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금을 돌 같이 보라고?
‘황금을 돌같이 보라’는 말은 돈이란 신(神) 앞에 쉽게 무릎 꿇는,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교훈을 안깁니다.
‘황금을 보기를 돌같이 하라’ 이르신 이는 최영 장군입니다. 그 한 마디가
최영의 이미지를 각인시켜 놓았지요.
어느 정도 인격을 닦아야 황금을 돌 같이 볼 수 있을까? 의문이 들면서도
한때는 이 만한 카타르시스도 없다고 생각했었지요.
가난했던 학창시절, 이를 금과옥조로 삼아 스스로를 위안하기도 했습니다.
“돈이냐 젊음이냐 이것이 문제로다!“ ”야! 없다가도 생기는 게 돈 아냐?“
이렇게 친구와 맞장구치면서 말이죠.
그로부터 반세기가 지난 요즘의 학생들에게 최영의 말을 빌려 돈에 대한
생각을 물으니 한 친구가 눈을 동그랗게 뜨네요. “예? 말도 안 돼. 황금을
어떻게 돌과 비교해요.“ 아이들이 한바탕 깔깔 대며 ‘엄지 척’ 합니다.
”돈 그거 없으면 청춘 비참해져요.“
수렵시대와 농경시대에는 돈타령이 지금 같진 않았겠지만, 산업시대를
돌면서 돈의 위용은 갈수록 진가를 발휘하고 있습니다.
‘돈은 알라딘의 등불’ 이란 말도 있어요. 무슨 소원이고 다 이루어 주는
마법의 등잔처럼 돈이면 무엇이든 다 할 수 있다는 뜻이겠죠. 그래서
‘돈은 모든 사람을 엎드리게 하는 유일한 권력.’이란 말도 나왔습니다.
머리는 빈 깡통이면서 지식을 탐하는 부자 귀신이 있었답니다. 그가
당대의 석학인 가난한 선비를 찾아가 지식을 팔라고 간청합니다.
“한 오천 냥이면?” 선비가 들은 척도 안합니다. “만 냥까지 쳐드립죠.
만냥 큰돈입니다” 선비의 얼굴에는 미동도 없습니다. 한참을 쩝쩝거리던
귀신이 통 큰 배팅을 합니다. “십만 냥! 어떠십니까?”
그러자 선비는 미련 없이 고개를 끄덕입니다. 계약서를 쓰기 무섭게
귀신이 궁금함을 못 참고 묻지요. “아무리 10만냥이 크기로서니 그래도
그렇지 팔 생각을 하십니까?“
눈을 감고 있던 선비가 빙긋이 웃습니다. 그리고 “그 돈이면 귀신도 살 수
있다네.” 돈의 위력을 한마디로 압축해 보인 얘기입니다.
그러나 돈을 쓰는 재미보다 버는 즐거움에 빠진 사람도 더러 있습니다.
GH 노만이 쓴 ‘크리스의 얼굴’ 이라는 작품에 이런 이야기가 나오죠.
한 친구가 죽기 살기로 억척스레 돈만 버는 부자를 향해 비아냥거립니다.
“그렇게 돈을 벌면 뭘 하나. 아들이 자네가 버는 이상으로 방탕하게 낭비할
텐데. 허망한 일 아닌가?“ 그러자 부자가 너털웃음을 짓습니다. ”모르는 소리
말게. 제 놈이 아무리 돈을 펑펑 쓰고 놀아본들 애비의 돈 버는 즐거움에
비할 텐가?“
또 이런 사람도 있지요. 일생을 성실히 노력해서 거부가 된 금융업자가
임종이 가까워지는 모양입니다. 이 부자에겐 불행히도 자식이 없었지요.
형제들이 저 많은 유산을 어떻게 처리할지 정해 달라고 은근히 보챕니다.
형님 정신이 이만하실 때 말씀 하셔야 합니다.” 형제의 채근을 받던 금융
거부가 그들을 돌아보며 빙그레 웃습니다.
“알아서 처리하게 난 관심이 없네. 내가 일생 동안 즐길 대로 즐기고 남은
찌꺼기에 불과한 거 아닌가.“ 참 대답이 쿨 합니다. 돈을 버는 재미가
귀하고 즐거웠지 번 돈은 한낱 즐거움이 타고난 재에 불과하다는
그 인식이 놀라울 따름입니다.
돈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필요한 기본 요소입니다. 그렇지만 돈에 대한
가치관을 어디에 두고 있느냐에 따라 물질에 대한 인식은 크게 달라질 수
있습니다. 그래서 ‘황금을 돌같이 보라’는 말은 돈이란 신(神) 앞에 쉽게
무릎 꿇는,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교훈을 안깁니다.
*글 이관순(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