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을 '반짝반짝'이며 살자
시간은 후진도 모르고 유예도 없는 직진 형입니다. 오늘이 반짝반짝 빛나게 살아야 할 이유입니다. 미움, 원망의 자리에 위로, 격려, 사랑을 채워서요.
11월은 참 애매한 달입니다. 가을도 겨울도 아닌 회색지대 하늘에 뜬 낮달처럼 온기가 없습니다. 가을비 그친 아차산에 올랐다가 수년 전의 기억에 잠겨 한참을 머물렀습니다.
그해 가을, 주왕산 일대로 형제여행을 다녀왔습니다. 3형제 내외가 25년을 함께 한 즐거움인데 그해는 큰 형님의 자리가 비었었지요. 가장 건강했던 분이 세상을 떠나신 겁니다. 늘 계획을 세우고 먹거리와 잠자리를 준비해 주셨지요.
그러면서 여행은 한 차로 해야 맛인데, 카니발 한 대 있으면 좋겠다고 아쉬워했습니다. 이제는 카니발 리무진도 마련했는데 타는 사람이 5명뿐 입니다. 한 사람의 빈자리가 이렇게 크다는 것이 여행 내내 생각에서 떠나지 않았지요. 한 치 앞을 못 보는 게 우리네 인생임을 실감합니다.
900km를 운행하면서 많은 얘기를 나눴지요. 아무래도 빈자리의 주인공인 큰 형님과의 추억이 많았습니다. 가을 벌판 위로 기억들을 떠올리면서 서로에게 묻습니다. 우리 다섯이 언제까지 이렇게 여행을 다닐 수 있을까?
축대에서 돌 하나 빠지니 갑자기 전체가 위태롭게 느껴진 겁니다. 그래서인지 그해 가을 산하가 유난히 눈부셨습니다. 주로 꺼낸 주제는 이 세 가지에 있는 듯합니다. “해야 했는데” “했어야만했는데” “할 수 있었는데...” 모 시인은 인생에서 가장 슬픈 것을 이 세 가지로 꼽았지만, 내게는 참회록처럼 다가왔습니다.
가을은 소란스런 계절이 아닙니다. 단풍 찾아 요란하게 몰려다니는 그러한 행락철만은 아닌 듯합니다. 우리 몸에 눌어붙은 삶의 얼룩을 닦으면서 내면 깊이 침잠해야 하는 절기입니다. 안 쓰던 일기라도 써야할 그런 나날입니다.
오색으로 물든 가을 풍경에서 경건한 생명들의 아름다움이 빛납니다. 단풍진 나뭇잎을 털어내며 겨울나기를 준비하는 나무들, 생명들이 사라진 빈 들판, 모진 비바람을 견뎌내고 가지에 주렁주렁 매달렸던 과일들의 소회는 무엇일까. 그러면서 떠오르는 것. 내 인생도 가을이 짙었는데 어디에다 낫을 댈 수 있으려나... 스산한 바람이 나이만큼 차오릅니다.
쉬운 것이 하나 없는 우리들 삶입니다. 물질이 곤궁한 것만큼 견디기 어려운 일도 없지요. 광야에 홀로 선 나무처럼 느껴지는 외로움도 무척 우리를 힘들게 합니다. 더 힘든 일은 사랑하는 사람의 이름을 불러도 대답이 없을 때입니다.
옆에 있다면 온갖 걸 다 해줄 것 같은데 이 세상에 없을 때 그 열패감은, 밑을 모를 만큼 깊고 광대하겠죠. 오늘이 그를 사랑할 마지막 날이 될 수도 있고, 지금이 그와 나눌 대화의 끝일 수도 있어요. 이런저런 핑계로 내일에다 미루지 마십시오.
내일은 상상 속에서나 있는 것. 아무도 내일을 살아본 사람은 없으니까요. 말하기는 쉬워도 내일을 기약하는 건 부질없는 철부지 소리이거나 비겁한 짓입니다.
우리는 내일을 기약할 수 없는 인생입니다. 아껴야 할 사람이 옆에 있다면 오늘 최선을 다 해 사랑하세요. 그것이 부부이든, 가족이든, 친구일 수도 있겠지요.
시간은 후진도 모르고 유예도 없는 직진 형입니다. 오늘이 반짝반짝 빛나게 살아야 할 이유입니다. 미움, 원망의 자리에 위로, 격려, 사랑을 채워서요. 지금 내 손에 쥔 시간만이 확실한 내 것이니까요.
글 이관순 (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