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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노을처럼 아름답던 식탁의 축제
    사람들이 그렇게도 갈구하는 행복은 어디에 있는 걸까? 골드러시를 따라 미 서부로 향했던 그 많은 사람들은 무엇을 찾았을까. 공자는 제자의 질문에 ‘행복은 없다’고 간단명료하게 답합니다. 공자는 이에다 ‘인생에는 행복을 찾아가는 여정이 있을 뿐’이라고 덧붙였습니다. 공자가 말하고자 한 것은 행복이란 눈이 혹할 보석 같은 게 아니라고 내 나름 유추 해석합니다. 거대한 바위 밑 은밀한 곳이나 화려한 샹들리에 속에 숨겨진 것이 아니고, 우리가 사는 일상의 그 사소한 것들, 그 자체에 있음을 말하려 한 것으로 주석을 답니다. 행복은 더 이상 파랑새도 아니고 신기루도 아닌, 바로 우리의 일상에 흘러갑니다. 매일 우물에서 물을 길어오듯 행복도 일상이란 우물에서 길어 올려야 합니다. 돌아보니 그 많던 내 일상들이 다 허공에 흩어졌습니다. 우주의 어느 시간보다도 값진 것들입니다. 나이가 들면 외롭다고 합니다. 수많았던 그 일상들을 되돌릴 수 없고 함께 할 수도 없다는 것 때문이겠지요. 자식들로 들썩이던 공간은 소산하다 못해 적막감마저 흐릅니다. 전화도 오고 주말이면 찾아주니 반갑기도 하지만 잠시 머물다 떠나고 나면... 이젠 막내마저 직장 따라 지방으로 갔으니 그마저도 용이하지 않습니다. 옛말에 고개가 끄덕여 집니다. “마음이 지척이면 천리가 지척이고, 마음이 멀어지면 지척도 천리”라는 말... 형제간의 소통도 예전 같지 않습니다. 통화를 해도 쉽게 대화거리가 궁해지죠. 전 같으면 자식걱정에, 자랑에, 줄줄이 엮을 테지만 빈 둥지끼리 나눌 것은 그저 서로의 건강 걱정이나 해주면 끝입니다. 존경하는 선배와 만났습니다. 큰 아들은 미국에서 학위를 따고 현지에 눌러 앉은 지 11년째랍니다. 오늘은 손자가 화상통화를 할려나? “아참, 이번 주는 바쁘다 했지? 그래 바빠야지.” 일본에 있는 둘째 딸은 엊그제 통화에서 아이 교육이 힘들다고 넋두리하던데. “타지도 아닌 타국 생활이니 그렇겠지.” 제 둥지를 찾아간 자녀들한테 옛 일상을 더듬자고 할 일은 더욱 아닙니다. 그렇다고 넋두리만 하고 있을 수도 없습니다. 그것이 우리 인생이 거쳐야 할 여정으로 받아들여야 할 테니까요. 늘 아쉽고, 부족하고, 늘 그리움이 많은 게 우리네 인생인 듯합니다. 그래도 아직 남은 인생이 있고 걸어야 할 여정이 있고, 맞이할 일상이 남았으니 희망이란 새 한 마리 날아와 내 어깨에 앉아 주길 기대합니다. 그러다보니 더욱 간절해지는 것이 하늘의 은총입니다. 그분만이 내 남은 여정에 행복의 무늬를 함께 짜 주실 분이 시니까요. 식탁의 빈자리를 채워주시고 내가 입술을 열어 기도하면 응답해 주십니다. 성경을 펴면 말씀이 두런두런 대화를 나누자고 합니다. 예전에 느끼지 못한 행복감이 차오릅니다. 아이들과 즐기던 저녁 식탁의 축제는 흩어져갔지만, 그 분과 함께 하는 식탁의 축제는 노을빛처럼 아름답습니다. 오늘도 사랑과 그리움이 묻은 집에서, 가족의 기억들이 숨 쉬는 공간에서, ‘고뇌는 내가 갈아입는 옷 중 하나이니 나는 상처받은 사람에게 기분이 어떤지 묻지 않는다 나 스스로 그 상처받은 사람이 된다' (월트 휘트먼의 '나의 노래' 중에서 글 이관순(소설가/이관순의손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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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3-28
  • 시간보다 소중한, 함께 할 사람
    살면 살수록 강해지지 못하고 약해지는 게 사람입니다. 유독 사람만 신앙에 의지하는 것도 그 때문이겠지요. 몸집도 키도 작아지고, 꿈도 희미해지고, 늘어나는 건 나이테뿐입니다. 친구 병문안을 다녀오며 많은 생각이 따라왔습니다. “하나님이 새 생명을 선물하셨어. 받을 자격이 없는데 내게” 내 손을 잡으며 친구가 건넨 말입니다. 25일 동안 중환자실에 누워 있었다는 친구는 완전 다른 사람이 돼 있었습니다. 가장의 책무보다는 평생 자기가 좋아한 일에 빠져 살았지요. 전국의 명산을 섭렵하더니 세계의 명산 순례를 끝낼 만큼 건강도 좋았습니다. 이로 인해 가장으로서 아빠로서 지어야 할 짐을 고스란히 떠안은 건 아내였죠. 그가 만든 그늘 때문에 가족에게는 인기가 없었습니다. “당신 성당에만 나가요. 그 이상 더 바라지 않을 게요.” 모든 걸 체념하고 남편 구원에만 희망을 걸었지요. 그러한 아내에게 ‘죽을 때 가까워지면 고백해 볼게’라고 했던 그가 큰일을 겪더니 달라진 것입니다. 애나 어른이나 사람을 기분 좋게 하는 단어가 ‘선물’일 것입니다. 주고받는 쪽 모두를 만족시키는, ‘사랑’ 같은 귀한 어휘입니다. 친구를 눈물겹게 한 고결한 선물, 감당이 안 되는 분에 넘친 선물, 생명은 세상의 그 어느 것보다 값진 선물이겠지요. 작가 볼테르는 창조자가 내려주신 선물로 ‘생명’을 꼽았고, 프랜치스코 교황은 ‘시간’을 말했습니다. 친구는 나를 보기 며칠 전 병상에서 영화 ‘라스트 미션’을 보았다고 했습니다. 자신의 이야기를 콕 집어 말하는 것 같아 마음으로 많이 울었다고 합니다. ‘라스트 미션(the mule 노새)’은 어느 낙제점 가장의 참회록입니다. ‘시간보다 소중한 것’을 들려 줍니다. 실존인물을 각색한 주인공 역을 노장 클린트 이스트우드(사진)가 맡았습니다. 원제목에서 보듯 주인공 얼의 삶은 ‘노새’를 닮았지요. 한 가지만 생각하는 노새.... 가족과 떨어져 사는 삶에 익숙한 얼은 화훼농장을 가꾸는 일에 시간과 정성을 다 쏟아 붓습니다. 백합경연대회는 그가 기다려온 무대입니다. 대회마다 우승컵은 그의 차지였고, 그 순간 느끼는 행복감은 컸습니다. 이를 삶의 낙으로 삼았던 얼이 생의 끝자락에 이르면서 눈물을 짓습니다. 기회가 있었음에도 하지 못한 일들을 떠올리며 흘리는 눈물은 대개가 때늦은 ‘후회’입니다. 분신과도 같던 꽃 농장이 기울면서 깨닫게 된 것이지요. 어느 날, 가족에게 평생 좋은 일을 못해온 얼이 거금을 내밉니다. 꽃 농장이 압류될 만큼 쫄딱 망한 직후여서, 아내는 돈의 출처를 수상히 여깁니다. 비밀은 영화의 원제(原題)인 ‘mule'에 숨어있지요. 얼이 필요한 돈을 얻기 위해 마약 운반책을 맡은 것입니다. 운반 물품이 마약임을 모르는 채 말입니다. 얼은 가족에게 진 마음의 빚을 보상하기 위해 노새처럼 일합니다. 그러던 중 아내가 위독하다는 비보를 듣습니다. 매달 시간 엄수가 밀매조직의 생명임에도 얼은 병원으로 달려가 아내를 위로합니다. “사랑해 여보” 수십 년 만에 해보는 말이지만 낯설지 않습니다. 아내가 기뻐합니다. 얼은 아내의 눈을 보며 약속합니다. “앞으로 더 사랑할게 더 많이.” 그것이 불가능한 일이란 것을 알면서도. 범죄 조직은 규칙을 위반한 얼의 제거에 나섭니다. 이쯤에서 작가는 말합니다. “시간보다 더 중요한 하나는 시간을 함께 보낼 사람.“ 이라고. 너무 늦긴 했으나 이 진리를 깨달은 90세의 얼은 평생 등졌던 딸과 함께 할 시간을 그리며 마지막 배달에 나섭니다. 얼은 운반 물품이 마약임을 알게 되고 끝내 마약 단속국과 맞닥뜨리는 운명의 갈림길에 섭니다. 그는 어떤 길을 선택을 할까요? 원로 문학평론가 유종호는 최근 펴낸 신작에서 “삶의 곡절을 많이 겪었다고 각별한 지혜가 생기는 건 아니다”라고 했습니다. 오랜 세월 굽이쳐온 삶의 길목에서 찾아낸 인생의 지혜가 겸양으로 들리지만, 살고 또 살아봐도 알지 못할 게 인생이라는 고백처럼 들립니다. 퍼내고 퍼내도 줄지 않는 샘물 같이 말입니다. *글 이관순(소설가) 이관순의 손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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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3-25
  • 시간보다 소중한, 함께 할 사람
    살면 살수록 강해지지 못하고 약해지는 게 사람입니다. 유독 사람만 신앙에 의지하는 것도 그 때문이겠지요. 몸집도 키도 작아지고, 꿈도 희미해지고, 늘어나는 건 나이테뿐입니다. 친구 병문안을 다녀오며 많은 생각이 따라왔습니다. “하나님이 새 생명을 선물하셨어. 받을 자격이 없는데 내게” 내 손을 잡으며 친구가 건넨 말입니다. 25일 동안 중환자실에 누워 있었다는 친구는 완전 다른 사람이 돼 있었습니다. 가장의 책무보다는 평생 자기가 좋아한 일에 빠져 살았지요. 전국의 명산을 섭렵하더니 세계의 명산 순례를 끝낼 만큼 건강도 좋았습니다. 이로 인해 가장으로서 아빠로서 지어야 할 짐을 고스란히 떠안은 건 아내였죠. 그가 만든 그늘 때문에 가족에게는 인기가 없었습니다. “당신 성당에만 나가요. 그 이상 더 바라지 않을 게요.” 모든 걸 체념하고 남편 구원에만 희망을 걸었지요. 그러한 아내에게 ‘죽을 때 가까워지면 고백해 볼게’라고 했던 그가 큰일을 겪더니 달라진 것입니다. 애나 어른이나 사람을 기분 좋게 하는 단어가 ‘선물’일 것입니다. 주고받는 쪽 모두를 만족시키는, ‘사랑’ 같은 귀한 어휘입니다. 친구를 눈물겹게 한 고결한 선물, 감당이 안 되는 분에 넘친 선물, 생명은 세상의 그 어느 것보다 값진 선물이겠지요. 작가 볼테르는 창조자가 내려주신 선물로 ‘생명’을 꼽았고, 프랜치스코 교황은 ‘시간’을 말했습니다. 친구는 나를 보기 며칠 전 병상에서 영화 ‘라스트 미션’을 보았다고 했습니다. 자신의 이야기를 콕 집어 말하는 것 같아 마음으로 많이 울었다고 합니다. ‘라스트 미션(the mule 노새)’은 어느 낙제점 가장의 참회록입니다. ‘시간보다 소중한 것’을 들려 줍니다. 실존인물을 각색한 주인공 역을 노장 클린트 이스트우드(사진)가 맡았습니다. 원제목에서 보듯 주인공 얼의 삶은 ‘노새’를 닮았지요. 한 가지만 생각하는 노새.... 가족과 떨어져 사는 삶에 익숙한 얼은 화훼농장을 가꾸는 일에 시간과 정성을 다 쏟아 붓습니다. 백합경연대회는 그가 기다려온 무대입니다. 대회마다 우승컵은 그의 차지였고, 그 순간 느끼는 행복감은 컸습니다. 이를 삶의 낙으로 삼았던 얼이 생의 끝자락에 이르면서 눈물을 짓습니다. 기회가 있었음에도 하지 못한 일들을 떠올리며 흘리는 눈물은 대개가 때늦은 ‘후회’입니다. 분신과도 같던 꽃 농장이 기울면서 깨닫게 된 것이지요. 어느 날, 가족에게 평생 좋은 일을 못해온 얼이 거금을 내밉니다. 꽃 농장이 압류될 만큼 쫄딱 망한 직후여서, 아내는 돈의 출처를 수상히 여깁니다. 비밀은 영화의 원제(原題)인 ‘mule'에 숨어있지요. 얼이 필요한 돈을 얻기 위해 마약 운반책을 맡은 것입니다. 운반 물품이 마약임을 모르는 채 말입니다. 얼은 가족에게 진 마음의 빚을 보상하기 위해 노새처럼 일합니다. 그러던 중 아내가 위독하다는 비보를 듣습니다. 매달 시간 엄수가 밀매조직의 생명임에도 얼은 병원으로 달려가 아내를 위로합니다. “사랑해 여보” 수십 년 만에 해보는 말이지만 낯설지 않습니다. 아내가 기뻐합니다. 얼은 아내의 눈을 보며 약속합니다. “앞으로 더 사랑할게 더 많이.” 그것이 불가능한 일이란 것을 알면서도. 범죄 조직은 규칙을 위반한 얼의 제거에 나섭니다. 이쯤에서 작가는 말합니다. “시간보다 더 중요한 하나는 시간을 함께 보낼 사람.“ 이라고. 너무 늦긴 했으나 이 진리를 깨달은 90세의 얼은 평생 등졌던 딸과 함께 할 시간을 그리며 마지막 배달에 나섭니다. 얼은 운반 물품이 마약임을 알게 되고 끝내 마약 단속국과 맞닥뜨리는 운명의 갈림길에 섭니다. 그는 어떤 길을 선택을 할까요? 원로 문학평론가 유종호는 최근 펴낸 신작에서 “삶의 곡절을 많이 겪었다고 각별한 지혜가 생기는 건 아니다”라고 했습니다. 오랜 세월 굽이쳐온 삶의 길목에서 찾아낸 인생의 지혜가 겸양으로 들리지만, 살고 또 살아봐도 알지 못할 게 인생이라는 고백처럼 들립니다. 퍼내고 퍼내도 줄지 않는 샘물 같이 말입니다. *글 이관순(소설가) 이관순의 손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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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3-21
  • 희망은 한 마리 새
    많은 사람에게 희망을 준 장영희 교수(시인)가 세상을 버린 지 10년이 되었습니다. 그 작은 몸집으로 장애를 이겨내고 병마와 싸웠던 생전의 모습이 은화처럼 맑고 밝게 떠오릅니다. 세 차례 암이 발병하는데도 희망을 잃지 않고 의연했던 삶, 투병 와중에도 약속한 글을 쓰고 계획한 책을 펴내며 진한 감동을 전했습니다. 그녀는 자신을 걱정하는 사람들에게 "하느님은 다시 일어서는 법을 가르치기 위해 나를 넘어뜨리신다."며 희망을 절창했습니다. 그녀가 조선일보에 연재한 ‘영미시 산책’은 독자들의 큰 사랑을 받으며 화제가 됐었지요. 선정한 시들도 아름답지만, 그녀의 시 해설은 더욱 감칠맛 나는 삶의 매력으로 넘쳐났습니다. 그녀는 2009년 봄날, 친구인 화가 김점선과 두 달 간격으로 이 땅과 이별을 했습니다. 그녀의 책에 삽화를 그렸던 김점선, 따뜻한 시어로 영혼을 보듬는 시인 이해인(수녀)과 깊이 교류하며 많은 사람들에게 아름다운 기억을 남겨주었습니다. 그녀가 ‘영미시 산책’에서 소개한 시 가운데, 에일리 디킨슨의 ‘희망은 한 마리 새’는 고단한 인생을 사는 우리들 가슴에 위로와 잔잔한 감동을 일으켜 주었습니다. '희망은 한 마리 새/ 영혼 위에 걸터앉아/가사 없는 곡조를 노래하며/그칠 줄을 모른다... 모진 바람 속에서 더욱 달콤한 소리/ 아무리 심한 폭풍도/ 많은 이의 가슴을 따뜻이 보듬는 그 작은 새 노래 멈추지 못하리/ 나는 그 소리를 아주 추운 땅에서도/ 아주 낯선 바다에서도 들었다/하나 아무리 절박한 때도 내게 빵 한 조각을 청하지 않았다. 그녀는 ‘희망은 우리의 영혼 속에 살짝 걸터앉아 있는 한 마리 새와 같다’고 했습니다. 기쁘고 행복할 때는 잊고 살지만, 마음이 아프고 절망할 때 어느 새 곁에 와 손을 잡아줍니다. 희망은 우리가 열심히 일하거나 간절히 원하여 생기는 게 아니라, 상처에 새살이 나오듯, 죽은 가지에 새순이 돋아나오듯, 희망은 절로 생겨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제는 정말 막다른 골목이라 생각할 때, 가만히 마음속 깊이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귀를 기울여 보라고 합니다. 한 마리 작은 새가 속삭일 것이라며... “괜찮아, 이게 끝은 아닐 거야. 넌 해낼 수 있어.” 쉬지 않고 속삭입니다. 생명이 있는 한 희망은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봄이 빗속에 노란 데이지 꽃을 들어 올리듯/ 나도 내 마음을 들어 건배합니다/ 고통만을 담고 있어도/ 내 마음은 예쁜 잔이 될 겁니다' 그녀가 소개한 사라 티즈데일의 '연금술'이라는 시의 한 구절입니다. 시인은 우리의 마음을 잔에다 비교합니다. 때로는 희망과 기쁨을, 때로는 절망과 슬픔을 담는 잔으로요. 그녀의 마음속 잔에는 고통만 담겨 있을 텐데, 빗물을 금빛으로 변화시키는 데이지 꽃처럼 고통을 기쁨으로 바꾸겠다고 전합니다. 우리 마음의 잔에도 쓰디쓴 고통만이 담길 때가 많지요. 그것을 빛나는 지혜와 용기로, 평화와 기쁨으로 바꾸는 것이 삶의 연금술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머리로는 이해하면서도 그녀가 말하는 것처럼 삶의 연금술사가 되기란 그렇게 만만한 일은 결코 아닐 것입니다. 장영희 교수는 생전에 ‘희망은 하늘이 주신 선물‘로 표현했습니다. 떠난 지 10년이 지났는데도 그녀가 날린 희망이란 작은 새 한 마리는 오늘도 우리들 마음의 창을 두드립니다. “희망을 포기하지 마세요 넘어지더라도” 소포클레스도 “인류의 대다수를 먹여 살리는 것은 희망.”이라고 말했습니다. 우리가 책을 보고 좋은 영화를 보고 연극을 보는 것도 궁극적으로 좀 더 아름답게 살고 싶은 욕구 때문입니다. 그 욕구가 ‘희망이란 한 마리 새’로 우리의 마음에 날아와 앉는 것이지요. 소설 같은 긴 산문 글도 좋지만, 좋은 시를 찾아 읽는 습관을 들이면 어떨까요. 짧은 시간에 삶에 위로와 격려를 받는 데 이만한 것이 없을 테니까요. *소설가 / daum 이관순의 손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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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3-18
  • 내 가슴엔 칭얼대는 아이가 산다
    우리는 세대를 구분할 때 종종 실수를 저지른다. 애나 어른이나 한 명 한 명이 다른 인생이고 그대로가 작은 우주인데, 그렇게 살피지 못하고 한 묶음으로 처리할 때가 있다. 칠팔십 대를 생물 연령만으로 따져 사랑방 상노인으로 규정하고, 사오십 대를 싸잡아 아저씨로 병렬 처리한다. 한 사람 한 사람이 어마어마한 가치가 있는데도 말이다. 그러다 시 한 편이 눈에 들어왔다. ?사람이 온다는 것 실로 어마어마한 일이다 그는 그의 과거와 현재와 그리고 그의 미래가 함께 오기 때문이다 부서지기 쉬운, 그래서 부서지기도 했을 마음이 오는 것이다...? -정현종 시 ‘방문객’ 중 세월에 휘감겨 살아온 사람들을 향한 상찬 같기도 하고, 용하게 인생살이를 살아낸 사람들 삶에 현미경을 들이대는 것 같기도 하다. 일생을 산 사람은 한 사람 한 사람이 그대로 개선장군이다. 보이지 않은 가슴속에는 비바람에 시달리고 삭풍 한설을 견디느라 얼마나 많은 상처와 아픔을 보듬고 있을까. 인생을 뒤돌아보면 저마다 주어진 한 생애를 성심껏 사는 것이니, 그곳에 시시한 삶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사람들에 대한 선의는 인간의 의무이다. 사람이 사람을 선의로 대하지 못한다면 인간의 가장 중요한 의무 하나를 이행하지 않는 것이다. 우스꽝스럽고, 좀은 누추하고, 바보 같은 사람이라도 존중하지 않으면 나 또한 존중받기를 포기하는 행위이다. 사람의 외모는 다 달라도, 속 사람은 다 같은 귀함이다. 잘났든 못났든 사람에게는 각기 유아독존의 영역을 살아가니까. 누가 나를 정신적으로 피곤하게 하고, 혐오스럽게 해도 “저 사람의 사는 방법이려니”하고 넘길 일이다. 나이가 들수록 원만하게 더불어 사는 것이 지혜이지, 까칠하게 보이는 것이 잘 사는 삶이 아니다. “넌 사는 게 왜 그 모양이냐?” 걸핏하면 옆사람을 향해 핀잔을 주는 친구가 있었다. 하는 말이 좀 어설프고 말이 조금만 주제를 이탈해도 면전에서 쏴 부치는, 그래서 대포라는 별명을 얻은 친구였다. 그러던 그가 위암 수술을 받았다고 해서 집으로 병문안을 갔다. 체중이 10kg 이상 빠지고 머리에 모자를 눌러쓰고 있는 모습을 보자 하니 세월이 저렇게도 흘러가는가 싶었다. 자기 자신은 바꾸지 못하는 사람이 남을 바꾸겠다는 것은 논리적으로나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일이다. 유일하게 약발이 잘 듣는 한 가지가 있다면 사람을 인격체로 예우하고 사랑으로 감싸는 일 아니겠는가. 세상을 염세했던 쇼펜하우어도 '만인에게 할 일은 오직 선의로 대하라’는 것이었다. 여기서 시 하나 더, 장석주의 ‘대추 한 알’... ?저게 저절로 붉어질 리는 없다 저 안에 태풍 몇 개 저 안에 천둥 몇 개 저 안에 벼락 몇 개 저게 저 혼자 둥글어질 리는 없다 저 안에 무서리 내리는 몇 밤 저 안에 땡볕 두어 달 저 안에 초승달 몇 날 ? 대추 한 알에 우리 인생을 담은 시인의 관찰이 융숭깊고 광휘하다. 잘 생긴 대추나 못 생긴 대추나 똑같이 추운 밤을 견뎌냈다. 비바람과 천둥, 번개, 벼락을 맞으며 상처를 보듬었다. 하나하나 우주의 사랑을 듬뿍 받아 결실한 것들이다. 대추처럼 사람도 둥글둥글 되기까지, 제혼자 노력으로는 될 리가 없다. 오스스 몸을 떨며 무서리를 맞고, 쨍쨍 내려쬐는 땡볕에 그을려야 했다. 초승달이 둥근달이 되고 이지러지기를 또 얼마나 바라보며 기다렸을까. 시련을 이기지 못하면 붉고 둥근 대추 한 알이 절로 영글 수 없듯이, 그래서 사람이 사람을 위로하지 못하고 구박함은, 선의를 저버리는 것이다. 한 자리에서도 화려하게 먼저 피는 꽃이 있고, 뒤늦게 서리를 맞으며 꽃잎을 여는 꽃도 있다. 예로부터 사람을 불의로 예단함을 죄악이라고 했다. 물을 주고 북을 주는 것은 사람의 몫이라 해도, 열매를 맺게 하는 일은 오로지 하늘의 소관이 아닌가. 이 나이가 되니 이따금 살아온 내 몸이 기특하고 대견스러울 때가 있다. 까칠한 상전을 모시느라 몸인들 얼마나 고생이 심했겠나! 까다로운 성질을 못 이기고 세상에서 당하면 당한 대로, 아프면 아픈 대로, 몸을 구박하고 마구 굴려 많은 탈을 불렀다. 이제는 그렇게 쇠잔해진 몸을 상전으로 모시고 살아야 할 나이가 되었다. 이를 잘 깨치는 것이 천리를 아는 일이다. 바퀴의 위아래는 시간이 되면 바뀌는 법이다. 어제는 위였다가 오늘은 아래로 내려온다. 나이가 들면 마음도 잘 토라지지만 몸은 더 잘 삐친다. 대수롭지 않은, 사소한 일로 몸이 삐칠 때는 나 스스로 감당이 안 될 때가 있다. 큰 병이라도 찾아오면 어쩌나. 그러면서 깨달았다. 노인의 마음에는 칭얼대는 아이가 살고 있다는 것을. 칭얼대고 투정이 많은 어린아이의 엄마일수록 아이를 달래는 그만의 기술이 있는 법이다. 그 기술이 하루아침에 생겨날 리 만무다. 오랜 시간 아이에게 볶이고 속을 끓여야 쌓이는 내공이다. 우리의 삶도 그러야 하리라. 나이가 든다는 건 마음에 욕망을 거두고 감사의 파동을 높이라는 것이다. 노인의 일상을 편하게 가꾸는 방법이다. 인생에서 궁극적으로 유익을 주는 것은 감사한 마음에 있다. 우리는 몸을 내 것이라 착각하고 멋대로 대하며 살아오지 않았나? 일생을 거역하지 않고 나를 위해 헌신하고 충성한 몸에게 감사한 마음을 품을 때가 되었다. 몸과 분쟁하지 않고 서로를 긍휼히 여기며, 그래야 몸이 칭얼대지 않고 나도 편안하다. “못난 나를 위해 한평생 수고해줘 고맙네. 끝까지 잘 좀 부탁하네.” 오늘도 나의 가슴에는 징징대는 어린아이가 살고, 나는 그와 화해 중에 있다. -소설가/daumcafe/이관순의 손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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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3-14
  • 사랑은 언제까지 유효할까?
    산행 멤버 중에 두 사람의 영구 결번이 생겼다. 한 사람은 죽지 못할 만큼 사랑해서 집안 어른들의 반대에도 결혼을 강행하고 잘 산다 싶었는데, 10년 전 이혼하고 미국으로 떠난 여성이다. 결혼도 성격대로 급행으로 몰아치더니 헤어질 때도 한순간 쿨하게 돌아섰다. 그리고 1년 있다가 현지에서 미국인과 재혼했다는 소리가 들렸다. 또 한 사람은 평생을 한 여자를 가슴에 담고 비혼으로 산 남성이다. 중학교 선생이었던 남자는 학부모인 여자를 만나면서 그리움의 일기를 쓰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루어질 수 없는 나 하나의 사랑인 것이, 난생처음 한눈에 반한 여자가 유부녀이기 때문이다. 남자는 여자가 가난한 집안을 살리려고 열두 살 연상의 돈 많은 남자와 결혼한 것임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더 애틋한 일기를 썼다. 이를 눈치챈 친구들이 비극을 자초하지 말라고 많은 권면을 했지만 사랑이 질서 정연한 이론으로 성립되는 건 아니지 않은가. 남자는 마음에 품은 한 여자의 안부를 평생 먼발치에서 들으며 살았다. 같은 신도시에 사는 까닭에 운이 좋으면 스치기도 하고 짧은 인사를 나누는 정도였다. 학부모들과 만나는 자리에서 딱 한 번 마주 앉아 대화를 나눈 적이 있을 뿐이다. 남자는 입을 열려고 애쓰지 않았다. 가정이 있는 사람에게 할 말이 아니라는 생각에서다. 사랑은 가슴으로나 품을 일이라 자위하면서 그날의 일기를 썼다. 그렇게 5년쯤 지났을 때 여자의 남편이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들었다. 병원 장례식장에서 그녀를 만났다. 조문을 마치고 접견실에 잠시 앉아 그녀가 타다 준 커피를 마신 후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두어 달이 지난 뒤 우연하게 길에서 두 사람이 마주쳤다. 마침 큰일을 치른 뒤라 자연스럽게 길 옆의 스타벅스에 들어가 인사를 나누었다. 장례는 잘 치렀느냐고? 문상을 해주셔서 고맙다고…. 그렇게 일상의 얘기들을 주고받다가 여자가 시계를 보았다. 오늘 병원 예약이 있다고 했다. 두 사람은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왔다. 푸른 6월의 햇살이 눈에 부셨다. “날이 참 좋네요.” “그러게요.” “잘 다녀오시고 밝게 사셨으면 좋겠습니다.” 남자의 인사에 여자는 웃으면서 목례를 하고 헤어졌다. 그러고 또 얼마를 지났을까. 가을비가 추적되는 버스정거장에서 버스에서 내리는 그녀와 만났다. 전 같지 않게 얼굴이 창백해 보였다. 날도 차가운데 따뜻한 커피나 들고 가시라고 여자의 소매를 끌었다. 잠시 망설이던 여자가 따라나섰다. 남자는 그날 스타벅스에서 여자로부터 암투병 중인 새로운 사실을 전해 들었다. 수술을 받기 위해 곧 입원해야 한다는 말도 듣게 된다. 그리고 보름이 지났을 무렵, 수술 후 회복 중인 그녀를 병실로 찾았다. 고통이 심했는지 짧은 시간이 지났는데도 많이 수척해 보였다. 간호사의 말로는 수술은 잘 됐지만 말기암이라 예후를 잘 살펴봐야 한다고 했다. 사흘돌이로 남자는 여자를 찾았다. 쓸쓸하게도 그녀에겐 병상을 지켜 줄 만한 가족이 없어서였다. 가족이라고는 유일하게 직장에 나가는 여동생 하나뿐이었다. 죽은 남편이 형제가 없는 데다 하나뿐인 아들마저 신부가 되어 아프리카 오지에 나가 있었다. 귀국할 수 없는 형편임을 알고 아예 연락조차 하지 않았단다. 남자는 지극 정성을 다해 여자를 돌보았다. 그럼에도 회복이 안 되는 것이 너무 안타까웠고 여자는 남자의 곡진한 정성에 한없는 고마움을 느꼈다. 그러면서 태어나 처음으로 이성을 느끼기 시작했다. 그러던 어느 날 여자는 남자의 품에 안겨 마지막 숨을 가누고 있었다. 남자가 더 이상 미룰 수가 없다는 생각에 가슴속 깊이 묻어둔 말을 꺼냈다. “내 마음을 아시겠어요?” “예... 알아요. 고마워요.” 두 사람은 평생 하지 못한 말을 나누었다. 말은 짧았어도 천금을 나누는 시간이었다. 그리고 며칠 후 여자는 남자의 품에서 눈을 감았다. 남자는 여자가 떠난 뒤에도 가슴속 깊이 잔물결을 일으키는 사랑의 파동을 품고 살았다. 그 뿌리에 측은지심은 없었다. 만남이 짧다고 잊히는 것도 아니고, 애틋한 추억이 없다고 사라지는 것도 아니었다. ‘사물의 아름다움은 그것을 생각하는 마음에 달려 있다’라고 한 영국의 철인 데이비드 흄의 말을 되새기지 않더라도. 사랑에 유효기간이란 있는 걸까? 젊어서는 사랑으로 살고 늙어서는 정으로 산다거나, 정주고 살다가 나중에는 측은지심으로 산다는 말은 맞는 말일까? 반은 맞고 반은 틀리는 말 같다. 우리는 사명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사랑으로 사는 존재여야 하기 때문이다. -소설가/daumcafe이관순의 손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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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3-11
  • 남자가 남긴 토막말
    “어이” “이봐” “여기” 결혼을 앞둔 여자가 남자에게 한 가지 꼭 지켜줄 것이 있다고 했습니다. 아내를 이런 식으로 부르지 않겠다고 약속해 달라는 것입니다. 어떤 경우도 입에 올려서는 안 될 막말이라면서. 그동안 남자가 아내를 부르는 수많은 입을 보았는데 가장 혐오스럽고 비인격적인 호칭이라고 했습니다. ‘부부관계를 지키는 마지노 선’이라며 처음부터 금을 딱 긋고, 대신 이름을 불러달라고 했어요. 가장 가까운 남편으로부터 한 사람의 인격체로 존중받고 싶다는 것이 여자의 생각이었습니다. 그렇지 않고 어떻게 부부관계를 말할 수 있고 존중할 수 있겠느냐며 자존감 지닌 삶을 이야기했습니다. 약속대로 남자는 결혼 30년이 지날 때까지 그 약속을 잘 지켰습니다. 살다 보면 화가 치솟고 감정이 욱할 때도 있었겠지만, 그래도 남자는 말로 여자의 마음을 상하게 하지 않았습니다. 시댁 어른들 앞에서도 매번 이름 뒤에 ‘씨’를 붙였고 존댓말을 썼어요. 당시로는 흔치 않은 말법입니다. 그러던 남자가 딱 한 번 실수를 범하고 만 건, IMF 환란 때 사업이 부도에 몰리는 긴박한 상황에서였죠. 이 고비만 넘기면 회생이 가능할 텐데, 처가가 끝까지 외면하고 보증을 피하자 한 순간 감정이 폭발하며 나온 소리입니다. 거친 막말이 나오더니 아내를 밀쳐 넘어지게 했습니다. 한 순간 넋이 나간 남자가 정신을 차리고 주어 담으려 했지만 이미 쏟은 물이었지요. 그날이 하필 아내 생일과 겹쳤습니다. 잊었다가도 해마다 그날이 오면 생각나는 아픈 기억…. 남자 마음이 편할 리 없습니다. 계절이 찾아오듯 때만 되면 회한으로 떠오르는 토막말. 딱지가 앉기도 전에 다시 생채기를 내는 일이 반복됩니다. 사업한다는 남자한테 딸을 주고 싶지 않다던 장인어른의 말도 떠오릅니다. 말이 좋아 사업가지 호강은커녕 늘 넉넉하지 않은 살림으로 마음고생을 시켰고, 급전이 필요할 때면 처가로, 친구로, 돈 심부름도 다녔습니다. 생각은 심연에 가라앉은 부끄러움까지 휘저어 올리죠. 남편으로, 아버지로, 살뜰히 살펴 준 것도 없는데, 내색 없이 살림에 충실해준 아내가 고맙고, 알아서 잘 커서 스스로 짝을 만나 제 앞길을 찾아간 두 아들 딸이 대견스럽고 감사했습니다. 결혼 45주년이 되던 그해 봄. 부부는 딸이 결혼기념일이라고 마련해준 호텔에서 저녁 식사를 마치고 여느 날처럼 집에 돌아와 잠을 잤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마지막 날이 돼버렸습니다. 새벽녘, 잠을 자던 남자가 흉통을 호소하며 온몸이 땀에 젖을 때, 멀리서 구급차 소리가 들렸습니다. 협심증을 앓아온 남자는 곧바로 응급실로 실려 갔지만, 남자의 명줄은 거기까지였습니다. 창졸간에 삼일장이 치러졌습니다. 삼우제를 마친 아내가 남편의 유품을 정리하다가 책상 서랍 안쪽 밑에 깔려 있는 흰 봉투 하나를 찾았어요. 죽음을 예견한 걸까. 꼼꼼한 남편이 미리 써둔 유서였어요. 남자의 체온이 실린 육필은 첫 문장을 참회로 시작했습니다. “효은 씨. 약속을 못 지켜 미안합니다. 그것도 당신 생일에, 홧김에 쏟은 해서는 안 될 나의 막말에 용서를 구합니다. 평생 후회로 안고 살았습니다...” 두 번째 단락에는 어려서 죽은 큰 아들의 회한을 담았습니다. 네 살배기 아들 준이를 폐렴으로 잃고 한강에 나가 가루를 뿌리던 날, 그 밤의 아픈 기억을 말했습니다. 그 후로 한강 근처를 나가지 못하고 시린 가슴으로 몇 년을 방황할 때, 나를 보고 모두가 잊으라고 했었지요, 자식은 가슴에 묻고 그만 잊으라 했을 때... 당신만은 내게 그러지 않았습니다. “잊으려고 애쓰지 말아요. 그건 너무 가혹해요. 그다음 생기는 빈 공간은 어쩌려고요. 그 무엇도 대신해 채울 수 없어요.” 그러니 우리 죽을 때까지 옹이처럼 가슴에 박고 잊지 말자고 했습니다. 상처는 보듬고 싸매야지 뜯어내면 덧나게 마련이고, 시련은 견디고 이겨내는 것이라고 나를 다독일 때, 캄캄한 밤바다에서 한 점 빛으로 흔들리는 등대를 보는 심정이었습니다. 당신의 말이 맞았습니다. 시련은 운명이고, 운명은 떨치고 이겨낼 때 소망이 생긴다는 사실을. 의사가 말했지만 차마 당신에겐 전하지 못하고 당신 옆에서 눈을 감고 싶었습니다. 당신이 이 글을 읽게 된다면, 이젠 내가 당신께 당부할 차례입니다. 효은 씨, 끝이 정해진 책처럼 내 생의 길이는 여기까지입니다. 이별의 아픔이 크겠지만 마지막 책장을 넘길 때까지 삶의 시선을 꼿꼿하게 지켜주길 원해요. 앞서 가서 자리 잡고 그날의 당신을 기다리렵니다 용서해줘 감사하고, 사랑해줘 고맙고, 먼저 떠나 미안해요... -소설가/ daumcafe/leelett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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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3-07

실시간 기고 기사

  • 집은‘기억이 사는 곳’
    하루는 짧지만 눈물겹기도 합니다. 그러나 다시 돌아올 수 없다는 점에서 하루는 우주의 어느 시간보다 귀합니다. 그중에서 가장 값진 시간은 가족이 모이는 저녁시간입니다. 어느 정치인이 ‘저녁이 있는 삶’을 구호로 내걸었을 때 멋진 인문학적 성찰이라 반겼지요. 정말 가족이 모인 저녁만큼 복된 곳은 없습니다. 1년 365일 아침이면 흩어지고 저녁이면 모이는 곳... 냇물소리 같은 아이들의 재잘거림과 웃음소리, 때로는 서럽게 울기도 하고 그러면서 서로의 상처를 얘기하며 싸매주는 곳... 가정은 때 묻은 일상을 위로하고 웃음을 되찾아주는 행복제작소입니다. 생명이 있는 곳엔 집이 있습니다. 마을마다 사람들의 집이 있고, 산과 숲에는 동물의 집이 숨어 있습니다. 물고기들은 바다와 강에다 집을 짓습니다. 사람의 집에는 또다른 집들이 공생하고 있지요. 처마 밑에는 제비집이, 담장 한켠에는 길고양이의 집이 깃들어있습니다. 집은 생명이 안전하게 살아가기 위해 만들어낸 공간이고, 행복을 찾는 온갖 아이디어가 숨어있는 곳입니다. 전국을 돌며 추억의 ‘구멍가게’ 를 그린 화가 이미경은 “집은 기억이 사는 곳”이라고 했습니다. 특정한 어느 때를 떠올릴 때면 그 기억에는 항상 집이 있으니까요. 누구와 어떻게 살았는지, 어떤 추억을 함께 만들었는지, 그 기억이 숨 쉬는 공간이 집입니다. 가족이란 함께 기억을 만들고 기억을 공유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죽어서는 서로의 가슴에다 집을 짓고 들어가지요. 황동규 시인은 “죽음을 공유하고 있는 사람들이 가족” 이라 했습니다. 사랑과 그리움을 묻어 둔 곳. 세상에서 실패해도 보듬어 주는 곳, 남편의 사랑이 클수록 아내의 소망은 작아지고, 아내의 사랑이 클수록 남편의 번뇌는 작아지는 곳, 그 집을 가리켜 ‘기쁨과 슬픔도 같이 하니 한 칸의 초가도 낙원이라’ 고 말합니다. 미국인이 가장 사랑하는 노래‘홈 스위트 홈’ 미국의 국가인 ‘성조기여 영원하라.‘는 미국인들의 자긍심을 높이는 애창곡입니다. 하지만 미국인들의 정서에 더 깊이 녹아있는 노래는 ’Home Sweet Home‘입니다. “아무리 초라해도 내 집만 한 곳은 세상에 없다"고 한 노래죠. 이 노래를 작사한 사람은 극작가이자 배우였던 죤 하워드 페인입니다. 부모님과 어린 시절을 같이 한 뉴욕의 집 말고는 평생을 유랑하며 고향의 집을 그리워하다가 이 노랫말을 쓰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의 유해가 아프리카에서 뉴욕으로 돌아오던 날, '홈스위트 홈'이 연주되는 뉴욕항에서 체스터 아더 대통령(21대)이 그를 맞았습니다. 이유는 하나였죠. 앞만 보고 세계최고의 성공을 향해 질주하던 미국인들에게 그 어떤 가치와도 비할 바 없는 가정의 소중함을 일깨워 준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그는 워싱턴 근교 공원묘지에 안장돼서야 비로소 집 한 칸을 마련한 셈입니다. 묘비엔 이렇게 씌어 있습니다. "아름다운 노래로 미국을 건강한 나라로 만들어주신 존 하워드 페인. 편안히 잠드소서." 노래 가사는 이렇게 시작됩니다. “즐거운 곳에서는 날 오라 하여도/ 내 쉴 곳은 작은 집 내 집뿐이리/ 내 나라 내 기쁨 길이 쉴 곳도/ 꽃 피고 새 우는 집 내 집뿐이리/ 오~사랑 나의 집/ 즐거운 나의 벗 집 내 집뿐이리... 원 가사는 이렇습니다. “이 세상의 여러 즐거움들과 화려한 궁전 같은 곳들을 다닐지라도 비록 초라한 곳이지만 내 집 같은 곳은 없다네. 하늘로부터 오는 아름다움이 우리를 거룩하게 하는 그곳, 온 세상 다 배회하며 찾아다녀도.. 정말 내 집 같은 곳은 없다네(하략)...” 이 노래는 미국의 남북전쟁에서도 진가를 발휘합니다. 강(江)을 사이에 두고 남군과 북군이 양보할 수 없는 ‘프레데릭스버그 전투’를 이어갈 때입니다. 이 전투는 18만 명이 참전해 1만 7천명의 사상자를 낼 만큼 치열했습니다. 밤이 되면 사기를 높이기 위해 양 진영에서는 군악대 연주를 시작합니다. 그때 북군이 연주한 곡이 ‘홈 스위트 홈’입니다. 행진곡을 연주하던 강 건너 남군도 어느새 같은 연주를 따라합니다. 홈 스위트홈이 밤하늘에 울려 퍼지게 된 거죠. 이 연주는 고향집을 그리워했던 병사들의 심금을 울렸고, 마침내 남?북군 할 것 없이 강물로 뛰어들어 떼창을 부르는 진풍경이 전선의 밤을 메아리쳤습니다. 고향 집을 열망해온 마음이 적의 개념마저 잊게 한 겁니다. 결국 이 노래로 전선에는 하루의 휴전이 선포되는 위력을 보였지요. 그렇습니다. 시공을 넘어 가정보다 소중한 건 이 땅에 없습니다. 그럼에도 우리사회엔 가정을 위협하는 불행의 요소들로 차있다는 것이 비극입니다. 집은 있어도 돌아가고 싶지 않은 집이, 해체되는 가정이, 흩어지는 가족이 늘고 있다는 소식은 같은 푸른 하늘을 이고 있는 우리를 우울하게 합니다. <이관순의 손편지 . daun.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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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2-22
  • 아버지는 무엇으로 먹고 사는가
    우리 속담에 ‘부모 속에는 부처가 들어있고, 자식 속에는 앙칼이 들어있다’ 는 말이 있습니다. 부모는 자식을 무한 사랑하지만, 자식은 불효할 따름이라는 뜻이죠. 부모는 자식이 배부르고 따뜻한가를 늘 물어도, 자식은 배곯고 추위에 떠는 부모를 마음에 두지 않는다는 옛말도 있습니다. 꽃들은 나무의 아픔을 모릅니다. 비바람으로부터 보호하려는 나무의 헌신을 갓 피어난 꽃들이 기억할리 없지요. 독일 시인 안톤 시낙은 ‘우리를 슬프게 하는 것들’에서 ‘나의 사랑하는 아들이여, 너의 소행이 내게 얼마나 많은 불면의 밤을 가져오게 했는가?’ 가슴의 언어를 토합니다. 자식과 부모는 천성이 그런가 봅니다. 우리 건설업이 중동에서 건설신화를 만들던 1970년대. 사우디아라비아 정부가 KDI에 연구용역을 의뢰했었지요. ‘무엇이 한국 근로자로 하여금 하루 16시간 노동 하게 하는가?’ 석유부국 사우디가 장차 석유자원이 고갈될 때를 대비해 미래를 준비하기 위함이었죠. 그들을 궁금하게 했던 ‘한국인의 16시간 노동’을 가능케 한 것은 잘 살아보자는 ‘희망’으로 요약됩니다. ‘아, 잘 있거라 부산항구야...’ 부산에서 함정을 타고 월남 전선으로 떠나던 병사들은 불안한 심정을 노래로 달랬지요. 그럼에도 그들이 살아올 수 있었던 것은 ‘가시는 월남 땅 하늘은 멀더라도 한결같은 겨레 마음 님의 뒤를 따르리라’며 힘을 모아준 국민적 성원과 가족들을 위해 살아가야 한다는 염원 때문이 아닐까요?. 또 하나, 월남전의 한 상황입니다. 통증을 호소하며 죽어가는 부상병에게 차마 몰핀이 떨어졌다고 말할 수 없는 의무병이 대신 식염수를 놔주고는 “이제 괜찮아질 거야.” 희망을 주자 사르르 잠이 들더라는 얘기는 단순한 전선의 무용담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희망’은 지금 우리사회에 꼭 필요한 약발이니까요. ?… 고래 같은 아버지를 춤추게 하는 것들. 비록 학교 과제로 이뤄졌지만 자녀들의 편지는 고래같은 아버지들을 춤추게 했습니다. 천근으로 눌려 있던 어깨를 펴지게 해주었지요. 이런 것이 인문학의 학습효과입니다. 두 아버지가 내게 직접 전화를 주었지요. 좋은 과제를 내주어 고맙다고요. 가슴에서 포기했던 딸을 되찾은 것 같아 정말 기쁘다고도 했습니다. 학생들의 편지에서 발췌한 일부입니다. “아빠가 답장을 주셨네요. 편지 한 통이 아빠의 마음을 흐뭇하게 해드렸다니 정말 기뻐요. 그런데 아빠가 없는 친구가 있다는 걸 알았어요. 그 친구에게는 교수님이 편지를 대신 써 주시겠다고 했어요. 세상에는 감사할 일이 너무 많은데 전 너무 허영에 들떠 있었다는 걸 느꼈어요. 지금부터는 아빠의 희망이 되는 딸이 되겠어요. 어느새 많이 늘어난 흰 머리카락이 안타까워요. 오늘도 파이팅 하세요...” “아버지, 못난 아들입니다. 요즘 무척 힘드시죠? 매우 피곤해 보이십니다. 그런 가운데도 못난 아들과 가족을 위해 희생하시는 모습을 보면 마음이 아픕니다. 제가 어렸을 때 장기도 많이 두셨는데, 여의도에서 자전거도 많이 타고.... 커서는 추억거리가 아무것도 없네요. 아버지 언제 우리 둘이 산이라도 함께 타요. 막상 편지를 쓰자니 아버지에 대해 너무 모른다는 생각만 듭니다. 몰라서 죄송합니다.” “스물넷의 나이에 아버지에게 글을 쓰니 기분이 묘합니다. 늘 말썽만 피우고 다닌 저였잖아요. 언젠가 거리에서 시비가 커져 경찰서에 갔을 때 아버지께서 뒤치다꺼리를 하셨던 일이 기억납니다. ”젊었을 땐 이런 것도 경험이다. 어깨 펴라.“ 말하시며 제 어깨를 툭 치셨죠. 그날 밤 주체할 수 없이 눈물을 흘린 후 제 생활은 바뀌었습니다. 아버지는 언제나 제게 ‘왕’이십니다. 앞으로 좋은 아들이 되겠습니다....” “아빠가 돌아가신 후 많은 게 변했어요. 웃음이 사라졌고, 아빠란 단어가 사라졌어요. 계실 때는 아무렇지도 않던 일이 하나하나 상처가 되더군요. 지금도 좋은 걸 보면 아빠에게 선물하고 싶은 생각이 들어요. 그래서 엄마에게 더 잘하려고 하지만 잘 안 되네요. 전 항상 아빠가 지켜보고 계시다는 생각을 하며 살게요. 아빠에게 전달 안 될 걸 알면서도 썼어요. 봉투에다는 ‘하늘나라의 아빠에게’ 라고 썼어요. 아빠, 정말 그립습니다....” <소설가 이관순의 손편지 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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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2-19
  • 역사의 덫에 걸린 남자
    은혜를 모르는 사람은 없어요. 갚아야 할 때를 애써 몰라 할 뿐. 원래 인간은 배은망덕한 존재입니다. 동시에 남의 배은엔 혀를 차는 존재죠. 망덕으로 덮어씌우는데도 능하답니다. 그러니 애초 은공으로 엮일 자리엔 비켜서는 게 상책입니다. 하지만 인간사를 그 같은 단순 셈법으로 풀기엔 역부족입니다. 사노라면 알면서도 역사의 덫에 말려드는 아픈 경우가 있어요. 올가을 단종의 혼이 어린 영월 청령포를 바라보며 떠올린 단상입니다. 사약을 내리라 충동한 사람, 모양새를 만들어 사약을 내린 사람, 사약을 들고 찾아간 사람, 시신을 수습해 무덤을 만든 사람, 이들 모두 은공의 그물 짜기에 가담한 사람들입니다. 세조 3년에, 금성대군이 모반을 기획했다는 고변이 들어온 후 넉 달간 조정은 피로 물듭니다. 주군인 단종을 사사하여 모반의 뿌리를 뽑으라는 정인지, 신숙주의 주청을 받아 세조는 사약을 내립니다. 조정은 사약을 받고 승하한 어린 단종의 육신을 강물에 던진 뒤 시신을 거두는 자 3대를 멸한다는 어명을 내렸지요. 물위에 뜬 옥체가 물길 따라 빙빙 돌다 되돌아오고 그때마다 곱고 여린 열손가락이 수면에 떴습니다. 이를 통곡한 영월 호장 엄홍도가 한밤에 시신을 수습해 노모를 위해 준비해둔 관에 옥체를 염하여 장사를 지냈습니다. 역사는 그의 충절을 높이 사 충의공이란 시호를 내렸지요. 하지만 한 사람이, 역사의 기록에서 빠졌어요. 영월로 귀양 가는 단종을 호송했고, 유배지로 사약을 들고 갔던 의금부도사 장방연입니다. 주군을 배은하고 은공의 가시밭길을 걸은 사람의 고뇌는 무엇일까? “천만리 머나먼 길에 고운 님 여의옵고/ 내 마음 둘 데 없어 냇가에 앉았으니/ 저 물도 내 안 같아야 울어 밤길 예놋다.” 그가 남긴 시조에는 단종을 향한 애끓는 충심이 절절하지만, 역사는 그의 행적을 지웠습니다. 240년 후 쓰인 숙종실록에 한 차례 이름이 오를 뿐이죠. 때마침, 서울에서 11월 8일까지 국립창극단이 무대에 올린 팩션 창극 ‘아비, 방연’과 만났습니다. 계유정란을 배경으로 군권을 노린 수양대군의 책사 한명회에 간계로 역사의 덫에 빠지는 왕방연을 그렸습니다. 극은 강직한 충신이 주군을 저버릴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부성애’로 풀면서 굽이치는 감동과 굵은 서사를 전합니다. 난세의 영웅이 될 건가. 딸을 지키는 평범한 아비가 될 건가. 신하된 신념과 현실의 삶 사이에서 고뇌한 아버지 왕방연을 부부예술가 서재형(연출), 한아름(작)이 그의 숨은 삶을 복원시켜 역사의 결을 다듬었습니다. 한 밤 북한산 기슭에서 수양대군이 어린 사슴의 목에 칼을 꽂으며 말합니다. “김종서를 비롯한 불충한 자들을 베고 어지러운 종사를 바로 세우려 한다. 그대들 뜻은 무엇인가?” 한 무리 사내들이 소리 높여 “忠!”을 외칩니다. 이제 수양은 조카를 폐위하고 스스로 왕이 되는 운명의 길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단종이 총애한 무인 방연의 운명도 마찬가지입니다. 혼례를 앞둔 어린 딸을 지키기 위해 명을 받드는 아비니까요. 혼례 날 밤에, 단종 복위를 모의한 혐의로 사위가 체포되면서 또 다시 광풍이 붑니다. 딸이 공신노비로 보내지는 것만은 막아야 하는 아비의 고뇌는 깊어지고, 간특한 한명회가 사약을 전하는 사명을 주지요. 방연은 딸을 구하려고 한양에서 영월까지 달려갑니다. 땅이 일어나고 강물이 출렁이도록 사흘 밤낮 말을 달리는 아버지 방연의 모습에서 오늘도 가족을 위해 치달리는 현대의 아버지들이 떠오릅니다. 이 시간도 어디선가 말 달리는 슬픈 아비가 있겠지요. 덫에 걸린 무대 위 남자가 고통을 창으로 쏟아냅니다. 창극은 극도의 정한을 표현하지 못할 때 판소리로 풀었습니다. 오로지 소리의 힘으로, 포효하는 한 인간의 통한을 해일처럼 밀어내자 객석 여기저기 흐느끼는 소리가 높아집니다.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라 했지요. 세조실록(세조3년 10월 21일)은 단종의 사인을 자살로 변조했습니다. “임금께서 명하시길 송헌수는 교형에 처하고 나머지는 논하지 말도록 했다. 노산군(단종)이 이를 알고 스스로 목메어 졸하니 예로써 장사를 지냈다.” 세자로 태어나지 않았으면 좋았을 것을. 565년 전 단종이 승하한 10월 그날처럼, 올가을도 청령포를 둘러싸고 흐르는 서강(西江)은, 어진 햇볕아래 남빛 물결을 반짝이며 무심히 흐를 뿐입니다. (글 이관순 소설가/ daumcafe/ leerett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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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2-15
  • 기억은 추억이 되고 추억은 화석이 되고
    인간만이 지닌 고귀한 것은 무엇일까? 누구는 ‘지능’이라 하고 혹자는 ‘말’ 또는 ‘글’ 이라고 합니다. 이 모두 창조주의 귀한 선물이지만 인생을 살면서 ‘기억’ 만큼 소중한 것도 없습니다. 지능이 모자란 사람도 행복할 수 있고, 말이나 글이 서툴러도 사는데 지장이 없습니다. 나름 행복감을 느끼며 살 수 있어요. 하지만 기억은 그 자체만으로 행불행을 나누는 선이 됩니다. 기억을 상실한다는 것은 한 인생이 사라지는 것과 같습니다. 기억한 만큼이 한 사람의 인생이 되고 존재한 삶이니까요. 기억은 부부, 가족, 친구, 사회를 연결하는 회로입니다. 기억의 공유가 없으면 사랑마저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그래서 죽음 다음으로 공포를 갖게 하는 것이 기억상실증입니다. 치매를 두려워하는 이유가 되겠지요. 언어 능력이 뛰어난 사람이 언젠가부터 익숙한 단어가 떠오르지 않고 수십 년째 사는 동네에서 길을 잃고, 그러다 어느 날 기억이 뿌리째 뽑혀 나간다고 생각해 보세요? 온몸에 소름이 돋을 일입니다. 치매 환자 가족이 기억을 살리려고 옛 추억을 꺼내는데, 한 노인학자는 치매 환자에게 과거 일을 자꾸 묻는 건 좋은 방법이 아니라고 합니다. 그 보다 정답이 없는 열린 질문이 효과적이라는군요. “엄마, 여기 온 거 기억나요?”라고 묻지 말고 “엄마, 꽃이 참 예쁘죠?” 이렇게 지금의 얘기, 아무 말을 해도 답이 되는 말을 권합니다. 이런 대화가 언어를 잃은 치매환자와 관계를 지속할 수 있게 해준다고 조언합니다. 노인이 되면 외로움을 탑니다. 그 모습이 안타깝고 슬프지만, 뒤집으면 기억이 온전하다는 방증이기도 해요. 지난 9월 ‘너무 외롭다’고 광고를 낸 영국의 한 할아버지 이야기에 눈물이 핑 돌았습니다. “저는 사랑하는 아내이자 영혼의 동반자인 아내 조(JOE)를 잃었습니다. 친구나 가족이 없어 대화를 할 사람이 없어요. 24시간 계속되는 적막이 견딜 수 없는 고문과 같습니다. 나를 도와 줄 사람 없나요?” 은퇴 물리학자 윌리엄 씨(75)는 외로움에 사무친 나머지 자택 창문에 이렇게 쓴 포스터를 내걸고 도움을 호소했습니다. 슬하에 자식 없이 아내 조와 35년을 사랑하며 살았다고 합니다. 하지만 코로나 봉쇄령이 내려져 있던 5월, 췌장암을 앓던 아내가 갑자기 떠나자 삶이 아파오기 시작했습니다. 생의 동반자를 잃은 뒤 밀려오는 외로움과 사투를 벌여야 했습니다. 적막강산인 집에서 하염없이 아내 사진만 쳐다보며 말입니다. ‘기억’ 은 이렇게 무섭기도, 슬프기도 합니다. 누구는 기억 상실로 가족을 불행에 빠뜨리고, 누구는 온전한 기억 때문에 절절한 그리움을 떨칠 수 없다고 호소합니다. 문학평론가 고 김현은 기형도 유고시집 ‘입속의 검은 잎’에 붙인 해설에 “사람은 두 번 죽는다. 한 번은 육체가 죽을 때, 또 한 번은 이를 기억하는 이들이 모두 사라질 때”라고 썼어요. 그렇다면 윌리엄 씨의 기억엔 여전히 살아 있는 아내의 두 번째 죽음이 남아있으니, 얼마나 긴 세월을 외로워하면서 또 그리워해야 할까. 내게도 살아 있는 기억 하나가 있습니다. 3형제로 구성된 한국의 3인조 록 밴드 ‘산울림’이 30년 활동을 접고 해체하면서입니다. 2008년 11월 발매된 ‘산울림 전집 박스 세트’ 에 남긴 보컬 김창완의 글은 아직도 명료한 기억으로 빛납니다. “이제 바람은 멈추었다. 모든 색은 합쳐져 하나의 작고 검은 마침표가 됐으며, 모든 빛은 합쳐져 수억 겁의 미래로 가버렸다. 산울림, 그들의 노래는 화석이 되었다.” 겨울초입에 친구 아내가 하늘나라로 이사를 했습니다. 눈 내리는 적막한 들판을 혼자 걷는 순례자의 모습으로. 퍽이나 좋아한 슈베르트의 ‘겨울 나그네’ 선율을 사뿐히 지르밟으며 조심조심 방문을 열고 갔습니다. 기억은 늘 애잔하고, 슬프고, 그립습니다. 옷은 낡아지면 갈아입지만, 기억은 추억이 되고 추억은 화석이 되어 풍화를 이깁니다. 생전에 했던 말대로, 이방인처럼 찾아온 그대여! 이방인처럼 떠나간 그대여! -글 이관순 소설가/ daumcafe leerett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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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2-05
  • 키리에 엘레이손 Kyrie Eleison
    8월은 잔인했습니다. 광복절 날 미국이 아프가니스탄 철수를 발표하자 마자 탈레반이 전광석화처럼 진격하더니, 베트남 사이공(호치민)처럼 눈 깜짝할 사이 수도 카불의 함락 소식이 들렸습니다. 국경을 향한 육로마다 수백만의 난민 행렬이 늘어섰습니다. 주변국은 철조망을 두르고 장벽을 치고 국경을 봉쇄했는데도 꾸역꾸역 밀려드는 아프간인들. 막힌 건 땅길에, 하늘 길도 마찬가지입니다. 카블 공항엔 수천 명의 아프가니스탄인 으로 장사진을 쳤습니다. 미군 수송기에 매미 떼처럼 붙어 몸뚱이 하나를 쑤셔 넣으려는 사람들의 비장함이 삽시에 비행장을 아수라장으로 만들었지요. 움직이는 수송기에 매달리다 떨어지고 깔리고, 구명대 하나를 놓고 죽기 살기 매달리는 모습에서 1950년 12월 흥남 부두에서 사투를 벌이던 피난민들이 오버랩 됩니다. 그때나 이때나 똑 같은 아우성···. 그 시각. 한쪽에선 참혹한 인간 도륙이 시작됐습니다. 탈레반이 동족을 줄 세워 꿇어앉히는 순간, 총구마다 불을 뿜습니다. 볏단처럼 쓰러지는 사람들에 다가가 2탄 3탄을 쏴대는 광란의 춤판이 펼쳐졌지요. 그 눈 뜨고 볼 수 없는 잔혹한 동영상이 인터넷 SNS 공간을 유령처럼 떠돌았습니다. 평화롭던 일상이 깨지며 정신까지 너덜너덜해진 사람들. 아프간은 사람이 살 수 없는 저주의 땅으로 변해 버렸지요. 그런 가운데 또 한쪽에서는 숭고한 생명이 꽃핍니다. 콩나물시루 같은 수송기 안에서 여인의 출산 소식이 들렸습니다. ‘오, 아가야 어쩌자고 이 시각에 태어나니?’ 탄식이 명치 끝을 가시가 돼 찌릅니다. 그래도 찾아온 생명이니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 축복 송은 불러주어야 하겠지요. 무구한 생명 앞에 불행 운운하는 것은 온당하지 않으니까요. 벌써 비행 중인 수송기가 고향이 된 아기가 셋입니다. 최고의 행복 속에 불행은 잉태되고 최악의 상황에도 행복이 배태된다. 아, 이것이 우리네 삶의 현장임을 여실히 짚어줍니다. 기내의 생명 탄생은 까마득한 옛 기억까지 소환합니다. 무너진 집터를 지나다 마주친 경이로운 순간의 기억. 깨진 기왓장을 들추자 짓눌린 풀포기의 가녀린 얼굴에서, 생명의 경건함에 소름이 돋았어요. 베트남 패망 때의 모습도 떠오릅니다. 1974년 4월 30일. 사이공 함락 직전의 긴박했던 곳은 미국 대사관입니다. 밖은 대사관으로 들어가려는 사람들로 아수라장이고, 대사관 옥상엔 흙빛 얼굴들이 하늘을 봅니다. 얼마나 급박했으면 헬리콥터가 앉지도 못하고 상공을 맴돌다 밧줄만 내렸을까. 한 사람이 밧줄에 매달리기 무섭게 헬기는 상공으로 치솟고, 대사관의 성조기가 내려졌습니다. 미군 철수의 마지막 종언이었죠. 미국 대사관에 들어왔으니 살았다고 안도한 그 많던 사람들은 어떻게 되었을까. 그 안에는 현지의 건설 현장 철수를 지휘하다가 미처 나오지 못한 두 분의 우리 회사 직원들도 있었습니다. 해안선이 긴 베트남은 바다로 뛰어든 난민 100만 명을 받아냈습니다. 세계 언론을 뜨겁게 달군 ‘보트 피플’의 슬픈 탄생입니다. 그중 운 좋은 사람은 수장을 면했지만, 아프간에는 뛰어 들 바다도 없습니다. 베트남 패망을 연민의 눈으로 지켜본 사람은 월남에서 사선을 넘어 온 32만 참전 용사들입니다. 그렇게 비원을 안긴 베트남은 그 후 기적처럼 살아났습니다. 깨진 기왓장 사이로 생명이 꽃을 피웠습니다. 광기의 칼춤이 난무하는 아프가니스탄은 언제라야 나라다운 모습을 되찾을 수 있을까? 한국처럼, 베트남처럼, 세월이가면 아프간 사람들도 희망을 노래할 날이 오면 좋으련만. 이념보다 무서운 건 신념입니다. 71년 전 한국, 47년 전 베트남이 이를 경험했습니다. 다음은 아프가니스칸 차례입니다. 허망한 이념과 신념의 너울을 벗고 기적의 날이 오기를 기원합니다. 두려움을 키우는 건 지금의 어려움이 언제 끝날지 모르는 막연함입니다. 그래도 한강의 기적이 있었고, 메콩 강의 축복이 있었으니 그날을 꿈꾸며 피투성이가 돼 있더라도 살아만 있으라. 살아만 있으라···. ‘키리에 엘레이손(kyrie Eleison)’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소설가 / daumcafe leeretter 이관순의 손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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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1-25
  • 나는 무엇을 지키는 자인가?
    사람들이 쓰는 언어에서 그들이 사는 세상이 보입니다. 예나 지금이나 ‘가정’ ‘가족’ 이상의 소중한 가치를 지닌 것이 있을까 싶지만, 사회가개인 중심의 늪에 빠지면서 이기적 생각이 일상을 지배합니다. 고통을 주려고 상대 가족을 범죄 대상으로 삼는 건 영화 속 얘기만이 아닙니다. 자녀를 납치하고 아내를 폭행하고 가족을 볼모로 한 범죄가 계속 느는 것은 사람에게 가장 아픈 곳이 가족이어서죠. 우리 생활에 가족이란 용어가 일상화된 것은 그리 오래되지 않아요. 전엔 투박하지만 정감 있는 ‘식구(食口)’란 말을 많이 썼는데, 언젠가부터 가족이란 말로 대체된 모양새가 됐습니다. 가족은 사전적 의미로 ‘부모, 자식, 부부 관계로 맺어져 한집에서 함께 생활하는 공동체’라는 뜻이지만, 식구는 ‘같은 집에서 같이 살며 끼니를 함께 하는 사람’을 이릅니다. “여섯 식구가 코딱지만 한 방 두 칸에 기거하면서 아버지는 식솔의 입들을 책임지느라 평생을 힘겹게 사셨다….” 필자 소설 중 가난과 싸우던 시절, 먹는 일만큼 중한 것은 없었죠. 그래서 아버지는 딸린 식구의 입을 책임지는 막중한 짐을 지셨어요. 식솔, 가솔 등의 말은 다 가장의 무게를 느끼게 하는 아버지 용어입니다. 가족이 먹는 입을 따지는 식구보다 격이 있어 보이기도 하지만, 끈끈한 정분과 생명력은 ‘식구’가 더 우직하면서도 살갑습니다. 먹고사는 생존 운명체로서의 질긴 연(緣)입니다. 식구와는 또 다른 의미의 ‘생구(生口)’란 말이 있습니다. 식구뿐 아니라, 노비나 식객, 집에서 기르는 소, 닭, 개 같은 짐승들을 통틀어 ‘생구’라 불렀어요. 함께 기식한다는 뜻입니다. 조선일보 인기 칼럼을 연재한 이규태 선생의 ‘한국인의 의식구조’에서 찾은 말입니다. 선생은 “이 세상에서 짐승을 사람과 동격으로 표현하는 말을 가진 나라는 아마 우리 외엔 없을 것”이라고 통찰했지요. 소설 <대지>로 노벨문학상을 탄 펄벅 여사가 오래전 한국에 왔을 때, 소 달구지를 모는 지게꾼에게 큰 감동을 받았다고 했죠. 다큐 영화 <워낭소리>에 전율했던 그 짠함이 펄벅의 감성을 흔든 겁니다. 소는 40년을 동고동락한 할아버지의 식구요 생구입니다. 할아버지는 소가 무거워할까봐 얼마 안 되는 짐도 나눠지고, 소가 늙어 죽으면 묘도 써 줍니다. 그 공생의 삶이 눈물겹도록 아름다웠어요. 지구의 육지 면적에서 매년 남한 면적의 60%만 한 사막이 늘어나고, 아마존 밀림은 매년 여의도 면적의 6배가 사라진답니다. 이 모두 공생의 삶을 저 버린 인간의 탐욕이 빚는 참사입니다. 사람이 지켜야 할 기본은 무엇일까? 이에 오바마 대통령이 답합니다. 2004년 민주당 전당대회에서 청중을 감동시킨 연설에서죠. 정치적 수사 가득한 연설문 대신, 가슴의 언어로 국민 마음을 흔들었습니다. 텍스트는 인류 최초의 살인사건을 다룬 성서입니다. 신이 아벨의 제사를 즐겨 받는데 화가 난 형 카인이 동생을 죽이자 카인에게 묻습니다. “네 동생 아벨은 어디 있느냐?” 그 대답을 21세기의 오바마가 대신한 것입니다. “만일 시카고 남부에 글을 읽지 못하는 소년이 있다면, 그 아이가 제 아이가 아니어도 그 사실은 제게 중요합니다. 만일 어딘가에 약값을 지불하지 못하는 노인이 의료비와 월세 중 하나를 택해야 한다면, 그녀가 제 할머니가 아니라도 제 삶마저 가난해집니다. 만일 어떤 아랍계 미국인이 정당한 법적 절차 없이 체포당했다면, 그것은 제 시민권에 대한 침해입니다...” 전 미국인이 숨을 죽입니다. 그들 마음 깊은 곳에 숨어 있는 자비와 희망에 불씨를 살려주었기 때문이죠. 강퍅한 세상에 찌든 사람들의 눈물샘을 자극하면서 오바마의 연설은 절정을 향합니다. “저는 다음 같은 근본적인 믿음이 있습니다. 저는 제 동생을 지키는 자입니다. 저는 제 여동생을 지키는 자입니다. 이것이 바로 이 나라를 작동하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의 미국이란 가족으로 모이게 하는 것입니다.” ‘저는 동생을 지키는 자’란 말은 구약성서 창세기 4장에 나옵니다. 오바마는 카인처럼 “내가 동생을 지키는 자입니까?” 항변하지 않고 성서를 깊이 묵상한 지혜로 가족애와 이타적 사랑을 말했어요. 결국은 가족입니다. 내가 우선할 일은 먼저 나를 보호하고 가족을 지키는 일입니다. 세상의 많은 문제는 가족을 지키지 못하면서, 이타적 사랑을 저버리는 이기적 행위에서 생성됩니다. 동시에 우리가 지켜야 할 가치는 ‘생구’입니다. 통섭을 주창하는 최재천 교수의 ‘호모 심비우스(공생인)’와도 통하는 말입니다. 그것이 내 가족과 인류와 자연을 지키는 진정한 공생인이 되는 길이 아닐까? -소설가/ daumcafe 이관순의 손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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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1-22
  • 달빛 그네 타기
    정월 대보름 밤에 달빛 열차를 타고 옛적 그 시골 길에 내렸습니다. 코앞에 떠오른 휘영청 밝은 달과 별빛이 교교히 흐르는 곳. 온 천지가 몽환적인 고향에 말입니다. 대보름이 되면 화롯불로 피어나는 따스한 얼굴들이 있습니다. 달빛을 밟으며 이집 저집 밥을 얻으러 다닌 머리 큰 ‘짱구’, 눈이 작은 ‘졸려’,몸을 배배 꼬던 ‘지렁이’ 친구, 학교 운동장에서 달빛그네를 타던 여자 동창들... 다들 어디서 살까? “워얼∼얼얼얼” 들판 위로 솟은 보름달을 보고 우리 집 황구 워리가 길에 나와 짖기 시작합니다. 이를 받아 건너 마을 개들이 따라 짓고 동서사방 개 짖는 소리로 가득할 때, 밤의 서정은 말갛게 핀 숯불같이 따스합니다. 어른들은 그 소리가 청승맞다고 작대기를 휘두르지만 내겐 교회의 새벽 종소리처럼 아름답기만 했지요. 청량한 들판으로 개 짖는 소리가 퍼지고 반향 돼 돌아올 때 그 아득함과 아련함이 달빛에 실려 떠다닙니다. 보름달만 보면 짖던 워리. 쩌렁쩌렁한 목소리가 달빛그네를 타고 이 밤에 출렁입니다. 워리에게 달은 두려움이었을까? 행여 그리움에 운 워리의 곡성은 아니었을까? 문득 워리가 그리워집니다. 달빛이 길어 올린 열의 아홉은 그리움입니다. 슬픔, 사랑, 이별 같은. 그리움은 운명처럼 차지게 따라붙어요. 인생 항로에서 잃은 것들에 대한 연민과 찾지 못한 것들의 갈망이 달빛 속에 숨고르기를 합니다. 떠나간 부모님이, 배우자가, 잃은 자식이 그렇고, 토라져 가버린 사랑이, 가슴 설레는 만남을 꿈꾸는 저마다 사연이 이 한밤 달빛에 충만합니다. 지구 반대편 에콰도르엔 ‘세상 끝 그네’가 있습니다. 이곳에서 사람들은 가는 줄에 생명을 걸고 벼랑을 오고가는 아찔한 그네를 탑니다. 삶과 죽음을 건너뛰는 희열을 느끼면서 나만의 고통도 함께 털어내고픈 야릇한 충동을 받겠지요. 나도 이 밤에 달빛이 풀어놓은 그네를 탑니다. 창공으로 내 몸이 솟구쳐 오를 때마다 속진을 씻는 개운함과 현기를 느낍니다. 뜰 위로 쌓이는 달빛 별빛을 더듬다 화롯불에 넣어둔 고구마를 잊은 그 밤의 기억이 아물거립니다. 뒤란의 댓잎 스치는 소리에 떠난 임이 오는 기척인가 싶어, 허망한 짓인 줄 알면서도 은근히 문을 열어보고, 뜨락에 내린 노란 달빛을 두 손으로 담아보기도 하고, 댓잎 스치는 곳으로 귀를 열어도 보지만 월광을 흔드는 바람소리뿐입니다. 오스스 온몸에 한기를 느낄 때, 은혜로운 달빛이 몰려와 한 자락 이불로 몸을 감싸줍니다. 사람은 가진 것을 잃은 후 새로운 것을 얻기도 해요. 시력을 잃었더니 청력이 기적을 만들어내고, 청력을 잃은 뒤 불후의 작품을 남긴 예술혼도 있습니다. 달은 소멸과 생성을 거듭하죠. 보름에서 그믐으로 이지러졌다가 다시 둥근달로 되살아나는 모습은 언제 봐도 경이 그 자체입니다. 비탄 속에 희망이 움트고, 절망의 벼랑에 선 이가 다시 마음을 고쳐먹는 것도 보이지 않는 마음속 달 때문입니다. 인공지능이 바둑 대결에서 인간을 이기는 세상일지라도, 여전히 달의 영역은 존재합니다. 사리와 조금이 갯벌을 만들고, 사람들에겐 끝 모를 동경과 사유를 주는 가치를 계수나무와 토끼로 덮기엔 한없이 부족하죠. 설령 달이 지구의 한 부분이 떨어져 나가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해도 달과 지구는 한 몸입니다. 지구와 달은 서로에게 특별한 존재인 것이, 오늘도 지구가 흔들리지 않고 자전할 수 있게 잡아주는 힘은 오롯이 달의 몫이요 달의 능력입니다. 우리에게도 달 같은 존재가 있습니다. 앞길이 막혀 방황할 때, 마음 둘 곳을 잃고 비틀거릴 때, 무엇이 나를 잡아줄까? 남편과 아내가,부모와 자식이, 아니면 친구나 또 다른 무엇이 있겠지요. 분명함은 어딘가에 나를 지탱시키는 존재가 있다는 사실입니다. 누군가 나를 위해 기도해 주는 사람이 있습니다. 동시에 나 또한 누군가를 위해 기도하고 힘이 될 소중한 존재입니다. 서로 기대어 사는 존재. 서로 기원하며 사는 존재. 대보름 밤, 달빛그네를 타고 이렇게 외쳐 봐요. 내 달은 누구인가? 나는 누구의 달인가? 달빛 서정이 이에 답할 것입니다. -글 이관순 소설가/ daum cafe/ leerett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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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1-18
  • 설날 떡국 한 그릇
    어김없이 올해도 설날은 찾아왔고, 3대가 둘러 앉은 가족들 앞에 떡국 한 그릇씩이 놓였습니다. 떡국을 먹음으로 나도, 아들도, 손자들 모두 미뤄져 온 나이를 한 살씩 온전히 먹게 되었지요. 아이들은 손가락을 꼽으며 한 살 더 먹은 기쁨을 자축하기에 흥났고 아들 내외는 제 나이가 실감이 나지 않는다는 표정이고, 아내는 올해로 끝날 60대를 반추합니다. 떡국을 먹을 때면 돌아가신 부모님 생각이 납니다. 아버지는 젊음이 한창인 아들에게 떡국을 드시면서 늘 말씀하셨습니다. “한 살 더 먹으면 한 살 더 어른스러워야 한다”고. 그때는 도덕 책에나 있을 공자님 말씀쯤으로 건너 들은 글귀입니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부모님 얼굴을 떠올리고, 먹은 나이를 생각하다 불현듯 자각이 듭니다. 부모님 생전엔 아들과 나이 차가 늘 똑같아서 두 분은 늘 어른이셨고 난 여린 아들였는데, 떠나신 뒤로는 매년 한 살씩 부모님 나이를 따라잡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던 어느 해 설, 갑자기 어머니 나이에 근접하고 있음을 깨닫습니다. 그리고 몇년 후 어머니와 동갑이 되던 설날 아침에, 목이 잠겨 떡국 한 그릇을 먹는데 시간이 걸렸습니다. 지금 내 나이보다 15년 아래셨던 어머니는 아들 사업이 힘든 것을 알고 파트타임으로 식당 주방 일을 나가셨습니다. 가족들은 그 사실을 눈치 채지 못했습니다. 이듬해 설날 어머니가 대학에 합격한 손자 세배를 기뻐 받으시고 1년치 등록금을 담은 봉투를 쥐어줄 때서야 그간 사정을 알게 되었지요. 아들 합격 소식에 기쁨도 잠시, 등록금 마련에 한숨이 나던 힘든 때였죠. 덕분에 아들은 대학에 들어갔으나, 그때 얻은 허리병과 낙상 사고가 겹치면서 어머니는 마지막 2년을 누워 고생만 하다 눈을 감으셨지요. 이후로 설이 오면 어머니 얼굴이 떠올랐고, 손자도 할머니 사랑을 잊지 못했지요. 그런데, 그때 어머니보다 내 나이가 더 들었는데도 손자를 위해 그 헌신을 해낼 수 있을까? 여전히 물음이 생깁니다. 나는 여전히 여린 어머니의 아들일 뿐입니다. 올 설날 아침, 떡국 한 그릇을 비우면서 눈이 욱신 거려옴을 느꼈습니다. 태산 준령만큼이나 높아보이던 아버지의 그 나이가 된 자신을 알아 보았기 때문입니다. 지금도 아버지를 온전히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러니까 내가 아버지보다 8년 아래였을 때, 고열로 쓰러진 아들을 살리려고 고희를 훌쩍 넘기신 분이 눈 쌓인 산길을 걸어 외삼촌 댁 약방을 찾아 떠나셨습니다. 아내만 어쩔 줄을 몰라했지요. 집에는 체온이 39도를 넘나드는 남편이 벌겋게 익어 있고, 눈구덩이에 약을 구하러 떠나신 시아버지는 자정이 되는데도 연락이 없으셨습니다. 가슴 조이던 새벽 두시, 눈을 뒤집어 쓰고 아버지가 약을 구해 가슴에 품고 오셨습니다. 폭설로 응급차마저 출동을 못할 때 쉰살이 넘은 아들을 구하려는 일심으로 늙으신 아버지가 눈이 덮인 20리 산길을 걸어 갔다가 오신 것입니다. 그 담력은 어디서 나온것이며, 그 용기는 어디서 나온 것일까? 어느새 아들이 아버지의 그 나이가 되었는데도 스스로 그러한 헌신을 할 수 있을까? 되물으면 여전히 의문이 남습니다. 떡국을 먹고 나이를 먹는다는 것. 한 살 나이를 먹으면 한 살 더 어른스러워져야 한다는 것. 아버지의 당부가 무엇을 뜻한 것인지 딱히 짚을 수는 없음에도 아들은 어느새 아버지의 자리에 앉아 있는 자신을 봅니다. 올 설날 아침에도, 떡국을 나누며 아이들에게 말했습니다. ‘한 살 더 나이를 먹으면 한 살 더 어른스러워져야 한다’고. 그저 나이 먹으면 헛똑똑이가 된다고, 손자 손녀에게 당부했습니다. 아버지가 생시에 하시던 그 말법 그대로 써서. -이관순 소설가/ daumcafe/ leerett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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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1-15
  • 설 인사 어떻게 생각하세요?
    해가 바뀐 지 달포나 됐는데 인사가 다시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로 돌아갑니다. 스스럼없이 나눌 덕담인데, 정작 새해 인사로는 적절치 않다는 지적이 있어요. 살아서 장례식을 한 전 고구려연구회장인 서길수 교수가 대표적입니다. 복을 짓지도 않고 들어오기만을 바랄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복이란 삶에서 누리는 행운입니다. 스스로 노력 없이 행운이 굴러들어 오라는 것은 입에 착 달라붙지 않는 새해 인사라는 것이지요. 그 대신 ‘새해 복을 많이 심으세요.' 라는 새 인사말을 제시합니다. 복 받으란 말에는 요행의 의미까지 담기지만, 심는다는 말엔 복을 저축하라는 뜻이 있습니다. 행운은 개인의 노력이나 책임과 무관하지 않아서입니다. 인생은 복권이 아니잖아요. 봄에 씨앗을 뿌리고 여름에 잘 가꾸어야 가을에 상응한 열매를 거둡니다. 그런데 우리가 나누는 새해 인사엔 뿌리기보다 거두는데 방점을 찍는 듯한 어색함이 보입니다. 그래 생각하면 정치판엔 ‘새해 표 많이 받으세요’ 요식업체는 ‘복 많이 드세요’가 어울리지 않을까? 연초부터 부자 되라고, 복을 많이 받아야한다는 은근한 강요 같기도 하고 명령형 인사로도 들립니다. 오늘의 물신 사회에서 행복은 신의 자리를 대체한 만능의 세속 종교가 되었습니다. 돈 관련 서적이 불티나게 팔리고 로또, 주식에 목을 매나하면 오매불망 잭팟이 터지길 꿈꾸죠. 과잉된 행복 욕망 또는 불행 인식에 끌려서 우울증을 호소하는 사람이 늘어나니, ‘행복’이 21세기를 지배하는 이데올로기란 말이 나옵니다. 행복은 마트에서 살 수 있는 ‘1+1’ 상품도 아닌데 ‘열려라 참깨’처럼 행운이 뚝딱 굴러 오라고 주문을 외웁니다. 그래서 서길수 교수는 ‘행복하세요’라는 인사보다 ‘행복을 심으세요’가 품위와 진정성이 있는 인사로 보인다고 합니다. 올 설엔 복을 받은려하지 말고 복을 지으시라는 인사를 해보면 어떨까요? 김형석 교수도 연초 신문 연재 ‘100세 일기’에서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인사보다 더 따뜻한 ‘행복해지십시오’라는 인사를 건넸습니다. “건강해지기 바라며, 사업에 성공하길 축원하며, 훌륭한 업적을 남기길 바라는 마음“을 담았지요. “이렇게 살았더니 행복해졌다는 사람은 있어도 행복을 위해 이렇게 살았다는 사람은 없어요. 값있는 삶의 결과로 주어지는 게 행복입니다.“행복은 그 자체가 삶의 목적일 수 없지만, 내 인격 수준보다 무거운 행운은 복이 되지 못합니다. 로또에 당첨돼 불행해졌다는 이야기나, 탐욕으로 재력, 권력을 쥐더니 많은 사람에게 고통을 주더라는 말도 같은 맥락입니다. 사람마다 주어진 ‘운’이란 게 있다면, 어느 쪽으로 기울게 할지는 내가 살아가는 행동에 달려 있어요. 선한 생각으로 행동을 하면 운이 내게로 열리고, 악한 행동을 하면 운이 점점 떠나가는 이치입니다. 성경에 나오는 ‘八福’도 복을 받을 수 있는 자격을 가르칩니다. 조건을 갖춘 사람에게 복은 자연스럽게 찾아온다고 했어요. 정신적 가치를 모르는 사람은 물질적 행복을 누릴 수 없고, 이기적인 사람은 행복해지기 어렵다는 교훈이 깔려있지요. 남에게 불행과 고통을 주면서 나만 행복해지려는 사고는 받아들이기 힘든 죄악스러움입니다. 하지만 남에게 선한 뜻을 베풀며 사랑을 나누는 사람은 더 큰 축복을 차지합니다. 그렇게 살아 본 사람만이 아는 진실입니다. 성실하고 정직한 삶은 버림받지 않아요. 많은 이웃의 행복을 위해 힘쓴 사람일수록 덤으로 존경이 따라옵니다. 그래서 인격이 최고의 행복을 얻는 그릇이지요. 어떻게 사는 사람이 행복한가. 수많은 인문서와 앞서 살다 간 현인들 얘기는 ‘감사’하는 마음으로 사는 것이 행복해지는 첫 번째 요건으로 꼽습니다. 감사를 모르면 행복도 모른다는 뜻이죠. 행복은 ‘더불어 삶’의 고백입니다. 설날 인사로 이렇게 해보세요. ‘행복을 많이 지으세요.’ ‘행복을 많이심으세요.’ 나누다 보면 입에 감기는 인사가 되지 않을까? -글 이관순 소설가/ daumcafe/ leerett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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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1-11
  • 새 노래로 이봄을 맞으리
    겨울은 늘 용맹함으로 시작했다가 패잔병처럼 사라집니다. 아직 정월(음력)인 데도 여기저기서 봄의 옷자락 끌리는 소리가 들립니다. 바위 밑에 남은 잔설을 헤치니 봄의 전령인 복수초가 어느새 꽃눈을 틔웠습니다. 소리 없이 바빠지고 있는 것은 나무도 마찬가지입니다. 얼었던 땅이 녹으면서 싱그러운 수액이 오르고, 메말랐던 나뭇가지는 물기를 머금었습니다. 뿌리 깊은 나무는 바람에 흔들리지 않는다고 하지만 차디 찬 땅 속에 내린 뿌리들이 겨울 한철을 어떻게 견뎠을까. 뿌리의 고단한 헌신에서 모성애를 느끼는 것은 혹독한 겨울에도 잠들지 못하고 생명을 품고 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사막식물은 우리가 상상하는 그 이상으로 많은 뿌리를 깊이 내립니다. 이에 비해 수생식물은 뿌리라고 할 것도 없을 만큼 빈약합니다. 콩나물을 키워보면 알 수 있습니다. 물이 넉넉하면 곁뿌리가 적고, 부족하면 잔뿌리만 키웁니다. ‘뿌리가 깊어야 가뭄을 타지 않는다’ 는 말도 있습니다. 여기에는 근원이 깊고 튼실해야 어떤 시련도 견뎌낼 수 있다는 뜻이 함축돼 있습니다. 모든 것에는 근본이란 게 있습니다. 개인과 집안, 국가와 민족, 전통과 문화에도 근원이 있는 법이니까요. 오죽하면 ‘물 한 모금을 마실 때도 시원을 생각하라(飮水思源)’고 했을까. 식물학자의 말을 빌리면 땅 위에 드러난 식물의 잎줄기와 땅 속에 내린 뿌리의 생체량은 엇비슷하다고 합니다. 지상의 풀 한포기, 잘라낸 나무 한 그루의 무게가 지하에 뻗친 원뿌리와 잔뿌리를 합친 것과 균형을 이루고 있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식물뿌리를 ‘숨겨놓은 반쪽’ 이라고도 한답니다. 잔잔한 호숫가 벤치에 앉아서 물 위로 드리운 나무 그림자를 보노라면 수면 저 아래 광맥처럼 뻗혀 있을 뿌리가 궁금해질 때가 있습니다. 이목지신(移木之信)이란 말이 있습니다. 군주는 나무 한 그루를 옮기는 데도 백성을 생각해야 한다는 뜻이지만 나무를 옮겨 심을 때는 믿음을 줘야 한다는 의미도 담겨 있어요. 생명은 그만큼 연약한 것입니다. 옮겨 심는 나무가 클수록 새 땅에 적응하는 기간이 길어져 3년까지는 안심할 수 없다고 합니다. 옛적에, 고향의 어른들이 큰 나무를 이식한 후 막걸리를 둘레에 흠뻑 뿌리는 걸 본 적이 있습니다. 그 때는 몰랐는데, 커서야 뿌리를 돌보는 토양세균들의 왕성한 번식을 돕기 위한 배려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또, 원래 자랐던 곳의 흙을 떠와 섞어주기도 합니다. 익숙한 토양세균과 더불어 새 땅에 잘 적응하게 하려는 정성을 담은 것입니다. 봄기운이 산야의 곳곳을 오르고 있습니다. 주자십회훈(朱子十悔訓)에 “봄에 씨를 뿌리지 않으면 가을에 후회한다(春不耕種秋後悔)”고 했어요. 그럼에도 진실과 사실은 달리하는 게 우리네 삶인 것이, 마음은 이미 봄인데 몸은 아직 겨울옷을 두르고 있으니까요. 좌표를 짚어보니 서 있어야 할 자리에서 멀리 쳐져 있는 나를 봅니다. 하지만 깨달음이 있고 갈 길이 남았다는 것은 축복이기도 합니다. 그 마음으로 겨우내 움츠렸던 몸에 기운을 모으고 다시금 신발 끈을 동여매렵니다. 올 봄도 텃밭을 작은 수도장으로 삼아 땀을 내는 것으로 시작하렵니다. 언 땅을 뒤집고 드러난 검은 살에 봄볕을 쬐는 일부터 하려고요. 흙살의 감촉과 흙냄새도 맡으면서. 어떤 향수가 언 땅 속살에서 나오는 흙냄새만 한 것이 있을까. 마른 마음밭(心田)에도 생기를 불어넣고 정성껏 씨를 뿌려야겠습니다. 뱀이 허물을 벗는 것은 매우 고통스러운 일이지만, 성장하려면 피부를 찢어내야만 합니다. 매번 같은 패턴으로 피부를 벗지만 새로워지는 뱀처럼, 나도 낡은 옷을 벗고 새 노래로 봄을 맞으리라. 텃밭에다, 심전에다, 씨앗을 뿌리면서없이 봄 길을 걸어보리라. 글 이관순 소설가/ks8120@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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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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