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늙고, 잘 죽는 일
“순간순간이 아쉽지. 더 잘해주지 못해. 저렇게라도 내 옆에 오래오래 있어주면 좋겠어. 그래서 지금이 행복해.” 그 편안한 얼굴에서 나오는 말이 신선처럼 들립니다.
한 동네에서 30년쯤 살면 동네사람과 만남은 함께 늙어간다는 것을 확인하는
자리입니다. 팔팔했던 젊음이 다들 주름진 얼굴로 바뀌었습니다.
“얼굴이 좋아지셨네요?” 암을 이겨낸 분과 인사를 나누지만 마른 몸, 굽은 허리,
눈빛에서 연민을 느낍니다.
아파트 단지가 생기면서 후문 옆에 과일가게를 연 박 씨는 지금도 그 자리를
지키고, 시장입구에 생선 파는 아줌마도 여전히 생선을 만집니다. 한 번 선택이
평생에 작용한다는 말을 실감케 합니다.
꿈이야 많았겠지만, 어어 하는 새 세월이 흘렀겠지요. “가을볕이 좋아 잠깐
졸았는데 백발이 되었네.”라는 시구가 빠른 세월을 절창합니다.
그래서 후회 없는 인생을 살려면 다섯 가지 계획을 잘 세우라고 합니다.
중국 송나라 때 주신중이란 학자가 ‘인생오계론(人生五計論)’을 설파했지요.
이 다섯 가지를 바르게 세워 잘 실천하면 실패 않는 삶을 산다고 합니다.
첫째가 ‘생계(生計)’입니다. 난 무슨 일을 하여 어떻게 먹고 살 것인가?
직업에 관한 계획과 준비를 말합니다. 첫 업이 평생의 업이 되기 쉬우니까요.
그때보다 평균수명이 40년은 길어졌으니 생계의 중요성은 더 커질 수밖에요.
설령 적성을 살려 일할 곳이 마땅치 않더라도 쉬 포기하지 말라합니다.
둘째는 ‘신계(身計)’입니다. 몸과 마음을 강건하게 하라는 뜻이겠지요.
신외무물이란 말처럼 내 몸보다 소중한 것은 없습니다. 재물은 있다가 없고
또 채워지지만, 잃은 건강은 되찾기 어렵습니다.
요즘은 이 말이 어떻게 ‘처신’ 하며 살 것인가로 해석됩니다. 처세가 바르지
않으면 힘써 쌓은 명예까지 다 무너집니다. 끌끌하신 분들이 검찰 포토라인에
서는 것을 많이 보았으니까요.
셋째는 가계(家計). 가정을 어떻게 꾸려나갈 것인가를 묻습니다. 부부관계,
부모와 자식, 형제 관계를 이르죠. 가정은 마음의 풀을 뽑는 곳입니다. 사랑과
신뢰를 바탕으로 서로의 마음에 잡초가 자라지 못하게 돕는 곳입니다. 가정의
중요성은 거듭 말해도 부족함이 없겠죠. 사회의 마지막 안전판이니까요.
넷째는 노계(老計)죠. 어떻게 늙어 갈 것인가? 참 어려운 고난도 문제입니다.
“참 곱게 늙으셨어요.” “예쁜 얼굴이 왜 저리 됐지?” 늙음을 두고 듣는 말이죠.
오죽하면 앙드레 지드가 “인생사에서 가장 어려운 건 아름답게 늙는 것‘이라고
했을까요. 삶이 얼굴에 나타난다는 말은 허투루 나온 말이 아닙니다.
세상을 편안하게 보고, 모든 것을 받아들이며, 이해하고 배려함이 나의
늙음을 아름답게 해줍니다.
끝으로 사계(死計)를 통해 어떻게 죽음을 준비할까를 묻습니다.
죽음은 모든 것의 끝이 아니라 새로운 세계로 들어가는 입구입니다. ‘죽음학’이
새롭게 조명되는 이유지요.
종교가 말하는 생명의 부활, 윤회, 내세도 뚜렷한 사생관 위에 서 있습니다.
감사하는 삶, 봉사하는 삶, 겸손한 삶이 편안한 사계의 충분조건입니다.
월 초에, 아내 병수발로 2년 가깝게 두문불출한 선배가 모임에 나왔습니다.
모두가 걱정했는데 빗나간 예상이었지요. 몸집은 빠졌지만 표정도 밝고 여간
편안해 보이지 않았습니다. 잘 웃던 모습도 여전했으니까요.
수발을 드는 건지 받는 건지 오해받겠다고 하니까 말을 받습니다.
“순간순간이 아쉽지. 더 잘해주지 못해. 저렇게라도 내 옆에 오래오래 있어주면
좋겠어. 그래서 지금이 행복해.”
그 편안한 얼굴에서 나오는 말이 신선처럼 들립니다.
*글 이관순(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