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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너도 죽는다‘메멘토 모리’
    말에는 묘한 힘이 있어 곱씹을수록 향기를 내는 말이 있고, 겸손함을 가르치는 말도 있지요. 라틴어는 그런 철학적 의미를 함의한 말과 글이 꽤 많습니다. 언젠가의 기억입니다. KBS TV '도전 골든벨‘에서 최후 1인이 된 학생에게 50번 마지막 골든벨 문제가 주어집니다. “고대 로마에서 승리를 쟁취한 장군이 개선행진을 할 때 주위에서 외쳤던 라틴어는?“ “메멘토 모리" 영예의 골든벨이 울리는 짜릿한 순간을 지켜보았지요. 다소 생소한 라틴어 '메멘토 모리(memento mori)'는 '죽음을 기억하라‘는 뜻입니다. 유래는 로마 공화정의 개선식으로 거슬러 올라가요. 개선식은 전쟁에서 승리한 장군에게 주어지는 영예입니다. 개선장군은 관습에 따라 전차를 타고 퍼레이드를 벌입니다. 영웅이 탄 마차가 시민의 환호 속을 헤치고 행진하는 동안 뒤에서 노예들이 큰소리로 외쳐댑니다. 메멘토 모리! 메멘토 모리! “오늘은 개선장군이지만 너도 언젠가는 죽는다. 겸손하게 행동하라.” 승리에 도취된 장군에게 본분을 잊지 않도록 경각심을 주는 장치인 셈이죠. 로마 최고의 환대 속에서도 너는 신이 아닌, 한 인간일 뿐임을 알린 것입니다. 메멘토 모리에는 세 가지 철학적 가치가 내재되어 있습니다. ‘죽음을 기억하라. 운명을 사랑하라. 현재에 충실하라.’ 이 셋은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도 적용되는 훌륭한 교훈입니다. 스티브 잡스도 스탠퍼드대 졸업식 축하 연설에서 이를 강조했습니다. 췌장암 투병으로 힘든 시기를 보내던 그는 ‘죽음은 삶이 만든 최고의 발명품‘이라고 격찬합니다. 그러므로 제한된 인간의 시간을 다른 누군가의 인생을 살 듯 낭비하지 말고 자신을 믿고 집중하라고 졸업하는 학생들에게 말합니다. 뜻이 통하는 라틴어에 ‘카르페 디엠(carpe diem)'이 있습니다. 몬래 이 말은 신을 공경하고 오만해지지 말라는, 현재를 가치 있게 살라는 뜻인데 이후 기독교 영향을 받아 현세의 부귀나 영화의 부질없음을 알립니다. 우리에게도 ‘화무십일홍’이란 말이 있죠. 열흘 가는 붉은 꽃이 없다는 이 말엔 ‘한 번 흥한 것은 반드시 쇠한다.’ 는 속뜻을 지닙니다. 트로트 가수 김연자가 불러 유명한 노래 ‘아모르 파티’도 같은 말입니다. 사랑을 뜻하는 아모르와 운명을 뜻하는 파티가 합성된 라틴어로 이 또한 ‘운명을 사랑하라’는 말이지요. 인간이 가져야 할 삶의 태도로 철학자 니체가 처음 사용했습니다. 메멘토 모리는 미국 남서부에 거주해온 나바호족에서도 찾을 수 있어요. 그들은 “네가 세상에 울면서 태어날 때 세상은 기뻐했으니, 네가 죽을 때 세상은 울어도 너는 기뻐할 수 있도록, 그러한 삶을 살아라.”는 의미심장한 철학을 닮고 있습니다. <메멘토 모리>, <카르페 디엠>, <아모르 파티>, <화무십일홍>까지 모두 겸손한 삶을 가르칩니다. 제한된 시간을 사는 인생에게 죽음을 기억하고, 운명을 사랑하고, 오늘에 충실하라.... 이보다 더 삶을 성찰하게 하는 말이 또 있을까 싶습니다. 글/ 이관순(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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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4-15
  • 의리가 사라진 세상
    짓궂은 질문을 해봅니다. ‘사람’과 ‘인간’은 같은 거야? 사전의 설명은 비슷 하지만, 아무래도 “저 인간!” 하면 부정적 이미지가 앞서죠. “저 사람 인품이 좋아”로는 써도 “저 인간 인품이 좋다”고 말하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세상에 사람 같지 않은 인간이 많다보니 용례까지 헷갈립니다. 초등학교 국어 교과서의 ‘의좋은 형제’를 생각하면 지금도 마음이 훈훈합니다. 우애 좋은 형제가 가을 수확을 마치고 들판에 볏단으로 노적가리를 만듭니다. 형이 보니 아우네 것이 적어 보입니다. 그날 밤, 어려운 아우 형편을 안 형이 자신의 볏단을 옮겨 놓고, 다음날 밤은 식솔 많은 형을 생각한 아우가 반대로 볏단을 옮기지요. 노적가리가 줄지 않자 형제 다 고개를 갸우뚱합니다. 마침내 볏단을 옮기던 형제가 달빛 아래 마주치면서 얘기는 끝나죠. 그때의 감동으로 습자시간이면 붓글씨를 ‘노적가리 풍년일세’만 썼던 기억이 납니다. 가난해도 마음은 풍년인 사람들이 살던 시절이 있었지요. 엊그제 복권 당첨금이 살인흉기가 된 사건이 났습니다. 우애 좋은 형제가 복권 당첨으로 수억 원의 당첨금을 받아 배분까지는 성공했는데, 그 돈으로 사업을 했던 형이 망하며 사단이 납니다. 돈을 더 요구하는 형과 보증을 선 동생 간에 감정이 충돌하다 동생을 살해하는 일이 벌어진 겁니다. 황금만큼 요괴스러운 것은 없습니다. 돈 앞에 장사가 없다지요. 일본 속담에 ‘담배꽁초와 돈은 쌓일수록 냄새가 난다’고 했습니다. 돈이 사람을 부패하게 만든다는 뜻이겠지요. 사는 것은 전보다 풍족해도 인성은 강퍅해졌습니다. 돈을 둘러싼 이기적 욕망이 칼끝처럼 첨예하게 부딪치는 세상입니다. 개신교의 큰 어른이셨던 목사님이 생전에 우리교회에 오셔서 당신이 붓으로 큼직하게 쓴 ‘의리를 지키자’란 글귀를 강단에 내리고 설교를 하신 적이 있습니다. 세상이 오죽하면 의리를 부탁했을까요. 사람과 사람,관계 사이에 의리가 사라졌다고 탄식하는 소리가 높아만 집니다. 제목을 잊은 영화입니다. 세 친구가 딱 한 번 은행을 털어 깨끗하게 살자며 치밀한 준비를 합니다. 그들의 거사는 성공했고 무사히 안전지대에 도착하자 돈다발을 놓고 환호합니다. 한 친구가 축배를 들자며 나갔다가 술에 독을 타서 옵니다. 욕심이 생긴 거죠. 태연하게 돌아온 친구가 술잔을 건네고 축배를 외칠 때, 팡팡! 술 사온 친구가 고꾸라지고 남은 둘은 낄낄댑니다. 뛰는 놈 위에 나는 놈이 있거든요. 둘은 더 큰소리로 건배를 외치지만 독배를 든 이들도 쓰러집니다. ‘사람에게 의리 빼면 시체’ 라고 말하던 세상이 있었지요. 의리란 뜻은 ‘사람관계에서 마땅히 지켜야 할 도리’로, 여기엔 사람이 갖춰야 할 덕목이 다 녹아져 있죠. 가난은 견뎌내기 어려운 것임을 경험한 세대가 모이면 그래도 그때가 좋았다고 반추합니다. 의리가 사라진 곳에 먹잇감을 놓고 으르렁 대는 동물세계가 어른댑니다. 사람 사이 흐르는 체온 대신 물질을 향한 충혈 된 눈빛만 섬뜩하니 사람은 없고 인간만 남아 보입니다. 다시 사전을 봅니다. ‘인간’이란 단어의 기본설명 뒤로 ‘사람의 모습은 하고 있되 사람답지 못하다는 뜻.’을 추가하고 예문도 달았군요. “저 인간이 한 짓을 생각하면 돌아버리겠어.” 너무도 흔히 듣는 슬픈 말이 됐습니다. 글 이관순(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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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4-08
  • 의리가 사라진 세상
    짓궂은 질문을 해봅니다. ‘사람’과 ‘인간’은 같은 거야? 사전의 설명은 비슷 하지만, 아무래도 “저 인간!” 하면 부정적 이미지가 앞서죠. “저 사람 인품이 좋아”로는 써도 “저 인간 인품이 좋다”고 말하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세상에 사람 같지 않은 인간이 많다보니 용례까지 헷갈립니다. 초등학교 국어 교과서의 ‘의좋은 형제’를 생각하면 지금도 마음이 훈훈합니다. 우애 좋은 형제가 가을 수확을 마치고 들판에 볏단으로 노적가리를 만듭니다. 형이 보니 아우네 것이 적어 보입니다. 그날 밤, 어려운 아우 형편을 안 형이 자신의 볏단을 옮겨 놓고, 다음날 밤은 식솔 많은 형을 생각한 아우가 반대로 볏단을 옮기지요. 노적가리가 줄지 않자 형제 다 고개를 갸우뚱합니다. 마침내 볏단을 옮기던 형제가 달빛 아래 마주치면서 얘기는 끝나죠. 그때의 감동으로 습자시간이면 붓글씨를 ‘노적가리 풍년일세’만 썼던 기억이 납니다. 가난해도 마음은 풍년인 사람들이 살던 시절이 있었지요. 엊그제 복권 당첨금이 살인흉기가 된 사건이 났습니다. 우애 좋은 형제가 복권 당첨으로 수억 원의 당첨금을 받아 배분까지는 성공했는데, 그 돈으로 사업을 했던 형이 망하며 사단이 납니다. 돈을 더 요구하는 형과 보증을 선 동생 간에 감정이 충돌하다 동생을 살해하는 일이 벌어진 겁니다. 황금만큼 요괴스러운 것은 없습니다. 돈 앞에 장사가 없다지요. 일본 속담에 ‘담배꽁초와 돈은 쌓일수록 냄새가 난다’고 했습니다. 돈이 사람을 부패하게 만든다는 뜻이겠지요. 사는 것은 전보다 풍족해도 인성은 강퍅해졌습니다. 돈을 둘러싼 이기적 욕망이 칼끝처럼 첨예하게 부딪치는 세상입니다. 개신교의 큰 어른이셨던 목사님이 생전에 우리교회에 오셔서 당신이 붓으로 큼직하게 쓴 ‘의리를 지키자’란 글귀를 강단에 내리고 설교를 하신 적이 있습니다. 세상이 오죽하면 의리를 부탁했을까요. 사람과 사람,관계 사이에 의리가 사라졌다고 탄식하는 소리가 높아만 집니다. 제목을 잊은 영화입니다. 세 친구가 딱 한 번 은행을 털어 깨끗하게 살자며 치밀한 준비를 합니다. 그들의 거사는 성공했고 무사히 안전지대에 도착하자 돈다발을 놓고 환호합니다. 한 친구가 축배를 들자며 나갔다가 술에 독을 타서 옵니다. 욕심이 생긴 거죠. 태연하게 돌아온 친구가 술잔을 건네고 축배를 외칠 때, 팡팡! 술 사온 친구가 고꾸라지고 남은 둘은 낄낄댑니다. 뛰는 놈 위에 나는 놈이 있거든요. 둘은 더 큰소리로 건배를 외치지만 독배를 든 이들도 쓰러집니다. ‘사람에게 의리 빼면 시체’ 라고 말하던 세상이 있었지요. 의리란 뜻은 ‘사람관계에서 마땅히 지켜야 할 도리’로, 여기엔 사람이 갖춰야 할 덕목이 다 녹아져 있죠. 가난은 견뎌내기 어려운 것임을 경험한 세대가 모이면 그래도 그때가 좋았다고 반추합니다. 의리가 사라진 곳에 먹잇감을 놓고 으르렁 대는 동물세계가 어른댑니다. 사람 사이 흐르는 체온 대신 물질을 향한 충혈 된 눈빛만 섬뜩하니 사람은 없고 인간만 남아 보입니다. 다시 사전을 봅니다. ‘인간’이란 단어의 기본설명 뒤로 ‘사람의 모습은 하고 있되 사람답지 못하다는 뜻.’을 추가하고 예문도 달았군요. “저 인간이 한 짓을 생각하면 돌아버리겠어.” 너무도 흔히 듣는 슬픈 말이 됐습니다. 글 이관순(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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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4-04
  • 슬픔이여 안녕!
    죄 없는 어린 생명이 희생될 때 더없이 고통스럽습니다. 남달리 알레르기 반응을 보이는 것은 일종의 트라우마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여덟 살에 충북 영동의 한 초등학교에 입학했습니다. 여름이 되면 아이들과 몰려서 마을 앞에 흐르는 강에 나갑니다. 겨울엔 썰매를 타고 여름엔 물놀이를 하는 곳. 경부선이 지나가는 철교 아래가 또래들의 여름 아지트지요. 흰줄 하나를 내린 검정 팬티를 입고 상급생들은 수영으로 강을 건너고, 하급생들은 교각 중턱에 걸터앉아 형들을 부럽게 바라보다가 텀벙 강물에 몸을 던집니다. 이날도 철교 아래에 한 떼의 아이들이 모였습니다. 비가 와서 물이 좀 불었지만 누구도 겁내지 않았지요. 그런데 물이 불면 수심에서 물돌이가 이는 걸 모른 게 비극입니다. 형들이 수영을 가르친다고 아이들을 밀어 넣는데 그만 1학년 쌍둥이 동생이 소용돌이에 말려든 겁니다. 아이가 물속에서 허우적이자 더럭 겁이 난 아이들이 달아나기 시작합니다. 나도 겁에 질려 뛰다가 뒤를 돌아봤는데, 발을 구르며 울부짖는 쌍둥이 형의 모습이 보였습니다. 죽은 아이는 내 짝꿍이었습니다. 마을이 발칵 뒤집어지고... 나도 밤마다 경기를 일으켰습니다. 땀을 흘리며 악몽에 시달렸지요. 물에 퉁퉁 부은 친구가 나를 원망했기 때문입니다. 넋이 나간 친구 엄마, 고래고래 소리질러 아들 이름을 부르는 아빠, 나를 원망스레 쳐다보는 쌍둥이 형... 나는 누구 앞에서도 고개를 들 수 없는 죄인이었습니다. 친구를 버리고 도망쳤다는 죄책과 슬픔이 어린 가슴을 쿵쿵 뛰게 했지요. 이로 인해 부모님 걱정도 덩달아 커졌습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아버지가 발령을 받아 새 임지로 이사하면서입니다. 가족이 아버지의 전근을 반색한 것도 나 때문이었죠. 아픈 기억은 상급학교로 진학할수록 많이 옅어졌습니다. 초등학교 동창들과 연락을 끊은 것도 도움이 됐습니다. 결혼 후로는 아예 잊다시피 지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어느날, 우연히도 길에서 쌍둥이 형을 만나면서 덜컥 상처가 뜯기고 말았습니다. 어머니는 우울증을 앓다가 목을 매셨고, 알코올 중독에 빠진 아버지도 암으로 돌아가셨답니다. 한 아이의 죽음이 이렇게 가족을 황폐화 시켰구나. 아물었던 내 상처에도 피가 나는 걸 느꼈습니다. 가족 중 유일한 생존자인 형의 얼굴에 깔린 그늘을 보았습니다. “가족 몫까지 잘 살아야지. 흔들릴 때마다 그렇게 위로해.” 예민한 성격 탓일까, 이후로 이따금 꿈을 꿉니다. 시골에서 놀던 추억들이, 떠난 어린 친구의 모습도 생생하게 포착됩니다. 더 힘들게 하는 건 잊을 만하면 날아드는 이런저런 또래 아이들 희생소식입니다. 줄어드는 인구도 걱정인데 죽었다하면 아이들이냐고 격분도 합니다. 지난 봄, 헝가리에서 유람선 전복으로 6세 소녀가 숨졌다는 비보가 그랬었죠. 외할머니 손을 꼭 잡은 아이의 인양된 모습은 더 애처로웠습니다. 그 아픔이 채 가시기도 전에 또, 엄마가 일곱 살 어린 아이를 데리고 동반자살을 했다는 비보가 들렸습니다. 죽음이 낯설기만 어린 나이에 얼마나 섬뜩했을까, 얼마나 설득했을까, 아니 강요했을까. 그래야 했던 엄마의 심정은? 푸른 6월에는 전 세계인을 슬픔에 잠기게 한 사고가 또 발생했습니다. 멕시코 국경에서 리오그란데 강을 건너 미국으로 밀입국하려던 25세 아빠와 두 살짜리 딸이 익사한 것입니다. 아빠가 아이를 셔츠 안에 넣고 아이는 아빠의 목을 끌어안은 채 떠내려 온 사진을 봤습니다. 물살을 이겨내려 했던 아빠의 다리는 물위에 떠 있고, 아이의 바지는 물먹은 기저귀로 불룩했습니다. 강 건너서 울부짖는 엄마의 얼굴이 오버랩됩니다. 멕시코 영화 ‘신 놈브레’는 중남미사람들이 ‘죽음의 열차’를 올라타고 미국으로 밀입국하려는 과정을 그린 영화입니다. 열차 지붕에 올라타다 떨어져 죽고 힘겹게 탄 뒤는 살해나 강간을 당하기도 합니다. 서글픈 것은 점쟁이가 찾아온 주인공에게 일러주는 말이죠. “넌 미국에 도착할거야. 그런데 안내는 신이 아닌 악마가 하지.”라고. 그 악마는 죽음의 열차를 올라 탄 아빠와 딸을 강물 속에 빠뜨린 것입니다. 스스로를 위로합니다. 어쩌면 아이들이 찾아간 저세상이 험난한 이 세상을 사느니 보다 낫지 않겠냐고. "여긴 낙원이 아냐. 슬퍼하지 말고 편히 쉬어라..." 오래전 읽은 프랑수아 사강이 쓴 ‘슬픔이여 안녕’ 이란 소설 제목이 떠오르는 것은 우연일까요? *글/이관순(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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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4-01
  • 노을처럼 아름답던 식탁의 축제
    사람들이 그렇게도 갈구하는 행복은 어디에 있는 걸까? 골드러시를 따라 미 서부로 향했던 그 많은 사람들은 무엇을 찾았을까. 공자는 제자의 질문에 ‘행복은 없다’고 간단명료하게 답합니다. 공자는 이에다 ‘인생에는 행복을 찾아가는 여정이 있을 뿐’이라고 덧붙였습니다. 공자가 말하고자 한 것은 행복이란 눈이 혹할 보석 같은 게 아니라고 내 나름 유추 해석합니다. 거대한 바위 밑 은밀한 곳이나 화려한 샹들리에 속에 숨겨진 것이 아니고, 우리가 사는 일상의 그 사소한 것들, 그 자체에 있음을 말하려 한 것으로 주석을 답니다. 행복은 더 이상 파랑새도 아니고 신기루도 아닌, 바로 우리의 일상에 흘러갑니다. 매일 우물에서 물을 길어오듯 행복도 일상이란 우물에서 길어 올려야 합니다. 돌아보니 그 많던 내 일상들이 다 허공에 흩어졌습니다. 우주의 어느 시간보다도 값진 것들입니다. 나이가 들면 외롭다고 합니다. 수많았던 그 일상들을 되돌릴 수 없고 함께 할 수도 없다는 것 때문이겠지요. 자식들로 들썩이던 공간은 소산하다 못해 적막감마저 흐릅니다. 전화도 오고 주말이면 찾아주니 반갑기도 하지만 잠시 머물다 떠나고 나면... 이젠 막내마저 직장 따라 지방으로 갔으니 그마저도 용이하지 않습니다. 옛말에 고개가 끄덕여 집니다. “마음이 지척이면 천리가 지척이고, 마음이 멀어지면 지척도 천리”라는 말... 형제간의 소통도 예전 같지 않습니다. 통화를 해도 쉽게 대화거리가 궁해지죠. 전 같으면 자식걱정에, 자랑에, 줄줄이 엮을 테지만 빈 둥지끼리 나눌 것은 그저 서로의 건강 걱정이나 해주면 끝입니다. 존경하는 선배와 만났습니다. 큰 아들은 미국에서 학위를 따고 현지에 눌러 앉은 지 11년째랍니다. 오늘은 손자가 화상통화를 할려나? “아참, 이번 주는 바쁘다 했지? 그래 바빠야지.” 일본에 있는 둘째 딸은 엊그제 통화에서 아이 교육이 힘들다고 넋두리하던데. “타지도 아닌 타국 생활이니 그렇겠지.” 제 둥지를 찾아간 자녀들한테 옛 일상을 더듬자고 할 일은 더욱 아닙니다. 그렇다고 넋두리만 하고 있을 수도 없습니다. 그것이 우리 인생이 거쳐야 할 여정으로 받아들여야 할 테니까요. 늘 아쉽고, 부족하고, 늘 그리움이 많은 게 우리네 인생인 듯합니다. 그래도 아직 남은 인생이 있고 걸어야 할 여정이 있고, 맞이할 일상이 남았으니 희망이란 새 한 마리 날아와 내 어깨에 앉아 주길 기대합니다. 그러다보니 더욱 간절해지는 것이 하늘의 은총입니다. 그분만이 내 남은 여정에 행복의 무늬를 함께 짜 주실 분이 시니까요. 식탁의 빈자리를 채워주시고 내가 입술을 열어 기도하면 응답해 주십니다. 성경을 펴면 말씀이 두런두런 대화를 나누자고 합니다. 예전에 느끼지 못한 행복감이 차오릅니다. 아이들과 즐기던 저녁 식탁의 축제는 흩어져갔지만, 그 분과 함께 하는 식탁의 축제는 노을빛처럼 아름답습니다. 오늘도 사랑과 그리움이 묻은 집에서, 가족의 기억들이 숨 쉬는 공간에서, ‘고뇌는 내가 갈아입는 옷 중 하나이니 나는 상처받은 사람에게 기분이 어떤지 묻지 않는다 나 스스로 그 상처받은 사람이 된다' (월트 휘트먼의 '나의 노래' 중에서 글 이관순(소설가/이관순의손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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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3-28
  • 시간보다 소중한, 함께 할 사람
    살면 살수록 강해지지 못하고 약해지는 게 사람입니다. 유독 사람만 신앙에 의지하는 것도 그 때문이겠지요. 몸집도 키도 작아지고, 꿈도 희미해지고, 늘어나는 건 나이테뿐입니다. 친구 병문안을 다녀오며 많은 생각이 따라왔습니다. “하나님이 새 생명을 선물하셨어. 받을 자격이 없는데 내게” 내 손을 잡으며 친구가 건넨 말입니다. 25일 동안 중환자실에 누워 있었다는 친구는 완전 다른 사람이 돼 있었습니다. 가장의 책무보다는 평생 자기가 좋아한 일에 빠져 살았지요. 전국의 명산을 섭렵하더니 세계의 명산 순례를 끝낼 만큼 건강도 좋았습니다. 이로 인해 가장으로서 아빠로서 지어야 할 짐을 고스란히 떠안은 건 아내였죠. 그가 만든 그늘 때문에 가족에게는 인기가 없었습니다. “당신 성당에만 나가요. 그 이상 더 바라지 않을 게요.” 모든 걸 체념하고 남편 구원에만 희망을 걸었지요. 그러한 아내에게 ‘죽을 때 가까워지면 고백해 볼게’라고 했던 그가 큰일을 겪더니 달라진 것입니다. 애나 어른이나 사람을 기분 좋게 하는 단어가 ‘선물’일 것입니다. 주고받는 쪽 모두를 만족시키는, ‘사랑’ 같은 귀한 어휘입니다. 친구를 눈물겹게 한 고결한 선물, 감당이 안 되는 분에 넘친 선물, 생명은 세상의 그 어느 것보다 값진 선물이겠지요. 작가 볼테르는 창조자가 내려주신 선물로 ‘생명’을 꼽았고, 프랜치스코 교황은 ‘시간’을 말했습니다. 친구는 나를 보기 며칠 전 병상에서 영화 ‘라스트 미션’을 보았다고 했습니다. 자신의 이야기를 콕 집어 말하는 것 같아 마음으로 많이 울었다고 합니다. ‘라스트 미션(the mule 노새)’은 어느 낙제점 가장의 참회록입니다. ‘시간보다 소중한 것’을 들려 줍니다. 실존인물을 각색한 주인공 역을 노장 클린트 이스트우드(사진)가 맡았습니다. 원제목에서 보듯 주인공 얼의 삶은 ‘노새’를 닮았지요. 한 가지만 생각하는 노새.... 가족과 떨어져 사는 삶에 익숙한 얼은 화훼농장을 가꾸는 일에 시간과 정성을 다 쏟아 붓습니다. 백합경연대회는 그가 기다려온 무대입니다. 대회마다 우승컵은 그의 차지였고, 그 순간 느끼는 행복감은 컸습니다. 이를 삶의 낙으로 삼았던 얼이 생의 끝자락에 이르면서 눈물을 짓습니다. 기회가 있었음에도 하지 못한 일들을 떠올리며 흘리는 눈물은 대개가 때늦은 ‘후회’입니다. 분신과도 같던 꽃 농장이 기울면서 깨닫게 된 것이지요. 어느 날, 가족에게 평생 좋은 일을 못해온 얼이 거금을 내밉니다. 꽃 농장이 압류될 만큼 쫄딱 망한 직후여서, 아내는 돈의 출처를 수상히 여깁니다. 비밀은 영화의 원제(原題)인 ‘mule'에 숨어있지요. 얼이 필요한 돈을 얻기 위해 마약 운반책을 맡은 것입니다. 운반 물품이 마약임을 모르는 채 말입니다. 얼은 가족에게 진 마음의 빚을 보상하기 위해 노새처럼 일합니다. 그러던 중 아내가 위독하다는 비보를 듣습니다. 매달 시간 엄수가 밀매조직의 생명임에도 얼은 병원으로 달려가 아내를 위로합니다. “사랑해 여보” 수십 년 만에 해보는 말이지만 낯설지 않습니다. 아내가 기뻐합니다. 얼은 아내의 눈을 보며 약속합니다. “앞으로 더 사랑할게 더 많이.” 그것이 불가능한 일이란 것을 알면서도. 범죄 조직은 규칙을 위반한 얼의 제거에 나섭니다. 이쯤에서 작가는 말합니다. “시간보다 더 중요한 하나는 시간을 함께 보낼 사람.“ 이라고. 너무 늦긴 했으나 이 진리를 깨달은 90세의 얼은 평생 등졌던 딸과 함께 할 시간을 그리며 마지막 배달에 나섭니다. 얼은 운반 물품이 마약임을 알게 되고 끝내 마약 단속국과 맞닥뜨리는 운명의 갈림길에 섭니다. 그는 어떤 길을 선택을 할까요? 원로 문학평론가 유종호는 최근 펴낸 신작에서 “삶의 곡절을 많이 겪었다고 각별한 지혜가 생기는 건 아니다”라고 했습니다. 오랜 세월 굽이쳐온 삶의 길목에서 찾아낸 인생의 지혜가 겸양으로 들리지만, 살고 또 살아봐도 알지 못할 게 인생이라는 고백처럼 들립니다. 퍼내고 퍼내도 줄지 않는 샘물 같이 말입니다. *글 이관순(소설가) 이관순의 손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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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3-25
  • 시간보다 소중한, 함께 할 사람
    살면 살수록 강해지지 못하고 약해지는 게 사람입니다. 유독 사람만 신앙에 의지하는 것도 그 때문이겠지요. 몸집도 키도 작아지고, 꿈도 희미해지고, 늘어나는 건 나이테뿐입니다. 친구 병문안을 다녀오며 많은 생각이 따라왔습니다. “하나님이 새 생명을 선물하셨어. 받을 자격이 없는데 내게” 내 손을 잡으며 친구가 건넨 말입니다. 25일 동안 중환자실에 누워 있었다는 친구는 완전 다른 사람이 돼 있었습니다. 가장의 책무보다는 평생 자기가 좋아한 일에 빠져 살았지요. 전국의 명산을 섭렵하더니 세계의 명산 순례를 끝낼 만큼 건강도 좋았습니다. 이로 인해 가장으로서 아빠로서 지어야 할 짐을 고스란히 떠안은 건 아내였죠. 그가 만든 그늘 때문에 가족에게는 인기가 없었습니다. “당신 성당에만 나가요. 그 이상 더 바라지 않을 게요.” 모든 걸 체념하고 남편 구원에만 희망을 걸었지요. 그러한 아내에게 ‘죽을 때 가까워지면 고백해 볼게’라고 했던 그가 큰일을 겪더니 달라진 것입니다. 애나 어른이나 사람을 기분 좋게 하는 단어가 ‘선물’일 것입니다. 주고받는 쪽 모두를 만족시키는, ‘사랑’ 같은 귀한 어휘입니다. 친구를 눈물겹게 한 고결한 선물, 감당이 안 되는 분에 넘친 선물, 생명은 세상의 그 어느 것보다 값진 선물이겠지요. 작가 볼테르는 창조자가 내려주신 선물로 ‘생명’을 꼽았고, 프랜치스코 교황은 ‘시간’을 말했습니다. 친구는 나를 보기 며칠 전 병상에서 영화 ‘라스트 미션’을 보았다고 했습니다. 자신의 이야기를 콕 집어 말하는 것 같아 마음으로 많이 울었다고 합니다. ‘라스트 미션(the mule 노새)’은 어느 낙제점 가장의 참회록입니다. ‘시간보다 소중한 것’을 들려 줍니다. 실존인물을 각색한 주인공 역을 노장 클린트 이스트우드(사진)가 맡았습니다. 원제목에서 보듯 주인공 얼의 삶은 ‘노새’를 닮았지요. 한 가지만 생각하는 노새.... 가족과 떨어져 사는 삶에 익숙한 얼은 화훼농장을 가꾸는 일에 시간과 정성을 다 쏟아 붓습니다. 백합경연대회는 그가 기다려온 무대입니다. 대회마다 우승컵은 그의 차지였고, 그 순간 느끼는 행복감은 컸습니다. 이를 삶의 낙으로 삼았던 얼이 생의 끝자락에 이르면서 눈물을 짓습니다. 기회가 있었음에도 하지 못한 일들을 떠올리며 흘리는 눈물은 대개가 때늦은 ‘후회’입니다. 분신과도 같던 꽃 농장이 기울면서 깨닫게 된 것이지요. 어느 날, 가족에게 평생 좋은 일을 못해온 얼이 거금을 내밉니다. 꽃 농장이 압류될 만큼 쫄딱 망한 직후여서, 아내는 돈의 출처를 수상히 여깁니다. 비밀은 영화의 원제(原題)인 ‘mule'에 숨어있지요. 얼이 필요한 돈을 얻기 위해 마약 운반책을 맡은 것입니다. 운반 물품이 마약임을 모르는 채 말입니다. 얼은 가족에게 진 마음의 빚을 보상하기 위해 노새처럼 일합니다. 그러던 중 아내가 위독하다는 비보를 듣습니다. 매달 시간 엄수가 밀매조직의 생명임에도 얼은 병원으로 달려가 아내를 위로합니다. “사랑해 여보” 수십 년 만에 해보는 말이지만 낯설지 않습니다. 아내가 기뻐합니다. 얼은 아내의 눈을 보며 약속합니다. “앞으로 더 사랑할게 더 많이.” 그것이 불가능한 일이란 것을 알면서도. 범죄 조직은 규칙을 위반한 얼의 제거에 나섭니다. 이쯤에서 작가는 말합니다. “시간보다 더 중요한 하나는 시간을 함께 보낼 사람.“ 이라고. 너무 늦긴 했으나 이 진리를 깨달은 90세의 얼은 평생 등졌던 딸과 함께 할 시간을 그리며 마지막 배달에 나섭니다. 얼은 운반 물품이 마약임을 알게 되고 끝내 마약 단속국과 맞닥뜨리는 운명의 갈림길에 섭니다. 그는 어떤 길을 선택을 할까요? 원로 문학평론가 유종호는 최근 펴낸 신작에서 “삶의 곡절을 많이 겪었다고 각별한 지혜가 생기는 건 아니다”라고 했습니다. 오랜 세월 굽이쳐온 삶의 길목에서 찾아낸 인생의 지혜가 겸양으로 들리지만, 살고 또 살아봐도 알지 못할 게 인생이라는 고백처럼 들립니다. 퍼내고 퍼내도 줄지 않는 샘물 같이 말입니다. *글 이관순(소설가) 이관순의 손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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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3-21

실시간 기고 기사

  • 고통은 하늘이 내린 선물
    살면서 가장 많이 선택하는 단어가 희망이고, 피하고 싶은 단어가 고통입니다. 단테의 ‘신곡’엔 ‘지옥의 문’ 앞에 서는 사람들에게 희망이란 희망은 모두 박박 긁어 버리라고 하죠. 지옥에는 희망이 존재하지 않으니까요. 오래전 대상포진으로 큰 고통을 당한 적이 있습니다. 한 달 넘는 치료과정에서 겪은 통증의 기억은 10년이 다 된 지금도 ‘대상포진’이란 말에서 조차 신경이 써집니다. 중추를 칼끝으로 헤집고 침이 곳곳의 피부를 뚫어대는 통증에 한바탕 진땀을 흘리다보면 고통도 잠시 쉴 때가 있습니다. 그때 먹고, 웃고, 수다도 떨지만 다시 올 고통에 두려움을 느낍니다. 해도 고통의 강도가 센들 회복이 주는 기쁨만 할까. 여자가 겪는 산고도 마찬가지겠지요. 입덧이 나면서 열 달 동안 몸과 마음이 짊어지는 고통을 남자들은 알지 못합니다. 그러니 산실 밖에서 기다리다 조는 남자들이 생기겠지요. 하지만 산고가 심한들, 새 생명의 탄생이 주는 환희에 비할까. 그 고통을 겪고도 둘째, 셋째 아이를 낳을 수 있는 것은 가늠할 수 없는 희락과 기대가 훨씬 크기 때문일 것입니다. 낳는 것도 힘들지만 아이를 기르는 일은 더 힘들 텐데, 그 때문에 양육을 포기했다는 말은 들어보지 못했어요. 오히려 받은 고통의 수천만 배를 더 얹어 자식들을 사랑합니다. 자식의 혼사를 끝내고 속 시원하다는 말은 다 겉치레 수사입니다. 여전히 부모들은 눈시울을 붉히고 손수건을 꺼내듭니다. 천방지축이던 것이 언제 저렇게 성장해서 제 가정을 이룬다는 사실에 한 없이 파도치는 것은 감동과 감사뿐이지요. 세상이 온통 다 변했다 해도 고통의 질과 양은 옛 그대로입니다. 지금도 피하고 싶은 것이 고통입니다. 그럼에도 내가 마땅히 겪어야 할 고통임을 자각하는 순간, 우리는 태도를 바꾸고 그 속으로 뛰어들지요. ‘살아있다’는 것은 ‘고통을 겪다’와 동의어입니다. 생명으로 존재하는 한 고통은 불가피 하니까요. 꽃도 흔들리며 피고 바람에 눕는 풀도 아프긴 마찬가지입니다. 통증의 신호가 잘 전달돼야 건강을 지킬 수 있듯, 고통이 지겹다고 감각 신경을 제거해버리면 통증을 잊을지 몰라도 신체 어딘가에 마비를 부릅니다. 한 의료 선교사가 한센병 환자를 돌보는 사역을 하다가 겪은 이야기예요. 어느 날 갑자기 그의 발에서 감각이 사라졌습니다. 직감적으로 감염을 의심할 수밖에요. 발에 주삿바늘을 여기저기 찔러보지만 통증을 느끼지 못합니다. 그가 밤새 홀로 부르짖어 기도한 것은 단 한 가지뿐. “주님, 제게 고통을 돌려주세요! 통증을 느끼게 해주세요!” 그제사 비로소 통증이 생명에 없어선 안 될 하늘이 내려준 선물임을 알게 됩니다. 생명을 위해 더없이 소중한 선물이 무엇일까? 지금 내가 겪는 이 고통도, 이 역경도 하늘이 내린 선물이 아닐까? ‘젊어 고생은 사서도 한다’라는 옛 어른의 가르침은 결코 빈말이 아녔어요. ?한 송이의 국화꽃을 피우기 위하여 봄부터 소쩍새는 그렇게 울었나보다 천둥은 먹구름 속에서 또 그렇게 울었나보다…? 인생도 생명의 탄생에는 고통이 있고 성숙에는 고난이 따른다는 것을 갓 핀 국화송이가 전합니다. 시드니에 사는 교민이 고국을 다녀가는 길에 개나리 가지를 꺾어다가 자기 집 마당에 심었다고 해요. 이듬해 봄이 됐어요. 맑은 공기와 좋은 햇볕에 잎과 가지는 한국에서 보다 무성했지만, 꽃은 피지 않았습니다. 첫 해라 그런가보다 했는데 다음해도 그다음해도 꽃은 피지 않는 걸 보면서 비로소 알았답니다. 혹한이 없는 호주에서는 개나리꽃이 아예 피지 않음을. 저온을 거쳐야 꽃이 피는 것을 춘화현상이라고 하는데 진달래, 철쭉, 튤립, 백합, 라일락 등이 이에 속한답니다. 봄에 파종하는 봄보리 보다 가을에 파종해 겨울을 나는 가을보리가 수확도 많고 맛도 좋은 이치와 같아요. 추운 겨울을 거치면서 풍성하고 더욱 견실해집니다. 사람도 고난을 많이 헤쳐 나온 사람일수록 강인함과 인생의 깊이가 다릅니다. 무르익은 누군가의 인생이 부럽다면 그의 고난부터 이해할 일입니다. 지금 겪는 내 고난을 너무 원망하지 마세요. ‘통증’이 몸이 건강함을 알리는 신호듯이 그 고통이 나를 인도하는 축복의 통로일 수 있으니까. -글 이관순 소설가/ daumcafe/ leerett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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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9-21
  • 내 삶이 내 스펙이다.
    현실에 지쳐 희망을 접었다는 학생이 연구실로 교수를 찾아왔다. 가난한 환경에서 학업과 일을 병행해 왔는데 부족한 성적 때문에 기업의 해외연수생 모집에 응시를 못한다고 눈시울을 붉혔다. 정말 잠 안 자고 안 먹고 열심히 노력하며 살았는데, 지금 나 자신이 너무 초라해 보인다고 낙심했다. 교수는 그 학생의 성실한 생활 태도를 잘 알고 있었다. 이때 스승은 학생에게 무슨 말로 위로와 격려를 전할까. 스승은 제자에게 말했다. “네가 살아온 삶이 네 스펙이다.” 일단 접수부터 하라고 권했다. “학점이 'all B' 이상여야 하는데 'C'가 하나 있어요.” 스승이 제자 등을 두드리며 “학점이 다가 아니다. 너는 너만의 스펙이 있잖니? 힘을 내라. 추천서는 내가 해주마.” 결국 학생은 스승의 정성 어린 추천서 덕에 선발되었고, 1년 연수를 성실하게 마치자 곧바로 그 회사에 스카우트됐다. 그리고 런던 주재원으로 발령을 받았다. ‘내가 살아온 것이 내 스펙’이라고 알려준 스승의 한마디가 절망의 어둠 속 인생을 부활시킨 것이다. 스승의 그 한마디에 열등을 치유하고 온전한 자유를 찾은 제자는 런던에 부임한 첫날밤, 비 오는 테임즈 강가에서 비를 맞으며 눈물을 흘렸다. 그리고 스승에게 감사의 편지를 보냈다. 어둠은 모든 것을 삼켜버린다. 어둠은 순식간에 희망, 꿈, 환상, 미래까지 다 덮어버리지만, 천년의 어둠도 한 줄기 빛에 날아간다. “어둠이 빛을 이긴 적은 없다.” 영화 ‘미션’ 첫 장면에 떠오르는 자막이다. 빛과 어둠은 동전의 양면 같이 붙어 있다. 문제는 내 시선이 어느 쪽을 향하고 있느냐이다. 인생에는 수많은 고통과 역경이 따라붙지만 그 불행을 해결할 수 있는 작은 문이 어딘가에 열려 있다. 인생이 매력적인 것은 ‘고난을 거듭할수록 지혜는 쌓이고 나를 강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사막을 여행하다 쓰러지는 사람은 대개 오아시스를 눈앞에 두고있다고 한다. 시련의 시간을 좀만 더 견뎌냈더라면 찾을 텐데. 이 고통의 법칙은 우리가 사는 지상의 언어요 약속이다. 사람이 스스로를 귀히 여기지 않으면 누가 나를 존중해 줄까? 나는 나다운 멋이 있고 재능을 지닌 세상에서 하나뿐인 존재이다. 이것이 자존감이다. 자기를 자랑하는 자존심과는 다르다. 자신을 존중할 줄 아는 이가 역경에서 이긴다. 주눅 들지 말고 어깨를 쫙 펴고 걸어가자. 때가 되면 ‘나 자신’이 바로 비장의 무기임을 알게 될 것이다. 가장 완벽한 정보는 내가 아슬아슬하게 승리하거나 패한 것에 있다. -소설가/daumcafe이관순의 손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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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9-18
  • 신발장을 정리할 시간
    시름에 찬, 여름 한(恨) 세월이 간다 폭우 속에 잠긴 집들 산사태에 쓸려간 삶의 터전들 둑은 터지고 다리는 끊어지고 지붕 위로 올라간 소의 수난까지 아버지가 물 빠진 쓰레기 속에서 사진액자를 찾아들고 수건으로 훔치고 한참을 본다 단란했던 시절 사진관에서 찍은 가족사진이다 그 속에 일곱 가족이 웃고 있다 넥타이 매고 행복해하는 아버지 오빠가 암으로 이승을 뜰 때도 아들이 힘들다며 어머니가 요양원을 자원할 때도 가족은 웃었다 웃음 속에 흐르는 애잔함이란 한 번 가면 오지 않는 시간이다 백로(白露)가 가까워진 아침 풀잎에는 영롱한 이슬이 맺히고 뜨락 위로 부는 바람은 정갈하고 계절은 이처럼 쉽게 오가는데 아직도 웃고 있는 가족들... 지금은 신발장을 정리할 시간 함지에 가득 물을 받아놓고 현관에 흩어진 신발을 닦아야지 씻고 헹구고 물기를 털어서 가지런히 줄을 세워 말려야지 신발장 위의 박스는 내려서 그 속의 신발은 꺼내놓고 여름 신발은 담아서 올려야지 신발장이 정리되는 동안 신발은 새집에 들어갈 생각에 한가슴 부풀고 산만했던 마음은 가을바람에 살포시 부풀고. 소설가/daumcafe 이관순의손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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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9-14
  • 누가 시간을 지배할까
    천고마비(天高馬肥). 말이 살찌는 계절, 말만 들어도 평화로운 초원을 떠올리게 합니다. 그러나 이 말은 몽골을 경계해온 중국에는 평화보다 긴장을 상징합니다. 원기를 회복한 몽골족이 언제든 공격할 수 있는 시기이기 때문입니다. 중국은 몽골을 늘 경계해 왔어요. ‘몽고’라는 국호로 얕잡아보면서도 그들의 전술 전략에 수없이 농락당한 아픈 경험이 있습니다. 얼마나 시달렸으면 북방 유목민족을 경계하고자 만리장성을 쌓고, 동북 부족 때문에 천리장성을 축성했을까. 알려진 대로 칭기즈칸의 몽골은 한 때 1억의 유라시아를 호령했던 막강한 제국이었죠. 헝가리 등 동유럽에서, 블라디보스토크, 러시아까지 그들의 말발굽 아래 수많은 나라가 무릎을 꿇었습니다. 그 와중에 국가의 명패를 지킨 나라는 고려뿐입니다. 형제의 맹방이라고 의리를 지켜주어서죠. 유목민족인 몽골이 고려를 맹방으로 우대한 것은 한반도가 몽골족의 후예라는 연대의식이 작용했다고 보는 시각이 큽니다. 유독 한국인 신생아의 엉덩이의 시퍼런 반점을 ‘몽골리안 마크’로 불린다는 것도 예사롭지 않습니다. 21세기 문명이 새롭게 유목 문화를 주시합니다. “집을 짓고 사는 자, 다 망한다”라고 한 몽골 장수 돈유 코코 말처럼, 누가 시간을 지배하느냐라는 인류의 초관심사가 IT 문명과 맥이 닿아서입니다. 그동안 문명의 쥬류인 정착 민족의 관심은 ‘누가 공간을 제어하며 사나?’ 였다면, 유목 문화는 ‘누가 시간을 제어하며 사느냐?’에 있습니다. 이는 수직적 위계사회가 수평적 위계사회로의 이동을 뜻합니다. 한국인의 유목성 기질을 분석한 책을 재밌게 읽었어요. 이를 보면 우리도 다분히 유목민 DNA가, 피가 흐르고 있음을 어느 정도 수긍하게 합니다. 그 하나로 <활쏘기>를 꼽았어요. 우리나라 양궁이 유달리 강한 이유를 유목민 기질에서 찾습니다. 고구려 고분 벽화를 보세요. “얼마나 말과 활을 잘 다루면, 달리는 말에서도 뒤를 향해 쏠 수 있을까?” 고구려 시조 주몽의 뜻이 ‘활을 잘 쏘는 자’란 점도 우연은 아닐 것입니다. <골프> <바둑>에서도 빛나는 유목 기질을 찾습니다. 바둑은 어떤가요? 수직적 위상으로 설정된 장기나 체스와 달리 바둑은 수평적 위상에서 출발합니다. 왕을 잡으면 끝나는 장기와 달리, 바둑은 끝까지 가봐야 승부가 납니다. <이동통신> 발달은 보다 뚜렷한 우리민족의 장점이 투시되어 있습니다. 이동통신 세계 3대 보급률 국가인 한국, 핀란드, 스웨덴의 공통점은 몽골리안 계란 점입니다. 유목민은 끊임없이 움직이고 변해야 살 수 있습니다. 우리 <민속 풍습> 중엔 끊임없이 돌아다니는 것이 많아요. 단오, 삼짇날, 천렵, 단풍놀이가 그렇습니다. 유목성에는 남의 마을, 이웃집에 대해 늘 궁금함이 있습니다. 옛날엔 발품을 팔고 귀동냥으로 알아챘지만, 지금은 애어른 구별 없이 핸드폰을 들고 궁금증을 풀잖아요. <음주문화>도 예외가 아닙니다. 서양 음주는 스스로 따르고 마시는 자작(自酌)문화지요. 우리도 농경사회 땐 비슷한 자배(自杯)를 즐겼지만, 서서히 돌려마시는 순배(巡杯)로 바뀌면서 ‘우리는 하나’를 외쳐댑니다. 몽골 음주습관은 각배(角杯)예요. 좌장이 병권을 쥐고 뿔로 만든 각배를 돌려 마십니다. 이동하는 짐을 줄이기 위해 한 사람만 술잔을 지닙니다. 그것이 이동에 효능임을 아니까요. 몽골대학의 졸업식은 참 흥미롭습니다. 우리처럼 졸업식장에 모여 끝내지 않고 계속 이동하며 행사를 이어가죠. 오전 졸업식, 점심 호텔, 오후에 학교로 이동, 다시 야외로 나가 새벽까지 돌아다니며 즐깁니다. 우리가 1·2·3차로 술집을 순례하고 폭탄주를 돌리는 것에도 유목문화의 이동성이 잠재돼 있는 걸까? 빨리 마시고 빨리 취하는 건, 빨리 끝내고 떠나야 한다는 잠재의식 때문은 아닐까? <고스톱>도 같은 관점에서 봤어요. 일반 화투는 위계질서가 분명하지만 고스톱은 ‘광’과 ‘껍질’이 동등한 반열에 서 있습니다. 왕이 죽으면 끝나는 게 아니라 승패는 끝까지 가봐야 압니다. 다 죽었다가 살아나고 다시 죽기도 하니까. <춤사위>는 어떨까요? 어깨춤, 관광버스춤, 말춤, 위아래로 흔드는 마상 춤사위 등 시간·장소에 따라 변화무쌍합니다. 한국경제의 급성장엔 <빨리 빨리>라는 주술이 작동했지요. 1년에 초장을 찾아 네 번 이동하며 사는 유목민의 최대 관심은 빨리빨리 다음 초지를 찾는 일입니다. 21세기는 시간을 제압하고 공간을 지배하는 신 유목시대입니다. 그러니 ‘싸게 싸게’ ‘빠릿빠릿하게’ 일을 해치워야 합니다. 영화 <친구>의 패러디 대사처럼 “이제 마이 머물렀다 아이가. 고마 퍼뜩 떠나재.” 이관순 소설가/daumcafe/leerett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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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9-11
  • 끝내 돌아오지 못한 아들
    거의 매일같이 파티와 사교모임을 즐기는 미국의 한 상류층 부부가 있었습니다. 그들은 침실이 여섯 개나 있는 저택에서 살고 있었어요. 그날도 저녁 파티에 참석할 준비에 들떠 있었습니다. 막 집을 나가려고 하는데 전화벨이 울렸어요. 뜻밖에도 월남전에 참전한 아들의 전화였습니다. “어머니, 방금 제대하여 본국에 돌아왔습니다.” “오, 아들! 네가 살아 돌아왔다니 정말 기쁘구나. 언제 집에 오느냐?” 어머니가 기쁨에 넘치는 소리로 물었습니다. “빨리 갈게요. 그런데 집에 내 전우 한명을 데리고 가도 되겠습니까?” “아무렴, 여부가 있냐. 내가 환영해 주마. 그 친구도 데리고 오너라.” 어머니는 망설이지 않고 승낙을 했습니다. 그러자 아들이 말했어요. “어머니, 그런데 제 친구는 두 다리가 절단되고 팔 하나를 잃었습니다. 얼굴도 심한 화상을 입었고 귀 하나와 눈 하나도 없습니다. 그래서 보기가 매우 흉한데, 딱히 갈 집이 없답니다.” “그래? 하지만 너무 걱정할 것 없다. 같이 쉬면서 갈 곳을 찾아보자.” 아들은 감사하다면서 어머니에게 다시 물어봅니다. “어머니가 다시 한 번 승낙을 해주면 좋겠어요. 나는 그가 우리 집에서 오래도록 함께 살게 하고 싶거든요.” 우아하고 교양 있는 어머니는 아들의 말에 당황한 기색입니다. 그녀는 황급히 아들의 말을 가로막았습니다. “그건 안 된다. 친구의 딱한 사정은 백 번이고 동정하지만 그렇다고 우리 집에 마냥 있게 할 수는 없지 않겠느냐? “그러실 테죠. 하지만 그렇게 하면 안 될까요?” “깊게 생각을 해보렴. 동네 사람들은 무어라고 할 것이며 네 아버지가 이를 허락하시겠니? 친구는 나라가 적절한 예우로 사는데 지장 없게 돌봐 줄 거다. 마침 연휴도 다가오니 너나 빨리 집에 돌아와서 오래간만에 가족끼리 휴가를 즐기도록 하자.” 그 말에 아들이 침묵하면서 대화가 끊겼습니다. “아들아, 내 말 안 들리니? 아들아?” “띠띠띠......” 어머니는 먹통이 된 전화통에 아들 이름을 부르다가 전화가 통화 중에 끊어진 것을 알았습니다. 다시 전화 오기를 기다렸지만 벨은 울리지 않았어요. 초조하게 시계를 보던 부부는 할 수 없이 약속 시간에 늦지 않으려고 집을 나섰습니다. 그리고 밤늦게 파티를 마치고 집에 돌아오자마자 어머니는 부재 중 전화 메시지부터 확인합니다. 그러나 기다리던 메시지는 없고 대신 캘리포니아 한 카운티 경찰서에서 온 녹음된 메시지 하나가 기다라고 있었어요. 이건 뭐지? 알지도 못하는 경찰서에서 왜? 이상한 예감이 든 어머니는 다급히 알려준 번호로 전화를 걸었습니다. 그리고 다음 날 그 마을로 먼 길을 달려서 경찰서를 찾았습니다. 경찰서장이 부부를 앉히고 침통한 표정으로 자초지종을 설명합니다. “여기 두 다리와 한쪽 팔이 없고 얼굴에 심한 화상이 있고 눈과 귀가 하나씩 없는 청년의 시체가 있어서요. 머리에 총을 쏴 자살한 듯합니다. 그런데 그의 신원증명서를 보니 당신의 아드님인 것 같습니다.” 미국 전쟁사에 기록된 가슴 아픈 사연을 재구성한 글입니다. 이야기를 들으면 우리는 그 어머니를 탓하기가 쉽겠죠. 그러나 막상 우리가 그 어머니였다면 달리 어떤 처신을 할 수 있었을까? 그 어머니는 평소에 자원 봉사도 열심히 하고 교회의 자선 사업에 앞장 서서 적극 참여한 여성이었습니다. 월남전이 끝나고 고향으로 돌아온 미국 젊은이들의 비극적인 이야기는 수없이 많습니다. 미군 5만8천 명이 사망하고 10만 명에 가까운 부상자를 낸 월남전은 당시 미국 사회에 엄청난 충격과 부작용을 불러왔지요. 히피족이 등장한 것도 실은 월남전의 영향을 크게 받았습니다. 그러나 전투에서 당한 부상보다 더 견뎌내기 힘들었던 것은 사회의 냉대였습니다. 자신의 참담한 모습과 마주하게 될 부모님의 절망하는 모습이 두렵고 무서웠던 아들은 집을 찾기 전에 조심스럽게 어머니의 의중부터 살폈습니다. 그리고 아들은 깊은 고뇌 끝에 자신이 할 수 있는 마지막 선택으로 극단적인 방법을 택했지요. 어머니의 선을 긋는 말 한마디에 그렇게 그리워한 집으로 영영 돌아가지 못하는 아들이 되고 말았습니다. 어머니의 머릿속에 저장된 자랑스러운 아들의 이미지를 지켜드리고 싶은 아들이었을 테니까요. 가정의 달엔 가족 간의 이동과 모임으로 즐겁고 행복한 사람들이 많겠지만, 양지가 환할수록 한쪽으로 그늘이 짙어집니다. 돌아오지 못하는 건 아들뿐이 아닙니다. 아버지일 수도, 엄마일 수도 있고, 이런저런 사정으로 떠도는 가족들일 수도 있습니다. 가뜩이나 사랑에 굶주려 있는 시설에 있는 아이들에겐 5월의 웃음소리가 가슴 저미는 소리일 수도 있겠지요. 금년 5월에는, 우리 가족 이름으로 그늘진 이웃을 헤아리고 살피는 작은 무엇 하나 준비하면 어떨까요? 그러면 더 가치 있고 소중한 ‘가정의 달’로 반짝반짝 빛날 것 같아서···. 한 뼘 그늘을 지우는 빛이 되기도 하겠죠. 글 이관순 소설가/daumcafe/leerett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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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9-07
  • 빈집으로 보내는 여름편지
    푸른 바다에 갈매기들이 온다 여름 한철 내내 사람들에게 바다를 내어주고 떠나갔던 갈매기 가족들이다 사람들은 갈매기를 쫓아냈다고 생각하지 않듯이 갈매기들은 잠시 바다를 사람들에게 빌려주었다고 생각한다 바다가 제 모습을 찾아가는 동안 먼바다로 나갔던 물고기들은 해안으로 돌아오고 짓무른 모래밭도 파도에 씻기며 다시 편안한 제 몸을 찾는다. 모래밭에 새긴 사랑의 발자국들 뜨겁게 일렁이던 욕망의 그림자 모두 다 지워내고 이젠 고요의 시간으로 돌아갈 때 바다가 바다로 돌아가듯 이젠 마음의 서랍을 정리할 시간 여름 내내 눅눅했던 마음은 볕에 내다 말리고 현관에 널린 신발은 씻어 올리고 때로 얼룩진 시간은 닦아내고 이슬... 풀꽃... 사랑... 감사... 그런 착한 말들로 가지런하게 마음을 정돈하고 싶다 바다에서 돌아와 신발을 벗을 그대를 위하여 함초롬히 이슬에 젖어 올 가을을 위하여 -소설가/daumcafe이관순의 손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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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9-04
  • 나뭇잎 사이로 가을이 오네
    올여름, 낭만은 없었다. 미쳐 돌아가는 염천 아래로 극한 폭염과 극강 호우, 한반도를 관통한 태풍에 급급해야 했던 올여름은 애초 낭만과 거리가 멀었다. 그래도 푹푹 찌는 날씨에 세 시간 걸리는 열차에 몸을 실은 건 여수 밤바다는 다르겠지 하는 기대 때문이었다. 어둑한 밤바다를 보며 넘실거리는 파도를 연상시키는 멜로디에, 읊조리듯 속삭이는 버스커버스커의 ‘여수 밤바다’를 상상했다. 이 노래는 이명박 정부가 그 당시 잘 나가던 장범준에게 여수엑스포를 띄워줄 노래를 만들어 달라고 해서 나온 노래다. 그런데 웬걸 수많은 ‘낭만 포차’에선 아이돌 그룹 노래가 고막을 때렸다. 늘 기대는 70~80%에 놓아야 하는데, 눈에 거슬리는 것이 많았다. 시어터진 갓김치를 우적우적 씹다가, 밖으로 나와 조명 없는 곳에 걸터앉아 이어폰을 끼고 노래를 들었다. 그러다 밤하늘에 뜬 둥근 달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문득 내 모습이 좀은 청승스러워 보이기도 했다. 아, 그렇구나. 이제 내가 살았던 세상의 낭만이 기댈 곳은 좁다랗다는 걸 깨닫는다. 그러면서 연 나흘째 동해안을 훑으며 차를 몰고 주유천하 중인 대학 동창의 얼굴이 떠올랐다. 친구는 지치지 않고 좌충우돌한 그날의 에피소드를 뚝딱뚝딱 만들어 카톡에 올렸다. 본인은 괜한 화장발을 올리지 말라고 손사래를 치지만, 내 주변에 몇 남지 않은 '서정파'이자 유일하게 남은 '낭만가객'이 아닌가 싶다. 댄스면 댄스, 노래면 노래, 운동이면 운동(테니스, 탁구, 수영), 더하여 사람까지 좋아해 새벽부터 밤까지 그가 끊임없이 찾아다니고 즐기는 것만 꼽아도 열 손가락은 펴야 한다. 그 나이에 세상을 자기만의 방식으로 즐길 줄 알고 사랑하며 힘써 살기란 어려운 일이다. 그를 보며 잘 놀고 즐기는 것도 타고난 복이라는 걸 생각한다. 세상에는 ‘기다리는 것’과 ‘기다려지는 것’이 있다는 걸 알았다. 사뮈엘 베케트의 희곡 ‘고도를 기다리며’를 읽다가 스친 것이다. 늘 생각했던 ‘고도’를 기다리는 사람의 입장에서가 아니라, 그들이 기다리는 ‘고도’의 입장으로 생각을 비틀어 보았다. 극 중에 단 한 번도 등장하지 않는 고도야 말로 오히려 그를 기다리는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의 초조함보다 불안과 긴장이 더 크지 않았을까? 무대에 오르기 전 막 뒤에서 느끼는 배우들처럼. 분명 고도는 어딘가에 오고 있다. 그 점만은 진실이다. 단지 도착하는 데 시간이 걸릴 뿐이다. 그 순간이 오기까지 기다려지는 사람의 존재를 확인할 길이 없다. 고도의 존재는 온전히 그를 기다리는 사람에 의해 그려지기 때문이다. 어쩌면 만남보다 만남 이전의 기다림의 시간이 아름다울 수 있다는 생각을 떠올려 본다. 갑자기 ‘고도를 기다리며’를 생각한 것은 순전히 가을 탓이다. 오후 들어 한바탕 소나기가 훑고 지나간 산능선 위로 뭉게구름이 해맑은 하늘에 떠 있고, 그 푸른 하늘 끝에 물린 검단산 자락이 잡힐 듯 가까이 보였다. 처서(處暑)가 지난 지도 닷새째다. 이제 모기 입은 삐뚤어지고 풀은 더 이상 웃자라지 않는다는 자연의 신호를 사람들은 알려주지 않아도 감지할 줄 안다. 여전히 한낮 더위는 쨍쨍해도 높이 뜬 나뭇잎 사이로 언뜻언뜻 가을이 스치고, 산에서 내려오는 바람에서 계절의 박동을 느낀다. 우리가 여름에 지쳤던 강도만큼 기다림을 키워온 가을이기에, 고도를 기다리는 두 사람처럼 오늘은 안 오지만 내일은 올 것이라는 믿음이 더욱 차질 수밖에… 그래서 가을을 기다리는 마음이 설레고 좋은가 보다. 처서가 지나면서 조석으로 부는 바람이 소슬하고 풀벌레 우는 밤이 가깝게 다가온다. 풀잎에 이는 바람의 숨결이 다르고, 꽃잎마다 달린 아침 이슬이 영롱하니 빛난다. 길가에 갓 피어난 코스모스가 생글생글 웃음 지며 하늘하늘 속삭이는 것도 이맘때 풍경이다. “나 많이 기다렸나 봐? 조금만 기다려. 다 왔어.” “어서 와. 팔월도 낼모레가 끝이야.” 8월의 밑동을 바라보는 사람들 얼굴이 한결 밝아진 것 같다. 떠나는 여름에 대한 원성만큼 상대적으로 커진 다가올 가을에 대한 기대 때문일 것이다. 기다리는 사이, 남은 여름의 잔해부터 마무리하자. 눅눅한 옷가지는 햇볕에 보송하게 말리고, 장독대는 독마다 뚜껑을 열어놓고, 책들은 거풍 시켜 책갈피로 스민 습기를 날려야겠다. 이제 여름은 가고 가을이 대세다. 우리가 눈치채지 못하는 사이 밤공기는 더욱 서늘해질 것이고, 텃밭에 내린 아침이슬이 바짓가랑이를 휘적실 테니까. 계절은 이처럼 쉽게 가고 오는데, 우리는 또 얼마나 어렵게 고단한 삶을 준비해야 하는지. 문득 여수 밤바다에 떠올랐던 둥근 달이 생각난다. 그때는 잘 몰랐는데, 그날 밤 돌산공원에서 바라본 두 대교의 불빛이 아련하고 아득하게 흔들린다. 기다림의 기쁨도 아쉬움의 작별도 쓰라린 아픔까지 지나고 나면 늘 그리워지는 법이다. 어느새 나뭇잎 사이로 가을이 보인다. -소설가/daumcafe 이관순의손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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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8-31
  • 가족으로 존재하는 이유
    비에 바람까지 불어 꽃비가 내리던 날, 지인이 페이스 북에 사진과 함께 글을 올렸습니다. 택배가 왔다고 해서 나갔더니 아들이 책을 보냈습니다. 별생각 없이 포장을 뜯다가 한바탕 웃고 말았다는 책···. 제목이 뜻밖에도 <알츠하이머의 종말>(2018)입니다. 책을 보낸 이유가 따로 있을 테지만 아버지가 치매에 걸릴까 걱정한 모양입니다. 불현듯 “요즘 엄마한테 자주 화를 내시나요?” 며칠 전 아들이 엄마와 통화하며 이것저것 묻더라는 말이 떠오릅니다. 그리고 하루 뒤 이 엄중한 책 한 권이 도착한 겁니다. 책 표지엔 아마존· 뉴욕타임스 종합 1위, 월스트리트 저널 올해의 책 등 베스트셀러 인증을 넷이나 달고 있었지요. “아들아, 걱정마라 아비는 멀쩡하다. 잘 읽고 더 건강해지마. 고맙다.” 그래도 걱정하는 아들이 기꺼워 휘파람을 불며 답글을 보내다가 문득 생각이 스칩니다. 내가 벌써 애들이 걱정할 나이인가? 쓴웃음 뒤로 한 줄기 바람이 스칩니다. 동화 속 주인공들의 결말은 항상 해피 엔딩입니다. 선이 악을 물리치고 행복한 세상을 찾는다는, 설정 자체가 대부분 그렇게 돼 있으니까요. 하지만 생각을 조금만 비틀면 또 다른 질문이 생깁니다. 백설 공주는 사악한 새엄마에게 목숨을 잃을 뻔했는데도 복수하고 싶은 생각은 없었을까? 불덩이에 마녀를 죽인 헨델과 그레텔은 마음이 아프지 않았을까? 궁금증이 생깁니다. 동화작가들이 주인공들을 통해 어린 독자들에게 전하려는 것은 재미와 함께 들려주려는 교훈 때문이겠지요. 그래도 동화 속 규범이 획일적인 건 좀 불만스럽습니다. 현실과 통섭 없는 세계만 있다는 지적이 나오기 때문입니다. 사회학적 관찰로 동화를 보면 동화속 미심쩍은 부분에 눈이 떠져요. 관점을 달리해 보면 또 다른 모색과 재미, 상상이 더해지게 됩니다. ‘백설 공주는 왜 자꾸 문을 열어 주지? 일곱 난쟁이가 신신당부했음에도 한 번도 아니고 사람만 찾아오면 번번이 기다렸다는 듯 문을 열어줍니다. 그러니 연거푸 곤경에 빠질 수밖에요. “엄마 백설 공주가 좀 멍청한 것 같아요?” 요즘엔 이렇게 되묻는 똑똑한 아이들이 있어 생각 없이 동화책을 읽어주던 엄마를 당황하게 합니다. 이점도 명작 동화가 예전처럼 환영받지 못하는 이유가 된다고 해요. 그러나 차분하게 뜯어보면 주목할 부분이 보입니다. 일곱 난쟁이가 아무리 백설 공주에게 잘해준들, 온종일 친구도 없는 빈집에 혼자라 생각해 봐요. 얼마나 외롭고 사람이 그리울까. 백설 공주 같은 상황에서는 누구든 문에 손이 갈 수밖에 없을 거예요. 세상에는 소외됨으로 인해 어리석은 선택을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동화는 주인공들을 통해 현대인이 지닌 결핍, 상실 등 사회적 관계에 대해 생각을 하게 하죠. 많은 동화가 표면상의 교훈적인 것 외에도 상징성을 지니고 있으니까요. 하지만 획일화된 구조 속에 있는 세상은 ‘왜?’ 라고 묻는 사람을 불편하게 여깁니다. 우리는 생각보다 많은 규범에 갇혀 살아요. 이에 맞설 설득력이 없으면 기존 논리를 따를 수밖에요. 과학이 ‘왜?’라는 것에서 출발했듯 우리의 삶도 이러한 물음을 통해 발전합니다. 이팝나무에 흰쌀밥이 탐스럽게 꽃 피던 때, 친구의 전화를 받았어요. 내용인즉 시골에서 혼자 사신 어머니를 모셔왔는데 얼마 전부터 자꾸 아파트 출입문을 열어준다고 걱정이 태산입니다. ‘딩동∼!’ 벨 소리만 나면 반사적으로 현관문으로 달려가 찰칵∼ 소릴 내며 문부터 열어준다는 어머니. 그렇게 설명하고 당부해도 허사라고 합니다. 하는 수 없이 부부 중 하나가 집에 남아야겠다는 결론에 이르렀답니다. 한동안 어머니 덕에 알바 없이도 부부가 편의점을 잘 운영해 왔는데···. 결국 알바를 다시 두기로 하고 아내와 교대로 집에 남기로 했다는군요. 전화를 끊고 나니 이런저런 상념이 모락 거립니다. 어머니는 왜 현관문을 자꾸 열어주는 걸까? 시골집에선 밤새 사립문을 열어두고 사셨다는 어머니. 그 무의식 속엔 혹시 2년 전 세상을 뜨신 아버지가, 1년 전 사고로 잃은 큰딸이 자리 잡고 있는 건 아닌지···. 얼마 후 친구의 전화를 받았습니다. 혼자된 여동생이 올라와 어머니를 모시고 다시 시골로 내려갔다고. 가시기 전에 병원에서 치매 진단을 받았는데 걱정할 정도는 아니라 한시름 놓았다고... 그래도 어머니를 보내는 마음이 편할 리 없겠지요. 책을 보낸 친지의 아들, 동화 속 주인공들, 친구의 어머니까지. 모두 물음을 던집니다. 왜 그랬을까? 때로는 내가 모르는 걸 누군가는 알고 있고, 그것을 알려주는 사람이 있습니다. 바로 친구요 가족입니다. 삶이 외롭고 힘들어 다리가 휘청일 때, 발 벗고 나서서 그의 빛나던 한 때를 증언해야 함은 가족이 나눠야 할 몫입니다. 서로에 관심을 높이고 혼자가 아닌 함께 기대어 사는 것이, 메마른 세상을 이기는 참 지혜가 될 테니까요. -소설가/daumcafe 이관순의손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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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8-28
  • 엄마 나무
    ‘발설한 걸 알면 난 죽어.’ 하면서도 결국엔 근질거리는 입을 열어야만 성이 풀리는 게 사람입니다. 사람이 할 말을 못하고 살면 병이 된다고, 그래서 세상에는 비밀이 없는 모양입니다. 동서에 산재한 설화 중 ‘임금님 귀는 당나귀’가 대표적인 것이겠지요. 신라 경문왕과 두건지기 이야기는 어떤 설화보다 현실감이 팽만합니다. 왕의 두상 비밀을 지키느라 두건장이의 속병은 평생을 이어갑니다. 죽음이 가까워지자 두건장이는 이판사판이란 생각으로 가슴속 비밀을 대밭에 나가 시원하게 토설하고 말지요. 그런데, 속은 시원해졌지만 바람이 불면 대숲에서 소리가 납니다. ‘임금님 귀는 당나귀’라고. 어쩌면 그렇게 착상이 사람 심리를 콕 집었습니다. 사람들 이야기 잘 들어주는 한의사 한 분을 알고 있습니다. 진료차 내원한 사람이 엉뚱한 고민을 털어놔도 다 받아줍니다. 주말에 그 분과 수락산을 오르는데 일행 중 여성이 자신이 겪는 힘든 얘기를 꺼냈어요. 쉬지 않고 이어지는 이야기···. 정상에 올라 하산 때까지 그녀의 불행과 함께 하느라 이날 등산은 재미는커녕 입안에 쓴 맛만 돌았습니다. 한의사가 시종 여성의 아픈 사연을 경청 위로했기 때문입니다. 그 날 산행도 그에겐 수행의 도장임을 알게 되었지요. 그는 10년 전 티베트에 갔다가 티베트 불교의 ‘통렌’에 심취하여 이를 실제 삶의 현장에서 실천하는 사람입니다. 통렌은 남의 고통과 내 행복을 바꾸는 호흡 명상 수행법입니다. 모든 사람들의 고통을 들이마시고 내 안에 있는 행복의 기운을 내주는 것입니다. 그럴수록 괴로워하는 이들의 고통은 점차 사라지고 더불어 나도 행복해진다는, 아름다운 수행법이죠. 삶을 교정할 수 있는 나만의 수양법이 있다는 건 복된 일입니다. 한 어머니가 멀리 시집보낸 딸을 생각하면 가슴부터 미어집니다. 새파란 서른 살 나이에 어쩌다 청상이 되어 어린 아들과 시모를 모시고 사는 딸의 기구한 팔자가 눈물겨웠기 때문입니다. 하루는 딸이 얼마나 힘들게 살고 있는지 어렵게 시간을 내어 먼 길을 찾아갔습니다. 불시에 나타난 엄마를 보고 놀라는 딸의 모습에서 어머니는 얼마나 삶이 고된지 한눈에 알아챕니다. 딸과 바람을 쐬려 한다고 사돈의 양해를 구해 밖으로 나왔습니다. 마을 뒷산에 올라 깊은 숲길로 들어선 어머니가 딸의 손을 잡습니다. “내 기구함이 내 딸 정수리로 흘러내릴 줄은 몰랐구나.” 대를 이어 청상이 된 딸의 운명을 가슴 아파한 것입니다. 6.25전쟁 때 남편을 잃고 딸 하나에 모든 걸 걸고 홀로 키워낸 친정어머니입니다. “엄마, 나 괜찮아요. 이건 내 운명이지 엄마 하고는 상관없어요.” 솔숲에 이르자 어머니는 주위를 살핀 후 딸의 손을 이끌고 수령이 백 년은 됐을 소나무 앞으로 다가갔습니다. “잘 들어라. 나도 널 키울 때 이래 살았다. 가슴이 아프고 터질 것 같거든 참지 말고 여기 와서 다 쏟아라. 나무가 엄마다 생각하고.” 딸은 그러겠다고 약속했습니다. 모녀는 하룻밤을 함께 하고 헤어집니다. 그리고 세월이 흐른 뒤 아카시아 꽃향이 산골에 가득 차오르던 5월에 친정어머니가 다시 딸네를 찾아왔습니다. “좋은 일이라도 있느냐? 얼굴이 많이 나아보이는구나.” 딸이 배시시 웃기만 합니다. “어쨌든 편해 보이니 좋다.” 이번엔 딸이 어머니 손을 잡고 뒷산 숲길로 이끌었어요. 그리고 그 나무 앞으로 안내했습니다. 딸이 나무를 바라보면서 엄마에게 말합니다. “엄마가 시킨 대로 했어요. 나무가 엄마라 생각하고 슬프면 와서 앙탈 부리고 통곡하고, 그랬더니 가슴이 뚫렸나 봐요.” “그래, 아주 잘했구나.”ㆍ 어머니가 나무를 살핍니다. 나무는 몇 년 사이 많이 쇠해 보였습니다. 지난 태풍에 오른쪽 큰 가지가 부러져 몽똑한 모습이 안쓰럽고, 한쪽 가지는 솔잎이 누렇게 말라 기진함이 역력합니다. 그런 나무를 향해 친정어머니가 심정을 전합니다. “미안하네. 우리 딸 설움 받아주느라 자네가 이리됐구먼. 그래도 자네가 사람 하나를 살렸네. 한없이 고맙네.” 나무에 정령이 있다고 믿는 어머니처럼, 통렌 수양을 하는 한의사 처럼, 나무도 연민을 내보내고 괴로움을 받아들이는 기쁨을 느꼈을지 모릅니다. 자연은 모든 존재를 대상으로 자비와 자애의 마음을 나누니까요···.가족으로 존재하는 이유 -소설가/daumcafe 이관순의손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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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8-24
  • 스위스, 안락사 현장 동행
    ‘극강 호우’에 숨죽이던 지난 7월, 제목조차 낯선 책 한 권과 마주했다. <스위스, 안락사 현장에 다녀왔습니다.> ‘조력 자살 한국인과 동행한 4박 5일’이란 부제가 달렸다. 작가 신아연은 어느 날, 생의 마지막 순간을 기록해 달라는 부탁과 함께 스위스 조력사(존엄사) 현장에 동행해 달라는 제안을 받는다. 그리고 난해하기 짝이 없는 죽음의 여행을 하면서 삶과 죽음이 동전처럼 붙어 있다는 사실을 성찰하고 이 책을 썼다. 독자의 이해를 위해 작가와 그분과의 대화를 간추려보았다. 2021년 8월 26일, 스위스 바젤에서 64세로 생을 마감한 한 남자가 있다. 독자라는 인연으로 스위스까지 동행했지만, 그전에는 얼굴 한 번 본 적 없던 사람이었다. 그분은 폐암 말기 환자로, 두 번의 시술을 받고 다시 재발해 작가와 연결이 될 때는 주치의가 예상한 여명을 석 달 남짓 남기고 있었다. 마련해 준 비즈니스석을 타고 스위스까지 ‘거창한’ 죽음 배웅에 나서면서 생각했다. 어떻게든 그의 마음을 돌려보리라고 마음을 다잡지만 결국 죽음의 침상에 눕고 마는 그를 보며 무기력과 혼란에 빠져들었다. 내가 그때 하나님을 만난 후라면 그분 손에 천국행 티켓을 쥐어드렸을 텐데, 그리고 천국행 티켓은 스위스에서 발행하지 않는다는 것을 분명히 알려드렸을 텐데, 모두 돌이킬 수 없는 일이 되어버렸다고 했다. "스위스로부터 안락사가 승인되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담담했어요. 그동안 깊이 생각했고 오래 준비해 왔기 때문인지 슬픔이나 아쉬움, 회한, 두려움 같은 감정은 없었어요. 남은 건 언제 생을 마감할 것인가만 결정하면 됩니다. 이제 버킷리스트 같은 건 없어요. 하루하루 편안하게 평범한 일상을 살다 때가 되면 스위스로 마지막 여행을 떠날 것입니다. ‘원 웨이 티켓’을 손에 쥐고.” 한 사람은 왕복 티켓, 또 한 사람은 편도 티켓을 쥔 그 엇갈린 경로를 머릿속에 그리며 스위스 여행을 시작했다. 현지에서 그분을 처음 만났을 때, 비행기를 오래 탄 사람처럼 약간 지친 모습일 뿐 말기암 환자라 할 만한 동태는 찾아볼 수 없었다. "신 작가님, 와 줘서 고마워요. 먼 길 오느라 고생 많았지요?" 그가 분위기를 띄우자 동행자들의 긴장도 누그러지면서 약간의 농담을 주고받을 수 있었다. “뭐야, 형님 멀쩡하구먼. 이렇게 건강한데 왜 이런 결정을 하고 그래요." "내가 너무 생생해 서운한가. 모두들 따끈할 때 날 만져 봐. 이틀 후면 싸늘하게 식을 테니까." 스위스 2일째, 조력사 단체에서 담당 의사가 찾아왔고, 마지막 면담을 가진 후 그는 이생에서 남기는 마지막 ㅅ사인을 했다. "두렵지는 않은데 어릴 때 달리기 출발선에 섰을 때처럼, 대중 앞에서 연설하기 전처럼 가슴이 두근거리고 긴장되네요. 어떤 면에선 설레기도 해요. 내일 아침에 데리러 온다고 했어요. 저승사자가 찾아오는 거지만, 엄밀히는 내가 찾아가는 거지요." 조력사 시행 하루 전, 생애의 마지막 밤이 찾아왔다. 눈치 챌만큼 감정의 기복을 보이지 않은 채 주위를 향해 담담하게 말했다. "오늘 밤은 잠들지 않으려고 해요. 인생의 마지막 밤을 잠으로 보내고 싶지 않으니까. 모든 순간을 깨어서 느껴보려고 해요. 지상의 모든 순간, 모든 마지막을." 날이 밝았다. 모두에게는 새날이지만 그분에겐 이생에서의 마지막 날이 밝은 것이다. 오전 10시경 안락사 시행장소로 이동했다. 동행자들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한 명씩 돌아가며 각자의 휴대전화로 그분과 사진을 찍었다. 일부러 환하게 웃고 최대한 고개를 꺾어 얼굴이 닿는 포즈를 취했다. 팔짱을 끼거나 한쪽 손은 그러쥐고 다른 손으로는 어깨를 얼싸안기도 하면서…. 그분은 표정이나 몸에 움직임이 없었다. 마치 동상을 배경 삼아 사진을 찍는 것처럼 움직이는 것은 우리뿐이었다. 우리의 호들갑에 잠시 희미한 미소를 짓던 얼굴에 쓸쓸한 표정이 짧게 스쳤다. 그 분은 농담을 거는 여유도 보였다. "야, 내가 무슨 연예인 같구나. 나하고 사진들 찍느라고 난리인 걸 보니." 정적이 흐르던 공간에 웃음이 깃털처럼 흩어졌다. 그곳 담당자가 말했다. "이제부터 충분히 시간을 드릴 겁니다.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을 모두 하고 작별 인사를 나눈 후 준비가 되면 저희를 부르시면 됩니다." 직원이 나가자 그분의 시선이 우리를 향했다. "이렇게 와 줘서 고마워요. 모두들 수고 많았어요." 담담한 어투로, 엷은 미소까지 얹으며 하직 인사를 했다. 이 순간을 위해 얼마나 ‘예행연습’을 했으면 저럴 수 있을까. 작가가 어디로 가시느냐고 물었다. "글쎄요... 어디든 가겠지요." "좋은 데로 가실 것 같나요?" "있다면 갈 것 같아요." "지금 누가 가장 보고 싶으신가요?" "어머니요. 부모님이 마중 나와 계시면 좋겠어요. 수목장을 할 테니 한 번 와줘요." 잠시 정막이 흐를 때 그분이 말했다. "이제 가야겠어. 밖에 사람을 불러요." 그러나 선득 나서는 사람이 없었다. "어서. 모두 배고플 거야. 내가 어서 가야 점심을 먹지." 그분은 마지막 순간까지 남는 자에 대한 배려를 잊지 않았다. 본인이 어서 떠나야 우리가 점심을 먹는다니. 조카가 마지못해 문밖에 사인을 보내자 작은 카메라와 거치대를 들고 담당자가 들어왔다. "이제 모두 조용히 하세요. 짧은 동영상을 찍어야 하니까요." 그리고는 그분을 향해 정면으로 카메라를 설치했다. 그리고 카메라의 녹음 버튼을 누르고는 자기의 말을 또렷하게 복창하라고 했다. I'm sick, I want to die. I will die. 나는 아프고 죽길 원하며 죽을 것이다 그분이 그 말을 따라 하자 녹화는 끝났고, 약물 팩이 걸렸다. "마음의 준비가 되면 밸브를 손수 돌리세요. 그러면 수 초 안에 편안히 잠드실 겁니다." 설명이 끝나기 무섭게 그분 스스로 밸브를 돌렸다. 순식간의 일이었다. 설명을 하던 남자도 흠칫했고 우리의 입에서도 짧은 탄식이 나왔다. "아, 졸리다..." 그 말을 끝으로 5~8초 남짓한 사이에 고개가 옆으로 떨어졌고, 입가에는 희미한 미소가 흘렀다.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삶과 죽음의 경계를 찰나의 순간에 넘어 스스로 생명을 내놓은 그분의 발을 작가는 식어갈 때까지 잡고 있었다. 두 번 다시 볼 수 없는 강렬한 체험이었다. 그러면서 깨달았다. 삶과 죽음은 따로 있지 않다는 사실을…. 그 분은 현지에서 화장 돼 지금 공주의 한 추모공원에 잠들어 있다. 디그니타스는 스위스 취리히의 ‘조력 자살(존엄사)’을 돕는 기관이다. 이곳에 가입한 한국 사람만300여 명. 그동안 10명이 이곳을 찾아 생명을 내려놓았다. 우리 사회에 안락사 논쟁이 물살을 타고 있는 것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스위스의 조력사 현장을 경험한 작가는 돌아와 기독교인이 되어 이렇게 말했다. “생명의 주인은 우리가 아니며, 태어나는 것도 죽는 것도 우리의 선택이 될 수 없다”라고. 그가 소중하게 느낀 것은 생명의 존엄이 아닌가 싶다. 조력자살은 죽음이 금기시 된 우리 사회에 어떤 변화를 부를까. -소설가/daumcafe 이관순의손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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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8-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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