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이란 죽음을 향한 순례
순례의 끝머리에서 보고 싶은 사람 웃으며 만나고. 사랑하는 가족들과 손을 잡고 “너와 함께 한 세상이 행복했다... 굿바이.” 하며 순례를 마칠 수 있다면.
조선의 성리학자 이기가 말했다 해요. “노인이 젊은이와 반대인 것이 3가지가 있다. 밤에 잠을 안자며 낮잠을 좋아하고, 가까운 곳을 못 보면서 먼 것은 보며, 손주는 몹시 아끼면서 자식과는 소원한 것, 이것이 노인의 3가지 상반된 점.” 이라고.
늙어가며 슬픈 건 소중한 것을 지키기가 힘들어지는데 있습니다. 가족, 명예, 친구 등 모두가 소중한 것들이죠. 지켜보려고 애쓰지만, 하나 둘 낙엽 지듯이 내 곁을 떠납니다. 그러다 꾀 벗은 나무가 된 자신을 보면서 연민하겠지요. 그러나 중요한 것은 집으로 잘 돌아가는 일입니다. 흙에서 왔으니 흙으로 잘 돌아가는 것이지요.
웨스트민스터 사원엔 위대한 학자나 시인, 화가, 존경받는 정치인이 묻혀 있다고 합니다. 기라성 같은 유명인사들 주검 틈에 토마스파라는 농장지기가 있습니다. 80세까지 총각이었다가 122세에 재혼해 장수했다는 그의 주장이 입소문을 타 유명인사가 된데 따른 것이지요.
그는 찰스1세 국왕도 알현하는 영광도 지닙니다. 하지만 런던의 한 초청 만찬장에서 음식을 먹다가 탈이 나 죽었다고 합니다. 검증 없이 말만 듣고 가장 장수한 복 받은 사람으로 평가해 묘지를 내준 사원의 결정은 ‘장수’에 대한 인간 의 관심이 얼마나 큰지를 잘 보여줍니다.
86세로 선종한 김수환 추기경이 칠순을 맞아 신부들과 식사하면서 “막상 일흔이 돼보니 죽음이란 게 두려운 것 같다”고 말했습니다. 추기경의 두려움은 70년이란 긴 시간을 갖고도 아직 고치지 못한 허물이 많은 게 아쉽고, 남은 시간에 얼마나 허물을 고치며 살까 생각하니 초조하다는 뜻입니다.
해를 보내면서 ‘늙음’과 ‘죽음’이란 단어가 자주 입에 오른 듯합니다. 그런 상념에 젖다보면 오래 사는 장수의 미련보다 남은 생을 통해 얼마나 내 허물을 고치며 살 수 있을까 고뇌한 추기경 얼굴이 흔들립니다.
오래 전 읽었던 오연석 교수(전 경기대. 죽음학교 교장)의 글도 생각납니다. 죽음을 준비하는 지혜 같아서 머리에 넣어두었지요. 그는 1년에 몇 달씩 캐나다에 머물었는데 옆집에 사는 노인과 이웃사촌으로 친하게 지냈답니다.
정원을 가꾸는 솜씨가 좋아 모르는 것도 척척 알려주었다는 군요. 그런데 부인이 죽은 후로 더는 그 물음을 못하게 됐답니다. 그때마다 머리를 긁적이며 “꽃 이름은 아내가 잘 아는데”하며 부인을 그리워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던 어느 해, 그가 병원에 입원했다는 소식을 들었고, 다시 호스피스병원으로 옮긴 것을 알게 되었답니다. 언제 또 볼까 싶어 문병 차 찾아갔는데, 내 손을 잡더니 오래 살지 못한다며 놀랍도록 편안한 미소를 짓더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동안 이웃이 되어줘 행복했다면서 자신의 장례식에 초청하고 싶다고 하는군요.
오 교수가 돌아오면서 생각합니다. 내게 이 정도였으면 가족과는 얼마나 많은 대화를 나눴을까. 우리 주변에 그분처럼 죽음을 준비하고 사랑하는 사람들과 “고맙다, 행복했다, 함께 해 좋았다”고 말하며 떠날 사람이 얼마나 될까 묻게 되더랍니다.
나도 할 수만 있다면 그런 바람 하나 갖고 싶습니다. 순례의 끝머리에서 보고 싶은 사람 웃으며 만나고. 사랑하는 가족들과 손을 잡고 “너와 함께 한 세상이 행복했다... 굿바이.” 하며 순례를 마칠 수 있다면.
(소설가 이관순의 손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