외롭기는 마찬가지인 듯합니다. 사람은 태어난 후 ‘아빠, 엄마‘ 로 부르며 성장기를 보내다가 때가 되면 ’아버지 어머니‘로 바꿔 부르기 시작합니다. 멀리 이스라엘에서도 같은 호칭을 사용한다고 해 놀랐습니다. 기독교100주년기념교회를 담임하다 정년퇴임하고 거창으로 내려간 친구 이재철 목사가 전하는 말입니다. 이스라엘을 갔을 때, 누가 아빠하고 뒤에서 부르더랍니다. 깜짝 놀라 돌아보니 이스라엘 아이가 자기의 아빠를 부르는 것이었습니다. 같은 뜻의 어휘지만 ’아빠‘와 ’아버지‘는 의미가 사뭇 다릅니다. 아빠는 아버지를 뜻하는 아람어고, 아버지는 역어인 헬라어입니다. 아빠로 불리는 아버지는 자식에게 무한책임을 지지만, 아버지로 부르는 아들은 부모를 섬기는 모습을 뜻합니다. 그런 역할과 기능이 어휘에 담긴 거지요. 지금은 자녀들에 대해 무한책임을 지는 아빠의 자리에 있습니다. 모든 헌신으로 아이들을 키우지만, 어느 날이 되면 아버지의 자리로 옮겨 앉아야 합니다. 그 과정이 아름다우려면 아버지가 자녀들과의 대화에 새로운 눈을 떴으면 합니다. “아빠가 미안하다. 네 맘을 헤아리지 못해서”라는 생각으로. 소설가 이관순의 손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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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5-07
  • 음악은 천상의 소리
    밤바람이 선득한 주말. 저녁을 먹고 장자호수공원으로 산책을 나섰습니다. 사람들이 오가는 사이로 청아한 색소폰 연주음이 들려옵니다. 발길이 절로 이끌려 간 곳엔 한 분이 ‘셀프 콘서트’를 열고 있네요. 잔디밭에 앉아 연주가 끝날 때마다 박수를 칩니다. 연주력이 준수한데다 가을밤의 정취까지 더해져 색소폰 선율에 젖는 아름다운 가을밤을 즐겼지요. 음악은 사랑을 전하는 신의 소리라고 합니다. 모든 사람을 하나로 묶어 주지요. 음악은 연주자의 기쁨도 되지만 만인의 즐거움도 됩니다. 연주가의 재능을 부럽게 바라본 영화가 있습니다. ‘어거스트 러쉬.’ ‘음악은 사랑을 낳고 사랑은 운명을 부른다.‘는 말이 잘 어울린 영화지요. 밴드 싱어이자 기타리스트인 루이스와 촉망 받는 첼리스트 라일라의 보석보다 반짝였던 단 하루 밤 이후, 남자는 그녀를 한 번도 잊은 적 없고, 여자는 얼굴도 모르는 낳은 아이에 대한 그리움을 놓은 적이 없지요. 이들의 믿음 하나는 “음악이 있는 한 우리는 다시 만날 거야”라는 것. 부모의 DNA를 받은 아이는 일찍부터 놀라운 음악적 재능을 보입니다. 시설에서 자란 11세의 소년은 부모만이 자신의 음악을 알아볼 수 있다는 믿음 하나로 뉴욕을 찾아갑니다. 모든 게 신비한 뉴욕. 도시가 만드는 수많은 소리들이 소년의 청각에 음계로 포착됩니다. 소년은 아이들을 모아 거리에서 노래를 시키는 워저드를 만나 어거스트란 이름으로 거리 연주자로 등장해 천부적인 실력을 보입니다. 하루는 소리에 끌려 교회 합창단 연습장에 들렸다가 처음 보는 오선지와 오르간 앞에서 작곡하고 연주하는 놀라운 재능을 발휘합니다. 이를 지켜본 목사님이 줄리어드에 음악천재로 추천합니다. 줄리어드에서 사모곡 라프소디를 작곡해 주위를 놀라게 한 어거스트. 마침내 뉴욕필하모니 콘서트에 특별 출연자로 초청됩니다. 줄리어드 출신의 유명 첼리스트(엄마)와 함께. 하지만, 연주회를 앞두고 위기가 오죠. 워저드가 연습장에 나타나 아버지라며 친권을 주장하고 데려갑니다. 학교는 간곡히 연주회만큼은 보내달라고 부탁을 하지만 거절당하죠. 금관악기가 아이의 영혼을 뽑는다는 그릇된 인식으로... 다시 광장 연주에 나서는 어거스트. 부근을 지나던 루이스가 소리에 홀려 찾아오고, 금세 호흡을 맞추더니 황홀한 기타 2중주를 펼칩니다. 어거스트가 오늘 밤 있을 센트럴파크 공연을 알려주지만, 루이스는 귀에 담지 않고 “용기를 잃지 말라”는 말만 주고 떠납니다. 그날 밤, 어거스트는 친구의 도움으로 탈주에 성공해 연주장으로 달려가고, 지방공연에 나서던 루이스는 뉴욕 중심가에서 아이 얼굴이 나온 배너광고를 보지요. 전율을 느낀 그도 차를 버리고 연주회장으로 내달립니다. 환호 속에 첼로 연주를 끝낸 라일라가 아이를 생각하며 공원을 빠져나올 때, 줄리어드 총장이 특별초청 지휘자를 소개합니다. 무대에 등장하는 어거스트. 환호하는 청중... 놀라운 자작곡이 그의 지휘 속에 연주를 시작합니다. 밖을 향하던 라일라가 연주음에 끌려 뒤돌아서고, 또 반대편에서는 황홀한 눈빛의 루이스가 나타납니다. 마침내 무대 앞에 이르러 12년 만에 마주 서는 남과 여... 환희의 포옹을 할 때 지휘하는 아이의 모습이 비칩니다. 세상에는 수많은 소리들로 가득 차 있지요. 귀를 기울인 만큼 들리기도 하고 지나치기도 합니다. 끊임없이 들리는 세상의 소리를 옮겨 작곡하고 연주하는 음악천재가 말하죠. “아이들이 동화를 믿듯 저는 음악을 믿어요. 부모님이 살아계신다면 제 음악을 꼭 듣게 될 거야요.” 어거스트의 간절한 믿음처럼 나는 어떤 믿음을 확신하며 살고 있나요? 글 이관순(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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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4-29
  • 내 앉아있는 자리
    스산한 바람에 비까지 흩뿌리니 단풍은 지고 낙엽만 우수수 쌓입니다. 이렇듯 나무도 꽃도 지상의 모든 생명들이 사이즈를 줄이는 시기입니다. 그것이 한 주기의 마지막 겨울을 상대하는 지혜입니다. 사람이 나이가 든다는 것 또한 사이즈를 줄이는 것으로 시작됩니다. 몸집이 줄고, 먹는 게 줄듯 이것이 절제의 근본이며 이치입니다. 세상에 나올 때 작게 나왔으니 돌아갈 때도 비우고 작게 돌아가야 합니다. 여기에는 실상과 허상이 공존하지만 스스로 말수를 줄이고, 욕심도 미움도 줄이고, 자랑, 명예 같은 덧없는 것은 날려야 합니다. 그래야 사이즈가 줄지요. 루디 세네카는 “인간은 마치 시간이 모자란다고 불평하면서, 마치 시간이 무한정인 것처럼 행동한다.”고 사람의 어리석음을 비꼬았지요. 그런데 사람은 이를 알면서도 어제의 습관을 오늘도 고집하고 삽니다. 친구가 많다고 자랑하시나요? 바쁜 것을 미덕으로 생각하셨나요? 그보다는 흉금을 터놓고 말할 한 사람의 친구가 더 소중한 때입니다. 친구도, 만남도, 분주함도 지혜롭게 줄여가는 것이 노년의 삶을 가볍게 하고 실수를 줄이는 방법입니다. 우리 몸은 수분이 80% 이상이라고 하죠. 비슷한 비율로 우리 삶을 주장하고 있는 것이 말입니다. 그만큼 물과 말은 몸을 유지하고 삶을 구성하는 중요한 요소입니다. 그래서 절제를 말할 때 가장 먼저 꼽는 게 말입니다. 내가 살면서 토해낸 말을 양으로 계측한다면 얼마나 될까. 그중 꼭 필요했던 말은 얼마쯤 일까. 이제는 할 말 못할 말, 안 해도 좋을 말, 상처 주는 말을 가려가며 했으면 합니다. 내뱉은 말은 흘러간 세월처럼 돌릴 수 없으니... 그래서 이랬으면 좋겠습니다. “이제는 많이 들어주자. 듣는 귀는 8로 열고 말하는 입은 2로 줄이자. 남이 말할 때 자르지 말자. 중간에 끼어들지 말자. 말 줄기를 돌리지 말자.” 비위 상한다고 파르르, 욱, 버럭 하는 감정도 이젠 삭혀 없애야 합니다. 행여 그런 상황이 되면 심호흡 한 번으로 날려버리세요. 대신 많이 웃어주면 좋겠습니다. 상대가 가족, 친구, 이웃, 누구든 만나면 웃는 것으로 말문을 열어요. 나이가 들면 웃는 근육도 굳는다는데, 얼굴에 웃음기마저 빠지면 노인 특유의 표정 없는 일그러진 인상만 남아요. 나이가 든다는 것은 옻칠을 더하는 것처럼 윤을 내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미움이나 시기, 질투는 다 헛된 뜬구름이지요. 뜬구름을 좇다가 낯선 곳에 서 있는 나를 발견하는 건 아픈 일입니다. 살고 있는 이날, 앉아 있는 이 자리가 내가 족해야 할 자리임을 아는 사람은 행복합니다. 이 나이에 맘대로 못할 게 뭐야. 하지만 나이가 들수록 남을 배려하며 사는 인생이 아름답습니다. 살아보니 ‘역지사지(易地思之)’ 이상의 스승은 없더군요. 사서삼경이 대단한 게 아니라, 상대편 입장을 늘 먼저 헤아리면 그것이 상선의 절제입니다. “오죽했으면... 그래 저럴 수 있겠다... 나도 그 입장이면... 저도 사람인데.” 글 이관순(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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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4-22
  • 너도 죽는다‘메멘토 모리’
    말에는 묘한 힘이 있어 곱씹을수록 향기를 내는 말이 있고, 겸손함을 가르치는 말도 있지요. 라틴어는 그런 철학적 의미를 함의한 말과 글이 꽤 많습니다. 언젠가의 기억입니다. KBS TV '도전 골든벨‘에서 최후 1인이 된 학생에게 50번 마지막 골든벨 문제가 주어집니다. “고대 로마에서 승리를 쟁취한 장군이 개선행진을 할 때 주위에서 외쳤던 라틴어는?“ “메멘토 모리" 영예의 골든벨이 울리는 짜릿한 순간을 지켜보았지요. 다소 생소한 라틴어 '메멘토 모리(memento mori)'는 '죽음을 기억하라‘는 뜻입니다. 유래는 로마 공화정의 개선식으로 거슬러 올라가요. 개선식은 전쟁에서 승리한 장군에게 주어지는 영예입니다. 개선장군은 관습에 따라 전차를 타고 퍼레이드를 벌입니다. 영웅이 탄 마차가 시민의 환호 속을 헤치고 행진하는 동안 뒤에서 노예들이 큰소리로 외쳐댑니다. 메멘토 모리! 메멘토 모리! “오늘은 개선장군이지만 너도 언젠가는 죽는다. 겸손하게 행동하라.” 승리에 도취된 장군에게 본분을 잊지 않도록 경각심을 주는 장치인 셈이죠. 로마 최고의 환대 속에서도 너는 신이 아닌, 한 인간일 뿐임을 알린 것입니다. 메멘토 모리에는 세 가지 철학적 가치가 내재되어 있습니다. ‘죽음을 기억하라. 운명을 사랑하라. 현재에 충실하라.’ 이 셋은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도 적용되는 훌륭한 교훈입니다. 스티브 잡스도 스탠퍼드대 졸업식 축하 연설에서 이를 강조했습니다. 췌장암 투병으로 힘든 시기를 보내던 그는 ‘죽음은 삶이 만든 최고의 발명품‘이라고 격찬합니다. 그러므로 제한된 인간의 시간을 다른 누군가의 인생을 살 듯 낭비하지 말고 자신을 믿고 집중하라고 졸업하는 학생들에게 말합니다. 뜻이 통하는 라틴어에 ‘카르페 디엠(carpe diem)'이 있습니다. 몬래 이 말은 신을 공경하고 오만해지지 말라는, 현재를 가치 있게 살라는 뜻인데 이후 기독교 영향을 받아 현세의 부귀나 영화의 부질없음을 알립니다. 우리에게도 ‘화무십일홍’이란 말이 있죠. 열흘 가는 붉은 꽃이 없다는 이 말엔 ‘한 번 흥한 것은 반드시 쇠한다.’ 는 속뜻을 지닙니다. 트로트 가수 김연자가 불러 유명한 노래 ‘아모르 파티’도 같은 말입니다. 사랑을 뜻하는 아모르와 운명을 뜻하는 파티가 합성된 라틴어로 이 또한 ‘운명을 사랑하라’는 말이지요. 인간이 가져야 할 삶의 태도로 철학자 니체가 처음 사용했습니다. 메멘토 모리는 미국 남서부에 거주해온 나바호족에서도 찾을 수 있어요. 그들은 “네가 세상에 울면서 태어날 때 세상은 기뻐했으니, 네가 죽을 때 세상은 울어도 너는 기뻐할 수 있도록, 그러한 삶을 살아라.”는 의미심장한 철학을 닮고 있습니다. <메멘토 모리>, <카르페 디엠>, <아모르 파티>, <화무십일홍>까지 모두 겸손한 삶을 가르칩니다. 제한된 시간을 사는 인생에게 죽음을 기억하고, 운명을 사랑하고, 오늘에 충실하라.... 이보다 더 삶을 성찰하게 하는 말이 또 있을까 싶습니다. 글/ 이관순(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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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4-15
  • 의리가 사라진 세상
    짓궂은 질문을 해봅니다. ‘사람’과 ‘인간’은 같은 거야? 사전의 설명은 비슷 하지만, 아무래도 “저 인간!” 하면 부정적 이미지가 앞서죠. “저 사람 인품이 좋아”로는 써도 “저 인간 인품이 좋다”고 말하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세상에 사람 같지 않은 인간이 많다보니 용례까지 헷갈립니다. 초등학교 국어 교과서의 ‘의좋은 형제’를 생각하면 지금도 마음이 훈훈합니다. 우애 좋은 형제가 가을 수확을 마치고 들판에 볏단으로 노적가리를 만듭니다. 형이 보니 아우네 것이 적어 보입니다. 그날 밤, 어려운 아우 형편을 안 형이 자신의 볏단을 옮겨 놓고, 다음날 밤은 식솔 많은 형을 생각한 아우가 반대로 볏단을 옮기지요. 노적가리가 줄지 않자 형제 다 고개를 갸우뚱합니다. 마침내 볏단을 옮기던 형제가 달빛 아래 마주치면서 얘기는 끝나죠. 그때의 감동으로 습자시간이면 붓글씨를 ‘노적가리 풍년일세’만 썼던 기억이 납니다. 가난해도 마음은 풍년인 사람들이 살던 시절이 있었지요. 엊그제 복권 당첨금이 살인흉기가 된 사건이 났습니다. 우애 좋은 형제가 복권 당첨으로 수억 원의 당첨금을 받아 배분까지는 성공했는데, 그 돈으로 사업을 했던 형이 망하며 사단이 납니다. 돈을 더 요구하는 형과 보증을 선 동생 간에 감정이 충돌하다 동생을 살해하는 일이 벌어진 겁니다. 황금만큼 요괴스러운 것은 없습니다. 돈 앞에 장사가 없다지요. 일본 속담에 ‘담배꽁초와 돈은 쌓일수록 냄새가 난다’고 했습니다. 돈이 사람을 부패하게 만든다는 뜻이겠지요. 사는 것은 전보다 풍족해도 인성은 강퍅해졌습니다. 돈을 둘러싼 이기적 욕망이 칼끝처럼 첨예하게 부딪치는 세상입니다. 개신교의 큰 어른이셨던 목사님이 생전에 우리교회에 오셔서 당신이 붓으로 큼직하게 쓴 ‘의리를 지키자’란 글귀를 강단에 내리고 설교를 하신 적이 있습니다. 세상이 오죽하면 의리를 부탁했을까요. 사람과 사람,관계 사이에 의리가 사라졌다고 탄식하는 소리가 높아만 집니다. 제목을 잊은 영화입니다. 세 친구가 딱 한 번 은행을 털어 깨끗하게 살자며 치밀한 준비를 합니다. 그들의 거사는 성공했고 무사히 안전지대에 도착하자 돈다발을 놓고 환호합니다. 한 친구가 축배를 들자며 나갔다가 술에 독을 타서 옵니다. 욕심이 생긴 거죠. 태연하게 돌아온 친구가 술잔을 건네고 축배를 외칠 때, 팡팡! 술 사온 친구가 고꾸라지고 남은 둘은 낄낄댑니다. 뛰는 놈 위에 나는 놈이 있거든요. 둘은 더 큰소리로 건배를 외치지만 독배를 든 이들도 쓰러집니다. ‘사람에게 의리 빼면 시체’ 라고 말하던 세상이 있었지요. 의리란 뜻은 ‘사람관계에서 마땅히 지켜야 할 도리’로, 여기엔 사람이 갖춰야 할 덕목이 다 녹아져 있죠. 가난은 견뎌내기 어려운 것임을 경험한 세대가 모이면 그래도 그때가 좋았다고 반추합니다. 의리가 사라진 곳에 먹잇감을 놓고 으르렁 대는 동물세계가 어른댑니다. 사람 사이 흐르는 체온 대신 물질을 향한 충혈 된 눈빛만 섬뜩하니 사람은 없고 인간만 남아 보입니다. 다시 사전을 봅니다. ‘인간’이란 단어의 기본설명 뒤로 ‘사람의 모습은 하고 있되 사람답지 못하다는 뜻.’을 추가하고 예문도 달았군요. “저 인간이 한 짓을 생각하면 돌아버리겠어.” 너무도 흔히 듣는 슬픈 말이 됐습니다. 글 이관순(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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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4-08
  • 의리가 사라진 세상
    짓궂은 질문을 해봅니다. ‘사람’과 ‘인간’은 같은 거야? 사전의 설명은 비슷 하지만, 아무래도 “저 인간!” 하면 부정적 이미지가 앞서죠. “저 사람 인품이 좋아”로는 써도 “저 인간 인품이 좋다”고 말하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세상에 사람 같지 않은 인간이 많다보니 용례까지 헷갈립니다. 초등학교 국어 교과서의 ‘의좋은 형제’를 생각하면 지금도 마음이 훈훈합니다. 우애 좋은 형제가 가을 수확을 마치고 들판에 볏단으로 노적가리를 만듭니다. 형이 보니 아우네 것이 적어 보입니다. 그날 밤, 어려운 아우 형편을 안 형이 자신의 볏단을 옮겨 놓고, 다음날 밤은 식솔 많은 형을 생각한 아우가 반대로 볏단을 옮기지요. 노적가리가 줄지 않자 형제 다 고개를 갸우뚱합니다. 마침내 볏단을 옮기던 형제가 달빛 아래 마주치면서 얘기는 끝나죠. 그때의 감동으로 습자시간이면 붓글씨를 ‘노적가리 풍년일세’만 썼던 기억이 납니다. 가난해도 마음은 풍년인 사람들이 살던 시절이 있었지요. 엊그제 복권 당첨금이 살인흉기가 된 사건이 났습니다. 우애 좋은 형제가 복권 당첨으로 수억 원의 당첨금을 받아 배분까지는 성공했는데, 그 돈으로 사업을 했던 형이 망하며 사단이 납니다. 돈을 더 요구하는 형과 보증을 선 동생 간에 감정이 충돌하다 동생을 살해하는 일이 벌어진 겁니다. 황금만큼 요괴스러운 것은 없습니다. 돈 앞에 장사가 없다지요. 일본 속담에 ‘담배꽁초와 돈은 쌓일수록 냄새가 난다’고 했습니다. 돈이 사람을 부패하게 만든다는 뜻이겠지요. 사는 것은 전보다 풍족해도 인성은 강퍅해졌습니다. 돈을 둘러싼 이기적 욕망이 칼끝처럼 첨예하게 부딪치는 세상입니다. 개신교의 큰 어른이셨던 목사님이 생전에 우리교회에 오셔서 당신이 붓으로 큼직하게 쓴 ‘의리를 지키자’란 글귀를 강단에 내리고 설교를 하신 적이 있습니다. 세상이 오죽하면 의리를 부탁했을까요. 사람과 사람,관계 사이에 의리가 사라졌다고 탄식하는 소리가 높아만 집니다. 제목을 잊은 영화입니다. 세 친구가 딱 한 번 은행을 털어 깨끗하게 살자며 치밀한 준비를 합니다. 그들의 거사는 성공했고 무사히 안전지대에 도착하자 돈다발을 놓고 환호합니다. 한 친구가 축배를 들자며 나갔다가 술에 독을 타서 옵니다. 욕심이 생긴 거죠. 태연하게 돌아온 친구가 술잔을 건네고 축배를 외칠 때, 팡팡! 술 사온 친구가 고꾸라지고 남은 둘은 낄낄댑니다. 뛰는 놈 위에 나는 놈이 있거든요. 둘은 더 큰소리로 건배를 외치지만 독배를 든 이들도 쓰러집니다. ‘사람에게 의리 빼면 시체’ 라고 말하던 세상이 있었지요. 의리란 뜻은 ‘사람관계에서 마땅히 지켜야 할 도리’로, 여기엔 사람이 갖춰야 할 덕목이 다 녹아져 있죠. 가난은 견뎌내기 어려운 것임을 경험한 세대가 모이면 그래도 그때가 좋았다고 반추합니다. 의리가 사라진 곳에 먹잇감을 놓고 으르렁 대는 동물세계가 어른댑니다. 사람 사이 흐르는 체온 대신 물질을 향한 충혈 된 눈빛만 섬뜩하니 사람은 없고 인간만 남아 보입니다. 다시 사전을 봅니다. ‘인간’이란 단어의 기본설명 뒤로 ‘사람의 모습은 하고 있되 사람답지 못하다는 뜻.’을 추가하고 예문도 달았군요. “저 인간이 한 짓을 생각하면 돌아버리겠어.” 너무도 흔히 듣는 슬픈 말이 됐습니다. 글 이관순(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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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4-04
  • 슬픔이여 안녕!
    죄 없는 어린 생명이 희생될 때 더없이 고통스럽습니다. 남달리 알레르기 반응을 보이는 것은 일종의 트라우마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여덟 살에 충북 영동의 한 초등학교에 입학했습니다. 여름이 되면 아이들과 몰려서 마을 앞에 흐르는 강에 나갑니다. 겨울엔 썰매를 타고 여름엔 물놀이를 하는 곳. 경부선이 지나가는 철교 아래가 또래들의 여름 아지트지요. 흰줄 하나를 내린 검정 팬티를 입고 상급생들은 수영으로 강을 건너고, 하급생들은 교각 중턱에 걸터앉아 형들을 부럽게 바라보다가 텀벙 강물에 몸을 던집니다. 이날도 철교 아래에 한 떼의 아이들이 모였습니다. 비가 와서 물이 좀 불었지만 누구도 겁내지 않았지요. 그런데 물이 불면 수심에서 물돌이가 이는 걸 모른 게 비극입니다. 형들이 수영을 가르친다고 아이들을 밀어 넣는데 그만 1학년 쌍둥이 동생이 소용돌이에 말려든 겁니다. 아이가 물속에서 허우적이자 더럭 겁이 난 아이들이 달아나기 시작합니다. 나도 겁에 질려 뛰다가 뒤를 돌아봤는데, 발을 구르며 울부짖는 쌍둥이 형의 모습이 보였습니다. 죽은 아이는 내 짝꿍이었습니다. 마을이 발칵 뒤집어지고... 나도 밤마다 경기를 일으켰습니다. 땀을 흘리며 악몽에 시달렸지요. 물에 퉁퉁 부은 친구가 나를 원망했기 때문입니다. 넋이 나간 친구 엄마, 고래고래 소리질러 아들 이름을 부르는 아빠, 나를 원망스레 쳐다보는 쌍둥이 형... 나는 누구 앞에서도 고개를 들 수 없는 죄인이었습니다. 친구를 버리고 도망쳤다는 죄책과 슬픔이 어린 가슴을 쿵쿵 뛰게 했지요. 이로 인해 부모님 걱정도 덩달아 커졌습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아버지가 발령을 받아 새 임지로 이사하면서입니다. 가족이 아버지의 전근을 반색한 것도 나 때문이었죠. 아픈 기억은 상급학교로 진학할수록 많이 옅어졌습니다. 초등학교 동창들과 연락을 끊은 것도 도움이 됐습니다. 결혼 후로는 아예 잊다시피 지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어느날, 우연히도 길에서 쌍둥이 형을 만나면서 덜컥 상처가 뜯기고 말았습니다. 어머니는 우울증을 앓다가 목을 매셨고, 알코올 중독에 빠진 아버지도 암으로 돌아가셨답니다. 한 아이의 죽음이 이렇게 가족을 황폐화 시켰구나. 아물었던 내 상처에도 피가 나는 걸 느꼈습니다. 가족 중 유일한 생존자인 형의 얼굴에 깔린 그늘을 보았습니다. “가족 몫까지 잘 살아야지. 흔들릴 때마다 그렇게 위로해.” 예민한 성격 탓일까, 이후로 이따금 꿈을 꿉니다. 시골에서 놀던 추억들이, 떠난 어린 친구의 모습도 생생하게 포착됩니다. 더 힘들게 하는 건 잊을 만하면 날아드는 이런저런 또래 아이들 희생소식입니다. 줄어드는 인구도 걱정인데 죽었다하면 아이들이냐고 격분도 합니다. 지난 봄, 헝가리에서 유람선 전복으로 6세 소녀가 숨졌다는 비보가 그랬었죠. 외할머니 손을 꼭 잡은 아이의 인양된 모습은 더 애처로웠습니다. 그 아픔이 채 가시기도 전에 또, 엄마가 일곱 살 어린 아이를 데리고 동반자살을 했다는 비보가 들렸습니다. 죽음이 낯설기만 어린 나이에 얼마나 섬뜩했을까, 얼마나 설득했을까, 아니 강요했을까. 그래야 했던 엄마의 심정은? 푸른 6월에는 전 세계인을 슬픔에 잠기게 한 사고가 또 발생했습니다. 멕시코 국경에서 리오그란데 강을 건너 미국으로 밀입국하려던 25세 아빠와 두 살짜리 딸이 익사한 것입니다. 아빠가 아이를 셔츠 안에 넣고 아이는 아빠의 목을 끌어안은 채 떠내려 온 사진을 봤습니다. 물살을 이겨내려 했던 아빠의 다리는 물위에 떠 있고, 아이의 바지는 물먹은 기저귀로 불룩했습니다. 강 건너서 울부짖는 엄마의 얼굴이 오버랩됩니다. 멕시코 영화 ‘신 놈브레’는 중남미사람들이 ‘죽음의 열차’를 올라타고 미국으로 밀입국하려는 과정을 그린 영화입니다. 열차 지붕에 올라타다 떨어져 죽고 힘겹게 탄 뒤는 살해나 강간을 당하기도 합니다. 서글픈 것은 점쟁이가 찾아온 주인공에게 일러주는 말이죠. “넌 미국에 도착할거야. 그런데 안내는 신이 아닌 악마가 하지.”라고. 그 악마는 죽음의 열차를 올라 탄 아빠와 딸을 강물 속에 빠뜨린 것입니다. 스스로를 위로합니다. 어쩌면 아이들이 찾아간 저세상이 험난한 이 세상을 사느니 보다 낫지 않겠냐고. "여긴 낙원이 아냐. 슬퍼하지 말고 편히 쉬어라..." 오래전 읽은 프랑수아 사강이 쓴 ‘슬픔이여 안녕’ 이란 소설 제목이 떠오르는 것은 우연일까요? *글/이관순(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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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4-01

실시간 기고 기사

  • 어느 결혼식 주례사
    세상에는 향기를 내는 사람과 악취를 내는 사람, 두 부류의 인생이 살아 갑니다. 다시 말해 ‘사람 같은 사람’과 ‘사람 같지 않은 인간’이 함께 살아가고 있습니다. ‘사람’과 ‘인간’은 뜻은 같아도 용례에 따라 느낌이 전혀 달라집니다. “저, 사람 같지 않은 인간!”이라고 말할 때는 인간성이 별로인 부정적 이미지를 전합니다. 하지만, “저 사람 마음씨는 비단결이야!”라고 할 때 ‘사람’은 호감과 긍정의 이미지를 전합니다. 초등학교 국어 교과서에 ‘의좋은 형제’라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우애 좋은 형제가 가을이 돼 벼 수확을 마치고 들판에 나란히 볏단을 쌓아 노적가리를 만들었습니다. 형이 보니 아우네 볏가리가 빈약해 보입니다. 그날 밤, 형은 가난한 아우 형편을 헤아려 자신의 볏단 일부를 동생의 가리로 옮겨 놓습니다. 그러자 다음 날은 아우가 식솔 많은 형을 걱정해 볏단을 옮기지요. 그렇게 오고 가는 사이, 형과 아우는 줄었어야 할 볏단이 그대로라는 사실에 고개를 갸우뚱합니다. 의문을 키우던 형제는 보름달이 뜬 밤에 비로소 의문이 풀립니다. 형제가 달빛 아래 마주쳤기 때문입니다. 가난했어도 마음은 풍년인 사람들이 살았던 시절의 이야기입니다. 결국 인생은 아름답게도 추하게도 만드는 것이 다 어디서 시작될까? 하나 같이 ‘마음의 문제’입니다. 오늘 주례자는 딱 한 가지만 당부합니다. 신혼부부가 오늘 맞는 첫날 밤을 우리말로 ‘꽃잠’이라고 부릅니다. 신혼 초야를 ‘꽃이 잠자는 시간’ 으로 표현한 우리말이 얼마나 시적이고 아름답습니까? 두 사람은 오늘 꽃잠을 자면서 이 한 가지를 다짐했으면 합니다. 배우 김보성이 외친 유명한 말인데, 큰소리로 내 말을 따라 해 보세요. ‘우리 부부 의리를 지키며 살자’. 한 번 더 크게! 네, 아주 잘했습니다. 개신교의 큰 어른이셨던 한완석 목사님이 돌아가시기 전에 붓글씨로 큼직하게 ‘의리를 지키자’라는 문구를 써서 강단에 내리고 설교를 한 적이 있습니다. 노 목사의 눈에 세상이 오죽했으면 유언처럼 당부한 말이 의리였을까. 그만큼 세상에 의리가 사라졌기 때문입니다. ‘사람에게 의리를 빼면 시체’라고 말하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의리가 밥 먹여 주나?’로 험악해졌습니다. 의리란 ‘사람 관계에서 마땅히 지켜야 할 도리’라는 뜻입니다. 사람이 갖춰야 할 가치와 덕목이 이 말에 몽땅 녹아 있습니다. 예전 같으면 지금이 힘겹게 보릿고개를 넘을 때입니다. 그 가난했던 시절을 겪었던 사람들이 모이면, 그래도 그때가 사람 사는 맛이 있었다고 옛날을 회상합니다. 의리가 사라진 곳엔 먹잇감을 놓고 으르렁대는 동물 세계만 남습니다. ‘사람’은 없고 욕망으로 충혈된 ‘인간’들로 넘쳐납니다. 이웃간 의리가 깨지더니, 친구간에 의리가 무너졌다고 탄식합니다. 급기야는 형제간, 부부간, 심지어 부모 자식 간에도 의리를 저버렸다는 서글픈 소식이 들리는 세상에 우리는 살고 있습니다. 이런 때일수록 그 어떤 교훈보다 필요한 것이 ‘의리’라고 생각합니다. 사람들 삶에 의리가 기본이 돼야 합니다. 남편과 아내가 꼭 지켜야 할 의무 중 으뜸으로 삼을 게 의리입니다. 자식은 부모에게 의리를 다하고, 친구 사이나, 스승과 제자 사이에도 의리가 앞서야 합니다. 세상을 요령 있게 사는 것도 지혜이겠으나, 의리 하나만큼은 우직하게 지키는 사람이 고결한 삶을 사는 사람입니다. 인생을 풍성하게 하려면, 돈에 앞서 의리를 지키고 가꾸는 것으로 시작해야 합니다. 삶을 통하여 향기를 내는 사람이 있습니다. 의리를 존중하고 실천하는 그런 사람과 대화를 해보면, 인간적 풍미에서 향을 느낄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의리는 말로서 지켜지는 것이 아닙니다. 인생도 사업도 결국은 모두가 마음의 문제입니다. 진실한 마음으로 신실한 삶을 다잡고 살면, 지금은 힘들어도 언젠가 내 선택이 옳았다는 걸 알게 됩니다. 이를 위해 필요한 것이 다음 세 가지 마음입니다. 初心을 지키는 신실한 마음(眞心) 童心과 같은 깨끗한 마음 (淸心) 熱과 誠을 다하는 마음 (誠心) 이 세 마음을 끝까지 지키려고 최선을 다하는 사람이 성공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그것이 부부가 세상에서 존중받으며 복 되게 사는 길이고 인생을 아름답고 풍요롭게 가꾸면서 사는 길입니다. 두 사람은 오늘 당부한 3가지 마음, 즉 ‘三心’을 잘 닦고 소중히 지켜 ‘의리 있는 가정, 의리 있는 부부’로 백년해로 하면서 만복의 기쁨을 나누기를 축복합니다. -소설가 daumcafe 이관순의 손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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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6-20
  • 가슴속 배냇저고리
    신부 서품을 받아 한 성당의 사제가 되기 위해 떠나는 아들에게 어머니가 비단 보자기로 싼 작은 상자를 내밉니다. 무엇이냐고 묻자 어머니는 조용한 시간에 풀어보라고 이릅니다. 어머니의 기도는 이렇게 이루어졌습니다. 한참을 잊고 지내온 신부는 사제관 한쪽에 놓아둔 상자를 꺼내 보자기를 풀었습니다. 상자 안엔 누렇게 바랜 아주 작은 배내옷이 들어 있었습니다. 그 속에 어머니 편지가 곱게 접혀 있습니다. 어떤 자리에 가 있더라도 늘 기억하라는 어머니의 기도입니다. “예전엔 나도 한없이 어리고 작았다는 마음으로, 언제나 낮은 신부님이 되세요. 어미도 그렇게 기도하겠습니다”라는 글입니다. 편지를 읽던 신부님의 가슴도 뜨거워졌겠지만, 배냇저고리라는 말에 내 가슴도 뭉클했습니다. 한없이 여리고 연약한 나를 감싸주었던, 세상에 태어나 처음 입은 어머니가 지어준 옷. 그 속에 얼마나 많은 어머니의 사랑의 언어가 숨어 있습니까? 겸손해라. 온유해라. 사랑하고 섬겨라. 그때를 기억하라... 모든 언어가 하나가 되어 가리키는 곳은 ‘낮은 곳’이었습니다. 배내옷에는 세상의 어떤 선물과도 견줄 수 없는 어머니의 사랑이 녹아 있습니다. 어머니는 사제가 되어 광야로 떠나는 아들에게 사랑의 가늠자 하나를 선물한 것입니다. 뜨거움, 기쁨, 환희, 눈부심, 설렘으로 가슴이 벅차올랐던 사연을 마주한 지가 언제인가? 나이 들었다는 이유로 모든 걸 외면하고 앞으로 나가지 못한 채 뒤만 보며 사는 것은 아닌지 묻게 됩니다. ‘누구 같이’ 살고 싶다던 그 많은 멘토들, 롤모델은 어디로 다 보내고 툇마루에 드리우는 저녁 그림자를 쓸쓸하게 바라보는 삶을 살고 있지는 않는가? 6월의 푸른 잎새 사이로 나를 떠올립니다. 나도 가슴속 어딘가에 어머니가 지어 주신 배냇저고리의 흔적이라도 남았으면 좋을 것을. 김수환 추기경의 선종 12년. 탄생 100년을 기념하는 날에 그러한 갈증을 느낍니다. 추기경은 어머니 기도대로 일생을 배내옷을 품고 산 분입니다. 47세에 한국 최초, 세계 최연소 추기경이 된 후 일생을 스스로 바보라 칭하면서, 늘 넉넉한 품으로 핍박받고 소외당한 사람들을 품어주고, 사회를 향해 묵직한 소리를 내던 분이셨습니다. 모든 사람에게 긍정의 마음을 심어준 분입니다. 1951년 처음 사제복을 입을 때 선택한 성구는 ‘하느님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였고, 세상에 남기고 간 인사는 “고맙습니다. 서로 사랑하세요.”였습니다. 한국교회사연구소가 펴낸 ‘김수환 추기경’에는 세계 최연소 추기경이 된 후 미리 쓴 유서가 있습니다. 1971년 2월 21일 밤이라고 밝힌 사무용지 한 장에 또박또박 써 나간 유서엔 회개와 용서를 구하는 것뿐입니다. “그리스도께서 가장 깊이 사랑하시는 가난한 사람들, 우는 사람들, 소외된 사람들, 모든 불우한 사람들 속에 저는 있지 못했습니다… 형제 여러분, 저의 부족한 사랑을 용서해 주십시오….” 열정으로 가득한 마흔아홉 나이에, 유서부터 준비한 이유는 무엇일까? 일생을 통한 추기경의 고백이고, 다짐이었을 것입니다. 가슴에 품은 빛바랜 배내옷의 가르침 대로. 추기경은 잘못된 정치에도 묵직한 매시지를 날렸습니다. 정권의 수배를 받은 학생들에게 은신처를 제공한 명동성당 앞에서 경찰에게 말합니다. “나를 넘고 지나가라. 그러면 뒤에 신부들이 있을 것이고, 또 넘어가면 뒤엔 수녀들이 있을 것이오.” 준엄하게 불의를 꾸짖는 어른이셨습니다. 어느 날 저녁이었어요. TV를 보던 사람들이 깜짝 놀랐습니다. “어머, 세상에!” “추기경님이 어떻게!” TV 속에서 대중가요 ‘사랑의 미로’를 부르는 것입니다. 사람들의 눈은 놀라면서도 입은 웃었습니다. 추기경의 소박함에 고개를 끄덕이고, 나도 남자라는 소탈한 모습에 마음 뭉클함을 느끼면서. 추기경은 종교의 편 가르기를 경계했습니다. 구원이라는 명제 앞에 종교는 서로가 경계할 대상이 아니라 했습니다. 어느 해 부처님 오신 날에는 서울 성북구 길상사에서 열린 음악회에 법정 스님과 나란히 앉아 화합의 아름다움을 보였습니다. 촛불, 반미시위 등을 둘러싸고 일부 급진파 종교인이 공격을 받던 2004년 때입니다. 추기경은 자신의 색깔을 묻는 질문에 “굳이 말하면 바꿔가는 보수(補修)”라고 뼈 있는 유머로 답했지요. 이태 전 지방선거를 앞두고는 깜짝 선언도 합니다. “나도 출마합니다. 기호는 1번이고, 지역구는 전국구입니다.” 바보 추기경의 유머는 늘 잔잔한 깨달음을 동반했습니다. 거칠고 서걱대는 삭막한 세상에서 낮은 자리를 찾아다닌 김수환 추기경. ‘내 탓입니다’를 선창해 사람들마다 자동차 뒷 유리에 스티커를 달게 한 그분의 따뜻한 리더십이 선연합니다. 아픔 있는 자에게는 “고통은 하나님이 주신 은총입니다.” 위로하고, 젊은이에겐 “가끔은 칠흑 같은 어두운 방에서 자신을 바라보라”라고 등을 토닥여 주었습니다. 고단한 삶으로 방황하며 길을 묻는 자에게는 ‘인간의 길이란 어떻게 하면 ‘내면적으로 풍요롭게’ 사느냐에 있습니다.”라며 다독였지요. -소설가 daumcafe 이관순의 손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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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6-16
  • 세한도(歲寒圖) 앞에서
    “아들아, 다녀간 지 열흘인디 고새 이리두 보고 잡다냐? 엄동설한에 밥은 잘 묵냐? 엄니는 자나 깨나 아들 걱정뿐이당... 엄니가 해준 세한도 부적일랑 꼬옥, 속옷에 넣기라...” 부적으로 쓸만큼 세한도를 사랑한 어머니가 군에 간 아들에게 쓴 편지입니다. 새해를 시작하며 ‘세한도(歲寒圖.국보 제180호)’를 떠올렸습니다. 황량한 들판 위의 초라한 초가집, 한겨울에 의젓하게 서 있는 소나무 잣나무를 거칠게 그려넣은, 추사 김정희의 ‘세한도’가 생각났습니다. 세한도는 추사의 심경이 그대로 살아있는 명작이지요. 갈필을 사용하고, 자연미와 고담한 멋스러움을 추상화해 수묵으로 그렸습니다. 그림엔 그의 ‘歲寒’이 담겼어요. 설 전후 혹독한 추위와 고난을 표징합니다. ‘눈이 와야 솔이 푸른 줄 안다’는 말처럼 삭풍한설 속에도 솔은 인고의 푸름을 드러냅니다. 추사는 왜 이리도 쓸쓸한 그림을 그렸을까? 추사는 안동김씨 세력에 의해 대역죄인이 되어 제주로 9년 유배를 당했지요. ‘위리안치형’이란 중형에 처해져. 고생을 모르고 지낸 추사에게 유배생활은 견디기 힘든 일이었습니다. 끊임없이 풍토병에 시달리는 가운데도 칠십 평생에 벼루 열 개를 밑창내고 붓 천 개가 다 닳아 버릴 만큼 학문 정진을 쉬지 않았어요. 이 그림은 제주도 유배 5년째인 1844년 제자 이상적의 정의에 답례로 그린 것입니다. 주변에 들끓던 그 많은 사람 다 떠나고, 부인마저 세상을 뜨니 고립무원의 추사에게 한줄기 빛은 제자인 이상적뿐이었어요. 역관인 제자는 청나라에 갈 때마다 신간 서적과 학문 동향을 전했습니다. 권력에 의해 땅 끝까지 내쳐진 스승을 끝까지 따라준 제자였지요. 웬만한 정의로는 할 수 없는 일임을 안 추사가 자신의 심경을 글로 담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권력이 있을 때는 가까이 하다가 권세의 자리에서 물러나면 모른 척 하는 것인데, 내가 지금 절해고도에서 귀양살이를 하는 처량한 신세임에도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는 그 마음을 무어라 표현해야 할 건가. 공자는 ‘추운 철이 돼서야 송백의 푸르름을 볼 수 있다’고 했으니 잘 살 때나 궁할 때나 한결같은 그대의 정이야 말로 세한송백(歲寒松柏)의 절조가 아니고 무엇이랴.? 고서화 연구가 이용희 선생은 “세한도는 일견 퍽 싱거운 그림” 이라 했고, 추사의 일생을 다룬 최초의 비평서인 ‘완당평전’을 낸 유홍준도 “실경산수로 치자면 0점짜리 그림“ 이라고 했습니다. 그럼에도 세한도를 추사 예술의 정수로 꼽는 데는 눈에 보인 모습이 아닌 사의(寫意), 즉 뜻을 표현했기 때문입니다. 그림, 글씨, 글 내용이 삼위일체를 이루어 값을 매길 수 없는 무가지보의 가치를 만들었죠. 세한도가 돌고 돌아 국민 품에 안기기까지 굴곡진 소장사(史)를 써야 했습니다. 세한도는 이상적이 죽은 뒤 추사 연구가인 경성제대 후지스카 지카시 교수의 소유가 돼 일본으로 갑니다. 이를 찾고자 서예가 소전 손재형이 거금을 들고 도쿄로 향했습니다. 태평양 전쟁으로 연합군의 공습이 계속되는 상황에서도 소전은 100일을 하루도 거르지 않고 후지스카를 찾아갑니다. 이에 감복한 후지스카가 “내가졌다”며 세한도를 무상으로 내주었습니다. 귀국해서도 세한도는 정착을 못했죠. 손재형이 정치를 하면서 자금이 딸리자 저당을 잡혔고, 결국 개성 갑부 손세기의 소유가 됩니다. 이후 대를 이어 소장해온 아들 손창근 씨가 지난 해 “자식보다 더 아낀 작품”이라는 세한도를 아무런 조건 없이 국가에 기증했습니다. 추사는 그림에 ‘장무상망(長毋相忘)’이란 인장을 찍었어요. ‘오랜 세월 지나도 잊지 말자‘는 뜻입니다. 살아있는 것은 모두 사라졌으나, 추사와 이상적의 정리와 의리는 세한에도 푸르름을 더합니다. 우리가 흔히 쓰는 ‘영원히’라는 말을 사용하지 않고, 마음을 안으로 다스린 장무상망의 글귀가 심금에 와 닿습니다. ‘우리 오래도록 잊지 말자.’ 우정도 사랑도 추운 겨울이 되면 밑천이 드러나는 법이죠. 나는 누구로부터 장무상망이란 말을 들을 수 있을까? 이를 돌아보게 하는 세한도... 지난 여름 과천추사박물관을 돌아본 뒤 혹시나 해 중앙 박물관을 찾았으나 원본을 만나지 못했어요. 안식년이랍니다. 하지만 국립박물관이 국민 품으로 돌아온 것을 기리고자 곧 ‘세한도 특별전’을 열 것이라는 소식에 희망을 안고 발길을 돌렸지요. 그 특별전이 지금 중앙박물관에서 1월 말까지 열리고 있습니다. -글 이관순 소설가/daumcafe/leelett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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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6-14
  • 그림과 그림자
    누가 귀한 잠언을 남겼습니다. ‘사람은 모두 누군가의 선생이다.’ 빈부 귀천, 신분에 구애 없이 누군가에 영향을 미치면서 산다는 뜻이겠지요. 그러니 언행을 함부로 굴리지 말라는 숨은 뜻도 있습니다. 유독 미술에 둔하다고 생각해온 내게 작은 몸짓으로 심연에 잠들었던 미적 감각을 흔들어 깨운 분이 있습니다. 동양화가, 수묵추상화가라는 수식어가 달린 산정 서세옥(1929-2000)입니다. 산정 작품을 처음 만난 것은 24년 전. 그가 서울미대 교수로 재직할 때이고, 이미 자신의 미술세계로 일가를 이룬 후였어요. 인사동의 한 전시장에서 산정의 그림과 만날 때, 그간 느껴온 그림의 난해성 대신 내 눈의 동공이 커지는 걸 느꼈습니다. 그 후 산정의 전시회는 물론 신문에 나는 동정까지 눈에 들어오면서 화가에 대한 이해를 높이게 되었지요. 동양화의 전통적 방식을 탈피해 추상성과 단순성을 토대로 ‘수묵추상화’라는 새 경지를 열었습니다. 1970년대에는 단순한 점과 선으로 사람들의 흐름을 표현하는 천재성을 부각시키더니, 후반에는 자연에 동화해가는 모습과 인간 본질에 다가 가는 작품을 많이 선보였습니다. 산정의 작품에 보다 깊이를 느낀 것은 2016년 2월 중앙현대미술관에서 열린 ‘서세옥 특별전’에서입니다. 작품의 소재가 다 사람들이었는데, 단순한 선으로 연결된 추상기법의 표현이 단조롭지도 화려하지도 않지만 지루하지도 않았지요. 산정의 그림에는 그의 표현대로 추함도, 화려함도, 한쪽으로 기울지 않은 사치와 검소를 봅니다. 전시장에 걸린 글은 산정의 그림에 인생교본을 덧대어 놓은 듯했습니다 *화이불치(華以不侈): 화려하되 사치스럽지 않다. *검이불누(儉以不陋): 검소하되 누추하지 않다. 있는 것만으론 새로울 수 없고 없는 것만으론 공허하기만하다. 길게 보면 무상이 없고 짧게 보면 유상이 없다. 이는 화가가 가는 길목에서 처음부터 모든 걸 열어놓고 생각해야 할 화두다. 저 달은 잠깐 보면 차고 기울지만 항상 보면 되돌아오고, 저 강물도 묵은 물과 새 물이 이어져 흐르나 나누지 않고 함께 흐르고 또 흐른다.? 인생도 늘 비우면서 채울 것을 찾아야 해요. 그러려면 겸손할 수밖에 없습니다. 채워도 2할은 비워두는 여작의 삶이어야 옛 것과 새 것이 만나고 흐릅니다. 무엇을 비우고 무엇으로 채울 건가. 화가는 예부터 바람도 잡고 그림자도 잡아내야하는 ‘포풍(捕風)과 착영(捉影)을 해야 한다고 했어요. 보이지 않는 저 바람을 어떻게 잡아 낼까. 나뭇가지 휘어지고 옷자락이 펄럭이는 모양을 그리는 것만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문학도 그렇습니다. 바람은 우주가 소통하는 최초의 표현이죠. 망망한 바다에 바람이 불면 파도가 일고, 끝없고 거대한 횟바람 소리가 납니다. 산정은 우주가 살아 숨 쉬는 모습이 붓끝에서 들려야 한다고도 했습니다. ‘그림’은 ‘그림자’로 시작된 줄인 말입니다. 그림자는 무엇이든 흉내를 낼 수 있으니, 만유는 그림자의 장난에 지나지 않는다는 해석이 가능해 집니다. 문학도 그림자의 숙명을 지녔습니다. 사람 또한 그림자일 뿐이라면 우리도 예외 없이 그림자로 놀아나는 숙명이 아니던가. 그렇다면 내가 어둠 속으로 숨어들어갈 수밖에 없다. 어둠 속에는 그림자가 없다. 때문에 화가는 항상 무대 밑 어두운 곳에서 자기를 낮추고 화려한 조명 속에 난장판이 벌어지고 있는 그림자 향연을 지켜봐야 함을 화두로 새겨야 할 일이다.? ‘서세옥 특별전’ 은 나와 타인과 그리고 그들과의 관계를 생각하게 하고, 자연과 인간의 조화에 대해 성찰케 합니다. 추상기법으로 표현한 다양한 사람들의 모습이 그래서 더욱 친밀함을 더합니다. 작품마다 두 사람 이상이 모였지요. 손잡고 군무하면서 연대하는 ‘合’의 가치를 온몸으로 전달하는 작품도 있고, 그 속에서 인간을 확인하고 자연과 인간의 ‘합’을 찾기도 합니다. 지난 해, 치열하게 살다가 조용히 세상을 등진 서세옥. 그가 표출한 다양한 형태의 사람과의 만남은 내 안의 다양한 형태의 그림자와 만나게 해주는 선물이 되었지요. -글 이관순 소설가/daumcafe/ leelett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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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6-10
  • 5월이란 광야
    온 누리가 꽃 세상입니다. ‘4월을 주면 나머지 달을 다 주겠다’라는 T.S. 엘리엇의 말에서 우리는 꽃에서 기쁨을 찾고 신록에서 생명의 환희를 느끼려는 지혜를 살핍니다. 5월이 되면 지문처럼 살아나는 두 개의 충격이 있습니다. 주정으로 지새우던 아버지가 10대의 자녀에 의해 죽임을 당한 것과 턱없이 치솟은 전세비를 마련 못한 가장이 세 가족과 함께 동반자살한 사건입니다. 당시 많은 사람은 어린 자식들을 더 가엾게 생각했어요. 오죽했으면 자식이 차마 하지 못할 그 끔찍한 짓을 아비에게 했을까. 그래도 그건 아니지 패륜아들을 힐난하다가도 그 아들을 연민했습니다. 어떻게든 살아보려고 밤낮없이 닥치는 대로 노동을 해온 어머니를 때도 없이 구박하고, 아이들에게는 폭군으로 군림한 비정한 가장에게 더 많은 화살을 날렸었지요. 가슴을 시리게 한 것은 자식의 손에 죽은 아버지입니다. 신병을 앓는 데다 실직까지 한 가장의 좌절과 중압감은 익히 상상이 가는 일이죠. 알코올로 황폐해진 사람은 이미 정신 질환에 가까운 상태이니까요. 그가 온전한 정신이었다면 아들을 그렇게 만들진 못 했겠죠. ‘아버지 죽인 패륜아’란 낙인이 찍혀 평생을 가위눌려 살아야 하는 자식을 만든다는 건 상상도 못 했을 것입니다. 언젠가부터 우리 사회의 아버지는 상징적 존재로 추락했습니다. 머슴이 된 아버지 잔상이 곳곳에 낙화처럼 날립니다. 시집온 여자가 말하던 ‘층층시하’ 대신, 이젠 남자들이 층층 첩첩에 묻혔습니다. 동료와 경쟁하고 치고 올라오는 후배들 눈치 보며 상사에 굴신하면서 실적 내랴, 승진하랴… 평생을 경쟁과 긴장에서 떠날 날이 없습니다. 그래도 예전에는 아버지의 권위라는 게 있었지요. 아버지가 집 짓는 목수라면 적어도 자식에게 ‘우리 아버지가 지은 집’이라고 가리키며 자랑하는 자부심을 주었지요. 하지만 지금은 수십 층 빌딩 공사장에서 일하는 아버지는 왜소함뿐입니다. 또 다른 비극의 아버지가 있습니다. 턱없이 오른 전세금에 가족을 데리고 갈 곳을 마련하지 못하고 끝내 집 설움이 없는 하늘나라로 이사를 결행한 아버지는 이 사회가 만든 비극이었습니다. “주님께서는 못난 내게 좋은 아내와 귀여운 자녀를 선물로 주시는 큰 축복을 허락하셨습니다. 이 얼마나 행복한 가정인가. 그런데….” 이렇게 시작한 유서를 남긴 가장은 우리의 선한 이웃이었습니다. 이산화탄소에 깊이 잠드는 가족 옆에서 대학 노트에 써 내려간 유서는 떨어진 눈물방울로 얼룩졌습니다. “아버지 대부터 시작된 가난의 대물림은 기적이 없는 한 벗어나지 못할 탄데, 혼자서 갈까 생각도 했지만 남은 가족 앞날이 불 보듯 뻔한데….” 이렇게 계속된 유서의 마지막 구절에는 정치하는 사람들에게 지혜를 구하는 간절한 간구도 잊지 않은 마음씨 착한 이웃이었습니다. 당시 여론은 오죽했으면 그랬겠느냐, 죽을 용기로 살아야지, 동정과 질책이 비등했었지요. 하지만, 이러한 참극은 우리가 끌어안아야 할 현실이고 개선 또한 우리의 몫입니다. 그러나 10년이 지난 지금도 가위눌린 아버지는 여전히 눌린 채로, 무심히 흐르는 세월에 한숨짓습니다. 뼈아픈 것은 가난보다 이웃에 대한 무관심과 생명 경시 풍조입니다. 카네기는 “이웃이 굶든 자기 두통에나 신경 쓰는 것이 문명사회”라고 비난했지만, 이웃이 죽은 지 나흘 만에 발견돼도 예사롭지 않게 취급되는 세상입니다. “세 닢 주고 집 사고, 천 냥 주고 이웃 산다”라는 속담처럼 더없이 중요한 게 이웃인데, 이 소중한 가치가 디지털 문명 속에 존재나 하고 있는 걸까. 물 오른 수목과 푸름을 더하는 신록, 힘차게 키를 돋우는 풀포기들. 꽃향기에 아이들 웃음소리까지 5월은 생명의 은총으로 화합하는데, 사람들만 서로에게 등을 돌리고 있습니다. 산하에 차오른 생명의 기운은 자연의 화해에서 생성됩니다. 화해가 없는 자연은 생명이 자라지 못하는 황무지를 만들듯, 이웃과의 화목 없는 삶이라면 숨 쉬는 주검에 다름 아닙니다. 가정의 달에도 광야로 내몰리는 우리의 이웃들… 한 번쯤 생각을 모으고, 음지의 이웃을 살피는 5월이었으면. 동화 속 ‘성냥팔이 소녀’가 우리 집 창문 아래에도 떨고 앉아 있지는 않은 지, 창을 열고 살피는 5월이 되었으면. -소설가/ daumcafe 이관순의 손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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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6-07
  • 틈이 있어야 찾아오는 것들
    인간관계가 중하다는 건 다 압니다. 일평생 영향을 주고받는 것 중 이만한 것이 없으니까요. 가진 것이 넉넉하고 기품 있게 사는 것 같아도 인간관계가 편하지 않으면 실상은 다 허상입니다. 사람이 온유하지 않고, 겸손을 모르면 자신을 잘 모릅니다. 성품이 모난 사람은 외롭고 불행한 삶을 자초하게 됩니다. 늙어 모든 게 떠난 병상에 누워서야 세한(歲寒)에 떠는 자신과 만나죠. 부부간, 형제간, 남여 간, 친구와 이웃사이 등 모든 사람 관계를 아름답고 풍부하게 하고, 마음 편하게 활기차게 만들어 사는 법은 하나뿐입니다. 내 그릇을 다 채우려 들지 않는 것이죠. 80%만 채우고 20%는 비워두는 삶입니다. 마음을 비우는 일이 쉬운 것 같아도 쉽지 않은 일이죠. 오래도록 도를 닦고 수양을 한 사람도 한 순간 용수철처럼 튀어나오는 것이 욕망이란 본능입니다. 서점가의 모든 인생 수험서, 처세론, 철학 서적들이 아무리 외쳐대도 견물생심이라, 욕심 앞에 장사가 없지요. 그래도 끊임없이 노력해야 하는 것이 내 그릇의 일부를 비우는 일입니다. 만수위가 된 댐은 위험하고, 물이 가득 찬 제방은 터지기 마련입니다. 음식물로 위를 가득 채우는 사람을 미련하다고 하면서, 정작 마음엔 별 오만 잡다한 욕심으로 가득합니다. 이슬도 무거우면 떨어집니다. 차면 기우는 달 같이 차면 넘치는 것이 자연계의 순리입니다. 보름달은 차는 순간부터 기울기를 시작합니다. 사람의 마음도 비울 줄 아는 습관을 들여야 합니다. 이것이 삶을 풍성하게 이끄는 고상 함이며 삶의 지혜입니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바늘도 안 들어갈 만큼 속이 꽉 찬 사람, 똑똑하다고 소문난 사람을 유심히 관찰해 보세요. 대부분 겉모습과 달리 이기적이고 자기애와 주장이 강한 사람임을 알게 됩니다. 유불리를 냉철하게 따지고 기준에 미치지 못하면 가차 없이 응징하고, 자기를 높여주는 말을 은근히 즐깁니다. 세상을 잘 사는 사람은 그런 사람이 아닙니다. 좀 모자란 듯한 사람이 정이 많고, 어려울 때 힘이 되고, 좀 허술해 보이는 사람이 내 고난에 아파하는 이웃이고 친구가 됩니다. 톨스토이 소설 ‘이반 일리치의 죽음’에 나오는 하인 게라심 같은 사람이죠. 주인이 보기에 그는 어리숙했고 우직하기만 했지 어딘가 좀 모자란 사람으로 밖에 보이지 않았지요. 그러던 주인이 병들고 병상의 시간이 길어지면서 주위를 맴돈 많은 사람들이 다 떠나갑니다. 필요에 의해 연결될 사람들이지요. 위기의 순간에 내 곁에 누군가 남아 있다면 행복한 사람입니다. 이반 일리치가 괴로운 건 용변을 볼 때마다 남의 도움을 받는 일입니다. 진심으로 만난 사람은 친구가 고통받을 때 나타납니다. 임종을 앞둔 이 견디기 힘든 일을 도와준 건 하인 게라심입니다. 지난 세월을 돌아보니 내 처지를 이해하고 진심으로 대해 준 사람은 단 한 사람뿐임을 알게 됩니다. 끝까지 자기 곁을 지키는 최후의 1인이 된 사람이 게리심임을 깨닫습니다. 주인이 처음으로 미안한 마음을 전합니다. 그러자 그가 말했습니다. "우린 언젠가 다 죽잖아요. 형편이 같은 사람인데 주인님을 위해 이 정도 수고 좀 못하겠어요. 어찌 고생이라 하겠습니까?“ 마음이 강퍅했던 이반 일리치는 그런 게라심이 내 곁에 있다는 데 큰 위안을 받고, 눈물을 삼킵니다. 죽음 앞에 이르러서야 어질어지는 게 인간입니다. 게라심을 통해 우리는 무엇을 배울 수 있을까? 화려한 삶보다 한결같은 삶이 귀하고. 조금 부족한 듯 살아야 인생이 깊어지고 조금 모자란 듯 살아야 삶이 활기찹니다. 조금 손해본 듯 살아야 관계가 좋아지고 조금 지는 듯 살아야 마음이 편해집니다. 화려한 삶을 연모하지 말아요. 좀 부족하고 모자라야 바람이 드나들 틈이 생기고 햇빛이 스며들 틈이 보입니다. 대리석이 차가운 것은 겉은 매끄럽고 화려해도 틈이 없으니 냉한 자기 체온뿐입니다. 다른 사람이 들어와 함께 어울릴 수 있는 틈을 만드세요. 바람이 들고 빛이 찾아와 섞여야 생명이 자라고 풍성해집니다. 그 틈으로 새가 찾아와 집을 짓고 노래를 들려줍니다. 틈이 없는 사람은 자존감은 없고 자존심만 강한 사람입니다. ‘어우렁 더우렁 살자’라는 사람은 틈이 그리운 사람들입니다. ‘엄마야 누나야 강변 살자’란 사람은 틈을 사모하는 사람입니다. 이들은 자존심을 버리고 서로의 자존감을 높여 줍니다. 상대방의 자존감을 살려 줄 때 지금 사는 세상이 보다 살만 해집니다. 현실에 자족하는 사람이 그런 사람입니다. -소설가/ daumcafe 이관순의 손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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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6-02
  • 너도 죽는다‘메멘토 모리’
    말에는 묘한 힘이 있어 곱씹을수록 향기를 내는 말이 있고, 겸손함을 가르치는 말도 있지요. 라틴어는 그런 철학적 의미를 함의한 말과 글이 꽤 많습니다. 언젠가의 기억입니다. KBS TV '도전 골든벨‘에서 최후 1인이 된 학생에게 50번 마지막 골든벨 문제가 주어집니다. “고대 로마에서 승리를 쟁취한 장군이 개선행진을 할 때 주위에서 외쳤던 라틴어는?“ “메멘토 모리" 영예의 골든벨이 울리는 짜릿한 순간을 지켜보았지요. 다소 생소한 라틴어 '메멘토 모리(memento mori)'는 '죽음을 기억하라‘는 뜻입니다. 유래는 로마 공화정의 개선식으로 거슬러 올라가요. 개선식은 전쟁에서 승리한 장군에게 주어지는 영예입니다. 개선장군은 관습에 따라 전차를 타고 퍼레이드를 벌입니다. 영웅이 탄 마차가 시민의 환호 속을 헤치고 행진하는 동안 뒤에서 노예들이 큰소리로 외쳐댑니다. 메멘토 모리! 메멘토 모리! “오늘은 개선장군이지만 너도 언젠가는 죽는다. 겸손하게 행동하라.” 승리에 도취된 장군에게 본분을 잊지 않도록 경각심을 주는 장치인 셈이죠. 로마 최고의 환대 속에서도 너는 신이 아닌, 한 인간일 뿐임을 알린 것입니다. 메멘토 모리에는 세 가지 철학적 가치가 내재되어 있습니다. ‘죽음을 기억하라. 운명을 사랑하라. 현재에 충실하라.’ 이 셋은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도 적용되는 훌륭한 교훈입니다. 스티브 잡스도 스탠퍼드대 졸업식 축하 연설에서 이를 강조했습니다. 췌장암 투병으로 힘든 시기를 보내던 그는 ‘죽음은 삶이 만든 최고의 발명품‘이라고 격찬합니다. 그러므로 제한된 인간의 시간을 다른 누군가의 인생을 살 듯 낭비하지 말고 자신을 믿고 집중하라고 졸업하는 학생들에게 말합니다. 뜻이 통하는 라틴어에 ‘카르페 디엠(carpe diem)'이 있습니다. 몬래 이 말은 신을 공경하고 오만해지지 말라는, 현재를 가치 있게 살라는 뜻인데 이후 기독교 영향을 받아 현세의 부귀나 영화의 부질없음을 알립니다. 우리에게도 ‘화무십일홍’이란 말이 있죠. 열흘 가는 붉은 꽃이 없다는 이 말엔 ‘한 번 흥한 것은 반드시 쇠한다.’ 는 속뜻을 지닙니다. 트로트 가수 김연자가 불러 유명한 노래 ‘아모르 파티’도 같은 말입니다. 사랑을 뜻하는 아모르와 운명을 뜻하는 파티가 합성된 라틴어로 이 또한 ‘운명을 사랑하라’는 말이지요. 인간이 가져야 할 삶의 태도로 철학자 니체가 처음 사용했습니다. 메멘토 모리는 미국 남서부에 거주해온 나바호족에서도 찾을 수 있어요. 그들은 “네가 세상에 울면서 태어날 때 세상은 기뻐했으니, 네가 죽을 때 세상은 울어도 너는 기뻐할 수 있도록, 그러한 삶을 살아라.”는 의미심장한 철학을 닮고 있습니다. <메멘토 모리>, <카르페 디엠>, <아모르 파티>, <화무십일홍>까지 모두 겸손한 삶을 가르칩니다. 제한된 시간을 사는 인생에게 죽음을 기억하고, 운명을 사랑하고, 오늘에 충실하라.... 이보다 더 삶을 성찰하게 하는 말이 또 있을까 싶습니다. 글/ 이관순(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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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5-30
  • 품위 있게 늙어가기
    ‘만족함을 알면 욕되지 않고, 그칠 줄을 알면 위태롭지 않다.’ (知足不辱 知止不殆) 젊어서 선배들로부터 많이 듣던 말입니다. 세월이 흐른 지금은 너나 없이 입에 올리는 말이 ‘품위(品位)’입니다. 어떻게 하면 노년을 품위 있게 살며, 품위 있게 늙어갈 건가. 삶의 화두가 되었지요. 품위란 한자는 입구(口) 세 개가 모인 ‘물건 품(品)’과 인(人) 옆에 설 립(立)을 더한 ‘자리 위(位)’를 써요. 노년의 품위를 말할 때 나는 두 개의 원칙을 세워놓고 생각합니다. 첫째는 말을 때와 장소에 맞게 하는 것이고, 둘째는 스스로를 살펴 겸손하게 처신하는 것입니다. 아는 척하거나 말 길게 하지 않기, 다른 사람 말할 때 끼어들지 않기, 늘 나를 돌아보며 살펴 살기…. 하지만 나를 돌아보고 살기가 쉽지 않은 건 사람은 자신에게 관대한 성향이 있어섭니다. 남에겐 관대하면서 자신에겐 엄격하기란 쉽지 않아요. 올해를 시작하며 ‘성찰’과 ‘자성’을 꼽은 건 그래서 입니다. 바쁨 속에도 짬을 내어 나를 돌아보지 않으면 영영 나 자신을 잃고 말 것이란 두려움이 가슴 한 구석에 늘 자리 잡고 있어요. 생각 없이 살고 주어지는 대로 산다는 게 너무 덧없어 보여섭니다. 아침에 명상을 하고, 낮엔 글을 쓰고, 밤에는 일기를 쓰면서, 나를 돌아보는 기회를 많이 가지려고 합니다. 때로는 간밤에 꾼 꿈에 대해 생각하는 것도 ‘나’를 돌아보는 기회일 수 있겠다 생각하죠. 한 여름 태양 같은 에너지는 기를 숙였어도 돌담에 속삭이는 햇살처럼 온기를 주는 사람이 되고픈 바람입니다. 예전처럼 사람들이 내 말에 귀를 쫑긋 세우지 않아도, 중심에서 멀어지면 멀어진 대로 받아 들이며 살아요. 우선은 중심에서 잘 빠져나오는 것이 중요합니다. 쨍쨍한 여름날이 다 가고 서늘한 가을인데, 비키니 입고 들레면 어찌 될까? 내 선 자리를 인지하고 다가올 겨울을 바라봐야 내게 보다 진지해질 수 있습니다. 퇴직한 지 수삼 년이 지났는데도, 외부와 선을 대는 일에 집착하거나, 그것을 복원하려고 아등바등하다 보면 내 삶은 위축되고 노년의 건강을 해치는 스트레스만 쌓입니다. 몸에 익은 것들과의 작별도 익숙해야 해요. 나만의 루틴을 만들어 실천 하는 것이 품격까지는 아니더라도, 외부의 충동이나 유혹에 휘둘리지 않고 내 나름의 고요한 삶을 즐길 수 있는 수단입니다. ‘남김없이 다 쓰고 간다. 재물, 재능, 열정, 사랑도 몽땅!’ 지인이 마음 벽에 쓴 비문이랍니다. 젊어선 쉬지 않고 일에 매달렸는데, 이젠 꿀벌처럼 나를 위해 부지런히 살겠답니다. 그분 결기가 부럽기도 한 건 왤까요? 그러지 못하는 내 마음을 대신해서가 아닐까 해요. 흔하게 받는 카톡 내용이 대부분 병 걸리지 말고, 잘 늙고, 장수하자는 것들입니다. 온라인 커뮤니티까지 세상의 좋은 말로 차고 넘칩니다. 그럼에도 도움이 안 되는 건 아직 생각과 행동이 겉돌기 때문입니다. 미나미 가즈코가 쓴 ‘늙지 마라 나의 일상’도 어떻게 하면 노년을 품위를 지키면서 살까로 가득 찼어요. 혼자 사는 70대 여성 눈으로 많은 관찰과 체험, 생각을 채집해 정리한 노년용 실용서로 일독을 할만합니다. * 오늘 아무렇지도 않게 했던 일을 내일에는 못하게 될지 모른다. 그런 상황도 받아들일 준비가 돼 있다. 일종의 각오다. 각오가 돼 있기에 난 매일 반복되는 사소한 일상을 감사하게 받아들일 수 있다. *.하루에도 옷을 여러 번 갈아입는다. 내 힘으로 옷을 벗고 입을 수 있는 날이 오래오래 지속되길 기도하며. 옷을 갈아입는 행동이 단순한 행동이라 해도 내겐 육체적 정신적 리허빌리테이션이다. *. 자세를 바르게 하는 것이야 말로 내게 줄 수 있는 가장 큰 선물이다. *. 청소하기, 집안일 찾아 하기는 내가 할 수 있는 중요한 운동이다. * 심신이 약해진 고령자에게 잠깐의 통화는 쓸쓸함을 달랠 좋은 친구다. *매일 일기를 쓴다. 일기를 쓰면 노화 예방에 효과가 있을 것 같아서다. *약속은 삶의 이벤트라고 생각한다. 친구든 친지든 사람을 만날 때 만큼은 설렘으로 준비하고 즐거운 시간을 보내려고 노력한다. * 삶의 마지막은 나 혼자다. 젊든 늙든 반려자를 상실한 슬픔을 쉽게 극복되리라 생각하는 건 잘못이다. 수십 년이 지나도 그 애틋한 마음은 달리 설명할 길이 없다. 그저 심각하게 생각지 않으려고 할 뿐…. 노년에게 건강이란 무엇일까. 스스로 행복하다고 느끼는 생활을 지속해 나가는 것이겠죠. 건강이 나빠지면 따라 마음도 약해집니다. 우울해질 땐 마음이 따뜻해질 수 있는 상황을 적극 만들어야 합니다. ‘감사합니다.’ 나이를 먹은 후 빼먹지 말아야 할 인사예요. 나를 기억하는 사람이나 나와 마주치는 모든 사람에게 감사의 말을 건네는 것이 최소한의 품위를 지키는 일이랍니다. 말할 때는 꼭 웃으면서, 고마워요. 감사해요…. 미소는 마음의 자물쇠를 여는 열쇠와 같습니다. -소설가/daumcafe 이관순의손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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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5-26
  • 왜 일하는가?
    손편지에 소개한 일본 ‘경영의 신(神)’으로 불리는 교세라 그룹 창업주 이나모리 가즈오 명예회장이 쓴 책 두 권이 2021년 봄 연이어 국내에 소개된 적이 있습니다. 연말에 두 권을 읽었습니다. 2021 독서 리스트에 올리고도 미뤘다가 구세군 자선냄비의 종소리를 듣고서 서둘렀던 책입니다. <왜 일하는가>. <왜 리더인가>. 그의 60년 경영 인생을 반추한 두 권 책에는 경영서적 답지 않게 혁신, 효율, 기술 등을 강조하지 않고 ‘마음’을 앞세운 점이 흥미롭습니다. 사업의 크기는 곧 마음의 크기라고 생각한, 그의 혜안이 돋보입니다. 두 책은 각기 다른 질문을 던지고 있어요. <왜 일하는가>가 매일 아침 힘겹게 일어나 일터에 나가야 하는 이유를 치열하게 되묻는다면, <왜 리더인가>는 리더가 갖춰야 할 ‘힘’으로 마음을 다루었습니다. 일하는 것도 일종의 자기 수양입니다. 일에 전념하는 자세로 인격을 연마할 수 있기에, 인생의 깊이와 가치를 만들 수 있다고 보았지요. 반성하고 돌아보는 자세가 겸허한 사람을 만들기 때문입니다. ‘천직’이란 것이 따로 존재할까? 이 물음에 답합니다. 천직은 우연히 찾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좋아해야 만들어지는 것임을 60년 기업 경영을 통해 터득했답니다. 이에 대한 태도는 단호합니다. 많은 사람이 자신에게 맞는 일을 찾는다는 이유로 쉽게 직업을 바꾸고 오랜 시간 헤매는 것을 안타까워합니다. 어떤 일이든 일에서 중요한 것은 선호의 문제이기 전에 집중과 몰입의 문제입니다. 무슨 일이든 몰입하고 집중하면 추진력이 생기고 성과도 좋아지는 법. 그러면 주위의 인정을 받게 되고 그러한 인정은 일을 더 좋아지게 하는 선순환 구조를 만들어 냅니다. 인생이든 사업이든 내가 하는 일이 즐거운 선순환 구조를 만드는 게 중요합니다. 그러려면 내가 하는 일이 좋아지도록 노력하는 자세가 선행되는 것이 중요하겠지요. 인간은 기쁨을 느낄 때 새로운 에너지와 용기를 얻으니까요. 자신이 하는 일에서 크든 작든 만족과 성취를 느끼며 감동하는 사람은 끊임없이 앞으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작은 성취에 감동하며 얻는 기쁨은 경험한 사람만이 아는 쾌감이자 기상입니다. 이를 터득하기 위한 수단으로 지시를 받기 전에 스스로 알아서 일하는 적극적인 사람이 되라고 권합니다. 이 세상에 지시받는 것을 좋아할 사람은 한 사람도 없을 테니까요. 지시 받는 것이 싫으면 지시 전에 알아서 움직이는 것이 상책입니다. ‘수동적으로 일하지 말라’라는 가장 큰 이유는 무엇일까? 수동적인 일은 일을 재미없게 만들고 실증을 일으켜 결국 떠나게 만드니까요. 능동적으로 일하는 사람은 주변에 긍정적인 영향을 줍니다. 그러면 자연 생각하며 일하게 되고 생각하는 사고는 창의적 사람을 만듭니다. 회사나 조직을 앞으로 나갈 수 있게 힘을 보태는 사람이 됩니다. 무엇을 꿈꾸는가? 높은 꿈과 소망은 인간과 조직을 발전시키는 최고의 동력입니다. 가슴에 높은 꿈을 품고 계속 외치고 다짐하세요. 어느새 목표가 당연하게 내 것이 되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꿈은 간절할수록 실현에 가까워집니다. 마음이 간절하면 행동도 따라 갑니다. 구체적인 목표와 계획을 세우고 간절함을 앞세우세요. 목표를 이루려면 간절한 바람이 의식에 짙게 깔려야 합니다. 간절한 바람이 미칠 정도로 일에 몰두시킬 것입니다. 그는 세 가지에 방점을 찍었어요. 굳게 다짐하라. 스스로를 믿어라, 그리고 몰입하라. 한때 불교에 귀의했던 탓인지 평범한 곳에서, 때로는 엉뚱한 곳에서 비범함을 찾습니다. 삶이든 기업이든 이웃을 생각하는 마음을 기본으로 깔고 시작하는 것도 독특합니다. 이를 타력(他力)이라 했습니다. 인생도, 사업도 원리는 하나. 선하게 영위하는 것. ‘타력’ ‘선한 동기’ ‘겸허’입니다. 내가 행한 생각과 행동이 훗날 내게로 되돌아온다는 것에도 믿음을 지닙니다. 악하게 행하면 언젠가 어떤 형태로든 남에게 준 상처가 내게로 돌아옵니다. 그래서 선하게 영위하라는 것입니다. 지방의 작은 업체를 ‘세계 100대 기업’으로 키운 자수성가 사업가이자 부도 직전의 일본항공을 맡아 2년 만에 흑자로 전환시킨, 리더의 정수를 보여준 일본 경영의 신 이나모리 가즈오. 그는 리더의 고초를 털어놓았죠. “27세에 교세라를 창업했지만 제품을 찾아주는 거래처는커녕 문전박대를 당하기 일쑤였다. 직원들 임금을 주려고 하루 12시간 뛰어다니며 머릴 조아려도 돌아오는 건 냉소뿐.” 또 그에게서 리더의 고통을 들어요. “나는 언제쯤 떳떳한 사장이 될 수 있을까? 직원들로부터 돌아오는 냉소와 리더를 신뢰하지 않는 것이 매출이 떨어지는 것보다 더 고통스러웠다”라는 아픔을…. 이것이 리더의 눈물입니다. 90세인 그는 지금도 매일 거울을 바라보며 ‘어리석은 놈!’ “무례한 놈!”이라고 꾸짖습니다. 그리고 ‘신이시여, 죄송합니다.’ 용서를 구하고 자신을 성찰합니다. 사람이 믿고 사는 방식은 각기 다르지만 구하는 목표는 하나입니다. 맑은 영혼으로 내세에 들어가는 것. 이를 준비하는 것이 인생일 테고 그 과정에서 기업도 영위되는 것이 아닐까. -소설가/ daumcafe 이관순의손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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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5-24
  • 웰컴 투 팝콘
    신록은 꽃철에서 시작합니다. 꽃철은 아이들을 산으로 불러냅니다. 살아난 산들이 골짝마다 화사한 옷으로 갈아입고, 딱히 갈 데 없는 가난한 아이들에게 아름다운 꽃동산을 열어줍니다. 진달래 철쭉 아카시아 등 색색으로 피어난 봄꽃들이 능선과 골짝을 물들이고, 흥에 겨운 아이들이 쉬지 않고 꽃을 찾아다니던 풍경 속엔 아이들만의 또 다른 즐거움이 있습니다. “야, 여기! 이리 와!” 또래 형이 소리치면 아이들은 소리 난 곳을 향해 우르르 비탈을 내달리죠. 와~! 아이들이 지르는 탄성엔 아름다움보다 ‘많다’는 데 방점이 찍힙니다. 봄꽃은 곧 먹는 꽃이니까요. 아이들은 그때가 보릿고개란 것을 모릅니다. 쫄쫄 배를 골아도 사는 게 그러려니 할 뿐. 또래들의 관심은 늘 노는 데만 정신을 팔지요. 그러다 허기를 느끼면 또래 형이 소리칩니다. “야, 산에 가자!”. 뒷산에서 삘기를 뽑아 먹고, 붉은 진달래를 따서 입에 넣고 우적우적 씹습니다. 쌉쌀한 맛이지만 모두들 입술이 물 들도록 꽃잎을 따 먹고 집으로 향할 때면 입술마다 보랏빛에 물들었죠. 음식으로 치자면 요즘 한창인 이팝나무꽃이 더 살갑습니다. 나뭇가지를 뒤덮은 하얀 꽃이 마치 ‘이밥(쌀밥)’ 같다고 붙여진 이름입니다. 여름이 시작될 무렵 핀다고 입하 목(立夏木)으로도 불립니다. 이팝이 꽃을 피울 때가 공교롭게도 보릿고개와 겹쳤습니다. 보릿고개를 넘던 옛 조상들 눈에는 가지마다 다닥다닥 붙은 꽃이 쌀밥으로 보였나 뵵니다. 이팝꽃이 주는 슬프고도 아름다운 환영입니다. 영화 ‘웰컴 투 동막골’의 압권인 장면은 정적을 깨는 팝콘 판타지입니다. 국군, 인민군, 연합군이 마을 사람들을 사이에 두고 만들어낸 우리 민족의 아픈 서사를 더 저리게 했던 바로 그 장면…. 수류탄이 마을 옥수수 창고로 굴러들어가 터지면서 옥수수가 팝콘으로 튀겨져 하늘 높이 솟아오를 때, 사람들 얼굴에 온기를 돌리고, 팝콘이 밤하늘에서 흰 눈으로 내릴 때, 모두를 잠시나마 선한 얼굴로 되돌려 함박웃음을 짓게 했던 팝콘 판타지…. 어제 들린 서울 현충원에도 이팝나무마다 흰 눈이 소복소복 쌓였습니다. 화려하지는 않지만 충혼의 넋을 위로하는 지금은, 저보다 맞춤한 꽃이 떠오르지 않습니다. 새 정부가 국민 품으로 돌려준 청와대에도 이팝나무 꽃이 폈습니다. 박근혜 대통령이 정치 고항인 대구 달성에서 가져와 심었다는데, 올해는 더 풍성하게 피어 ‘웰컴 투 청와대’의 한 자리를 밝힙니다. 언젠가부터 은행나무를 대체해 가로수로 각광을 받더니 청계천에도 가로수에서 흰 팝콘을 터트립니다. 전주 팔복동 철길, 함평 양재리도 그 소박한 꽃송이가 밥사발 가득 흰쌀밥을 얹었습니다. 조선 왕조 때는 벼슬을 해야 이씨가 주는 귀한 밥을 먹을 수 있다고 해 ‘이(李)밥나무’로 불렸다는 꽃. 전라도에서는 ‘밥태기’, 경기도에서는 ‘쌀나무’로도 불리지만 이미지는 다 흰쌀밥이죠. 나무에 무슨 귀족이 있고 서민이 있을까만 굳이 따진다면 이팝나무는 배고픔의 고통을 아는 서민 나무의 대표라 할 것입니다. 군락을 이루어 피는 벚꽃, 배꽃, 지금이 한창인 이팝꽃, 아카시아꽃처럼 흰꽃만큼 우리 눈을 환하게 열어주는 꽃도 없습니다. 지금은 산하마다 아카시아가 제철입니다. 오늘도 워커힐을 지나 집으로 가는 아차산로에는 산에서 내려오는 아카시아 향기로 진동합니다. 사시사철 내게 넓은 품을 열어준 아차산의 지금은, 하얀 꽃무리가 구름꽃이 되어 녹색 숲을 덮고 있습니다. 밤에 창을 열면, 베란다를 지나 서재로 들이친 고혹한 향기가 절로 깊은 들숨부터 쉬게 합니다. 아카시아는 서러움의 꽃입니다. 먹을 것이 없던 시절, 아이들이 밥 대신 따먹던 꽃이었으니까요. 또한 그리움의 꽃입니다. 이해인 시인의 시 ‘아카시아’가 그렇습니다. ?..내가 철이 없어/ 너무 많이 엎질러 놓은 젊은날의 그리움이/ 일제히 숲으로 들어가/ 꽃이 된 것만 같은/ 아카시아꽃? 아카시아 향이 멀어지고 찝찔한 밤꽃 향이 나면, 여름이 온다는 신호입니다. 벌써 봄의 끝자락, 야속한 건 부리나케 폈다 떠나는 봄꽃의 속성입니다. 어쩜 성질머리가 봄을 꼭 빼닮았을까? 삶을 그리웁게 하는 건 배불리 먹고 잘 놀던 기억이 아니라, 힘든 때를 함께 한 사람들과의 기억입니다. 봄꽃은 그래서 애잔하고, 지울 수 없는 얼룩이고, 정겨운 내 기억의 문신이죠. -소설가 daumcafe 이관순의 손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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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5-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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