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누구인가? 무얼 위해 사는가?
인생이라는 내가 살아온 발자취아며 후손들에게 역사적인 사실로 남겨져 교훈이 되고 삶에 보탬이 될 수 있어야 하는데 나는 얼마나 그런 인생을 살아왔는가?
요즈음 나는 팔순을 바라보고 있는 나이에도 새삼 ‘나는 누구인가? 무얼 위해서 사는가?”란 정체성 문제로 혼란에 빠지고 있다.
마약과의 전쟁을 선포한 정부가 말레이시아 마약조직의 필로폰 밀반입 범행에 연루된 인천공항 세관 직원들의 수사를 외압에 의해서 중단시킨 일을 영등포 경찰서 백해룡 경정이 폭로 하였다.
어찌 국민의 생명과 안전을 보호해야 될 정부가 마약수사를 중단시키는 해괴한 짓을 그냥 덮어버리려는 괴물 정치권을 바라보면서 새삼 “우린 누구인가? 무얼 위해 사는가?”라는 질문을 하지 않을 수 없다.
세상에 모든 사람들은 각기 다른 타고난 본성이 있다는 사실은 숨길 수 없는 진리이다. 부모와 형제지간에서 같은 가족이라는 틀 아래에서 살아왔어도 부모와 형제들도 각기 다른 특성을 갖고 있기 마련이다. 그래서 서로 이해충돌이 일어나고 다툼이 일어날 수 있다. 그렇지만 같은 집안에서 같이 먹고 자란 식구라는 공감대가 있기 때문에 다툼이나 갈등은 어느 정도 완해될 수 있는 여지가 있는 것이다. 상대방을 이해하고 이를 배려하려는 마음도 생겨서 안락한 가정을 이룩하기 위해서 노력하기 마련이다.
우리나라 부모님의 심정은 “나는 평생 농삿일로 고생을 하지만 너만은 대학에 들어가서 이런 부모와는 달리 멋지고 행복한 인생을 보내야 된다”는 희망으로 자식의 뒷바라지를 위해서 어떤 희생을 감수하게 된다.
자식들은 이런 부모님의 은혜에 보답하기 위해서 부모님의 기대에 어긋나는 자식이 되지 않기 위해서 최선을 하기 마련이다. 그렇지만 부모님의 기대란 ’남보다 앞서 권력과 재력를 누리는 욕심‘이다. 그렇지만 한국의 사회를 천민자본주의로 말하듯이 권력과 부란 대물림을 받는 것이어서 농촌출신 자식들에겐 이런 기회가 주어지지 않는다.
그래서 농촌 출신들이 출세하는 길은 사법고시나 행정고시를 합격하는 일이고 그 다음으로 급여가 높은 기업체에 들어가 돈을 많이 버는 일이라는 평범한 진리가 통한다.
지난 25년만에 한강의 기적을 이룩하여 선진국 대열에 편입되었다고 자랑한다. 그렇지만 그 이면을 살펴보면 인플레 소득으로 빈익빈 부익부의 구조를 통하여 형성된 자본이 재벌그룹이라는 미명으로 국가경제를 지배하고 있다.
30대 재벌들이 경제적 부가가치의 98%를 차지하고 있다고 하니 어찌보면 재벌독재체제가 가능한 경제구조를 갖고 있다. 이런 부를 축적시킨 원동력은 부동산이고 부동산을 많이 보유하면 떼돈을 벌수 있다는 게 진리이다.
권력을 장악하게 되면 무엇보다도 금융을 이용할 수 있는 여지가 생겨서 많은 부동산을 보유할 수 있게 되고 이는 엄청난 축재의 수단이 되고 있는 것이다.
경제적 부가 특정인에게 주어지면서 정치권력은 엄청난 경제적 부를 누릴 수 있는 계기를 만들어 주고 대통령에게 모든 권력이 집중되는 현상이 일어나고 있는 부패의 원천이 되고 있다.
결국 권력의 불나비가 되어 한 자리를 차지하는 길이 부와 권력을 누릴 수 있는 기회가 되는 것이 아닐까? 여겨진다.
독일의 사회학자 게오르크 짐멜은 ‘대도시와 정신적 삶’이라는 그의 저서를 통하여 “대도시의 많은 사람들 속에서 사람들은 ‘외로움과 쓸쓸함’을 깊게 느낀다”며 “‘군중 속’에서의 ‘외로움’. 그 원인은 서로의 ‘상호 무관심’과 ‘속내 감추기이다”라고 밝혔다.
권력 지향적인 조직에서 상대방에게 배려할 여지가 없고 오직 상관의 지시 명령에 따를 뿐이다. 그래서 우린 자신의 외로움이 ’상호 무관심과 속내 감추기‘라는 내 자신이 안고 있는 병적인 현상이라는 사실을 깨닫지 못한 채 세상을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그래 내 자신의 외로움조차도 환경 탓, 주변 사람들의 탓으로 돌리면서 ’상호 무관심과 속내 감추기‘라는 병적 현상을 치유할 여유를 갖지 못한 채 평생 남의 탓만 하면서 살아가는 얼간이 같은 존재로 살아가고 있는 것이 아닌가?
상호 무관심이나 속내 감추기라는 내자신의 병적인 특성도 모른채 남의 탓으로 일관하면서 살아가는 동안 “내가 이 사회에 어떤 존재이고 무얼 위해 사는가?”란 정체성의 회의를 가질 수 있는 여유가 없었던 것이다.
보부아르의 장편소설 “모든 인간은 죽는다”에서 “인간은 홀로 태어나 누구의 도움도 없이 수많은 선택을 하며 자신의 삶을 견인해 나아가야 하는 존재다. 그러나 삶의 끝엔 늘 죽음이 있으므로, 인간은 결코 죽음의 공포에서 벗어날 수 없다. 그러므로 끊임없이 불안한 존재다”라고 인간의 실존의 실체를 말해 주고 있다.
정말 우리들은 탄생, 그리고 내 자신의 삶, 마지막으로 죽음의 길로 가야되는 운명을 갖고 이 세상을 살아가고 있다. 그런데도 나는 내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생각없이 남의 탓이나 하면서 이 사람 말과 저 사람 말에 따라서 허우적거리면서 살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런데 팔순을 바라보는 나이에 새삼 “내 자신은 누구인가? 무얼 위해 사는가?”라는 정체성에 대한 회의를 갖고 지금까지 잘못 살아온 인생을 반성하게 된다.
우리들의 인생이라는 것은 3가지 싸움을 하면서 살아갈 수밖에 없는 존재이다. ’자연과의 싸움, 사람과의 싸움, 그리고 내 자신과의 싸움‘에서 살아야 되는 운명을 갖고 이 세상에 태어났다.
어린 시절 자연과의 싸움에서 인내를 배워야 한다는 것이다. 추운 겨울이 지나면 따뜻한 봄이 오고 더운 여름이 지나면 시원한 가을이 오듯이 세상이란 참고 기다리면 결국 자신의 원하는 꿈을 실현시켜 나갈 수 있는 희망을 주는 것이다. 그래서 이런 시절 멋진 꿈을 안고 보다 멋진 세상에서 살아나가겠다는 포부를 가져야 하는 것이다.
이제 성인이 되어서 직장에서 많은사람들과의 싸움을 해야 한다. 경쟁은 이기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에게 배려하면서 보다 최선의 내 능력을 발휘하여야만 하는 일이라는 것을 트롯 경연대회에서 우린 알 수 있다.
상대방을 이겨야 하는 적이 아니라 우리는 다 함께 손 잡고 나가야 하는 동반자라는 사실을 인지하고 열심하 자신의 능력을 연마하여 멋진 노래로 대중들에게 감동을 불러일으키는 일이 가수의 본업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상대방을 적으로 간주하고 없애하는 하는 전쟁을 치르면서 살아갈 것이 아니라 상대방을 배려하고 함께 살아갈 수 있는 공감대를 만들어 나가면서 어울려 사는 세상을 만들어나가야 한다.
마지막으로 늙어서 내자신과의 싸움에서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가야만 하는 인생‘이라는 엄연한 사실을 인정해야 된다는 것이다.
내가 지금까지 어떻게 살아왔고 마지막 남은 인생을 어떻게 보내야 할 것인지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내 자식들이나 후배들에게 인생은 무얼 위해서 살아가야 되는지 그 가치를 되새기게 만드는 것이 선배로서 마지막 남겨야 될 말 한마디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결국 인생이라는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나서 살아온 발자취이다. 내가 인생의 주체이며 모든 책임일 내 자신이 부담해 나가야 될 나만의 선택이다. 그리고 그 발자취가 우리들의 후손들에게 역사적인 사실로 남겨져 교훈이 되고 삶에 보탬이 될 수 있는 길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닫고 잘못 살아온 인생을 후회하게 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