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4-24(수)
 

늦가을의 기억입니다. 막내아들 집을 찾은 어머니와 공원을 산책하는데 뜬금없이 세상이 참 헐거워졌다라고 말씀하십니다. “뭐가요?” 젊은 아들이 묻지만 어머니는 밍근한 웃음만 지어 보이셨지요. 그땐 무엇을 말씀하는지 잘 몰랐습니다. 이 나이가 돼서야 그 미소의 뜻을 알게 됩니다. 가을 끝을 돌다 절로 깨친 겁니다. 연이틀 추적되던 가을비가 그치자 문득 세상이 헐거워 보인다는 생각이 들어서죠.

 

낙엽진 거리가 성글어 보이고 공원도 휑합니다. 빈 가지 사이로 하늘이 보이고, 사람들 사이를 스치는 바람도 스산합니다. 산 계곡 물소리는 수척해졌고, 젖은 돌계단을 밟는 사람들 표정도 쓸쓸합니다. 들에도 산자락에도 이별하는 것뿐입니다. 그 길을 걷다 문득 때 지난 어머니의 대답을 찾았습니다. ‘너도 살아보면 안다는 것을. 시든다는 것은 돌아가기 위한 생명체의 마지막 경건한 행위란 것을.

 

한 생을 휘돌았던 뜨거운 피가 빠지며 전하는 마지막 언어가 시든다’ ‘시듦이라는 말이겠지요. 다음은 사위다.’ 불타듯 소리 없이 사라지는 것만 남습니다. 아쉬울 것도 서운할 것도 없는.사람들은 1년이 훅 바람처럼 지나간다고 속절없어 하지만, 누구에겐 그 짧은 시간이 성심을 다해 살았던 생애입니다. 어느 시인은 낙엽을 보고 땅에다 맨몸을 뉘고 상처를 묻는다고 했습니다.

 

어쩌면 이 말은 온 곳으로 돌아가려는 마지막 지움의 흔적일 수도 있겠지요. 시듦이란 소임을 다한 생명이 자신의 삶을 거두는 일이니까. 그래서 잘 시들면 잘 거두는 것이란 말이 생겼나 봅니다.

 

세월의 속도감은 12월 들어 유난히 빠르게 느껴집니다. 엊그제 꽃이 피었다 했는데 여름이 오고, 선선한 바람이 분다 했는데 어느새 단풍이 들더니 그도 잠시, 비바람이 낙엽을 털어냅니다. 그리고 앙상한 뼈마디로 남기까지 나무의 1년은 쉼 없이 가쁘게 돌아온 시간의 매듭뿐입니다.

지난 주말, 도봉산에 올랐다가 나를 돌아보게 한 것이 또 있습니다. 마른 낙엽을 밟다가 돌연 미안한 마음이 든 겁니다. 오롯이 순종으로 잇대 온 나뭇잎의 굽은 등을 밟다가 말입니다. 생애를 끝내고 갖는 마지막 쉼에 모질게 가하는 내 밟는 행위를 보고. 잊고 지내온 이기적인 내 모습이 어른거립니다. 낙엽을 빗겨 밟으려고 하면 할수록 발에 밟히는 낙엽의 마른 신음소리를 듣습니다.

 

어찌 성한 몸으로 피멍 든 등을 밟으려 하나. 산행 때마다 나무뿌리 밟지 말라고 당부하던 친구가 떠오릅니다. 사람들이 등산길에 드러 나무뿌리를 밟는 모습에, 생명에 가하는 야만행위라고 펄쩍 뜁니다.나뭇잎이 돋아날 때의 향긋함, 우거진 수풀을 제초할 때 나는 알싸한 풀 향기, 쌓인 시든 잎에서 풍기는 농익은 낙엽의 향은 얼마나 코끝을 홀리고 벌렁거리게 하던가.

 

푸른 잎 단풍으로, 낙엽으로, 이어지면서 사람들 가슴에 위안을 주던 잎새의 생은 그래서 경건하기조차 합니다. 김동길 박사가 이런 말을 했지요. 나이가 들면 아는 게 많아지고 모든 것이 이해될 줄 알았는데, 실은 모르는 게 더 많아지고 이해하려고 애써야 할 것들이 더 많아지더라고... 나이가 들면서 그런 걸 느낍니다. 넓은 길보다는 호젓한 오솔길이 좋고, 또렷함보다는 아련함이 좋습니다. 살가움보다 무던함에 마음이 가고, 질러가는 것보다 에둘러 돌아가는 굽잇길이 즐거움을 줍니다.

 

시든다는 것은, 힘줄만 앙상하게 남는다는 것은, 한 생을 휘돌아 나가는 생명들의 마지막 미사입니다. 시들어 마른 맨몸을 땅에 뉘이고 상처를 묻는, 숙연한 의례입니다. 길을 나서면 만나는 모두가 스승이라는 말이 맞습니다. 오늘은 하찮은 마른 낙엽이 내게 죽비를 들이댈 줄은 몰랐습니다.

 

나도 저들처럼 지난 1년 삶을 털어서 슬픔은 슬픔대로, 아픔은 아픔대로 사위어 땅에 묻어야겠습니다. 미움도, 아픔도, 미련도 모두.그리고 다시 울고 웃는 일상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세월이 이렇게 소리 없이 휘감고 돌아가면서 절대 변할 것 같지 않던 나도 이런 변화를 맞습니다. 얼굴도, 생각도, 마음도, 모두가 다.

 

시인 친구가 일러주더군요. 편지를 부치러 나갔다가 집에 돌아왔는데 주머니에 편지가 그냥 있으면, 가을이 맞다고. 가을 건망증은 다람쥐가 더합니다. 애써 도토리를 땅에 묻고는 잊으니까요. 세상뿐 아니라, 세월도 헐거워 보이는 12월의 시작입니다.

-소설가 daumcafe 이관순의 손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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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소 깨닫는 ‘시든다’는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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